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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오르지 않더라도 산에 오르는 모든 행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종교적 목적이나, 동식물·지질·지리조사 같은 학술목적의 등산도 있으나, 여기서 말하는 등산은 등산 그 자체에 순수한 목적을 둔 행위로, 산에 오르는 것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고 즐거움을 찾는 행위와 자연미에 대한 심미적 정서 등을 함양하는 문화적 행위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문화적 측면보다 스포츠의 측면이 강하게 작용해서, 높은 산[高山]을 정복하고 그 과정에서의 인간 한계를 극복하는 산악운동과 일반 등산을 구별한다.
옛사람들은 등산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범위 내로 국한하였고, 생존수단을 위한 수렵행위가 고작이었다. 산은 생활의 터가 아니었으며, 미신이나 고대종교의 영향으로 산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우리 나라는 고대로부터 숭천숭산사상(崇天崇山思想)을 지녀왔으며, 여기에서 등산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단군신화에서 단군의 강림은 그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또 우리 나라 산에는 어디를 가든지 사찰이 있다. 이는 산이 심신의 수련장임을 뜻한다. 삼국시대 화랑도의 ‘유오산수무원부지(遊娛山水無遠不至)’는 산을 악마나 공룡의 주거지로 경원하던 유럽의 경우와는 아주 대조적이며, 우리 민족이 일찍부터 산과 가까이 하고 산을 문화의 무대로 인식하였다는 자랑스런 기록이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시조 온조 왕조에는 기원전 30년에 “고구려 동명왕의 왕자인 온조(溫祚)와 비류(沸流)가 부아악(負兒嶽:지금의 북한산 仁壽峰, 또는 용인의 負兒嶽이라는 설도 있다)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비록 택리적(擇里的)인 목적일지라도 2000여 년 전의 기록으로서 유럽과 비교할 때 선각적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132년, 백제의 개루왕 때 산성을 쌓았고, 156∼158년 신라 아달라왕대에는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을 뚫어 개발과 이용을 한 것으로 미루어 이 무렵에 벌써 생활영역으로 산을 가까이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숭천숭산사상을 보여주는 기록으로는 백제 고이왕 10년(243)에 제단을 쌓고 천지산천에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팔관회(八關會)라든가 삼신산(三神山)·오악(五嶽)을 비롯해서 산천은 초복제액(招福除厄)의 근원으로 받들었고, 더욱이 조선시대에 와서 진산(鎭山)의 개념은 도참의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숭산의 구체적인 발로였다.
최남선(崔南善)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이나 ‘백(白)’자와 연유한 민족신앙으로서 산은 우리 민족의 독특한 자연관이었다. 이러한 민족적인 토착신앙 외에도 민속신앙으로도 볼 수 있는 기우(祈雨)·기자(祈子)·초복(招福)을 산신령에 기원하였으니 어쩌면 산이 애니미즘(animism)의 구체적 상징일 수도 있었다.
또한 심미의 대상으로서의 산은 유럽의 경우보다 빨라 조선 초 안견(安堅)을 비롯해서 강희안(姜希顔)·정선(鄭敾)·심사정(沈師正)·강세황(姜世晃)에 이르는 산수화에서 산을 도원경(桃源境)으로 구현하였다. 한편, 삼국시대로부터 산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라 때 최치원(崔致遠)의 유불선(儒佛仙)의 특출한 행각의 장소도 산이었고, 아울러 은신처로서도 널리 이용되었다. 생육신 김시습(金時習)을 비롯하여 맹사성(孟思誠)·정철(鄭澈)·윤선도(尹善道)·김병연(金炳淵) 등이 이룬 해학과 자연구송(自然口誦)과 은둔송(隱遁誦)은 산을 심미적 예술의 대상으로 삼은 좋은 예가 된다.
(1) 근대 이전의 등산
순수한 등산의 효시는 화랑도의 유산에서 비롯되나 그들의 유산처가 신라 전역에 걸쳐 모든 산천이었으므로 어느 산, 어느 봉으로 국한할 수는 없다.
이보다 앞선 723년(성덕왕 22)부터 727년까지 혜초(慧超)가 중앙아시아, 즉 오늘날의 파미르고원·힌두쿠시·아프가니스탄 일대를 구도 여행한 것은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에 상세히 기록, 발표되어 해외등산의 효시로 삼을 수 있다.
이 무렵 승려 무상(無相)의 티베트 고산의 구도순례도 또한 특기할 일이다. 그리고 745년 비록 군사목적이었으나 고선지(高仙芝)가 당나라 장군으로 곤륜산맥을 거쳐 빙설의 힌두쿠시 달코트(4,572m)를 넘은 진군은 한국인이라는 뜻에서 또한 등산사에 기록될 만하다. 고려 말에는 정도전(鄭道傳)이 백두산을 등산한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 이성계(李成桂)가 덕유산 남봉에 제단을 쌓고 기원한 기록과 무학(無學)이 무악(母岳)과 삼각산(북한산)을 오른 것은 도읍선정을 위한 등산이었다. 유람적 등산으로는 세종 때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보현봉(북한산) 등산이 있다.
