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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인의 안타까운 민족 배반
~<선구자>의 시인 윤해영의 만주에서의 친일 창작활동
오양호(인천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시인)
Ⅰ 윤해영은 누구인가
윤해영의 ‘선구자’는 한 때 ‘애국가’에 버금갈 만큼 있기 있는 가곡이었다. 그러나 현재 이 가곡을 열창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1977년부터 만주이민문학을 연구해1) 오던 나는 윤해영이 독립군이 아닌 시인이고, 그것도 여러 편의 친일시를 쓴 것을 발견하고, 그 충격과 번민 속에 있을 때 1993년 3월 마침 문민정부가 출범하여 대통령식이 거행되는데 ‘애국가’가 제창된 후 <선구자>가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속에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하는 장면을 TV로 지켜보게 되었다. 나로서는 너무나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윤해영의 <낙토만주>가 내 머리를 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머뭇거리지 못하고 「동아일보」에 칼럼을 썼고2), 「동아일보」가 내 견해를 받아들임으로써3) 선구자를 국가행사에서는 부를 수 없는 가곡이라는 공감대가 천천히 대중 속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 후「국어국문학회」지에 <윤해영 시의 율격과 시의식 고찰>이란 논문을 발표하였고4), 이 논문을 읽은 독자들이 논문내용을 인터넷에까지 여기저기 퍼 날랐다.5)
윤해영尹海榮이 시인으로 밝혀진 것은 1990년이다6). 그 이전까지는 윤해영은 베일에 싸인 신비한 존재였다. ‘신비한’이라는 말은 그가 만주천지를 주름잡던 독립군이자 가곡 <선구자>의 작사자로만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선구자>가 한국인들에게는 애국가만큼 숭엄한 가곡으로 애창되어 온데다가, 더욱이 이곡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기 에 그에 대한 신비감은 더 강했다.
1932년 10월의 어느 저녁 무렵, 만주 모란강변에 있는 서장안가西長安街의 한 싸구려 여인숙에 묵고 있던 조두남趙斗南에게 윤해영이라는 청년이 찾아왔다. 윤청년은 평소 만주의 평원을 무대로 일제와 싸우다가 쓰러져간 독립투사의 혼을 위로하고 아울러 만주지역에 사는 동포가 선열을 추모하며 노래할 수 있는 장엄하고 위대한 노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는 목단강에 젊은 작곡가 조두남이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작시 한 편을 들고 그 곳을 헤맨 끝에 조두남을 찾아냈다고 했다.
두 명의 청년은 의기투합했다. 윤해영은 조두남에게 용정에서의 동포들의 고생과 독립운동의 상황을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조두남은 윤해영의 시에 감격하여 ‘내 민족이 함께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고 희망을 잃지 않으며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남긴 그 소원에 응하기 위해서 젊은 정열을 기울여 작곡에 착수했다.7)
조두남은 불과 16세가 되던 1928년 첫 작곡집을 출판하는 재능을 보였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재기가 출중하였던 까닭에 1930년대에는 그에 대한 소문이 인근지역은 물론 만주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1932년에 조두남의 이름을 듣고 만주의 용정에서 찾아온 윤해영이라는 청년으로부터 노랫말이 적힌 메모를 받아서 작곡한 노래가 <선구자>이다. 이노래는 <용정거리>라는 제목으로 불려졌으나, 해방 후 선구자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8)
1933년 내가 만주 하얼빈에 살고 있을 때 한 청년이 나를 찾아왔다. 키가 크고 마른 체격에 함경도 말씨를 쓰는 그는 시 한 편을 내 놓으며 곡을 붙여달라고 하고는 표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가 그 노래를 곧 찾으러 오겠다고 했기에 나는 작곡을 해 놓고 기다렸으나 그 청년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주고 간 시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독립군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나에게 왔다 간 뒤 어쩌면 어디에선가 전사했을 것이다9).
전설 같은 내력이다. 그러나 우리는 윤해영이나 조두남에 대한 이런 신비한 내력에 관계없이 가곡 <선구자>를 애창한다. 가사 전체가 가지고 있는 비극적 서사성과 곡이 주는 장중한 선율이 우리를 항상 압도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에서는 윤해영의 이력을 이렇게 기술하기도 한다.
룡정은 조선인들이 집중된 곳으로서 전후로 여러 가지 반일 단체와 반일 문화 조직들이 발족되어 반일투쟁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 유서 깊은 도시를 선배들에 대한 경모의 심정을 담아 노래한 것이 <룡정의 노래>(선구자)이다. 작사자 윤해영은 반일 사상이 경정한 열혈청년이었다. 그는 계속하여 많은 작품을 썻으며 해방직후에도 <동북인민행진곡>(김종화 작곡)등 우수한 작품을 남기고 조선 회령으로 나갔다10).
조두남이 윤해영을 보는 것과 같은 견해이다. 그러나 김덕균은 다른 하나의 사실을 더 전해준다. 즉 윤해영이 해방 후에도 <선구자>와 같은 ‘우수한 시’를 썼다는 사실과 공산주의자가 되어 북한으로 갔다는 내력이다. <선구자>와 같은 ‘우수한 작품’은 대할 수 없으니 구체적인 언급을 할 수 없지만, 글의 문맥으로 보아 그 ‘우수한 작품’은 사회주의 이념을 찬양한 글일 듯하다.
「만주시인집滿洲詩人集」에 수록된 <오랑캐고개>,「반도사화와 낙토만주半島史話와 樂士滿洲」에 수록된 <낙토만주樂土滿洲>, 역시「반도사회와 낙토만주」에 수록된 <척토기拓土記>는 <선구자先驅者>의 시의식과는 제목만 봐도 거리가 멀다. 작품 제목이 모두 친일문제를 내걸고 있기 때문이다. 윤해영의 시가 문제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에 있다.
