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를 가슴에 묻고 세상 아이를 가슴에 품었다"
■2009년 12월22일 경기도 임진각
150명 보육원 아이들 속에서 남혁이의 미소가 유난히 빛났다. 자장면을 맛있게 먹은 뒤 바이킹, 회전목마를 열심히 탔다. 소원 적은 쪽지를 풍선에 넣어 파란 하늘로 날려 보냈다. 병색(病色)이 사라지고 뺨이 점점 붉어졌다.
일곱살 남혁이는 올 2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전주 예수병원, 전북대병원에 갔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서울아산병원에서야 소년을 괴롭힌 게 백혈병(白血病)이라는 걸 알게 됐다. 엄마는 털썩 주저앉을 뻔 했다.
22일 사단법인 '생명을 나누는 사람들'이 경기도 임진각에서 주최한 산타 열차 발대식 행사, 남혁이의 올해 첫 나들이였다. 아이는 즐거웠고 엄마는 안절부절못했다. 면역력 약한 백혈병 아이에게 제일 무서운 게 감기다.
전셋집은 병원비로 날아갔다. 감리교 측에서 마련한 쉼터가 없었다면 모자(母子)는 병에 앞서 추위와 가난에 먼저 쓰러졌을 것이다. 아버지 없이 아이를 키우는 김경미(36)는 모처럼 뛰는 아이 몰래 자꾸만 눈물을 훔쳤다.
아이들 사이에서 김명국(金明國·46)은 '배우'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쉴 새 없이 웃기고 떠들었다. 그는 1년에 1~2번 이 행사에 참가한다. 매달 마지막 일요일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조혈모세포 기증 홍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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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22일 보육원 아이들과 김명국이 임진각에 있는 바이킹에 올랐다. 그 모습을 잡기 위해 사진기자도 흔들리는 바이킹에 몸을 맡겼다. 기계가 움직이자 그들의 미소가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모든 아픔과 어려움을 이겨낼 만큼. ☞ 동영상 chosun.com /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다. 영길이가 엄마 손을 잡더니 눈을 맞췄다. 얼마 뒤 아이는 스르르 손을 뺐다. 눈길을 천장으로 돌렸다. 박귀자는 중환자실로 아이를 옮겼다. 허공을 걷는 것 같았다. 발이 푹푹 빠지는 느낌이었다.
'점프(Jump)!' 의사의 말이 떨어졌다. 전기충격기가 풀어 헤친 아이 가슴에 닿았다. 그때마다 아이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이미 빠져나간 아이의 넋을 되돌려보려는 시도는 두시간 동안 계속됐다. 허망한 작별의식이었다.
문득 정신 차린 엄마가 말했다. "우리 아들 아프니까…이제 그만하세요." 8년17일간 지상에 머물다 간 아이를 보는 엄마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아이는 하늘로 가며 그 모습을 되돌아봤을 것이다.
김주호, 나중에 영길로 이름을 바꾼 김명국·박귀자의 외아들이다. 1993년 10월 결혼한 그들은 1년 뒤 딸 소슬이를 낳았고 1997년 영길이를 낳았다. 유달리 연극을 좋아했던 아이는 2000년 8월부터 투병(鬪病)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5년이 이 가족에겐 악몽의 연속이었다. 항암(抗癌)치료는 점점 강도가 높아져 갔다. 그때마다 아이 얼굴에서 웃음이 줄어들었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기억 속에 엄마는 아이의 마지막 나들이 옷을 챙기고 있었다.
■같은 시각 전북 부안
그때 김명국은 TV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촬영하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보는 송희립이 그가 맡은 역할이었다. 촬영 끝날 무렵 그는 한쪽 벽을 보고 웃었다. 이순신 장군 칼 소품(小品)이었다.
아들은 "이순신 장군 칼을 만져보고 싶다"고 했다. 칼을 얻은 김명국은 대단한 선물이라도 준비한 양 뿌듯했다. 그때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새로운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부모 도장을 찍어야 한대, 빨리 서울로 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전화를 끊은 그는 병원 간호사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는 김명국의 전화를 받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 그로부터 4시간 동안 그가 기억하는 것은 자동차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는 사실 뿐이었다.
침대에서 아버지를 보낸 아이였다. 그 아이가 냉동고(冷凍庫)에서 아빠를 맞았다. 청바지, 초록빛에 바다색 섞인 남방, 하얀 양말, 운동화, 모자. 아이가 좋아하는 옷이었다. 마치 가족과 함께 봄 소풍이라도 떠나는 듯한 차림이었다.