1463년(세조 9)의 양성지(梁誠之)의 ≪동국지도≫ 편찬, 1481년(성종 12)부터 7년간에 걸친 ≪동국여지승람≫ 편찬, 그리고 1530년(중종 25)의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 등에는 능히 지지(地誌)를 위한 학술등산이 있었을 것이 예상되나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1480년 김일손(金馹孫)의 두류산(지리산, 1,915m) 기행, 1560년(명종 15) 이이(李珥)의 금강산과, 1569년(선조 2) 청학동 소금강 기행, 1640년(인조 18) 이명한(李明漢)·정곤수(鄭崐壽) 등의 청학동 소금강 등행, 1671년(현종 12)의 김창협(金昌協)의 금강산·설악산 등의 기행록인 ≪동유기 東遊記≫, 또한 1686년(숙종 12)의 정시한(丁時翰)의 ≪산중일기 山中日記≫나 1730년(영조 6) 송진명(宋眞明)의 ≪백두산지도≫ 제작 등은 하나의 등산사적인 기록이 된다.
그리고 최근에 알려진 1731년 남하정(南夏正)의 계룡산 등산 등은 기록에 있는 유산 등산이다. 연도가 정확하지 않으나 ≪백두산일기≫로 기록이 보존되어 있는 1740년대의 백두산등산은 어쩌면 최초의 선구적인 집단적 고산등산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어 1764년 박종(朴琮)의 ≪백두산유록≫에 있는 등산은 본격적인 백두산 집단등산이었고, 유지(油紙)를 천막으로 사용하고 하산할 때 불태워 없애는 등 극지법(極地法) 등반의 효시로도 생각된다.
이 밖에도 서명응(徐命膺)의 연도 미상의 백두산기록인 ≪보만재집 保晩齋集≫이 있으며, 1770년 박제가(朴齊家)도 묘향산을 등산한 적이 있다. 백두산만 따진다면 이보다 앞서 1677년 중국 쪽에서의 등산과 1683년에 재차 등산한 기록이 있으나 중국인의 기록이고, 유명한 정계비(定界碑) 설정에 따른 1712년의 등정과, 1753년의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 擇里志≫ 편찬에 따른 전국 산천기행도 등산사적인 기록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김정호(金正浩)의 1860년대의 ≪대동여지도≫ 제작을 위한 백두산을 비롯한 전국 산천답사는 학술목적의 등산으로 평가된다. 1886년(고종 23) 만주 쪽에서 백두산을 올라간 영국인 하즈반드 일행을 비롯, 1905년 을사조약까지 미국·일본·러시아·영국인 등 7건의 학술목적의 백두산 답사와 등정기록이 있다.
이와는 달리 1850년(철종 1) 이상수(李象秀)의 <금강산등정기>가 ≪동국산수기≫에 발표되어 있다. 민족항일기에 들어와서는 서구적 등산기술을 익힌 일본인들이 전국의 산을 오르고 그 중에서도 백두산·관모봉(冠帽峰)·금강산 등을 종주등산 방식에 의해 여러 번 등정하기도 하였다.
(2) 근대의 등산
근대 등산의 역사는 1818년 제랄드형제가 히말라야의 파르기알봉(6,791m)을 등정한 것을 최초로 삼고 있으나, 이때는 측량과 탐사활동이 목적이었다. 순수한 등산은 1833년 영국의 그레함이 두나기봉(7,066m)을 정복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민화를 통해 조선 중엽 이후 밧줄을 타고 암벽에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고전적 암벽등반인지는 확증되고 있지 않다.
근대등산의 표본이랄 수 있는 암벽등반은 1926년 5월 영국인 아처(Archur)와 임무(林茂)가 북한산 인수봉을 첫 등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보다 앞선 기록으로 영국인 아처와 일본에 있던 영국인 매크리(Macrae) 두 사람에 의한 도봉산 만장봉 남벽 초등(初登)이 최초의 암벽등반이라는 이설이 있으나, 초등 기록 발표연도가 ≪영국산악회보≫에 1931년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30년 4월일 가능성이 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1925년 5월 일본인 이야마(飯山達雄)와 임무 두 사람의 북한산 보현봉과 비봉, 그리고 백운대 암벽초 등반을 우리 나라 근대등산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으나, 난이도로 보아 1926년 임무와 아처의 인수봉 초등을 근대등반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어쨌든 1925년 또는 1926년에 걸친 근대적 등반의 시작은 임무·이야마·아처·매크리 등에 의해 개화되었다. 서울 근교 암벽을 차례로 초등등반하면서 1930년대부터는 국내 알피니즘이 광역화하고 금강산암벽·백두산·관모산 등과 북한산의 적설기 초등으로 이행되어갔다. 즉, 새로운 초등등반 대상을 찾아 미등(未登)의 산을 찾았고 암벽등반과 아울러 겨울등산의 초등등반이 시작되었다.