<선구자>와 <낙토만주>의 시의식이 정반대를 형성하는 점은 완전히 독자들의 예상을 뒤집는다. 시 <선구자>가 민족의 독립의지를 너무나 곡진하게 서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구자> 뿐만 아니라「만주시인집」에 수록된 다른 세편의 시 <발해고지勃海古址>,<사계四季>, <해란강海蘭江>도 <선구자>와 동일한 시의식이 작품을 지배하는 점 역시 그러하다.
박팔양朴八陽은「만주시인집」의 서문에서 윤해영의 <발해고지>를 인용하면서 ‘만주 땅은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우리의 고향’이라며 칭찬하고 있다. 당시 만주 문인의 대부 노릇을 하던 박팔양이 민족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빌미로 윤해영의 시를 인용하고 있다.
이 글은 윤해영의 이런 문제의 시 6편, 곧 <해란강> <오랑캐 고개> <사계> <발해고지> <樂土滿洲> <拓土記>를 지배하는 시의식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 과제이다.
Ⅱ, 민요적 율격과 반민족적 시의식
<선구자>와 <낙토만주>는 형식면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시의 내포(Connotation)는 그렇지 않다. 먼저 시 형식을 검토해 보자.
①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드래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 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깊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②
一, 五色旗 너울 너울 樂土滿洲 부른다
百萬의 拓士들이 너도나도 모였네
우리는 이 나라의 福을 받은 百姓들
希望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살으리
二, 松花江 千里언덕 아지랑이 杏花村
江南의 제비들도 봄을 따라 왔는데
우리는 이 나라의 흙을 맡은 일꾼들
荒蕪地 언덕우에 힘찬광이 두르자
三, 끝없는 지평선에 五穀金波 굼실렁
노래가 들리누나 아리랑도 흥겨워
우리는 이 나라의 터를 닦는 선구자
한 천년 세월 후에 榮華萬世 빛나리11)
시 ① ② 의 각 행 첫 음절이 3음절로 된 것을 제외하면 시 ① ②가 모두 4음절로 이루어진 4음보격 율격양식이다. 또 두 시가 모두 3연으로 되어 있는 점도 같다. 4보격 음보의 연속은 우리말의 발화구조에 잘 어울릴뿐더러 4보격으로 율격적 효과 창출에 도움을 준다. 또 말의 자연스러움을 훼손시켜야 하는 부담도 가장 적다. 이런 점에서 4음 4보격은 완전한 율격적 평형을 얻고 안정성을 확보하게 된다. 4보격 특유의 유장한 율동감을 가장 자연스럽게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두 시의 경우도 만주 황야를 달리는 선구자에 대한 고양된 정서, 그리고 그 만주를 약속된 땅으로 생각하며, 어떤 숭고한 정신에 대한 교시적 헌사의 의미가 4음4보격 때문에 효과적으로 나타난다.
시 ①은 한국인들이 체험했던 반일적 민족 정서를 4보격의 장중한 시어로 형상화시켰다. 그 결과 가곡의 가사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가곡 <선구자>를 해설하는 한 연구자는 이 노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선구자>를 부르며 비장하고 엄숙한 기분을 느껴보던 청소년기를 가지고 있다. <선구자>는 가사에 내포되어 있는 바와 같이 독립투사들의 고혼을 달래기 위하여 만든 노래이다. 장엄하고 엄숙하고 비감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이 노래는 숱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오늘에도 불려지고 있다.12)
‘장엄하고 엄숙하고 비감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이유가 4음4보격의 운율이 가지고 있는 특징 때문이다. 물론 가곡으로 불릴 때는 그 곡이 가지고 있는 음악성이 지배한다. 그렇지만 <선구자>의 경우 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율격적 특성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4음4보격이 한국의 기층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민요 가락이기 때문이다.
4음4보격의 율격은 그 연원이 고려가요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가 잘 아는 <만전춘> <이상곡> <처용가> 등을 지배하는 율격은 4음4보격이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임란을 거치고,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 시조, 가사의 장르를 넘으면서 서민들의 기층문화의 영역에까지 이 율격이 영향력을 뻗친다. 곧 판소리, 잡가, 민요에서도 4음4보격이 지배적인 율격 형태로 정착한다. 이런 점에서 위의 시 ① ②는 우리 민족의 미의식 속으로 깊숙이 들어올 수 있는 요소를 구비하고 있다. 바로 이 시가 가지고 있는 감탄할만한 율격적 특징이다.
4음4보격의 민요는 원래부터 민요적 전통으로서 존속되어 온 것이 아니다. 상층문화의 영향력이 기층문화의 저변에까지 확대되고, 민요가 이것을 새로이 받아들임으로써 확장된 영역이다. 시 ②가 선 자리가 바로 여기다. 시 ②는 민요에서 파생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록 문학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념성의 표출’이다. 곧 일본에 대한 ‘관념적 찬미’다. 이것은 시조나 가사가 4음4보격의 확고한 위치를 구축하고 가장 우세한 가락의 자리를 형성하던 15, 6세기 이후에 일어났던 현상과 비슷하다. 당시의 4음4보격은 새로운 지배 이념이 된 유가儒家적 세계관의 구체적 실천을 이상으로 삼았던 지배계층(사대부)들의 미의식을 가장 잘 표현하는 율격모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가치질서의 재편과 더불어 이의 확산을 위해 4음4보격의 형식을 절대화하였던 것이다. 4음4보격의 이런 민요 율격화의 과정은 시 ②가 차용하고 있는 민요 율격과 발상에서 그 시대와 지배계층의 성격이 유사하다.
시 ①과 ②는 형식면에서는 꼭 같다. 그러나 시 ①을 지배하는 시 의식은 생생한 체험에 바탕을 둔 민족의식이고, 시 ②는 체험되지 않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바로 지배 계층의 속성인 그 ‘관념론적 진술’이다. 시 ①과 ②가 형식면에서 동일하면서도 내용면에서 반대가 되는 것은 시의 이런 기본 심상에서 찾을 수 있다.
