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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구경, 다시 해보십시다.
등산이나 여행을 가게 되면 으레 절(寺)을 들르게 되고 절구경을 하게 마련이다. 절구경이라는 것이 불자(佛子)나 특별히 관심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곤 그저 법당이나 기웃하고 탑을 배경으로 하여 기념 촬영이나 한 번 하면 그만이다. 기껏해야 법당이나 탑 앞에 세워진 안내문 정도 읽어보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30년 전 일을 장황하게 얘기하면서도 3일 전 일을 기억 못하는 쉰세대의 해괴한 기억력으로는 절문을 나서기도 전에 읽은 내용을 다 반납하고 나온다. 전국의 유명 사찰을 다 다녀 봤어도 그 절이 그 절이요, 그 불상이 그 불상이려니 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도 몇이 안 된다. 우리나라 사람이 그런지, 우리 세대가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가 대체로 입맛은 섬세해도 눈맛(?)은 둔하거나 게으른 듯싶다. 어느 집 설렁탕, 추어탕이 맛있다는 얘기는 다투어 하면서도 잣나무와 소나무도 구분 못하는 사람이 상당수 있으니 하물며 불상, 불탑을 얘기해서 무엇하랴. 요는 관심! 百聞이 不如一見이라지만 관심 없이 보면 百見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차라리 ‘一聞後 一見이면 百見보다 낫다’라는 말을 하고 싶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 하여 이 방면 대가(大家)들께 청문(請聞)했으면 좋으련만 ‘주역(周易)에 정통한 사람은 周易을 말하지 않는다’했으니 들은풍월 50代 문고판 상식’으로 아는 척 좀 해 보십시다.
자 그럼, 소요(逍遙)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우리 건축 문화유산과 문화재의 대부분을 지니고 있는 절에 함께 가보십시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개울물 소리 들어가며 1~2km 걸어가면 첫 번째 만나게 되는 것이 일주문(一柱門)이다. 절을 구경하려면 몇 개의 문을 거쳐야 하는데 일주문은 사바세계와 불국정토의 경계가 되는 문이다. 一柱는 기둥이 하나라는 뜻도 있지만 부처를 향한 一心을 형상화한 이름이다. 두 기둥을 일직선상에 놓고 맛배지붕을 올린 것이 대부분이다. 동래 범어사 일주문은 4개의 돌기둥 위에 지붕을 얹어 가장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일주문에는 ‘○○山 ○○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어 절의 대문 역할을 한다. 요즘 일주문은 사찰입장료 받는 곳으로 전락해 버린 느낌이 있어 훗딱 지나치고 싶지만, 잠깐 걸음을 멈추고 편액을 잘 살피면 우리나라 서예 대가나 역사적 인물의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어 절 입구부터 반가운 마음이 들게 한다. 동래 범어사 일주문
일주문을 지나면 중문격인 천왕문(天王門)이 나온다. 이름까지 욀 필요는 없고, 동서남북 네 방위를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이 험상궂은 인상과 우람한 모습으로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짓누르고 있다. 분위기가 으스스하여 어떤 이는 혐오감을 느낀다고도 하지만 불교의 상징물로 생각하면 굳이 폄하할 일도 아니다. 흔하진 않으나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금강문(金剛門)이 있기도 하다. 역시 불법의 수호신이며 수문장 격인 금강역사상[仁王像]이 좌우에 벌여 있다. 근육질의 태권도 폼으로 내방객을 맞는 석굴암 금강역사상과 분황사탑 1층 탑신부 감실 입구의 인왕상이 유명하고, 여주 목아불교박물관에 설립자가 조각한 목조금강역사상이 인상에 남는다.
마지막 문은 불이문(不二門)이다. 진리는 둘이 아니요 오직 하나라는 뜻인데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生과 死, 만남과 헤어짐,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하나라는 것을 깨달으면 해탈한다는 뜻이다. 이 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사찰 당우(堂宇;神佛을 모신 집)가 배치된 경내에 도달한다.
