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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간 산행일시: 2024. 1. 16.(화) - 음력(12. 6.), 일출 07:46~일몰 17:38
●2구간 산행일시: 2024. 1. 18.(목) - 음력(12. 8.), 일출 07:45~일몰 17:40
●산행지: 검단지맥 2구간 졸업(물푸레고개-은고개-끝자락)
●산행코스: 물푸레마을 정류장-물푸레고개-법화산(383.3m)-346.1m봉-작은 무등재-326.7m봉-큰무등재-317.8m봉-대지고개- 대지산(326.2m)-318.3m봉-부천당고개-불곡산(344.5m)-정자봉(311.7m)-형제산(286.3m)-태재육교-240.3m봉-일곱삼거리고개-344.5m봉-곧은골고개-영장산(414.2m)-357.8m봉-302.3m봉-중원터널-갈마치고개-이배재고개-망덕산(498.9m)-검단산(536.4m)-남한산성 남문-청량산(497.1m)/수어장대(482.6m)-남한산성 서문-남한산성 북문-402m봉-동장대터-남한산(522.1m)-338.1m봉-303.1m봉-은고개/엄미리고개-삼거리-425.8m봉-용마산(596m)-536m봉-두리봉(569m)-양자골고개-검단산(657m)-291.9m봉-바깥창모루
●먹거리: 생수500cc 보온병500cc, 땅콩크림빵2, 단백질바2, 맛동산
●준비물: 고아텍스, 바람막이, 상의, 체인젠, 스틱, 헤드랜턴, 후레쉬, 모자, 장갑2, 충전지2, 충전짹, 휴지, 물티슈
●거리: 약 41.1Km, + 20.4km
●소요시간: 15.38h, +7.43h
●누구랑: 나홀로
●경비: 1구간(쟈철,버스, 편의점8,400, 태재고개7,300, 버스,자철), 2구간(버스, 편의점5,000원, 자철)
●날씨: -8~4, 1~10
●산행경과:
* 1. 16.(화) 41.1km
- 00:37 : 사거리
- 00:55 : 무푸레고개
- 01:12 : 법화산(383.3m)
- 01:48 : 무등치
- 02:23 : 317.8m봉/ 육각정
- 02:46 : 대지고개
- 03:09 : 대지산(326.2m)
- 03:28 : 329m봉
- 04:05 : 불곡산(344.5m)
- 04:38 : 태재고개
- 04:42~05:16 : 편의점
- 07:09 : 응달평산
- 07:23 : 영장산(414.2m)
- 08:10~15 : 간식
- 08:26 : 333.4m봉
- 08:42 : 고불산(321m)
- 08:52 : 갈마치
- 09:37 : 이배재
- 09:42~48 : 간식
- 10:37 : 망덕산(498.9m)
- 10:58 : 만수천약수터
- 11:18 : 검단산(523.9m)
- 12:03 : 지화문
- 12:40~50 : 수어장대/청량산(497.1m)
- 13:33 : 전승문(북문)
- 14:34 : 남한산(522.1m)
- 15:53 : 303.1m봉
- 16:11 : 은고개
* 1. 18.(목) 20.4km
- 09:07 : 은고개
- 10:17 : 희망봉
- 11:12 : 용마산(596m)
- 11:32 : 고추봉
- 11:54~12:02 : 행동식
- 12:20~32 : 검단산(657m)
- 13:24 : 안창모루갈림길
- 13:40 : 창모루마을
- 13:55 : 월남전 참전기념탑
- 14:22 : 구당 유길준묘소
- 15:19~23 : 검단산(657m)
- 15:35~42 : 행동식
- 16:22 : 371.3m봉
- 16:50 : 팔당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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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단지맥(黔丹枝脈) 이란?
칠장산에서 분기한 한남정맥은 석성산을 거쳐 선장산(349.7m) 북쪽 1.7km 지점인 용인 향린동산(88C.C.)에서 두갈래로 산줄기가 분기되는데 한남정맥은 아스팔트 도로따라 경부고속도로를 가로질러 아차지고개를 지나 수원 광교산으로 이어가고, 또 하나의 산줄기가 향린동산(88C.C.)에서 서북쪽으로 분기해서 법화산(法華山, 383.3m), 불곡산(佛谷山, 344.5m), 영장산(靈長山, 414.2m), 검단산(黔丹山, 536.4m), 청량산(淸凉山, 497.1m), 남한산(南漢山, 522.1m), 용마산(596m), 검단산(657m)을 거쳐 경안천이 한강에 합수하는 팔당댐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45.6km인 산줄기이다. 검단지맥의 서쪽은 탄천, 동쪽은 경안천을 경계지으며, 경안천이 한강에 들어가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데, 산줄기의 끝자락이 팔당댐 건설로 강이 수위가 높아져 정확한 지점을 특정하기 곤란하므로 팔당댐을 지맥의 종착점으로 본다. 검단지맥에는 검단산((黔丹山)이 두 개 있는데, 팔당호 직전의 검단산이 더 높고 이 산줄기의 최고봉이라 검단지맥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또한 검단지맥 남한산에는 남한산성이 축조되어 있어 이 산성을 통과한다. 경안천이 한강을 만나는 합수점 바로 위쪽에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한강기맥 두물머리가 위치해 있는데, 그 인근지역에 한강기맥, 천마지맥, 앵자지맥, 검단지맥 등 4개의 기맥/지맥 산줄기 끝점이 한 군데로 모이는 지형을 이루고 있다. 검단지맥의 검단산(黔丹山, 657m)에서 지맥의 끝을 산줄기가 다하는 하남시 창모루마을 한강변에서 그 맥을 한강에 넘겨주는 경로로 잡기도 한다. 이 경우 날머리 교통이 매우 수월하다.
♤ 검단지맥 개념도
♤ 검단지맥을 지나는 동네
* 용인시(龍仁市)
용인시는 '땅모양이 거북과 같다'하여 금구음수형(金龜飮水形, 거북이 물 마시는 모습),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 거북이 뻘에 묻힌 모습), 영구하산형(靈龜下山形, 거북이 산에서 내려오는 모습), 부해금구형(浮海金龜形, 바다 위로 거북이 떠오르는 모습), 금구입해형(金龜入海形, 거북이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 금구입수형(金龜入水形, 거북이 물로 들어가는 모습), 구갑주형(龜甲胄形, 거북 등 모양), 금구하전형(金龜下田形, 거북이 밭으로 내려 오는 모습) 등등 여러가지 모습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풍수지리에서 얘기하는 명당보국의 길지로 알려진 곳이 많다. 풍수에서 거북은 부귀와 장수 그리고 번창을 상징한다. 또한 풍수에서 형상이 제일 많은 대표적인 동물이 거북이고, 하늘의 기(氣)을 먹고 사는 영험하고 신성한 동물로 알려진 거북은, 십장생(十長生) 중의 하나로 팔괘를 완성하는데 낙서를 제공한 동물이 거북이다. 풍수에서는 이러한 거북을 금구(金龜)라고 부른다. 수지구가 거북이 머리에 해당하며, 용인시청이 있는 곳이 거북이 배에 위치하고 있다 한다. 용인지방의 지리적 특성 중의 하나는 경안천, 탄천, 오산천, 청미천, 진위천, 안성천 등 대소 하천이 모두 용인에서 발원하여 인접 시.군으로 흘러 나가고 있다는 것인데, 이와 같은 현상은 용인지방이 분지를 형성하면서 인접 시. 군을 내려다 보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멸오'나 '용구(龍駒)', '구성(駒城)'이 ‘높다’는 의미에서 표기된 지명이라면, 이미 삼국시대에 이와 같은 용인(龍仁)의 지리적 특성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용인시(龍仁市)에서 '용(龍)'자가 들어가게 된 유래에는 이런 설화가 내려온다. 용인시의 좌측으로는 투구봉이 있고 우측으로는 칼봉이 자리잡고 있는데(봉우리의 형상이 투구와 칼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투구봉과 칼봉 사이에는 넓은 터를 마을 사람들은 '장군대지형의 땅'으로 믿고 있다. 장군이 무술을 연마하기에 꼭 알맞을 정도의 넓은 지형이다. 옛날에 남씨 문중에서 이곳에 묘를 썼는데, 그후 얼마 안 있어 그 문중 가운데 한 집에서 아기장수를 낳았다. 아기는 낳은지 사흘 만에 옆구리에 날개가 돋아났으며, 힘 또한 장사여서 상대할 사람이 없었다. 아기장수가 태어날 무렵은 당파싸움이 치열하던 때로, 자신의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 서로간에 암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혹여 다른 집안 자제 가운데 훌륭하게 될 소지가 있는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는 물론 그 집안 전체를 몰살하였다. 열세에 몰려 있던 남씨 문중에선 아기장수가 태어난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될 것이라고 불안해했다. 남씨 문중에서는 전체 회의를 열어 숙고한 끝에 아기장수가 성장하기 전에 처단할 것을 결의하였다. 워낙 힘이 센지라 여럿이 커다란 바위로 눌러 죽였고, 아기를 양지 쪽에 묻어 주려고 땅을 파 보았더니, 거기에서 투구와 칼이 나왔다고 한다. 한편 남씨 가문에서 아기장수가 태어날 때 장군대지형에서 마주 보이는 액교산에 있는 바위에서 용마(龍馬)가 나와 울었다고 한다. 이 용마는 아기장수가 죽자 태울 주인이 없음을 슬퍼하며 성산(城山, 석성산)을 향해 달려 나갔다. 현재 고림리의 액교산에는 용마가 났다는 용마바위가 아직도 전하는데, 용마가 몸부림치며 울부짖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지역은 이런 설화가 많다. 「고장군 묘소 전설」, 「아기장수와 용마바위」, 「유방리의 남씨네 아기장수」등이 내용이 비슷하다. 이것이 훗날에 조선시대의 남이장군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이런 전설들이 전해져 삼국시대의 구성현(駒城縣)이 고려초 용구현(龍駒縣)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통합포털에서 발췌정리]
* 광주시(廣州市)
경기도 중남부에 있는 시로 동쪽은 여주시, 서쪽은 성남시, 남쪽은 용인시·이천시, 북쪽은 하남시와 한강을 경계로 남양주시와 접하고 있다. 시청은 경기도 광주시 송정동에 있다. 동쪽에는 정암산(正巖山, 403m)·해협산(海狹山, 531m)이 남종면에 입지하고, 앵자봉(鶯子峰, 667m)·천덕봉(天德峰, 635m)이 여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에는 불곡산(佛谷山, 313m)·검단산(黔丹山, 535m)이 성남시와, 남쪽에는 해룡산(海龍山, 367m)이 이천시와 접하고 있다. 중앙에는 용마산(596m)·태화산(泰華山, 644m)·무갑산(武甲山, 578m)·관산(冠山, 556m)이 있으며 이들 산지 사이로 남한강의 지류가 흐르면서 주변에 좁은 곡저평야를 형성하고 있다.용인에서 발원하는 경안천(京安川)은 광주시의 서부를 복류하면서 능원천(陵原川)·직리천(直里川)·중대천(中垈川)·목현천(木峴川)과 합류하고 초월읍에서 곤지암천(昆池巖川)과 합류하여 남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남한강은 군의 북쪽을 동서로 흐르고 있다. 산지가 많아 지역 간의 교류를 위해 일찍이 고개가 개발되었는데 그중에서 성남시로 통하는 갈마치(葛馬峙)·태현(台峴)·곧은골고개·이배래고개·새나리고개, 이천으로 통하는 넓고개, 용인으로 통하는 봉골고개·부천당고개·말치고개가 있다. 삼한시대에는 광주를 중심으로 일어난 마한이 지금의 군청소재지인 경안에 도읍을 정하여 광주의 별호를 회안(淮安)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백제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여 년 동안 도읍을 하였던 곳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일대였다. 이곳은 오늘날 서울시 송파구에 속해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광주지역에 속해 있었다. 한강유역에 도읍했던 백제는 국력이 날로 신장해 근초고왕대에는 고구려와 싸워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까지 성장하였다. 그러나 475년(문주왕 1)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개로왕이 피살되고 백제는 공주로 천도했으며, 이후 76년 동안 광주지역은 고구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유적과 몽촌토성에서 발견되는 고구려 토기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551년 광주지역은 백제·신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탈환되어 잠시 백제의 영역에 속했지만, 553년(진흥왕 14) 나제동맹을 파기한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뒤에는 신주(新州)로 되었다가 660년(태조무열왕 7)에 한산주(漢山州)로, 다시 756년(경덕왕 15)에 한주(漢州)로 개칭되었다. 이 지역은 당시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를 합한 지역만큼 넓었던 신주와 한산주·한주의 읍치(邑治)지역으로서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였다. 940년(태조 23)에 한주는 현재의 이름인 광주로 개칭되었고, 983년(성종 2)에 전국을 12도로 나눌 때 광주목을 두어 관내도(關內道)를 다스리게 하였다. 세종 때 진을 두어 광주목 진영소속으로 여주목·이천도호부·양근군과 지평·음죽·양지·죽산·과천의 5현을 두었다. 1566년(명종 21) 방어사와 토포사를 겸하였고 1577년(선조 10) 부(府)로 승격되어 방어사를 겸하였고 1592년의 임진왜란 때는 수어부사(守禦副使)를 겸하였다. 1623년(인조 1) 남한산성을 쌓고 주치(州治)를 옮긴 뒤 1630년 광주부윤으로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45일간 항쟁의 격전을 치러 국난극복의 보루가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세종 때의 상신인 맹사성(孟思誠), 세조 때의 대신이며 학자인 최항(崔恒), 임진왜란 때의 명장 신립(申砬) 등이 있으며, 묘가 모두 군내에 있다. 또한 실학자 안정복(安鼎福)도 이곳 출신이다. 1895년(고종 32)에 다시 광주군으로 되었으며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헌릉(獻陵)이 대왕면에 쓰여진 뒤로는 광릉(廣陵)으로 별칭되기도 하였다. 또한, 한강과 경안천의 수로를 통한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사옹원(司甕院) 분원(分院)이 설치되어 분원백자의 산지로 유명했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백자 요지만도 85개 소에 달하고 있다. 1917년에는 군청이 남한산성에서 경안리로 이전되었고, 근대의 인물로는 역대의 시가를 모아 『가곡원류』를 편찬한 안민영(安玟英), 신소설 『추월색(秋月色)』을 발표하여 신문학 개척에 공이 큰 최찬식(崔瓚植), 민족대표 33인 중의 1인으로 3·1운동을 주도했던 이종훈(李鍾勳), 개화기의 선각자 유길준(兪吉濬), 근대의 정치가였던 신익희(申翼熙) 등이 있다. 1963년에 구천면·중대면·언주면과 대왕면의 일부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고, 1964년 중부면 성남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3년에 성남시가 신설되면서 중부면 일부와 대왕면·낙생면·돌마면이 광주시에 편입되었다. 1979년 5월 1일에 광주면이 읍으로, 1980년 12월 1일에 동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 1월 1일에는 동부읍·서부면 및 중부면 산산곡리가 하남시로 승격, 분리되어 군세가 일시 약해졌으나 수도권 위성지역으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2001년 3월 21일에 군에서 시로 승격되었으며, 오포면도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4년 6월 21일에 초월면과 실촌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2011년 6월 21일 실촌읍이 곤지암읍으로 2015년 10월 16일 중부면이 남한산성면으로 개칭되었다. 이 지역의 교통은 예로부터 중부내륙과 통하는 서울의 관문이었고 한강의 수운을 이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 이 지역을 지나는 도로는 중부고속도로가 군의 중심부로 서북·동남향으로 지나고 국도 3호선이 이천시에서 곤지암읍과 광주시내를 거쳐 성남시로 들어가고 국도 43호선이 여주시에서 들어와 남한산성면을 동서로 지나고 있다. 철도로는 경기도와 강원도를 잇는 경강선이 2016년부터 부분적으로 개통하여, 광주시를 지나고 있다. 교통이 편리하고 제조업체가 많이 입주하고 있으나 전 토지의 37%가 개발제한 구역에 묶여 있어 개발이 억제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광주의 생활권 가운데 고속도로가 지나는 경안동·남한산성면·초월읍 등은 서울시의 영향권에 있다. [통합포털에서 발췌정리]
* 성남시(城南市)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한 시로 서울의 위성도시 중 하나로서 서울 도심에서 남동쪽으로 약 26km 거리에 있으며 경기도에서 수원시, 고양시, 용인시, 화성시에 이은 인구 5위의 도시이며 경남 창원시를 포함해 전국에서 6번째로 인구가 많은 기초단체다. 남으로는 용인시, 서로는 청계산을 능선으로 과천시, 의왕시, 동으로는 광주시, 북으로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강남구, 송파구 및 하남시에 접하고 있다. 동쪽으로 남한산(522m)과 청량산(479m)·검단산(535m)·불곡산(312m)의 긴 산줄기를 경계로 하남시·광주시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청계산(618 m)을 경계로 과천시와 의왕시를 접하며, 북쪽은 서울특별시 송파구·강남구·서초구, 남쪽은 용인시와 접한다. 검단지맥에 둘러싸여 탄천을 따라 남북으로 긴 협곡 분지 지형이며, 1989년 성남시 남부에 건설된 분당신도시 및 2000년대에 건설된 판교신도시는 성남 구시가지와 그린벨트로 생활권이 단절되어 있어 시가지와 생활권이 양분되어 있다. 시청은 중원구 여수동에 있고, 수정구, 중원구, 분당구의 3개의 일반구가 설치되어 있다. 수도권에서 제일 먼저 계획적으로 개발된 위성도시로 년도순으로 과천시, 안산시, 광양시, 화성시, 계룡시 순으로 발생했다. 성남이라는 지명은 남한산성의 성곽 남쪽의 일원에서 본딴 것으로 성곽 남쪽이라는 뜻에서 유래됐다. 남한산성의 동서남북의 관문 중 남문 앞쪽을 제외한 나머지는 경기도 광주시가 관할하고 있고, 유일하게 남문 앞 지역만이 성남시 관할로 있는데 실제로 남한산성 남문 앞쪽은 성남시 지역에 속한다. 한자 역시 城南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옛 광주군에서 분리되었던 때부터인 1973년에 시로 승격되면서 성남이라는 지명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1914년 이전의 역사는 광주시/역사와 같다. 1914년까지는 광주군 세촌면, 대왕면 남부, 돌마면, 낙생면 일대였다. 그러다가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세촌면이 중부면(현 남한산성면)에 흡수됐다. 그러나 구 세촌면 지역의 행정적 불편함으로 인해 1946년 구 세촌면 지역에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가 설치됐다. '성남'은 남한산성(城)의 남쪽(南)에 있다는 의미로 지어졌으며, 이때부터 성남이란 지명이 공식적으로 행정상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64년 중부면 성남출장소가 광주군 직할 성남출장소로 확대됐다. 1971년 광주군 직할 성남출장소가 중부면 일부뿐만 아니라 잔여 대왕면, 돌마면, 낙생면까지 포괄하는 경기도 직할 성남출장소로 확대됐다. 1960~70년대에 서울의 빈민들을 집단 이주시키기 위한 광주대단지가 성남출장소 지역에 지어졌지만, 미흡한 도시계획과 생업의 어려움, 정부의 외면 등 각종 문제점이 노출되어 결국 1971년 광주대단지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광주대단지 주민들의 요구사항 중 하나가 성남출장소의 성남시 승격이었고, 서울시가 광주대단지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전부 들어줌에 따라 1973년에 광주군 성남출장소(중부면 일부, 대왕면, 돌마면, 낙생면)가 성남시로 승격됐다. 1988년 수정출장소와 중원출장소를 설치하고, 1989년 5월 1일에 구제를 실시해 두 출장소를 수정구, 중원구로 승격 설치했다. 1991년 9월 17일에 분당신도시를 관할로 하는 분당구를 중원구에서 분리해 신설했다. 1990년대 이후 신도시 개발 열풍에 따라 중원구 남부지역에 분당신도시가 조성되어 분당구로 분구되었다. 이어서 2000~10년대에는 판교신도시와 판교테크노밸리가 조성되었다. 이로써 성남시는 서울시에 일방적으로 종속된 베드타운에서 벗어나서 자체적인 생활권을 이루기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2020년대 현재까지도 위례신도시가 조성/분양되면서 꾸준히 세가 확장되었다. 즉, 사실상 성남시 전체를 신도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울 중앙부로부터 20km 반경, 수원시 21km 반경에 있으며, 철도는 없으나 분당선의 각 역을 통하여 관내 교통과 연계되고 있다. 도로교통은 경부고속도로와 용인서울고속도로가 시의 서남부를 통과하며,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를 주축으로, 잠실방면의 도로와 광주-안양간 도로, 서울 지하철 8호선과 분당선 전철이 통과해 타 지역과의 소통이 편리하다. 그리고 기존 한국철도공사 분당선의 혼잡도 완화와 표정속도 증가를 목적으로 정자역에서 판교신도시를 거쳐 강남역을 잇는 신분당선이 2011년 10월 28일 개통하였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하남시(河南市)
