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英中, 한국독립의 관문을 열다
◇ 카이로 선언/정일화 지음/568쪽·선한약속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장제스 중국 총통이 모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방안을 협의하기 위한 이 회담의 결과로 나온 카이로선언에는 “일본이 폭력과 야욕으로 점령한 모든 영토로부터 추방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연합국이 처음으로 일제로부터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 책에는 카이로 선언이 나왔던 과정과 각국의 역할, 카이로 회담 이후 국제정세 변화와 한국의 독립 과정이 소개돼 있다.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 독립에 관한 조항은 선언문 초안에서부터 들어가 있었다. “한국을 적절한 순간에 독립시킨다”고 명확히 규정한 이 조항은 선언문이 수차례 수정을 거치는 중에도 확고하게 살아남았다. 선언문 초안을 작성했던 사람은 바로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 저자는 이 책에서 그의 여러 업적을 밝히며 그를 한국 독립의 발단을 만들었던 카이로 선언의 숨은 주역 중 한 명으로 소개한다. /이새샘 2010-03-06
한국 ‘즉각 독립’ 보장 안한 카이로 선언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왼쪽)와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오른쪽)는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배, 전쟁과 분단으로 이어지는 우리 근대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다.
1943년 11월 카이로 ‘3거두 회담’의 실제적인 주역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였다. 중국의 장제스 주석을 ‘3대 거두’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루스벨트였다. 루스벨트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있기까지 장 주석 영도 아래 중국이 근 5년간 홀로 일본과 전쟁을 했으며,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뒤에도 일본 육군의 반 이상을 중국 전선에 묶어둔 공적을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후 아시아 문제를 다루는 회담에 아시아의 지도자가 참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루스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아시아 문제 처리를 위해 중국이 중요한 몫을 담당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일본을 완전 무장해제시킨 다음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안정되고 민주적인(친서방적인)’ 중국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을 ‘4대 강국’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의 사기를 높이는 것도 고려한 셈이다. 처칠은 중국을 이렇게 치켜세우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듯하나, 루스벨트의 구상을 거역할 의사는 없었을 것이다.
카이로회담에서는 한국 문제가 주요 의제도 아니었으며, 논의하는 시간도 길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선언문에 담을 한국 독립의 시기를 두고 초안이 몇 번 고쳐졌다. 11월24일 제시된 미국의 초안에는 ‘가능한 한 가장 이른 시일’(앳 디 얼리스트 파서블 모먼트)로 돼 있었으나, 다음날 루스벨트는 이것을 ‘적당한 절차에 따라서’(앳 더 프로퍼 모먼트)로 고쳐서 제출했다. 이것을 영국이 ‘적당한 절차에 따라서’(인 듀 코스)로 문구를 바꾸자고 한 것이다.
루스벨트의 첫번째 초안은 한국을 독립시키는 것이 지상목표임을 밝힌 것이나, 수정안은 독립에 앞서 다른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영국의 안은 루스벨트의 수정안을 좀더 멋진 다른 표현으로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리 멋진 표현으로 둘러댔지만,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지만 즉시 해줄 수는 없다는 저의를 임시정부의 어른들은 즉시 간파했다. 충칭에서는 한인들이 여기에 대한 항의집회도 열었으며, 임정의 간행물들도 이 안에 반박하는 글을 실었다.
카이로회담에 참석한 장제스 주석은 그 자리에서 한국은 마땅히 독립돼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 우리의 장래에 지대한 영향을 줄 ‘인 듀 코스’라는 구절의 함축성은 파악하지 못한 듯하다. 미·영 두 나라가 한국의 ‘신탁통치’를 이미 논의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던 것이 명백하다. 충칭 한인사회의 반발을 알게 된 뒤에야 그 함축성을 이해한 중국 당국은, ‘선언’은 이미 발표돼 돌이킬 수 없으니 일단 독립을 보장했다는 점을 들어 임정의 반대를 누그러뜨리려고 설득한 것으로 알고 있다.
