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형제,자매여러분 건강하시죠? '유령 청년부' 이상복입니다. 청년부의 성전에 이방인이 발들이기 부끄러워 눈팅(?)만 하다가 다녀간 흔적을 남깁니다.
이 게시판에는 재미있고 즐거운 내용이 게재돼야 맞을 것 같은데.. 암튼 올려봅니다.
작년겨울이었던가요, 경기도 남양주시에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올드 청년부 분들은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경춘국도와 양평국도가 갈리는 도농검문소 부근에 한동안 방치됐던 공장터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고층아파트가 들어섰구요. 그 흉물스럽던 건물이 무엇이었을까 오랫동안 궁금해하던 참에 작년말 아예 직접 취재에 나선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선 환경에 무지했던 산업화 시기에 많은 피해자를 양산시켰고, 지금도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저주받은 터' 였더랍니다. 유독 취재이후 맘이 불편했던 기억이 남은 '원진레이온' 이야기를 청년부 가족들께 들려드립니다. 내용들은 월간지에 게재된 내용들로 기사체라 읽기에 거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해해주시길..
잊혀지면서 끝나지 않은 악몽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중독 86명 死亡 … 생존 근로자 816명 ‘신음’
경기도 남양주시 도농동 1번지 일대에 병풍처럼 들어선 B아파트 단지. 이곳은 14만 7천평 부지에 20층 이상의 고층 아파트 4개 단지, 총 5천 7백여 세대가 모여 살고 있는 대단위 아파트촌이다. 최근 이곳은 집값이 많이 뛰었다. 복선전철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중앙선 도농역과 가까워 이른바 ‘역세권 수혜’를 봤기 때문이다.
회색 구름이 무겁게 깔린 지난달 10일, 미디어는 46번 경춘국도에서 중앙선 철도를 가로질러 B아파트로 통하는 육교위에 섰다.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재잘거림, 시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주부들의 느긋한 뒷모습은 여느 주거지역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이 평화로운 풍경을 한 궤적 걷어내면 바로 이곳에 죽음의 음산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정확히 43년 전인 1962년 11월, 도농리 1번지는 대형크레인과 불도저가 황량한 벌판을 다지고 있었다. 무려 15만 4천평 부지에 국내 최초의 화학섬유 공장 ‘흥한화섬’이 들어서고 있는 광경이다.
24살의 청년이 굴지의 섬유공장에 입사하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66년, 위용을 드러낸 이 거대한 공장은 높다란 굴뚝에 납빛 연기를 내뿜으며 마술처럼 인견사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논밭이 즐비했던 도농리에 우뚝 선 흥한화섬은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한국의 산업화를 상징하는 듯 했다.
전국 각지에서 이 공장에 취업하겠다는 사람이 몰려왔다. 심지어 뒷돈을 줘야 들어갈 수 있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설립 당시 하루 15톤의 레이온을 생산하던 이 공장은 몇 차례 경영난을 겪으면서도 몸집을 불려, ’80년에는 무려 50톤의 레이온을 만들어내는 굴지의 섬유공장으로 변해 있었다.
그 사이 상호도 흥한화섬에서 세진레이온으로, 다시 원진레이온으로 개명했다. ’79년 군대를 제대하고 강원도 횡성에서 무작정 상경한 박종림(당시24세, 現 50세)씨는 벽에 붙은 ‘원진레이온 구인광고’를 보고 신이 났다. 당시만 해도 원진은 ‘월급쟁이’가 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터였다.
박씨는 그 길로 원진 노동자가 됐고 일주일간 입사교육도 받았다. 그는 당시를 “주민등록 사진이 흑백에서 칼라로 바뀔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취업과 동시에 아예 막자골(現. 도농동 일대)에 둥지를 튼 박씨는 두해가 지난 ’81년 지금의 아내 이상옥(49)여사와 결혼도 했다.
