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계四季에 깃든 그리움의 미토스(mythos)/박용진
ㅡ 김도형 시집『약속된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
누구나 상실의 시간에 머물거나 이를 건너온 경험이 있다. 아픔이 가져오는 통점에서 '왜'라는 생각에 휩싸이는 이유는 나의 선택과는 다르게 여겨지는 현존의 피투성 때문이다. 삶의 근원에 대한 의문과 고통에 대한 시적 관점은 비슷할 수 있지만 시인들은 여러 현상에 감응하며 천착한 자아를 시적 세계로 구성하여 이를 다양하게 내놓음을 볼 수 있다.
시의 구성과 삶의 실제는 동일하거나 거의 비슷하다. 시인의 감각을 통해 축적한 경험에의 기억과는 다른, 숨기고 싶거나 혹은 어두운 감정은 자신도 모르게 의식 아래를 떠돌다가 의식 표층으로 떠오르며 시 창작에 있어 시원始原을 부여한다. 삶은 항상 즐겁기만 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불쾌했거나 미충족한 감정은 심층 의식 속으로 스며든 다음 일상에 비주기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으며 뜻하지 않은 일과 마주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시를 쓰고 난 다음이면 낯선 자신과 조우하기도 한다. 아무리 안온한 영역을 지키려 해도 온전히 가리기 힘든 민낯은 작품 세계 곳곳에서 문득 돌출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시인들이 시를 쓰면서 심적 정화 작용을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으로든지 진행하게 되는 이유가 되며 시적 화자를 통한 가상의 시뮬레이션과 스스로에 대한 질문으로 상념이 망상으로의 전이됨을 방지하고 도래하지 않은 희망을 텍스트로 선을 긋기 때문이다.
김도형 시인의 시집 약속된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에서는 작품 세계는 삶의 일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상실에 대한 반동인 그리움의 자화상을 일정하게 견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떠한지 살펴보자.
2.
봄비에 잊혀진 기억은
우산 속 빗소리뿐이었다
한 뼘 다가서지 못했던
라일락 꽃향기는 진했다
추억이라는 것
그래도 너밖에 없더라
혼자 만든 추억은
혼자만의 그리움이 되고
혼자 만든 기념일엔
라일락 꽃향기가 난다
ㅡ 봄비 내리는 날에 부분
내리는 비는 실존함을 직접 느끼게 하는 현상이다. 물방울은 대기를 정화하며 절기의 변화를 알리는 봄비가 되지만 중력의 법칙에 따르는 낙숫물을 보며 많은 상념과 추억에 잠기게 된다. 이런 몰입 안에는 코기토(cogito)가 있다. 이런저런 기억부터 백일몽, 생과 사에 대한 생각까지 다양하다.
'비'의 의미는 중첩이 된다. 구름에서 응결된 물 입자가 쏟아져내리는 비와 잘못되거나 그름을 뜻하는 '비非', 기념하기 위해 세운 돌 등에 글을 새겨놓은 '비碑', 물질 상호 간 비율을 나타내는 '비比'까지 많은 의미가 있다.
통상적으로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젖은 마음에서 파생하는 우울함을 낳으며 대체로 부정적이라 할 수 있고 '멍'하니 바라보며 휴식과 백색소음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라일락은 4월에 피는 대표적인 봄 꽃이다. 일주일간의 깊은 향기에 흠뻑 취하게 한다. 한 뼘 다가서지 못했던 아쉬움은 피고 진 다음에야 진한 추억으로 남아 그리움이 된다. 라일락(lilac)과 서정(lyricism)의 스펠링이 비슷한 것도 라일락이 서정을 대표하는 꽃이 아닐는지.
작품 라일락 꽃향기에서는 흰 라일락이 아닌 왜 보랏빛 라일락을 언급했을까. 슈펭글러1에 의하면 보라는 빨간색이 파란색에게 잠식당한 색이며 상징적으로 우아한 고독과 신앙심, 음성적인 예술의 영감을 뜻한다고 했다. 파랑과 빨강이 혼합된 색만큼 신비로움을 가져다준다.
