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아이가 인 스타에 5.18을 언급한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5·18 당시 북한군이 개입했고, 全통은 관여하지 않았으며, 헬기 사격이나 폭력진압이
없었다는 내용이 아직도 돌아다니는 모양입니다. 북한군 개입설은 ‘교도소 습격 설’을
두고 한 말 같습니다. 헬기 사격은 이미 증거가 나왔고 전 두환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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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 사령관정호영이 발포 명령을 했나? 79.12.12사태가 일어난 후 최 규하를 권한
대행으로 앉혀놓고 전 두환이 국보위에 있었던 것은 전 국민이 아는 사실입니다.
1980년 3월 4일-3월 6일 수도경비사령부에서는 '제1차 충정회의'에서 군의투입을
요하는 사태 발생 시 강경한 응징조치가 필요하다고 내려졌으며, 이미 80년 초에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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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가 가열될 것을 대비해 전국 군 부대에 ‘충정훈련’이 강도 높게 실시됐고, 5월 10
일부터 2군사령부에서는 광주·대전 등에 제7공수여단을 배치하는 방안을 의논했습니다.
5월 14일부터 제31사단은 광주 지역의 주요 보안 목표를 점거하기 시작했으며, 5월 15일
제7공수여단은 광주·대전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제가 80년 당시에는 담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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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1 봄 학기를 하고 있었고 84년에는 필동에 있는 충정부대에 근무를 했는데 제 직속
상관이 신 윤희 대령이었습니다. 신 대령은 신군부개국공신입니다. 우리 임무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APC와 함께하는 폭동진압이었습니다. 무조건 하루4시간은
실전처럼 의무교육을 했습니다. 그때 우리 헌병대에서 실행했던 연무선16개 동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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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렷 총-2.높이 들어 총-3.허리에 총-4.뒤로돌아-5.3연속 앞으로 이동-6.뒤로돌아-
7.3연속 뒤로 이동-8.찔러-9.밀어-10.좌우로 돌아-11.3연속 비켜 쳐-12.뒤로돌아-
13.밀고 쳐-14.차렷 총-15.좌로 돌아-16.차렷 총(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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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시내에서의 시위 진압에 투입된 한 공수부대원은 시위진압이 해산 위주가 아닌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격진압이 발생했다고 진술했는데 실제로 계엄사령부와 2군사령부 등
체포 위주로 진압하라는 상부의 지시는 공수부대 원들의 과격진압을 부채질했습니다.
광주에서 시위가 계속되자 계엄부사령관인 육군 참모차장 황 영시는 강력하게 진압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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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시했습니다. 5월 18시 23시 부로 2군사령관의 강조 사항이 각 공수부대에 지시됐고 이
지시는 ‘공수부대 시내 출동, 융통성 있게 운영’하며, ‘전 가용 작전부대 투입’하여 ‘주모자
체포‘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날 내려진 지시는 ’포고령 위반자는
가용수단 동원 엄중 처리‘하며 ’소요 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토록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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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습니다. 이 같은 지침으로 인해 현장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더욱 과격한 진압에
나서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계엄사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김 대중 연행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들의 시위를 '불순분자'나 '고정간첩들의 책동으로 몰아갔습니다. 5월 21일 계엄
사령관 이 희성은 담화문을 발표합니다. 이 담화문에서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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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 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이다"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같은 요인들 때문에 현장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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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부대원들은 시위를 '불순분자'의 소행 또는 시위대를 '적'으로 규정했고,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결과적으로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폭력적이고 가혹한 진압을
하는 배경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타격분대 체포 조(저격 조)라는 것이 있는데
“나는 타격분대 체포조로서 명에 의거 특정인물 체포, 이상입니다” 수경사(수방사 전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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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지철 때부터 정권의 1중대이었습니다. 제가 신병으로 갔을 때 병에서 중사로 말뚝을
박은 고 참 중에서는 중앙청 앞에서 단 측정을 직접 했다는 사람도 있었고, 여의도 광장에서
수경사기동대가 교육을 받은 것을 제가 직접 목격했습니다. 물론 경찰서 무기고가 털렸다는
이야기나 광주교도소 탈옥시도를 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당시는 내가 직접보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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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유언비어인지 아닌지 사실 확인을 할 수 없었는데 훗날 여러 정황을 볼 때 광주
교도소 습격은 불가능합니다. 광주교도소는 31사단에서 경비를 서다가 나중에 공수부대가
직접경계근무를 섰고 당시 교도소장의 증언에 따르면 교도소 근처에 단 한 구의 시체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무자비 하게 죽고 터지다보니 아차, 이러다간 개죽음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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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겠다싶어 자구책으로 동네 파출소 무기고를 털고 결국 군납업체인 광천 동 아시아
자동차에 까지 가서 장갑차 끌어오고 도청에서 사격전을 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었을 것
입니다. “왜 쏘았지 총, 왜 찔렀지 칼, 트럭에 싣고서 어데 갔지”
당시 계엄군이 사용한 총은 M16이고 31사단은 향토 사단이기 때문에 M1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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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사단장이었던 정 웅 소장이 주동자란 신군부의 주장은 엉성한 주장입니다.
저는 M16으로 폭동진압을 할 때 직접 대검을 장착했습니다.(계속)
2020.6.4.thu.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