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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당교육의 목적
조선시대 서당에서의 교육은 주로 양반자제들의 과거(科擧)를 준비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성종(成宗) 때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 유인달(兪仁達)이 집 근처에 서당을 설립하여 학동들을 가르쳤는데, 그에게서 배운 34명의 학동들 가운데 10여 명이 생원이나 진사 시험에 급제하였다(『성종실록』18 성종 3년 4월 갑오)는 사실에서 바로 이러한 서당의 설립 목적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종(明宗) 때 제정된 「경외학교절목(京外學校節目)」에 따르면, 동몽훈도(童蒙訓導)에게는 먼저 소학(小學)을 가르쳐 구독(句讀)에 익숙하게 하고 문리(文理)가 어느 정도 터득된 다음에, 대학(大學) · 논어(論語) · 맹자(孟子) · 중용(中庸)을 익히게 하여 사학(四學)에 진학시켰다. 지방에서도 각 마을[鄕]에 학장(學長)을 두고 관례대로 향교에 진학시키도록 하였다(『명종실록』3 명종 1년 6월).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사학(四學)과 향교(鄕校)에 입학하기 위한 공부가 서당에 요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과거 응시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던 평민층에서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유교적 상식을 갖추는 것이 서당 교육의 목적이었다. 따라서 평민의 자제들은 수신제가(修身齊家)의 일상적인 교양이나 생활 의례 및 관혼상제(冠婚喪祭)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데 그쳤다. 이처럼 평민의 자제들이 다니는 서당에서 민중교화를 교육 목적으로 한 것은 정부가 유교사상에 입각한 예속(禮俗)의 교화(敎化)에 중점을 둔 교육을 장려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서당에서의 놀이를 통한 교육
서당에서의 놀이는 학습의 연장인 경우가 많았다. 서당에서 학생들이 취미 있게 경쟁하는 '초중종'과 '골모듬', '화승작(일정한 길이의 화승에 불을 붙여 놓고 그 화승이 다 타기 전에 글을 짓는 것)' 같은 것이 그것이다. '초중종'은 옛사람의 시를, '골모듬'은 전국의 지명을 학습시키는 데 효과적이었고, '화승작'은 글을 빨리 짓는 것을 장려하는 데 효과적인 것이었다. '골모듬'은 고을모듬의 준말로, 고을 이름을 알아맞히는 놀이였다. 학동들이 모여서 아무 책이나 펼쳐 놓고 고을 이름에 해당하는 글자를 찾아서 기술하는 놀이였는데, 제일 많아 맞춘 사람이 이기는 놀이였다. 이 놀이는 고을 이름을 외우도록 하는 학습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 밖에 학습과 관계된 놀이로는 글자맞추기 · 수가지놀이 · 사운희(四韻戱) 등이 있었다. 한편 여름에는 시원한 곳으로 가서 글공부를 하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학습을 장려하는 방법으로 강패를 사용하기도 했다. 즉, 대추나무로 만든 것을 굴려서 일(一)이 나오면 하루 배운 것을 외우고 이(二)가 나오면 이틀 배운 것을 외워야 했던 것이다. 이 때 하나를 틀리면 한 대, 10개를 틀리면 10대를 종아리에 맞았다. 서당에 훈장이 없을 때에는 말타기, 새 기르기, 마을 돌아다니기, 소풍놀이(천렵), 제기차기, 연날리기, 얼음지치기, 자치기, 도둑놈잡기, 씨름, 곤이, 장기 등을 하면서 놀았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놀이도 연령 차이가 있어서 함께 놀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서당에서의 교육방법-1
1) 암기
서당의 교육방법으로는 매일 실시하는 강(講)의 결과와 개인의 능력에 맞는 수준의 학습량을 주어 주입식 암기교육의 완전 학습의 방법을 택하였다. 예를 들면 어린 학동을 가르칠 때 먼저 법을 정하고 구독(句讀)은 낮고 쉬운 것 가운데 알만한 것을 주었다. 그리고 반드시 부과할 학습량을 줄여서 학습시켰다. 즉, 다섯 줄을 감당할 수 있으면 세 줄 정도에만 그치고, 차차 학습량을 늘여주었던 것이다(『堂集』17 更辛苦法). 그리고 어린 학동을 가르칠 때 먼저 법을 정하고, 반드시 반드시 정통하게 한 다음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해석까지 외우게 함으로써 주입식 암기 위주의 완전 학습방법을 따랐다(『堂集』17 循繩尺法).