입사 당시 그가 받은 초봉은 8만원이었고, 결혼할 당시는 17만원까지 올랐다. 함께 입사한 동기들이 일주일도 안 돼 원진을 떠날 때 꿋꿋이 남아 일한 대가였다.
“그렇게 안 좋은지 몰랐고 얘기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왜 일부 사람들은 그토록 선망하던 직장을 며칠 만에 포기해야 했을까. 레이온은 목재펄프를 알칼리셀룰로오스와 이황화탄소의 화학적 반응을 통해 걸쭉한 방사액으로 변형시키고, 이를 실의 형태로 굳혀서 만든다.
원진은 이처럼 직접 실을 뽑는 방사과와 원액과, 처리정련과 등의 몇몇 부서가 있었다.
박종림씨가 입사해 만 6년 가까이 일한 곳도 방사과다. 박씨의 표현대로라면 “구수하고 좋았던 냄새”가 났다고 하지만 그가 들이 마신 것은 레이온 제조공정 중에 발생하는 치명적 CS2 (이황화탄소) 가스였다.
“실을 감는 포터에 ‘실걸이’를 하면 포터가 빠르게 돌면서 열이 발생하거든요. 찬물(원액추정)에 위 아래로 담기며 돌아가는데, 유리 대롱에 물(약품)을 부으면 실이 딸려가며 김(이황화탄소 가스)이 올라 와요. 너무 더워서 마스크를 쓸 생각도 못했죠. 거기 일한사람 모두 마스크를 안 썼어요. 내 딴에는 그 냄새가 구수하고 좋았는데 그게 그렇게 안 좋은지 몰랐고 회사에서 얘기해 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그러나 함께 일하던 동료들 중에 덩치 좋고 건장한 체격의 그가 1년도 지나지 않아 체중이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일을 끝내고 나오면 눈이 따끔거렸고 더러 소변에서 피가 섞여 나오기도 했다.
아침에 작업복에 넣어간 동전은 집으로 돌아올 때 새카맣게 부식돼 있었다. 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함께 신혼을 보내고 있던 이상옥 여사는 “결혼하고 보니 남자허리가 25인치일정도로 말라있었고 퇴근하고 남편이 돌아오면 몸에서 가스냄새가 역하게 났다”고 말했다. 나목처럼 그렇게 버티던 그는 결국 팔이 저리고 아픈 증상이 나타나더니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맥없이 쓰러지고 만다.
독(毒)가스에 몸이 망가지다 … 목숨과 바꾼‘산재보상금’
건강한 강원도 출신의 청년은 이유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원진레이온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박씨와 유사한 증상을 보이거나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돌연히 숨지는 방사과 동료들도 발생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일터가 죽음의 독가스를 내뿜고 있는지 몰랐다.
그는 망가진 몸을 이끌고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갔다. 소일로 농사를 지으며 건강도 조금씩 회복됐지만 유독가스에 상당기간 노출된 신체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손상된 상태였다.
4년 동안 요양을 취하던 그는 결국 일을 찾아 무작정 구리로 돌아왔다. 남양주, 구리일대는 그가 상경해 청년기를 보낸 최초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10년 동안 청소차를 운전하며 생계를 꾸려나간 박씨는 원진레이온에 대한 기억을 그렇게 조금씩 잊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날 그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원진레이온에 근무했던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건강검진이 있다’는 통보였다.
그는 검진을 통해 ‘이황화탄소 중독자 판정’을 받았다. 본지가 그를 만난 건 지난달 중순, 도농동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세워진 원진녹색병원에서다. 원진병원은 박종림씨처럼 산업재해자 판정을 받은 원진 근로자들이 목숨과 바꾼 보상금을 모아 설립한 산재 전문병원이다.
그는 6년전 혈관 장애가 발생하면서 중풍으로 쓰러졌다. 이후 좌측 신경이 모두 마비돼 현재는 목발에 의지해 거동하고 있다. 때 없이 찾아오는 두통과 기억상실은 지금도 그를 괴롭히고 있다. 얼마 전에는 복부 부위에 염증이 발생해 제거수술을 받고 투병중이다.
