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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대기
池 幸 玉
1941. 5. 31 全南 長興 出生
대한 흉부 및 심장혈관외과학회장
‘가난한 심장병환자의 아버지’한양대 구리병원장
‘페스탈로찌’라고 불리우고 청렴강직한 교육자 아버지
‘실력과 인간성이 가장 중요하다’이것이 철학인 선생의 선친 池柳萬 공은 6년제인 보통학교 5학년 때 광주사범시험에 합격한 수재로서 장흥 관산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임한 교육자이다. 아동 사랑에 열성을 다 바친 선친을 주변사람들이‘페스탈로찌’라고 불렀고, 또한 관사를 교감에게 양보하고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통학을 하실 만큼 청렴하셨으며, 남에게 아부나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대쪽같은 선비이기도 했다. 선친의 박봉으로 인해 가계는 거의 모친 金少禮 여사께서 책임을 지고 농사를 지으셨다. 비록 농사를 짓긴 했으나 관산에서 최고 부잣집 딸과 교장선생님의 사모님으로서 체통을 잃지 않으신 모친은 주위 사람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나누어 주는 등 항상 베품을 미덕으로 알고 사신 분이었다. 항상 가정엔‘봉사하라, 근면 ․ 검소하라, 남을 사랑하라’이것이 두 분의 실천덕목이자 선생의 인생관이 되었다. 선생은 초등학교 시절 동급생을 지도할 만큼 공부를 잘 했는가 하면, 중 ․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지게질에서 쟁기질까지 다 도맡아 농사를 꿰차고 지을 정도로 근면하기도 했다. 심지어 중학생 때에는 꼭두새벽에 밭의 김치거리를 뽑아 지게에 지고 십리 길을 걸어 시장에 판 다음 등교하기까지 했다.
중학교 때 이정차 친구와는 50여년이 다된 오늘까지 우정을 지속하고 있다. 선생은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먼저 배신하지 않는다. 고교 땐 선생을 중심으로 5인방이‘삼위일체’로 스터디했다. 돈이 없어 한 권만 사가지고 돌아가면서 강의하고 그날 강의한 만큼은 찢어서 버렸다. 그 정도로 철저히 공부했다. 모두다 실력이 있어 자신들이 원하는 대학, 원하는 과에 들어갔다. 이 중 한 친구가 명문대에 들어갔으나 입학금 마련이 어렵게 되자 친구들과 읍내 유지를 찾아다니며 입학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만능스포츠맨에서 수술을 잘하는 외과의사로
만능스포츠맨인 선생의 운동신경은 수술할 때 능수능란하고 빠른 칼솜씨로 나타났다. 2번째 독일에 갔을 때 독일의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인 Dr. Minami 라는 동료의사와 피부 절개부터 심폐기장치까지 수술시합에서 선생이 이겼다. 선생은“나는 욕심이 많다. 선의의 경쟁에서 절대 안 지는 게 나의 성격이다.”고 덧붙였다.
의대를 선택하게 된 동기 및 가정교사로 어렵게 대학을 마치다
선생이 의대를 선택하게 된 것은 가난 때문에 병원에 못가고 고통받거나 그냥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였다. 이 때가 초등학교 때였다. 선생이 의대를 다닐 만큼 가정형편은 녹록하지 않았다. 보릿고개를 넘을 때 선생도 보릿가리죽을 물리도록 먹고 자랐다. 선생의 대학생활 역시 어려웠다. 본과 1학년 때는 다행히 금호타이어 박상구 회장댁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선생은“그 때 박상구 회장으로부터 인간적으로 감화를 많이 받았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존경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독일의 Bircks 교수와 박상구 회장이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고 회고했다.