며칠 뒤 아버지는 아들과 작별했다. 인천연안부두 앞 바다 장례식장 11번 부표(浮標)였다. 한 줌 재로 변한 아들을 허공에 뿌렸다. 아버지는 빌고 또 빌었다. '태평양과 대서양, 인도양 즐겁게 여행하고 나중에 다시 만나자….'
서울 배문고 시절 김명국은 그룹사운드를 결성했다. 대학가요제 참가가 꿈이었다. 입시준비로 고3 때 그룹을 해체했다. 그 멤버들이 서울예전에 다시 모였다. 5인조 '열두냥서푼'은 1983년 그리던 무대에서 은상(銀賞)을 탔다.
그는 드럼을 두드릴 줄만 알았다. 연극이라곤 입시 때 읽어본 '연극개론'이 고작이었다. 대학가요제가 끝나자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노래를 계속할 것인가, 전공을 살려 연극을 할 것인가. 그의 선택은 후자(後者)였다.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탈 정도인데 왜 음악을 그만 뒀습니까.
"그걸로는 먹고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잘해야 나이트클럽 밴드, 아니면 악단(樂團)에서 드럼을 치고 있었겠지요. 2학년 때 정신 차리고 연극에 몰두했습니다. 소질이 있었는지 졸업 작품에서 주연을 맡게 됐습니다."
―동료들의 시샘이 대단했을 텐데, 어떤 작품이었나요.
"'우리 읍내(邑內)'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주인공 이름이 조오지였어요. 한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작품인데 다음 세상에서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여운을 주는 내용이었습니다. 동료들이 반발했지요. 하지만 당시 유덕형 학장님으로부터 '100명 중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연극배우'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어요."
―졸업 후 곧바로 대학로로 진출했나요.
"학점이 모자라 졸업을 못하고 입대했지요. 제대해서 학점 채우고 대학로 극단에 들어갔어요. '로뎀'이라는 극단 소속이었습니다. 로뎀에 소속됐지만 이곳저곳에 프리로 출연했습니다."
―거기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지요.
"당시 아내는 극단 '성좌' 소속이었어요. '샐러리맨의 죽음'에서 배역을 맡았는데 항상 연습실에 가보면 아내가 제일 먼저 나와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어요. 나중에 물어보니 아내도 일찍 출근하는 절 보며 똑같은 생각을 했대요."
―1993년 10월 결혼했지요.
"연극을 마치면 '쫑파티'라는 걸 합니다. 보통 삼겹살로 1차를 하고 이태원 나이트클럽에 갑니다. 그런 모임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제가 나이트클럽에 가면 선후배 여자 연기자들과 돌아가며 블루스를 췄어요. 한 번은 이상하게 아내만 착 안겨오더군요. 대시한 거지요. 그날 집에 바래다주며 뽀뽀해버렸습니다, 하하."
―두 사람 다 연극배우면 참 살기가 힘들 텐데.
"연극배우 생활이 가난합니다. 보통 두 달 연습하고 한 달 공연합니다. 처음엔 20만~25만원을 받았어요. 동사무소에 연봉(年俸)을 신고하러 갔는데 100만원이라고 하니 직원이 묻더군요. '월급이 아니고 연봉이라고요?' 장모님이 처음엔 결혼에 반대했어요. 지금은 지갑에 제 사진을 넣고 다니시지만. 아르바이트를 할 수밖에 없었지요."
―1990년대 중반부터 방송과 영화에 출연했지요.
"처음 맡은 TV출연작이 드라마 '모래시계(1995년)'에서 고현정을 취조하는 형사역할이었습니다. 한 회만 출연하기로 했었어요. 촬영 후 짐 챙겨 나오는데 감독이 부른다더군요. 더 출연하라고. 당시 회당 출연료가 31만원인데, 연극에 비하면 엄청나게 좋은 보수였습니다. 1~2시간만 하면 되니까요."
―영화는?
"'약속(1998년)'에서 주인공 박신양의 상대역인 폭력조직 남정택파 회장 역을 했어요. '주유소 습격사건(1999년)'에선 마티즈 몰고 주유소로 들어와 1만원어치 주유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 대사가 거의 애드립이었습니다."
―그 즈음 영길이가 태어났지요.