2) 자율학습과 반복학습
서당 교육에서는 반드시 학동들로 하여금 스스로 해석하게 하되, 급하게 해석하지 말도록 하였다. 해석이 맞지 않으면 바르게 해석할 수 있을 때까지 고쳐 해석하게 하였다(『?堂集』17 更辛苦法). 이처럼 서당에서는 학동들에게 자율학습과 반복학습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학습에서 계몽시키는 순서는 먼저 『천자문』과 같은 교재로 한자[單字]를 가르치고, 다음에 『천자문』이나 『동몽선습』 등을 사용하여 단자(單字)를 부쳐 음독(音讀)하는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나서 구독(句讀)의 문리(文理)를 가르쳤고, 문장의 문리(文理)를 해득시키도록 하였다. 강독(講讀)의 순서는 『천자문』으로부터 시작하여 『동몽선습』·『통감(通鑑)』·『소학』· 사서(四書) · 오경(五經) ·『당송문(唐宋文』·『당률(唐律)』의 순서에 따라 읽도록 하였다.
(손인수 외, 『교육사신강』, 문음사, 74쪽)
3) 문답
배운 글을 소리 높이 읽고 의리(義理)를 묻고 대답하는 강(講)을 받아 학습이 철저히 된 것을 확인한 뒤에 진도를 나아가는 것이 서당의 전통적인 교수법이었다. 강(講)은 대개 일강(日講) · 구강(句講) · 망강(望講) · 월강(月講) 등으로 구분되었다. 그런데 배운 것을 단순히 암기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문리(文理)를 터득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그러므로 아무리 암기력이 뛰어나더라도 수준 높은 지적(知的)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강(講)을 마칠 수 없었다. 암송하고 난 뒤에 따르는 문답식 교육방법은 ‘박학지(博學之)’ · ‘심문지(審問之)’ · ‘신사지(愼思之)’ · ‘명변지(明辨之)’하는 기능과 수양을 도모시켜 주었던 것이다. 억지로 기억하는 일이 없게 하고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編意自現)’과 같이 스스로 물리(物理)가 트이도록 하는 방법 즉, 획일적이 아닌 개인 중심의 능력별 교수방법을 택하였다.
조선시대 서당에서의 교육방법-2
서당에서는 “해가 진 뒤 촛불을 밝혀 독서하다가 밤이 늦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고 하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야독(夜讀)을 권장하였다. 그리고 계절에 따라 교과목을 변경하여 겨울과 봄에는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여름과 가을에는 사학(史學)과 자집(子集)을 독서하게 함으로써 계절과 교과목을 조화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름철의 더울 때에는 연구 정진에 힘든 경서(經書)를 피하고, 대신 사기(史記)나 문집(文集) 등을 읽게 하였다. 반면에 겨울철에는 사서(四書) · 오경(五經)의 경서를 읽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당에서는 여가를 이용하여 ‘초중종(初中終)’ · ‘고을모음’ · ‘화승작(火繩作)’ · ‘대귀(對句) 맞추기’ · ‘조조잡기’ 등 경쟁적인 놀이를 통하여 학습에 흥미를 북돋우기도 했다.
조선시대 서당에서의 교육방법-3
1) 강독과 암송 강독은 날마다 자기 실력에 맞게 범위를 정하여 배우고 하루 동안 숙독하되 '주산'을 놓고 읽은 횟수를 센다. 일단마다 백 번 이상 읽는 것이 보통이다. 遁) 하루 동안 숙독한 것은 그 이튿날 암송하여 통과한 후에 새 것을 배운다. 만일 암송을 못하면 암송할 수 있도록 또다시 숙독시킨다. 이리하여 두뇌의 소질대로 진도는 개인마다 빠르고 늦음이 달라 천재는 천재대로 급히 성장하고 둔재는 둔재대로 얼마든지 지연하다가 낙오된다. 밤에 글 읽기를 장려하여 흔히 12시 넘도록 등잔불 아래에서 끊임없이 계속한다.
2) 계몽 계몽의 순서는, 첫째로 천자문 같은 것으로 낱글자를 가르치고, 遁) 다음에 천자문이나 [동몽선습] 같은 것으로 낱글자를 붙여서 음독하는 것을 가르치고, 다음에 구두(句讀)의 문리를 가르치고, 다음에 한 문장의 뜻을 가르치고, 다음에 스승 없이 스스로 해석하고 읽게 된다.
3) 계절과 학과 계절과 학과를 조화시켰으니 여름의 더운 때는 머리를 쓰되 연구되는 딱딱한 학과의 강독을 폐지하고 흥취를 끄는 시와 율을 읽고 또 시와 율을 짓는(적어도 하루에 한 편을 지음) 것으로 일과를 삼고, 봄과 가을에는 사기나 고문 같은 딱딱하면서도 부드러운 중간쯤 되는 문장을 읽고, 겨울에는 경서를 읽는다. 여가를 잘 이용하여 봄, 가을의 밤을 비교적 짧기 때문에 야독(夜讀)이 없다. 이 시간을 이용하여 사율을 짓는다. 낮에는 글 읽기를 파한 후 단편적인 시간을 이용하여 서도를 연습한다.