사찰은 수행(修行), 교육(敎育), 포교(布敎)의 3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곳이므로 불전(佛殿), 강당(講堂), 승당(僧堂) 등 각종 건축물이 배치되어 있다. 시대와 종파, 절이 위치한 산세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우리나라 사찰의 전통 가람배치는 불이문, 강당, 대웅전이 일직선상에 놓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불이문을 들어서서 강당 마루 밑을 통과하면 전면 축대 위에 위엄있게 자리한 전각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나라 고대 목조 건축물은 사찰이나 궁궐 전각이 대부분이다. 사찰 건축을 살피는 방법을 보자.
첫째, 지붕을 본다. 지붕의 형태는 맞배지붕, 우진각지붕, 팔작지붕이 기본이다. 맞배지붕은 일명 뱃집이라 하는데 양 지붕면을 사람人자 형태로(책을 엎어놓은 형태) 마주 붙인 지붕이다. 가장 간단한 지붕양식으로 오래된 건축물이거나 규모가 작은 건물에 이 양식이 많다. 맞배지붕은 측면 벽이 風雨에 노출되므로 이를 막기 위해 대개 풍판을 붙인다. 고려시대 맞배지붕으로 유명한 것으로 영주 부석사 조사당과 덕숭산 수덕사 대웅전이 있다. 우진각지붕은 경사면이 4면인 지붕이다. 즉 맞배지붕 좌우 측면에 삼각형 형태의 경사면을 붙인 지붕인데 추녀 끝을 올려 추녀마루나 경사면이 곡선을 이루는 것이 맞배지붕과 다르다. 우진각 지붕은 성문 ,누각, 정자 등에 많이 발견된다. 국보1호 숭례문이나 광화문이 다 이 형태의 지붕이다.
수덕사 (국보49호)
팔작지붕은 합각(合閣)지붕이라고도 하는데 한 마디로 맞배지붕과 우진각지붕을 한데 합친 형태의 지붕 양식이다. 우진각지붕은 용마루 끝에서 추녀마루가 45도 각도로 직접 내려오지만 팔작지붕은 맞배지붕 처마 네 귀에서 45도 각도로 추녀마루를 달아 낸 것이 서로 다르다. 팔작지붕은 웅장하면서도 추녀 끝을 날렵하게 들어 올려 처마선이 우아한 곡선미를 이루어 내게 한 점에서 일본의 건축 양식과 대별된다. 일본이 자랑하는 나라(奈良)의 세계 최대 목조 건물인 東大寺 대불전 앞에 서면 우선 45m높이의 웅장함에 압도되지만 뭔가 흡족치 않은 느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처마선의 밋밋함이었다. 우리에게 곡선은 생활선이요, 생명선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의 눈 속에 보이지 않게 자리잡은 곡선은 여유 없는 직선과 경망스런 곡선을 모두 거부한다. 한국 건축의 처마선의 곡선은 한국미의 출발이자 완성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화엄사 각황전(국보제67호) 중층팔작지붕
이외에 네모뿔 형태의 사모지붕, 십자형지붕 등이 있다. 우리나라 3寶 사찰인 불보(佛寶)사찰 양산 통도사, 법보(法寶)사찰 합천 해인사, 승보(僧寶)사찰 승주 송광사는 전각이 많고 밀집되어 있어서 각종 지붕 양식을 고루 살필 수 있다.
다음은 처마아래 단청이 화려한 공포(拱包)와 익공(翼工)에 대해 알아보자.
익공은 기둥 위에 새 날개처럼 튀어나온 장식물의 일종이다. 공포처럼 지붕의 무게를 줄이기 위한 기능보다는 장식 기능이 강하다. 임란 때 우리 고건축이 많이 훼손되어 조선조 후기에 재건축한 것이 많은데 법당 등 중요한 건물은 다포계 양식, 2차적 건물은 주심포계 양식, 그리고 부수적인 건물은 익공식을 주로 했다 한다.
