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구서문교회 당회장시절의 명신홍박사>
"병든 몸으로 미국서 총신 본관 건축 모금해" 겸손으로 한 평생을 보낸 숨은 헌신자
명신홍 박사. 그는 우리에게 그리움이면서도 아쉬움이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명 목사님을 통하여 깨닫게 하신다.
지금은 무너져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린 총신대학교 사당동 캠퍼스의 본관을 생각하면 아련한 물안개 같은 그리움이 몰려온다. 우리는 그곳에서 추위에 떨며 공부하였고, 졸업후 아쉬움을 안고 떠나왔다.
사당동에서의 첫 만남
필자는 1966년 3월에 총회신학교 신과(오늘의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였다. 그때 총신 교장이 명신홍 목사님 이었다. 헌신의 꿈을 안고 모여든 신학도들에게 사당동 캠퍼스는 너무나 황량했고 미완의 공간이었다.
학교 주변은 모두가 논 밭이었고 찻길이 없는 소나무가 무성한 산의 골짜기의 연속이었다. 버스는 숭실대학교 앞 로타리가 종점이었고 그것도 여름의 躍뗐뗄〈� 이화약국 앞 로타리까지 밖에 오지 않아서 그곳에서 사당동까지 걸어야 했다.
문제는 그 땅이 진흙탕 길인데 있었다. 그래서 '아내가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길이었다. 우리는 숭실대학교 로터리에서 문방구를 경영하던 박 집사(후에 목사가 됨)의 문방구에 장화를 맡겨두고 그곳에서 장화를 갈아신고 이른바 '헐덕고개'를 넘어서 학교로 갔다. 그런데 그 길이 4월까지 얼었다 녹았다 하니 장화가 필요했고, 장마철에도 장화가 필요했으니 장화가 우산과 함께 꼭 필요한 우리의 무장이었다.
학교 건물이라고 해야 유리창도 없는 뼈대뿐인 교실이었고 창문은 비닐로 바람을 막았다. 바닥은 시멘트가 정리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채로 였고, 난방 시설이 없는 상태여서 5월까지 오버코트를 입어야 했으며, 위에서 말한 박집사 가게에 오버코트를 맡겨두고 아침마다 찾아입고 등교를 했다. 요즈음 학생들이 이 말을 들으면 고구려나 신라시대 이야기쯤으로 생각 할 지 모르겠다.
우리는 신학교 교장 선생님이신 명 목사님을 수업 시간에 처음 뵈었다. 훗날 우리들이 안 일이지만 그분은 건강에 심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학교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계셨다. 아담한 체구의 인자한 모습이 전형적인 목회자요 교수였다.
왜 그렇게 배가 고팠을까?
우리가 신학교에 입학할 즈음에는 우리 나라 사람 모두가 절대 빈곤의 상황이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신학생들은 유독 더 가난하였다. 학교 기숙사의 점심값은 20환이었는데, 찌그러진 양은 그릇에 담은 밥 한그릇과 콩나물 두어개가 둥둥 떠다니는 된장국이 전부였는데, 그때는 그것도 우리의 성찬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러한 점심도 먹지 못하여서 본관 건물 뒤의 수도꼭지에 메달려 물로 배를 채우고 뒷 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점심 시간을 보냈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어서 점심시간이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필자의 생일날 동료들이 특별히 우리들이 자주 모여 토론하던 장소인 본관뒤 잔디밭의 무덤가에서 점심을 함께 먹고 기도하며 축하해주던 그 날을 지금도 기억한다. 지금도 현역에서 은퇴를 했거나 은퇴 직전인 옛 친구들이 모이면 '그때 왜 그렇게 배가 고팠을까?'를 이야기 한다. 그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20대의 혈기 왕성한 청년들이 기본적인 식생활을 할 수 없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끝없는 면학의 길
명신홍은 1904년 4월 14일 평안남도 대동군 김제면 원창리 노동 마을 명진석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가운데는 고신측 목사인 명신익이 있다.
그는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학생들과 다른 길을 갔다. 숭전을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었는데 그는 평양신학교가 아닌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났다.
명신홍은 평양을 떠나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에서 도쿄의 일본대학교와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하여 일본의 학문과 신학의 경향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의 끝없는 유학생활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명신홍은 그후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1936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경남 강서군 진지동교회에서 시무중에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한국 장로교회의 전통을 계승한 지도자의 길을 갔다.
공부에 대한 열망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명신홍은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유학하였다. 이 학교는 이미 정암 박윤선이 신학석사(Th. M.) 학위를 받고 1963년에 귀국한 바가 있다.
