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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 왕조 ┓♥ 스크랩 융건능 - 현륭원
윤대화 추천 0 조회 143 12.09.24 17: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융건능(隆.健陵)은..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이 잠든 곳...

 

 

 

 

 

 

융능은 사도세자..건능은 그의 아들 正祖의 묘이다. 정식 명칭은 현륭원이라 한다. 조선의 현군이었던 영조 임금(52년동안 재위)..그의 아들 사도세자...사도세자의 아들 正祖 임금....英祖는 신문고를 설치하여 백성의 고충를 들었으며, 탕평책을 펼처 당파 싸움을 없애려 노력하였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문을 진작시키고, 균역법을 실시하여 백성의 세금을 덜어 주는 등..세종이래의 현군이었다.  당시는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이 그 극을 달리고 있을 때.... 결국 사도세자도 당파 싸움에 휘말려 모함을 받고,  아버지 英祖에 의하여 뒤주에 갇혀 죽는다.

 

 

 

1762년. 6월 英祖는 사도세자의 자결을 명하나, 거부하자 뒤주에 갇아버리고, 손수 열쇄를 잠근다. 물 한모금, 밥 한숟가락 주지 않았으며, 빛이 들어오지 못 하도록 모든 틈을 막아버리고 뒤주 주위에는 풀을 산더미같이 쌓아 놓았다. 찌는 듯한 더위와 굶주림으로  사도세자는 8일만에 목숨을 다하고 죽는다. 후일 英祖도 후회하고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를 내린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는의  그의 글 "한중록"에서 사도세자는 궁녀를 죽이는 등...정신이상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아마 당파싸움의 와중에서 일부러 미친 척하였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죽은 사도세자는 양주 배봉산에 묻히게 되나, 그의 아들 正祖가 즉위하자, 지금의 화성,이 곳으로 모시며 장헌세자로 칭한다. 

 

 

 

돌아가신 부모를 보살피기 위하여 바로 곁에 용주사를 건립하고, 자주 다니기 위하여 수원 시내에 行宮을 건축...지금은 세계 유네스코가 보호하는 인류의 문화 유산 자원이 되었다.

 

 

 

 

 

              건능은 正祖의 묘...융능은 그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이다. 먼저 건능으로 가보자.

 

 

 

 

 

  

 

 소나무 숲... 보기만 하여도 그윽한 냄새나는 듯... 빛의 방향에 따라 각양각색의 그림이 연출된다.

사진은 역시 빛의 예술이다. 같은 피사체라도  빛의 각도와 양에 따라 무한한 연출이 가능하다.

 

 

 

 

 

 

 

                                            罪人之子   不爲君王

 

 

正祖에 대한 기본적인 사료(史料)로는 우선 정조실록, 정조 자신의 일기인 일성록(日省錄) 그리고

정조가 매일 반성한다는 뜻에서 자신의 언행을 기록케 한 일득록(日得錄) 등은 기본 사료이고, 규장각 일기인 내각일력(內閣日曆)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찬(官撰)사료들은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정조실록은 정조가 죽은 후, 정치적 반대파인 노론벽파(老論僻派)가 집권하면서 작성되었다는 문제가 있고, 일성록은 일부 내용이 의도적으로 삭제되었다는 하자가 있다, 물론 정치적 반대파에 의한 의도적인 왜곡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료들은 작성자의 정치적 의도를 염두에 두고 해석하여야 하며, 혜경궁홍씨의 한중록이나 정약용의 저술같은 개인 기록으로 보충할 필요가 있다.

 

 

정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도세자의 문제일 것이다. 사도세자를 죽인 쪽에서는 "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 ( 罪人之子, 不爲君王 )" 이라는 팔자흉언(八字凶言)을 조직적으로 유포시켰다. 그래서 영조는 세손(世孫...정조)을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효장세자(10살에 죽은 영조의 맏아들)의 아들로 입적시켜 "죄인의 아들"이라는 허물을 씻어 주었다.

 

 

 

그러나 正祖는 즉위 당일 " 오호라!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를 이어 받도록 명하신 것이다." (정조실록 즉위년 3월10일)이라며 스스로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벽파를 적대시하는 대신 포용하였다. 그 이유는 할아버지인 英祖의 유훈(遺訓)때문이었다. 英祖는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는 자는 王法으로 처단해야 한다고 유훈을 남겼다.