또한 1927년 박석윤(朴錫胤)의 알프스 몽블랑 등산기가 발표되었고, 1920년대에는 한국여성산악부가 설립되었다. 민족항일기에 우리 나라에 와 있던 일본인을 중심으로 1931년 ‘조선산악회’가 창설되었고, 1935년까지 일본인에 의한 근교 암벽 초등이 성행하였으나, 1934년 도봉산 만장봉 등벽을 김정태·엄흥섭이 초등함으로써 새로운 코스에 의한 한국인의 독자적인 초등등반이 시작되었다.
특히 1938년 말부터 태동한 ‘산악인금요회’가 ‘백령회’(회장 엄흥섭)로 결성되면서 양두철(梁斗喆)·주형렬(朱亨烈)·김정태(金鼎泰)·이재수·방현(方炫)·채숙 등이 서울 근교 암벽에서 새로운 코스에 의한 초등에 성공하였고, 적설기등반에서는 1941년 12월에서 1942년 1월에 걸쳐 31일간 마천령산맥을 전산종주(全山縱走)함으로써 한국산악인의 저력을 과시하였다.
이 기산중에 비록 일본인이 동행한 기록이 적지 않았으나 한국인에 의한 근대등산의 실천과 선구적인 업적은 광복 후 산악운동의 기틀이 되었다. 한편, 일본인들은 금강산암벽이나 함경북도의 산에서 기록을 남겨놓았으나 패전이 가까워지면서 등산은 군사목적을 위한 훈련연습의 성격으로 변질되었다.
(3) 현대의 등반
① 광복∼1960년:광복과 더불어 한국산악회(초대 회장 宋錫夏)는 재빨리 한국인만으로 설립되었으나 국토분단으로 이북에 있는 산으로 갈 수는 없었다. 또한 남한의 산도 치안이 불안해서 등산은 산지를 중심으로 한 국토규명사업의 학술답사로 변모하였다.
순수산악인들인 백령회원이 기반이 되었으나 학술조사목적의 등산이 성행하였고, 산이 아닌 인근 도서(島嶼)가 주무대가 되었다. 서해·다도해·독도·울릉도를 비롯해서 해도상의 파랑도(波浪島)를 찾는 것이 산악회의 주요 사업이 되었다. 6·25전쟁 후 대학산악부가 재건 창설되고, 설악산이 수복되면서 등산 대상은 서울 근교 암벽에서 설악산 울산암 암벽과 미답의 설악산 초등으로 옮겨갔다.
그 당시 유일한 전국적인 대표단체인 한국산악회는 6·25전쟁 전후에 회장 홍종인(洪鍾仁) 주도의 학술등반과 1955년의 수복 후 최초의 설악산답사등반, 그리고 1956년과 1957년 동계에 한라산 적설기등반을 하였는데, 이러한 등반은 6·25전쟁 후 우리 나라 등산운동의 새로운 지침과 방향설정의 본보기가 되었다.
학생산악운동으로는 1955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산악회(회장 柳洪烈)의 추계 설악산 천불동 초등반(대장 孫慶錫)과 1956년 겨울 서울대학교 공과대학(회장 박희선, 대장 김형실)의 적설기 지리산 전산종주, 같은 시기의 슈타인멘클럽(대장 田湛)의 동계 설악산 천불동 직등초등반이 환도 후의 새로운 초등 풍조를 산악계에 던졌다. 아울러 지방에도 각급 산악단체가 창설되었다.
② 1960∼1980년:1960년부터 한양공과대학 산악부(대장 鮮于 仲玉) 등이 도봉산 선인봉과 북한산 인수봉에서 새로운 코스를 개척, 초등하면서 암벽등반이 성행하였고, 등산이 일반인의 레저화가 되면서 각종 산악단체가 속출하였다. 특히 각종 등산단체를 규합한 연맹체로서 대한산악연맹이 1962년에 창설되었다(회장 李崇寧).
1960년대부터는 종래까지 사용하던 군용장비가 퇴색하고 국산장비가 개량되고 볼트하켄과 안전벨트의 사용으로 직벽등반과 인공등반으로 새로운 코스가 개척되었고, 광복 전의 초등 코스는 고전화되었다.
미국인 취너드와 선우 중옥 등의 북한산 인수봉 취너드코스(1963년)를 비롯하여 산비둘기산우회·에코·우정산악회·크로니·마운틴빌라·MSR 등이 인수봉·선인봉·숨은벽·울산암에서 각각 새로운 등로를 개척하였다.
1962년 우리나라 최초의 산악 기술서인 ≪등산백과≫의 출간과 1969년부터 월간지 ≪산≫과 ≪산수≫가 창간되어 산악도서의 간행이 시작되었다.
해외원정에 있어서는 1962년 경희대학교의 히말라야 다울라기리Ⅱ봉(7,751m, 대장 박철암) 시등(試登)에 이어, 1970년 추렌히말(대장 김정섭) 원정과, 1971년의 제1차 마나슬루원정과 대한산악연맹의 로체살원정이 있었다.