이곳에 유학 할 때의 일화 한토막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학교 기숙사에서 매일 예배를 드렸는데, 명신홍의 기도 차례가 되면 한국 말로 기도를 하였는데 기도 마디 마디마다 '간절히 간절히' 기도한다는 말을 사용하여 미국인 학생들을 궁금하게 했다. 그래서 미국 학생들은 그 말의 뜻을 묻고 그 말의 뜻을 전해들은 후 참 좋다면서 그때부터 그를 '미스터 간절히'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는 다시 미시간주 그랜드 레피츠에 있는 칼빈신학교로 갔다. 네델란드 개혁파 후예들이 세운 이 학교에서 그의 탐구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는 1941년에 칼빈에서 신학석사(Th. M.) 학위를 받았다. 이것이 훗날 총신 본관 건축을 위해 기독교 개혁파교회(CRC)들을 순방하여 모금하는 연결고리가 된 것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오묘하다고 찬탄할 수 밖에 없다.
그의 탐구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뉴욕에 있는 비블리칼신학교로 가서 1943년에 신학석사(Th. M.) 학위를 받았다. 해방 후인 1956년에 뉴욕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문학석사(M. A.)학위를 받은 것을 볼 때 끝없는 그의 학구열에 감탄 할 뿐이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명신홍은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3개의 신학석사(Th. M.) 학위를 받았는데 그 기간이면 박사학위를 받고도 남았을텐데 왜 그렇게 하였을까?라는 궁금증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공부한 학교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공부한 웨스트민스터, 칼빈, 비블리칼신학교이다. 즉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신학교들이다. 이 계열의 신학교들은 그때까지 박사 학위를 주는 학교가 없어서 다른 계열의 학교로 가지 않고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학교를 순방하며 공부하였다고 생각된다.
여기에 덧붙여서 한국의 정치적 상황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때는 일제 강점기의 마지막 탄압이 극에 달했을 때이다. 평양신학교는 폐쇄되고 이른바 '후 평양신학교'라고 불리우는 친일학교가 세워진 상황에서 그가 귀국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목회자의 길
해방과 함께 귀국한 명신홍은 목회자의 길에 헌신한다. 평안도 출신의 그가 보수적인 지역인 대구에서 목회한 것이 특이하다. 그는 1946년부터 1957년까지 대구 서문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다. 그의 사역을 여러 가지로 평가할 수 있으나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교단의 정통성을 지켜 나간 일이다. 명신홍이 대구 서문교회에서 목회하던 때는 한국 교회의 재건과 분열이라는 회오리 바람이 불던 때였다.
서문교회부터 분열의 바람이 불었다. 신사참배 반대를 통해 수난을 당하였던 성도들을 중심으로 고신측이 형성되고 여기에 따르는 사람들이 교단을 조직하게 되었다. 서문교회 안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1951년 8월에 서문교회를 떠나 고신측 서문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명신홍은 교회를 지켜내는데 노력하였다.
다른 하나는 기장측의 이탈이었다. 고신측의 분립같은 사건은 없었으나 피난지 대구는 교회 정치의 본산이 되었고 그는 자의든 타의든 여기에 관련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교단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수고를 하였다.
이러한 형편 속에서 이성헌 목사를 전도사 때부터 키워 후계자가 되게 하고 대구 굴지의 교회로 성장시켰다. 또 1953년에 대한 예수교장로교 총회장에 피선되어 교단을 이끌었다.
총회신학교를 위하여
총회는 장로회신학교와 조선신학교를 합동하여 총회신학교(조선신학교측에서는 거부하였으나)를 세우고 새로운 교수진을 형성하였다. 신학교 이사회는 명신홍 등 '공부한 목회자'들을 교수요원으로 헌신하게 하였는데 여기에 명신홍도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 교회는 한국전쟁과 교단분열의 상처를 안고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에 WCC 문제까지 제기되었다. 1954년 제39회 총회는 명신홍과 김현정을 교단 대표로 에반스톤에서 모이는 제2회 WCC대회에 참석하게 하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보고는 정반대였다. 명신홍은 WCC의 신학적 문제를 지적하면서 반대입장을 표하였고, 김현정은 찬성 입장을 나타내었다.
이것은 마치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을 분석하려고 보낸 정사와 부사의 보고가 정반대였던 것과 너무나 비슷하며, 1959년의 교단 분열로 달려가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통합측이 이탈하자 총회신학교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WCC를 동조하는 교수들은 광아루에 세워진 연동측 신학교로 가 버리고 총신은 박형룡, 명신홍만이 남아서 학교를 지키고 무너진 교단과 신학교를 수호하는 일에 있는 힘을 다하였다.