원진병원에는 지금도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고 있는 67세의 김항씨와 대 수술을 받고 목을 드러낸 어철우(70)씨, 뇌경색으로 수술만 두 번을 받은 이수남(61)씨 등 많은 원진노동자들이 후유증에 시달리며 고통스런 생을 이어가고 있다.
‘저주받은 기계’가 한국에 들어온 기구한 사연
1960년 일본 동양레이온의 자하공장. 일본의 대표 섬유화학기업 토레이社의 전신이었던 ‘동양레이온’ 공장에 40여명의 기술자들이 현지 기술자들에게 기술을 전수 받고 있다.
이들은 흥한화섬에서 파견된 한국인 엔지니어들이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62년 흥한은 동양레이온과 계약을 체결하고 이들 시설의 한국행을 결정한다.
그러나 이 시설들은 동양레이온에서 6년간 24시간 풀가동된 구식기계로, 그들조차 채산이 맞지 않아 사실상 폐기처분을 결정한 고철에 불과하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범죄, 종군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며 한일 국교정상화를 전제로 ’62년 일본 외상과 ‘전후배상’ 문제를 흥정하고 있었다. 결국 일본 외상과 김모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회담을 통해 ‘무상원조 3억 달러’를 약속받는다.
그리고 정확히 열흘이 지난 어느 날, 친일파 조선 재벌이자 흥한화섬의 박흥식 대표는 이미 감가삼각이 끝난 레이온 제조기들을 36억엔이라는 고액을 주고 설비인수계약을 맺는다. 전후 배상 품목의 하나가 된 레이온 설비가 이황화탄소 중독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동양레이온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애물단지’가 한국으로 건너가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 기계들은 도농리 흥한화섬 신축사옥에 앉혀졌다. ’66년 봄 준공을 마친 공장은 하루 15톤의 인견사를 뽑아내며 근로자들을 죽음의 현장에 가둬놨다. 물론 어느 누구도 본지가 만난 박종림씨처럼 이황화탄소의 위험을 알지 못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몸이 나빠지기 시작했던 ’81년, 원진퇴직자 중 최초의 직업병 환자가 나타났다.
9년전 사망한 홍원표씨는 직업병 인정기준도 없던 당시, 국립의료원에서 이황화탄소중독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원인모를 병을 얻어 일을 그만둔 많은 퇴직자들이 유사한 고통을 호소했고, 특히 방사과에 근무했던 노동자들은 거의 똑같은 증상을 보이며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고 객지에서 운명을 달리 했다.
산업재해의 경종은 울렸지만‘희생이 너무 컸다’
이들은 80년대 후반 ‘직업병인정투쟁’을 전개하며 산업재해에 대해 무지했던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원진 퇴직자들은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 ‘원진직업병대책위원회’, ‘원진레이온직업병피해자및가족협의회’를 결성하고 정부를 상대로 지루하고 고단한 싸움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국은 이들의 목소리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당시에도 산업재해란 용어를 사실상 금기시하던 군사정권의 잔영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원진 피해자들은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과 함께 회사정문 앞에서 무기한 항의농성을 시작했다. 야당 당사와 신문사들을 찾아다니며 비참한 자신들의 사정을 호소도 해봤다. 그러나 이렇다 할 진전이 없자 급기야 노동자들은 ‘올림픽 성화 봉송 저지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올림픽을 한 달 앞둔 9월, 성화봉송 주자들은 원진레이온 정문 앞의 경춘국도를 통과할 예정이었다. 리어카를 동원해 성화 봉송을 막고 자신들의 억울함을 전 세계에 폭로하겠다는 ‘힘없는 자’들의 처절한 계획은 은밀하고도 치밀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결국 이들의 시도는 성공했다. 사실을 미리 알아 챈 정부는 국제적 망신이 두려워 직업병 유소견자에 대한 검진 등을 포함해 피해자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기로 약속했다. 이로써 최초 35명, ’90년에는 110명이 넘는 원진피해자가 직업병 환자로 인정받았다.
