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눈 뜬 장님들이다
2005년 6월 최영수 소장
언젠가부터 나는 외출을 할 때 귀걸이를 열심히 다는 나를 느낀다. 아마도 내가 나이 먹으며 화장기 없는 얼굴이 자꾸 머릿속으로 생각되어지는 것 같다. 사실 평소에는 나의 경우, 주변에서 내 눈에 보이는 나이 먹은 여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느끼는 그 느낌으로 나를 보고 또 한편으로는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나이 먹음’의 그러한 초라함을 행여 내 모습에서 보일까봐 내 스스로 지우려 애쓰는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귀걸이라는 군더더기로 나를 잠깐씩이나마 좀 근사해져 보이고자 ‘나이 먹으면서 생기는 때(몸에 생기는 때)'를 그렇게 화장을 하느라 바쁜 나를 본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 한 점은 상체를 벗어버린 자유로운 여성의 몸짓을 표현한 손바닥만한 작은 그림이다. 나도 그러고 싶어서였다. 시집살이로 낮보다 밤에 더 옷을 꼭꼭 입고 자야했던 나는 옷을 벗어버린 자유로움을 너무 그리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외출 시에 이러한 자유를 아무 생각도 없이 너무도 당연하게 버려버리곤 온 몸에 ‘주렁주렁’이 아니면‘더덕더덕’ ‘생긴 대로가 아닌 나’로 군더더기를 많이 붙여서 남들 눈에 ‘더욱 근사한 나’로 거듭 태어나려 한다. 정말로 근사한지는 잘 모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당연하게 나의 군더더기에 더 많은 눈을 주고 칭찬을 해준다. 그러면 나는 더 헤벌쭉 웃으며 그런 ‘군더더기 발린 나’에 만족하고 즐기는 나를 본다. 어떤 의미에서는 매일 매일 매 순간 이렇게 나는 군더더기라는 부속품 몇 가지로 본래의 나를 감추면서 나 자신은 물론 주위를 기만하면서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다 어느 날엔 정말 내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와 ‘나라고 느끼고 싶은 나’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헷갈려 하기도 한다. 아직도 서툴다. 내 모습을 내가 몽땅 드러내도 상대가 덜 드러내는 자신의 거울에 나를 비추면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몽땅 드러냄이 때로는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경우도 있어서 삼가려고 하면, 다 드러냄이 훨씬 편안함을 아는 내가 스스로 불편해서 무엇을 먹다 체한 사람 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한다. 나를 있는 그대로 상대에게 보여주기도 쉽지 않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여전히 쉽지 않다.
사실 우리들이 살면서 나누는 대화를 들어 보면, 대부분 다 눈을 뜨고 마주 보면서 말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장이나 이익에만 치우쳐 있어서 상대의 입장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을 뿐만 아니라, 맹목적인 눈만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이라고 느껴진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님비족’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모두들 슈퍼비전을 받을 수도 없고, 또 누가 그런 우리들을 슈퍼비전을 해 줄 수 있겠는가? 다행히 고속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기에 우리들은 스스로 고민을 한만큼 자신에게 맞는 맞춤형 정보선택이 가능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을 보여주고픈 모습으로 더욱 능숙하게 잘 보여줄 수 있겠다. 물론 대부분은 성형수술이나 군더더기로 자신을 더욱 근사하게 연출할 수도 있겠지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모습을 원천적으로 잘 관리하고 보살핌으로써 뿜어져 나오는 향으로 저마다 독특할 수 있으면 비록 눈을 뜨고도 못 본들 어떠하겠는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를 바란다면 황희 정승처럼‘그래, 너도 옳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너스레를 떨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꾼들로 넘쳐나리라. <행가래로 4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