"신혼살림을 아리랑고개에서 차렸습니다. 정릉으로 이사왔을 때 아내는 빈 병 모아 팔아 반찬거리 사오고 시장에서 버린 배추 잎사귀를 주워왔어요. 그걸로 시래기국 끓여먹고 김치 담가먹었습니다. 아내는 입버릇처럼 '설렁탕 한그릇 먹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어요.
―별의별 일을 다했다고 들었습니다.
"영길이 임신했을 때 상계동 한 아파트에서 속칭 '노가다'로 1년을 일했습니다. 전 한번 일하면 몸을 내던집니다.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노가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작업반장이 옷 갈아입고 퇴근하면서 '어이, 김씨도 퇴근하지'라며 흡족해하더군요. 그렇게 하니 일당 6만원에서 점점 올라가더군요. 청계천 7~8가에서 쓰레기 청소도 했어요. 냄새도 못 참겠지만 더 심한 게 개, 고양이 시쳅니다. 갈퀴에 긁히면 내장이 쏟아지고…. 연탄배달, 책 외판원도 해봤고요."
―그러다 2000년 맥도날드 CF로 '맥도날드 아저씨'란 별명을 얻은 거군요.
"그 회사는 알려진 모델을 안 씁니다. 3명이 최종 후보로 올랐는데 제가 뽑혔어요. 미국 본사에서 'CF 내용이 아주 파워풀하다'는 평가를 받았지요. 당시 모델료가 회당 180만원이던 시절입니다. 영길이 태어나고 좋은 일이 많아 저흰 '복덩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다 아이가 백혈병에…, 대학 졸업작품 내용이 마치 앞날을 예고한 징후 같은 느낌이 듭니다.
"(…) 그때야 알 리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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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명국은 아들을 잃은 후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아픔을 가진 이들에게 삶의 의욕을 주는 것이다. 산타복장을 한 그는 점심시간에도 아이들의 식사를 돕느라 분주했다. ☞ 동영상 chosun.com /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처음 약속한 인터뷰 장소는 목동 CBS 건물이었다. 그런데 확인차 전화하니 도봉구 창동 순복음 한성교회 바로 옆 음식점에서 만나자고 했다. 겨울 잔광(殘光)이 유리창을 물들이고 중랑천 바람이 그 빛을 흐트리던 날 그가 말했다.
"원래 말술이었습니다. 지금은 끊었어요. 신앙생활도 아들 때문에 하게 됐고요. 투병하던 말기 아이가 느닷없이 성경(聖經)을 읽어달라고 하더군요. 엑스레이 찍을 때면 병원 내 교회를 지나야 하는데 자주 기웃거리기도 하고."
―혹시 바로 옆의 교회가?
"모처럼 나들이 나왔을 때 영길이가 이곳을 지목하며 '여기 다니고 싶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지금 제가 사는 아파트 바로 옆입니다."
―왜 하필 봄나들이 옷을.
"아이가 그 옷하고 가죽 자켓을 제일 좋아했어요. 화장(火葬)하는데 가죽 옷은 좋지 않다고 하더군요. 잘 타지 않는다고. 안 타면 아이에게 안 좋다고. 인천에 바다 장례식장이라고 있는데 거기선 매일 뜨고 내리는 비행기가 잘 보입니다. 아이가 여행을 좋아했는데 그 모습이라도 보라고."
―백혈병과의 싸움이 힘들지요.
"돈이 많이 들어요. 여러분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빚을 많이 졌습니다. 열심히 갚았는데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요. 2억 정도."
―그렇게나?
"제대혈 이식을 두달 코스로 하는데 8400만원 정도 듭니다. 그 치료를 받고 나면 온몸에 물집이 생겨요. 쓰라려서 옷을 입을 수도 없습니다. 일양약품에서 나오는 메디폼이라는 것으로 감싸줘야 해요. 한장에 7만~8만원인데 몸 전체를 감으려면 30만원쯤 들지요. 제가 아들에게 그랬어요. '넌 매일 30만원짜리 맞춤복 입는다'고."
―호주도 보내고 미국도 보냈지요.
"백혈병 아이에겐 추위가 제일 큰 적(敵)이거든요. 미국에 보낸 건 이건희(李健熙) 삼성그룹 회장께서 미국 스탠퍼드대학에 가 암 치료를 받는다는 뉴스를 본 직후였어요. 아픈 아이를 둔 부모는 뭐든지 해주고 싶어집니다. 아내와 아이만 보냈지요."
―차도가 있었습니까.
