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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디모데전서 1장 12~17절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을 하나씩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거울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장점만 크게 보고 약점은 작게 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은 선명하게 보면서 자신의 허물은 흐릿하게 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지나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는 왜 이렇게 살았을까” 하는 후회 속에 자신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백을 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말은 바울이 자기 자신을 과장해서 비하한 말이 아닙니다. 또한 자신은 아무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절망의 선언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고백은 **복음의 은혜를 가장 깊이 경험한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지켰고, 종교적으로 열심이었으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전까지 바울은 자신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자신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죄인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여기에는 역설이 있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의를 크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지 않습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기 전의 모습을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그 다음입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에게 과거는 자랑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절망의 무덤도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죄가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는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은 죄를 죄라고 정확하게 부릅니다.
그러나 복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너는 죄인이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너를 구원하셨다.”로 나아갑니다.**
바울이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보다 더 큰 은혜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세 가지 단어로 설명합니다.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
여기서 “박해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διώκτης(디오크테스)**입니다.
작은 글씨로 읽으면 *디오크테스* 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끈질기게 뒤쫓는 사람, 박해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그냥 싫어했던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찾아다녔습니다. 잡아다가 감옥에 넣었습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훗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볼 때에는 과거를 봅니다.
“저 사람은 예전에 그랬어.”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한번 그렇게 했던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겠어?”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과거만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가능성을 보십니다.**
사람은 바울에게서 박해자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서 사도를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의 원수”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복음의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를 지워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재료로 사용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숨기면 은혜도 작아지기 때문입니다.
죄가 작아지면 은혜도 작아집니다.
내가 별로 죄인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도 별로 크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깊은 죄 가운데 있었는지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알게 됩니다.
어두운 밤에 별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인간의 죄를 깊이 인식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선명하게 빛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는 고백은 자기혐오가 아닙니다.
이것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회개와 자기혐오는 다릅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나 자기혐오는 자기 자신만 바라보게 합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갑니다.”
자기혐오에 빠진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안 돼. 나는 형편없는 인간이야. 나는 변할 수 없어.”
회개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자기혐오에는 하나님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복음적인 겸손은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가치를 나에게서 찾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귀하게 사용되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게 직분을 맡기셨다”고 고백합니다.
12절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이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자신의 충성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나를 충성되이 여겨.”
자신의 자격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내게 직분을 맡기셨다.”
바울의 사역의 출발점에는 언제나 **은혜**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아주 위험한 일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은혜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자기 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에는 “주님, 제가 죄인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봉사와 직분과 경력과 신앙연륜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했습니다.” 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위험입니다.
**은혜로 시작한 사람이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출발점을 잊지 않았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고백은 바울을 작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작아질 때 하나님이 커지는 것입니다.
내 의가 작아질 때 십자가가 커집니다.
내 자랑이 사라질 때 은혜가 보입니다.
16절에서 바울은 더욱 놀라운 말을 합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증거**로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도 구원하셨다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이것이 바울의 확신이었습니다.
바울의 과거는 복음의 장애물이 아니라 복음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가 박해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가 교회의 원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더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가 죄인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원이 더 놀랍게 보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우리에게도 지나간 삶의 흔적이 있습니까?
잊어버리고 싶은 과거가 있습니까?
누군가에게 말할 수 없는 상처가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게 생각하는 모습이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지금도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바울의 고백을 들어야 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울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과거를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의 과거를 새로운 의미 안으로 가져옵니다.
상처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패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용서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깊은 죄에서 건짐받은 사람은 다른 죄인을 정죄하기보다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까?”에서 “저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겠구나.” 로 바뀝니다.
“저 사람은 구제불능이야.”에서 “나도 은혜가 아니었다면 저 자리에 있었을 사람이다.” 로 바뀝니다.
이것이 은혜가 만든 사람입니다.
**자신이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른 죄인을 함부로 정죄하지 않습니다.**
물론 죄를 죄라고 말해야 합니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정죄와 책망은 다릅니다.