사월의 기도 에서도 시인의 영적인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단순한 염원이 아닌 "잠깐 숨 돌리는 사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꽃비로 내리지는 마소서"에서 보듯이 순간을 이루던 것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알 수 있다. '순간'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른 특별한 시간으로 남을 수 있어 일정한 계측과 평가를 하기 어려운 상대적 시간 개념이다. 시인이 이야기하는 사라져 버릴, 사라진 순간은 무엇을 비유한 것인지 정확하게 추정하긴 어렵지만 매 순간의 연장선인 삶에 있어서 뜻하지 않은 상실을 대하는 위중한 간절을 시적 서정의 순간에서 느낄 수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봄이라는 계절은 꽃향기와 복사꽃과 벚꽃, 보라색과 분홍색(앵화)이 추억 안에 혼재되어 있다. 비록 봄비로 져버린다 하더라도.
3.
시련은
해 뜨면 사라지는
아침이슬로 맺히고
슬픔은 한여름에 내리는
소나기로 지나간다
행복은
창을 열면 불어오는
향긋한 바람이며
사랑은
눈 시린 그리움에
바닷길을 걷는 것이다
절망은 없다
희망은 태양 가득히
ㅡ 태양은 가득히 전문
오늘날은 심화된 물화의 세상이다. 즉물적으로 작용하는 물질의 가치만을 최고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물질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한 기본적인 본능에서 기인하였기에 한쪽으로 치우친 평가를 하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한 부작용 또한 잘 알고 있어 조절과 억제로 우리 세상은 존속이 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문제는 물질적 탐욕에 기인하기에.
작품 태양은 가득히 는 1960년 르네 클레망 감독과 알랑드롱이 출연했던 영화를 떠올린다. 인간 탐욕과 파멸을 그린 상영 당시에 섬뜩한 경고와 교훈을 안겨준 영화가 왜 떠올랐을까. 시인은 작품 세계에서 선형구조의 정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상실의 감정이 낳는 자연스러운 그리움이 인간 물욕의 극치를 보여준 영화의 파형 때문이리라.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은 한여름 소나기로 흘려보내고 창을 열고 바람을 맞아들인다. 이어서 시리게 찾아오는 그리움(슬픔 혹은 아쉬움의 반동)에 바닷가를 걷는다.
괄호를 치다는 태양 같은 희망을 가득 채우기까지의 방편이다. "살다 보니" "돌아오다 보니" "참으로 먼 길을 와버렸다" 열심히 살다 보면 스스로의 궤적에서 벗어나는 수가 생긴다. 이게 아닌 데를 되뇌며 이탈도 하기에 시인은 괄호를 쳐버린다. 괄호는 자칫 해석이 분분할 수 있는 상징임에도 '내 것'과 '내'의 언급은 자칫 먼 길로 빠져버릴, 몰랐으면 좋았을 사람(무의식적 자아)과 너무 늦게 만난 사람(초자아)의 대칭 구도에서 짝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괄호에 가둔 것이리라.
"마지막 달력을 내려야만 하는 하루" "개와 늑대의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
프랑스에서는 해 질 녘 박명薄明의 시간을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비유한다. 어둑해지는 때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이 안 되는 황혼은 인생의 막바지로 치닫는 순간이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에서 현대인들은 많은 중압감에 시달린다. 늑대처럼 움직여야 질책당하지 않을뿐더러 생존해나갈 수 있는 세상이다. 시인은 사람을 물어버릴 늑대 대신에 순하게 길든 개의 시간을 선택했다. 푹 자고 난 다음의 아침해가 가져다 줄 희망에 물들어 있다.
4.
