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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6월 10일 월요일
[(녹)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아합 임금에게 가뭄을 예고한 엘리야는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낸다. 주님께서는 까마귀를 시켜 그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제1독서). 산으로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행복하여라.” 하고 여덟 가지 참행복을 선언하신다(복음).
제1독서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엘리야>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7,1-6
그 무렵 1 길앗의 티스베에 사는 티스베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내가 섬기는, 살아 계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 말이 있기 전에는 앞으로 몇 해 동안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2 주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3 “이곳을 떠나 동쪽으로 가,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내라.
4 물은 그 시내에서 마셔라. 그리고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에서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하겠다.”
5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대로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로 가서 머물렀다.
6 까마귀들이 그에게 아침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고,
저녁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다.
그리고 그는 시내에서 물을 마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2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바이올린 장인 마틴 슐레스케는 바이올린을 만드는 과정에서 얻은 통찰과 함께 이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는 훌륭한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는 울림이 좋은 목재를 찾으러 높은 산에 올라갑니다. 높은 산에 빽빽하게 자라는 나무들은 햇빛을 받으려고 빛이 들어오는 곳을 향하여 가지를 뻗칩니다. 그러다 빛을 받지 못한 가지들은 시들고 말라 죽습니다.
그러면 나무는 부담이 되는 죽은 가지를 떨구어 냅니다. 안타까운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죽은 가지가 떨어져 나간 바로 그 자리는 나이테가 얇고 섬유질이 길고 단단해져 질 좋은 울림 목재가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여 죽은 부분, 우리에게 부담을 지우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악습과 악덕입니다. 이 부분은 하느님의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죽어 있으면서 몸과 마음에 붙어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죽은 가지를 떨구는 나무의 지혜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가지를 떨구는 순간에는 아프고 고통스럽겠지만, 그 자리는 자신의 고집이 얇아지고, 성품이 더 단단해져 아름다운 삶의 울림을 낳는 목재가 됩니다. 모든 것을 취하지 않고, 해로운 것을 버리는 사람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마틴 슐레스케, 『울림』, 31-32면 참조). 악습과 악덕이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 달콤하여 버리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또는 이것을 잘라내는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잘라내지 않기도 합니다. 달콤한 것을 버리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삶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삶이며, 그 삶은 우리를 하늘 나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이 세상에 나보다 더 부족한 사람은 없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나이를 조금 먹게 되니 슬슬 지난 세월을 자주 돌아보게 됩니다. 감지덕지하게도 주님께서는 제게 수도자요 사제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저같이 부족하고 비천한 사람에게 너무나 과분한 은총입니다.
직장 생활을 할 때에는 언제나 말단이요 바닥이었는데, 수도자요 사제란 신분만으로 급격한 신분 상승이 이루어졌습니다. 능력도 경험도 일천한데, 관리자요 책임자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고 지속적인 겸손의 덕을 유지했으면 좋았을 텐데, 젊은 혈기에 그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보잘 것도 없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은연중에 내가 누군 줄 알아? 하며 부끄럽게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즉시 위로부터 신호가 오더군요. 주님께서는 강력한 철퇴같은 충격 요법으로 저를 바닥으로 내려치셨습니다. 그 바닥에서 다시 한번 새롭게 시작하도록 혹독한 고통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요즘은 조금 나이도 들었겠다, 쓰라린 체험도 했겠다, 철저하게 제 자신을 낮추며 살고자 노력합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나보다 더 부족한 사람은 없다는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형제를 바라봅니다.
신기하게도 자세를 낮추니 세상만사가 은총꺼리들입니다. 밑으로 내려서니 모든 것이 감사거리들입니다. 손에 쥔 것을 놓으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는데, 찬찬히 주변을 돌아보니 감사할 일들, 행복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뭐니 뭐니 해도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 그 하느님께서 과분하게도 ‘하루’라는 은총의 선물을 지속적으로 주고 계시다는 것, 죄인임에도, 나약함에도,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기회를 주신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비록 티격태격하지만 홀로 고독에 밥 말아먹으며 외롭게 살아가지 않고 형제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따지고 보니 너무나도 과분한 은총 속에 살아가고 있군요. 그렇다면 얼굴을 활짝 펴야 되겠습니다.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너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그렇게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장엄한 어조로 ‘진복팔단’을 선포하십니다.
천국에 오르는 길 여덟 가지를 아주 쉽고도 명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임을, 창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임을 선포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행복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봐’라는 얼굴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원인이 뭔지 아십니까? 끝도 없이 올라가기만 원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올라가서는 절대로 내려오지 않으려고 기를 쓰기 때문입니다. 한번 차지한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또 얼마나 고생들이 많겠습니까?