경기도 중동부에 있는 시로 서울의 동쪽 관문이며, 서울에 직장을 두고 있는 주민이 많다. 남쪽으로 광주시, 서쪽으로 서울특별시 강동구와 송파구, 서남쪽으로 남한산을 끼고 성남시, 북쪽으로 한강을 경계로 구리시, 남양주가 있다. 검단산, 금암산, 남한산 등 검단지맥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수도권의 개발과 성장, 중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1989년에 하남시로 승격되어 광주군에서 분리되었다. 시의 이름인 '하남'은 이름을 지을 당시 백제의 도성으로 알려졌던 하남위례성에서 따온 것이다. 시로 승격하기 전의 지명이 '동부읍'과 '서부면'이라 이름으로 쓰기엔 부적절했기 때문이다. 한남정맥의 영향으로 대부분 산지를 이루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서울의 침상도시로 자리잡았다. 서울과 인접하여 하나의 도시생활권을 이루고 있다. 백제 시조 온조왕 14년(기원전 5년)에 하남시 일대를 도읍으로 정하고 하남 위례성이라 부른 이래, 475년까지 백제의 도읍지였다.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한주를 광주로 개칭하였다. 1577년(조선 선조 10년)에 광주군 동부면이 되었으며, 조선 전기까지 광주목, 광주부의 중심지였다. 읍치가 서부면 궁촌, 즉 지금의 춘궁동에 있었고, 향교가 동부면 교리, 지금의 교산동에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병자호란 이후 읍치가 남한산성으로 이전했다. 광주시/역사 항목을 보면 과거의 광주 고을 영역이 광대했고, 하남의 위치가 중심지로써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80년 광주군 동부면이 동부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에 광주군 동부읍과 서부면에 중부면 상산곡리를 합쳐 하남시로 승격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남쪽에 청량산이, 중앙에 객산과 금암산이, 동쪽에 검단산과 두리봉이 솟아 있다. 검단지맥의 줄기로 둘러 싸이고 강원도 산지에서 흘러 내리는 한강 지류가 북으로 흐르고 있어 산과 강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한강은 팔당을 지나 남양주시와 경계를 이루며 북서류한다. 한강 연안에는 범람원 및 하안단구가 형성되어 있다. 검단산을 중심으로 산에 둘러싸인 분지로 북쪽, 동쪽에 한강이 둘러 동양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입지다. 전체 면적이 93.04 ㎢이고 이 중 녹지지역이 84.11%인 78.26 ㎢, 전체 면적의 77%가 그린벨트다. 녹지와 그린벨트의 높은 비율때문에 2010년도 이전에는 경기도 중 많이 낙후된 지역이었다. 하지만 서울에 땅이 부족해져 그린벨트가 일부 해제되고 신도시가 개발되자 상황이 변한다. 하남시는 도로를 통한 서울 접근성이 가장 좋은 경기도 지역중 하나다. 과천과 비교해 보면, 과천은 서울과 연결된 도로가 제한적이다. 과천뿐만 아니라 경기도 대다수는 서울 종심 진입이 어떤 형태로든 제한적이다. 그러나 하남은 시내도로를 통해 서울 종심에 가장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다. 도로의 시 경계 표시가 없다면 서울로 착각할 정도다. 위례신도시와 미사강변도시는 시내가 완벽하게 붙어 있어 자세히 보지않으면 서울과 하남의 경계를 알수 없고 하남시의 일부 지역은 지역번호를 서울 번호인 02를 사용한다. 평지가 적지만 서울과 인접한 지역이 많아 큰 약점이 아니다. 경기도 남부와 북부의 교차점으로서 남부와 북부지역 모두 교류가 활발하며 남부와 북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도 있다. 한때 하남시에는 전철역이 존재하지 않았었지만 서울지하철 5호선을 미사지구로 연장하는 방안이 검토되었었으며, 2014년 9월 29일에 착공되었으며, 2020년 8월 8일에 하남선 1단계 구간(상일동역 ~ 하남풍산역)이 개통됨으로 인해 하남시에도 지하철역이 생겼으며, 하남선 2단계 구간(하남풍산역 ~ 하남검단산역)도 2021년 3월 27일에 개통되었다. 후일에는 서울지하철 3호선도 연장을 기다리며, 위례와 관련한 각종 경전철의 철도도 개통될 것이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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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부 구간거리
지맥분기봉(335m)-1.5km-물푸레고개-0.6km-법화산-3.5km-대치고개-0.9km-숫돌봉(-1.0km)-2.3km-불곡산-2km-태현-1.9km-새마을고개-2.4km-새나리고개-1.7km-영장산-3.8km-갈마치고개-1.9km-이배재-1.5km-망덕산-2.1km-검단산-2.8km-청량산-3.4km-남한산-3.7km-은고개-6.1km-검단산-2.9km-팔당댐
* 구간거리
- 접속: 지맥분기점에서 물푸레고개 1.5km 구간은 골프장(88C.C.) 출입제한으로 통행 불가
- 용인 물푸레마을 휴먼시아3.5단지, 아너스빌 4단지 앞 사거리 ~ 물푸레고개 1km
- 물푸레고개 ~ 이배재/ 2차선도로 26.6km (대지고개 우회 2km)
-. 물푸레고개 ~ 태재 13.9km
-. 태재 ~ 이배재 12.7km
- 이배재/ 2차선도로 ~ 팔당댐 삼거리(45번국도) 26.3km
-. 이배재 ~ 은고개 15.3km
-. 은고개 ~ 검단산 7.9km
-. 검단산 ~ 바깥창모루 3.1km
-. 검단산 ~ 배알미리 3.5km
* 식수 공급지 및 산행 정보
- 물푸레 3,4단지: 편의점
- 태재고개: 음식점(추어탕, 설렁탕), 편의점, 가락공판장
- 남한산성 전승문 아래 식당가
- 은고개 식당가: 복가네보리밥집 등
- 낚시터: 간이매점
- 검단산 정상 막걸리
- 바깥창모루마을: 편의점
* 서울에서 검단지맥 분기점 내려가는 길
- 자쳘: 분당선 왕십리~도곡, - 신분당선 양재~보정(1, 2번출구), - 에버라인 어정역
- 1241번, 31번 경기버스: 보정역 4번출구 ~ 청덕동 물푸레 3,5단지 아파트 버스정류장, 0.25h, 1,500원
- 택시: 보정역 ~ 물푸레마을 아너스빌 4단지, 구성역 ~ 향린동산 분기점, 15,000원
- 택시: 어정역(1번출구) 어정사거리 ~ 물푸레마을 휴먼시아 3.5단지 정류장, 향린동산 분기점
* 검단지맥 하남시 끝머리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창우동 바깥창모루-하남버스환승공영차고지~강변역: 9304번 광역버스
- 창우동 바깥창모루-안창모루-버스환승공영차고지-산곡2교-하남검단산역(5호선), 1.2km, 도보 17분
- 배알미동 팔당댐~하남: 카카오택시, 히치, 버스? (교통편이 나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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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단지맥과 관악지맥은 문수산 보구곶리를 향해 갈길이 바쁜 한남정맥에서 수도 서울로 떨어져 나오는데 그 중에 검단지맥은 옛 광주부를 거쳐 한강의 두물머리 팔당에 이른다. 화가 미치지 않는 적당한 거리에서 서울을 오래 바라보고자 누울 자리를 마련한 석인리(율동)에 접어들면 잊혀진 광주군 돌마면의 소재가 다시 떠오르고, 서울시가 백기투항한 8.10성남민권운동 일명 '광주대단지사건'도 처음 알게 되었다. 검단지맥을 밝게 빛내는 별은 김수환추기경, 고불 맹사성, 남한산성이 그 주인공이다. 지맥은 마지막 검단산에서 두 갈래로 나눠지기도 하는데 우연하게도 그 두 지점의 가운데가 북한강과 남한강 물이 합수해 수도 서울로 쏟아져 들어오는 도미협곡이다. 그곳에 오래전 이야기인 도미설화가 검단지맥을 끝낸 맥꾼을 기다리며 반갑게 맞아준다. 맥꾼이 전국 방방곡곡 지맥을 찾으며 지맥과 연관된 인문을 넓힌다는 의미에서 도미설화를 찾아 후기 말미에 소개해드렸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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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했습니다. 분기점에서 골프장으로 진입할려면 정문을 피해 주차장으로 곧바로 넘어서야 하는데 그럴려면 높다란 울타리는 없는지 그러다 만약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다시 택시를 불러타고 물푸레마을로 이동해야 하고, 자칫 경비원에게 붙들려 경찰에 인계된다면 건조물침입죄로 시간을 축낼 수도 있겠지요. 심야에 경비들이 순찰을 도는건 아니라서 설령 통과한다 해도 나이가 있으니 자랑할 일은 아닌것 같았습니다. 물푸레마을 3.5단지에 도착해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청덕배수지를 지나 약 20분 진행하여 물푸레고개에 도착합니다.
♤ 향린동산 지맥분기점(330m봉)/ 구계/ 삼읍동봉(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기흥구 동백동 → 청덕동)
검단지맥은 향린동산 지맥분기점에서 서쪽으로 내려서면 정문 경비실을 지나기에 제지를 당하고 북쪽, 향린동산 쪽으로 울타리를 우회하여 골프장 영선사가 있는 주차장 지점으로 직접 내려서야 한다. 88C.C.골프장으로 진입하여 주차장을 지나 클럽하우스 뒤편 건물에서 국기게양대 88개를 세워놓은 능선에 올라 302m봉을 향해 마루금을 따른다. 14번홀을 따라 골프장 도로에서 올라서면 골프장은 검단지맥 능선에서 동서코스로 나뉘고, 골프장 도로에서 가파르게 왼쪽 능선으로 올라서서 무푸레고개로 진행하지만 이 1.5km 구간때문에 골프장 측과 불필요한 마찰 촉발을 우려하여 우회하는 경우가 대세이다.
♤ 물푸레고개(255m)/ 용인시 기흥구 - 처인구
무푸레고개는 용인시 기흥구 청덕동(淸德洞)에서 처인구 모현읍(慕賢邑) 능원리(陵原里)를 넘어가는 고개이고, 청덕동은 포장까지 되어있는 도로이나 모현읍쪽은 88C.C. 철책선으로 막혀있다. 탄천(炭川)의 발원지 가운데 기흥구의 마북동과 청덕동(마북천) 지역은 ‘예부터 물푸레나무가 많고 항상 맑고 푸른 물이 흘러내린다’하여 '청덕리(淸德里)', '물푸레골'이라 불리던 곳이다.
♤ 탄천(炭川)
탄천은 예부터 삼천갑자 동박삭의 전설이 내려오는 한강의 지류이다. 동방삭(東方朔·기원전 154~93)은 한(漢) 무제(武帝·기원전 156~87)에게 스스로를 천거해 미관말직에 등용된 이래 평생을 조정에 ‘은거’했다는 익살과 해학의 정치가였는데 언젠가 한국에선 장수(長壽)의 대명사인 ‘삼천갑자 동방삭’으로 변했다. 원래 수명이 삼십(三十)이었던 동방삭은 십(十)에 한 획을 더 그은 천(千)으로 바꿔 삼천갑자를 살게 됐다. 이에 동방삭을 잡으러 온 저승사자가 성남 분당의 탄천(炭川·숯내)에서 숯을 빠는 꾀를 냈다. 길을 지나던 동방삭이 “내 삼천갑자를 살지만 이런 기괴한 모습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가 신분이 탄로나 붙잡히고 만다. 이것이 전해오는 탄천 이름의 또다른 전설이다. 이같은 전설을 배경으로 용인시에서는 죽전 1,2동이 공동 개최하는 탄천문화제가 해마다 죽전체육공원과 탄천 일대에서 펼쳐지고 있다. 특이하게 남에서 북으로 흘러 용인, 분당, 판교, 송파, 강남 지역을 관통하는 준용하천이다. 용인시 수지구, 기흥구에서 발원하여 서울 송파구와 강남구를 거쳐 양재천과 합해져 한강으로 유입되는 한강의 제1의 지류(支流)로 총 길이 35.6km, 유역면적은 302km2이다.
♤ 법화산(法華山, 383.3m)/ 구계/ 삼읍동봉(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기흥구 청덕동 → 마북동)/ 4등삼각점(수원 472/ )/ 정상석, 데크목쉼터, 운동기구
왼쪽으로 0.1km 벗어나 있는 법화산을 다녀온다. 지맥의 왼쪽이 기흥구 청덕동에서 마북동으로 바뀐다. 법화산은 불경 중의 하나로 모든 경전의 왕이라는 법화경에서 따온 이름으로 용인시 서북부, 북부지역에 위치한 구성지역의 중심 산이다. 《조선지명지》에는 읍내면 상마곡(마북동)·동변면 수청동(청덕동)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수지구 죽전동·기흥구 마북동·청덕동·언남동과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등 3개구 모두에 걸쳐있다. 1861년(철종 12) 고산자(古山子)김정호가 편찬·간행하고 1864년(고종 1)에 재간한 분첩절첩식의 전국 지도첩.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미흡한 조사탓인지 향수산(香水山)으로만 그려져 있다. 또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의 천주교 용인 공원묘지 부근에서 다른 물줄기 하나를 만들어 경안천으로 흐른다. 현재 구성읍 청덕동의 88C.C.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레이크사이드C.C. 등 골프장을 사이에 두고 향수산과 연결되고 있으며 마성터널을 사이에 두고 석성산쪽은 동백동, 법화산 쪽은·청덕동으로 나뉘는 곳으로 산은 높지 않지만 여러 갈래로 나뉘어 여러 마을들을 감싸 안고 있는 형세다. 법화산은 주변의 형세가 타지역보다 높아 여러 신하가 임금에게 조례를 올리는 군신봉조형(群臣奉朝形) 같다는 전설처럼 예로부터 명당보국(明堂保局)의 길지로 알려진 곳이다.
♤ 346.1m봉
참나무에 법무연수원과 천주교공원묘지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박혀있다.
♤ 작은 무등치(305m, 小無等峙)
작은무등치는 용인시 기흥구 언남동에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사기막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이정표에는 왼쪽으로 마북캠퍼스가 0.5km이고, 진행방향으로 천주교공원묘지를 안내한다. 과거 능원리 오산리 일대에서 용인의 치소(治所)였던 구성으로 가는 큰 길이었다. 이미 『여지도서』에 명칭이 나타나며 이후 역대 <읍지>류나 각종 지도에 어김없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대부분의 지도에 그려져 있는 도로가 광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를 보면 당시에는 중요한 길목에 있는 고개였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웃에 있는 대지고개는 4차선 대로가 되었지만 이전에는 지게나 지고 다닐 수 있는 오솔길에 불과했고 마을 남쪽의 물푸레고개도 무등치보다 큰 고개는 아니었다. 조선시대 지도나 기록상으로만 보아도 300여 년에 가까운 연륜을 가진 고개인 것이다. 고개를 나타내는 한자어로 령(嶺), 현(峴), 치(峙), 천(遷) 등이 있고 한글로는 고갯마루, 등성마루, 언덕 등이 있는데 하늘마을에서 성현마을까지 단국대학교를 감싸안고 있는 형국의 작은 무등치(無等峙, 일명 무등재), 도태굴고개, 큰무등치, 응달길고개로 이어지는 법화산 자락은 산등성이에서 다시 천주교 용인공원묘지의 능선을 따라 가다가 수지에서 광주 가는 국도 제43호선 대지산 대지고개에서 과협한 다음 북쪽으로 또 다른 산봉우리 하나를 만든다. 바로 불곡산(344.5m)이다.
이 구간을 지나며 멀리 양지리조트 불빛이 보이는데 몇 번을 찾아보게 되네요. 앵자에서 독조지맥이 갈라져 나가는 의미있는 곳이죠. 주간엔 찾기 힘들고 야간이기에 주어지는 특혜 같습니다.
♤ 326.7m봉/ 마북산
무등치를 지나 5분 가량 오른 무명봉이다. 왼쪽 아래로 용인천주교공원묘지가 보인다. 좌틀로 내려선다. 마북산이 있는 마북동(麻北洞)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 있는 동으로 옛날 상마곡 마을에 마운사(痲雲寺)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그 사찰의 중이 마의를 입고 다녔으며, 또한 이곳이 면소재지의 북쪽에 위치한다 하여 마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구성읍 마북리의 마꼴은 ‘막혀 있는 골짜기'의 뜻을 가진 땅이름이다.
故김수환추기경님 묘소를 방문하고 싶어도 워낙에 야심한 밤인지라, 선암지맥과 팔공지맥 사이에 김수환추기경님의 생가가 있습니다. 생가와 묘소가 검단지맥-한남정맥-백두대간-낙동정맥-보현지맥-선암지맥의 산길로 연결이 되는군요. 산경표를 따라서 지맥꾼만의 계산 방법이지요.^^
♤ 용인천주교공원묘지
공원묘지 마루금에 서있는 이정표의 죽전야외음악당 방향을 계속 따른다. 용인천주교공원묘지는 1967년 명동성당에서 최초로 묘지를 개발하였으나 관리운영상의 어려움으로 1978년 8월초 서울교구청으로 이관되었으며 현재는 재단법인 천주교 서울대교구 유지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1998년 묘지가 만장 처리된 이후로 매장 묘지 분양은 하지 않고 있으며 천주교 신자들의 소요가 늘어나는데 비해 추가 묘지 확보가 어려워지게 되면서 1991년 6월부터 20년 기한제 묘지 제도를 실시해오고 있다. 한국인 최초의 주교이자 교구장이었던 노기남 대주교와 김수환 추기경을 포함한 사제 64명의 묘소가 있다.
♤ 큰무등치고개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과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를 잇는 고개이다. 왼쪽에 간이 화장실이 있다. 지맥은 계속 묘지 경계선을 따라 진행한다. 처인구 모현(慕賢)은 삼이나 목화의 실로 짠 천을 잿물로 삶고 물에 담갔다가 햇볕에 널면 빛이 바래는데 이런 포쇄 작업을 하던 곳이라 해서 쇄포면(灑布面)이라고 불렸는데 1411년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 12. 22.~1392. 4. 4)의 묘소를 능원리로 모시면서 고려말 충신을 사모한다 라는 뜻을 담아 모현(慕賢)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수지의 풍덕(豊德), 죽절(竹節), 단국대 앞의 성현마을 또한 단심가를 지어 부른 정몽주선생과 연관있는 지명이니 이쯤 되면 고김수환추기경님이 포은 정몽주선생의 나와바리에 들어와 계신게 아닌가 싶다. ㅋ
여기에서 미리 왼쪽으로 우회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한양 가는데 과천에서부터 기는 격이고요. 철탑까지 더 진행해야 합니다. 능선을 조금 따르다 왼쪽으로 십분 정도 내려서니 쉴낙원이 나오고 야간이라 차가 없어 도로를 뛰어넘으니 시간이 많이 절약되네요.
♤ 317.8m봉/ 육각정/ 운동기구/ 삼구봉(용인시 처인구, 기흥구 → 수지구)
지맥의 왼쪽이 기흥구 마북동에서 수지구 죽전동으로 바뀌는 삼구봉이자 삼읍동봉 지점이다. 317.8m봉에서 우틀하여 비포장 도로를 따라 공원묘지 외곽을 돌아간다.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서 광주시 오포읍으로, 대치고개로 43번 국도가 넘어가며 지맥을 잘라먹어 굴다리로 건너야 한다. 천주교공원묘원 최상단 322.1m봉에서 왼쪽 송전탑으로 가서 오른쪽 능선을 따르다 왼쪽으로 가파르게 치고 내려서면 쉴낙원 장례식장이다. 공원묘지 외곽도로를 따라 철망울타리의 철문이 나올 때까지 더 진행하여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유진레미콘을 통과하여 43번국도로 내려서면 굴다리가 가깝다.
♤ 대치고개/ 43번도로/ 돼지고개/ 대덕고개
대지고개로 내려서면 좌우로 굴다리를 찾아 통과해야 한다. 굴다리를 통과하면 다시 대지고개 정상으로 올라 마루금에 복귀하고 폐업한 산마루촌 가든 옆 샛길로 대지산에 오른다. 이곳이 평야지대도 아닌데 왜 큰 땅이라는 이름의 대지(大地)가 되었을까? 이곳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는 많은 문중의 족보에는 조상의 묘의 위치가 대부분 대지산(大地山) 선영이라고 땅지(地)자로 기록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마을에 내려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는 서울에서 임금님이나 관리들이 지방 나들이를 할 때 주로 사용하던 큰 길 중의 하나가 서울 양재와 판교를 거쳐 신갈로 이어지는 지금의 23번 국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임금님이 경복궁에서 아침을 먹고 행차를 하면 남산을 지나 서빙고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오면 점심때가 되어 말에게도 말죽을 먹였다하여 그 곳의 이름을 말죽거리(지금의 양재동)라 부르게 되었으며, 점심 후에 다시 발길을 재촉해 달래내 고개(지금 경부고속도로 위)를 지나 판교에 이르니 소나기가 쏟아져 운중천이 범람하여 길이 막히자 마을 주민이 널빤지를 가져다 임시가교를 설치하여 임금님을 무난히 건너게 하였다 하여 그곳을 '널다리' 즉 판교(坂橋)라 부르게 되었으며, 또 한참을 내려오다 보니 모처럼만에 그래도 다소 넓은 들이 나타나자 '이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한 백성이 농사를 지어 군량미를 조달하는 군량뜰(지금의 수지 레스피아 일원)이라고 말하자 임금님이 대지고개 쪽을 바라보며 '그래도 이곳은 꽤 큰 땅 이구먼!'하였다고 말하여 그 때부터 이곳을 큰 땅 즉 대지(大地)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임금님의 행렬은 계속되어 양고개(현 운전면허 시험장)를 너머 신갈 역말(지금 기흥구 신역동)로 이어진다. 역말이란 공무로 지방에 출장을 갈 때 하루 쉬어 가며 말에게도 저녁을 먹이고 재우던 곳이다. 특히 암행어사 이야기에 등장하는 마패에 그려져 있는 말의 수에 따라 이곳에서 말을 갈아타거나 재우고 먹일 수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서울에서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약 1백여 리 길목에는 역말이라는 지명을 지닌 곳이 더러 남아 있다. 그 예가 경기도 광주시 역동에도 남아있다. 이렇게 해서 임금님의 하루 행차는 역말에서 마무리 되며, 임금님의 발길 따라 수많은 지명이 지어지기도 하고 바뀌기도 하였던 것이다.