1972년 제2차 마나슬루원정에서는 5명의 대원과 10명의 현지 셰르파 등 15명이 조난하는 대량 조난이 있었다. 한편, 1964년부터 시작한 일본 북알프스나 대만의 옥산등산도 거듭되었다. 1970년대부터는 산악운동이 수적으로 확산되어 1971년에 ‘대학산악연맹’이, 1972년에는 ‘고교산악연맹’이 결성되었고, ‘직장산악인협회’도 창설되면서 각종 산악행사가 성행하였다.
1975년 대한산악연맹의 제1차 에베레스트정찰(대장 崔秀南)과 한국산악회의 제1차 안나푸르나Ⅰ봉정찰(대장 孫慶錫)은 대표적 산악단체의 본격적인 해외원정의 시금석이 되었다. 1977년 18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대한산악연맹 에베레스트원정대(대장 金永棹)는 9월 15일 고상돈(高相敦)과 셰르파 펨바노루부에 의해 등정에 성공했다.
1978년에는 한국산악회(대장 全炳九)의 유동옥(兪東玉)과 셰르파 파상놀브가 안나푸르나4봉을 등정하였다. 1979년에는 북미 알래스카의 매킨리에 한국일보대·고령산악회대·고려대학교산악회 등 3개 대가 몰려 모두 등정에 성공하였으나 한국일보대에 참가한 고상돈과 이일교가 추락, 조난하였다.
이 밖에도 1970년대에는 국내외의 산악운동의 충실화와 전국적인 확산이 두드러졌다. 특히 한국등산학교(교장 權孝燮)가 상설기구로서 개설을 보았고, 악우회(岳友會)에 의한 암벽코스의 등급정리가 있었다. 1969년에 한국산악회가 국제산악연맹에 가맹하였고, 1972년에는 대한산악연맹도 여기에 가맹해서 국제적 산악운동의 대열에 끼었다.
③ 1980년 이후:제2차세계대전 후 유럽 알프스에서는 동계 알프스등반과 직등, 단독등반이 정통화되었다. 한편, 히말라야에서는 8,000m급 거봉 14좌가 1950년부터 1964년까지 차례로 초등정되어 그 뒤에는 새로운 코스의 초등정과 7,000m급의 도전이 있었다.
1970년부터는 히말라야에서도 직등과 벽등반시대로 접어들었다. 1979년부터는 중공의 등산해금(登山解禁)에 따른 초등반과 히말라야 동계등반·무산소등반·단독등반이 현대등산의 특징으로 부상해서 알파인스타일등반이 히말라야 고산등반의 정통으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세계적 추세의 배경에서 1980년대의 우리 나라 등산계는 해외원정이 수적으로 급증하고 국내에서는 동계 빙벽등반이 새로운 한계도전의 등산운동으로 등장하였다.
1980년 유럽 알프스에서만도 악우회를 비롯한 4개 대가 도전해서 아이거 등 3대 북벽에서 개가를 올렸고, 동국대학교산악회는 히말라야 마나슬루(대장 이인정)를 무산소로 등정하였다. 또한, 남미 안데스 아콩카구아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산악회(대장 김용환)가 등정하였고, 청화산악회는 미국 휘트니봉을 등정하였다.
이렇듯 폭발적인 추세는 히말라야지역에 도전한 한국대가 1962년 이래 1985년 10월까지 총 81대로(히말라야지역만), 이 중 1980년부터 1985년까지 6년 동안에만 68개 대가 해외원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타 인접국인 일본·대만을 제외한 남북미·알프스·남북극 지역 등에도 39개 대가 도전했다.
그 중에는 1981년 에코와 은벽 합동의 알프스 드류서벽등정, 성균관대학교산악회의 안나푸르나 1봉 남봉등정도 있었다. 1982년에는 닐기리중앙봉·람중히말(여성대)·마카루Ⅰ봉(한국산악회)·가네슈4봉(부산학생산악연맹) 등의 등정이 있었으며, 대전 자일클럽의 고준바캉 초등정(대장 김영환 외 11명)은 세계적인 초등기록이 되었다.
또한 남선우(南善佑)의 동계 푸모리초등반은 한국 산악인이 이룩한 히말라야 동기 초등으로 최초의 기록이다.
1983년에는 숙원의 바인터브락Ⅱ봉을 윤대표(尹大杓) 외 6명이 세계 초등정을 이룩하였고, 포항의 향로산악회의 눈봉 등정과 영남대학교의 안나프르나2봉 등정에 이어 허영호(許永浩)의 마나슬루 무산소단독초등이 있었는가 하면, 남선우는 거듭 아마다브람에 동기 무산소 단독초등반의 위업을 이룩했다.
1983년의 눈부신 기록에 이어 1984년에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은 한국원정대가 히말라야로 몰려 절정을 이루었다. 총 41개 대 가운데 한국등반대만 17개 대가 도전한 것이다. 푸타 히운추리·바른체 히말의 북봉과 중앙봉·캉구루·샤르체·탐세르크·캉구루서벽·타르케 캉을 각각 등정하였고, 특히 쟈누에서는 김기혁 등이 동계 초등반을 성공시켰으며, 여성에 의한 8,000m 동계등정(김영자)이 안나푸르나1봉에서 있었다.