 

 

 

正祖가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면, 先王의 유훈을 어긴 것으로 반정(反政)의 명분이 될 우려가 있었으며, 또한 그들을 모두 敵으로 돌릴 경우 정국 운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정조는 노론벽파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즉위에 성공하였는데, 정조는 노론벽파를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며 제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혐의로 처벌하였다. 先王인 英祖의 유훈을 어기지 않으면서 소기의 정치적 효과를 거두는 운영의 묘를 살린 것이다.

 

 

  

그러나 부친을 죽인 원수들과 타협하는 것은 초인적인 인내가 필요하였다. 정조는 재위 24년 6월, 병석에 누웠을 때  " 두통이 많이 있을 때 등쪽에서도 열기가 많이 올라오니, 이는 다 가슴의 화기(火氣)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가슴의 화기는 부친을 죽인 원수들과 얼굴을 맞대고 정치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구선복(具善復)이다.

 

 

 

그는 英祖시절부터 軍權을 장악하고 있던 숙장(宿將)으로서, 사도세자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그를 계속 훈련대장,병조판서 등의 군 요직에 임명하다가, 재위 10년에야 다른 역모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처형한 후 이렇게 말하였다.

 

 

 

 

" 역적 구선복으로 말하면 홍인한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 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헐후(歇後)한 말에 속한다. 매번 경연(經筵)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兵權을 손수 쥐고 그 무리가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다른 사단으로 인하여 법을 적용하였다..... "

 

 

 

 

정조는 재위 13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 화성으로 옮겨 현륭원으로 삼고, 자주 능행(陵行)하였는데... 현륭원에 참배할 때며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여 옥체를 땅바닥에 던지고,눈물을 한없이 흘리면서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잡아 뜯다가 손톱이 상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 (정조실록18년1월20일)고 할 정도로 부친을 애도했다.

 

 

 

그러나 정조는 부친을 위한 최고의 복수는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이 칠순이 되는 1804년에 왕위를 純祖에게 물려주고, 上王 자격으로 화성으로 가서, 사도세자의 추숭(追崇)사업을 하려고 결심한다.

 

 

正祖 자신은 先王의 유훈을 받았으므로 사도세자의 추숭사업에 나설 수 없지만, 아들 純祖가 할아버지인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하는 것은 英祖의 유훈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논리이었다. 또한 정조는 " 지금 신하들이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안 하는 것도 義理이고, 훗날 신하들이 추숭사업을 하는 것도 義理 "라고 말하는데, 이는 사도세자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추숭을 반대하는 세력의 입장도 배려하는 것으로..바로 이 부분이 정조와 집권 노론이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正祖는 이러한 타협을 통하여 조성된 왕권으로 미래를 지향하는데 이 점이 바로 정조의 眞面目이라고 할 수 있다.

 

 

 

 

 

          수라간...원래 몽골어로, 음식을 차리는 부엌으로 좌측에 1칸짜리 방으로 되어있다.

 

 

 

 

 

 

 

 

 

 

 

        홍살문...신성한 공간임을 알리는 붉은 칠한 문...홍살문을 지나 임금은 가마에서 내린다.

 

 

 

 

 

 

          정자각(丁字閣)으로 각종 제사를 지내는 곳...정(丁)자 형태이므로 정자각이라 한다.

 

 

 

 

 

   

 

 

 

 

 

 

                                            규장각(奎章閣) 1

 

 

 

 

규장원(奎章院) 또는 내각(內閣)이라고도 한다.정조가 즉위한 직후인 1776년 3월11일 설치되었다. 대궐 안인 창경궁 금원(禁苑)에 설치하여 역대 국왕의 시문, 서화,고명(顧命), 왕세보(王世譜),보감(寶鑑) 등을 보관,관리하였다. 규장각은 송(宋)의 용도각(龍圖閣), 천장각(天章閣)을 모방한 것으로서, 1463년(세조 9)에 양성지(梁誠之)의 건의가 있었으나 설치되지는 못하였다. 1694년(숙종 20)에 어제(御製),어필(御筆)을 보관하는 소각(小閣)을 설치하여 규장각이라 불렀고, 숙종의 친필로 편액(扁額)을 내걸었으나 곧 페지되었다.