다포 양식의 처마
다음은 기둥을 본다. 기둥이 6개면 5칸, 4개면 3칸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이라 하는 말은 기둥 수에서 나오는데 정면은 대개 홀수 칸이다. 사찰 건축은 거의 다 둥근기둥[圓柱]이고 사각기둥[方柱]은 거의 없다. 기둥의 모양을 볼 때 배가 불룩하니 나온 기둥을 ‘배흘림기둥’이라 하고 일직선으로 다듬되 기둥머리가 기둥뿌리보다 약간 좁은 ‘민흘림기둥’,그리고 ‘원통형기둥’이 있다. 배흘림기둥은 기둥의 3분의 1 지점을 가장 불룩하게 하여 위로 갈수록 지름이 좁아지는 기둥 형태로 지붕의 무게를 떠받치는 안정감을 줄뿐 아니라 추녀의 곡선과 어울려 조화미를 형성해 준다.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원통형 기둥을 일직선상에 배열하면 착시 현상으로 기둥이 가늘어 보인다고 한다. 이 착시현상을 막기 위해 고대 그리스 신전에서도 배가 불룩한 기둥을 세웠다는데[엔타시스] 이 기둥 형태가 현대까지 이어진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한다. 코린트식이니 이오니아식이니 해도 배흘림기둥 위에 화려한 단청의 공포 장식은 우리만이 갖는 미적 유산이다. 눈이 수북히 쌓인 날, 오래 된 사찰의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날렵한 추녀의 석가래 단청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는다면 오래도록 그 정취를 잊지 못할 것이다.
다듬지 않고 원목의 생김대로 그대로 쓰인 것도 있다. 충남 해미 개심사의 심검당과 종루의 휘어진 기둥들은 인상적이다. 우아하고 세련된 곡선의 미가 아니라 휘어짐의 미라할까? 불균형 속의 균형의 미라할까? 기둥, 도리, 들보에 휘어지고 뒤틀어진 목재들을 생긴 그대로 짜 맞춘 나무들의 조화에서 김원용선생이 한국의 미는‘자연의 미’요 ‘미 이전의 미‘ 라 한 말을 실감할 수 있겠다. 기둥이 얹힌 돌을 주초(柱礎)라 하는데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기둥 밑면을 돌 표면에 맞춘 초석을 ‘덤벙주초’라 한다. 삼척의 죽서루는 자연석 위에 길고 짧은 기둥을 세워 누각 밑의 오십천과 어울리는 조화미를 보이고 있다.
우리 사찰 건축물 가운데 지리산 화엄사 각황전, 모악산 금산사 미륵전,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을 일러 3대 건축물이라 말한다. 경복궁 안에 있는 민속박물관이 이 세 건축물을 본 따 지은 것이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한국 유일의 고건축 박물관이 있는데 백 여 점의 정교한 축소 모형 가운데 이 세 건물의 모형이 가장 눈에 띈다. 적어도 이 글에서 언급된 모든 건축물의 축소모형을 한 곳에서 볼 수 있으니 한 번 꼭 들르시라.
다음은 법당의 편액을 본다. 보통은 대웅전(大雄殿)이라 써 있다.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하고 문수와 보현을 협시(脇侍)로 모신 전각이다. 석가모니불과 함께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같이 모신 삼존불당은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한다.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곳은 대적광전(大寂光殿) 또는 비로전(毘盧殿), 화엄전(華嚴殿)이란 현판을 단다. 한마디로 불전 편액에 어떤 이름이 붙었는가에 따라 불전에 모신 부처님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아미타불을 모신 곳은 극락전(極樂殿) 또는 무량수전(無量壽殿), 아미타전(阿彌陀殿)이라 한다. 미륵불을 모신 곳은 미륵전(彌勒殿) 또는 용화전(龍華殿), 저승세계를 관장하는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冥府殿), 관세음보살을 주 전각으로 모신 원통보전(圓通寶殿)과 일반 전각의 관음전(觀音殿),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藥師殿), 이외에도 영산전(靈山殿), 나한전(羅漢殿), 칠성각, 산신각 등 크고 작은 전(殿)과 각(閣)들이 사찰 경내를 형성한다.
내친 김에 불상에 대해 잠깐!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등을 어떻게 알아보느냐? 주로 손모양[手印]을 보고 판단한다. 석가모니불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 해서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해서 허벅지 위에 가볍게 놓고 오른 손은 엎어 오른쪽 무릎 아래로 땅을 향한 모양이다. 석굴암 본존불을 기억하면 된다. 석가모니불 좌상(坐像)은 대개 이 항마촉지인이나 선정인(禪定印:단전 아래서 두 손을 펴서 포개 얹고 엄지를 맞대고 있는 수인)이 대부분이다. 비로자나불은 지권인(智拳印)이라 해서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왼손 집게손가락을 세워서 오른 손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아미타불은 미타정인(彌陀定印)이라 해서 선정인의 변형인데 9개로 세분되어 복잡하다. 수인은 종파에 따라 다르고 엄격히 지켜진 것도 아니니 이 세 가지만 알아도 아쉬운 대로 아는 척 할 수 있다.