1985년에도 전년의 여세로 1월의 동기 투크체봉등정을 비롯해서 출루서봉·투크체, 1986년 1월 동기의 캉테가 등에 등정하였는데, 특기할 것은 울산대산련의 이규진 등이 히말츄리 북봉에 세계초등반을 이룩하였고 홍석하 등의 남극대가 최고봉 빈슨에 올랐다.
1986년 8월에는 대한산악연맹의 김병준 외 16명의 대원이 세계 제2위의 고봉인 K-2봉에 전통적인 정공법 방식으로 등정에 성공했다. 같은 해 4월에는 강가푸르나에 여성대원도 낀 등정이 있었다.
등정은 하지 못했으나 1985년에서 1986년에 이르는 겨울 동안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에만 고려대학교를 비롯한 한국의 3개 등반대가 각각 다른 코스로 시도해서 기개를 높인 바 있다. 1986∼1987년 겨울에도 2개의 한국대가 최고봉에 도전하였다.
그리고 1987∼1988년 겨울 허영호(M.S. 대, 단장 김일권)가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동계등정하는가 하면 세계 제3위의 칸첸중가(8,586m)에서는 부산대륙산악회(대장 정상무)의 이재춘대원이 동계 2등하였으며 또한 광운공업고등학교 OB팀(대장 전진양)은 10대 2명의 대원이 고줌바탕을 동기등정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1977년 겨울 설악산 토왕성 빙폭을 크로니산악회의 박영배 등 7명이 완등하였고 같은 시기에 마운틴빌라가 동계에 울산암 리지를 완등하여 초등반하였다. 그 밖에도 빙폭 초등은 설악산을 비롯해서 각처의 빙폭을 초등하는 기록이 속출했다.
1984년 2월에는 무학산악회의 이태식·박내경 등이 토왕성 빙폭과 좌우암벽까지 단독초등하는 초인적 기록을 세웠다. 이어 1985년 1월에는 대승폭포 빙폭을 윤대표·정호진 등이 기술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초등정하였다.
이러한 추세에서 세계적으로도 능력을 인정 받은 암벽등반기술에 의해 난이도가 높은 볼더링과 하드푸리등반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다.
(1) 등산의 요소
등산은 산의 다양성이나 높이·지형·기상·위치·계절 같은 자연적 요소와 기술적 요소인 등산자의 경험·능력·연령·성·수련도 등의 인위적 요소, 그리고 이에 따른 물질적 요소인 장비·식량 등이 서로 알맞게 준비되어 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등산의 3대 요소이다.
여기에 모험이 수반하는 한계에의 도전과 미지의 영역 추구가 스포츠등산의 특질이고, 근대등산의 발달에 따라 스포츠등산은 오늘날에 와서는 극한적인 자연조건과 저산소환경에서 행할 때 현대적 등산으로 정의된다.
(2) 등산의 대상
우리 나라에서는 온대권 특유의 사철에 따른 등산을 즐길 수가 있다. 가장 높은 조종산(祖宗山)격인 백두산(2,744m)과 관모봉(冠帽峰, 2,541m)을 비롯하여 이른바 한국 알프스라 불리는 개마고원과 묘향산·낭림산·금강산·부전고원 일대의 산이 북한에 위치하고 있으며, 휴전선 이남의 산으로는 한라산(1,950m)·지리산(1,915m)·설악산(1,708m)이 대체로 여러 코스에 따라 등산가가 몰리는 산이다.
예로부터 삼신산(三神山)은 봉래(蓬萊:금강산)·방장(方丈:지리산)·영주(瀛州:한라산)를 말하였고, 오악(五嶽)으로는 백두산·지리산·금강산·묘향산·북한산을 각각 북·남·동·서·중악으로 불렀으나, 일설에는 묘향산·구월산·금강산·지리산·계룡산을 5악으로 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진산(鎭山)이 전국 240여 고을마다 있어서 숭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그의 산수론에서 12 명산으로 금강산·설악산·오대산·태백산·소백산·속리산·덕유산·지리산·칠보산·묘향산·가야산·청량산(안동)을 말하고 있으며, 휴정(休靜:서산대사)은 4대 명산으로 금강산·묘향산·구월산·지리산을 수(秀)와 장(壯)으로 평하였다.
최남선은 북한산·백두산·원산(圓山, 2,309m:함경북도 경주와 덕천 사이)·낭림산·두류산(1,324m:평안남도 양덕과 함경남도 문천 사이)·분수령(1,128m:강원도 평강서북)·금강산·오대산·태백산·속리산·장안산(1,237m:전라북도 장수)·지리산 등 8도의 조종격인 산 12개를 12 명산, 또는 12 종산(宗山)이라 하였다. 여기에 묘향산·한라산·구월산·칠보산·설악산·관모봉·소백산·주왕산을 넣어서 20명산이라 하기도 한다.