 

 

정조가 즉위와 동시에 규장각을 설치한 것은 세자인 동궁(東宮)시절부터 계획하여 왔던 것으로 ,단순한 어제봉안(御製奉安)이나 국립도서관으로서의 기능외에 큰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규장각은 설치 초기에는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政敵)을 제거할 친위세력의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홍국영(洪國英...최초의 세도정치가)의 도움으로 척신(戚臣)세력을 제거하고, 또 다른 척신으로 군세유지를 기도한 홍국영마저 제거한 이후,1781년 규장각의 새로운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후 정조의 개혁정치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연구와 이를 위한 도서의 수집 ㄱ리고 개혁에 동조하는 정치세력의 결집과 재교육 등 활동을 본격화하였다.

 

 

따라서 규장각 소속의 각신(閣臣)은 광범한 기능을 갖고 있었다, 각신은 승지와 같이 왕과 밀접한 시신(侍臣)으로서의 기능과 언관(言官), 사관(史官), 시관(試官), 경연관(經筵官) 기능 및 王의 교서 및 유서(諭書)를 대찬(代撰)하는 기능 등을 가졌다. 어제(御製)를 보관하는 기구로서의 규장각은 전각(殿閣)제도로서 그 자체가 왕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어서 강력한 왕권을 지향하는 정조의 정치적 지향이 내포된 것이었다.

 

 

 

 

 

 

 

 

 

                                          규장각(奎章閣) 2

 

 

 

 

규장각은 장용영(壯勇營)과 함께 정조의 친위세력의 형성을 위하여 설치되었기 때문에 正祖가 죽은 후에는 장용영의 해체와 더불어 그 기능이 현저히 약화되어, 단순히 역대 왕들의 어제(御製)와 도서를 보관,관리하는 기능에 국한되었고, 각신(閣臣)은 특별한 권한이 모두 철회되어 명예직에 지나지 않았다.

 

 

1864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어제,어필 등이 宗親府로 이관되면서, 규장각은 도서관리 기능만 남게 되었다.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규장각의 지위는 다시 크게 격상되어, 1907년 비서기능이 규장각으로 단일화되었고, 대제학(大提學)이란 직책이 생긴다. 1992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분리되어 독립기관으로 되며, 현재 도서 15만점, 고문서 7만점,목판 2만점 등 합계 약 25만점이 전해지고 있다.

 

 

 

 

 

 

 

 

 

                                          사도세자     思悼世子

 

 

 

 

사도세자는 영조(英祖)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영조 25년, 큰 아들인 효장세자가 죽은지 7년 만에  외아들로 사도세자가 태어난 것이다. 英祖는 늦둥이인 世子를 총애하며, 왕자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극찬하며 사랑하였다.  하지만 노론 세력에 의하여 왕위에 오른 영조의 한계 그리고 노,소론이 대립할 때마다 왕 노릇을 그만 두겠다고 소동을 벌이는 영조 앞에서 세자는 영문도 모르고 석고대죄할 수 밖에 없었다.  어린 세자는 대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용되기만 하였다.

 

 

세자는 점차 아버지인 영조와 숙부인 경종의 관계를 알게 되고, 이야기로만 떠 돌던 ...자신의 아버지가  숙부인 경종을 독살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고...그렇게 만든 老論을 증오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노론세력들은 세자가 王이 되면 자신들의 기득권이 많이 훼손될 것을 우려, 세자를 모함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노론의 행태,모함과 아버지 영조가 무서워진 세자는 궁궐 안에서 칼을 휘두르거나 함부로 宮女를 죽이는가 하면,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평양을 다녀 오는 등, 정신질환과 같은 비정상적인 행보를 계속하게 된다.

 

 

드디어 1762년 노론은 노비(奴卑)인 나경언을 사주하여 세자의 비행(非行) 10조목을 英祖에게 올리도록 하였다.  이 일로 나경언은 참형을 당하고, 英祖는 세자를 불러 조목조목 다그치며, 자결할 것을 명령하지만, 세자가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서인(西人)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8일만에 굶어 죽게 하였다. 1762년으로 세자의 나이 28세 이었다.