여타의 불상들은 그 특징에 따라 판별하면 된다. 약사여래는 약병을 들었고, 관음보살은 화려한 의상에 보관(寶冠)을 썼고, 문수보살은 사자를, 보현보살은 코끼리를 타고 있고 하는 식이다. 미륵불은 마애불이나 석불입상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미륵불상이 많은 것은 미륵숭배 사상의 영향 탓일 것이다.
석가모니불(항마촉지인)
비로자나불(지권인)
아미타불(미타정인)
법당 안에 본존불을 모시지 않고 천불(千佛)을 모신 곳도 있다. 김천 직지사와 해남 대흥사 천불전이 유명하다. 천불상은 여래불상처럼 해탈 득도한 상호(相好:부처님의 얼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각종 모습이어서 친근감을 준다. 처음 눈에 띈 불상에서 남자는 오른 쪽, 여자는 왼 쪽으로 자기 나이만큼 헤아린 부처가 자기 부처란 말이 있으나 그냥 만들어낸 말일 것이다. 불상이 자세에 따라 결가부좌상(結跏趺坐像), 반가상(半跏像), 입상(立像), 와상(臥像) 등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우리나라 유일의 와불(臥佛)이 있는 곳, 전남 화순 운주사가 그 곳이다. 이곳의 와불을 ‘부부와불’이라 부르는데 남방 불교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조소상의 부처 열반상이 아니라 약간 경사진 평평한 반석에 두 부처를 선각(線刻)한 것이다. 눕혀 놓은 마애불이라고나 할까? 운주사는 천불(千佛), 천탑(千塔)의 사찰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석불 70여 구, 석탑 10여 기만 남아 있다. 예전에 그 많은 석불, 석탑이 세워진 것과 화순 지역이 우리나라 고인돌의 최대 보고(寶庫)인 점이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요즈음 거대한 불상 건립이 유행처럼 번져 설악산 신흥사의 청동석가여래좌상, 낙산사의 석조해수관음보살입상, 법주사의 청동미륵대불, 천안 각원사의 청동아미타불좌상, 팔공산 동화사의 석조약사여래대불 등이 눈길을 끈다. 이 거대 불상들은 대개 20년 안팎에 세워진 불사(佛事)인데, 불상이나 불전을 거대하게 축조해서 ‘동양최대’를 다투기보다는 불교 현대화에 더 노력하는 것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든다.
법당 안을 들여다봤으면 법당의 외곽을 한 바퀴 돌기 마련인데 법당 측면 또는 후면 벽에 그림을 그린 것이 눈에 뜨일 때가 있다. 흔하기는 나한상들이 많지만 특정한 절에는 十牛圖[심우도尋牛圖]를 볼 수 있다. 이는 선(禪)의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동자가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10폭의 그림이다. 그림 하나하나에 제목이 붙어 있어 제목과 그림 내용을 음미하면 조금쯤은 이해가 갈 듯도 하다. 어떤 절에는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다. 이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8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으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와 함께 불교에서는 불상 못지않게 경배의 대상이 되는 그림이다. 그래서 법당 외벽에 그리기보다는 석모니불의 후불탱(後佛幀)으로 모시거나 전각에 따로 모시기도 한다.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捌相殿:捌은 八의 갖은자)이 대표적인 예다. 원래 이 팔상전은 전각이 아니라 5층 목탑인데 팔상도를 모셔서 팔상전이라 이름 붙인 듯싶다. 영월 사자산 법흥사 법당 뒤에는 화강암에 부조한 팔상도가 병풍처럼 둘러 있는데 최근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탑(塔)이다. 