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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이익 삶과 사상을 따라]14. 성호의 국방론-경기일보 20130429 보도자료 / 성호서세250주년 행사
2013/09/10 17:17 http://blog.naver.com/seonghoeeik/40196888154 |
문무 균형ㆍ애민사상 밑바탕한 ‘전쟁 억지’ 국방력 강화 역설
성호는 우리나라 전통의 청야(靑野)전술에 따른 산성(山城)을 중심으로 한 수성론(守成論)을 강조하였으며 산성이 있는 곳에 농원을 조성하고 소나무, 전나무 대신 과실수(果實樹)를 중심으로 식재하여 평상시에는 백성의 생활에 도움이 되고 유사시에 백성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급자족의 방안을 마련하도록 주장하였다. 사진은 북한산 중성문. |
장용영의 야간 군사훈련 |
이러한 구조 속에서 군포의 징수가 관리들의 사리사욕에 악용되어 수탈적 형태로 이루어지게 되면서 백성은 극심한 폐해를 겪어야 했다. 성호는 이러한 사회적 부조리가 일반 백성이 향군(鄕軍)으로 종사하면서 또 다른 군사인 중앙군(中央軍)을 위해 군포를 바치게 됨으로써 초래되는 이중부담의 구조 자체가 문제라고 판단하여 향군과 중앙군의 독립적 운영을 제안하였다.
무인 양성 교육기관 무학(武學) 창설 …
체계적 교육ㆍ평가 통해 엘리트 지휘관 육성 제안
軍布 부조리 차단 향군ㆍ중앙군 독립적 운영
중앙군은 급료로 충당하고 향군은 농번기엔 생업
농한기에 군사훈련 ‘전통적 병농일치’ 주창
청과 국경분쟁보다 일본의 침략을 더 중요시…
청 우호국 인식은 성리학 중화주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지만 국경 영토주권 간과한 점은 문제
즉 둔전(屯田)을 다시 바로 세워 중앙군의 급료로 충당하여 향군이 경위(京衛)에 간여하지 않도록 하고 향군은 농번기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농한기에 군사훈련을 하는 전통적인 병농일치를 구현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중앙군과 향군의 분리라는 측면에서 성호의 병농일치 사상은 반계 유형원의 복고주의 경향의 병농일치와는 다른 측면을 갖고 있으며, 정조대에 이루어진 장용영의 설치에 따른 둔전제 실시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또한 군비(軍備)에 있어서 성호는 시대를 앞서가는 제안을 내놓는다. 병기제작의 표준 제작 지침서를 마련하여 왕부 즉 의금부에 비치하여 이를 바탕으로 무기를 제조하여 표준화된 병기 제작을 실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표준화는 산업사회의 주요 특징으로 부속품의 규격 및 재질을 통일하고 이로 인해 부속품의 호환성(互換性)을 확보함으로써 집중적인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하므로 성호의 사고에 근대성을 부여할 만하다. 이와 더불어 병기 제작자 실력 여부에 따라 현대적 성과급제를 도입하고 제작 책임자의 성명을 새겨 넣는 실명제를 제안하였다. 성과급제와 실명제는 무기 제작의 질을 높이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위)홍이포, 아래) 사무라이 일본도 |
성호는 산성이 있는 곳에 농원을 조성하고 소나무, 전나무 대신 과실수(果實樹)를 중심으로 식재하여 평상시에는 백성의 생활에 도움이 되고 유사시에 백성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급자족의 방안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수성론은 향토방위체제 마련과 함께 다산 정약용의 민보론(民堡論)의 형성에 일정부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성호는 해박한 지리적 지식을 바탕으로 춘천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방어전선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즉 춘천은 지리적 요새로서의 요건을 갖춤과 동시에 성호가 수성을 위해 가장 중요시했던 자급자족을 위한 비옥한 들판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전통적인 피난처로 활용되었던 산꼭대기나 강화도와 같은 외딴섬과 달리 명령체계의 단절을 피할 수 있는 교통의 요건도 갖추고 있었다. 이에 국가가 위기에 처했던 고종대에 들어서 실제 춘천에 이궁(春川離宮)이 설치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청나라가 몰락할 것이며 그들이 만주로 복귀하게 되면 국경분쟁이 초래될 것이라는 긴장은 성호의 국방론의 배경이 되었지만, 실제 성호의 관점은 당대의 논란과는 사뭇 다르다. 성호 역시 청나라의 사치와 향락의 풍조는 결국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견하였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청과의 국경분쟁이 아니라 일본의 침략이었다.
서양과도 원활한 소통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무기 및 축성 등 더 뛰어난 무비를 갖춘 상황에서 일본 국내 정세가 안정되고 통일국가가 이룩되면 서양의 세력을 등에 업고 우리나라를 재차 침범할 우려가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성호는 청국을 분쟁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병을 보내줄 수 있는 우호국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는 성리학 중화주의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었다.
성호는 현실적으로 강력한 국방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역사적 학습을 통해 익힌 사대교린의 실익(實益)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대를 하는 것이 마음으로부터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힘이 약해서 할 수밖에 없다는 실리 외교적 입장을 견지하였다고 하더라도 나라의 국방을 강대국에 의존하기 위해 청과 국경지역의 영토주권을 간과한 점은 비판의 여지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성호 이익의 국방론은 애민사상을 바탕으로 한 경세적(經世的) 측면에서 구현되었으며 문무의 균형 잡힌 사고방식을 토대로 하여 단순한 정책 나열이 아닌 사회적 관계 및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나아가 국제관계를 고려한 정책의 제안이라는 사실에 성호의 실학자적 면모가 드러나는 또 다른 분야로 평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성호의 국방론의 생명력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소개하며 마치고자 한다. 성호는 당시 병서의 종류가 너무 많다고 지적하면서 중요한 내용만을 취합하여 한 권의 무서(武書) 경전으로 만들 돼 책의 제목을 ‘지과경(止戈經)’이라 명명할 것을 제안하였다.
‘지과경’의 ‘지(止)’자와 ‘과(戈)’자는 무(武)자의 파자(破字)로서 성호는 모든 무비 즉 국방이 갖는 목적과 명분은 전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쟁을 그치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무비의 경전이 추구해야 하는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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