이 과정 속에도 많은 원진 퇴직자들의 병세가 악화됐고 더러는 고통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죽음을 택해 파문이 확산됐다.
도농리 일대를 황폐화시킨 원진 …“견딜 수 없이 냄새가 났다”
물론 이런 와중에도 원진레이온은 사실상 24시간 가동을 멈추지 않았다. 원진은 인조섬유가 아니라 저주받은 직업병 환자를 끊임없이 양산하고 있었다.
당시 거주자의 증언에 의하면 “중앙선 도농역 주변도 사람처럼 중병을 앓았다”고 했다. 원진레이온 주변의 나무들은 푸른빛을 잃고 시들어갔고, 지붕에 세워둔 안테나는 반년도 지나지 않아 심하게 부식됐다. 내구연한이 20년인 중앙선 전기철선은 유독 도농역 부근에서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끊어졌다.
도농동에서 서른아홉 살부터 살아온 백낙천(72) 할아버지도 이런 사실을 기자에게 확인해 줬다. 백씨는 36년째 공장 부근에 거주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원주민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아파트가 들어선 공장 터를 가리키며 “서풍이 부는 날은 아예 코를 움켜쥐고 밖에 나가야 했다”며 진저리쳤다.
백 씨는 “날이 흐려 저기압인 날은 원진에서 견딜 수 없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며 “공장에서 일하러 들고나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야 어떻겠냐며 그저 참고 살아왔다”고 말을 흐렸다.
한편 ’68년부터 계속된 경영난과 산재 환자 급증에 따라 원진은 ’79년 산업은행 법정관리에 들어간다. 이후로 예편한 군 장성들과 산업은행 간부들이 번갈아 살림을 떠맡았지만 원진의 부실한 재정은 그들의 노동자들처럼 중병을 앓고 있었다. 결국 ’93년 5월, 원진레이온 정문에는 ‘휴업공고’가 나부낀다.
30년 가까이 가동되던 레이온 설비들은 많은 희생자들을 뒤로한 채 그렇게 허망하게 멈춰 섰다. 이때까지 모두 1만 4천여 명의 근로자가 원진을 거쳐 갔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유해산업이 인간의 생명에 얼마나 큰 위해를 가하는지 절실하게 배웠지만 이후 무고한 피해자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나 혹독한 것이었다.
일본→한국→중국 … ‘지금도 돌고 있는 죽음의 기계’
이듬해 산업은행은 파산절차를 밟고 원진레이온의 모든 채무와 채권을 실사해 채무변제에 필요한 동산과 부동산을 남김없이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원진에 남은 것은 낡을 대로 낡은 방사기 설비와 을씨년스런 공장부지가 전부였다.
산업은행은 이 기계에 고철 값을 매겨 경매에 부쳤다. 모두 3개 회사가 응찰했고 가장 후한 값을 써낸 ‘나전모방’이 54억 원에 방직기, 직기, 레이온 생산설비 일체를 낙찰 받았다. 하지만 나전에게 이들 설비는 애당초 단순한 ‘고철’이 아니었다. 나전은 국제입찰 자격이 없었던 중국 단동시 국영 화섬창에 4억의 웃돈을 얹어 이들 시설을 넘기기로 이미 의견이 오간 상태였다.
일본이 버린 공해 산업이 가난한 전후 한국으로 떠넘겨져 수많은 중독자를 피폭시키고, 그 시설이 한국보다 산업화가 더딘 중국으로 팔려나가는 희극과 같은 일이 자행되고 있었다. ’95년 가을부터 나전모방은 공장상부 벽을 뜯어 30여년 가까이 어둠속에 있던 장비를 깨끗이 분해해 상자에 담아 날랐다.