 

 

세자로서, 왕으로서의 기량과 도량이 이미 현재 왕인 영조를 뛰어 넘어 백성으로부터 사랑가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며, 노론을 견제하고, 소론과 남인을 신임하던 사도세자....그에게는 후일 정조대왕이 되는 아들 이산(李山)을 두었었다.경종이 일찍 죽어 세자가 없었을 때, 영조는 오로지 유일한 왕손이었다는 사실임을 고려할 때, 만약 사도세자에게도 후손이 없었다면 (정조)....아마 목숨은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

 

 

 

이후 노론은 다시 세자의 아들인 이산(李山)을 죽이려 모함하지만, 이번에는 할아버지인 英祖가 오히려 李山을 보호하여, 22대 왕으로 오를 수 있게 하였다... 정조대왕이다.

 

 

 

정조는 이후 노론을 견제하며, 先王의 비극을 교훈삼아 탄평책을 펼치게 되지만, 正祖의 아들 순조(純祖)의 왕비로 老論쪽 딸로 결정한다. 이는 노론을 자신이 견제할 수 있다는 정조의 자신감이었지만, 이는 정조의 최대 실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노론 세력은 다시 득세하며 권력을 독점하고, 조선 왕조는 멸망의 길로 가까워 진다.

 

 

 

 

 

  

 

 

 

 

  

 

 

 

 

 

 

 

 바깥쪽을 향하여 앉아있는 동물들...석양(石羊)이라 한다. 양(羊)은 악귀를, 호랑이는 맹수를 내?는 역할이라  바깥쪽을 향하고 있다.

 

 

 

 

 

 

                                     

 

 

 

                                        이제 사도세자의 묘인 융능으로 간다.

 

 

 

               소나무 숲을 지나  융능이 보인다.  건능과 똑 같은 구조이다. 언덕이 좀 낮다.

 

 

 

 

 

 

 

 

 

 

 아버지인 영조는 사도세자(思悼世子)로... 그 손자인 정조는  장헌세자(莊獻世子)로  ....

묘비에는 사도 장헌세자 (思悼 莊獻世子)로 기록 되어있다. 사도세자의 도(悼)는 서러워 할 도자이다.  英祖도 그 아들을 뒤주에서 죽게 한 부정(父情)을 후회하며  그렇게 이름 지은 것 같다.

 

 

 

 

 

 

 

 

 

 

 

 

 

 

 

 

 

 

 

 

 

 

 

 

 

 

 

                                                     중록     恨中錄

 

 

 

한중만록(閑中漫錄)으로 부르기도 한다.한중록은 正祖의 生母이며, 사도세자의 부인이었던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자전적 회고록이다. 6권6책으로 구성된 한중록은 혜경궁이 회갑을 맞던 해인 정조19년(1795)에 친정 조카 홍수영(洪守榮)의 건의로 시작되었으며, 그 후 67세,68세,71세 등 네번에 걸쳐 완성되었다. 그 주된 내용은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후의 생활과 당쟁 등의 권력투쟁을 그린 것인데, 특히 남편 사도세자가 시아버지 英祖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참변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순수한 한글로 집필되어 문학적인 의의가 크다.  그러나 역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거의 위서(僞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중록에는 당시의 정치상황과 궁중생활, 여성의 위치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사료적 가치도 적지 않은데,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내용이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거리가 먼 정도가 아니라 자신과 친족들은 인격이 훌륭하고 청렴하며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것으로 그리면서도...다른 쪽에 있는 인물들은 자신들과 완전 반대의 모습으로 왜곡하여 그려 놓았다.

 

 

 

남편인 사도세자를 중증의 정신질환자로 묘사하며 죽어 마땅하다고 비판하며......시아버지 英祖 역시 정상적이지 못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고, 시어머니인 영빈이씨도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표독스러운 여성으로 ...심지어는 아들이 正祖까지도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만다.  한중록은 역사의 관점에서 평가할 때 진실은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은 위서(僞書)에 가깝다고 한다.

