양파실기 해제
이 책은 조선조 효종 헌종 때 20여년간 재상을 지낸 양파 정태화 공의 생애와 사적에 관련된 자료를 모아둔 책인데, 목판으로 간행된 적은 없고 다만 1990년 2월에 동래정씨 양파공파 종중에서 영인한 것을 저본으로 삼아 번역해 본 것이다.
실기라는 말은 사실의 기록이라는 뜻인데, 문집이 별도로 있는 분의 경우에는 본인의 저술이외에 후인들이 정리한 생애와 사적에 관련된 내용만을 뽑아서 실기라고 하고, 문집을 남길 정도로 본인의 저술이 그렇게 풍부하게 전하지 않는 분은 본인의 저술 몇 가지와 후인이 지어준 생애 사적에 관한 글을 합하여 실기라는 이름으로 책을 내기도 하는데, 이 양파공의 경우에는 별도로 문집 15권이 필사본으로 전하며, 거기서는 본인의 생애 사적에 관한 기록은 제외되어 있다.
이 양파실기 필사본의 영인본는 가장, 행장, 묘갈지명, 년기, 부록 순으로 되어 있는데, 그 앞에 붙은 국한문 혼용체의 서문에 의하면 양파공의 12대손 문영(文泳: 전임 종친회 회장)씨의 증조부인 학산(學山: 휘 寅杓, 승지)공이 정사하여 둔 것을 영인한 책이라고 한다.
옛날의 관례에 의하면, 훌륭한 분이 작고하면 나라에서 시호를 내리는데, 이 양파 정태화란 분의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국헌(國憲)을 바로 잡는데 도움을 준 분”이라는 뜻이다. 시호로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뜻이 담긴 여러 글자 중에서 이 두 글자를 고르는 데는 이 분이 평생 동안 살아온 이력과 공적을 조사하여야만 한다. 이 공적 조사의 자료가 되는 것이 바로 행장인데, 사회적으로 매우 명망이 있는 문필가에게 의뢰하여 짓는 것이 관례다. 이 행장을 의뢰하기 이전에, 이 행장에 실을 만한 기본적인 내용을 집안 사람들 중에서 미리 한번 정리하여 행장을 짓는 사람에게 주는데, 그것을 가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중국에서 전해오는 원론적이고 사전적인 이야기이고, 행장과 비슷한 내용을 담은 시장(諡狀)이라는 글도 있고, 또 시호를 청할만한 위치에 있지 못한 경우에도 가장과 행장을 두루 장만하여 선조의 이름을 후세에 널리 전하려는 경우도 자주 있기 때문에 이 행장이라는 말이 뒤에 와서는 보통 어떤 사람에 대한 신상 소개서 정도로 의미가 격하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가장이나 시장은 모두 이러한 후세에 남발된 글들과는 그 격이 다르다고 할 것이다.
맨 처음에 나오는 글이〈익헌공가장〉이란 제목이 붙은 글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처음 이 가장을 지을 때에는 아직 시호가 지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아마 돌아가신 아버님의 가장이라는 뜻으로 선부군(先父君) 가장정도로 불렀을 것인데, 후세에 정리하면서 편의상 이러한 시호를 붙여 부른 것이다. 원문이 무려 67쪽이나 되는 상세한 글인데, 작성자는 밝히지 않았다. 아마 양파공의 아드님과 집안 사람들이 상의하여 작성하였을 것이다.
내용은 보통 가장과 같이, 가문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본인 일생의 이력, 본인의 성품, 부인과 자녀 소개로 끝난다. 이중에 대부분의 내용이 본인의 관직 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60쪽이 넘으며, 병자호란 때 도원수 김자점의 종사관으로 활약한 이야기, 복잡해진 명나라와 청나라 틈바구니에서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동분서주한 사실, 만년에 노론과 남인들 사이에서 격심하게 대립되는 예론을 조정하면서 고심한 이야기 등이 퍽 소상하게 적혀 있다. 이 가장 뒤에 소자(小子) 쌍행(雙行)으로 본인이 언제 재상이 되었다가 언제 그만 두고, 또 다시 언제 다시 부임 하였는지를 자세하게 정리하여 부기하여 놓고 있다.
시장과 행장은 모두 식암(息庵) 김석주(金錫冑)라는 분이 지은 것인데, 이 실기를 정리한 분이 노론의 선봉으로 정치적인 음모를 꾸미다가 죽음을 당한 식암의 관직명을 밝히기를 좋아하지 않았는지, 이 식암의 벼슬 이름은 삭제하고, 또 행장도 시장의 내용과 비슷하다고 하면서 여기에는 수록하지 않았다.
묘갈명은 예조판서 겸 예문관 제학 강백년(姜栢年)이 지었고, 묘지명은 예조판서로 홍문관 대제학을 겸임한 남용익(南龍翼)이 지었다. 원래 중국에서는 묘지에 묻힐 사람의 이름과 사적을 도자기 판에 새겨 묘안에 파묻어 놓고서 오래된 뒤에도 누구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이러한 글을 만들었는데, 지위가 높은 사람의 것은 묘지명, 낮은 사람의 것은 묘갈명이라고 해서 구분한 적도 있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이러한 지위에 따른 명칭의 구분은 없어지고, 이 두 가지를 다 마련하여 묘비와 같이 묘 곁에 세우는 것이 관례와 같이 된 것 같다. 이러한 글들의 내용도 위에서 말한 가장이나 행장과 비슷하나 사기에 새기던지, 돌에 글자를 파야한다는 제약 때문에 길이가 좀 짧아지고, 또 글 끝에 명(銘)이라고 하여 넉자로 된 운문을 붙여놓은 점이 다르다. 이러한 글들 뒤에도 모두 이 실기를 편찬한 분의 보충 설명이 조금씩 붙어 있다.