의과대학 교수로서의 한평생
의대 졸업 후 입대, 광주 7육군병원에서 대위로 제대한 선생은 1975년 3월 27일 한대의대 전임강사를 시작해서 2006년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다. 그간 2차례에 걸쳐 4년을 넘게 독일 대학병원과 심장센터에서 유급조교와 독일 정식공무원으로 몸담으며 선진의술을 익히기도 했지만, 의술로서 국위선양에도 크게 기여했다.
두 번째 가서 몸담았던 바드웬하우젠 심장센터에서 붙잡는 걸 굳이 뿌리치고 귀국하게 된 것은 독일에서 익힌 선진의술을 우리나라 후진들과 환자들에게 베풀고자 하던 차에 마침 한대의대의 흉부외과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서 귀국을 권했기 때문이었다. 귀국 후 곧 흉부외과 과장 및 주임교수로 발탁돼 1986년 10월 1일부터 1999년 2월까지 한대의대 흉부외과를 이끌면서 그 당시 국내에서 특히 심장수술이라고 하면 한대의대를 꼽을 정도로 여러 면에서 한양대 흉부외과를 최고로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한대병원 흉부외과가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첫째는 실력이고, 둘째는 인간성과 함께 환자를 꼭 살려야겠다는 강한 의지’라는 선생의 지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이 독일에서 배운‘협심증 환자의 대동맥관상동맥 연결술’(바이패스)을 한양대에서 최초로 시술했으며, 당시 바이패스를 포함한 흉부외과 수술하면 한대병원으로 통했다. 한대병원에서 이루어진 흉부, 심장, 혈관, 식도, 종격동, 대동맥 수술을 거의 다 선생이 도맡아했다고 보면 된다. 그간 한대병원 백남심장센터 소장, 흉부외과 과장 및 주임교수, 한대 구리병원장, 국내외의 권위 있는 관련 학회활동, 국제학회 참석, 관련단체 및 일반사회단체 활동 등이 선생 삶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저서로는 교재인‘최신 흉부외과학(공저)’을 비롯하여‘나의 건강비결’,‘고혈압과 운동’(딸 수인과 공동 독어 번역)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센 쥬드 핀박의 혈류역학적 고찰’외 160여편이 있다. 배출한 박사로는 한대의대 교수를 비롯하여 11명이 있고, 석사는 현재 서대문시립병원장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이 있다.
독일 듀셀돌프대병원 ․ 보쿰대부속병원 바드웬하우젠심장센터 4년
독일 대학병원에 2차례 약 4년간 근무하는 동안, 듀셀돌프대학병원 심장혈관외과 Bircks주임교수의 초청에 의해 간 첫 번째는 그렇다 치더라도, 두 번째는 처음에 갔을 때 그곳 의료진 특히 주임교수에게 실력과 인간성, 의사로서 헌신적인 태도 등을 능히 인정받아 갔기 때문에 그 의의가 매우 크다. 바드웬하우젠심장센터장으로 내정된 Kӧrfer 교수가 추천하고 주지사가 허가하여 독일 정부의 정식 공무원신분으로 가게 된 것이니 말이다.
Bircks 주임교수는 심장관련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만큼 여러 나라에서 수십 명의 의사들이 몰려와 있었고, 선생도 그 중 한 명이었으나 남다른 점이 있었다. 병원에서의 일상생활은 아침 7시 30분에 환자의 수술준비가 완료돼 피부절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6시면 병동에 도착, 회진부터 돌았다. 회진을 돌며 검사도 하고 그 결과로 환자들의 상태를 파악, 그 병동 담당 스텝진과 토론을 했다. 이어 중환자실에 들러 전날 수술환자들을 파악하고 중환자실의 의사들과 토론하며 특이 사항이 없으면 수술실에 가서 손을 씻고 수술에 참여했다. 그러면 보통 7시 15분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항상 선생은 제일 먼저 병원에서 일을 시작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하루에 두세 번 수술에 참여하는 게 보통이나 응급환자가 오면 4번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점심과 저녁식사를 거를 때도 있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주당 근무시간이 40시간이고 토 ․ 일요일은 휴무였으나 선생은 토 ․ 일요일도 멀리 가지 않고 대기하였다가 응급환자가 오면 먼저 달려가 진료와 수술에 참여하는 성실성을 보이는 등 전적으로 병원에 매달려 살았다.