♤ 죽전음악당
한국토지공사가 지역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지역주민의 문화 향유 기회를 확대하기 위하여 택지 개발지구 내에 세웠다. 공사기간은 2004년 10월 28일부터 2005년 10월 31일까지였으며, 준공 후 용인시에 기증하여 현재 용인시가 관리하고 있다. 죽전야외음악당은 2006년 3월 23일 개관 하였으며, 죽전택지 개발지구 내의 숲속에 자리하고 있어 자연친화적인 문화공간의 특징을 갖고 있다. 최신식 조명 장치와 음향 설비를 구비한 수준 높은 야외 공연장으로 개관 이래 죽전 주민은 물론 용인 지역 주민의 생활 향상과 여가 활동에 크게 기여하는 문화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지리적으로 경부고속국도·영동고속국도와 가깝고, 단국대학교 교정과는 바로 이웃하여 접근성은 점점 좋아지고 있으며 나아가 개관 이래 지금까지 지역주민들의 문화 향수를 충족시켜주는 공연을 지속적으로 선보여 특색 있는 야외 음악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지산에서 숯돌봉을 다녀오시는 분도 계시더군요. 두 구간으로 나눠서 한다면 숯돌봉과 문형산을 다녀오심도 가능하겠습니다.
♤ 대지산(大地山, 326.2m)/ 3등삼각점(수원 320/ 1988 재설)/ 시계/ 삼읍구봉(용인시 수지구, 처인구 → 광주시 능평동)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1동과 처인구 모현읍, 광주시 능평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여러 지도에는 산명이 표기되어 있지 않으나, 읍지 등의 자료에 대치(大峙)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대지산은 “대치”가 변음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산은 크게 보아 동쪽과 서북쪽, 남쪽으로 능선이 뻗어 있으며, 동쪽에 비해 서쪽의 경사가 급하다. 동쪽으로는 숫돌봉(330m)과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부처당고개를 거쳐 불곡산과 연결되며, 남쪽으로는 대지고개를 거쳐 법화산으로 연결된다. 산의 남서쪽에 강남공동묘지가 있고, 동남쪽에는 채석장이 있어 산세가 많이 훼손됨에 따라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대지산 살리기 운동’이 전개되었다. 고개 남쪽에는 수원시에서 광주시로 이어진 국도 43호선이 동서 방향으로 지나고 있다. 용인시 최북단 죽전동에는 대지라는 마을이 있고 대지산이라는 산도 존재한다. 대부분 경주 김씨 문중소유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맥은 좌틀하여 내대지마을 죽전동 쪽이다.
♤ 광주시 오포읍(五浦邑)
광주시 오포읍은 2022년 9월 1일 신현동(신현리), 능평동(능평리), 오포1동(고산리, 추자리, 문형리) 및 오포2동(양벌리, 매산리)의 4개 행정동으로 분동되고 오포읍 소속 법정리는 일괄 법정동이 되며 폐지되었다. 대한민국 읍중 양산시 물금읍, 남양주시 화도읍에 이어 세번째로 인구가 10만이 넘는 대규모 읍이었으며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지명의 유래는 경안천을 중심으로 5개 (역말, 양촌, 허산이, 딴뫼, 구머니)의 보가 형성되고 있어 오포라고 칭했다. 동쪽으로는 초월읍, 서쪽과 북서쪽으로는 성남시 분당구, 남쪽으로는 용인시 모현읍, 남동쪽으로는 도척면, 남서쪽으로는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북쪽으로는 경안동, 광남동과 마주하였다.
♤ 329m봉/ 큰골산/ 삼시봉(광주시, 용인시 → 성남시)
지맥의 왼쪽이 용인시 죽전동에서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으로 바뀌는 삼시봉 지점이다. 야간이지만 주위에 고압선송전탑이 자주 보였고, 몇 발짝 내려서면 곧바로 휘남에고개이다.
♤ 성남시 둘레길/ 누비길
아~ 세상에!! 야간이라 눈에 띄이지 않은건지 준희선생님 산패는 은고개 내려서기 직전에 딱 하나 확인했습니다. ㅠㅠ
♤ 318.3m봉
불곡산능선사거리에서 3분 정도 올라선 밋밋한 봉우리이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높이 매어 있다는데 찾을 수 없고 구미32, 구미 31 등의 조그만 표지판이 나무에 붙어있을 뿐이다.
♤ 326.7m봉/ 불곡산 생태공원/ 팔각정/ 시계/ 삼동봉(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광주시 능평동 → 신현동)
한남정맥이 광교산에서 백운산을 통하는 마루금이 환하게 바라다 보인다. 청명지맥을 찾아보지만 아직 손대보지 않은 지맥이라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지맥이 성남시에서 내세운 누비길에 접어들어 고속도로 수준이다.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는 조선조말 대한제국 때까지 태현리(台峴里)와 신촌리(新村里)로 2개 마을이었다. 1914년 일제 강점기에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신촌리의 신(新)과 태현리의 현(峴)을 따서 신현리(新峴里)라고 하였으며 4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막골(東幕)·새말·태재(台峴)·퉁점골이다. 능평동은 포은 정몽주의 묘와 연관된 지명이다.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피살을 당하여 상여가 고향 영천으로 향하는 도중 풍덕천에 이르러 상여를 덮은 연이 날려 능곡에 떨어졌는데 연이 날라가 떨어진 장소가 지관이 살펴보니 천하 없는 명당인지라 이 곳에 묘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왕의 묘를 모실만한 명당 자리가 많은 동네라는 뜻으로 능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골안사거리 안부에서 4분 정도 진행하면 부천당고개입니다.
♤ 부천당고개(281m)/ 부처당고개/ 돌무더기
부천당고개는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과 구미동을 구분하는 능선상의 고개로 불곡산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골안사 남쪽에서 광주시 오포면 신현리 절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불곡산 일대에 부처지골, 절골, 불당골 등 불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은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청량산과 검단산의 남한산성 지대에서 성남시와 광주시, 용인시의 경계를 이루는 대지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에 있는 고개의 하나로, 동쪽으로는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로 이어진다. 이 산줄기에는 북쪽으로부터 갈마치고개, 곧은골고개, 새나리고개, 새마을고개, 부천당고개 등이 있어 동서간의 교통로 구실을 한다. 부천당고개 서쪽에는 탄천의 동쪽 연안에 구미동이 위치하고 있고, 구미동에는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이 있다.
♤ 불곡산과 한국전쟁
한국전쟁 때 전사한 장병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2013년 6월 20일 불곡산에서 발견되었다. 이 유해가 발견된 불곡산은 1951년 1월 25일부터 2월 18일 사이 서울 재탈환을 위해 벌인 썬더볼트(번개) 작전 중 국군과 미군 등 UN군과 북한군, 중공군간의 수도권 산악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격전지 중 하나인데 이 작전이 시행되기 직전에 국군과 UN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켜 통일을 눈앞에 두었지만 중공군 개입으로 1, 4 후퇴를 하게 되는 시기였다, 그러나 작전의 승리로 위기가 수습되자 UN국가들에 만연된 한국전쟁의 철군논쟁을 잠재우고 전투의지를 보다 확고히 하여 현재의 휴전선까지 진출하게 되는 발판을 만들게 되었다. 썬더불트 작전(Operation Thunderbolt)은 미 1,9군단, 국군 1,6사단과 터키 여단이 수리산~불곡산~앵자봉~여주를 연하여 중공군 인해전술에 맞서 한강이남지역에서 실시한 파괴적 위력 수색 작전이다. 1951년 중국 인민지원군 및 조선 인민군의 대공세에 맞서 울프하운드 작전 이후 매슈 리지웨이 장군이 실행한 유엔군의 반격 작전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이 전투를 한강 남안방어전(漢江南岸防禦戰)이라고 부른다. 경기도 남부 및 서울 남부 일대에서 반격을 가한 유엔군은 이후 서울 수복을 준비하는 데 수월함을 겪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은 중공군의 반격 작전에 의해 대한민국을 포기하라 지시했지만 울프하운드 작전에서 성공을 거둔 리지웨이 장군은 미 참모총장 콜린스를 설득해 이 작전을 개시했다. 용인을 빠르게 수복한 유엔군은 1951년 2월 20일, 관악산을 점령하였다. 이 작전으로 유엔군은 땅에 떨어진 사기를 되찾았으며, 이후 중국군의 인해전술의 한계점이 무엇인지 파악하게 된다.
♤ 광주시 분당구 정자동(亭子洞)
정자동은 조선시대에 광주군 돌마면 정자리에 속한 지역이다. 이 지역이 조선 중기 이후 왕족인 전주이씨의 세거지가 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 제 9대 임금 성종의 아들(12남) 무산군(茂山君)의 제 5자인 태안군(泰安君) 이팽수(李彭壽, 1490~1525)]의 묘역과 그 자손들이 터를 잡았다. 태안군 증손이 되는 이경인(李敬仁, 1575~1642)은 이천부사겸 광주병마진관 등을 역임하였는데 병자호란의 치욕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내놓고 이곳 탄천 변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한운야학(閑雲野鶴)으로 소일하였다. 그 후 그가 즐기던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 정자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정자나무가 있어서 정자말, 정자골, 정자동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대지산에서 약 30분 소요됩니다. 강남 16산을 하며 세번 지났고, 외에도 산악회를 따라 여러 번 지났는데 팔각정도 2층으로 올렸고 정상석도 바뀌었습니다.
♤ 불곡산(佛谷山, 344.5m)/ 정상석, 2층팔각정/ 시계/ 삼동봉(광주시 신현동, 분당구 구미동 → 정자동)
불곡산 150m 직전에서 지맥의 왼쪽이 분당구 구미동에서 정자동으로 바뀐다. 불곡산은 경기도 성남시와 광주시 사이에 있는 산으로 산 이름이 한자가 똑같아 경기도 양주의 진산(鎭山)인 불곡산(佛谷山, 470m)과 혼동되는 산이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과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경기도 광주시 문형동에 있는 문형산(文衡山, 497m)과 함께 굴곡진 산세를 이룬다. 검단지맥의 검단산과 남한산으로 연결되는 산이다. 분당 지역의 옛지명에서는 큰절골과 작은절골 등에 절터가 있으므로 불곡산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또 정자동 웃마을 주민들이 이 산을 성스러운 산으로 여기고 산신제를 지낸 것에서 유래하여 성덕산(聖德山)이라고도 하고, 현지에서는 효종산(孝鐘山)이라고도 한다. 불곡산은 분당주민의 휴식처 역할을 한다. 성남시 녹지 축의 최남단에 있으며 분당구 정자동과 구미동 기슭에 자리잡았다. 남서와 북서 방향에 행글라이딩 이륙장이 있다. 특히 겨울에는 용인의 말아가리산과 더불어 분당에서 생성된 열기류 동호인들이 모여 행글라이딩 하기 좋은 곳으로 이름나 있다. 태재고개(추령, 秋嶺) 밑에 있다고 붙여진 태밑산은 임진왜란 때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임진봉 또는 이진봉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불곡산과 연결된다.
♤ 광주군 돌마면(突馬面)
‘돌마‘. 지금은 조금 낯설어진 이 지명이 광주군 시절에는 분당 지역의 대표지명이었다. 돌마면은 경기도 광주군에 있던 행정구역이다. 1577년에 광주목이 생기면서 광주군 돌마면이 되었으나 현재는 폐지되었고, 현재의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 갈현, 도촌, 여수동과 분당구 이매, 야탑, 서현, 율동, 분당동, 수내, 정자동 일대에 해당되는 지역이 돌마면으로 불렸다. 돌마의 범위는 시대별로 변화가 있었는데, 1914년에 일본이 우리나라의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할 때 세촌면의 하대원이 돌마면으로 편입되었다. 지명의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서 정확히 확정된 것이 없다. 지명의 한자 표기는 乭馬, 突馬, 突邁 등 세 가지로 나타난다. 突馬는 1577년 광주목이 생기면서 공식적인 행정단위로 돌마면이 되었고, 그 이전에는 돌마(乭馬)리로 불렸다.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돌마리라고 기록한 사례도 있다. 그 밖에 드물게 ‘돌매(突邁)’로 표기된 것이 있는데, 1546년(명종1)에 별세한 전주이씨 이효순(李孝舜)의 묘비문에 기록돼 있다. 돌마지명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1368~1429)의 ‘용헌집(容軒集)’에 ‘乭馬’라고 기록이 있다. 이원(李原)이 전북 여산으로 귀양 갔다가 세상을 떴는데, 돌마면 갓골 율리(乭馬面 加次谷 栗里)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이원 후손이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우고 이듬해에 반란을 일으켰던 이괄(李适)이다. 서거정이 지은 이원 신도비문에도 돌마면 율촌(乭馬面 栗村)에 장사 지냈다고 하였다. 고성이씨 묘역이 도촌동 주변에 많이 있었고 이괄의 난으로 이원 묘를 부관참시 하였는데, 묘에서 용의 모습이 완연한 이무기가 나와서 죽였더니 그 비늘이 수년간 흘러내렸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도촌 신도시 건설 때 출토된 유물을 보면 청동 용뉴, 화살촉, 등자 등 68점의 금속류와 도기 14상자, 자기 12상자 등의 토기와 자기류, 기와 250상자 이상, 석기 6점, 말뼈 14점 등이 출토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돌마라는 지명은 돌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서울 석촌동의 석촌(石村)은 한자표기만 그렇지 원주민들은 ‘돌마리’로 불러왔다. 석촌동에는 돌로 축조한 백제 고분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분당 신도시 개발 때 116기의 고인돌이 조사된 것으로 보아 돌마 지명도 돌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김기빈이 펴낸 ‘분당의 땅이름 이야기’에는 병자호란 때 충청감사 정세규가 탄천의 상류인 험천(머내)에서 청나라 군사와 싸워 크게 패하였는데, 주인을 잃은 말 떼가 이곳 산골짜기에서 갑자기 나타났다고 하여 돌마면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 설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군사정변으로 왕이 된 인조가 이괄의 반란을 겪은 후로는 군사훈련조차 중단시켰고, 조선군은 기마병이 주력부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병자호란 이전부터 돌마 지명이 사용되고 있었다. 현재 돌마 지명은 돌마초등학교와 돌마고등학교, 돌마교, 돌마로, 중앙공원 돌마각 등으로 남아 있다.
♤ 311.7m봉/ 3등삼각점(수원 312/ 1987 복구)
한때 맨발대선배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었다는데, 평상과 나무의자가 있다. 왼쪽 정든마을과 오른쪽 능안골 갈림길에서 올라서 우틀로 휘어져 내려선다.
♤ 형제봉(286.1m)/ 시계/ 삼동봉(광주시 신현동, 분당구 정자동 → 수내동)
286.3m봉에서 안부사거리로 내려서면 직진으로 형제봉 정자가 보인다. 형제봉 120m 직전에서 지맥의 왼쪽이 분당구 정자동에서 수내동으로 바뀌고 형제봉을 지나 약 120m 내려선 삼거리에서 지맥의 왼쪽이 다시 수내동 → 분당동으로 바뀐다.
♤ 241.3m봉
군용 참호가 있는 무명봉이다. 지맥은 우틀로 내려선다.
길을 잃을 염려는 없습니다. 육교가 세워지기 이전에도 그리고 청주한씨 묘를 우회하기 전에도 다닌 기억이 있으니깐요. 1151번 광역버스가 신사역에서 모현읍 오산리종점까지 고개를 넘나듭니다.
♤ 태재(台峴) 고개/ 추령(秋嶺)/ 57번도로/ 광주시 신현동 -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
가실고개라고도 하며 분당동 안말과 광주군 오포면 신현리에 걸쳐 있고 분당 신도시 지역내에서는 가장 험준한 고개이다. 이 고개의 명칭은 『여지승람』에는 추현(秋峴), 『동국여지승람』과 조선지지 자료에는 추령(酋領), 광주읍지와 남한지 및 경주김씨 상촌공파 세보에는 추령(秋嶺), 한국지명총람에는 태현(台峴), 일반지지자료에는 태현(泰峴)으로 기록되어 있다. 분당과 신현리의 경계에 위치한 마을이다. 태재란 큰 고개라는 뜻인데, 조선시대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도 태재는 군사요새지(軍事要塞地)로서 남한산성을 방어하는데 큰 몫을 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 말 충신인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의 묘가 있는데, 경기도 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남쪽 1㎞ 지점에는 상일동에 있는 주몽(走夢)재활원 설립자이자 사회사업가인 김기인의 묘가 있다. 지금은 웃태재, 아래태재로 두 개의 마을이 되었다. 성남 분당쪽에는 열병합발전소 폐열을 이용한 지역난방공사가 커다란 굴뚝을 여러 개 세우고 있다.
♤ 196m봉/ 삼각점봉
성남 누비길은 왼쪽 사면길로 이어지고 지맥길은 계단으로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선다.
♤ 240.3m봉
넘어골 갈림길을 지나서 오른 체력단련장이 있는 무명봉이다. 지맥길은 좌틀이다.
♤ 봉적골 고개/ 논적골 고개
왼쪽 분당 율동공원에서 오른쪽 봉적골로 내려가는 길이다. 오른쪽 400m 아래에 봉적골 마을이 있다. 이웃하는 고을간 물산의 이동과 교류를 위해 태재고개부터 이배지까지 일찍부터 검단지맥 상에 고개가 발달되었다.
♤ 새마을고개/ 설고개/ 서울고개
서울고개가 변하여 설고개가 되었다.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새말(新村)에서 분당구 율동 율동자연공원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이 지역에서 서울을 가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율동공원 갈림길/ 성남시 분당구 율동(栗洞)
분당 율동공원으로 널리 알려진 율동은 법정동이고 행정은 서현1동에서 관할한다. 율동의 명칭은 밤의 명산지에서 유래하며 서근(三斤)이나 되는 밤이 생산되었다고 풍자할 만큼 밤의 고장이라서 예로부터 취률리(取栗里), 석물을 갖춘 묘역이 많아서 석인리(石人里)라 했다고 한다. 또는 밤이 썩어나갈 정도로 많아 "썩은밤이"라 하고 한자로는 후율리(朽栗里)로 표기한다. 율동 600년 명문가인 청주한씨 묘비 여러 곳에 후율리라는 지명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썩은밤이가 정확한 유래일 것이다. 성남서지에는 조선조 중엽에 「산일리」라 부르기도 했는데, 1915년에 율리(栗里)라고 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안골 순흥안씨 족보에 보면 안침(安琛, 1445-1515)등의 묘지가 율리(栗里)로 기록되어 있고, 영의정 이종성(李宗城, 1692-1759)이 지은 대사간 유상재(柳尙載) 묘갈문에도 율리(栗里)로 표기되었으며, 유상재의 형 유상경(柳尙儆)의 묘갈문에는 율촌(栗村)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에 1915년 설은 틀린 것이다. 율동에는 순흥안씨, 진주유씨, 청주한씨, 한산이씨 등의 선조묘가 있으며 새마을중앙연수원, 분당저수지 등이 있다. 구전에 따르면 풍수설 또는 정감록에 율동 일대에는 58대장성 10승지지(十勝之地)가 있다하여 사방에서 풍수가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이를 입증이나 하듯 한국전쟁 당시에도 이 지역은 안전하였으며 분당지구 개발구역에서도 제외되었다. 율동은 성남지역에서 대단히 신령스럽고 유서 깊은 고장이다. 율동의 명막암은 아득한 옛날 봉황과 비슷하다는 전설의 새인 초명새가 남방에서 왔다가 세상이 살기 좋아 되돌아 갈 때를 놓치고 그만 바위가 되었다. 초명새 전설이 있는 만큼 신령스럽기도 으뜸인지라 산 이름은 영장산(靈長山)이다. 산 너머 광주 직동에 유명한 고불 맹사성 대감의 묘가 있어서 맹산(孟山)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정확한 이름은 영장산이다. 태평동의 영장산 봉국사에서부터 율동까지 영장산은 성남시를 포근하게 감싸 안은 형국이다.
♤ 216m봉/ 분당저수지갈림길/ 시계/ 삼동봉(광주시 신현동,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 → 율동)
왼쪽 능선으로 분당저수지에 내려서는 갈림삼거리로 지맥의 왼쪽이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에서 율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장의자가 여러 개 놓여 있는 소나무 숲으로 쉼터로 조성되어 있다.
♤ 271.8m봉
오른쪽으로 사면길이 있다. 왼쪽 계단길로 능선으로 올라선다.
♤ 233m봉
갈림길에서 왼쪽은 누비길이고 지맥은 오른쪽 빌라촌 철조망을 따라서 간다.
♤ 일곱삼거리고개/ 강남300C.C.
성남시 율동에서 광주시 목동으로 넘나든 고개인데 지명 유래는 오래전 실전되었고 현재는 빌라촌이 들어서서 고개의 흔적 조차 찾을 수 없다. "일곱 삼거리는 여섯 갈래의 지옥(地獄)으로 가는 길과 한 갈래의 하늘나라로 가는길 중에서 지성(至誠)으로 기도(祈禱)하면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얻게 된다 하였고," 산 아래 허당으로 떨어지는 골짜기가 많다는 말인지 사람이 살만한 민촌이 많다는 뜻인지 영장산에 전해오는 산 말 중에 한 부분으로 짐작하기는 너무 광범위하다. 칠거리가 아니고 일곱 삼거리이다.