책망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죄를 지적합니다.
정죄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죄를 붙잡습니다.
복음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지만 죄인에게 다시 일어설 길을 열어 줍니다.
그래서 바울은 15절에서 복음의 핵심을 아주 간결하게 선언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여기서 “죄인”이라는 말은 헬라어 **ἁμαρτωλούς(하마르톨루스)**입니다.
작은 글씨로 읽으면 *하마르톨루스* 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을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찾아오신 것도 아닙니다.
죄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착한 사람들의 상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소식**입니다.
병원은 건강한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환자가 있기 때문에 병원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의 전시장이 아닙니다.
**용서받은 죄인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볼 때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저 사람도 나처럼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에도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아직 완성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변화되고 있다.”
17절에서 바울은 갑자기 찬양으로 나아갑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것이 오늘 본문의 절정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죄를 말하다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자신의 과거를 말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말합니다.
자신의 실패를 말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에게 있어서 자신의 죄를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바라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참된 겸손이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계속 낮추는 사람이 아닙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하면서도 “그러나 주님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라고 말하면서도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십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실패했습니다.” 라고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의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은혜를 다시 발견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다른 사람의 죄를 봅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너 자신은 어떠하냐?”
남의 허물을 세기 전에 내 영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판단하기 전에 내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인지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죄인 중에 제가 괴수입니다.”
그러나 그 고백 다음에 반드시 이어져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저를 붙들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십니다.
나는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일으키십니다.
나는 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새로운 미래를 주십니다.
혹시 오늘 마음속에 자신의 과거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이 계십니까?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잘못했다.”
“하나님께서 정말 나 같은 사람을 받아 주실까.”
그렇다면 오늘 바울의 고백을 자신의 고백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고백도 놓치지 마십시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었습니다.”**
이 두 문장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죄만 보면 절망합니다.
은혜만 말하면서 죄를 보지 않으면 값싼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은혜를 붙들면 복음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자신을 정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동시에 나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너의 죄가 얼마나 큰가.”
그리고 “그 죄를 용서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 십자가 앞에서는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 누군가를 판단하게 될 때 잠시 멈추십시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나도 은혜가 아니었다면 저 사람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의 실수를 보았을 때 정죄하기 전에 기도하십시오.
“주님, 저 사람에게도 제가 받은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실수와 실패를 바라볼 때에도 자신을 함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나는 죄인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내지 마십시오.
“나는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신 죄인이다.” 라고 고백하십시오.
이 차이가 우리의 인생을 바꿉니다.
죄책감은 우리를 과거에 묶어 놓지만 은혜는 우리를 미래로 보냅니다.
정죄는 우리를 주저앉히지만 복음은 다시 일으킵니다.
자기 의는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게 하지만 은혜는 무릎 꿇게 합니다.
그리고 무릎 꿇은 사람만이 다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지막 고백은 “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지막 고백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나는 은혜받은 죄인입니다.”**
이 고백을 가진 사람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절망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보다 **그 죄인을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더 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자신을 변화시켰음을 증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부족합니다.
제가 넘어졌습니다.
제가 때로는 사람을 미워했고, 용서하지 못했고, 교만했고, 내 의를 앞세웠고, 주님의 뜻보다 내 뜻을 붙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저를 버리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주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저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제가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내 의가 아니라 십자가를 붙들겠습니다.
내 자랑이 아니라 은혜를 자랑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긍휼히 여기겠습니다.
그리고 남은 인생을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언하며 살겠습니다.”
바울은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을 크게 남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업적을 기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영원하신 왕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의 인생도 마지막에는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기억할 때 “저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어.” 라고 말하는 것보다, **“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었어.”** 라고 기억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이루었는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많이 은혜를 입었는지가 남는 인생.
내 이름이 얼마나 알려졌는지가 아니라, 내 삶을 통해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드러났는지가 남는 인생.
그리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이렇게 고백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그보다 더 크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바울처럼, **“주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