선생이 독일에 간지 6개월쯤 되었을 때 실력을 확실히 인정받는 한 사건이 있었다. 중환자실에 근무할 때였다. 교통사고 환자가 왔다. 중환자실에선 3일이 되었어도 진단을 못 내리고 있었다. 선생이 비장파열이라며 수술을 하자고 했으나‘아니다’고 거절했다. 결국 주사기로 복부천자를 해 본 결과, 비장파열로 판명돼 수술하여 완쾌되었다. 그 후로는 대우가 달라졌다. 어떤 의사보다 부지런하고, 합병증 없이 수술을 잘 하다보니 주임교수의 눈에 띄어 신임을 얻기까지 했다. 독일에선 웬만해서는 집으로 초대하지 않는데, 주임교수가 가족까지 초대해 주었고, 크리스마스나 연말에는 특별보너스까지 주는 등 경제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두 번째로 가서 연간 개심술 약 4,500예와 심장이식 150~200예를 수술하는 세계적인 병원 보쿰대학부속 바드웬하우젠심장센터에서 근무하게 된 것은 1981년 10월 독일생활을 끝내고 귀국하여 한대병원 흉부외과에서 부교수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독일정부가 세계에서 가장 좋은 심장센터를 세우면서 그 센터장으로 Kӧrfer 교수를 발탁했는데, 그가 스텝을 구성하면서 선생을 Oberarzt로 주지사에게 추천, 두 번째 독일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선생이 맡은 Oberarzt은 우리나라에서는 스텝이고 전임강사부터 교수 급에 해당, 실습학생들 지도는 물론 수술의 집도자로서 레지던트를 가르치고 모든 문제를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끝내야 하는 중책이었다. 심장센터 개원 당시부터 선생은 독일 전역에 널리 알려졌다. 심장센터의 개원 소식을 알리기 위해 수술을 집도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방영하였는데, 바로 그 수술을 집도하고 있는 주인공이 선생이 된 것이다. 그 때 이 방송을 보고 재독교포들의 축하전화가 빗발치기도 했다.
한 번 더 전국 텔레비전 방송을 탄 적이 있었다. 1985년 봄이었다. 병원 측에서는 800g짜리 환자의‘수술불가’판정이 독일의사들에 의해 내려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선생이 끝까지 고집해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아기를 수술했다고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이 뉴스로 인해 바드웬하우젠심장센터의 유명세가 더해졌고 전국에서 더욱 많은 심장병어린이들이 몰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선생이 2년 남짓 만에 심장병환자의 개심술에 약 800명 정도 집도하거나 수술에 참여하는 등 독일의사회의 명성획득과 함께 그 막중한 임무를 능히 수행하자 더 큰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퀘파교수가 노이하임에 주립심장센터가 설립되는데 그 책임을 선생에게 맡아달라는 제의를 했다. 이 제의로 독일 정착까지 고민했으나 귀국, 한대병원 흉부외과를 약 13년간 선생의 체제로 이끌면서 여러 면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흉부외과에 입원하는 환자들에게 쾌유와 건강을 비는 뜻에서 장미 한 송이씩 선물, 환자들 입장에서 아주 세심한 배려를 하였던 사례는 유명하다. 한편, 서울대 2, 원광대 1, 전북대 2, 한양대 2명 등 7명의 의대교수를 독일 바드웬하우젠대학병원에 추천, 선진의술을 배울 기회를 주었고, 앞으로도 계속 추천할 계획이다.