불탑(佛塔)이야말로 전문가의 지식이 필요하다. 어설픈 상식으로 아는 척 했다간 망신당하기 십상이다. 원래 탑은 석가모니 입적 후 사리를 봉안하여 경배했던 구조물이었다 한다. 그래서 인도의 초기 탑은 경주 왕릉 같은 반구형(半球形) 구조물이었는데 이것이 중국, 우리나라, 일본의 탑양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 석탑에 익숙해 있어서 으레 불탑은 석탑이려니 생각하는데 중국이나 일본을 가보면 그 생각이 잘못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중국의 탑은 전탑(塼塔)이라 해서 벽돌로 지은 탑으로 규모가 대국답다. 시안(西安)에서 진시황릉 다음으로 구경하게 되는 자은사(慈恩寺) 대안탑(大雁塔)은 7층 누각 높이가 45m라든가 54m라든가? 아무튼 높다. 경주 분황사 탑이 전탑 양식인데 3층만 남았어도 9m가 넘는 것으로 보아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의 탑은 목탑(木塔)이다. 담징의 벽화로 유명한 호류지(法隆寺)에는 금당과 나란히 5층 목탑이 서 있는데 그 규모가 법주사 팔상전만하다. 사찰 경내에 가장 높은 건축물은 다 목탑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우리나라는 석탑(石塔)의 나라요, 중국은 전탑(塼塔)의 나라, 일본은 목탑(木塔)의 나라란 말을 한다. 한마디로 주 탑재(塔材)가 나라마다 달랐다는 것이며, 우리나라는 질 좋은 화강석이 많아 석탑이 많이 보존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탑을 보려면 밑에서 위로 올려 보는 방법이 좋을 듯싶다. 기단이 일층인가, 이층인가부터 먼저 살피자. 탑신부는 옥개석이 몇 층인가. 옥개석은 판석으로 되었는가, 지붕 모양인가. 옥개석 밭침은 몇 개인가. 옥개석이 하나의 돌을 다듬은 것인가, 벽돌 쌓듯이 층을 이루었는가. 탑신(옥신)이 각 층마다 일정한 높이인가, 아니면 일정한 비율로 높이가 줄어드는가. 탑신은 하나의 돌인가, 우주(隅柱:모서리기둥)를 별개석으로 세웠는가. 우주 사이에 탱주(撐柱)가 있는가. 탑신 면석에 특별한 부조가 있는가. 상륜부에는 어떤 장식이 있는가.
불국사 석가탑
용어가 전문적인 것 같으나 처음부터 다 알려하지 말고 한 부분 한 부분 눈에 익혔다가 비교해 보면 차이점이 드러나게 된다.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세밀하게 하는 것이 아는 즐거움이다. 아, 저 탑은 옥개석 받침이 다섯 개니 통일신라 때 축조된 것이 아닐까 하고 탑 앞에 안내문을 읽어보니 과연 그랬다면, 혼자 쑥스럽게 즐겁다. 이게 아마추어의 기쁨이다. 너무 많이 알아도 대수롭고, 너무 몰라도 데면데면하다. 조금만이라도 지식을 갖춘 상태에서 화엄사 사사자(四獅子)3층 석탑을 보았다면 그렇게 쉽게 이 탑 앞을 떠나진 않았을 게다. 2층 기단의 우주를 대신하여 4마리의 사자상으로 탑신을 떠받친 모습에서, 다보탑에서 느꼈던 감동을 다 시 한 번 맛보 았을 것이다.
지리산 화엄사 사사자석탑
일제 때 엉터리로 보수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전환되는 시기의 최고(最古)의 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시원(始原)이 된다는 감은사지 쌍탑, 신라 최고(最高)의 탑이라는 충주 중원탑, 특수형 석탑으로 이름난 월정사 8각9층 석탑과 불국사 다보탑, 앞에서 언급된 고려시대의 명품 경천사 10층석탑은 모두 국보급 우리 문화유산이다. 이 외에도 화순 운주사의 원형, 원구탑이 특이한 모습으로 기억에 남는다.
법당 앞에 놓여 있는 또 하나의 석조물에 석등(石燈)이 있다. 석등도 불탑 못지않은 예술미를 지닌다. 웬만한 분이면 법주사 쌍사자 석등을 기억해 내시리라. 석등도 그 기본 구조는 석탑과 거의 같다. 하대석 위에 기름한 중대석[竿石]을 하나 세우고, 그 위에 화사석(火舍石:불을 밝히는 부분)을 얹고, 그 위에 옥개석을 씌우는 형식이다. 하대석은 원형에 연꽃무늬로 장식하고 옥개석은 팔각지붕 형식이 제일 많은 듯싶다.