♤ 새나리고개/ 나무골고개
목동에서 새나리골을 거쳐 오포읍 신현리 버스종점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예전부터 이 길이 있었는데, 지금의 골프장이 있는 곳으로 고갯길이 있었으나,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새로 고갯길을 뚫어, 지금의 고갯길이 생기게 되었다. 새나리골을 통하는 고개라서 이름 지어진 것이다. 목동이 속칭 나무골이라서 나무골고개라고도 불렀다. 현재 새나리고개(나무골고개)는 강남300컨트리클럽의 정문이 되었으며, 나무골은 골프장이 되었다. 새나리고개는 문형산과 영장산 사이, 문형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 새나리골
새나리라는 어원(語源)은 초가집의 지붕을 農家에서 볏짚으로 엮어 덮는데, 억새풀이나 갈대로 엮어 덮은 지붕을 새나리지붕이라고 한다. 목동은 예전부터 논농사가 부족하여 볏짚이 부족한 관계로, 山에서 억새를 베어다가 엮어서 지붕을 덮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곳에 억새풀이 많아 새나리골이라고 불려왔다고 한다. 조선조 말에 천주교인이 박해를 당하여 숨어 다닐 때, 이 곳으로 교인들이 들어와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새나리골은 현재 강남골프장 부지로 편입되었다.
♤ 문형산 갈림길
강남 300C.C. 골프장 울타리를 따라 문형산으로 가는 길에 등산객들의 흔적이 많이 나있다. 2.86km라 다녀오기엔 부담되는 거리이다. 지맥길은 골프장 울타리를 따라 왼쪽으로 이어진다.
구리 인창리에 있던 희빈장씨(玉山府大嬪) 묘가 이곳 문형리에 천장되었고, 1969년 광주시 도시구획으로 도로가 나는 바람에 다시 서오릉으로 옮겨갔다는군요.
♤ 문형산(文衡山, 496.7m)/ 문현산(門懸山)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 문형리 · 능평리와 목동에 걸쳐 위치한 산으로 문형(文衡)은 조선시대 대제학의 별칭으로, 이곳에서 선비가 많이 배출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문형산이라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문현산(門懸山)은 주 남쪽 45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문현산(門懸山)이라고 불렀으며, 『해동지도』에도 문현산(門懸山)이라고 기록, 『중정남한지』에 "문현산(門懸山)은 오포면과 낙생면의 사이에 있으며 주맥은 용인의 보개산(寶盖山)이다."라고 기록, 『조선지지자료』 광주군 오포면 산곡명에 문형산이 목동에 소재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북쪽으로 영장산, 서남쪽으로 불곡산과 연결되며 남쪽 기슭에는 봉곡사와 판교공원묘지가 있으며, 정몽주선생 묘소와 충렬서원도 자리 잡고 있는데 문형리 등에서 관련 지명을 엿볼 수 있다.
♤ 344.5m봉/ 팔각정, 쉼터/ 시계/ 삼동봉(성남시 분당구 율동, 광주시 신현동 → 광남1동)
지맥이 크게 좌틀하며 지맥이 오른쪽이 광주시 신현동에서 직동(直洞)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강남300C.C.를 지난 지점에 팔각정이 자리하고 있다. 광남 1동은 행정동이고 직동은 법정동이다. 광남 1동은 삼동·중대동·직동·목동·장지동·태전동 일부 등 6개의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이제부터 고불산 권역에 들어섰습니다. 갈마치까지 맹사성대감의 나와바립니다. 작년 홀대모 가을모임에서 배방산을 다녀와 배방읍 중리에 맹사성의 가족이 살던 맹씨행단을 들렸는데 원래 고려 최영(崔瑩, 1316~1388)장군이 살던 집이었답니다. 고불 맹사성은 최영장군의 손녀사윕니다. 고려 우왕에 장원하였고, 어머니 홍씨가 개성에 가서 낳았습니다.
♤ 곧은골고개/ 장현(長峴)/ 장고개(場峴)
성남 분당구 율동 응달말과 광주 직동 곧은골을 이어주는 고개로 영장산(맹산) 남쪽에 있다. 곧은골고개는 고개가 길어서 장현(長峴)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예전에 율동, 서현동, 분당동, 이매동 등지의 사람들이 광주 관아에 가거나 경안장을 보러 갈 때 주로 이 고개를 이용하였으므로 장고개(場峴), 일명 천조장골고개(千鳥長谷)라 부르기도 한다. 곧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는 뜻이 있어서 매우 긴 산굽잇길을 뜻하기도 하는데, 곧은골고개 역시 같은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 곧은골
직동의 중심 마을이다. 이 곳에 맹사성의 묘가 있고, 의령 남씨의 선대묘역이 있다. 의령 남씨들의 세거지로 집성촌이다. 맹씨의 후손들도 몇 집이 살고 있다. 맹산(孟山)에서 발원하여 흘러오는 하천이 있고, 이왕현(이앵이고개)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이 이 마을 어귀에서 합수하여 직리천(直里川)을 이루어 태전동에서 목리천(木里川)과 합쳐져 경안천으로 유입된다. 지금은 전원주택이 많이 들어서서 도시 사람들이 많이 와서 거주하고 있다.
지나온 법화산 쪽으로 레이크사이드C.C. 불빛이 밝습니다.
♤ 358.3m봉/ 응달평산/ 시계/ 분당구 율동 - 광주시 직동
등산로는 오른쪽 사면으로 돌아가고 마루금으로 올라선 봉우리로 산벚꽃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왼쪽 율동 아래가 응달평골이라 서래와선배님 방식으로 누군가에 의해 응달평산이란 이름을 붙였다. 우틀로 내려선다.
♤ 새마을 연수원 이정표
거북터를 가운데 두고 전후로 왼쪽 새마을연수원으로 이어지는 등로가 두 군데 있다.
♤ 영장산(靈長山, 414.2m)/ 맹산(孟山)/ 4등삼각점(수원 437/ 1987 재설)/ 시계/ 삼동봉(광주시 광남1동/ 성남시 분당구 율동 → 야탑동)
지맥의 왼쪽이 성남시 분당구 율동에서 야탑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서쪽에는 야탑동과 이매동 등이, 북쪽으로는 중원구 도촌동과 갈현동 등이 있다. 남쪽으로는 서현동이 있으며 동쪽에는 경기도 광주시가 있다. 율동공원의 큰 영장산은 큰매지봉과 작은매지봉을 거느리고 있는 형세로 분당지역 중심의 산세를 형성하고 있다. 영장산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과 태평동 사이에 위치하는 작은 산이며 남쪽으로 이어지면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과 중탑동 사이의 매지봉(梅址峰, 277m)이라 부르는 큰매지봉과 작은매지봉(274.5m) 그리고 성남시와 광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맹산(孟山)과 함께 몇갈래 산세를 이루고 있다. 작은 영장산의 주봉은 높이 193.7m의 봉우리로, 남한산성이 위치하는 청량산이 서남쪽으로 뻗어내린 줄기에 위치하는 구릉지 모양의 산이다. 조선시대의 각종 고지도에서는 분당지역과 광주시 경계 일대의 산지에 해당하는 맹산과 매지봉을 영장산(靈長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산지는 분당의 중앙공원에 있는 뒷매산으로 이어지는데, 뒷매산을 영장산으로 부르기도 하는 것으로 봐서 영장산 산자락였다는 얘기이다. 이 산봉우리 명칭의 유래에는 옛날 잘 훈련된 매를 이용하여 이 산 정상에서 매사냥을 한 것에서 매지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다른 전설에는 천지가 개벽할 때 세상이 모두 물에 잠겼는데 이 산봉우리에 매 한 마리가 앉을 수 있을 만큼 공간이 남았으므로 매지봉이라 부른다고도 전해진다. 영장산은 최근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매지봉’이나 ‘맹산’이라고 불렀다. 맹산(孟山)은 조선시대 세종이 명재상인 맹사성에게 이 산을 하사해 불리게 된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산아래 직동(곧은골)에는 맹사성의 묘와 맹사성이 타고 다녔다는 흑소의 무덤인 흑기총이 있다. 그는 높은 벼슬과는 어울리지 않게 평소 말이나 가마 대신 ‘기린’, 또는 ‘기리마’라고 부른 검은 소를 즐겨 타고 피리를 불며 다녔다. 선인들은 이 산에 연결된 산맥중 일장산(日長山)은 성일장여 (聖日長如)하고, 영장산(靈長山)은 성령장천(聖靈長千)하며, 일곱삼거리에서, 간구득도(懇求得道)하여 문현산(門懸山)에 천문현달(天門懸達)하라는 산 말은 남기었다. 이 말은 일장산(日長山)에서 백제시조 온조왕께서 개국하신 후 임금의 위엄과 따뜻한 보살핌이 해가 매일같이 온누리를 빠짐없이 비춰주듯이 그 찬란한 위명이 여일하라는 뜻이며 영장산은 임금의 착한 선정이 영원하게 하여달라는 것이고 일곱삼거리는 여섯 갈래의 지옥으로 가는길과 한 갈래의 하늘나라로 가는길 중에서 지성으로 기도하면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얻게 된다 하였고 문현산(門懸山)에는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는 문이 달려있다 해서 문현산이라 하였다. 이 영장산에 대하여 수많은 일화가 전하여오고 있다. 무학대사께서 광주안씨 선대중에 안성(安省)선생의 묘자리를 현 광주시 경안읍 중대리에 잡아주시며 영장산하에 뛰어난 명당길지(明堂吉地)라고 말씀하였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 이당골 갈림길(308m)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과 도촌동의 경계 능선에 있는 능선에서 광주시 직동 이당골로 넘어가는 길이다. 야탑동은 조선시대 광주군 돌마면 오야소동, 상탑동, 하탑동 지역이었는데, 오야소(梧野所)의 '야(野)' 자와 상탑, 하탑의 '탑(塔)' 자를 취한 것이다. 오야소란 이름은, 원래 마을 앞의 들이 넓고 주위에 오동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오동나무 들마을'이라고 하다가 오동나무 열매가 많이 열리는 ‘오야실(梧野實)’로 변하였고, 그것이 한자로 표기할 때 오야소로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또 상탑, 하탑의 ‘탑’은 그 정확한 축조 및 해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300여 년 전 이 지역에 탑이 있어 탑골이라 부른 것에 유래한다고 한다.
♤ 357.8m봉/ 조망쉼터/ 시계/ 삼동봉(광주시 광남1동, 성남시 분당구 → 중원구)
영장산에서 30분 정도 진행한 무명봉으로 장의자와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왼쪽으로 분당메모리얼파크 효천원을 지나 357.8m봉에 오르고 303m봉으로 내려서며 중원터널 위에서 지맥의 왼쪽이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등로는 303m봉 왼쪽 사면길로 간다. 마을 앞뒤에 하천이 있어 섬마을, 섬말로 불리던 것을 '도촌동(島村洞)'으로 한자화하였다.
♤ 사거리 안부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 응당말에서 광주시 직동 이당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아래로는 3번국도가 지나가며 최근에 생긴 제2영동고속도로가 통과하는 중원터널이 지나고 있다. 직동으로 내려가면 능안산이 나오고 도촌동쪽으로 내려가면 모라야산 기도원이 있다.
♤ 333.4m봉/ 섬말쉼터, 사각정자/ 시계/ 삼동봉(광주시 광남1동,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 → 갈현동)
왼쪽은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 응달말 마을이고 오른쪽은 광주시 직동 이당골로 내려가는 사거리안부에서 올라선다. 고불산의 유래는 이 고개 너머에 맹사성 선생 묘가 있어 맹씨 가문의 사패지가 이 일대라 맹산이거나 선생이 고불(古佛)이라는 호를 사용하여 이름이 생겨난 이유로 보인다. 청백리의 대명사 고불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이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는 역사적 인물이 죽으면 그의 생애와 치적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글 즉 졸기(卒記)를 기록으로 남겼는데, 맹사성의 졸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목된다. "좌의정을 지낸 맹사성이 79세로 죽었다. 벼슬하는 선비로서 낮은 자리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문 밖에까지 나가 맞이하고 방으로 모시고 윗자리에 앉혔다. 물러갈 때에도 역시 몸을 구부리고 손을 모으고서 배웅하되, 손님이 말에 올라앉은 후에라야 돌아서 문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아랫사람에게까지 관대한 그였지만 절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았으며 고위관료에게는 엄격했다. 그의 무덤은 '맹사성선생 묘'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의 호를 딴 고불산(古佛山)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번으로는 경기도 광주시 직동 산27에 위치한다.
♤ 고불산(古佛山, 333.4m봉/ 3등삼각점(수원 311/ 1983 복구)/ 성남시장례식장 영생관리사업소/ 시계/ 삼리봉(성남시 중원구 갈현동, 광주시 광남1동 → 탄벌동)
왼쪽으로 성남시장례문화사업소 하늘누리추모원이 보이고 오른쪽에 고압선송전철탑이 있는 지점으로 지맥의 오른쪽이 성남시 직동에서 삼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있었다는데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다. 성남시에서 고불산이라 이정표를 설치해 놓았는데 조금 더 가야 고불산이다.
♤ 경기 광주시 탄벌동(炭筏洞)
행정동이자 법정동이다. 탄벌동 관할의 법정동으로는 탄벌동 외에 회덕동과 목현동이 있다. 광주시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세를 띄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2020년 12월 1일 탄벌동(炭筏洞)이 분동되어 기존 송정동 주민센터가 탄벌동 주민센터로 변경되면서 송정동 주민센터는 광주시 광주대로 216으로 이전하였다. 광주시 서남부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경안동과 송정동, 서쪽으로는 성남시, 남쪽으로는 광남1동, 북쪽으로는 남한산성면과 각각 접한다. 이 지역은 대부분이 낮은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쪽이 산지이고 동남쪽이 주거지를 이룬다. 동네의 동남쪽에 3번 국도와 45번 국도가 교차하며 지나가고, 서쪽에서 목현천이 흘러와 경안천으로 유입된다. 관내에 광주경찰서가 있고 제천말, 큰말, 숯가마골 등의 여러 자연부락이 있다. 조선조 말까지는 탄동과 벌원리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의 축소 개편으로 두 마을을 합쳐 탄벌리가 되었다. 탄동은 예전에 한양의 양반들이 쓰던 연료인 숯을 굽는 가마가 있는 곳이라 하여 숯가마골이라 불렀다가 숯 탄을 써서 탄동으로 불리었다. 벌원리(筏院里)는 산 밑으로 탄천을 끼고 넓은 들판가(筏)에 자리 잡은 원(院)이 있었던 마을이라 해서 벌원리라 불렸다.
♤ 고불산(古佛山, 321m)/ 돌탑, 갈마치 이정표
성남시 중원구 갈현동과 광주시 직동, 삼동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광주시 곧은골에 선초 청백리의 표상인 고불 맹사성(古佛 孟思誠, 1360∼1438)의 묘가 자리잡고 있어 고불산이라 부른다. 자는 자명(自明)이며 호가 고불(古佛)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조부 맹유(孟裕)는 두문동(杜門洞) 72현 가운데에 한 명이며, 아버지 맹희도(孟希道)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희도부상(希道負上)」에 실릴 만큼 효자였으며, 맹사성은 풍수와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인물로 세종대에 좌의정을 지낸 명재상으로 알려져 있다.
♤ 갈마치(葛馬峙)/ 갈현(葛峴) 고개/ 동물이동통로/ 389번 지방도로
갈마치 고개는 성남시 중원구 갈현동에서 광주시 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389번 지방도로가 넘어가며 갈현(葛峴)이라고도 불린다. 고개 왼쪽 성남에는 화장장이라 불리는 성남영생사업소가 있고 동물이동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갈마치의 유래를 보면 말(馬)이 갈증(渴症)이 난다는 뜻으로 예전의 갈마치는 매우 가파른 고갯길이어서 말이 이 고개를 넘으면 목이 말라 헐떡임으로 꼭 물을 먹이고 쉬었다는 고개로 옛날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도중에 이곳에서 말에게 물을 먹여 갈증을 풀어주고 길을 떠났다고 한다. 갈마치(葛馬峙) 또는 갈현(葛峴)이라 했다는데 언제부터인지 지명의 유래가 옛날부터 칡이 많아서 갈현(葛峴)이라 불리웠다고 한다. 평택임씨 족보에는 이곳을 갈현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갈현동의 지명은 갈마치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연리지(連理枝) 소나무
송전탑을 지나 올라가면 유명한 연리지 소나무가 나온다. 수령은 약 40년이다. 연리지에 대한 유래는 중국 춘추시대 송(宋)나라 강왕(康王)이 절세미인인 한빙(韓憑)의 부인 하씨(何氏)를 빼앗았다. 한빙이 이를 원망하자 그를 가두고 성단(城旦, 변방에서 낮에는 도적을 지키고 밤에는 성을 쌓는 일을 하는 형벌)의 형벌을 내렸다. 한빙은 자살하고 말았는데, 부인 하씨 역시 한빙과 합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왕과 함께 누대에 올랐을 때 아래로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다. 화가 난 왕은 두 사람을 합장하지 않고 무덤을 서로 바라보도록 만들게 했다. 그날 밤 두 그루의 개오동나무가 각각의 무덤 끝에 나더니, 열흘도 안 되어 아름드리 나무로 자라 몸체가 구부러져 서로에게 다가가고 아래로는 뿌리가 서로 맞닿았다.(宿昔之間, 便有大梓木, 生於二冢之端, 旬日而大盈抱, 屈体相就, 根交於下, 枝錯於上.) 그리고 나무 위에는 한 쌍의 원앙새가 앉아 하루 종일 떠나지 않고 서로 목을 안고 슬피 울었다. 송나라 사람들은 모두 슬퍼하며 그 나무를 상사수라고 불렀다.
♤ 요곡산(幺谷山, 358.5m)/ 요골산/ 시계/ 삼리봉(성남시 중원구 갈현동, 광주시 탄벌동 → 목현동)
지맥의 오른쪽이 광주시 탄벌동에서 목현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준희선생님 산패와 반바지님의 요골산이라는 코팅지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오른쪽으로는 경기도 광주시 삼동 요골고개로 내려가는 길인데, 지금은 뉴서울 골프장이 자리를 잡고 있어 요골고개는 흔적조차 없다. 삼동에 있는 요골마을은 조선조 인조 때 예조판서를 지낸 경주 김씨란 분이 나라에 공을 세운 대가로 남한산성에 딸린 땅을 포함한 골짜기 일부를 받았다고 하는데, '작은골'이라 하여 '요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맥은 좌틀하여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원약수터 방향 이배재로 내려선다.
♤ 313.5m봉
장의자가 여러 개 놓여 있어 잠깐 쉬어가기 좋은 장소이다. 형제봉과 그 뒤로 남한산성 검단산이 바라보인다.
재배는 제사를 모시며 망자에게 드리는 예법인데 살아있는 왕에게 이배를 하다니...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이배치(二拜峙, 300m)/ 이배재/ 육교/ 지방도 338호선/ 이배재로/ 2차선도로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과 경기도 광주시 목현동을 연결하는 고개로, 고문헌에는 이보치(利保峙)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뜻은 조선시대에 남한산성을 방어하는데 있어서 훌륭한 보장지(保障地) 역할을 하였다는 의미라고 한다. 대동여지도에는 利夫峴(이부현)으로 표기되었다. 성남시 중원구와 광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청량산·검단산·망덕산 산줄기를 넘는 고개이다. ‘절을 두 번 하는 고개’라는 뜻의 이배재라고 지명이 붙은 것은 두 가지 유래가 있다. 먼저 옛날 경상도와 충청도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이 고개에 오르면 한양이 보여 임금이 있는 쪽을 향하여 한 번 절을 하고, 부모가 계신 고향을 향하여 다시 한번 절을 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하고, 또 다른 설은 조선 성리학의 대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임금을 향하여 절을 두 번 하고 길을 떠난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전한다. 퇴계의 후예들은 경복궁에서 도산서원까지 공의 마지막 귀향길 재현행사를 개최하는데 퇴계의 마지막 귀향길 경로는 임금의 배려로 관선(官船)의 도움을 받아 성동구 옥수동 두뭇개에서 여주 배개나루로 충주까지 이동했고, 이후 말을 타고 죽령을 넘어 도산서원에 이르렀다 하니 언제적 귀향과 연관이 있는 이배재인지는 더 알아볼 일이다. 북쪽으로는 성남시 수정구 산성동을 거쳐야 광주시로 넘어갈 수 있으며, 남쪽으로는 갈마치고개, 새마을고개, 태재 등의 고갯길이 두 도시를 연결하고 있다. 이배재를 통과하는 도로는 지방도 338호선 이배재로이다. 이 도로는 통행량의 증가로 이배재터널과 상대원터널을 지나는 신이배재로를 개설하여 순환로로 진입하도록 하였다.
♤ 310m/ 시계/ 삼동봉(광주시 목현동, 성남시 중원구 갈현동 → 상대원동)
왼쪽 능선이 달라붙는 지점으로 지맥의 왼쪽이 중원구 갈현동에서 상대원동으로 바뀐다. 형제봉(476.9m)으로 올라서며 준희선생님 격려표지판도 보인다.