그리고 독일 의사회와 두터운 신뢰를 바탕으로 우정도 돈독히 쌓았다. Kӧrfer 교수는 1991년 9월 제2차 세계심장흉부 수술 심포지엄 개최 때 선생을 초청하기까지 했다. 그 심포지엄에서 선생은 선생이 한국에서 집도한 심장판막대치수술의 수술성적에 대해 (사망률) 0.85%라고 발표하였다. 이는 당시 세계적인 학자들이 발표한 심장판막대치술의 사망률 3~4%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수치였다. 그 결과 참석한 학자들로부터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이렇게 선생은 독일의 관련학회 학술대회나 심포지엄이 있을 때마다 유일하게 한국에서 초청받아 참가하고 있으며 이때마다 그 동안의 연구를 발표는 물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옛 동료들과 스승을 찾아뵙곤 하여 독일에 가면 고향을 찾는 것 같은 포근함을 느낀다고 한다.
한양대학교 구리병원 원장
선생은 구리병원장 시절‘우리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을 내 가족같이 사랑하라.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환자는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라고 환자 제일주의를 내세웠다. 그리고 매일 아침 출근하면 반드시 응급실, 중환자실, 수술실에 들리곤 했다. 1년에 2차례씩 병실 500개의 전체 환자를 돌아보며 위로해주고 진료결과에 대해 알려주기도 했다. 이렇게 원장님이 직접 순회를 하니 손을 꼭 잡으며 눈물을 흘리는 환자도 있었다.
역시 구리병원에서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가만히 있을 선생이 아니었다. 각 보건소에서 노인들에게 건강에 관한 강의를 곁들이면서 보건소를 통해 오는 환자들에게는 진료비를 10% 할인해주는 제도를 마련했고, 사랑실은 교통봉사대와도 자매결연을 맺고 혜택을 줄 수 있는 계약을 체결했다. 사랑실은 교통봉사대에서 의뢰한 외국인 심장병환자로서 의보가 안 되는 환자에게 총 진료비의 30%를 감면해 주고, 나머지 70%를 교통봉사대에서 받는 걸로 제도화했다.
가난한 심장병환자의 아버지. 인술의 성자
‘가난한 심장병환자의 아버지’,‘인술의 성자’이 칭호들은 언론들이 선생에게 붙인 칭호다. 선생이 의료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75년이고, 1984년 사회복지법인‘한국심장재단’과 연계를 하면서부터 체계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지난 2002년 8월 말까지 한대병원에서 수술받은 심장병환자 수는 530명이고 이는 거의 대부분 선생의 손에 의해 수술이 집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국인 어린이의 수술로는 1990년 12월 15일 중국교포 자녀 林浩군(2)이 심실중격결손증 수술, 2002년 10월 우즈베키스탄 딜리노자(9)의 심장병 수술 등이 있다. 임군의 경우는 어머니가 중국에 온 한국관광객으로부터 ’서울 한대의대 지행옥 교수를 찾아가면 수술이 가능하다‘라는 말을 듣고 무작정 입국, 선생의 집도 하에 한국심장재단의 도움을 받아 수술한 경우이다. 이러한 공로로 1996년 한국심장재단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1998년부터는 심장병어린이를 돕고 있는 국내 모 자선단체와 손을 잡고 그 대상과 범위를 확대했다. 이 단체의 봉사대원들은 선생에 대해“너무 진실한 분입니다. 지방에 나가면 하룻밤 자고 오는데 할머니든 아기든 모두에게 너무 편하게 해줘요. 사람은 마음과 마음이 전해져야 하잖습니까? 그런 점에서 서로 호감을 갖게 됐고, 끝까지 함께 하고 싶습니다. 참 훌륭한 사람이고 훌륭한 의사입니다. 어느 누구한테도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의료신문’, 2003.9.8)라고 예찬하면서 선생과의 만남을‘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간 이 단체를 통해 선생이 300여명의 수술을 집도했다. 이 단체와의 무료 진료순회는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등 아시아 후진국을 상대로도 무료의술을 펼쳤다. 2002년 10월 21일 캄보디아 심장병어린이 소마리(9, 여)를 초청하여 무료수술, 대한민국 사랑의 인술을 캄보디아로 보냈다. 2003년 11월 13일부터 17일까지 우리 교민들과 현 주민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심장병 무료진료를 했다. 캄보디아 소녀 킨치아의 수술을 빼놓을 수 없다. 무료진료 차 앙코르와트를 갔다 오는 길에 파랗게 변한 어린 딸을 안고 차를 멈추게 한 여인이 있었다. 어린 딸은 폐동맥이 없는 선천성 복합심장기형이었는데 그냥 놔두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곧바로 한국에 데려와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다.