만주의 새로운 지배 계층, 친일 세력은 일본이 장차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 믿기에 일본 민족이 우수하다는 것을 주장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니 추상화, 관념화가 불가피했다. 당시는 친일 세력이 당당한 지배 세력이었고, 그 지배 세력은 하나의 이상을 민중 속에 실현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위해 윤해영은 민요의 형식, 또는 파생적 민요 형식이라도 빌어 와야 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윤해영은 대단한 지력자적 면모를 띤 시인이다. 시 ②가 반민족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보다 먼저, 그리고 더 중요하게 지적해야 할 사항이 이런 점이다. 왜냐하면 결과적이긴 하지만 발상 자체가 우리민족의 고유한 4음4보격의 양식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면서도 그 내용이 본질적으로 반민족적인 것과 제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조선조의 가사가 중심 내용으로 하고 있던 사대부의 논리가 민요형식으로까지 확산된 것은 민족 정서의 지속과 변화로 설명할 수 있지만, 타민족의 지배 논리가 가장 민족적인 형식으로 나타났다면 그것은 동일한 시각의 해석을 절대로 할 수 없다. 민족 정서를 기층에서부터 뒤집어엎으려는 기도가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섭고 두렵다.
그러면 시 ①과 ②가 가지고 있는 내포(Connotation)는 어떤가.
시인은 한 시대를 예언하는 지식인이다. 그렇다면 시인으로서의 윤해영이 남긴 반민족적인 행적에 대한 문책은 지나가는 말로 면책될 문제가 아니다. 그의 예술적 행위가 어떤 시인의 그것 보다 강하게 우리들 앞에서 생생히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선구자>를 열창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점을 생각할 때 가곡 <선구자>와 시인 윤해영의 문제는 온 국민이 알아야 할 급박한 과제이다.
시 <선구자>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시①과 ②는 다 같이 매 연 제 3행이 명사로 끝난다. 먼저 이점이 문제다. 시 ①에서는 모두 ‘선구자’이고, 시 ②에서는 제 3연만 ‘선구자’다. 그런데 그 ‘선구자’의 내포(Connotation)는 정 반대이다. 지칭하는 대상이 앞의 것은 ‘우리, 곧 조선’이고 뒤의 것은 ‘일본’이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선구자>에서)
우리는 이 나라의 터를 닦는 선구자. (<낙토만주>에서)
<낙토만주>의 ‘이 나라’는 말할 것도 없이 만주국이다. 그러나 그 만주국이라는 것은 일본이 세운 허수아비 나라이며, 꼭두각시 정부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연, 제 1연과 제 3연의 제 3행은 그 시상이 서로 비슷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주제와 시상이 반대되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시 ①
우리는 이 나라의 복을 받은 백성들---------시 ②
이역하는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시 ①
우리는 이 나라의 흙을 맡은 일꾼들---------시 ②
제 1연에서는 해란강 물줄기를 따라 말을 달리며 독립운동을 하던 거룩한 선구자의 시의식 대신, 만주국의 복을 받은 백성이란 시상이 자리 잡고 있고, 제 2연에서는 망명지의 땅을 누비며 무예를 닦던 선구자의 자리에 만주국의 흙을 개척하는 백성들이 서 있다. ‘우리는 이 나라의 흙을 맡은 일꾼들’이란 것이 다름 아닌 시 ②의 제 1연 제 2행의 그 척사拓士이다. 척사들의 개척으로 황야인 만주가 열리기에 만주국으로서는 그 공로를 마땅히 칭송해야 할 일이다. 윤해영이 이런 일에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 <척토기拓士記>란 시가 바로 그런 행적을 보여 준다.
③
고향을 떠나든 날 진달래 꺽거훗고
하룻밤을 오구나니 눈이 상기 쌓였구나
찬바람 滿洲벌판이 바로 예가 거기리
사나히는 城을 쌓고 婦女들은 흙을 날라
創世記 神話처럼 새 部落은 일워졌다
아들 딸 代代孫孫이 이 땅우에 사오리
언덕은 무연하고 온갖 雜草 욱어진데
나는야 소를 모라 것친 땅을 일구는 이
地平線 저-너머로 봄바람은 부러온다13)
이글의 형식은 연시조의 형식을 띄고 있다. 그렇다면 형식면에서는 아주 민족적이다. 앞에서 고찰한 시 ②가 4음4보격의 민요율격으로 민족 정서를 파고들어 가려던 그런 시의식과 동일하다. 아니 그런 전략을 앞지른다. 우리민족 고유의 형식 시조에 주제를 담고 있는 까닭이다.
진달래를 꺾어 그 꽃잎을 뿌리며 고향을 떠나 말로만 듣던 만주를 찾아온 남녀는 힘을 모아 만주국의 국민으로서 자손만대가 복을 누리며 살 마을을 만든다. 그 계절은 봄, 희망이고, 평화의 봄이다. 이상향을 만주, 곧 만주국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다. 1940년대의 만주 현실이 이렇다고 믿을 조선 사람은 많지도 않고, 내놓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어려울 탠데 <선구자>를 쓴 윤해영은 그렇지 않다. 현실이 고통스러우면, 시는 그런 현실을 뛰어 넘기 위해 이상향을 노래할 수 있다. 낭만주의 시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런 문학적 특질은 주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윤해영이 시조형식을 차용해 쓴 시 ③을 낭만적 시각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니다. 아니 그렇게 할 근거가 없다. 척토, 곧 땅을 개척한다는 것은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고, 가장 고통스런 문제인데 그 힘든 노동을 찬양하고 있는 까닭이다. 낭만시의 대상은 현실 너머에 있다. 1930년대부터 만주로 이주한 우리 민족이 그 황야를 힘들게 개척했다는 것은 그 때의 역사가 분명히 증명하는 일이다. 그런 비참한 현실을 이렇게 미화시킨다. 관념적 과장이 진실을 호도하고 있다. 정치적 선동문학의 전형이다. 이렇게 윤해영은 1940년대 민족 현실을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 인식하고 있다. 현실의 배반이고, 민족의 배반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은 민족의 한과 고통이 육화된 아리랑과 같은 작품을 날조하던 당시의 반민족적 기류와 그 궤도를 같이한다.