중국의 집권 국민당과 국민정부 주요 지도자들은 전후 한국이 즉시 독립해야 한다는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는 임정과 만주에서의 독립군 활동 등을 잘 알고 있었고, 우리의 독립 의지를 깊이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우리에 대한 인식은 전혀 달랐다. 이때 임정이 국내에서 지하활동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는데, 이 점은 미국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임정의 주미 외교대표부의 존재도 알고 있었으며, 미국에서의 활동이 보잘것없었을 뿐만 아니라 미 본토에 있는 한인사회의 대부분과 등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루스벨트는 한국에 대해 상당히 무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국이 일본보다도 훨씬 오랜 독립국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그는 한국 문제를 논의할 때 스페인에 정복당하기까지 독립된 국가형태를 가진 적이 없었던 필리핀 사례를 즐겨 들먹거렸던 것을 여러 기록에서 볼 수 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2010-03-16
‘카이로 선언’ 한국 독립 명시, 이승만과 관계 있나
# 청년 이승만.. 독립외교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외교를 중시하는 것이었다. 국제정치 전문가인 그의 독립외교 노선은 어떤 성과가 있었는가. 이 부분도 지금까지 저평가돼 왔다. 중국의 임시정부와 만주의 무장투쟁이 주로 평가 받았다. 의혈활동과 무장투쟁이 있었기에 외교노선도 빛을 발하는 것이겠지만, 외교가 없이 한국의 독립이 가능했을까. 요즘 새롭게 주목 받는 부분이 이 대목이다.
특히 1943년의 ‘카이로 선언’이 그러하다. 미국·영국·중국의 수뇌가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을 공약했다.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특별히 명시해 놓은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가 한 둘이 아닌데 왜 유독 한국만 명시했는가. 그동안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주창해서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올해 3월 출간된 『카이로 선언:대한민국 독립의 문』의 저자 정일화 박사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의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가 주창했다고 주장했다. 루스벨트의 심복이었던 홉킨스가 카이로 선언의 초안을 작성했고, 이를 루스벨트와 처칠이 약간의 수정을 한 후 완성됐다는 것이다.
유영익 교수는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그들이 알아서 한국 독립 조항을 특별히 넣었을 리는 없다. 아직 뚜렷한 증거는 없는 상태다. 카이로 선언과 이승만의 독립외교의 관계를 밝히는 일이 앞으로의 연구 과제”라고 말했다. /배영대 2010.06.14
한국만 콕 찍어 독립 보장…70년 전 루스벨트·처칠·장제스 그들은 왜
이승만 전문가 유영익 교수가 푼 현대사 수수께끼
“카이로선언, 미국 움직인 이승만 작품”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11월 27일 이집트 수도 카이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총리,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 총통이 전후 국제질서를 구상한 카이로선언을 공동 발표했다. 선언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문구가 포함됐다. ‘한국민이 노예 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과정을 통해 한국을 자유 독립국가로 할 것을 결의한다’고 명시했다.
1943년 이집트에 모인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왼쪽부터). 카이로선언은 한국 독립을 여는 문이었다.
세 차례 편지 보내 루스벨트 설득
제2차 대전 때 한국만 약소 식민국이지 않았다. 수많은 식민지 중 유독 한국을 지목해 ‘노예 상태에 놓여 있다’는 언급까지 보태며 독립을 보장한 배경이 무엇일까. 그것도 가장 높은 단계의 국제협약으로 꼽히는 공동선언에 한국이 등장한 이유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었다.
올해 카이로선언 70주년을 맞았다. 독립 한국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카이로선언의 수수께끼가 풀려나갈 조짐을 보인다. 유영익(77) 한동대 석좌교수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지목했다.
11일 만난 유 교수는 “카이로선언 탄생의 가장 큰 한국인 공로자는 이승만”이라고 주장했다. 국내 역사학계에서 그간 외교독립운동 노선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던 흐름을 뒤집는 발언이다.