2001년 3월부터 11월까지‘성동종합사회복지관’에서 수녀님들과 함께 외국인 근로자 무료건강진단을 실시했다. 성수동 공단지역은 영세사업장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으로 불법외국인 근로자와 외국인연수생 등이 많이 일하고 있는 곳이다. 특히 불법체류 근로자들은 신분상의 문제로 변변한 진료조차 받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무료진료활동 때 약사인 부인 김숙자 여사가 조제를 맡아 무료봉사에 나서기도 했다. 정밀검사를 필요로 하는 환자의 경우 한대 구리병원에 내원하여 검사받을 수 있도록 하였고, 8월에는 베트남인의 늑막염 환자를 발견, 수술하기도 하는 등 총 128명에게 무료의료봉사를 했다.
2002.2.24~6.23‘세계선린회 성동외국인근로자센터’에서 무료진료봉사를 실시, 인도네시아 21명, 베트남 26명, 몽골 21명, 이란 2명, 인도 3명, 필리핀 7명, 미얀마 6명, 태국 6명, 중국 5명, 방글라데시 12명, 기타 4명 등 총 113명에게 한대 구리병원에서 무료진료를 했다.
또 하나 언젠가부터 장흥군민들이 자랑하는 의료인으로 통하고 있다. 장흥군내 각 마을 이장들에게 가정이 어려운 심장병어린이, 반드시 심장병어린이가 아닌 일반병일지라도 가정이 어려운 사람을 추천해주면 무료의술을 펼치겠다는 안내문을 보내는 등 마음이 담긴 성의를 보인 결과, 몸이 아프면 1차적으로 선생과 상의를 하여 해결점을 찾을 만큼 장흥군민들에게 절대적인 의료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무료의료봉사의 에필로그(부부의료봉사, 부자의료봉사 등)
선생은“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의 환자에 대한 의료봉사는 무척 즐겁습니다. 왜냐하면 남을 돕는 것은 바로 자신을 돕는 것이고 자신이 그만큼 행복해지는 것이므로 이보다 고마운 일도 없지요”라고 30여년 한결같이 무료봉사인의 길을 걸어온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언론이 선생을‘인술의 성자’라고 하고 있는데, 다음은 그 실례로 한대의료원 게시판(2001.9.10)에 올라있는 글이다.“최근 지원장의 숨은‘사랑의 실천’이 알려져 주위를 훈훈하게 하고 있다. 지원장은 평소 자신의 환자로‘결핵성농흉’치료를 받아온 베트남 근로자 웬탕용(24, 남)씨가 병색이 악화되어 수술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치료비 문제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선뜻 수술비 전액을 대납하기로 약속하고 수술을 시행, 생명의 불씨를 살렸다.”
무엇보다 실천적인 선생의 무료봉사는 부부봉사와 함께 아들까지 대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오늘날 선생의 의료봉사가 있기까지는 부인의 절대적인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인생에 있어 때론 어머님 같기도 하고 때론 누님 같기도 한 부인은 내조 차원을 넘어 가능하면 선생이 진료봉사를 나갈 때 두 팔을 걷어붙이고 따라나서 약조제봉사를 펼치고 있다. 거기에는 철저한 신앙심이 밑받침을 해주고 있다. 선생은 혼배성사 때문에 성당에 나가기 시작, 40여 년간 성당에 나가고 있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부부이다.