경승을 주로 한 명산을 말하지 않고 등산을 대상으로 할 경우 암벽등산의 대상으로는 서울 근교의 북한산과 도봉산의 여러 암봉이 우리 나라 암벽등산운동의 원점이 되기도 한다. 그 밖에 6·25전쟁 후 수복된 설악산 울산암을 비롯한 여러 암봉과 희양산·무등산·월악산·월출산이 손꼽힌다.
동계 등산으로는 다양한 기상조건을 갖춘 한라산을 비롯하여 덕유산·소백산·지리산·설악산·오대산, 그리고 영남알프스로 불리는 천황산 일대를 친다. 그리고 지리산·토함산(745m)·계룡산(840m)·설악산·속리산(1,057m)·한라산·내장산(713m)·가야산(1,430m)·덕유산(1,594m)·오대산(1,523m)·주왕산(933m)·도봉산(840m)·월악산(1,097m)·소백산(1,420m) 등은 국립공원이기도 하다.
도립공원으로서의 산은 경상북도의 금오산, 경기도의 남한산성의 산, 전라북도변산반도의 산과 무악산, 전라남도의 무등산과 월출산, 강원도의 치악산, 충청남도의 덕산·가야산과 칠갑산 등이 있으며, 이 밖에도 조령산·수도산 등을 비롯하여 경기도의 명성산·용문산, 강원도의 태백산·두타산·청옥산, 경상북도의 팔공산, 경상남도의 신출산·취서산, 전라남도의 두륜산·조계산 등이 있다. 이들은 일반 등산을 비롯하여 코스와 계절에 따라서는 기술적인 스포츠등산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3) 등산의 분류
등산은 유람이나 행락적인 요소가 많은 일반 등산과 심미적 목적의 정적(靜的) 등산과 모험을 수반하는 한계 도전의 동적(動的)인 스포츠등산으로 크게 나뉜다. 또한, 등산의 본래 목적 이외의 뜻이 있는 탐험등산도 있다. 인원 수를 중심으로 한 분류로는 혼자서 올라가는 단독등산과 2인 이상으로 대를 짜서 올라가는 집단등산이 있다.
단독등산은 행락적 요소와 관광적 요소의 여행등산이 아니고, 개인의 능력 한계에 도전하는 보다 어려운 등산을 감행해야 되는 등산본질의 등산이며 가장 위험하고 기술적 수련을 필요로 한다.
집단등산에서는 대장·부대장·총무·장비·식량·기록·의료·수송 등의 전담 부서를 정해서 등산목적에 따른 안전한 운행이 필요하다. 행동에 따른 분류로는 산의 능선을 연결하여 등산하는 종주방식과 각각 출발점을 달리하는 개인 또는 등산대가 일정한 정상으로 올라가는 집중방식, 그리고 출발점과 하산지점이 각각 다른 방사상방식의 등산이 있다.
또 구조작업이나 학술답사에서 흔히 사용하는 파상방식이 있는데, 이것은 출발시간에 간격을 두고 정상에 올라가는 방식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코스를 약간 달리할 수도 있다. 고산등산 방식으로는 흔히 극지법으로도 불리는 포위정공법이 있다. 이것은 대규모의 등산대가 캠프를 점차적으로 점진시켜 정상에 서는 정통적인 등산전술이다.
이에 반해서 돌격방식 또는 돌진전법은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최대한의 소요시간을 단축시켜 정상에 오르는 속공전술이다. 현대등산에서는 등산 인부(셰르파)나 고정자일 등을 전혀 쓰지 않고 대원만으로 정상에 오르는 알파인 방식이 있고, 최근에는 고산에서의 동기무산소, 단독등반 방식도 대두되고 있다. 여러 방식에 따라 장단점이 있으나 대상과 능력 등에 따라 사용된다.
(4) 등산의 실시
등산은 계획·입안·실행·보고 등의 4단계를 거쳐 시행된다. 계획단계에서는 대원이 결정되고 리더(대장)가 선출, 결정된다. 아울러 독도(讀圖)에 의해 면밀한 코스의 검토, 시기결정, 일수 등이 협의되면 이에 따른 일정표(운행표)에 따라 행동지침을 결정한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장비·식량·경비 등을 비롯한 모든 준비를 완비한다.
실행에 따른 운행은 예상되는 대상 산의 코스에 따라 일정대로 운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만일 현지에서 부득이하게 계획변경을 할 때는 원칙적으로 안전등산의 범주 속에서 예정보다 쉬운 코스의 일정을 잡아야 한다. 하루 운행은 대원 중에 약한 자를 기준으로 한다.
등산보고는 모든 행동의 반성을 겸해서 다음 산행, 또는 다른 등산대를 위해 가식없이 기록, 보고되어야 한다. 그 방법으로는 보고서 간행, 등산기 출판, 사진전시, 장비전시, 슬라이드와 비디오기록공개 등이 있다. 그래서 등산의 심판은 스스로 내려야 하고, 등산은 문학과 예술을 겸한 운동이 된다.