♤ 보통골 갈림길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에 있는 골짜기로, 이 일대는 본래 보곡동(普谷洞)이었는데, 상대원이란 명칭은 이 지역에 고려 중엽인 1225년경에 사원(寺院)이 건립되어 원터 또는 대원(大院)이라 부르다가 원터 위쪽을 상대원, 아래쪽을 하대원이라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한 일설에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집(李集)의 서원이 있는 곳을 하대원이라고 한데 대하여, 조선 중기의 문신인 송언신(宋言愼)의 서원이 있었던 이 지역을 상대원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보통천의 발원지이기도 한 곳으로 보통천(普通川)은 중원구 상대원동 보통골에서 발원하여 대원천으로 합류하는 지류 하천이며 대원천은 다시 탄천으로 합류한다. 하천 길이는 740m이며 단대천, 독정천과 함께 대원천의 지류하천을 이루고 있다.
♤ 망덕산(望德山, 498.9m)/ 시계/ 삼면동봉(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 광주시 목현동 → 남한산성면 불당리)
정상석과 장의자가 몇 개 놓여져 있다. 지맥의 오른쪽이 광주시 목현동에서 남한산성면 불당리로 바뀌는 지점으로 과거 광주시 중부면이 2015. 10. 16.부 남한산성면으로 바뀌었다.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과 광주시 목현동 및 남한산성면에 걸쳐 있는 봉우리로 검단산과 이배재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산이다. 망덕산을 오르는 등산로는 상대원동 쪽에서는 보통골 서광사에서 오르는 길과 사기막골 대원사 방면에서 오르는 길이 있다. 광주 쪽에서는 목현동에서 오르는 길이 있다. 망덕산에서 능선을 따라 북쪽으로 2km 정도 더 가면 검단산(536.4m)이 나오고, 동으로 광주쪽으로는 두리봉(457.3m)과 곤두레봉(365m)으로 연결된다. 상대원동 쪽에 근린공원이 망덕체육공원이 있다. 망덕산은 왕기봉이라고도 한다. 산 이름은 '덕을 바란다'는 뜻을 가진 좋은 말이지만, '망' 자가 들어가 있어서인지 어감은 그다지 좋지 않다. 그래도 망덕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은 전국 곳곳에 있다.
♤ 광주시 남한산성면(南漢山城面)
남한산성면은 동쪽으로는 초월읍과 퇴촌면, 남종면, 서쪽으로는 성남시 수정구와 중원구, 남쪽으로는 송정동, 북쪽으로는 하남시와 접하고 있다. 서울 인접지역으로 수도권 보호기능을 담당해야 하는 지리적 특수 여건상 개발행위를 제한하고 있다. 병자호 전인 1600년대 초반 현재의 하남시에 있던 광주부 관아가 남한산성 안(산성리)으로 이전하면서, 300년 동안 광주 고을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명칭도 중부면이었던 것. 그러다가 군청이 경안면으로 이전하면서 쇠퇴하게 된다. 병자호란 때 조선 인조가 피신했던 남한산성이 위치한 역사의 고장이며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다. 이 지역은 과거 성남시 수정구, 중원구를 관할했던 구역이었으나, 1973년 7월 1일에 성남시로 분리되면서 산성리, 엄미리, 광지원리, 상번천리, 하번천리, 오전리, 불당리, 검복리 일대를 관할하는 지역으로 축소됐다. 1974년에 면 소재지가 산성리에서 광지원리로 이전하였다. 1989년 1월 1일 하남시가 신설되면서 중부면의 상산곡리가 하남시로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8개(산성리, 엄미리, 광지원리, 상번천리, 하번천리, 오전리, 불당리, 검복리)의 법정리와 11개의 행정리로 구성됨. 2015년 10월 16일 면의 이름이 중부면에서 남한산성면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른다.
♤ 만수천(萬壽泉) 약수터
이곳에서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등산객들은 용천약수 쪽으로 향하지만 맥길은 약수터 뒷쪽 직진 능선으로 이어진다. 전에는 물이 콸콸 잘 나왔는데 언제부턴가 오줌발이 시원찮다. 수질검사 결과도 음용불가로 나왔다.
불당리와 검복리, 고골, 등은 병자호란에 청군이 매복한 주둔 장소였습니다. 청군은 고립작전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여 자진 항복을 유도하였고, 하남 어둔이골, 태화산 아래 험천(머내), 광주 쌍령, 수원 광교산에서의 전투처럼 외부에서 오는 구원병(근왕병)을 차단하는 기보병으로 편성된 별도 기동대가 있었으며 이들은 적은 기병으로 고지대를 점령하고 위에서 아래로 치달으며 공격하여 오합지졸에게 공포감을 극대화해 지리멸렬하도록 심리전을 병행하였습니다.
♤ 불당리갈림길/ 광주시 남한산성면 불당리(佛堂里)
불당골은 유교를 신봉하던 조선조에서 산세가 좋은 검단산 줄기를 타고 주민들이 불당을 지어놓고 불교를 믿었다고 하여 불린 이름으로 지금은 불당리가 된 곳이다. 이곳에 있던 사찰은 병자호란 때 소멸되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불당골, 절골, 승방터 등의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역 주민의 말에 의하면 70여년 전까지 절이 있었다고 한다. 범굴암은 불당리마을 뒷산(검단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예전부터 불당리 마을 사람들은 바위굴에 범이 살았다 하여 범굴암 또는 굴바위라고 불렀다.
♤ 508m봉/ 시계/ 삼리동봉(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 광주시 남한산성면 불당리 → 검복리)
검단산에 닿기 직전 무명봉으로 지맥의 오른쪽이 광주시 남한산성면 불당리에서 검복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 광주시 남한산성면 검복리(黔伏里)
검복리는 검단산 밑에 엎드려 있는 모양이라서 검복리라 부르게 되었다. 자연마을에는 남벽수와 양치촌 등이 있다. 남벽수는 검단산 남쪽 계곡의 산이 병풍과 같이 펼쳐져 있고, 그 앞을 맑은 물이 흘러 한 폭의 산수화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고 양지촌은 양지바른 곳에 있어 생긴 이름이다. 남한산성 옛길이 지나는 남한산성 동문 밖에 검복리 마을에는 검북참이 자리했는데, 검북참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용한 역참제에 의해 설치된 역참(驛站) 중의 하나로 전통시대 교통과 통신을 담당하는 기관을 말한다. 지방에는 30리(약 12㎞)마다 역참(驛站)을 설치하여 중앙과 지방정부를 연결하는 통신수단으로 활용하였는데 관리들이 쉬어갈 수 있는 일종의 숙박시설인 원(院)을 설치하였으므로 역과 원을 지칭하여 역원(驛院)이라고도 하였다. 검북참은 남한산성 옛길을 이용하여 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남한산성 행궁을 거치기 전 머물 수 있는 참이었다. 그런데 일반인은 역참을 이용할 수 없었기에 주막을 주로 이용하였는데 그 때문에 조선후기에 주막이 빠르게 활성화 된 것으로 보인다. 검북참이 위치했던 검복리에도 이런 전통을 계승하듯 많은 식당들이 성업 중에 있다. 현재 검복리에서 역참과 주막은 사라졌지만 지나가던 길손을 맞던 장승 만은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병자호란의 남한산성 항쟁기간은 1636년 12월 14일~1월 30일
♤ 검단산(黔丹山, 523.9m)/ 시계/ 삼리동봉(광주시 남한산성면 검복리,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 → 은행동)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한봉과 검단산에 홍이포대(紅夷砲臺)를 구축하고 행궁에 포를 쏘았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 이때의 상황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청인이 대포를 망월봉과 남성(南城) 맞은편 봉우리에 설치하고 쏘기 시작하였다. 적이 또 대포 10여대를 남격대 밖에 설치하였는데 포의 이름을 호준 또는 홍이포라 하였다. 탄환이 큰 것은 사발만하고 작은 것도 거위알만한데 수십 리나 날 수 있었다. 매양 행궁을 향해 쏘기를 종일 그치지 않았다. 사창(司倉)에 떨어진 것은 기와집을 세겹이나 뚫고 땅속으로 한 자 남짓이나 박혔다. (淸人設大砲於望月峰及南城對峰放之.... 敵又設大砲十餘於南隔臺外 砲名虎? 紅夷砲 丸大如沙碗小比鵝卵能飛數十里 每向行宮而放之終日不絶 落於司倉瓦家貫穿三重入地尺許連中)’ 청나라 군대가 자리잡고 대포를 쏜 장소가 지금 외성 3곳이 있는 검단산, 한봉, 벌봉이었다. 남한산성 성안에서 가장 높은 곳이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으로 483m임에 반하여 검단산 520m, 한봉 418m, 벌봉 515m이니 성밖 고봉 3곳에 대포를 설치하고 임금이 계신 행궁을 내려다보며 대포를 쏘아대니 그 공포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병자호란 후 청(淸)은 조선이 성(城)을 중수하지 못하도록 감시하였는데 조선의 입장에서는 다시는 이런 치욕이 없도록 남한산성 방어체계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일이 산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세 봉우리에 외성을 쌓는 일이었다. 청나라의 간섭이 약화되자 숙종 12년(1686년) 봉암성을 쌓고 19년(1693년)에는 한봉성(漢峰城, 汗峰城)을 쌓았으며 45년(1719년)에는 신남성(新南城)을 신축했고 이어서 영조29년(1753년)에는 신남성에 동돈대와 서돈대를 개축하였다. 검단산(黔丹山, 536.4m)정상에는 송전탑이 설치되어 있어 오를 수가 없다. 또 한 봉우리에도 통신부대가 자리잡고 있다. 정상 3봉우리 중 동쪽 낮은 봉 헬기장에 검단산 정상석이 서 있다. 과거 공군부대와 함께 kt가 있어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이라 우회해야 한다. 검단산 정상에서 지맥이 왼쪽이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에서 은행동으로 바뀐다.
흔히 말하는 육군형무소 남한산성은 남한산성 내에 있었던게 아니고 행정학교와 특전사 중간에 있었습니다.
♤ 남한산성(南漢山城)/ 사적 제57호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8세기 중반에 조성된 성벽과 건물터 등이 확인되어, 신라 주장성(晝長城)의 옛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한산성에 대한 고려시대 기록은 광주부사를 지낸 이세화묘지명(李世華墓誌銘)이나 『고려사(高麗史)』에 몽고군이 침입하였을 때 ‘광주성(廣州城)’으로 피하여 항전하였다는 것 등이 전한다. 산성 안에서 고려시대 건물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광주성은 바로 남한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일장산성이라고 기록되었는데, 둘레가 3,993보이고 성 안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으며 우물 7곳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성 안의 논밭이 124결(結)이나 된다고 하였다. 조선시대(1392~1910)에 유사시를 대비하여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담당하도록 경기도 광주시·성남시·하남시 일원의 해발 480m가 넘는 험준한 지형을 따라 건설된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원성(元城, 本城)과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한산성의 초기 유적에는 7세기의 것들도 있지만 이후 수차례 축성되었다. 임진왜란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른 조선 조정은 남한산에 성을 쌓을 것을 논의하였으나 실행에는 옮기지 못하였는데 광해군 13년(1621년) 만주 벌판을 통일한 후금(後金, 뒤에 淸으로 국명 개칭)의 위협을 받고 이괄의 난으로 공주까지 피난하였다 돌아온 인조는 위급한 상황에 피신할 수 있는 보장지지(保障之地; 종묘사직을 지킬 수 있는 피난처)를 구축하려 했다. 하나는 강도(江都; 강화도)였으며, 또 하나 새로 남한산성을 축성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인조는 인조 2년(1624년) 총융사 이서(李曙,1580∼1637)에게 산성의 축성을 명령하여 옛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하였다. 인조 4년(1624년)에 둘레 6,297보, 여장(女墻) 1,897개, 옹성 3개, 성랑 115개, 문 4곳, 암문 16곳, 우물 80곳, 샘 45곳 등을 설치하고서 광주읍의 치소(治所)를 산성 안으로 옮겼다. 그 때 쌓은 산성이 본래의 남한산성인데 현재의 산성 모습은 대체로 그 때 쌓은 것이다. 단지 옹성의 모습만이 현재와 차이가 있다. 축성 공사에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전국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는데,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현재 남아 있는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곳의 사찰을 새로 건립하기도 하였다. 인조는 병자호란으로 우리 역사에 가장 치욕적인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단 위에 앉은 청태종 아래에서 한 번 절하고 3번 머리 조아리는 예를 3회 행함)라는 항복 절차를 밟았다. 이 때 겪었던 남한산성 방어 구조의 취약점을 보강한 것이 옹성(성의 한 부분을 길게 빼내어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옆에서 공격할 수 있게 한 돌출부)을 강화한 것이다. 본래 남한산성에는 북쪽 연주봉에 축성했던 옹성만 있었다. 병자호란의 수모를 겪은 조선은 인조 16년(1638년)으로 추정되는 해에 지대가 낮아 방어의 어려움을 겪은 남쪽 성벽에 3개의 옹성을 축성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옹성이 축성되었는데 바로 장경사 앞에 있는 장경사신지옹성(長慶寺新地甕城)이다. 남한산성은 건립된 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성곽 안에는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둘레의 길이는 약 8㎞ 정도이며, 면적도 약 528,460㎡ 에 달한다. 문화재로는 남한산성, 남한산성 행궁, 수어장대, 숭렬전, 청량당, 현절사, 침괘정, 연무관, 지수당, 남한산성 사찰(망월사터, 장경사, 개원사터, 장경사 동종)이 있으며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 6월 22일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
♤ 남한산성 제1남옹성/ 시계/ 삼리동봉(성남시 중원구 은행동, 광주시 남한산성면 검복리 → 산성리)
남한산성 남문을 향하다 제1남옹성을 지나 남한산성 성곽과 만나는 장소로 지맥의 오른쪽이 광주시 남한산성면 검복리에서 산성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성곽의 구조에 있어서 본성과 외성이 있고, 옹성(甕城)과 치성(雉城)이 있는데 모두 방어와 공격 능력의 전투력을 배가 시키기 위한 구조로 옹성은 가장 중요한 성문의 방어와 공격력을 높이기 위해 성문 밖에 성벽을 연장하여 이중으로 돌출시켜 마련한 시설이고, 치성은 성의 담장을 성곽으로부터 외부로 돌출시켜 벽체를 보호하고 공격력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 은행동(銀杏洞) 쉼터 갈림길
성곽 왼쪽 아래로 내려가면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이다. 은행동의 동명은 은행정에서 유래되었으며 은행시장 뒷편에 수고 30m, 둘레 6m, 수령 약 300년의 은행나무가 있는데, 여름이면 정자나무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은행정이라 불리웠는데, 으능쟁이, 은행쟁이라고 하며 은행나무에서 은행동의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공자가 고향 은행나무 아래에 단(杏壇)을 세우고 제자를 가르쳤다하여 조선시대 전국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행(杏)은 살고나무를 의미한다. 정약용선생도 『아언각비』에서 행단의 행을 은행나무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밝히고 있다. 조선시대 학자들 중 상당수는 행단의 나무를 은행나무로 잘못 알고 있었다.
♤ 남한산성 남문/ 지화문(至和門)/ 진남문(鎭南門/ 삼시봉/ 삼리동봉(광주시 남한산성면,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 → 하남시 학암동)
지맥이 지화문에서 산성을 따라 455m봉으로 올라서면서 지맥의 왼쪽이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에서 하남시 위례동으로 바뀐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었는데,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선조 때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2년(1624) 수축되기 이전 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3년(1779)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이 붙여졌으며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으로 들어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 들어왔다. 현재는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앞에 식재된 (350년 수령, 성남시 보호수) 느티나무와 함께 문화와 역사가 살아숨쉬는 시민의 역사터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 천주교 비극의 역사,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이후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장소로 피비린내 나는 처형장이 되어버렸다. 남한산성 성지성당 내부에는 순교자들의 옥에 갇혀있을 때 쓰고 있었던 칼이 채워져 있는 독특한 십자가상이 있다. 천주교 탄압의 본격적인 서막은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년) 부터였는데 천주교에 대해 큰 반감이 없었던 정조가 1800년 8월 18일 승하하고 순조가 11세의 어린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며 정권을 잡은 노론 벽파가 남인 시파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시작한 것이다. 박해의 진짜 이유는 정조시기에 세력을 키운 남인을 숙청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컸다. 바로 이 신유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첫 순교자가 발생하게 된다. 천주교 신자가 광주 및 인근 지역에서 잡히면 남한산성 포도청으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혔다. 순교자들은 심문을 당하다 결국은 감옥에서 순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교살형이나 교수형이 대부분 감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옥이 곧 순교터가 되었다. 신해박해(1791년) 때부터 천주교인들이 갇히기 시작했고 신유박해의 한덕운을 시작으로, 1839년 기해박해에는 김덕심, 김성우 형제 등이 순교했다. 제일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건 1866년 병인박해 때이다. 정은, 그의 종손 정양묵, 그리고 기해박해에 순교한 김성우의 모든 가족이 체포당해 순교했다. 현재 알 수 있는 마지막 순교자는 이치재다. 감옥에서 죽거나 고문 끝에 죽은 순교자들은 동문 밖으로 시신을 버렸는데 그 장소가 수구문이었다. 시체가 너무 많이 나가고 피가 물처럼 흘러 수구문은 시구문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 제6암문(서암문)/ 탄천여맥 갈림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성벽의 흐름 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성에 설치된 12개 암문의 외측 개구부는 대부분 홍예식이지만 제2암문과 더불어 이 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이다. 인조 15년(1637) 1월 23일, 한밤중에 습격해 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암문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 부른다.
♤ 청량산(淸凉山, 497.1m)/ 수어장대/ 4등삼각점(수원 420/ )
청량산은 경기도 하남시 학암동, 성남시 수정구 양지동, 서울특별시 송파구 마천동에 걸쳐 있는 산이다. 이곳에 사적 제57호로 지정된 남한산성이 위치한다. 청량산은 일견 평범한 산처럼 보이지만 산속이 광대한 분지로 되어 있고 밖으로는 험한 경사를 이뤄 천혜의 요새지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청량산, 남한산(522.1m), 한봉(414m), 검단산(536.4m)으로 이어지고 있어 산세의 구별이 모호하다. 산성은 정확히 말하면 청량산과 남한산에 걸쳐 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장경사(長慶寺:경기문화재자료 15) 등의 사찰이 있다. 산성 북서쪽으로 청량산이라 불리는 산쪽으로 수어장대가 있고 현절사(顯節祠:경기유형문화재 4)·청량전(淸凉殿)·숭렬전(崇烈殿)·연무관(演武館)·지수당(池水堂)·침과정(枕戈亭) 등이 있다. 성안에는 남한산 법화사지와 부도가 보존되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8호로 등록되어 있다. 이밖에 허물어져 가는 산성의 남문을 중수하여 보존하였고 마을 안쪽으로 임금이 납시어 활을 쏘았던 행궁터와 송암정·관어정·영춘정 같은 정자 등이 보존되고 있다. 1971년 3월 남한산성과 함께 총 36.4km를 도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남한산과 함께 고주몽의 셋째 아들인 온조(溫祚)가 남하하여 백제국을 일으킨 곳으로도 유명하다. 원래 온조는 현재의 서울 풍납동에 토성을 쌓고 위례성이라 하여 백제국을 세웠으나 지세가 불안하고 협소하여 이곳으로 천도했다. 또한 봉암성이라고 하는 벌봉을 둘러싸고 있는 남한산성의 외성에는 천혜의 요새답게 산세가 험해 병자호란 때 청태종과 청군이 이곳에서 진을 친 다음 전투는 하지 않고 인조와 조선군이 피신해 있는 남한산성을 내려다보면서 항복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 수어장대(守禦將臺)와 청량당(淸凉堂)/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제3호
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목적으로 지은 누각으로 수어장대는 임금을 보위하는 장군이 지휘하는 높은 장대를 말한다. 남한산성에 있던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으며, 성 안에 남아있는 건물중 화려하고 웅장하다. 남한산성 축성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라 편액을 달았다. 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현재 무망루 판액은 수어장대 오른편에 보호각을 지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청량당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 쌓을 때 동남측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죽었다. 이회는 죽을 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에언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의 청량당은 6.25 전쟁때 소실 되어 다시 지었다. 서장대가 있는 산 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국립지리원 청량산 삼각점은 서쪽으로 내려와 원판 테이블 뒤쪽 성곽 옆에 있다는데 가림막을 쳐놓고 성벽 보수 공사 중이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 탁지부측량소 삼각점/ 광주시 향토문화유산(기념물) 제7호
갑오개혁(1894년)으로 인해 호조에서 관장하던 호구∙공부∙전량∙식화∙조세∙재정 등의 사무 가운데 조세와 재정 관련 사무는 탁지아문이 승계하고, 경제 관련 사무는 공무아문과 농상아문이 승계하였다. 탁지아문은 1895년 을미개혁 때 탁지부로 변경되었으며 정부의 회계∙출납∙조세∙국채∙화폐∙은행 등의 사무 일체를 통괄하며 지방의 재무를 감독하였다. 탁지부는 근대적인 지적제도를 수립하기 위하여 전국에 11개 지역을 선정하여 최초로 삼각측량을 실시하였다. 이 사업을 위해 설치된 삼각점 가운데 1점이 1908년 수어장대 기단부 서쪽에 설치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탁지부측량소 삼각점은 지상으로 노출된 부분이 높이 22㎝, 폭 12×12㎝의 장방형이며, 정상부에 십자 표시가 있다. 전면에는‘도지부’라 음각되어 있다. 이 삼각점은 조본원점을 기초로 한 구소삼각점 34번 장대로 위도 37°20′37.445", 경도 127°10′32.180" 지점에 설치되어 있으며, 현대의 측량 성과와 비교할 때 좌표점의 오차가 30㎝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대단히 양호하다고 평가된다.