④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니
새 하들 새 땅이 이 아닌가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시구 춤을 추세
말밥굽 소-리 끈어지면
동-리 삽살개 잠이드네
젖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
五族의 새살림 평화롭네
븨였던 곡간에 五穀이 차고
입담배 주머니에 쇠소리 나네
보아라 東方에 이 밤이 새면
격양가 부르며 萬사람 살리14)
만주 봉천의 홍아협회라는 데서 발행되던 만주조선인통신在滿朝鮮人通信에 실린 <만주 아리랑>이다. 이것은 아리랑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대표 민요 아리랑에 ‘오족협화五族協和…’ 운운하는 구절은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고, 민족 정서와도 정면으로 대립된다. 그리고 만주를 밝고 활기차며, 희망의 대지로 인식하는 시 의식 또한 현실성이 약하다. 유민으로 떠돌고, 독립군으로 쫓기고, 두만강을 건너가 도둑 농사를 짓다가 월강죄로 참수를 당하고, 가난으로 딸을 팔아가며 목숨을 잇고, 마적 떼에 시달리면서도 독립군의 군자금을 대었던 민족사의 그 엄혹한 내력이 무시되고 있는 까닭이다. 민요 아리랑은 어떤 경우라도 민족의 고난사와 연결된다. 따라서 민족사와 연결되지 않은 밝음은 가짜다.
이런 점은 당시 최남선이 만주에 거주하면서 <만주가 우리에게 잇다>고 외치며 ‘만주는 이제 왕도의 지표 하에 새 역사의 건설이 재촉되고 잇다. 이에 대한 일본제국의 지도력이 아모러한 저해도 늣기지 아니할 것은 진실로 무론이다’고 하면서 ‘우리가 어떠케 이 위대한 천직을 소홀히 할 것인가. 그리고 만주낙토화 이외에 무슨 조흔 일을 다시 어듸에서 어들 것인가’라며 정신을 팔던 언사와 일치한다.
시인 유해영의 1940년대 초의 정신이 이러하지만 한「중국조선족 문학사」는 <선구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그 문학적 의미를 높이 평가한다.
<선구자>는 1930년대 초기에 창작 된 후(조두남 작곡) 널리 보급되어 크낙한 영향력을 산생한 노래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현대의 령마루에 서서 흘러간 민족의 력사를 돌이켜 보면서 외래의 강포에 대항하고, 민족해방을 위하여 분연히 떨쳐나 슬기와 용맹, 절개와 위훈으로 자랑을 떨친 우리 조상들, 특히 선구자들을 절절하게 추모하면서 민족의 비운을 찬 몸에 지니고 나라와 민족을 건져 낼 선구자들의 출현을 그 같이 고대하고 있다.
이 노래는 그 시적 정서가 비장하고 겨레의 넋이 세차게 사품치고, 민족의 념원과 정서를 대변함으로 하여 당시는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아주 널리 전승되어 불리우고 있다15).
<낙토만주>의 주제를 염두에 둘 때 윤해영에 대한 위와 같은 문학사적 평가는 용인될 수 없다. 특히 시 ②, 제 2연의 제 3행이 <척토기>의 바로 그 시의식과 동일함이 분명하고, 제 3연의 ‘아리랑도 흥겨워’의 그 아리랑도 이름이 아리랑이지 우리 민족의 한을 달래는 민요 아리랑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위 <만주 아리랑>이다. <만주 아리랑>은 일본 추종세력들이 우리의 고유민요 형식에 당시의 반민족적 정서를 담아낸, 그래서 민족주의자들을 훼절하게 만들던 노래의 하나다. 죽느냐 사느냐의 실존의 문제에 늘 쫒긴 것을 감안 하더라도 <만주 아리랑>은 <아리랑>의 그 도저한 민족성을 너무 크게 훼손시키고 있다. 인용 ④의 가사에 이런 내용이 확연히 나타난다.
<척토기> 전편을 지배하고 있는 활발함도 만주를 희망의 땅으로 인식하는 데서 온다. 이것은 만주국 국가에 나타나는 ‘세계동화원지즉 흥천지동류世界同化遠之則興天地同流’란 의미나 ‘조선인의 오래 폐쇄되얏던 종족적 원기는 일본의 국책에 자극되야 바햐흐로 진장의 고조를 보이고 잇다. 그리고 이를 추진함에 놀라운 종족 번식의 고율이 잇다. 이 두가지가 합하야 조선인의 발전력은 역외로 향하여도 저절로 활발하지 아니치 못할 터’16)라며 순천안민順天安民을 기원하던 언사와 같이 간다. 또 <두만강 뱃사공>이란 민요를 날조해서 ‘오족의 새살림 풍년든 땅에/ 춤추며 노래로 배 떠나가네’ 라는 정신세계와도 같다. <척토기>가 형식면에서 시조로 나타나는 것, <두만강 뱃사공>이 민요란 이름으로 날조되던 그 의식과 발상이 동일하다.
오족협화란 입장에서 보면 일본이 대동아 건설정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선인의 정신을 바꿔야 하고, 그 정신 개조가 예술의 형태로, 그것도 우리 민족 고유의 모습을 갖춘다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윤해영의 <선구자>와 시조 <척토기>가 놓인 자리가 바로 그러하다.
이런 점을 <오랑캐 고개>에서 살펴 보자.