(5) 등산기술
등산은 그 기술적인 분류에 따라 일반등산 또는 하이킹·암벽등산·빙벽등산·스키등산 등이 있고, 계절에 따라 특징 있는 등산을 할 수 있다. 또한 일수에 따라 당일등산·장기등산과 외국의 산을 향한 원정등산이 있다.
일반등산은 모든 등산에 기본이 되는 보행법,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걸음걸이, 숲길·낙엽길·계곡길 가기, 계곡 건너기, 능선길 가기, 돌풍 피하기, 비나 눈 속의 등산, 낙석 때의 등산 등이 있으며, 모든 경우 일정한 보행속도의 조절과 등산로 선택법, 길을 잃었을 때의 안전등산법이 요구된다.
모든 등산에서 캠핑 또는 산장생활은 산생활의 기본기술로 익혀야 되고 천막을 이용한 캠핑과 산장이나 사찰을 이용할 때는 공중도덕이 수반된다. 이러한 산생활의 기본기술은 취사법·노영법·자연보호·오물처리 등의 기본윤리와 교양이 필요하다.
① 암벽등반:암벽등반은 그 자체로서도 등산장르가 설정되지만 일반적으로 산을 형성하는 한 부분의 기술일 수도 있다. 암벽의 지형과 지질에 따라 여러 기술이 있으나 기본원칙은 유연한 밸런스와 리듬, 그리고 3지점 지지기술이 원칙이다. 암벽등반은 크게 자유등반과 인공등반으로 구분하고, 암벽의 종류와 형태에 따라 외면등반과 내면등반으로 구분한다.
암벽등반은 자유등반인 경우에는 홀드를 이용한 3점 지지에 의한 중심이동, 자일(로프)사용법과 확보기술 등이 요구된다. 인공등반에서는 이 밖에도 볼트·하켄의 사용, 테이프 슬링에 의한 러닝 빌레이(확보지점을 점차적으로 이동, 고정시켜 자일운동을 용이하게 하고 실족, 추락했을 경우 확보를 안전하게 하는 법)를 하고 안전벨트·헬멧, 각종 잼너트 등을 사용하여 지점으로 쓴다.
또한 인공적인 지점기구(너트·후렌드 등)를 사용하기도 하고, 등강기(登降器)로서는 유마르·8자고리·브레이크바·데상드르퍼머와 같은 인공기구를 사용한다.
자유등반은 가능한 한 인공적 등반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발 등의 신체로 반대방향의 힘을 이용하는 레이백기술과 잼기술 등을 써서 올라간다. 종래까지 암벽등반에서는 완력등반과 로프로 달아올리는 기술 등을 쓰기도 하였다.
확보기술은 확보하는 사람이 암벽을 향하여 서서 확보해 주는 폐쇄자세확보법과 암벽을 등에 지고 확보하는 개방자세확보법으로 구분한다. 기술로서는 정적(靜的) 확보와 추락하는 사람을 따라 자일운동을 흘려주다가 정지시키는 동적(動的) 확보가 있다.
방식으로는 확보자의 몸으로 하는 방식과 기구를 겸용하는 방식이 있다. 이때의 안전원칙은 낙하충격을 흡수하는 데 있다. 이 밖에 암벽등반의 별도 방식으로 볼더링과 하드푸리 등의 현대적 자유등반 방식이 있다.
② 빙설등반:겨울등산의 기술은 설상기술과 빙상기술로 구분되고 설상기술은 경우에 따라 설피·아이젠·피켈 기술이 요구된다. 설상보행은 발디딤과 사면, 적설량에 따라 좌우된다. 빙상기술은 흔히 빙벽기술로 통칭되는데, 고도의 아이젠과 피켈기술이 필요하다. 또한 빙벽기술로서 앞발톱이 있는 아이젠과 아이스바일 또는 아이스피켈을 양손으로 사용하여 올라서는 앞포인트(front point) 기술이 있다.
설중노영(雪中露營)은 언제든지 눈사태에 조심해야 하고 풍속·풍압·극한에 견디는 이중천막사용법과 설동·이글루(눈블록으로 만든 집) 등의 건설법, 그리고 극한 속에서의 비상비박법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동계등산의 한 형태로 스키등산은 깊은 적설에서 효과적인 등산방식이다.
(6) 등산장비
등산장비는 등산인원·능력·일수·계절 등에 따라 적절한 양이 필요하다. 모든 장비는 개인장비·공동장비·취사생활장비로 구분할 수 있다. 장비부족에서 오는 위험도 있지만 과다한 장비 지참도 좋은 일은 아니다. 특히 겨울등산이나 고산등산에서 방한장비의 선택은 준비장비의 경량화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장비는 항상 손질해야 하고 완전한 사용법을 숙지해야 한다. 장비 구분은 경기능(輕技能) 장비와 중기능(重技能) 장비(이중방한등산화·플라스틱등산화·이중천막)를 대상과 계절에 따라 마련해야 하고, 성능과 사용법을 완전히 파악해야 한다. 장비 구분은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7) 등산식량
등산식량은 계절과 등산방식에 따라 필요한 영양가와 열량이 요구되며, 구미에 맞는 식품이어야 한다. 또한 구미는 전대원의 최대 공약수로 그 기호를 선택한다. 겨울철을 제외한 계절에는 1인당 2,500㎈, 겨울에는 3,500∼4,000㎈가 요구되며, 영양가가 고루 갖추어져야 한다.