이상은 양파 공께서 작고하신 뒤에 후인들이 그 사적을 정리하여 놓은 것인데, 그 다음에는 양파공 본인이 자기의 일생 경력을 54세 2월까지 연보순으로 기록해 놓은 《양파연기(陽坡年記)》라는 기록을 요약하고, 또 71세 작고할 때까지 연보를 보충한 《연기초략(年紀抄略)》과 《연기보유(年紀補遺)》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필자들이 후손들에게 얻어 본 필사본《양파연기(陽坡年記)》는 1세에서 37세까지를 건(乾), 38세부터 54세까지를 곤(坤)으로 분권한 2권 분량의 퍽 자세한 자서전적인 저술인데, 위의 《초략(抄略)》에서는 볼 수 없는 개인 신변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많아서, 양파본인에 관한 연구는 말할 것도 없고, 이조 중․후기의 문인 관료들이 생활 양상을 가까이 접근하여 이해하는데 매우 소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이 《초략(抄略)》은 《연기(年記)》에 상세하게 적어둔 개인 신변의 상세한 기록, 예를 들면 언제 누가 죽고 누가 태어나고, 언제 어떤 여인을 소실로 맞이하고, 언제 어떤 여인을 내어보낸 것 같은 사실들은 대부분 삭제하고, 주로 공인(公人)으로서 처신을 어떻게 하였든가 하는 점에만 초점을 두고서 내용을 발췌하고, 또 부분적으로는 《연기(年記)》에 없는 내용도 보충하고 또 후인들이 쓴 야사나 야담의 내용까지도 소주 쌍행, 혹은 보충자료로 부기하여 두었으며, 서술 형식도《연기(年記)》는 모두 “내가 …하였다”는 식의 일인칭 직접화법의 서술이나, 이《초략(抄略)》에는 더러 “부군(府君)께서는 …하셨다”는 식의 삼인칭 간접화법의 서술이 섞여 나오는 것으로 보나, 이 《초략(抄略)》은 문자 그대로 《연기》를 간단하게 요약한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초략은 초략 나름대로 공인으로서 정태화란 분의 삶의 모습을 살피고, 이 분의 관직 생활의 고충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연기의 보유는 막내아들이며, 효종대왕의 사위가 되었던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정리하였다는 설명이 초략 첫머리에 보인다. 아마 초략 중간중간에 보이는 “부군(府君)께서는 …하셨다”는 식의 서술도 역시 동평위가 한 말로 보인다.
부록으로는 연대기에 편입시키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양파공의 일화 32 가지가 적혀 있고, 예송(禮訟)에 얽힌 이야기 〈기해의례〉와 〈갑인의례〉가 첨부되어 있다. 현실주의자로서의 양파공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내용들이다. 이 〈의례〉의 편자는 누구라고 밝힌 설명은 없는데 아마 이 실기를 필사한 학산공의 선조들이거나 또는 학산공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이 《양파실기》의 번역은 원래 한학자인 이민수(李民樹) 선생이 을유문화사를 통하여 착수한 것이나, 선생이 초고를 원고지에 200여장 작성해 두고는 별세하였다. 필자들이 을유문화사의 권유로 이 실기를 완역하기로 하고, 이와 아울러 양파유고(陽坡遺稿) 15권 까지도 두루 역주하기로 하였다. 이 실기의 번역은 박세욱 한 사람이 초고를 완성하고 이장우가 한차례 교열한 것이지만, 이 초고를 놓고서 매주 한번씩 가진 내용을 검토하는 독회(讀會) 모임에 참여하여준 사단법인 동양고전연구회의 이경혜, 조인숙, 박은숙, 김경숙, 남경여, 장미숙 선생님과, 신재환 박사(경북대), 남민수 박사(영남대), 이종미 박사(영남대), 박대현 선생(영남대), 박한규 선생(영남대) 등등 여러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한다. 이 분들의 밝은 눈과 조심스러운 지적이 없었더라면 이 역주 작업이 이 정도에도 이르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분들과 함께 양파유고 번역도 역시 계속하여 읽으면서 역주를 다듬고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우리들의 번역 주석 태도는, 한문과 한자를 잘 모르는 젊은 세대 사람들까지도 내용을 읽고서 이해할 수 있도록, 본문은 말을 쉽게 풀고, 어려운 어휘에는 자세한 주석을 첨가하였다. 이렇게 하다가 보니 번역 원고의 분량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작업량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자들의 일관된 고집을 받아들여준 종친회 여러 어른들과 을유문화사에 감사를 드린다.
2007년 5월 말경
이장우(李章佑)
박세욱(朴世旭)
첫댓글 전에 쓴 글을 다시 읽어 보니 재미가 있내요. 긴 글을 잘 요약해 준 까페 지킴이님께 감사드림니다. 서울 광화문의 교보문고에 가보니 이 책 번역본이 매우 큼직하게 꽂혀있어 반가웠습니다. 반농
제가 되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