 

 

 

혜경궁은 스스로 한중록에 대하여 사료적 신빙성을 부여하고 있지 않는다.  혜경궁은 " 또한 집에서는 내가 보낸 편지를 모두 세초(洗草...종이를 물에 씻어 글자를 지우느 것)하여, 내 필적을 남길만한 것이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60살이 넘은 나이에 한중록을 쓰면서 4~50년전의 일을 전부 기억에만 의존하고 있슴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한중록은 결론적으로 노론(老論)에 소속된 여성의 당파적인 시각에서 시작하여, 그것으로 끝났다고 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혜경궁홍씨의 가문

 

 

 

 

세자빈으로 간택될 정도이면 풍산홍씨는 명문이었다. 적어도 할아버지代까지는...판서를 지냈으므로. 그러나 아버지인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은 서른이 넘을 때까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집안이 쇠락하게 되는데, 오히려 그 점이 세자빈을 배출하게 되는요인으로 작용한다.

 

 

영조가 비록 탕평책(蕩平策)을 추구하여 골고루 인재를 등용한다 하였지만, 영조의 정치적 기ㅈ반은 어디까지나 노론(老論)이었기 때문에 세자빈도 당연히 노론쪽에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세력이 강한 집안은 소론(少論)의 경계를 야기시킬 우려가 있었다. 현재 세력이 미약하면서도 뼈대가 있는 가문이어야 한다는 기준에 맞추다보니 홍봉한이 적격이었을 뿐이었다.

 

 

한중록에 나타나는 홍봉한은 성균관의 학생회장인 장의(掌議)를 역임하였으며,明宗과 宣조시대의 명신(名臣)인 윤두수(尹斗壽. 1533~1601)를 방불케 할 정도로 학식이 대단하였다고 묘사된다. 게다가 청렴하기 짝이 없어 관직이 높아질수록 주변을 경계하고 깨끗하게 처신하였다고 "한중록"의 내용대로라면 인격과 학식의 모든 면에서 완성된 인물이 아닐 수 없다.이러함에도 실록의 기록은 정반대이다,

 

 

 

 

 

 

 

 

 

 

 

                                    홍봉한(洪鳳漢)..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정조실록 2년(1778) 12월 4일, 실록의 기록이다. 홍봉한이 죽었다. 홍봉한은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의 현손이다. 영조20년(1744)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변변치 못한 재능으로 왕실의 인척인 것이 참작되어 특별히 英祖의 위임을 받아 급제한 다음 오영(五營)과 육관(六官)의 장관을 지냈다.

 

 

영조37년(1761)에 재상에 올라 지위가 극히 높아졌는데, 그릇이 작은 자가 갑자기 귀하게 되었으므로 모질고 강퍅한 성질을 멋대로 부렸다. 10년동안 정권을 잡고 있으면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였으며, 어진 자들을 미워하여 은밀히 중상모략을  당한 사람이 많았다.

 

 

아들 셋과 아우 둘이 모두 조정에 나서 권력을 농락하여 마구 휘둘렀는데, 권세의 기염이 대단하여 감히 따지는 사람이 없었다.  임오년의 화변(禍變...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참변)이 있었을 때 뭇 신하들은 간담이 무너져 내려 어찌 할 줄을 몰랐는데, 홍봉한이 앞장서서 아뢰기를...臣은 오로지 성궁(聖躬...영조를 말함)만 알 뿐 입니다...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다시 정승이 되어 거리낌없이 방자한 짓을 마구 하였다.

 

 

영조4년(1771)에 큰 잘못을 저질러 파면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으나, 용서하고 억지로 다시 관직에 나서게 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였다."재상까지 역임하고,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의 평가가 이렇게 나쁠수도 없다. 사관이 더 이상 나쁠 수 없을 정도로 혹평을 하였으며, 부정부패의 혐의로 여러 차례나 탄핵을 당하였고, 사돈인 영조가 파직을 명할 정도였다면 홍봉한의 인물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또한  영조실록 11년 (1735) 11월3일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성균관 유생(儒生)들의 식점(食點)이 너무 적다고 하여, 임금이 유시를 내려 그들을 책망하였다. 반점(半點)인 자는 2년동안 정거(停擧...과거 응시자격의 박탈)하게 되어 있는데, 이규보(李圭報)와 홍봉한은 그 이름이 반점(半點)에 있었으므로 특별히 5년 동안 정거하게 하였다. "

 

 

 

 

성균관의 유생들은 출석여부를 식당에 비치된 장부에 동그랗게 원을 그려 기입하였으며, 그 것을 식점(食點)이라고 하였다. 하루에 아침과 저녁 두끼를 표시해야 1점이 주어졌으며, 최소한 50점을 넘겨야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는데, 반점(半點) 그러니까 성균관에서 하루에 딱 한끼만 먹은 자는 2년 동안 응시자격을 박탈하는 제재가 있었다.