♤ 남한산성 서문/ 우익문(右翼門)/ 시계/ 삼리동봉(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하남시 위례동 → 감이동)
지맥의 왼쪽이 하남시 위례동에서 감이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서문은 4개의 대문중 규모가 가장 작고,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3년(1799)에 다른 문과 같이 개축하며 우익문이라 칭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서문이 행궁의 우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15년(1637) 1월 30일 왕이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간 바로 그 문이다. 병자호란 때 12만여 청군의 남한산성 포위 속에서 1만3,000명 정도의 조선의 병력으로, 한달 정도의 비축 군량만으로 어떻게 이를 견디겠는가? 결국 인조는 전쟁 발발 후 2개월도 넘기지 못하고 추운 엄동설한에 말도 타지 못한 채 걸어서 송파 삼전도에 내려가 청 태종에게 머리를 땅에 아홉번 찧으면서 굴욕의 三拜九叩頭禮(삼배구고두례)의 항복의식을 가져야 했다. 국제정세에 어두운 조정의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의 실수가 초래한 결과이다. 신하들은 이러한 절체절명의 시간 속에서도 주화론(김명길)과 척화론(김상헌)으로 갈려 갑론을박 싸움질을 했다. 죄없는 백성들만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백성들 수십만 명이 청에 끌려가는 고통을 당하였다. 나라가 잘 못 되면 백성만 죽고 고난을 당한다. 결국 한 나라의 지도자들의 지혜와 영도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1637년(인조 15년) 2월 24일 인조와 대신들이 송파 삼전도에 내려가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며,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의식이 끝난 후 창경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포로로 끌려가는 수많은 백성들이 울부짖는데 그 수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 被擄子女望見, 號哭皆曰: "吾君、吾君, 捨我而去乎?" 挾路啼號者, 以萬數.
( 피노자녀망견. 호곡개왈: "오군, 오군, 사아이거호?" 협로제호자, 이만수.) "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남한산성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급해 물자수송이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 하남시 감이동에서 태어난 서흔남(徐欣男)
널무니는 남한산성의 서문 밖에 있는 하남시 감이동의 옛 이름이다. 널무니에서 태어난 천민 출신 ‘서흔남(徐欣男)’이 병자호란 당시에 전령으로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와 관련한 설화가 여럿 전한다. 인조는 피난길이 막혔다는 소식을 듣고, 강화도로 피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가는 도중에도 전세가 불리하다는 소식으로 인해, 겁을 먹은 수행원과 군졸들이 하나 둘씩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인조는 얼마 남지 않은 신하들을 함께 사공도 없는 나룻배로 송파강(松城江)을 건넜다. 송파강은 건넜지만, 날이 어두워지고, 눈까지 내려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인조는 걷기 조차 힘들어 신하들의 등에 번갈아 업혀가며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남한산성이 보이는 곳에 이르러서는 인조도 신하들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이 지쳐 있었다. 이 때 나무를 한 짐 지고 산을 내려오는 나무꾼 한 사람을 만났다. 나무꾼은 자청해서 “제가 임금님을 업고, 남한산성으로 올라가겠습니다.”라고 나섰다. 인조는 너무나 다급한 상황이라 나무꾼의 등에 업혀 남한산성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 나무꾼이 바로 ‘서흔남’이다. 남한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험하고, 잡목은 우거져 길을 찾기도 힘들었다. 거기다가 눈이 내려 빙판길이 되었다. 서흔남은 짚신을 신어서 더욱 미끄러웠다. 산을 오르고, 거기다가 빙판길을 올라야 해서 계속해서 미끄러지기만 하고, 발에서는 피가 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흔남은 인조를 업고 남한산성에 도착하였다. 남한산성에 도착한 인조는 서흔남을 불러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서흔남은 말을 못하고 가만히 있다가, “임금님의 곤룡포를 갖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옆에 있던 신하들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서흔남을 꾸짖었다. 그러나 인조는 미소를 지으며 곤룡포를 서흔남에게 주었다. 집으로 돌아간 서흔남은 평생 동안 곤룡포를 소중히 여겼다. 그러고 시간이 흘러 병석에 눕게 되자, 자신이 죽거든 곤룡포를 함께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고, 자식들도 유언에 따라서 곤룡포를 함께 묻어주었다고 한다. 서흔남은 병자호란에서의 공으로 천인의 신분을 벗고, 훈련주부(訓鍊主簿)와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 받은 역사적 실존인물이다. 현재 서흔남의 묘비는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소재해 있다. 위와 같은 설화를 통해서 서흔남의 임금을 향한 충성심과 병자호란에서의 역할 등을 알 수 있다. 곧 서흔남이 벼슬을 제수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화를 통해서 전승한다.
♤ 연주봉옹성(連珠峰甕城)/ 삼리동봉(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하남시 감이동 → 항동)
지맥의 왼쪽이 하남시 감이동에서 항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옹성(甕城)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은 이중 성벽을 말한다. 성 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해야 했으며,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다. 연주봉옹성은 북서쪽의 요충지인 연주봉을 확보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연주봉에서 바라보면 아차산과 남양주 일대의 한강이 조망되고, 이성산성과 하남시 춘궁동 일대가 특히 잘 보이며, 성 내부의 지역도 관측되는 중요한 요충지이다. 연주봉옹성은 둘레가 315m에 면적은 865㎡이고, 73개의 여장이 있었다. 남한산성도의 옹성 말단에 포루라는 표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옹성에는 포루가 있었지만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이 옹성 역시 2000년 토지박물관에서 발굴조사 후 현재는 복원되어 있다.
♤ 406m봉/ 삼리동봉(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하남시 항동 → 상사창동)
지맥이 왼쪽이 하남시 항동에서 상사창동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 전승문(全勝門, 365m)/ 남한산성 북문
남한산성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상사창동으로 이르게 되는데 고골을 통해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을 통해 이 문으로 운반하였으며, 고골은 춘궁동, 항동, 상사창동, 하사창동, 교산동을 아우르는 지역명칭으로, 광주관아가 있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고읍'으로 불리다가 '고고을'을 거쳐 '고골'로 변천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에 해당한다. 선조 때 산성 내에 동문, 남문, 수구문 총 3개이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성문은 원래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부터 있었던 성문은 아니고 인조 2년(1624년) 신축한 성문이라 한다.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말려들어 전멸하고 말았다. 김류의 아버지는 신립장군과 함께 탄금대에서 전사한 김여물이고 인조반정공신으로서 영의정을 세번이나 역임했으니 금수저에 노회한 풍객이었다. 29일 김류의 지휘로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김류가 성 위에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올라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때 갑자기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申誠立)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待罪)하니, 왕이 위유(慰諭)하였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 3년(1779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그 때의 패전을 잊지 말고 다시는 전쟁에서 패하지 말자는 뜻에서 전승문(全勝門)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북문은 이후 6·25 전쟁으로 파괴됐고 1979년 남한산성 보수정화 사업에 따라 새로 복원됐다. 그러나 점차 성문에 균열이 생기고 문루(門樓·성문 위의 누각)가 기울어져 안전이 우려되면서 경기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가 2021년부터 예산 25억원을 투입해 전면 해체·보수공사를 벌여 2023년 11월에 개방하였다.
♤ 402m봉/ 쉼터의자
성벽에서 약간 벗어나 오른 무명봉이다.
한강기맥, 천마지맥, 앵자지맥, 한남정맥의 부아산도 찾을 수 있습니다. 지나온 법화산과 불곡산도 찾아봅니다. 무엇보다 무갑산이 우뚝하네요.
♤ 동장대터(501m)/ 제 3암문
장대(將臺)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은 남한산성의 동북쪽 모서리 부분으로, 성 동쪽에 있다하여 동장대가 위치하였다. 동장대는 남한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좌영장이 지휘하던 곳이다. 동장대는 인조 2년 산성 수축 시에 설치되었고 누각도 함께 건립되었으나, 18세기 초에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남장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하였으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다시 짓지 않았다. 남한산 서봉인 망월봉 동장대터에서 지맥의 오른쪽이 남문(지화문)을 가다 제1남옹성에서 헤어진 검복리와 다시 만나 남한산까지 검복리와 산성리의 경계를 따른다.
♤ 봉암성/ 벌봉(蜂峰, 506m)/ 시계/ 삼리동봉(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하남시 상사창동 → 상산곡동)
봉암성에서 북쪽으로 내려선 벌봉(蜂峰, 506m)의 왼쪽이 상사창동에서 상산곡동으로 바뀌는 삼리동봉이며 봉암(峰岩)은 벌봉에서 능선을 따라 내려선 487m봉 바위를 말한다. 바로 아래에 법화사지가 있는데, 절터의 안내판에 청태종의 매부 법화장군 양고리(楊古利)가 원두표 장군의 꾀임에 넘어가 이곳에서 전사했기에 이곳에 법화사를 세웠다는 말이 전해진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전적(典籍)에 의하면 양고리는 광교산에서 김준용 장군의 휘하장수 박의(朴義)의 포에 맞아 전사했으니 맞지 않는 말이다. 조고문님 움막(성산정)도 있다. ㅋ
숙종실록보궐정오 17권, 숙종 [보궐정오실록] 12년 3월 13일 기록을 보면,
南漢城東, 有一峰, 名蜂嚴, 俯臨城中, 其下洞壑深廣, 賊雖藏兵而城中無由知之, 丙子之亂, 賊據此峰, 連放大砲, 城堞盡壞, 남한산성(南漢山城) 동쪽에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벌바위(蜂巖)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성 복판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 아래는 구렁이 깊고 넓어서 적이 병졸을 숨겨 두더라도 성 안에서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병자호란 때에 적이 그 봉우리를 점령하고 대포를 연달아 쏘았기 때문에 성첩(城堞)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 한남산(漢南山, 522.1m)/ 남한산/ 4등삼각점(422 재설/ 76.9.건설부)/ 시계/ 삼리동봉(광주시 남한산성면 검복리, 산성리 → 하남시 상산곡동)
지맥의 왼쪽이 남한산성면 산성리 → 하남시 상산곡동으로 바뀌고 남한산성을 내려서며 지맥의 오른쪽도 산성리 → 엄미리로 바뀐다. 지맥은 이정표에서 동쪽(왼쪽) 엄미리(은고개) 방향으로 내려선다. 남한산은 산의 사방이 평지로 둘러싸여 밤보다 낮이 길다고 하여 일장산(日長山) 혹은 주장산(晝長山)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한남산 정상은 문화재 정비사업으로 100m 떨어진 곳에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정수리는 출입불가라 산행 고도감은 떨어지며 정상석에서 오른쪽으로 진행하면 한봉가는 길이다. 한봉(漢峰 418.1m)은 제16 암문에서 10분 거리인 노적산 2.0km 이정표에서 길이 갈라져 방향 표시 없는 곳으로 진행한다. 폐성곽과 나란히 이어지는 길로 병자년에 청태종이 올라 한봉(汗峰)이라고 불렀다.
♤ 광주시 남한산성면 엄미리(奄尾里)
광주군 남한산성면 엄미리는 농지가 거의 없는 산촌이다. 대한제국 시절까지는 엄현(奄峴)과 미라동(尾羅洞)이 각각 다른 동네로 취급되었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을 축소 개편하면서 엄현의 엄자와 미라의 미자를 따서 엄미리라는 새 동네 이름이 만들어졌다. 일설에 따르면 한양에 살던 엄정승(嚴政承)이라는 이가 이곳에 명당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고개 위에서 내려다보니까 이 고개의 형태가 뱀의 꼬리 같다고 해서 엄미리라 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남한산성 동쪽 뒤편에 자리잡은 데다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디작은 마을이다. 미라울, 벽수골, 새말로 세분되는 공간에서 미라울은 금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는 자부심의 근거가 되고, 이는 곧 마을공간의 중심성을 이루는 당위가 된다. 최초로 누가 입향했고, 마을이 언제 세워졌는가는 전하는 바가 없다. 그러나 병자호란을 근거로 한 장승의 유래담이 전승되고 있고, 옛 모습에 가깝게 장승이 현존하는, 어느 마을보다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엄미리 장승제는 300여년 전 병자호란 당시 청군들이 남한산성을 포위, 주민들을 괴롭히다가 전란이 끝난 직후부터 전염병이 돌아 산신에게 치성을 드리고 마을 어귀에 장승을 세워 역병의 방지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 데서 비롯됐다.
15암문을 내려서서 왼쪽 엄미리 방향으로 죽천대선배님 녹색 띠지가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 410m봉
쉬어갈 수 있게 장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남한산이 올려다 보이고 주위 조망도 비교적 좋은 편이다.
410m봉에서 내려서서 346m봉에 이르면 쉬어갈 수 있는 장의자가 하나 있는 곳이 또 나옵니다. 그곳에서 지맥은 좌틀이지만 오른쪽으로 내려서는 능선길이 의안대군 능묘로 가는 길로 엄미리계곡 이정표 방향으로 50m 정도 내려가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100m를 더 내려가면 의안대군 방석묘역에 도착합니다.
♤ 의안대군(宜安大君, 1382~1398) 이방석묘/ 광주시 남한산성면 엄미리/ 경기도 기념물 제166호
이름 방석(芳碩), 시호 소도(昭悼), 1392년(태조 1) 정도전(鄭道傳) 등의 추대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때,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소생의 이복형들이 불만을 품고,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유배되는 도중 동모형(同母兄)인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審)과 함께 방원 일당에게 살해되었다. 뒤에 의안군(宜安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의안대군 묘역은 오랫동안 유실되었다가 1999년 초라한 무덤을 단장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태조는 무안대군에게 공순(恭順)[후에 장혜], 의안대군 세자 방석에게는 소도(昭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세종은 1437년에 후사가 없는 이들 형제를 위하여 5남인 광평대군을 방번의 후사로, 6남인 금성대군을 방석의 후사(奉祀孫)로 정하여 각기 사당을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 장구맥이재/ 하남시 상산곡동 어진마을
병자호란 때 호종(護從)군사들이 주둔하던 곳으로 어둔(御屯)골이란 뜻이다. 이곳은 병자호란 당시 원군들이 검단산에 진을 치고 있을 때의 격전지로 알려지고 있는데 어둔이골이 어원변화로 인하여 어진이골로 불리워 진 것 같다. 다른 뜻으로 전해져 오는 것도 있다. 어진 마을은 다른 마을보다 유난히 일찍 해가 지기 때문에 어둡다 또는 어두워진다 해서 어진마을이라 전해져 내려온다고도 한다. 어진마을의 계곡에 숯가마골, 장구맥이(장구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말구리(두리봉 넘어 계곡, 계곡 중턱에 곤도바위가 있다)가 있다.
♤ 338.1m봉/ 철탑
정상에 바위가 많아 넘어서기에 까다로운 봉우리로 등로는 봉우리 오른쪽 사면으로 우회한다.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우틀로 내려선다.
♤ 303.1m봉/ 4등삼각점(수원 427/ )/ 대림학원 학교림
준희선생님 산패가 노간주나무에 매달려 있다. 아래에 있는 삼각점은 마모되어 글씨가 없어졌다.
♤ 은고개/ 엄현(奄峴)/ 43번국도/ 중부고속도로
엄미리고개가 부르기 쉽게 은미리고개로 바뀌다가 은고개로 정착되었다. 경기도 하남과 광주시 경계에 있는 고개다. 행정지명으로 남쪽은 광주시 남한산성면 엄미리, 북쪽은 하남시 상산곡동이다. 검단지맥에 걸친 고개로 43번 국도와 중부고속도로가 지나며, 동쪽은 용마산, 서쪽은 남한산성 벌봉으로 이어진다. 은고개 이름은 엄미리(奄尾里)라는 지명에서 유래되는데, 엄미리의 '엄'자를 따서 엄고개(奄峴: 엄현)로 불리다가 발음이 은고개로 변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이나 남한지(南漢志)에는 엄현(奄峴)으로 표기되었다. 고개 밑에는 은고개마을도 있다. 지맥 마루금은 도로 건너 지장사로 190.3m봉으로 이어지나 중부고속도로를 건널 수가 없기에 어차피 오른쪽으로 내려서서 굴다리로 통과해야 한다. 이정표에는 검단산까지 6.5km 라고 안내한다. 실제는 7.9km이다.
♤ 425m봉/ 시계/ 삼리동봉(광주시 남종면 삼성리, 남한산성면 엄미리 → 하남시 상산곡동)
광주시 남종면과 남한산성면 엄미리, 하남시 상산곡동이 만나는 삼리동봉으로 남한산에서부터 광주시 남한산성면 엄미리와 하남시 상산곡동의 경계를 따라오다 은고개로 내려서서 국도 터널과 고속도로 암거를 연이어 지나고 425m봉에 올라 좌틀하여 검단산으로 향하는데 여기부터는 광주시 남한산성면과 헤어지고 남종면과 하남시 상산곡동의 경계를 따른다.
은고개에서 처음에는 43번국도 갓길을 따라 400m쯤 내려서다 오른쪽으로 빠져 음식점이 모여 있는 동네로 들어서고 내려서면서 첫번째 보이는 터널은 패스하고 조금 더 내려서서 연이어 국도와 중부고속도로 굴다리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만 첫번째 터널을 통과하고 도로를 따라 내려가다 왼쪽 동네로 나가 알바를 하게 되었습니다.
♤ 희망봉(454m)
연이어 터널을 통과하고, 낚시터에서 삼거리까지 도로를 따르고, 죽림원표지석을 지나 직상으로 가파르게 능선에 오르면 좌틀하여 희망봉을 지나게 되고, 죽림원표지석에서 이정표를 따라 좌틀로 완만하게 오르면 희망봉을 지나선 능선에 닿는다. 인생에 희망좀 보일까해서 언젠가 새해 일출을 여기에서 맞은 기억이 있는데 희망봉의 조망이 일망무제로 좋은 것은 아니다.ㅋ
♤ 용마산(龍馬山, 596m)/ 일자봉(日紫峰)/ 2등삼각점(이천 21/ 1987 복구)/ 시계/ 삼리동봉(하남시 상산곡동, 광주시 남종면 삼성리 → 이석리)
지맥의 오른쪽이 남종면 삼성리에서 이석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팔당호와 경안천이 만나는 곳 앵자지맥의 끝지점 분원마을이 발 아래에 있다. 용마산은 산줄기가 검단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려가다 솟구쳐 오른 모습이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거문봉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우고 있다. 하지만 참길향토문화지명연구소에 따르면 일자봉(日紫峰)이 정확한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정상 북쪽 삼각점이 박혀있는 봉우리의 이름도 갑성봉이라고 한다. 정상에 오르면 강건너 북쪽으로 운길산(610m)과 예봉산(683.2m)이 보이고, 남동쪽으로 정암산·해협산·무갑산·관산·앵자봉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 536.1m봉
참나무 가지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달려 있었다는데 언제적 얘긴지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 566m/ 고추봉, 두리봉/ 시계/ 사리동봉(하남시 상산곡동 → 하산곡동, 광주시 남종면 이석리 → 하남시 배알미동)
고추처럼 길고 높다는 데서 이름이 붙여졌다. 고추봉에서 한발 더 진행한 봉우리에서 지맥이 광주시와 헤어지고 좌우 완전하게 하남시로 들어서서 하남시 하산곡동과 배알미동의 경계를 따른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이정표에 매어 있다는데 찾을 수 없었다.
♤ 550m봉
550m봉을 내려선 삼거리에서 충혼탑으로 내려서는 왼쪽으로 약 0.82km, 5분거리에 곱돌광산약수터가 있다.
드뎌 검단지맥의 모산에 도착합니다.
♤ 검단산(黔丹山, 657m)/ 삼각점봉/ 전망데크/ 헬기장/ 하남시 하산곡동 - 배알미동
경기도 하남시와 광주시에 걸쳐있는 산으로 남한산에서 갈라져 나온 산이다. 백제 한성시대 하남 위례성의 숭산(崇山), 진산(鎭山)으로서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산으로 전해진다. 남한산성도립공원에 소속되어 있고 한강 방면으로 뻗어있다. 남쪽으로 용마산, 장작산 등과 이어져 있다. 같은 남한산에서 갈라져 나간 성남의 검단산 이름과 쓰는 한자까지 똑같지만 다른 산이다. 두 산이 인접하지는 않았지만 가까운 탓에 하남의 검단산과 성남의 검단산이 같은 산인 줄 알고 헷갈려 길을 잘못 찾거나, 두 산이 붙어있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한산을 기준으로 성남의 검단산은 서쪽에, 하남의 검단산은 동쪽에 있다. 하남 검단산은 한강을 사이로 북쪽으로 남양주시의 예빈산과 마주하고 있고, 그 아래로 팔당이 있다. 팔당댐은 이 산과 예빈산 사이를 흐르는 한강에 놓인 댐이다. 동쪽으로 뻗어있는 수도권의 시가지는 사실상 검단산부터 그 후로 이어서 펼쳐지는 지형적 장애물로 인해 양평군 방면으로는 단절된다. 동쪽은 팔당호가 있고 멀리 두물머리를 바라볼 수 있다. 예봉산과 두물머리, 팔당호를 바라보는 전망이 기가 막히다.