식량선택의 기본원칙은 ① 값이 싸고 영양가가 높은 것, ② 각종 영양소가 충분히 들어 있는 것, ③ 요리하기 쉬운 것, ④ 변질되지 않은 것, ⑤ 부피가 적고 가벼우며 포장이 잘 되어 수송이나 휴대에 편리한 것, ⑥ 버리는 부분이 적은 것, ⑦ 어떠한 상태에서도 손쉽게 먹을 수 있는 것(구미가 당기는 인스턴트식품)이다. 그리고 극한 상태나 비상시에 손쉽게 먹을 수 있는 별도 식품의 준비가 요구된다.
(8) 조난
등산은 출발지인 집에서 나와 집까지 무사히 돌아오는 전 과정을 말하기 때문에 조난은 실질적인 등산 과정에서의 조난과 기타의 조난, 즉 하산 후의 문제까지도 다루게 된다.
조난은 기상돌변·낙뢰·눈사태·낙석 같은 타주적(他主的)인 것과 등산자 스스로에 원인이 있는 실족, 장비부족, 기술미숙, 정신적·육체적 결함, 판단착오 등의 자주적(自主的)인 것으로 구분한다.
타주적인 것은 절대적 위험이고 자주적인 것은 조건 있는 위험이다. 이 절대적 위험 중에는 불가항력의 위험도 있으나 이것을 잘 판단하고 예방하며 또는 극복할 때 조난의 위험은 피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암벽조난은 1939년 4월 도봉산 주봉(主峰)에서 일어난 양정중학교 산악부원의 추락조난이다. 이에 앞선 1936년 1월 당시의 경성제국대학 산악부의 한라산 적설기등반시의 조난은 일본인의 본격적 겨울등산 조난의 1호였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1948년 1월에 있었던 전택대장의 적설기 한라산 조난이 있다. 광복 후의 암벽조난은 인수봉에서 1946년에 있었으나, 그 뒤 1954년 도봉산 만장봉에서의 경기중학교 산악부원 조난이 충격적이었다.
등산활동이 왕성해지면 그 반작용으로 조난 건수도 비례해서 늘어, 1960년대 이전에는 경험자의 조난이 한두 건에 불과하다가 1960년대부터는 일반 등산자를 포함해서 10건이 넘는 조난이 발생했다.
특히 1970년대부터는 매년 20건 전후의 조난이 속출하였고 대형화되어 지역도 전국으로 확산되고 해외조난도 발생하였다. 해외에서의 대형조난은 1972년 4월 제2차 마나슬루원정대가 등반대장을 포함한 5명의 대원과 셰르파 10명 등 15명이 눈사태로 조난사하는 세계 히말라야등산 사상 두번째의 대량 조난이 있었다.
국내 대형조난으로는 1971년 11월에 강풍과 한파의 기상돌변으로 북한산 인수봉 남측면에서의 7명 조난사가 첫 암벽 대형조난이었다. 그 뒤 같은 유형으로 1983년 4월에 인수봉 취너드 코스에서 대량조난이 있었다. 1969년 2월에 한국산악회 해외원정훈련대가 설악산에서 눈사태로 인해 대장 이희성(李熙成) 등 10명이 조난 압사한 것이 적설기로서는 대형 기록이 된다.
이와 비슷한 조난사건으로는 1976년 2월의 대한산악연맹 에베레스트훈련등반대가 설악산에서 훈련중 최수남 등 3명이 조난하였다. 1970년대 후반의 조난은 대체로 실족 추락사 조난으로 등산의 광역화와 더불어 전국적인 양상이 되었고, 해외조난도 예외없이 원정대 수에 비례해서 발생했다.
조난방지의 기본 7원칙은, ① 등산기술은 도약이 있을 수 없고 지도체계에 따라 책임있는 수련지도를 쌓아야 한다. ② 등산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③ 한 번만의 승부가 아닌 반드시 판단에 따른 후퇴결심도 과감해야 한다. ④ 자기체력, 대원의 능력에 따른 등산코스를 택한다. ⑤ 산에서의 만용과 저돌적인 용맹은 금물이다. ⑥ 지략보다 침착한 행동, 장비의 적절함과 점검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⑦ 다변성·다양성의 자연, 즉 기상변화에 항상 유의해야 한다.
이상이 조난방지의 기본이고, 조난대책으로는 리더의 자격, 능력문제, 사고 후의 구출 등의 판단과 작업요령이 적절해야 하고 이중조난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또한 사망판단은 의학적인 진단이 필요하고, 조난자의 운반은 생존자와 같이 취급하는 신중성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