세상은 쉼 없이 '불신의 자발적 중지'를 요구한다. 타인에 대한 불신은 끊임없이 더 많은 의심을 불러일으켜 공동체가 붕괴될 위험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에선 자의와는 다르게 타자에게 얽매이기 쉽다. '불신'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을 꿈꾸더라도 뜻하지 않는 일들로 믿음의 경계가 붕괴되기 쉽기에 불신과 믿음의 경계를 오가는 일련의 행위가 마치 일관된 경향성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가을이 가져오는 이미지는 어떤 것이 있을까. 차가워지는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과 사라지는 변화의 절기에 따르는 쓸쓸함과 이에 상반되는 따뜻함과 풍요의 이미지다. 이러한 가을의 이미지는 시라는 매질媒質을 통해 상실과 불신이 가져온 삶의 파편을 중화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시라는 예술 장르는 누군가에겐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이 개인에겐 오래도록 남아 있다가 사우스포(southpaw)한 일련의 일에 맞닦뜨리거나 겪을 일에 대한 충격을 상쇄시키는 역할을 충실히 해내게 만들어 준다.
김도형 시인의 시는 불필요한 수사를 배제하고 꾸밈없는 파토스(pathos)의 서정을 일관성 있게 견지하고 있다.
"오래전" / "가슴에서 떨어진" /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낙엽)
하나의 가을이 떨어지는 낙엽은 김도형 시인의 그리움이 발생하는 순간이다. 나뭇잎이 떨어지고 그리움에 젖음은 누구나 보고 겪는 평이함을 시인은 순간이라는 사건으로 그려내고 있다. 자발적 중지만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시인은 떨구는(세상) 것이 아닌 떨어짐(자연)을 선택했다. 그리고 떨어지고 사라지는 순간에 그리움을 담고 있다.
"먹구름으로" / "밀려오는 그대" (그리움의 역습)
그리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의식과 생각은 비슷한 듯 다르다. 의식 안에 쌓인 지난 기억을 움직이는 생각이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삶의 비의적 측면에서 기억에 얹힌 미완성과 미충족의 감정을 시인은 감성적 서정으로 조화시킴이 아름답게 여겨진다.
5.
평생을 나
한자리에서 살아왔다
돌고 도는 계절
길고 지루한
벌거숭이 겨울에는
누군가의 안식처가 아닌
죄수 같은 외로움뿐
ㅡ 중략 ㅡ
외롭고 추운 겨울밤
전봇대 같이 하늘을 향해
길쭉하니 서서
총총대는 별이 슬퍼 보여도
낯설지가 않다
하얗게 내린 숫눈 위에
ㅡ 하략 ㅡ
ㅡ 겨울나무 부분
평생이라고 여기는 지점은 미래지향적이다. 여지껏이란 말은 내일로 나아갈 확장과 변용을 이미 내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자리에 서서 앞으로도 성장을 계속할 나무의 이미지는 시인의 말을 조형한 것이다. 하얗게 내린 눈 위에 서 있는 나무에는 외로움이 매달려 있다. 외로움의 근원은 어디인가. 개인의 내적이든지 집단이든지 상호 간 모순에 대해 갈등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선택과 관련해 경험하는 갈등을 접근과 회피, 원거리 응시로 구분할 수 있듯이 갈등은 어디에서든지 겪을 수 있지만 당사자는 접근의 어려움으로 먼 거리를 두고 응시하게 되거나 심하면 고립이나 외로움의 감정에 빠지기 쉬워진다.
"발자국이 크다 / 맑은 영혼에 상처가 깊다" (잔설은 소망한다)
시인은 겨울나무가 되었다. 시적 주체는 오랜 시간을 건너온 다음 하얀 잔설과 함께하는 겨울나무의 이미지엔 얼마나 많은 리좀(rhyzom, 뿌리)의 경험이 담겨 있을까. 체험을 많이 쌓은 사람들은 대체로 진중해진다. 나이 혹은 지난 시간에서 쉽게 얻기 힘든 내적 지식을 겨울나무는 담고 있다.