반면에 폭풍 속 같은 고통의 한 가운데를 지나면서도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 원인이 뭔지 아십니까? 밑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낮은 자리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바닥에서 기어 다니니 추락할 위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낮은 곳에 서있으니 심신이 편안해서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 살기 때문에 그렇게 행복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 맡기고 나니 그렇게 행복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희망이기에 그렇게 행복합니다.
행복은 이 법칙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결정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리차드’는 자동차 정비소 사장입니다. 그는 얼마 전까지 교도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출소 후에는 노숙자로 거리를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웠지만, 딸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정비소를 차려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몹시 슬퍼 보이는 한 여성이 리차드의 정비소 앞을 지나갔습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하루는 그녀가 길거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있었습니다. 리차드는 그녀에게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누네’라는 이 여성은 감정에 북받쳐 자신의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리차드와 가까운 곳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차가 없었기에 걸어서 출퇴근했고, 매일 리차드의 정비소를 지나친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군인 아들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이라크 전에 참전했다가 얼마 전 집으로 돌아왔으나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간의 끔찍한 고통 끝에 1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하지만 누네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어린 두 자녀를 위해 일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도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힘들었어요. 사실…. 저도 곧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어요….”
리차드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누네를 매일 초대하여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차를 한 대 선물하고 사비로 등록까지 해 주었습니다.
“나는 감옥에도 갇히고, 노숙자로도 지냈습니다. 그런 내 모습이 보기 싫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난 딸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습니다. 내 딸도 언젠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배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한 사장이 매울 울면서 가게 앞을 지나가는 여성을 보고 인생을 바꿔 놓는데’, 포크포크, 유튜브]
리차드는 세상의 작은 빛이 되고자 했습니다. 빛이 되려면 자기를 태워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는 일이고 타인의 아픔 때문에 슬퍼하는 일이며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또한 의로움 때문에 평화를 이루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리차드의 삶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의 것을 잃으면 안 된다고 믿었던 때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의 것을 내어주어야 한다고 믿은 때입니다. 여기에는 딸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행복 선언인데 그 말씀 안에는 하나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게 가장 핵심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늘 나라를 차지해서 행복해지고, 자비로워지면 자비를 얻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내어주는 것은 반드시 되받게 된다는 법칙을 믿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법칙이 우주적인 법칙으로 인간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면 됩니다. 다만 예수님은 그 법칙을 믿음이, 행복의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가난해지면 반드시 채워주실 것임을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이것이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가 그 상징적인 예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당신을 만나려면 받았으면 내어놓아야 하는, 아니 내어놓기 때문에 또 물을 받게 되는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아담과 하와는 이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드려야 하는 것도 바치지 않아 행복을 잃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엘리야가 나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어서 박해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가뭄에도 하느님은 당신의 일을 하는 엘리야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부족하지 않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곳을 떠나 동쪽으로 가,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내라. 물은 그 시내에서 마셔라. 그리고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에서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하겠다.”(1열왕 17,3-4)
믿고 안 믿고는 우리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행복이 주어지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변하는 것들이 아닌 행복을 약속하는 영원한 약속을 믿고 우리도 가난해지고 자비로워지기로 모험 해 봅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 배달하며 어렵게 살던 학생이 성공하여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제게 인상적인 내용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나이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시간을 보내면 앞으로 남은 날들은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보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 여러분의 나이에 해야 할 일을 하고 시간을 보내면 앞으로 남은 날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보낼 수 있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간단한 말인데,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학생들도 강의를 들으면서 눈빛이 반짝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아주 간단하면서도, 쉬운 성공의 방정식 같았습니다. 학생이 예습과 복습을 하고, 책을 가까이하는 것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뒤로하고 오락실과 컴퓨터 게임을 가까이하고, 놀기에 여념이 없으면 학생의 앞날에 해야 할 일들이 주어질 것입니다. 수도자가 기도하고, 정결을 지키며,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뒤로하고 세상의 일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수도자의 앞날에는 악의 유혹이 기다릴 것입니다.
1997년 대한민국은 ‘국가부도 위기’를 겪었습니다.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기업이 도산하였고, 구조조정을 겪었습니다. 국가의 신용도는 떨어졌고, 외환위기를 겪었고, 수많은 실업자가 생겼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해야 할 일을 하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했습니다. 국민소득이 30,000불이 넘었다고 축배를 들었습니다. 무리하게 해외에 투자하였고, 해외 여행하면서 분에 넘치는 소비를 하였습니다. OECD에 가입했다고 좋아했습니다. 경제의 여러 분야에서 빨간불이 들어왔는데도 외면했습니다. 국가부도의 위기를 겪으면서 대한민국과 국민은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경쟁력 있는 기업을 헐값에 외국 기업에 넘겨야 했습니다. 20%가 넘는 이자를 감수하면서 대출받아야 했습니다. 국민은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아껴 쓰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대한민국은 ‘국가부도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저도 대출을 받았습니다. 부모님의 지낼 수 있도록 전세를 마련했습니다. 27년 전의 일입니다.