⑤
오날 이 고개엔
五色旗 발붓기고
목도군 절믄이들의
노랫소리가 우렁차서
豆滿江 나룻터엔 다리라 걸니고
南쪽으로 通한 길은 널버저……
이 봄도 나의 族屬들이
무테이 무테이 이 고개를 넘으리
한숨도 恐怖도 다 흘러간 뒤
다-만 希望의 깁분 노래 불으며 불으며
무테이 무테이 이 고개를 넘으리17)
<오랑캐 고개>에서
‘昭和 十二年 四月 於 龍井’(1937년)이라고 창작일자가 명기된 이 시는 일본의 만주 점령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정신적 갈등은 어디에도 없다. 오색기가 봄바람에 나부끼는 아래에서 젊은이 들이 목도를 메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우렁차단다. 긴긴 봄날 목도를 메는 일이 고통스러울 텐데 어째서 그 소리가 우렁차게만 들릴까. 두만강을 건너 넓은 길을 메우며 떼를 지어 밀려오는 동족들을 보았지만 한숨과 공포가 사라졌단다. 관념이 너무 앞서 있다. 현실에 대한 막연한 선험적 희망이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만 아니다.
물ㅅ 개와 坐首의 딸과 살아서
사람과 갓튼 물ㅅ 개를 낫코
물ㅅ 개와 갓튼 사람이
사람과 갓튼 사람을 나서
그 어른이
큰아큰 中原을 통트러 다스렀다는
아리숭한 이야기가 있다.
몽고 건국 설화와 연루된 <오랑캐 고개> 첫 연이다. 만주의 내력을 몽고족으로부터 끌어 오고, 청나라로부터 끌어와 오족이 화합했다고 기뻐하고 있다. 삭막한 대륙을 무대로 살아 온 만주족에게 있어서는 ‘물’은 외경의 대상이다. 그런 물에서 사는 물개와 사람 사이에서 누르하치 같은 영웅이 태어났고, 그래서 몽고족은 본질적으로 큰 힘을 지닌 족속이 됐다고 찬미하고 있다. 물론 ‘오랑캐 고개’란 말 속에는 이런 신화를 그냥 웃으며 말해 버리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 없는 바는 아니다. 그렇지만 시 <오랑캐 고개>는 두만강을 건너던 북간도 이사군의 한숨의 관문이었고, 10년 전부터는 밀수꾼 젊은이들의 공포의 관문이었는데 이제는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넘는 관문이 되었다며 그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시대에 대한 고통스러운 반응이 없고, 현실을 완전히 낙관적으로만 인식하고 있다다. 작가의 선험적 진술이 리얼리티를 거세시킨다.
Ⅲ, 순수 서정, 그 역사의식과의 결별
윤해영의 시가 앞 항의 내용과 같이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다. 「만주시인집」에는 <오랑캐 고개> 외에 <해란강>, <발해고지>, <사계>가 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세상에 알려진 바 없는 윤해영의 시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선구자>로 대표되는 민족의식의 맞은편에 <낙토만주> <척토기> <오랑캐 고개>가 놓여있기에 우리는 이런 시에 더 주목해야한다. 따라서 이런 작품에 나타나는 시의식도 한번 검증할 필요가 있다.
세 작품의 전문을 찬찬히 읽어 보자.
寂寞한 江이로다
거룩한 江이로다
고원일흔 자식들 젓줄을 빨리기
해란강 백리 언덕에 주름t살은 잡혓느니
전설의 물ㅅ 줄기 더드머 오르면
영란이 핀언덕에 어진사슴이
호사로운 두 뿔을 빗처보든 시절엔
정정한 낙엽송의 아지 가지가
은하의 별빗좃차 가렷다건만
이주민의 斧鐵에 역사가 빗날 때
쓸어지는 환목의 모닥도막을
가삼에 안고서 흘럿느니
銀河長長 天心에 별이 종종
流城에는 아리아리 人煙이 종종-
강낭ㅅ 대 마디마디에 希望을 매즌
어진 族屬들이 벌떼처럼 茂盛해서
입히 필때면
懷鄕病 절믄이들의
로맨스도 실어갓다.
금심만흔 사나히들의
큰 뜻도 실어갓다.
한世記 雜多한 이地城의 歷史를
늘근 해란강 백사장에 차즈리
<해란강>전문
오월의 석양
발해 옛터에
집팽이와 나와
풀숩에 스다.
歷史란 모도다
거짓말 갓태서
六宮의 남은 잣최
줏추돌도 늘것는데
第一官址 드놉흔곳
應靈寺 鍾이 울어울어……
기와 片片 어루만저
회고에 잠기우면
저-언덕 밧가는 농부
그 시절 백성인듯!
멍에민 소장등에
태고가 어리우다18)
<발해고지>전문
1. 봄
그옛날 오막사리가 사랏다는
傳說이 시린 각담에
냉이와 달래는
보람업비 파르럿고!
한그루 활작핀
살구나무 가지에는
그래도 벌들의 살임은
옛갓치 오븟하이
2.여름
구진비 뿌리는 黃昏이면
영산가닥 입입에
落水가 지름지름!
새끼 기르는 오치래기 둥지엔
지붕이 업서서 실탄다.
3.가을
알뜰이 길너논 코쓰모쓰
꽃치 폇건만
여름은 벌서
늘거서 갓네
쌀살한 바람이
몸맵시를 흔들고
파-란 하날이
너무도 매몰차
코쓰모쓰는 季節의
계못 자식 이란다.
4.겨울
욋딴집 저녁 굴뚝에
煙氣가 숫지다.
아마 靑솔가지를 때는 게지
바람도 새들도
모두 잠들어
삽사리 컹컹
寂寞을 불으다.
조각달 눈빗우에 조으는 밤
감자 입김쉬는 火爐가엔
金僉知 보는 趙雄傳
혼자서 흥겨우리19)
<四季> 전문
위의 시 세편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는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과거에 가 있다는 점이다. <해란강>에서는 한 세기전의 역사는 강가 백사장에 묻혀버렸고, <발해고지>에서는 옛 궁터에 종이 우는 석양이다. 한 때 민족의 웅지가 피어났던 대국의 성터에는 풀이 무성한데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지금 지팡이를 짚고 서 있다. 과거의 영화가 꿈으로만 남은 것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구조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는 그런 과거지향의 시상이다. <사계>도 봄에서 시작된 생성의 세계가 겨울의 적막함으로 끝나고 있다. 겨울은 죽음의 시간이고, 과거의 시간이다.