그 외에 법당 석축 아래 괘불석주(掛佛石柱)가 있는 곳이 있다. 얼른 보면 당간지주(幢竿支柱)와 비슷하지만 당간지주는 사찰 전면에 당(幢:부처의 공덕을 표시하면서 사찰의 위치를 알리는 일종의 깃발)을 걸기 위한 것이고 괘불석주는 괘불을 걸기 위한 것이다. 한마디로 국기게양대 같은 것이다. 당(幢)은 이 절에 대덕스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으나 당간은 많이 없어졌고 그 지주석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공주 갑사에 신라 때 제조된 철당간이 남아 있다. 당간의 생김새가 대나무 같아서 처음에는 대나무를 모방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철통을 이은 마디가 대나무 마디처럼 보인 것이다.
괘불은 일종의 탱화(幀畵)로서 부처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법당 밖에 내다 거는 불구(佛具)이다. 영산회상도 등 각종 불상을 주로 수를 놓아 그리는데 큰 괘불은 가로 세로가 10m가 넘는 것도 있다고 한다. 평소에는 보기 힘들고 의식이나 큰 재가 들었을 때 법당 앞에 내걸린다.
법당 앞의 탑을 구경하고 여러 전각을 돌고 나면 강당 옆에 범종각(梵鐘閣)이나 범종루(梵鐘樓)를 만난다. 범종각에는 범종이 걸려있는 게 당연하지만 범종 외에 사물(四物)을 같이 걸어둔 곳이 많다. 불교에서 사물이란 범종(梵鐘), 법고(法鼓), 운판(雲版), 목어(木魚)를 이른다. 이들은 예불이나 의식에 쓰이는 일종의 타악기로서 상징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
범종은 이승은 물론 저승의 중생(衆生)까지 제도(濟度)하고, 법고는 온갖 짐승을, 운판은 날짐승을, 목어는 물고기의 영혼을 구제한다고 한다. 산사에서 하룻밤을 묵어본 사람이면 새벽 어둠 속에 울려 퍼지는 범종 소리가 얼마나 영혼 깊이 스며드는가를 느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느 스님이 말하기를 범종의 입구가 아래를 향한 것과 종 아래 확을 만든 것은 지옥까지 종소리가 들리도록 한 것이라고 했는데 황당한 얘기지만 그러려니 하고 들으면 재미있다. 법고가 양쪽에 각각 암수 한 마리씩의 소가죽을 통째로 써야 북소리가 좋다는 얘기도 그럴 듯하다.
특히 사물 중에 범종은 우리나라 금속공예 예술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잘은 모르지만 용신(龍身)의 종걸이, 대나무 모양의 음통(音筒), 종의 어깨 부분의 36개의 젖꼭지, 그리고 그 유명한 공양비천상(供養飛天像)과 종 아래 부분의 연화 무늬가 중국과 일본 종에 구분되는 특징이라 한다. 언제 오대산에 다시 가면 상원사 동종을 찬찬히 살펴보고 싶다.
오대산 상원사 범종 자, 이제 얼추 절구경이 끝난 셈이다. 요사채(寮舍:스님들이 거처하는 곳)는 기웃거리지 않는 것이 예의이니 수조에 넘치는 약수 한 바가지로 목을 축이고 암자가 있는 오솔길로 걸음을 옮겨 보자. 절 외각의 부도(浮屠)밭에도 눈길 한 번 던져주고, 내가 걷는 이 길을 몇 백년 전에 누가 걸었을까 생각하면 삶에 찌든 마음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어 좋다.
사찰은 우리나라 국보급 문화재의 대부분과 많은 보물, 유형문화재를 간직한 곳이다. 이제 사찰은 등하산 길에 다리쉼 겸 눈요기하는 곳이 아니라 문화 유산을 순례하고 감상하는 곳으로 인식되어야겠다. 그래야 문화재 관람료가 아깝지 않지.
(일본인은 여행중에 반드시 메모하는 것을 봅니다.절에 관한 몰랐던 상식을 배우면 서 여행떠나면 더 유익할 것 같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