"그 병원에서 '10억원을 현금으로 예치하면 당장 오늘부터라도 항암치료를 시작하겠다'고 했다더군요. (…) 결국 피검사만 받고 1주일 만에 귀국했지요."
―부부가 이곳저곳으로 민들레 잎을 주우러 다녔다는 이야긴.
"민들레 잎에 해독(解毒) 성분이 있다는 소릴 들었습니다. 꽃 피기 전 잎이어야 하는데 야외에만 가면 주워왔지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마라톤까지 두번이나 뛰었지요.
"한 번은 일산에서 42.195㎞를 뛰었습니다. 골인하면서 스튜디오에 있는 아이와 포옹하는 설정이었습니다. 그 후 1주일 동안 계단을 내려가지 못했어요. 중국 고비사막에서 6박7일 동안 매일같이 50㎞ 넘게 달려 거의 400㎞를 뛰었을 겁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신발 밑창 떨어지는 것처럼 발바닥이 떨어지지요. 아이 생각하고 달렸습니다. 제겐 피니시(finish)라인이 있지만 영길이에겐 없잖아요."
―그렇게 해서 성금이 많이 모였나요.
"첫 마라톤은 골수기증을 널리 알리고 영길이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한거고…, 두 번째는 PD가 'ARS후원을 해주겠다'고 해 참가한 건데 약속을 지키지 않더군요."
―그럴 수도 있습니까.
"윗사람에게 얘길해야 하는데 총대 메기 싫었던 모양입니다. 주변 분들이 오히려 많이 도와줬어요. 한 드라마작가가 개인적으로 1000만원을 주기도 했고요. 약 선전하려 전화한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부모 입장에선 매달릴 수밖에 없지요. 아이만 살릴 수 있다면 광화문 한복판에서 벗고 춤추라고 해도 출 수 있는 게 부몹니다. 한약방도 가보고 보살도 찾아가보고, 점쟁이도 찾아가보고 용하다는 곳엔 다 가봤으니까요."
―그러면서도 TV나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뛰어다녀야 했겠습니다.
"남들은 프로필 멋지게 만들어 돌리는데 전 연극 프로그램에 나온 필름을 얻어 동네 사진관에서 몇백장을 뽑았어요. 프로그램을 복사한 뒤 파일을 10권쯤 만들어 방송국마다 돌아다녔지요. 한 PD가 낮술을 하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기에 흡연실에 가니 대뜸 '당신 무술연기자요?'라고 하더군요.
―중간중간 차도가 있었다던데.
"항암치료가 끝나면 환자들은 일시적으로 얼굴이 좋아져요. 얼마 전 사망한 장진영이도 회복된 것처럼 보인 게 항암치료를 중단했기 때문입니다. 영길이도 항암치료 끝난 뒤 학교(자운초등학교)에 그렇게 다니고 싶다고 해 두건 쓰고 마스크 쓰고 제 엄마한테 업혀 다녔지만 한달 정도밖에 가지 못했어요."
■부부
대화가 3시간을 넘기고 있다. 저녁 식사시간이 되자 바로 옆 식탁에 아주머니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서는 웃고 떠드는데 방안에서는 '잔인한' 질문이 이어졌다. 기자와 김명국은 서로 눈을 보지 않았다.
그에게 '다시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해보진 않았느냐'고 물었다. 김명국이 말했다.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아내가 그러더군요. 영길이랑 똑같이 생긴 아이가 나오면 낳겠는데 다른 아이가 생기면 영길이를 잊지 않겠느냐고."
―아이가 아프면 부부간 다툼도 많아지지요.
"많아지죠. 서로 얼굴을 보기도 싫어지고. 남자는 그래도 나아요. 일을 구실로 밖에 나가 집중하다 보면 잠시라도 잊을 수 있잖아요. 쉬운 건 남편밖에 없어요."
―딸도 힘들었겠습니다.
"5년을 거의 방치했지요. 전 돈 벌러 다니고 아내는 병원에서 아이 돌보고, 소슬이 혼자 빨래하고 라면 끓여 먹고 자고…. 미안하지요. 그래도 밝게 자라 다행입니다. 동생 생각이 났는지 중2 때부터 방학 때마다 서울대 늘푸른 학교라고, 소아암 환우(患友)들 다니는 학교에서 자원봉사도 하고 올여름에는 인도 뭄바이에 있는 청각장애아학교에서 봉사도 하고 왔어요."