무료의료봉사는 아들에게까지 대물림 하고 있다. 아들 赫俊은 치과의사로서 아버지에 이어 의술의 길을 걷고 있다. 매년 의료팀에서 라오스 ․ 우즈베키스탄 등지로 봉사단원을 파견하는데 여기에 동참, 지구촌 무의촌을 찾아가서 의료봉사에 헌신하고 있다. 물론 이 또한 명문가에서 시집 온 자부 변지원의 헌신적인 희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딸 秀仁은 서울 은광여고 재학 중에 독일로 갔는데, 영재들이 다니는 김나지움에 아무런 특혜 없이 독일학생들과 동등한 조건으로 들어가 아주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국내에서 최초로 독일에서 실내디자인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대 공대 박사과정에 있고, 대학강사로 있다.
이채롭게도 의대교수이면서도 복지사업을 유용하게 적용하기 위해 경영대학원을 마친 선생은“퇴임 이후에도 가능하면 무료의료봉사활동을 펼치고 싶다”고 하면서“독일엔 국가차원의 복지제도가 체계적으로 잘 되어있어 부러움을 가졌습니다. 제가 초기 의료봉사시절 복지가의 후원이나 개인적인 지원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한계와 낮은 효율성에 대한 많은 안타까움이 있었어요”라고 술회했다. 이는‘생산적 복지’로 일컬어지는 복지사회로의 걸음마를 시작한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 동안 선생이 겪었을 고민의 무게가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은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의료행위를 필요로 하는 모든 대상과 의료 수혜의 적절한 조치, 또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의료복지와 정책에 관련된 일을 수행해보고 싶다고 했다.
회갑연 대신 어려운 환자 돕기 행사 개최(2001.5.31)
‘한국일보’의‘살롱’란에 위 제목으로 실린 글의 일부를 인용했다.
회갑연도 마다한 참 인술의 실천가가 있다. 그는 후학들이 마련해 준 회갑연을 정중히 사절하는 대신 소외되고 어려운 심장병환자들을 돕기 위한 후원행사를 정성껏 마련했다. 미담의 주인공은 한양대 구리병원 池幸玉 원장(흉부외과). 지난 20여년간 가난하고 소외된 심장병환자들을 위해 사랑과 봉사의 참길을 걸어온 池幸玉 원장이 최근 회갑을 맞아 가슴 후련한‘깜짝 쇼’를 선보였다.…‘심장병 환자 및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후원의 밤’ 행사는 이렇듯, 소중한 지인들의 뜻을 한데 모아 치러졌다. 김종량 총장은 이날 축사에서‘회갑연을 대신해 이러한 후원 행사를 마련한 池幸玉 원장의‘사랑의 실천’정신에 존경을 표한다.’며‘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뜻깊은 일이며 이 숭고한 정신을 함께 나누자’고 말했다. 池幸玉 원장은‘남을 돕는 것은 바로 나를 돕는 일이라는 철학이 지난 20여 년 동안 가난하고 소외된 심장병 환자들을 위해 무료진료와 수술을 하게 된 원동력이었다’며‘남은 시간도 보다 많은 사람에게 의료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환자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 후원행사 추진위원회의 한 관계자는‘당신의 화려한 회갑연보다는 가난한 심장병환자들 및 소외받는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한 후원행사의 길을 택하신 池원장의 사랑의 실천은 우리의 마음속에 참스승의 가르침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선생의 인술론. 세계 의술사에 빛나는 의술들