신학교는 맥킨타이어의 도움으로 용산 교사를 마련하였고, 백남조 장로의 헌납으로 사당동 부지를 마련하였다. 모금을 위해 명신홍이 압장을 섰다. 당시 그의 건강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직장암 수술로 옆구리에 배설물 주머니를 차고 다녀야 하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몸을 이끌고 미국으로 건너가 개혁파교회(CRC)들을 순방하며 모금하였다. 그랜드 래피츠의 칼빈대학 기숙사에서 자취하며 순회 설교를 하여 3만달러를 모금하였다. 이 후원금을 기초로 하여 총회 산하 교회들이 뜻을 모아 지금은 사라진 본관 건물을 건축하게 되었다.
그는 그날 그날의 일을 일기에 기록하였다. 그 일기를 읽어보면 당시의 정황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미국 교회를 방문하여 설교한 내용이 조그만한 수첩에 다 기록되었다. 그런데 기막힌 일이 세월이 흐른 후에 나타났다. 그가 피땀흘려 모금한 돈으로 건축한 본관은 그 자리에 종합관을 건축한다고 헐려버려서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뿐아니라 그의 설교 노트와 각종자료들이 사당동 쓰레기 소각장옆에 버려졌다. 아마도 역사를 모르는 도서관 직원이 그 낡은 수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버린 모양이다. 이 자료들이 소각 직전에 어느 졸업생에 의해 수거되어 우리 집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의 기록은 어느 날엔가 전시될 때가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랑을 받으며
필자가 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명신홍은 교장으로 시무하고 있었다. 당시에 필자가 계속하여 전교 수석을 하자 그는 필자를 교장실로 불렀다.
"정 선생, 공부하는데 힘들지? 이번에 내가 미국 침례교신학교의 전액 장학금을 얻어 왔는데 정 선생이 미국 가서 공부를 했으면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제 우리도 여자교수를 키워야 하는데 정 선생이 헌신 하시게."라고 하셨다.
너무나 감사하고 황공스러운 말씀이었다. 필자는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기도하면서 가족들과 의논한 후에 말씀드리겠다고 하고 교장실을 나왔다.
이것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미국이라는 곳이 어디인가? 그것도 전액 장학금이라니! 사실상 필자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 영등포 공장에 들어가서 통합측 전도부 산하의 산업전도위원회 소속으로 도시산업 선교를 하면서 성경과 전도방법론을 배우기 위하여 총신에 입학했기 때문에 입학 당시부터 모든 교수님들로부터 계속 공부하라는 격려를 받아오기는 했지만, 그 때까지 한번도 유학을 놓고 기도한 적이 없었다. 이 문제를 놓고 본격적인 기도를 하면서 동시에 가족들과 의논했다. 집안 어른들의 반대는 격렬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60년대 초반에, 아무도 예수님을 믿지않는 집안에서, 20대 초반의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혼자서 미국 유학이라니 가당치도 않다고 격렬하게 반대하셨다.
결국 필자는 미국 유학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명 목사님을 찾아가 사과를 드렸다. 그러나 명 목사님은 포기하지 않고 그후에도 두 차례나 더 전액 장학금을 얻어 주셨다. 그러나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반대를 물리치고 유학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 장학금들은 림택권, 장영춘, 여운세 목사들에게 주어져서 그들이 유학을 떠났다고 들었으며 훗날 그들은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
필자 정정숙 교수
정정숙 박사는 서울여자대학교에서 사회학 (문학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신학석사),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교육학석사)), 미국 리폼드신학대학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기독교교육학(기독교교육학석사)을 전공하였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상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목회상담학박사)를 받았다. 또 미국 로욜라대학교(Loyola College of Maryland)에서 이상심리학을 전공하였고(Ph.D.Cand.), 남아프리카공화국 스텔렌보쉬대학교(University of Stellenbosch)에서 기독교상담학을 전공하여 신학박사(Th. D.)학위를 받았다. 그후 정교수는 36년간 총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교수로 섬기다가 은퇴하였다. 현재는 총신대학교에서 명예교수로 섬기면서 일본 고베신학교 초빙교수로, 한국상담선교연구원 원장으로, 한국성경적상담학회 고문으로 사역하고 있다. 저서와 논문으로는 운정 정정숙 전집(전 25권), 부록 4권, 기타 10권의 저서와 34권의 역서 간행 및 102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서 「기독교상담학」은 기독교출판문화상 신학부문 최우수상, 인간발달과 상담Ⅰ,Ⅱ」는 총신학술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은퇴시에는 대한민국 근정포장 및 훈장(대통령상)을 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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