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에게 희망을 <엡 4:21~24>
대광고 졸업예배. 2004.02.11.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림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
오늘 우리 학교에서는 마지막으로 예배를 드리는 3학년 학생들에게 꼭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수업 시간에도 소개한 적이 있는데, 트리나 폴러스가 지은 <꽃들에게 희망을> 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나중에 호랑나비가 되는 줄무늬애벌레입니다. 줄무늬애벌레는 태어나자마자 자기가 누워있던 나뭇잎을 열심히 갉아먹었습니다. 마치 먹기 위해 태어났다는 듯이, 한동안 먹고 자고 배설하는 일만 되풀이하던 줄무늬애벌레가 하루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삶이라는 게 이렇게 재미없고 따분한 것인가? 먹고 자는 것 이외에 다른 건 없는 걸까?”
단지 생존할 뿐인 본능적 삶에 회의를 느낀 줄무늬애벌레는 마침내 ‘의미를 찾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한참 동안 자기가 태어난 나뭇잎 주변을 기어 다니던 줄무늬애벌레는 드디어 저 멀리,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기둥을 발견했습니다.
기둥에 가까이 다가가자 수많은 애벌레들이 서로 먼저 기어오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줄무늬애벌레는 탄성을 질렀습니다. “야, 저기 저 멋진 기둥 좀 봐! 저기에 내가 찾는 무언가 대단한 게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저렇게 많은 애벌레들이 죽기 살기로 기어오르는 거겠지.”
기대에 부풀어 기둥의 밑둥까지 다가간 줄무늬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과 뒤섞여 정상을 향해 열심히 기어올랐습니다. 기둥을 오르면서 줄무늬애벌레는 어떤 법칙과도 같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밟을 수밖에 없다는 슬픈 사실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줄무늬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의 몸을 밟고 더 높이 기둥 꼭대기를 향해 오르고 또 올랐습니다. 거침없이 오르던 줄무늬애벌레는 어느 순간 오르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한 채 어정쩡 길을 막고 있는 한 마리 노랑 애벌레를 만났습니다.
그를 밟지 않고는 더 높이 올라갈 수 없었기에 줄무늬애벌레는 질끈 눈을 감고 단숨에 노랑 애벌레는 밟고 올라섰습니다. 그리고는 미안한 마음에 노랑 애벌레를 쳐다보는 순간, 두 마리 애벌레는 서로 눈이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원망이 담긴 듯한 눈으로 노랑 애벌레가 줄무늬애벌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위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이렇게 서로를 밟으며 오르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 우리 내려가면 어떨까?”
마침내 두 마리 애벌레는 서로 끌어안고 자신들의 몸을 둥근 공처럼 만들어 떼굴떼굴 굴러 기둥을 내려갔습니다. 두 마리 애벌레는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며 사는 것, 그건 새로운 경험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하지만 줄무늬애벌레는 그 거대한 기둥이 무엇인지, 기둥의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줄무늬애벌레는 노랑 애벌레를 남겨둔 채 혼자 기둥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보기로 했습니다.
줄무늬애벌레가 떠난 이후, 노랑 애벌레는 날마다 기둥 근처까지 다가가 그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하루 종일 줄무늬애벌레를 기다리다 지쳐 돌아가려는 노랑 애벌레에게 찢어질 듯 비명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몇 마리의 애벌레들이 기둥 꼭대기에서 떨어지며 내지른 비명이었습니다. 애벌레들은 죽기 직전에 노랑 애벌레에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저 꼭대기, 그 곳의 비밀은 나비들만이 알거야.”
꼭대기의 비밀은 무엇이며, 나비란 무엇일까? 생각에 잠기며 돌아오던 노랑 애벌레는 가늘고 질긴 여러 겹의 끈에 묶여있는 늙은 애벌레를 만났습니다.
“저런, 봉변을 당하셨군요.”
“아니, 우린 봉변을 당한 게 아니란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힘들지만 이 과정을 거쳐야 해.”
나비라는 말에 노랑 애벌레는 몹시 놀랐습니다. 조금 전, 기둥 꼭대기에서 떨어져 죽어가던 애벌레들도 나비 얘기를 했었거든요.
“나비가 무언가요?”
“나비는 창공을 마음껏 날아다니며 꽃들에게 생명을 주고 희망을 주는 아름다운 생명체란다.”
“창공을 난다구요? 우리는 기어 다니는 애벌레일 뿐인데요. 기어 다니는 우리가 어떻게 창공을 날 수 있단 말인가요?”
“너도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단다. 우리는 너를 기다리겠다.”
늙은 애벌레는 마지막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줄무늬애벌레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기둥의 정상에 오르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기둥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기둥은 무언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애벌레들이 서로 밟고 올라가서 생긴 애벌레의 기둥일 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거기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정상까지 올라간 애벌레들은 밀치고 올라오는 다른 애벌레들에 떠밀려 차례로 기둥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줄무늬애벌레는 이 기막힌 현실 앞에서 자신의 무모함을 탓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살기 위해 버티지 않으면 밑에서 올라오는 다른 애벌레들에 치받혀 곧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혼신을 힘을 다해 버티던 줄무늬애벌레가 거의 기진맥진해져 있을 그때, 갑자기 탄성이 들려왔습니다.