‘의사는 어떠한 경우라도 환자를 떠나서는 안 된다.’이것이 선생의 절대적인 인술론이다. 이를 입증하는 예가 있다. 2000.9 한양대 서울병원 흉부외과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심한 승모판막폐쇄부전증으로 폐울혈이 있어 온몸에 심한 부종이 있는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다. 환자의 상태는 매우 위급했다.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었다. 그 당시는 의약분업에 의한 갈등으로 의사들이 파업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 정부와 대치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어느 병원에 가더라도 심장수술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는 선생은 흉부외과 레지던트와 간호사들에게 수술을 도와 줄 것을 부탁했다. 다행히 그들도 흔쾌히 응해주었다. 파업을 찬성하는 이들에게 질책을 받을 각오를 하고 파업 도중에 응급수술을 실시, 인공심폐기를 이용한 승모판막을 인공판막으로 대치해주는 수술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미국과 독일에선 제일 인기가 높지만, 한국에선 거의 3D 업종으로 취급받는 흉부외과 의사가 된 것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는 선생은 세계 의술사에 기록될 만한 의술을 펼쳤다. 그 중 하나가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800g짜리 환자의 성공적인 수술이고, 1992년 폐결핵으로 호흡이 곤란할 만큼 좁혀진 32세 여자환자의 기관지를 7.5cm 절제, 다시 이어주는 대형 기관지 재건수술이 그것이다. 현재까지 외국에서 기관지 절개수술의 경우 6.5cm가 가장 길다. 그리고 0.85포인트의 심장판막대치술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성적이다.
다음은 선생이 개발한 것들도 있다. 독일에 있을 때다. 심장수술 전 인공심폐기를 장치할 때 대동맥의 압력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 인공심폐기를 장치하는 크램프와 동맥캐놀라를 한 치의 오차 없이 동시에 열고 끼우기가 결코 쉽지 않아 매번 어려움에 처하곤 했다. 이를 위해 선생이 개발한 게 요시땅 해서 원 투 쓰리, 그 쓰리 타임에 맞춰 동시에 열고 끼우도록 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독일 흉부외과 의사들이 이 방법을 쓰고 있으며, 이는 심장수술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이고, 다음은 사소한 것이라도 절대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다는 실례이다. 또한 링겔줄의 스크루가 옛날엔 양철로 줄 중간에 꼬부라져 있었기 때문에 환자가 잡아당기면 풀어져버리곤 했는데, 줄을 한 번 돌려서 사용하도록 개발, 고정이 되도록 했다.
언론 보도 및 상훈, 건강 10訓
앞서 소개한 바대로 독일 텔레비전에 2차례 전국적으로 방영된 것을 비롯, 한국에서도 KBS-TV에 방영되었을 뿐 아니라‘조선일보’․‘동아일보’․‘한국일보’등 국내 주요 일간지에 미담기사로,‘주간신문’(2004.6.24),‘인물포커스’, 사단법인 국민화합운동연합에서 발간한 월간지‘국민화합’표지인물 및 6페이지에 걸친 탐방기사, MBC 라디오에 출연 의료관련 신문이나 잡지 등에 100여 차례 이상 실렸다.
수상이 선생의 삶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약력난 이외에도 셀 수 없는 표창과 공로패, 감사장 등이 있다.‘장흥신문’(2001.5)의 사설에“지교수가 보여준 그 인술의 정신이야 말로 바로 히포크라테스 정신을 계승하고 슈바이처의 정신을 실천해 온 사랑의 인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교수의 이 사랑의 인술은 곧 우리 장흥군민의 긍지이기도 하다”라고 선생의 숭고한 그 정신을 예찬하고 있다.
선생은 의사로서‘健康 10訓’―무공해한 음식(자연식 ․ 채소) ․ 물 ․ 공기를 취할 것. 담배 ․ 술 ․ 소금 ․ 설탕 ․ 기름기 음식은 가급적 피할 것. 마음에 평안을 찾고 적당한 운동을 할 것―을 내놓았다. 동기간인 덕규 ․ 문자 ․ 행수가 각자의 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 이상 한국인물연구회, <<한국현대인물열전33선>>(2005)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