교회에 위기가 올 때가 있습니다. 역시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에도 빨간불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를 지망하는 성소자가 계속 줄고 있습니다. 주일 미사 참례 자도 줄고 있습니다. 교회 역시 고령화되고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다가오는 도전과 위기를 외면했습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시대의 징표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시대의 징표에 따른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식별해야 합니다. ‘교회는 항상 쇄신해야 한다.’라는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늘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낡은 것이 있다면 새롭게 바꿀 수 있는 과단성이 있어야 합니다.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이까지 버리면 안 되듯이 교회가 꼭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 가치들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말씀과 예배, 나눔과 희생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가정에서는 기도와 대화를 하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 하느님께서 참된 행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비움’의 영성입니다. 우리를 참된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재물에 대한 ‘탐욕’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언제나 교회가 부와 권력에 취했을 때였습니다. 교회가 나눔과 비움을 실천할 때는 언제나 기쁨과 행복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평화를 위해 연대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옳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받는 박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오늘의 성인
성 보구밀로(Bogumilus)
신분 : 주교
활동지역 :그네젠(Gnesen)
활동연도 ; +1182년
같은이름 : 보구밀루스
성 보구밀루스(또는 보구밀로)는 폴란드 귀족 출신으로 베르테의 도브로브(Dobrow) 태생으로 파리(Paris)에서 공부한 후 고향에 도브로브 성당을 세웠다. 그는 그 후 그네젠의 교구장으로 선출되어 1167년에 착좌하였다. 그는 가족의 영지를 희사하여 코로노바(Coronawa)에 시토 수도원을 세웠는데, 지혜롭고도 열성적인 그의 지도력에 성직자들이 거의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교구가 크게 발전했다고 한다. 연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 그는 스스로 주교직을 사임한 후 카말돌리회에 들어갔고, 우니에도브(Uniedow)에 있는 한 은둔소에서 여생을 보냈다.
성녀 올리바(Oliv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팔레르모(Palermo)
활동연도 : +9세기경
같은이름 : 올리브, 올리비아
성녀 올리바는 시칠리아(Sicilia)의 팔레르모와 카르타고(Carthago)에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용모가 뛰어나게 아름다웠던 그녀는 사라센인들의 침략 때문에 13세 때에 고향을 떠나 튀니스(Tunis)로 갔다. 처음에 그녀는 귀족 출신임을 인정받아 튀니스 근교의 어느 동굴에 살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비록 동굴에서 살았지만 그녀는 뛰어난 신앙을 지녔기에 여기서도 여러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이윽고 사라센인들이 그녀가 그리스도인임을 알고 지하 감옥에 가두고 빛과 음식을 차단하였다. 뛰어난 용모 때문에 배교하면 살려준다고 하였으나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이리하여 그녀는 쇠사슬에 묶인 채 끓는 기름통 속에 던져졌지만 죽지 않았다. 형리들은 하는 수 없어서 그녀의 목을 베었는데, 이때 그녀의 몸에서 비둘기 한마리가 하늘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녀는 올리브(Olive) 또는 올리비아(Olivia)로도 불린다.
복자 요한 도미니치(John Dominici)
활동년도 : 1376?-1419년
신분 : 추기경
지역 :
같은 이름 :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의 어느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요한 도미니치(Joannes Dominici)는 18세 때에 산타 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 수도원에서 도미니코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교육이 부족하고 또 말을 더듬기 때문에 한 때 많은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놀라운 기억력과 항구심은 자신의 모든 약점을 극복하는 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곧 놀라운 설교가와 지도자격인 신학자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또한 그는 성서 주해서와 두 편의 논문을 작성했고 토착어로 된 찬미가를 지었다.
12년 동안의 파리 대학교에서의 공부를 마치자 자신의 모교에서 가르치는 한편, 베네치아(Venezia) 지방을 다니며 설교활동을 하다가 피에졸레(Fiesole)와 베네치아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웠다. 그러는 동시에 이탈리아의 개혁 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그가 수도원의 총장을 역임할 때에는 청소년들의 그리스도교 교육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1406년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2세(Gregorius XII)를 선출하는 회의에 참석한 이래 교황의 고해신부 겸 고문이 되었다. 1407년 산 시스토(San Sisto)의 추기경으로 임명된 그는 당대의 큰 이단들을 예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832년에 승인되었고, 이어 183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