“저기를 봐. 저렇게 아름다운 생명체가 있다니!”
줄무늬애벌레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눈을 돌렸습니다. 창공을 나는 아름다운 노랑나비가 자신에게 접근해 오고 있었습니다. 순간 줄무늬애벌레는 자기 눈을 의심했습니다. 자기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겨우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노랑나비는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자유롭게 정상 부근을 선회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애벌레들이 그 아름다운 생명체에, 그리고 그 화려하고 여유로운 몸짓에 넋을 빼앗긴 순간, 노랑나비가 줄무늬애벌레를 붙잡으려고 접근했습니다. 줄무늬애벌레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습니다. 그 순간 노랑나비와 눈이 마주친 줄무늬애벌레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너무나 눈에 익은 친근하고 애정 어린 눈이었거든요.
노랑나비는 줄무늬애벌레에게 무언가 열심히 말을 했지만 줄무늬애벌레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줄무늬애벌레는 순간적으로 모든 애벌레들이 동작을 멈추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때다 싶어 줄무늬애벌레는 급히 기둥을 내려가며 동료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저 위엔 아무 것도 없어. 이건 무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우리들이 서로를 짓밟으면서 저절로 생겨난 애벌레기둥일 뿐이야!”
많은 애벌레들은 그 말을 듣고 줄무늬애벌레를 따라 기둥을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애벌레도 있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여기까지 올라오느라고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기둥을 내려온 수많은 애벌레들은 노랑나비를 따라 고치가 있는 곳까지 갔습니다. 노랑나비는 고치 안에 들어가 실을 뽑는 동작을 보여주었습니다. 애벌레들은 마치 어린 학생이 선생님의 동작을 따라 하듯, 자기 몸에서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수많은 나비들이 고치를 찢고 나와 창공을 날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줄무늬애벌레는 멋진 호랑나비가 되었습니다. 나비들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니며 꽃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갖가지 꽃이 만개하여 세상을 아름답게 수놓았습니다.
[인생을 사는 세 가지 방식]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이 이 책의 줄거리입니다. 트리나 폴러스는 왜 이 책을 써냈을까요? 애벌레 이야기를 통해 인생을 사는 세 가지 방식이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꼭 새겨들어야 할 매우 중요한 인생 이야기를요.
폴러스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인생의 첫 번째 방식은 ‘본능적인 삶의 형태’에 머무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그저 먹고 자는 것을 비롯하여 본능이 요구하는 욕구를 채워가는 것 이외에는 다른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폴러스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폴러스가 제시하는 인생의 두 번째 방식은 ‘치열한 경쟁으로 자신의 인생을 소진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인생을 사는 사람은 나름대로 의미를 찾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경쟁상대로만 보고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기 안에서 가능성을 찾기보다 주로 밖에서 찾다보니, 진정한 자아와 자기만의 가능성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결국 대부분은 치열한 경쟁 속에 서로를 해치며 무너져가고 맙니다. 경쟁사회에서 지쳐가는 수많은 현대인의 모습이 이 두 번째 삶에 담겨있다고 하겠습니다.
폴러스가 제시하는 인생의 세 번째 방식은 ‘자기 안에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여 꽃피워가는 삶’입니다. 이런 인생을 사는 사람은, 진정한 성공은 남을 짓밟고 올라가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믿으며, 우리 각자 안에 담겨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발견하고 꽃피워냅니다.
[고치의 기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애벌레가 단번에 나비가 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고치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인내의 기간, 준비의 기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애벌레의 시기를 지나 고치를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여러분의 고치를 잘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때가 되었을 때, 창공을 날며, 꽃들에게 희망을 주고,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나비와 같은 인생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마지막 한 가닥 실을 뽑아 고치를 완성하며 노랑 애벌레에게 들려주던 늙은 애벌레의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너도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너를 기다리겠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그런데 이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기로 한 다음, 저는 한 동안 고민에 빠져들었습니다. 애벌레들이 서로를 밟으면서 생겨난 기둥을 내려오면,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이 정말로 모두 자신의 고치를 만들고 훗날 창공을 나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 사회가 과연,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여러분에게 허용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경쟁의 트랙을 벗어나게 되면 이 사회로부터 도태되어 더 힘겨운 삶을 살게 되는 건 아닐까요?
저 자신의 이런 물음에 대해서, 사실 저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는 이유는, 트리나 폴러스가 꾼 꿈을 우리가 함께 꾸지 않으면, 우리 사는 세상이 너무 슬퍼지고 비참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저와 같은 기성세대들이, 치열한 경쟁으로 서로를 밟고 올라서지 않아도 누구나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서 여러분에게 물려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 기둥에 매달리면, 그건 다 같이 죽는 길이 된다는 트리나 폴러스의 경고는 마음 깊이 꼭 새겨들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어 물려주지 못해서 너무나 미안하지만, 그래도 여러분은 이런 현실의 벽을 넘어 자신의 고치를 잘 만들어주기를, 그래서 때가 되면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창공을 마음껏 날아다니며, 자유와 행복을 향유하기를, 그리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가기를, 두 손 모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