둘째는 공간적 배경이 민족사와 깊이 연관된 곳이거나 그 현장이다. 해란강은 간도 이민들에게는 생명의 젖줄이다. 시 <해란강>은 그런 해란강이 이민사와 연결되면서 민족사의 한 시대를 형상화한다. 백의민족이 개척의 혼을 기르던 간도, 그 굽이굽이에서 저항의 숨결을 생성해내던 공간이 해란강이다. 항쟁의 일 번지 청산리가 있고, 전쟁의 원귀가 뒤엉킨 수해가 있고, 이제는 전설 속으로 사라져 버린 선구자들이 말을 달리던 용정을 있게 한 근원이 해란강이다. <발해고지>의 육궁터나 <사계>의 김첨지, 조웅전 읽는 외딴집도 이런 민족사와 간련된 속에 서 있다.
세 번째의 특징은 작품의 정조가 낭만적 소멸구조로 시의식이 하강되다가 곧 회복됨으로써 긴장을 이루는 점이다. 이것은 서정시로서의 유기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해란강>에서 이런 점이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위에서 잠깐 말했지만 해란강은 만주이민의 고난의 현장이자 북간도의 상징이다.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남강산맥과 영액령산맥의 분기점인 증봉산, 계관라자산에서 시작되는 이 강물은 비옥한 분지, 북간도를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흐르다가 마침내 두만강으로 잦아든다. 두만강에 얽힌 우리 민족의 애환은 巴人의 「국경의 밤」과 같은 작품이 특징 있게 그 서사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해승은 <망각의 해란강>에서 이 강을 이렇게 설명한다.
원래 지형이 복잡하고 험준한 데다가 삼림 또한 거대하므로 그 원시림에서 흘러나오는 수 많은 물줄기는 산골마다 경지를 살찌게 하였고, 일찍이 여락민이 정착하여 풍요한 곡창이 되도록 만들어 놓은 해란강이야 말로 간도인들에게는 다시 없는 샘이며 생명의 젖줄인 것이다.
유동(柳洞), 부동(釜洞), 서작동(西作洞), 청산리(靑山里) 등 마을 이름도 그렇거니와 용수골, 통수골 매바위골 등 산골의 이름들도 한국적인 지명이 많다. 그런데 개척시대에 해란강변에서 제일 큰 마을은 용두레촌이었다. 두만강, 횔여 방면에서 강을 건너 남강 산맥을 넘어가노라면 오랑캐령에 이르게 되며 거기서 북으로 흐르는 육도하를 따라 백리 가량 북상하면 넓은 평원에 이르러 해란강에 합쳐지는데 그곳이 통칭 용두래골(龍井)이다20).
그러니까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분명 구원의 땅인 간도, 그 중심지인 용정을 있게 한 강이 해란강인 것이다. 김학철이 간도지방을 배경으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항일 투쟁과 역사를 증언하는 소설을 쓰면서 그 제목을 「해란강아 말하라」고 했고, 이욱이나 김효원이 그들의 시집을 묶으면서도 「해란강의 두견새」라 했으며, 이근전이 자전적 장편「고난의 년대」의 배경을 이 강변에서 전개해간 까닭 역시 이런 점에 있다.
이런 내력으로 볼 때, 윤해영이 <해란강>의 서두를 ‘적막한 강이로다/ 거룩한 강이로다’한 것은 관념적 진술이 아니다. 당대의 조선족으로서는 절로 나올 말이다. 그리고 이 강을 이주민의 고난사와 연결시킴도 민족적 의식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그가 일찍이 노래했던 바로 그 <룡정의 노래>,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와 바로 연결되는 시의식이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의 결말은 서두의 이런 현재시제와는 달리 과거시제로 끝난다. 바로 낭만적 소멸 구조다. ‘-갓다’, ‘-갓다’, ‘늘근 해란강의 백사장에 차즈리’로 되어 있다. 이것은 현재가 그렇지 않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점은 시의 중반부의 톤과 역접된다. 그래서 다소의 긴장을 형성한다.
銀河長長 天心에 별이 종종
流域에는 아리아리 人煙이 종종-
강낭ㅅ대 마디마디에 希望을 매즌
어진 族屬들이 벌떼처럼 茂盛해서
밝고, 다정한 이미지다. 그러나 그 다음을 잇는 것은 ‘회향병, 로맨스, 근심, 역사’와 같은 하강 이미지들이다. 그래서 또 시의 톤이 잡자기 떨어지며 꺾인다. 다시 소멸구조, 비극적 정조를 이룬다. 하지만 상승과 하강의 대립, 이런 것은 서정시의 정석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가 서정시로서 거둔 성과는 만만치 않다.
<발해고지>도 시 의식은 과거에 가 있다. 찬란한 과거, 역사에 대한 회고가 오월 석양 무렵의 밝음과 대비를 이룬다. 한시에서 즐겨 쓰는 대구법 형태다.
또 ‘제일 궁지 드놉은 곳/ 음영사 종이 울어 울어……/ 기와 편편 어루만져/ 회고에 잠기우면’이란 구정과 ‘저-언적 밧가는 농부/ 그 시절 百姓인 듯/ 멍에 멘 소 장등에/ 태고가 어리우다’는 어조가 비슷한 문구로 병렬되어 있다. 찬란한 과거가 현재의 무심한 자연과 대비되어 세월의 덧없음을 선명히 드러냄으로써 회고의 정을 돋운다.