―영길이도 때론 짜증을 냈겠지요.
"항암치료를 받다보면 입이 짧아져요. 뭘 먹고 싶다고 해 사가면 한 두 숟갈 뜨다 말지요. 그것보다 제일 힘든 게 다시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얘길 할 땝니다."
―지금도 아이의 흔적이 집에?
"3년 전에 집을 옮겼습니다. 방 한칸에 영길이 장난감을 쌓아두었어요. 기도실을 겸해서. 없애야 하는데 자꾸 미련이 생겼어요. 그때 모잠비크에서 한 소년이 축구를 배우러 왔는데 제 집에 묵게 했습니다. 그 아이 가는 길에 영길이 장난감을 큰 박스로 두개 싸서 보냈지요.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가지고 놀면 영길이도 좋아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도 연기를 합니까.
"제가 연극 리허설 할 때면 온 식구가 와요. 영길이가 절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어요. 동네 수퍼 아저씨들에겐 '혹시 김명국 아세요?'하고 모른다고 하면 소개해주기도 하고. 전 다른 인생을 사는 게 좋습니다."
―지금 삶이 괴롭기 때문인가요.
"얼마 전 끝난 드라마 '아가씨를 부탁해'가 끝난 후 모임에서 감독이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김명국 아닌 다른 인물로 살면 홀가분해지잖아요. 제겐 아이, 가정, 사회적 지위, 가장(家長)이라는 책임감이 있으니까요."
―돈 없는 게 한(恨)이 됩니까.
"제가 이런 일을 겪으면서 이건 도저히 개인으로선 감당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부분이.
"일례로 백혈병 환자는 골수이식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기증자가 선진국보다 적어 적합한 것을 찾아내기 힘들어요. 영길이도 결국 골수이식을 받진 못하고 조혈모세포 이식만 받았어요. 그때부터 군부대를 찾아다니며 골수기증 서약을 받고 있습니다."
―군(軍)과는 무슨 인연이 있기에.
"제가 수도방위사령부에 근무했습니다. 그때 상관 중에 별 단 분도 있고 해서, 전방부대 찾아다니며 사정을 설명하면 도와주지요. 매달 한 번씩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백혈병 홍보를 하는 것도, 산타 열차에 참가하는 것도, 지금 CBS에서 '수호천사 사랑의 달란트를 나눕시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도 다 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겁니다. 많을 땐 한달에 경유(輕油)값이 150만원이나 들 때가 있지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으면 사회가 힘을 모아야지요."
―아이가 아플 때부터 골수이식 캠페인을 벌였지요.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상태였는데 '너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많이 아픈 아이들을 위한 거니 웃어라'라고 제가 그랬습니다. 아이가 웃더군요."
―저 같으면 김명국씨처럼 못할 것 같은데.
"경제적으로 어려울 땐 참, 은행강도를 할 수도 없고. 그렇지만 짜증보다는 사랑을 알려야 하잖아요. 환아(患兒) 엄마들이 얼마나 괴롭겠어요. 저희도 그렇게 겪었는데. 그분들에게 삶의 의욕을 줘야 한다는 걸 영길이가 제게 주고 간 것 같아요. 가식이고 허위일지라도 그분들을 웃게 해줘야 마음의 병이 들지 않겠지요."
4시간 가까운 대화를 끝내고 기자는 김명국과 임진각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다음날 30분쯤 먼저 도착해 언덕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빨간 산타할아버지 차림을 한 그가 마이크를 들고 아이들을 인솔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말하자 아이들은 깔깔댔다. "아저씨가 말이야, 어떤 드라마에선 남을 괴롭히는 역할을 하고…." 아이들 틈에 낀 그가 식당 주방에 외쳤다. "아줌마, 전 곱빼기로 주세요!" 그에게 아이들이 사인을 해달라고 몰려왔다.
첫댓글 명국후배 진솔한 삶을 볼 수 있는 인터뷰이네뇨.. 감사합니다.
아들몫까지 열심히 살아가는 명국동문이 너무 대견스럽고 자랑 스럽습니다. 두손모아 기원 합니다.
형님 건강하십시요.
나두 신문 읽었습니다...후배가 자랑 스러워요...복 많이 받으실겁니다...
명국후배.진심으로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네요..힘들고 대단한 삶..마음고생..등등..제 자신이 숙연해지네요...너무나 자랑스럽고 큰 일을 하고 있네요..앞으로는 축복이 가득하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