유 교수는 “독립운동가로서 이승만은 비록 상하이 임시정부와 하와이 교민사회를 원만히 이끄는 데는 실패했지만 미 행정부를 향한 전방위적인 외교 노력으로 카이로선언을 이끌어내는 숨은 공을 거뒀다”며 “이승만이 1919년부터 45년까지 끈질기게 전개한 외교독립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실속 있는 성과를 거둔 것으로 다시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카이로선언의 외국인 공로자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의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다. 유 교수는 이번 주 초 배포될 신간 『건국 대통령 이승만』(일조각)에서 이승만의 생애와 업적을 새롭게 조명했다.
- 카이로선언의 의미는.
“카이로선언이 없었다면 한국 독립은 아마 요원했을 것이다. 군국주의 일본은 ‘무조건 항복’의 마지막 순간까지 한국을 자신들 영토에 포함하려 했다.”
- 한국 독립 문구는 장제스 총통이 넣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최근의 연구성과를 보면 장제스에게 한국 독립 문제를 먼저 제기한 사람은 루스벨트 대통령이고, 카이로선언 초안 작성자도 루스벨트의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였다. 정일화 박사가 『대한민국 독립의 문, 카이로선언』(2010)에서 밝혀낸 획기적 성과다.”
- 한국 독립 관련 결정적 사료조차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
“장제스는 43년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5일간 카이로에서 열린 회담 도중 한국 문제를 공식 거론한 일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11월 23일 저녁 루스벨트 숙소에 초대돼 루스벨트가 한국 독립 문제를 먼저 거론하자 이에 수동적·소극적으로 찬성했다.”

이승만
일제만행 고발 등 전방위 외교전
- 루스벨트와 홉킨스는 어떻게 한국 독립에 관심을 갖게 됐나.
“그 과정을 이번 책에서 살펴봤다. 당시 국제정세를 되돌아볼 때 루스벨트 대통령이나 홉킨스에게 영어로 한국 독립 의사를 전할 사람은 이승만 외엔 없다. 카이로선언 이전 이승만은 적어도 세 차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다. 1941년 펴낸 영문 저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의 부인 엘리너 여사에게 보낸 사실도 기억돼야 한다.”
유 교수는 카이로선언에 미친 이승만의 역할을 다양하게 재조명했다. 우선 ‘편지 외교’다. 유 교수가 가장 주목한 것은 43년 5월 15일자다. 이 편지에서 이승만은 미국이 1882년 조선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위반해 1905년과 1910년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도록 도운 일을 상기시키면서 동아시아를 시작으로 불행한 사태가 확산된 것은 독립된 한국이 동양 평화의 보루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유 교수는 “아주 잘 쓴 편지다. 5월 26일 루스벨트 대통령 비서실로부터 ‘세밀한 주의’라는 회답이 온 것으로 볼 때 루스벨트 대통령이 봤거나 아니면 적어도 홉킨스가 검토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이 편지에 앞서 펴낸 영문 저서 『일본 내막기』에서도 이승만은 미국이 1882년 조선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무시하고 1905년부터 일본의 한국 병탄을 허용한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일제가 105인사건(1912)과 제암리사건(1919)을 일으켜 한국의 기독교도들을 무참하게 박해한 진상을 폭로했다.
‘백년전쟁’같은 친일논쟁 끝내야
- 외교적 로비는 어떤가.
“이승만은 1942년 한미협회와 기독교인친한회를 결성해 워싱턴에서 활발한 로비활동을 펼쳤다. 대부분 독실한 기독교인들로 구성됐다. 한국 독립을 요청하는 진정서에 서명한 이들의 사회적 지위와 기독교계에서의 영향력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루스벨트와 홉킨스에겐 무시 못할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동영상 ‘백년전쟁’은 이승만을 친일파라 했다.
“언급할 가치도 없다. 카이로선언과 이승만의 역할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백년전쟁’ 같은 불필요한 논란에 마침표를 찍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배영대 2013.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