발해란 나라가 고구려 사람 대조영大祚榮이 세운 나라였고, 그 국세가 송화강 이남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다 차지한 대국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그런 나라의 성터를 민족의 흥망이 또한번 바뀌는 역사 앞에서 바라본다. 시인의 착잡한 심회가 큰 무리 없이 개진되어 있다. 이런 억제된 감정이 아니었으면 외연(Denotation)의 회고를 내포로 연결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곧 서정적 자아는 음영사 종이 우는 석양에 허물어진 궁궐터를 바라보며 다시 찾을 길 아득한 민족의 영화를 생각한다. 이런 시의식이 처연하고 감미롭게 다가옴은 시의 소재를 우리의 가장 찬란했던 한 시대를 선택함으로써가 아니라, 이 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장치, 곧 낭만적 소멸구조 때문이다.
<사계> 역시 시점은 과거에 가 있고 낭만적 정조가 중심 시상이다. ‘봄’은 전설이 서린 돌각담, 냉이. 달래가 파란 속에 오고, 옛날처럼 살구꽃이 피고, 벌들도 부산히 날아들지만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그때의 오막살이와 그때 사람들은 사라졌다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봄날의 화창함이 겨울의 닫힌 이미지로 끝나버렸다. 다른 봄의 예고가 마지막 행에서 시도되지만 그것은 효과가 없다. 김첨지의 ‘조웅전’도 흥이 없고, 칭얼대는 손자도 없고, 새도 바람도 자고 삽살개만 짓는 적막한 천지인 까닭이다.
‘여름’은 여름 저녁 한 때의 밝음이 가볍게 스켓치 되고, ‘가을’은 소멸적 시상이 코스모스, 가을, 하늘 등의 오브제를 통해 소박한 서정으로 처리되고 있다. ‘겨울’에서는 ‘겨울밤-조웅전-전통적 서경의 자장’으로 변전된다.
<사계>는 이렇게 시대감각이나 역사의식이 거의 배제된 순수서정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선구자> 같은 열정과 비장미도 없고, <낙토만주>와 같은 아세(阿世)도 없고, <발해고지>처럼 현실을 부정하는 시의식도 없다. 존재를 존재 자체로 바라보고, 시로 육화하려는 자세가 기본 틀을 이루고 있다. 윤해영의 시의 다른 특징, 민족적 허무의식이다. 무섭고 두렵다. <선구자>의 힘과 양양함이 사라진 소멸의식이 전편을 지배하고 있다. <낙토만주>나 <척토기>는 이런 민족의 소멸의식이 마침내 이 시인을 절망으로 몰아가 생성시킨 혼혈아일지도 모른다.
Ⅳ, 한 시인의 안타까운 종말을 정리하며
지금까지 이 글은 윤해영의 <낙토만주>와 <선구자>를 대비하고, <척토기>와 <오랑캐 고개> <해란강> <발해고지> <사계>의 시 의식을 고찰하였다.
그 결과를 정리하면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첫째, <선구자>와 <낙토만주>는 형식면에서 다 같이 4음4보격의 민요적 율격이지만 시의 주제는 완전한 대립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곧 <선구자>가 민족의 투혼과 독립의지의 형상화라면, <낙토만주>는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의 건설에 대한 송축이다. 이런 점에서 <낙토만주>는 일본의 만주 점령을 합리화 하는 정신을 앞장서서 수행한 작품이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둘째, <낙토만주>와 <척토기>의 시 의식은 당시 만주를 大日本건설의 전진기지로 만들려 했던 일본의 그 정신과 동일한 것임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윤해영이 당시의 정신적 사정을 문학이란 형식, 그것도 민요라는 형식에 담아내었다는 점에서 민족적인 것과 완전히 대치된다.
<척토기>는 일본이 그들의 대동아 건설을 효과적으로 이룩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이 만주 개척 사업에 적극 동참하고, 그런 정신을 함양해야 된다는 시의식이 주제를 이루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시조란 형식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윤해영이 <선구자>에서 형식을 내용과 일치시킴으로써 거둔 시적 성취가 무너져 내리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윤해영의 <척토기>와 <낙토만주>는 결과적으로 <선구자>의 그 도저한 민족의식을 아주 지략적으로 배반하였다.
셋째, 이런 점에서 윤해영을 일제에 항거하고 그 투혼을 노래한 민족문인의 차원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윤해영 평가에서 <선구자>만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문학사적 태도는 재고되어야 한다.
넷째, 윤해영의 <해란강> <발해고지> <사계>는 모두 그 시의식이 과거에 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일종의 민족적 허무주의에 빠져있다. 기대의 세계를 버리지 않겠다는 것이 <선구자>라면, 그 기대의 세계가 사라져버린 이후에 오는 허망감이 <해란강> <발해고지> <사계>이고, 그 절망을 극복하지 못함에서 야기된 돌이킬 수 없는 회고의 정, 반민족적 정서가 지배하는 작품이 <낙토만주>와 <척토기>라 하겠다.
유약한 시인의 불행한 인생유전이 치욕의 민족사와 합치되는 부끄러운 과거를 하필 <선구자>의 시인 윤해영에게서 발견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인의 작품에서 단편적이긴 하지만 고난의 시대를 뚫고 나왔던 자존적 민족과거사를 발견했고(<해란강>), 영화로웠던 시대에 대한 그리움도 발견 할 수 있었다(<발해고지>). 그리고 <사계>에서는 ‘은하장장 천심에 별이 종종/ 流域에는 아리 아리 인연이 종종’과 같은 생동적 모국어가 그 엄혹한 시대에 새로운 서정시의 가능성으로 활용되는 예도 보았다. 이런 점에서 윤해영의 시 몇 편은 한 시대가 생산한 혼혈아라 하겠다.