 

 

홍봉한은 5년이나 과거 응시자격이 박탈되었을 정도로 학문에 게을렀던 것이다. 그런 사람이 성균관의 학생회장인 장의(章議)를 역임할 수 있었겠는가?  아마도 판서를 역임한 부친의 후광으로 성균관에도 뒷구멍으로 입학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음서(蔭敍..높은 벼슬을 역임한 사람의 자제를 특별히 등용하는 것)를 이용하여 벼슬을 한 적도 있었다. 게다가 음서(蔭敍)를 통하여 얻은 벼슬이 경종의 능인 의릉(懿陵)을 관리하는 참봉(參奉)이었는데, 참봉은 종9품의 가장 말단이어서 벼슬이랄 것도 없었다.

 

 

 

이러한 홍봉한이 과거에 급제한 것은 딸인 혜경궁 홍씨가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후이었으니, 누가 보아도 사돈인 영조가 특혜를 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아비인 홍봉한을 윤두수(尹斗壽)에 버금가는 학식과 인격과 도덕성을 갖춘 보기 드문 인물로 우러러 그렸으니 "한중록"은 그 출발부터 썩은 악취를 풍긴다.한중록은 기억에 의지하여 집필한 수준 높은 문학작품이 아니라, 말도 안되는 언어도단과 왜곡으로 일관한 위서(僞書)에 다름아니다.

 

 

 

 

 

 

 

 

 

 

 

 곤신지(坤申池)이다. 융능을 만들고, 이듬해 1790년 조성하였다. 묘지에서 풍수지리상, 좋은 방향(坤申方. 남서방향)에  연못을 판다.  묘지로 부터 첫번째 물이다.

 

 

 

 

 

 

 

 

 

 

 

 

                          정말 좋은, 멋있는 산책길이다. 나무 내음.... 역사도 잊게 한다.

 

 

 

 

 

 

                                            융건능 입구에 서 있는 고목(古木).

 

 

 

 

 

 

 

                                  융건능 제실(祭室)....제사 준비 하는 곳 

 

 

 

 

 

                    지지대 (遲遲臺)..... 수원과 의왕의 경계에 있다.  작은고개이다 

 

 

 

 

 

正祖大王이 융건능에 행차할 때마다 지나가는 길목이다.  이 고개에 오르면 융건능이 보이는데도

" 왜 이렇게 더딘가? " 하고 한탄을 했고, 참배를 마치고 환궁할 때에는 고개 마루턱에 어가를 멈추게 하고 오랫동안 묘역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 어가에 올라서도 융건능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을 돌리지 않아 행차가 자꾸 늦어져 이 고개를 " 느리게 느리게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의 지지대고개라 부른다.  

 

 

 

 

 

 

 

 

 

 

                                                  근처에 휴게소이다.

 

 

 

 

                                              지지대 비각 (遲遲臺 碑閣) 

 

 

 

 

 

 

 

 

 

 

                  성혼불진모       晟昏不盡慕        정성을 다하지 못한 어버이 사모하여

               차일우화성        此日又華城        오늘 또 화성을 찾아와 보니

               영목침원우        靈穆寢園雨        원침에는 가랑비 부슬부슬 내리고

               배회재전정        徘徊齋殿情        재전에서 배회하는 그리운 마음 깊구나

               약위삼야숙        若爲三夜宿        사흘밤 견디기는 어려웠으나

               유유칠분성        猶有七分成        그래도 초상화 한폭은 이루었다네

               교수지지로        矯首遲遲路        지지대 돌아 오는 길에 머리 들어

               오운망이생        梧雲望裏生        벽오동 같은 구름보니 속 마음 일어나누나.

 

 

 

 

 

1796년 원행을 마친 정조가 환궁하면서 지지대에 다다랐을 때, 현륭원쪽을 돌아보며 지은 5언시이다. 1792년 정조의 초상화를 현륭원 재실에 걸어둔 뜻을 밝혔으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대소인원개하마 (大小人員皆下馬)....어른이건 어린이이건 모두 말에서 내려라...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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