♤ 검단산성(黔丹山城)
학계에서는 검이란 가미, 고마, 곰, 감등신을 나타내는 고어이므로 검단산을 신성한 단(檀)이 있는 산으로 해석하고 있다. '검(黔)'은 한자 뜻이 '검다'인데 고조선 때 단군왕검같이 제사와 정치의 기능을 겸한 제정일치 사회의 우두머리를 '왕검(王儉)' → '임검(壬儉)' → '임금'이라 불렀듯이 '검(黔)'은 '금'이 되어 즉, '크다, 신성하다'는 뜻이라 해석하고 단(丹)'은 현재의 한자 뜻인 '붉다'와는 다른 '제단'이란 뜻으로 '검단산'은 '신성한 제단이 있는 산'이란 뜻으로 해석했다. 한때는 검단산의 검(黔)을 '금'으로 읽어 '금단산'으로 부르기도 했고 실제로 한성백제(漢城百濟) 시절에 왕이 검단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검단산 정상은 현재 헬기장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검단산 정상에는 조선시대까지 봉수대가 있었고 최근까지 군부대가 있었다. 6.25전쟁 후 통신부대가 주둔하기 전까지 정상에는 건물기단석으로 추정되는 석축이 있었는데 군인들이 헐어버렸다는 제보도 있다. 검단산은 백제초기 하남위례성을 수호했던 한성백제의 진산이다. 백제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위례성의 외성(外城)이 있던 산으로 검단산 일대는 백제 시조인 온조왕 4년 이래 근고초왕 26년까지 무려 370년을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다. 그래서인지 위례성을 검단산과 남한산의 북쪽 산줄기 가운데 '고골' 일원으로 추측된다는 얘기도 있다. 북쪽에 구산토성, 한강너머에는 아차산성, 북한산성이. 서남쪽으로 이성산성, 객산토루와 새미재 토루, 교산동성터 뒤로 남한산성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동쪽으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의 풍광은 장쾌하다. 그 강줄기 따라 신원리산성, 파사산성, 술천성까지 조망된다. 산 아래 팔당댐 건너 예봉산의 알려지지 않은 산성까지 포함하면 사방으로 거미줄 같이 쳐진 방어망 한가운데인 가장 높은 곳에 검단산 보루가 자리했다.
처음엔 산줄기를 따라 검단산에서 바깥창모루로 직진하여 팔당대교에서 지맥을 마무리를 하고자 했는데 거리가 가깝다는 용이성으로 하루 날잡아 끝머리 두곳 모두를 섭렵하기로 합니다. 팔당댐을 가보지 않았다면 배알미리쪽도 괜찮은듯 합니다. 검단산에서 창모루까지는 3.1km, 배알미리까지는 3.5km입니다.
북쪽, 도미해협 건너편으로 기상관측소가 보이네요. 바로 천마지맥 상의 예봉산이 높이 솟아있습니다.
♤ 예봉산(禮峯山, 683.2m)
예봉산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팔당리와 조안면 진중리, 조안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북쪽으로는 적갑산과 갑산이, 동북쪽으로는 운길산이, 동남쪽으로는 예빈산이, 한강을 건너 남쪽에는 검단산을 마주보고 있다. 예빈산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때부터 수림이 울창하여 인근지역과 한양에 딸김을 대주던 연료 공급지였다. 정부 관서 중 손님을 맡아보던 관아의 예빈시에 나무벌채권이 있었기 때문에 예빈산이라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인근주민들에게는 운길산과 함께 사랑산 혹은 예빈산(옛 명칭으로는 철마산이라 불렸음)을 작은사랑산으로 칭하고 큰사랑산으로 칭했다. '산을 위해 제사 지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의미로 영산이라는 별칭도 존재한다. 조선시대의 지도에서의 예봉산의 명칭을 보면 해동지도, 동여도, 대동여지도에는 예빈산(禮賓山), 청구도, 대동지지에는 예봉산(禮奉山), 조선지지자료, 조선지형도에는 예봉산(禮峰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한제국 시대까지는 경기도 광주에 속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때 편찬된 조선지형도에는 경기도 양주군에 소속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봉산은 남양주시에서 중앙선이 복선 전철화된 이후 접근성이 높아져 등산객들의 출입이 잦아졌다. 예봉산의 또다른 유래는 산 밑에 미인촌이라는 마을이 있고, 이 마을에서는 절세미인이 나는데 이상하게도 15~16세만 되면 죽었다. 이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미인과 짝을 맺을 준걸한 남자가 없어 하늘이 이들 여인들을 데려갔기 때문이라고 기록돼 있다. (동국여지승람, 대동산수경) 예봉산 아래에 있는 미인촌은 지금의 팔당마을을 뜻하고 수많은 배와 상인들이 팔당에서 쉬어 갔는데 그 때문에 팔당 나루터에 술집과 예쁜 작부들이 모여 들어 미인촌이라 불렀고 그 뒤에 있는 산을 예빈산 또는 예봉산이라 했다 한다.
검단산에서 조망을 충분히 감상하고 직진하여 바깥창모루마을을 향합니다.
♤ 586.7m봉/ 정자
훼손지를 수년에 걸쳐 복원하고 전망데크를 설치한 곳이다. 정자와 휴식장소까지 쓰임새 있게 잘 지어놓았다.
♤ 291.9m봉/ 4등삼각점(성동 489/ 1994 재설)
왼쪽으로 에니메이션고-유길준묘소에서 올라오는 갈림삼거리를 지나 약 1분 내려선 봉우리이다. 봉우리 끝지점에 삼각점이 있다. 다시 10여 분 진행하여 넓은 둔덕같이 보이는 무명봉에서 안창모루로 내려서는 왼쪽 등로가 뚜렸하다. 바깥창모루로 내려서는 지맥길은 능선을 벗어나지 말고 희미한 등로를 따라 계속 직진으로 내려서야 한다.
대구 와룡산선배님 띠지를 반갑게 확인합니다.^^
♤ 112.6m봉
지맥의 마지막 무명봉으로 좌틀로 내려선다.
창모루마을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검단지맥을 마무리 합니다.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빵과 음료수를 준비하고 다시 검단산으로 오르기 위해 안창모루 쪽으로 월남참전기념탑으로 걸어갑니다. 10분 소요되네요.
♤ 창모루마을/ 하남시 창우동
창모루는 두미강변에 위치하고 검단산 끝자락에 있어 옛날에 세미(稅米)를 하역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고 산모퉁이에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팔당역으로 건너가는 나루터가 있었던 마을로서 옛날 백제 초기부터 포구로 번성하던 곳이다. 면사무소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즉 창고가 있고 그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창모롱이라 하였다고 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창고모퉁이 나루-창모롱-창모로-창모루로 변하여 지금에 와서는 전부 창모루라 불리게 된 것이다. 안창모루(내창,안창)는 창모루 나룻터에서 이 마을이 안쪽에 있다하여 안창모루라 했고 내창과 안창이라고도 많이 불리고 있다. 바깥창모루(외창)는 검단산 끝자락에 위치한 마을로서 창모루 마을의 바깥쪽에 위치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검단산에서 검단지맥의 끝머리가 두 갈래로 나뉩니다. 경안천과 한강의 합수점을 향하는 분들은 배알미동으로 꺽어내려서 팔당댐이 있는 관리교에서 마무리를 하는데 팔당호로 인하여 합수점은 찾을 수 없습니다. 팔당댐이 없다고 가정하고 경안천과 한강의 합수점을 찾는다면 윗배알미리에서 경안천의 하류인 소내(牛川)와의 합수점까지 얼만큼 거슬러 올라갈지 알 수 없어요. 차라리 검단산을 찍고 다시 되돌아가 수자원공사로 내려서야 합니다. 산경표의 산자분수령원칙을 억지 해석해 지맥도 합수점으로 가야한다는 분들이 계십니다만 합수점으로 가는 지맥은 기껏해야 162개 중 30개 내외인데 그걸 두고 어찌 원칙이라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맥은 자천타천 튼실한 산줄기를 따르는게 우선입니다.
검단산에서 10분쯤 내려서서 처음 만나는 장의자가 있는 삼거리에서 우틀하여 능선을 고수해야 합니다. 직진으로 죽천대선배님 띠지가 있어 믿거니 갔다가 옆에 능선이 있는데 내려가는게 이상해서 트랙을 꺼내보니 이게 아닙니다. ㅋ
♤ 394.8m봉
등로는 봉우리 오른쪽 사면으로 돌아간다. 암릉을 타고 직상으로 올라서면 정상은 꽤 널찍한 공터이다.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는데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기온이 오르며 습설이 되어 체인젠을 끼운 등산화 바닥에 눈이 자꾸 달라붙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내리막에서는 눈이 덮혀있는 낙엽에 밤까시가 섞여있어 자칫 넘어졌다간 밤까시에 찔릴까봐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더군요.
♤ 371.3m봉/ 3등삼각점(양수 317/ 1983 재설)
삼각점 안내판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묶여져 있다. 대도심을 흐르는 지맥이라 여러 사람이 많다보니 준희선생님 산패가 제대로 보존이 되지 않는다. 와사보생이요 누죽걸산이라지 않는가 검단지맥을 하며 전국 산하에 퍼진 선생님의 산하 사랑을 보다 많은 분들이 알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 팔당댐 삼거리/ 45번국도
배알미삼거리로 내려서서 길건너편으로 팔당댐을 바라본다. 강 건너 편엔 천마지맥을 하며 날머리로도 이용하는 천주교 소화공원묘지이다.
♤ 남양주시 와부읍 팔당리(八堂里)
팔당리는 조선 시대부터 대한제국 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지역으로 편입되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이 이루어지면서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에 편제되었고, 1980년 경기도 남양주군에 편입되면서 와부면에서 와부읍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남양주군이 남양주시로 승격되면서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팔당리가 되었다. 팔당의 유래는 두미협곡(검단산과 예봉산 사이의 한강)이 물살이 휘돌고 유속이 빨라 배가 전복 하는 사고가 많은 곳으로 이곳을 지나는 배의 안전한 통행을 기원하고자 당집을 세웠는데, 그 당집의 수가 8집이나 되어서 팔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팔당리 인근의 산세가 좋아 하늘에서 여덟 선녀가 내려왔고, 선녀가 내려와 놀던 자리에 각각 여덟 개의 사당을 지어 '팔당(八堂)'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녀 하강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팔선녀를 낳았기 때문에 '팔당'이라 불렀다는 유래가 전하여진다.
앵자지맥을 끝내고 멀리서 보았던 팔당댐을 가까이서 확인하게 되는군요. 천마지맥을 하며 반대편으로도 내려와 봤습니다. 2~3월 현호색과 처녀치마가 올라오면 천마지맥을 분기점부터 다시 할겁니다. 그때는 능내역으로 내려서서 마재고개로 다산정약용선생 묘소로 갈 예정입니다.
♤ 팔당댐(八堂dam)
팔당댐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과 하남시 천현동(배알미동) 부근 한강에 위치해 있는 댐으로 서울특별시에서 한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약 35km 지점,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의 두물머리로부터 하류 7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전력공사의 전신인 한국전력주식회사에서 1966년 6월에 착공하여 1974년 5월 24일 준공하였다. 댐에 설치된 폭 20m, 높이 16.75m의 15개 수문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채택된 저낙차 밸브형 발전을 가능하게 하며 텐더식 수문으로는 동양 최대 규모이다. 1973년에에 준공, 연간 발전은 3억 3,800만 kWh이며, 평균 출력은 시설용량의 48.2%인 38,600kW이었으며, 1999년에 80MW에서 120MW로 시설용량 증대공사를 완료하였다. 팔당댐의 취수원에서 서울특별시와 인천광역시, 경기도 일부 지역을 관할로 생활용수가 공급되고 있다. 또한 유역 면적 23,800㎢에 수몰 면적 17.1㎢의 거대한 인조 호수가 생겨 팔당유원지가 형성, 서울 근교의 관광 유원지로 그 역할을 다하였으나 2004년 팔당댐 주변이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폐쇄되었다. 한때는 팔당댐 공도교(2014년 관리교로 명칭 변경됨)에 45번국도가 지나갔으나 팔당대교가 개통됨에 따라 현재는 국도가 지나가지 않으며, 2004년 10월 인근 배알미대교 개통에 따라 팔당댐의 안전과 보안을 이유로 차량통행을 제한하였다. 그러나, 교통불편 등 끊임없는 민원이 지속되어 2006년 12월 8일부터 통행재개에 대한 협약 체결 및 2009년 9월, 2014년 9월 협약 갱신으로 각각 통행 시간이 연장되어 주말, 공휴일(휴일 전일 오후 6시 ~ 휴일 자정)에 한하여 소형승용차만 통행이 가능하다.(화물차 및 이륜차, 자전거, 보행자 통행불가) 관리교 통행관련 관리운영 및 보수 주체는 경기도(남양주시 도로교통국장)이다.
♤ 경안천(慶安川)
경안천은 경기도 용인시 호동 용해곡 상봉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모현읍·오포1동·오포2동·경안동 일대를 지나 북쪽으로 흘러 남종면 분원리(分院里)에서 한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으로 경안천 주요 지류 하천에는 고산천·직리천·중대천·목현천과 곤지암천 등이 있다. 2007년 2월 기준으로 팔당호 유입 수량은 1일 평균 47만 4천 톤으로 1.6%에 불과하지만 BOD 기준 오염 기여도는 무려 16%에 달하여 비상이 걸렸다. 유역면적 561.02㎢, 유로연장 49.3㎞, 하폭 1,930㎞, 하천연장 22.5㎞인 국가하천이다. 경안천의 명칭은 옛 광주시 경안리(慶安里)에서 유래하였으나, 경안리는 1917년 광주군청이 남한산성에서 경안면 경안리로 옮겨 오면서 서울에서 가깝다고 하여 일제에 의해 경안(京安)으로 표기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하천의 한자는 바뀌지 않고 경안천(慶安川)이라 불린다. 일제강점기에는 용인군 군청소재지인 김량장리를 관류한다 하여 김량천(金良川)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소천(小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주 동쪽 30리에 있는데 도미진(渡米津)으로 들어간다."는 내용이 나온다. 『해동지도』, 『광여도』, 『대동여지도』에는 우천(牛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정남한지』에 "우천은 퇴촌면에 있다. 일명 소천(昭川)이라고도 하는데, 『여지도서』에는 소천(小川)으로 되어 있다. 하나의 근원은 양지에서 나와 용인 금령역(金嶺驛) 앞을 지나 북쪽으로 흘러 광주 오포면에 이르러 세피천(細皮川)이 되어 다시 동쪽으로 흘러 경안역(慶安驛) 앞에 이르며, 다른 한 근원은 양지에서 나와 광주의 도척면에 이르러 곤지암천이 되고, 또 다른 근원은 여주에서 나와 광주의 실촌면에 이르러 동북쪽으로 흘러 경안천과 합류하고 동쪽으로 흘러 퇴촌면에 이르러 우천이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 퇴촌면 지위동(支渭洞)과 경안면 역촌에 경안천(慶安川)이 수록되어 있다.
♤ 도미설화/ 도미진(都彌津)/ 배알미리(拜謁尾里)
경기도 하남의 팔당댐과 팔당대교 사이에 배알미리란 강변마을이 있고, 그 곁에 도미진이라 불리던 한강의 나루터가 있다. 지금은 그 흔적을 보일 뿐이지만 이곳이 『삼국사기』가 전하는 도미나루 전설의 현장으로 한 백제 여인의 곧은 정절이 새겨진 곳이다. 도미설화는 백제 4대 개루왕(蓋婁王)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읍지 부근에 도미라는 한 평범한 백성이 살았는데, 그의 아내는 드물게 보는 미인이었던 모양이다. 도미의 처는 용모만이 아니라 행실도 곧고 절개도 굳은 여인이었다. 자고로 미인은 그 나름대로 유명세를 치르게 마련인가. 소문이 퍼지면서 급기야 왕까지도 도미부인을 탐내게 되었다. 그러나 도미 처의 절개는 왕의 권력도 통하지 않았으니 이에 앙심을 품은 왕은 야비한 공작을 전개한다. 그 공작이란 것이 남편 도미를 적당한 핑계로 대궐에 억류시킨 후 자신을 빼닮은 신하로 하여금 왕으로 변장시켜 도미의 집으로 보낸 것이다. '짐은 일찍이 그대가 미색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대 남편과 내기 장기를 두어 짐이 이겼노라 이제 그대는 짐이 소유가 되었으니 당장 대궐로 들어와 수청을 들지어다." 가짜 왕은 이런 거짓을 늘어놓으면서 도미 처를 범하려 한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는 그녀의 수완도 보통이 아니었다. 가짜 왕을 먼저 방에 들게 한 후 요구에 응하는 척 하면서 그녀 역시 자신을 닮은 여종으로 하여금 가짜 왕의 시중을 들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임기웅변이 오래 갈 리 만무하다. 뒤늦게 사실을 안 왕도 크게 노하여 악독한 보복을 가한다. 남편 도미에게는 누명을 씌워 그 벌로 두 눈을 뺀 다음 배에 태워 멀리 귀양을 보내고, 그 아내는 대궐로 끌고 와서 강제로 욕을 보이려 한 것이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도미의 처는 역시 현명했다. 왕이 그녀를 범하려 할 즈음, 그녀는 몸에 달거리(月經)가 있다는 핑계로 시간을 끌면서 틈을 엿보아 대궐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교묘하게 도망쳐 나온 그녀는 배알미리 나루터에서 배를 얻어타고 강을 건너 남편을 찾아간다. 기록에 의하면 그녀가 탄 배는 천성도(泉城島)에 닿았고 거기서 남편을 만났다고 되어 있으나 그 천성도가 지금이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두 눈을 잃고 풀뿌리를 캐먹으며 연명해 왔던 도미는 아내를 만나자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한다. 이들이 당시의 국경선인 한강을 건넜다고는 하나 안심할 처지는 못 되었다. 백제 왕의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이들은 다시 산산(蒜山)이라는 곳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곳에서 몸을 숨긴다. 백제와 적대관계에 있는 고구려 주민들의 대우는 극진했다. 고구려인들은 이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음식과 의복은 물론 보금자리까지 마련해 주며 이들 부부를 편히 살게 했다. 이 이야기는 대표적인 관탈민녀형(官奪民女型) 전설이다. 목숨을 걸고 정절을 지킨 여인이 행실이 아름답다 하여 기록에 남겼겠지만, 역사적 사실과 부합된다고 보기엔 어렵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백제 개루왕은 성품이 온순하여 선정을 베푼 임금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전설은 다른 시기의 것이거나, 혹은 고구려에서 꾸며 낸 선무용 일 수도 있다. 도미진이 지금의 어디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배알미리란 설이 있고 팔당대교의 북쪽 창우리란 설도 있다. 하남 도미나루 전설은 그 배경지역을 한강에 두고 있다. 그리고 한성 백제 도성이 있었다고 거론되고 있는 하남시의 창우리 강가에 있다. 여기에는 백제 도미설화에서 근원된 도미(都彌)와 관련되는 이름이 많은데 도미나루(渡迷津)를 비롯하여 도미원(渡迷院) 도미천(渡迷遷) 도미강(渡迷江) 도미협(渡迷峽) 도미사(渡迷寺) 도미 기우제단(渡迷 祈雨祭壇) 등이 있었으며 파생어로서 도미(渡迷) 도미(度迷) 도미(都迷) 도미(道迷) 두미(斗迷) 두미(斗尾) 두미(豆尾) 두미(豆美) 두미(頭彌) 두미(豆彌)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이렇듯 도미나루는 한자는 다르지만 도미라는 이름이 광범위 하게 사용되었고 각종 문헌 기록이나 지도 그리고 개인적 시문집에서 하남의 도미나루를 두고 기록한 문헌이 거의 전부에 가깝다는 것이다. 특히 도미설화와 관련된 지명이라고 보는 이유는 지역 도미전설이 삼국사기의 도미설화 내용과 동일하며 1656년 유형원(柳馨遠)이 편찬한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 광주목(廣州牧) 열여조(烈女條)에는 도미설화 내용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이는 이미 도읍이 남한(南漢)일 때의 일이므로 도미설화의 이야기는 도미원과 도미천이 있는 도미나루 부근의 이야기 일 것이라는 기록이 있어 이미 17세기 중반에도 도미나루 지역이 도미와 관련되어 생긴 이름임을 밝히고 있다. 같은 문헌의 우역조(郵驛條)에는 두미원(斗迷院)이 두미천(斗迷遷)에 있다하고 관량조(關梁條)에는 두미천(斗迷遷)은 도미천(渡迷遷)이라고도 하며 주 북쪽 23리에 있다. 