Ⅴ.마무리; 불행한 시인을 위한 변호
젊은 시인의 혼을 <선구자>에서 민족의 이름으로 잃어버린 조국을 호곡하던 윤해영씨! 해방이 되자 당신이 찾아간 북쪽의 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다시 <선구자>를 불렀습니까. 그런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만주 땅에서 고혼이 될 것이지! <선구자>를 땅에 묻지도 않은 채 당신이 시대를 앞지르며 외친 그 <낙토만주>가 이 무명의 후배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해방공간에서 그렇게 종적 없이 사라질 양이면 왜 끝까지 부르지 못할 노래를 남겼나요. <선구자>의 장중한 선율, <낙토만주>의 배반, 이 아이러니가 나를 야유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당신의 일생 또한 약소민족의 후예이기에 당했던 비극!
나는 2011년 한해를 만주, 북경, 장춘에서 백석白石과 함께 혹시 당신의 다른 자취가 있을까 하고 안타까와 찾아 헤맸지만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득한 만주공간에서 그렇게 종적이 없이 사라질 양이면 왜 부르지 못할 노래를 남겼나요. 지금도 그들은 독도를 죽도라며 우리를 넘보고 있는데!
오양호吳養鎬 약력
경북 칠곡 출생. 경북고, 경북대 졸업. 영남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지도교수 조동일.1981).『현대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 수년 전부터 월간『시문학』에 시를 발표하고 있고, 수필집에『백일홍』(신곡문학대상)이 있다. 평론집으로『낭만적 영혼의 귀환』『*문학의 논리와 전환사회』『*한국현대소설의 서사담론』등이 있다. 1970년대부터 만주조선족 문학연구를 하여 『한국문학과 간도』『*일제강점기 만주조선인 문학연구』『*만주이민문학 연구』(심연수문학상 수상), 백석의 만주행을 고찰한『그들의 문학과 생애, 白石』이 있다.
교토대(京都大) 객원교수 시절(‘일·한교류기금’ 지원) 재교토 유학생들과 “정지용기념 사업회”를 결성했고, 그 후 옥천군의 지원을 받아 도시샤(同志社)대학에 ‘정지용시비’를 세웠다. 대산재단의 지원금을 받아 정지용시를 일본어로 번역 출판하였다(『鄭芝溶 詩選』, 東京, 花神社, 2002). 북경의 중앙민족대(객좌교수), 장춘의 길림대(특빙교수)에서 중국조선족문학을 강의했다. 현재, 인천대 명예교수.(*표 저서;문화공보부,문화체육부,문화부, 대한민국학술원선정 우수도서)
1) 오양호, <박계주론>『영남어문학』4집. 영남어문학회,1977,10월. 이 소논문은 박계주가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쓴 소설에 대한 고찰이다. ‘영남어문학회’는 그 후 한민족어문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한국문학과 간도』간행을 준비 할 1980년대 초 나는 홍대 앞 극동방송국에서 북만주 조선동포에게 만주조선인 문학 방송도 했다.
2) 오양호, <선구자 열창 이대로 좋은가> 「동아일보.」,1993, 3, 10(수)일.
3) 「동아일보」1993, 3, 12일(금). <횡설수설> “이런 사실을 안 이상 이 노래는 며칠 전 문학평론가 오양호교수(인천대)가 본지 기고문에서 지적한 대로 적어도 정부의 공식행사에서만은 삼가야겠다는 의견을 외면할 수 없게 됐다. 회절한 시인의 작품을 애송한다는 것은 국민적인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4) 오양호, <윤해영 시의 율격과 시 의식 고찰>,「국어국문학」 114호.(국어국문학회, 1995년 5월)
5) 그 중의 한 사람이 노무현 정권 때 독립기념관 관장을 지낸 김삼웅이다. 그러나 나의 이런 행동을 비난하는 글 수편이 「동아일보」 독자투고 난에 오르기도 했다.
6)「동아일보」1990,2,28(수). <가곡 선구자 작사자 베일속의 윤해영씨 독립군이 아닌 시인 이었다>. 이때는 윤해영이『만주시인집』에 발표한 시가 친일성향의 시로 밝혀지면서이다. 극동방송 사장 윤지관 목사 방에서 오양호, 연변대 권철, 윤동주 재종제 가수 윤형주,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가 모여 윤해영의 시를 검토했다. 나는 그 후 만주 자료를 뒤지던 중 윤해영의 본격적인 친일 시 <낙토만주> <척토기>를『半島史話와 樂土滿洲』(滿鮮學會社.新京特別市.1943) 우연히 발견했고 그 충격이 아주 커서 <윤해영 시의 율격과 시의식 고찰>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글은 17년 전의 그 논문의 일부분을 조금 수정 보완한 것이다.
7) 박찬호, 『1895~1945 한국가요사(Kankoku Kayoshi)』, ( 안동림 역, 현암사,1992),117쪽
8) 김영준, 『한국가요사 이야기』(아름출판사, 1994), 389쪽
9) 조두남, 『그리움』(세광출판사, 1982), 41~43쪽. “나의 넋두리, 나의 세월의 앙금, 윤해영과의 상봉” 참조
10) 김덕균, 『조두남과 용정의 노래』중국조선족 발자취 총서·4(민족출판사,1991,북경), 566쪽
11) 윤해영, <樂土滿洲>「半島史話와 樂土滿洲」(滿鮮學會社,1943. 新京特別市), 690쪽
12) 김영준, 「한국 가요사 이야기」(아름출판사,1994), 388쪽
13) 윤해영, <拓土記> 「반도사화와 낙토만주」(만선학회사, 1943, 신경특별시), 539쪽
14) 「在滿朝鮮人通信」16호(1936,11월호). 맨 뒷 표지에 광고처럼 수록되어 있음.
15) 「중국조선족 문학사」(연변인민출판사,1990), 193쪽
16) 최남선, <북지의 역사적 특수성>「재만조선인통신」39호, 24쪽
17) 윤해영, <오랑캐 고개> 「滿洲詩人集」(第一協和俱樂部 文化部, 1942, 吉林市). 12쪽
18) 「만주시인집」15~16쪽
19) 「만주시인집」, 13~15 쪽
20) 李海承,「잊어버린 해란강」(진명출판사,1988).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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