우리 기술자들이 일본에 가서 그랬듯, 이미 중국노동자들은 공장에서 합숙하며 기술을 전수받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는 공해 장비의 가장 큰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가해자가 되는 일을 자처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이를 알아차린 원진의 퇴직노동자들은 분노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중국대사관도 방문해보고 명동성당에서 항의집회를 열어 무지한 중국도 달래보았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되돌아 온 것은 “내용은 알지만 지방정부가 추진하는 일이라 중앙정부로는 간섭할 수 없다”는 공허한 답변뿐이었다.
결국 나전모방은 이 ‘저주받은’ 시설들을 중국으로 수출하는데 성공했다. 원진재해자협회의 한 관계자는 “최근 중국을 다녀 온 신뢰할 만한 관계자가 아직도 원진 기계의 일부 부품이 중국에서 가동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관영산업 체재 속에 낙후된 중국의 환경인식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사지로 내몰지 가늠할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끝나지 않은‘원진레이온’… “제2의 원진은 많다”
산업은행은 ’96년 원진레이온 청산절차의 마지막 단계로 도농공장 부지와 용인공장 1만여 평을 건설사 부영(주)에 3천 7백억을 받고 팔았다. 들판이 전부였던 도농부지는 세월이 흘러 서울 근교의 우수한 주거지역으로 값이 매겨졌다.
이 돈은 원진레이온이 그동안 진 빚을 청산하고도 1천 6백억이 남았다. 법에 따라 전액 국고로 환수될 예정이었지만 원진 피해자들의 요구에 따라 산업재해 전문병원(現 녹색병원 서울, 구리)설립기금에 110억원, 추가 위로보상금 조성에 96억이 쓰였다.
탄식과 분노로 점철된 원진 노동자들의 싸움은 한국 사회에 ‘산업재해’란 개념을 선명히 남긴 채 그렇게 시간 속에서 잊혀갔다.
옛 원진레이온 사옥은 아이들 사이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퍼질 만큼 흉흉한 몰골로 방치됐다. 부영건설은 이 부지를 단숨에 헐고 대나무처럼 고층아파트를 세웠다.
이곳은 기반공사가 한창이던 지난 ’99년 ‘토양오염 의혹’이 제기돼 정밀검사가 실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10월 아파트 입주는 순조롭게 끝났다.
원진병원에서 주택가로 500M 떨어진 구리시 인창동의 한 상가건물 2층, 원진산업재해자협회. 50대에서 백발이 성성한 70대의 노인들이 돋보기를 쓰고 붓글씨를 배우고 있다.
사무실 한편으로는 천여 명의 얼굴이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반명함판 크기로 빼곡히 들어찬 사진들은 원진레이온에 근무하다 산업재해를 입은 사람들의 면면이다. 몇몇 사진들에는 검은색 빗금이 쳐져있고, 그 아래 ‘사망 ○월 ○일’이라고 적혀 있다.
협회의 집계에 따르면 현재 원진레이온 사건으로 직업병을 판정받은 사람은 총 913명으로, 이중 86명이 사망하고 816명이 요양 중이다. 단지 11명만이 이황화탄소의 피폭에서 벗어났을 뿐이다.
‘원진레이온 사람들’을 돌보고 있는 정호태 사무국장은 “원진 피해는 오늘은 멀쩡하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고, 식물인간이 되기도 하는 현재 진행형 재해”라고 말했다.
정 국장은 “이황화탄소 중독은 신경 계통에 마비를 불러오거나 혈관부분에 문제를 일으켜 예측을 못하는 죽음을 맞게 하고 있다” 며 “급작스럽게 발병하거나 50대 초반에 급사(急死)해 한 가족의 평화가 깨지는 경우가 가장 안타깝다”고 말했다.
현재 요양 중인 원진레이온 피해자들은 대부분 50세~70세의 연령층을 형성하고 있다. 시간이 원진의 악몽을 서서히 과거형으로 만들고 있지만 산업의학 전문가들은 “지금도 제2의 원진은 얼마든지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취재/ 이상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