바슐라르의 '무'(rien)2엔 물로 가득 채울 여백을 언급했다. 겨울은 절기의 마지막으로 현존재에게 죽음의 가능성을 열어둔다고도 하지만 겨울은 결빙 다음의 해빙, 잔설이 녹아 물이 되고 다시 꽃을 피우는 가능성으로의 공간이다. 물은 어디로든지 흐르며 머물지 않는다. 다만 물안에 잠긴 환원할 수 있는 잠재성은 알 수 없는 이유는 사람마다 모두 다를 수 있고 담을 수 있는 이야기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움의 본질은 추억이다.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한다는 '추억'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기억의 재생이 가져온 지난날의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본연의 가치를 확인하는 일이다. 추억이 없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삭막해질지 가늠하기 어렵다. '추억'의 깊이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 시를 통해 지난 기억과 앞으로의 기대는 발화의 주체에서 차이를 둘 뿐으로 미래를 밀고 가는 힘이 된다. 지난 기억은 왜 그리움으로 남는 것일까. 그리움의 전체엔 미뤘거나 돌아갈 수 없음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이미지가 독립된 형태로 자리 잡고 시간으로부터 마모되었기 때문이다. 넓고 포괄적인 의미망을 가진 추억은 그리움으로 이어진다.
부동의 자세로 서 있는 나무는 작품 전봇대와 허수아비에서도 연상이 된다. 지난 계절을 추억하며 쓸쓸히 서 있더라도 '보안등' 들판을 지키는 이미지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시인의 외로움은 타의적이 아닌 고독일 것이다. 자발성을 가진 고독에 젖으면 외로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6.
시인의 시집 약속된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에선 아픔이나 슬픔을 건너온 다음의 그리움에 대한 전개를 읽을 수 있다. 반복하는 아련한 그리움의 언술은 시인에 내포된 긍정의 메시지로 고난을 지나는 과정 대신 이미 다다른 성찰의 외피로 독자들을 이끌고 있다.
코로나 재난으로 종말에 대한 말이 자주 등장하는 세상에서 윤리 도덕의 해체, 문학의 끝, 구원은 어디에 등의 말이 넘쳐난다. 별 문제가 없는 사람이어도 자칫 유랑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하는 우려도 든다. 시인을 유랑하는 이들이라기도 하지만 시인에게선 지난 노매드의 흔적이 읽힌다.
시인의 시집은 R. 야콥슨의 발화의 여섯 가지 기능 중 발신자의 표현적 기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상상적 고난의 전개에서 희망적 사유를 독자에게 나눠주는 기능으로 귀결하는 작품집은 시인의 사적 체험에 근거한 삶의 좌표를 제시하고 있다.
비대면, 사회적 거리두기와 격리의 요구는 불가피한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권장할 일이다. 텍스트라는 고정 상태에서 관찰과 사유를 토대로 중층적 층위의 발화를 통해 무한한 연동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은 통증이 아닌 통각을 무디게 한 다음 단계로의 진행이다. 이는 호이징거3가 칭한 호모루덴스, 시문학은 소모적인 유희적 존재들의 행위가 아닌 사회문화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어떤 고통에도 시는 발화와 조절로 삶을 더 단단하게 이끌기에.
김도형 시인의 시집에서 그리움은 코다(coda)가 된다. 작품 전반을 흐르는 추억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는 그리움이 가득하다. 하지만 보편적인 그리움에만 매몰되지 않고 차별화 되는 이유는 사계절 속에서 자연의 잃어버림과 생성의 반복, 순환을 통하여 통찰을 향하는 탐색의 정서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상실이 가져오는 모든 것은 새로 시작하는 이른 단계임을 빗물, 꽃, 낙엽 같은 상관물에서 전환을 이룬 그리움의 순수 서정에서 알 수 있다.
1. oswald spengle. 독일의 철학자
2. 가스통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
3. 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 호모루덴
첫댓글 박용진 평론가님
아름다운 글 감동 깊습니다.
감사합니다.
내내 건안욱필하소서.
회장님
감사합니다
봄,
아름다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