동서 양쪽에 산이 강을 끼고 마주보며 서 있고 울퉁불퉁한 돌길이 산허리를 돌아 동쪽으로 봉안역(奉安驛)을 가리키며 험준하게 십여 리를 뻗었는데 옛날에는 도미원(渡迷院)이 있었다. 곧 서울의 목이 되는 중요한 지역으로 속칭 도미천(渡迷遷)이라 하였다. 이 기록은 광주의 치소가 하남의 춘궁동에 있다가 1626년 남한산성으로 옮겨갔는데 남한산성에서 도미나루까지의 거리가 23리 라는 뜻이며 강(江:漢江, 도미강, 두미강) 양쪽으로 좁은 협곡을 이루고 있어 이 좁은 강 협곡을 두미협(斗迷陜)이라고도 하였으며 강의 하류인 창우리 나루터부터 상류 배알미리까지 남쪽 강안의 절벽을 따라 약 10여 리를 울퉁불퉁하고 꼬불꼬불한 돌길이 벼랑을 끼고 이어졌었는데 이 돌길을 도미천(渡迷遷)이라고 한 것이다. 그 돌길은 도미의 이야기와 함께 신라 때부터 이어져 왔다고 보아지는데 천(遷)이라는 용어가 신라의 방언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도미천에 도미진과 도미원이 있었는데 현재 까지도 그 터와 유구를 확인할 수 있다. 문헌의 기록에 도미원과 도미진이 검단산 아래 도미천(벼랑에 있는 돌길)의 하류지점임을 기록하고 있는데 정확한 기록이다. 그것은 『세종실록지리지』에 ‘검단산은 주 동쪽에 있으니 고을사람들이 진산이라 일컫는다. 도미진은 주 동북쪽에 있으니 나룻배가 있다. 그리고 그 서쪽을 진촌진(미음진.독진)이라 하며 주 북쪽에 있으니 나룻머리에 수참을 두었고 참선이 15척이다. 또 그 서쪽에 광진도(광나루)가 있다.’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보아 검단산이 주 동쪽에 있고 도미진은 주 동북쪽이라 하였으니 검단산 중심에서 약간 북쪽(강의 하류 쪽)으로 치우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당시 주의 읍치가 있던 하남의 춘궁동에서 동북쪽이라는 말은 도미천이 하남의 창우리에서 배알미리까지 협곡을 이루면서 약 10여 리를 이루고 있는데 창우리 쪽으로 치우쳐 도미진(渡迷津)과 도미원(渡迷院)이 위치한다는 내용의 기록이며 현재 도미나루 표식이 있는 위치와 같은 곳이다. 현재 도미나루 추정지에서 창우리 방향으로는 도미나루와 비슷한 지형이 약 200m에 걸쳐 두개가 더 있다. 나루터는 항구와 반대로 강변의 돌무지가 모래톱처럼 강 쪽으로 튀어나온 곳에 자리한다. 따라서 도미나루 표지가 있는 도미진과 도미원의 추정지에서 팔당대교 방면인 하류 쪽으로 보면 두 곳이 더 있는데 창우리 마을(팔당대교)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창모루 나루터가 하나이고, 창모루 나루터와 도미나루 중간에 또 하나의 모래톱 형 강변돌무지가 하나 있어 모두 세 곳으로 그 중에서 제일 상류 쪽의 나루터가 도미나루인 것이다. 그 곳은 예전부터 도미나루로 전승되어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도미나루 식당’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도선하는 자리에서 가까운 곳에 비교적 넓은 평탄지가 있어 창고나 건물을 지었던 유구를 확인 할 수 있고 다른 곳에 비교하여 지형이 비교적 평탄하여 하역작업이 가능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유일한 곳이며 또 도미진 위쪽에 있었던 돌길(도미천)도 도미진에서 가까워 도미원이 자리하기도 수월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한편 도미부인이 배를 타고 떠난 곳은 이 세 곳 중의 한곳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도미부인은 왕의 탐욕을 기지(機智)로 넘긴 후 바로 강구로 달려왔다고 하였는데 배가 없어 건널 수 없게 되자 하늘을 향하여 통곡하였고 그때 홀연히 배가 나타나 승선한 것으로 되어 있어 강구 근처에 있는 나루터에서 승선하고자 한 것으로 보아 창우리 쪽에서 가까운 창모루 나루터나 조금 상류인 나루터 예상지역에서 통곡하였다면 주변에 있던 나룻배에서 울음소리를 듣고 뱃사공이 이동하여 태워 주었거나 예상치 않은 빈 배가 떠 내려와 승선하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도미나루 부근에서 배를 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할 것이다. 한편 강구(江口)라고 되어 있어 바닷가 강어귀를 생각 할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바닷가가 아니고 큰 냇물이 강과 만나는 지역도 강구로 보고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큰 냇물이란 하남시의 중앙을 관통하는 덕풍천이 한강과 만나는 주변지역을 강구로 표현한 것이니 바깥 창우리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동국여지지 열여조를 통하여 도미설화가 도미진의 이야기임을 밝히고 있음은 전술하였고 1956년 하남(당시 광주군 서부면)에 거주하던 중암(重庵) 구민회(具敏會) 선생이 집필한 남한비사(南漢秘史)에서 ‘개로왕이 도미(陶彌)의 아내를 사귀고자하여 도미의 두 눈을 찔러 멀게 하고 강에 던지니 도미의 아내가 남편을 구하여 고구려 땅으로 도망갔다는 기록을 보면 후에 도미를 던진 강을 도미나루라 부르니 지금의 광주군 동부면 창우리 앞에 두미나루라는 곳이 그곳이다.’ 라고 기록함으로써 도미나루가 도미와 연관된 전설임을 명확히 하였고 도미나루를 창모루나루터로 지칭한 것이다. 한편 ‘광주부지’와 ‘중정남한지’에서도 도미나루가 동부면에 있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도미나루가 하남시에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도미나루의 위치에 대하여는 서울시에서 편찬한 ‘한강사’에서는 당정섬 바로 위쪽을 도미진으로 표시하였고 경기도 박물관에서 편찬한 ‘한강’에는 배알미나루를 도미나루라고 하였으며 ‘남양주시지’에는 도미진이 팔당근처라고 적고 있다. 이들 자료가 모두 하남시에 있다고는 하지만 위치상의 차이가 있으므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도미진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주 동쪽 10리, 『세종실록지리지』의 주 동북쪽 등으로 표시한 것은 광주의 치소가 하남의 춘궁동에 있을 때를 기준 한 것이며 ‘동국여지지’와 ‘중정남한지’가 주 북쪽 23리, 그리고 ‘대동지지’에 두미천이 주 북쪽 20리, 두미진이 동쪽으로 20리라고 하고 그 북쪽 언덕이 두미천이라고 한 것은 1626년(인조4) 광주치소를 남한산성으로 옮긴 이후의 기록이므로 차이가 난다. 그러나 대동지지에서 두미진을 동쪽으로 20리라고 한 것은 착오에 의한 기록으로 본다. 당시 지도기록을 보아도 검단산이 너무 서쪽으로 그려있고 망월이 검단산 서쪽에 있어야 하나 검단산 동쪽으로 표시하여 잘못 그려진 지도가 여러 곳에서 산견됨을 알 수 있다. 서울시의 한강사에서 표시한 당정섬 위의 도미진은 당시 나루터가 강폭이 좁은 도미협에 있었음을 감안할 때 당정섬 부근에서는 이미 강폭이 많이 넓어진 지점이므로 나루터로서의 위치가 적절치 않다. 경기도 박물관에서 배알미 나루를 도미나루로 표시한 것은 잘못 그려진 지도를 참고하여 그렇게 한 것으로 보며 또 이를 근거로 하여 배알미나루를 도미나루로 단정하여 쌀과 관련 있는 나루라고 한다든가 두물머리(양평 양수리)에 연관한 지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도미나루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 기록하였듯이 창우리 쪽에 치우친 나루이다. 한편 배알미 나루의 근원을 쌀에서 찾는 것도 잘못이다. 굳이 쌀을 많이 수송한 나루는 창우리 쪽의 나루로서 세미(稅米)는 창우리 두미진에서 다시 세미길을 따라 환곡을 저장하는 사창(社倉)이 있었던 상사창동이나 하사창동으로 이송하였는데 배알미 나루에서 세미를 창우리 쪽으로 이동하였다면 변변한 마차 길도 없는 돌길을 따라 10여리를 역(逆) 방향으로 이동하였거나 다시 배에 태워 창우리로 이동하였다는 이야기인데 공연히 시간과 물자와 노력을 낭비하는 어처구니없는 처사로서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다. 다만 남한산성 치소로 직접 운송할 물자를 도마치 고개를 넘어 광지원을 통하여 수송하고자 하였다면 배알미 나루터를 더 진행하여 팔당발전소를 지나 이석리나 삼성리 부근의 선착장을 이용하여야 타당한 이야기가 된다. 따라서 배알미리는 도미진과 도미원과는 상관이 없는 지역이 되며 쌀과 연관 지으려는 설명도 광주의 사창이 어디에 있었는지 세미길이 어디인지 조차 모르는 단견에 불과하다. 분명한 것은 도미진과 도미원은 거의 같은 장소에 있었으며 도미천 길에서 창우리에 치우친 광주부 동북쪽 10리 거리에 있었다고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한 것이고 배알미동에 있었다면 주 동쪽 20리라고 하였어야 할 것이니 배알미나루와 쌀과는 애초부터 상관없는 지역임을 밝혀둔다. 배알미리(拜謁尾里) 마을의 배알(拜謁)은 “지위가 높거나 존경하는 사람을 찾아가 뵙는다는 뜻으로 고상한 이름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 배알과는 상관이 없는데서 출발한 이름이다. 일설에는 한양에서 지방으로 내려갈 때 이곳을 지나면 한양 땅이 더 이상 보이지 않으므로 임금을 향하여 절을 올리는 곳이라고 끌어다 붙이지만 배알미리에서는 서울은 커녕 하류의 약 10리인 창우리도 직접 보이지 않는다. 한편 임금에게 절을 올리는 곳이면 망배리(望拜里)나 주배리(主拜里) 등으로 해야지 왜 만나지도 않으면서 배알이라고 하였겠는가? 배알미리에서 약 10여리 동쪽으로 더 올라가면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가 나오는데 여기에 망주(望主)고개 라는 지명이 있다. 조선 초에 조영무(趙英茂)가 낙향하여 임금이 생각나고 걱정될 때면 고개에 올라 한양 땅을 향하여 절하였다는 곳이다. 그러나 배알미리는 그런 전설 또한 없는 곳이다. 따라서 배알미리의 의미는 다른 곳에 있다. 즉 우리 원래의 말 ‘비알미’에서 왔다고 보아야 한다. ‘비알미’라는 말은 ‘비알’은 원래 중부지방의 방언으로 ‘비탈’ 이라는 뜻으로 미는 ‘밑, 아래’라는 우리말인데 즉 “산비탈 아래의 마을” 이란 뜻으로 한자로 표시하자니 인심 써서 고상한 말로 표현한 것이다. 전술한 도미천(渡彌遷)이 창우리에서 배알미리까지 이어지는데 강비탈 돌길의 끝자락이요 검단산의 북동편 경사진 벼랑 아래의 지형이니 자연 산천의 모양에 따라 지명을 부르던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와도 맞는 해석이다. 그리고 남양주시지에서 도미나루를 팔당 근처라고 하였음은 남양주 지역에 있는 것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으나 원래의 의미는 팔당의 한강과 접한 맞은편 강안에 있는 나루로서 근처의 표현이 너무 광범위하였을 뿐이다. 아울러 다른 팔도군현지도(1760년), 팔도지도(1785-1789)에는 두미(豆迷)라고 기록하고 각기 검단산 동쪽에 표시하고 있는데 망월(望月)도 검단산 동쪽에 표시하고 있어 정확도에서는 떨어지며 해동지도(1750) 광주부에는 도미진(渡迷津)을 검단산 아래 기우제단 상류 쪽에 표시하고 동국여도(1800)에서는 도미천을 검단산 남쪽에 표시하여 잘못표기 하고 있으며 태호 상류쪽에 표시하고 있는데 태호(太湖)는 지금의 미사동 조정경기장 부근이다. 『대동여지도』(1861)에는 두미(斗迷)라고 표시하였으나 표시위치는 검단산과 예봉산 사이에 바르게 하였으나 검단산을 사실보다 서쪽에 배치하여 정확히 알 수가 없도록 표시하고 있다. 광주부(1871)지도에는 당정도(堂亭島) 위에 도미진(渡迷津)이 있고 그 상류 쪽으로 가면서 검단산 아래에 요해처(要害處)와 도미천(渡迷遷)을 차례로 표시하고 있는데 요해처란 군사적으로 자기편에는 꼭 필요한 반면 적에게는 해가되는 요충지를 이른다. 따라서 옛 지도상으로는 도미진의 정확한 위치의 판명이 곤란한 점이 있으나 모두 팔당 맞은편의 하남지역이라는 것은 판별이 가능하다. 그리고 고려 때에는 광주에 도미사(渡迷寺)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광주 도미사(渡迷寺) 산꼭대기에서 물이 솟아나서 민가가 잠기고 떠내려갔다’고 하여 도미진 근처의 검단산에 도미사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고려시대에도 ‘도미’라는 도미나루 근처의 지명이 널리 알려져 사찰의 이름으로까지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현재 도미설화와 관련이 있다고 내세우는 다른 지역의 나루 이름으로 ‘도미’라는 이름을 가진 나루는 하남 창우리의 도미나루 밖에 없다. 1447년 발간된 『용비어천가』14장에 ‘渡迷 두미津’ 이라는 표기가 나오는데 한자로 도미(渡迷)라 쓰고 한글로 ‘두미’라고 쓴 것인데 이는 현지에서 부르는 한글 이름을 표시한 것이다. 예를 들면 광진(廣津)을 ‘광나루’로 삼전도(三田渡)를 ‘삼받개’ 등으로 표시한 것인데 도미진이 현지에서는 두미진으로 통용되었다는 기록으로 후에 도미(渡迷)라는 지명이 두미(斗迷, 斗尾, 豆尾, 豆美, 頭彌, 豆彌) 등으로 표기하게 된 원인을 밝혀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도미(都彌)라고 불리었던 장소이름이 도미(渡迷)로 표기되고 다음에 두미(斗迷)로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도미설화의 발생 지역이므로 처음 도미나루라고 부르기 시작한 후로 계속 우리말로 도미라고 불리어 오던 것을 처음 도미나루를 한자로 표시할 때 전설보다는 그 지역의 자연적 특성이 우선 고려되는 지명의 표기전례에 따라 도미나루의 특성인 ‘건너는데 어지럽다’ 물살도 세고 너울도 많아 건너기 혼미하다는 의미의 도미(渡迷)를 나루이름에 도입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두미(斗迷)는 지역에서 이미 두미라고 통용되므로 도미(渡迷)와 같은 의미의 건너는데 크게 어지러운 뱃멀미 많이 나는 나루라는 의미로 두미(斗迷)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 다음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한자를 도입하여 사용한 것인데 두미(斗尾) 등 꼬리미(尾)를 사용한 것은 도미나루 지점이 도미협(渡迷峽)의 끝 지점으로 강의 너울과 어지러움이 끝나는 지점이라는 의미와 함께 두미협의 맨 ‘아래’ 위치에 있는 나루라는 의미로 생각되며 두미에서 두루미(彌)자를 사용한 것은 도미(都彌)의 의미를 살리려고 하였거나 멀다는 의미의 미(彌)의 뜻으로 ‘건너는데 멀게 느껴지는 나루’라는 의미로 보여진다. 한편 당초의 ‘도미(都彌)’라는 음이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두미(斗迷)로 바뀌었는데 민간에서 오랫동안 불리다 보면 도미-데미-되미- 뒤미- 두미로 변형된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도미나루가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양평의 양수리 두물머리와의 관계는 배알미 나루터에서 10리가 넘고 도미나루에서는 20리가 넘는 거리 차가 있어 두 물이 합치고 서로 바라다 보이는 지역에서만 사용되는 두물머리 와의 관계는 연관성이 없음을 밝혀둔다. 굳이 배알미나루터가 두물머리라면 이는 가까운 경안천의 하류인 소내(牛川)와의 합수지점에서 가까워 두물머리라고 하여야 하는데 기왕의 양수리 두물머리가 있으므로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도 두물머리라는 지역명은 회피되었을 것으로 본다.
- 뉴스투데이 24 윤제양 기자 입력 2013.05.21 14:24 <연재>'하남의 도미나루가 시사하는 백제도성' 참조 -
- 에필로그
서울 인근이라 교통이 편리하고 길이 그닥 어렵지 않아 저도 시동을 걸기 위해 검단지맥을 찬스 기회로 사용합니다. 전에 팔당에서 출발하여 오리역에서 저녁을 먹고 강남16산을 이은 적도 있고 한남정맥과 서울을 이으며 실거리상으로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두 구간으로 나눠서 하면 문제가 없겠지만 한 구간으로 할 경우 저는 처음 가보는 출발지를 주간에 하고 많이 가본 구간은 야간에 해야 맞습니다만 그럴려면 새벽에 끝나니 택시 잡아 타고 집에 들어가야 합니다. 깨끗하게 멀리 바라보는 시계를 얻을려면 여름보다는 한겨울이 좋겠구요. 그러나 산에서는 항상 의외의 변수라는게 따라다닙니다. 법화산을 올라가며 빙판길이 되어 있는 산을 보며 즉각 체인젠을 했어야 했는데 미끈덩 하며 한쪽 발로 중심을 잡을려다 무릎 위 바깥쪽으로 근육이 놀랐나봅니다. 이후론 계속 찜찜한 상태로 진행했네요. 태재에서는 오직 편의점만 불을 밝히고 있었구요. 도시락을 까먹고 잠깐 쉬며 발바닥을 부직포로 미리 땜질을 하고, 남한산성을 지나면서는 산성을 비롯 카메라만 들이대면 모두가 다 작품사진이었습니다. 동장대지에서 바라본 앵자지맥, 그리고 무갑산(武甲山, 580.7m)이 반가웠고 역시 수도 서울을 연하는 지맥인지라 먹거리가 많습니다. 이 골짜기, 저 고을마다 감춰져 있는 수많은 야사들이 자기도 보아달라며 아우성 치고 있습니다. 검단지맥을 마치니 경기도 광주, 이천, 용인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어요. 부족한 것은 이제 독조를 통해 얻을 기회가 또 있겠지요. 은고개로 내려서며 검단지맥을 의미있게 끝내기 위한 작은 고민을 하게 되었어요. 말끔하게 한 구간에 끝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하루 날잡아 검단산에서 양쪽 지맥의 끝지점을 모두 가보는 방법도 유익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첫댓글 수고하시었습니다.
벌봉쪽으로 가셔서, 남한산 정상석 사진을 놓쳤나 봄니다.
제 움막위치는 비밀인데...
고문님!
정상석은 없어졌어요. 공사중이라 임시로 다른 곳으로 이전해 놓은 모양입니다.
벌봉 아래로 내려서서 봉암 옆에 성산정 위치 다 알아요~^^
고조은산선배님이 위치를 알려주셨습니다.
글찮아도 조고문님~~!! 하고 벌봉에서 그쪽 방향에 대고 몇 번 불렀는데 출타 중이신지 대답이 없어서 그냥 갔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일요일에만 출근해요..
평일은 지방 출장 가느라 바빠서...
정상석은 내일 새벽 가서 찾아봐야겠어요.
넵~^^
정상석이 전엔 삼각점 바로 아래에 있었는데
그 부근을 깍아내려서 지대가 확 낮춰졌습니다.
벌봉을 보느라 왼쪽으로 빙 돌았는데 남한산으로 직진하면 그 사이에 옮겼을것 같아요.
혹시 성밖에다 내동댕이 쳤을까요? 제가 둘러볼 땐 없었는데요
오늘 본 남한산 정상석...있던 자리에 그대로...
3암문을 지나 동쪽으로 가다, 벌봉-남한산 갈라지는넓은 Y갈림길에서 남한산 방향으로 30여m 가서 있음.
남한산은 정상석에서 동남방향으로 150여m 더가야 있고 (3각점이 있는봉)..
고문님~!
제가 남한산을 지난 지가 최소한 3~4년은 된것 같습니다.
네모진 조그마한 표석일 때 보았고 저렇게 큰 정상석은 보질 못했습니다.
30m 더 가서 사진을 찍고 벌봉으로 우회를 할걸 그랬네요. 수고많으셨습니다.^^
검단지맥 마무리 하셨네요
예전 지나온 구간이라 선하네요
날머리 구간이 논란이 있는 곳인데 마무리 잘하셨네요
날씨도 좋고 시원시원한 풍경이 너무 좋습니다
눈도 내려 있고 멋진 뷰 잘 감상 했습니다
건너편에 예봉산이 보이고 언제 천마지맥을 가야 하는데 ㅠㅠ
늘 안산 즐산 하시고 올해도 홧~팅 입니다^)^
와룡산선배님!
오늘 올만에 실내벽에 나와 있습니다.
무리하지 않게 천천히 운동을 시작할려구요.
검단지맥 깔끔하게 양쪽 다 돌았어요.
가까워서 저에겐 유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두번에 걸쳐 마무리한 퐁라라운영자님의 검단지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겨울 심산산행을 시작으로 눈덮힌 남한산, 검단산 모습을 잘 묘사해 주셨네요.
중탈지인 은고개 오르내림도 만만치않은 곳이기도 합니다.
마무리가 아쉬웠음인지 종착지 창모루에서 검단산에 다시 올라 팔당댐까지 진행하는 여력을 보여주셨구요.
팔당대교를 보며 지난날 업무로 찾던 기억을 되돌려 봅니다.
새해에도 늘 건강한 산행되세요.~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방장님~^^
어영부영 1월달도 저물고 있네요.
운동도 안하고 허리둘레만 키웠더니 목디스크는 확실히 나아진것 같습니다.
수도권에서 쉽게 접하는 검단지맥이라 후기를 잘 다듬어 완성도를 높혔습니다.
영하의 혹독한 추위는 아니었지만 우연하게 병자호란 기간에 남한산성을 지났네요.
검단산, 남한산성은 독립산행으로도 몇 번 다녀오고, 강남16산을 세번에 걸쳐 도전하였기에
골안사갈림길까지는 어렵지 않았어요. 그 이후가 궁금했었는데,
야간이긴 했지만 물푸레골에서 불곡산까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그리고 포은 정몽주선생의 나와바리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네요.
포은선생의 고향은 보현지맥을 하러 영천에서 청송 노귀재를 가다가 지난 기억이 있습니다.
연일정씨이고, 실제 고향은 호미지맥을 하며 해병 부대 가기 전 왼쪽 아래인 포항시 남구 오천읍인데
어머니가 친정인 영천에 가서 낳으셨던 모양입니다. 예전엔 친정으로 출산 원정을 떠난 경우가 많았답니다.
이제 하나 또 잡으러 갈 시간이 된것 같습니다.
서둘지 않고 토실토실 살을 찌워 먹음직스럽게 지맥을 진행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