조선시대 양반서당의 교육방법
1) 글 배우기[受業]
스승에게 수업할 때에는 반드시 연장(年長)에게 사양하여 나이순으로 나아가야 하며, 배우기를 마치면 엄숙히 읍(揖)하고 물러난다. 배운 것을 이해할 수 없을 때에는 먼저 동문(同門)의 연장자에게 물어야지, 스승에게 허겁지겁 여쭈어서는 안된다. 그래도 꼭 여쭈고자 하면 반드시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자세를 가다듬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어느 책 어떤 부분이 명백하지 못하다고 여쭙고, 선생이 답을 하면 마음을 기울여 경청하고 제 자리로 돌아간다.
2) 모여 인사하기[會揖]
매일 새벽 숙직한(直日) 사람이 판을 한 번 두드리면 함께 일어나 세수하고 외관을 정제한다. 두 번 두드리면 당(堂)에 올라 차례로 서서 선생의 출좌(出座)를 기다려 엄숙하게 읍(揖)한 다음, 양쪽 서열이 서로 마주 보고 읍한 후 자리에서 물러난다. 밤에 잠을 잘 때에도 격판하고 회읍하는 것은 조회(朝會)와 같다. 강독회(講讀會)와 식사시간도 모두 격판(擊板)한다. 초하루와 보름에 선생이 자리에 앉으면, 모두 일어서서 재배(再拜)한다.
3) 방안에서의 자세[居處]
방안에서는 몸을 단정히 하고 바르게 앉는다. 서책(書冊)과 필묵(筆墨) 따위는 잘 정돈하고 읽어야 할 책과 쓸 물건은 때에 맞추어 조용히 내어 오되, 번란(飜亂)스러우면 안되며, 다 쓴 다음에는 제자리에 갖다 두되 뒤섞이게 해서는 안된다.
4) 책읽기[讀書]
책을 읽을 때에는 얼굴을 가다듬고 마음을 가라 앉혀 글자와 글귀를 천천히 음미하며 한 자 한자 분명히 읽어야 한다. 다른 곳을 보거나 무엇을 만지작거려서도 안되며, 모름지기 많이 읽어서 외우고, 또한 반드시 날마다 문리(文理)를 익히고 구절마다 통독해서 평생토록 잊어서야 안된다.
5) 글씨 쓰기[寫字]
붓은 온전한 마음으로 잡고 글자의 획은 엄정하게 할 것이며, 초솔(草率)하게 마구 쓰지 말고 삐뚤어지거나 빠지게 하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먹을 갈 때나 붓을 놓을 때에는 소리를 내지 말며, 먹물이 밖으로 튕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벼루나 책상에 낙서를 하는 일은 가장 좋지 못한 행동이므로 절대로 경계해야 한다.
조선시대 서당에서의 교육 평가
1) 강(講)
서당에서는 매일 매일의 학습량을 부과하였는데, 새로운 과제를 부과하기 전에 배운 내용를 반드시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다. 평가 방법으로는 강독(講讀)·암송(暗誦)·자의(字意)·문장 해석 등을 내용으로 하는 ‘강(講)’이 있었다. 강을 실시할 때에는 반드시 스스로 해석하도록 하되, 급하게 하지 않도록 했다. 맞지 않으면 고쳐 해석하게 하였고, 또 틀리면 맞을 때까지 계속해서 고치도록 하였다(『堂集』17 更辛苦法). 특히 조선왕조가 건국된 초기부터 ‘매일 행사(每日行事’ · ‘독서(讀書)’ · ‘제술(製述)’ · ‘강경성적(講經成績)’ · ‘벌칙(罰則)’ 등에 관한 학칙(學則)을 마련하였다. 이에 모든 교육기관에서는 학령(學令)의 준칙을 따랐는데, 서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2) 강의(講義)
강(講)을 받는데 일정한 절차가 있었는데, 이를 강의(講義)라고 하였다. 강의 성적으로 대통(大通) · 통(通) · 약통(略通) · 조통(粗通) · 조통 이하의 다섯 단계로 구분하였다. 대통은 구독(句讀)에 밝고 설명에 막힘이 없어서 책의 전체 내용을 두루 알고 다른 책까지 미쳐서 매우 밝게 알고 철저하게 통하는 경우에 부과하였다. 통은 더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어도 구독(句讀)하고 설명할 때 막힘이 없는 경우에 부과하였다. 약통은 밝게 알고 철저하여 통하지는 못했지만 구독이 분명하고 뜻을 설명할 때 통할(通割)할 경우에 부과하였다. 조통은 구독에 상백(詳白)하고 뜻을 해석할 때 전체적인 의미는 알고 있으나 설명이 미진한 경우에 부과하였다. 조통 이하는 낙제로 모두 벌을 주었다. 이처럼 평가의 기준은 교재의 뜻과 응용에 밝고 강령(綱領)과 의미를 잘 알며 구절을 자세히 알고 설명과 발표에 막힘이 없는가에 기준을 두어 평가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서당에서의 벌칙
전날 배운 것을 해찰하지 못하거나 외우지 못하면 대부분 종아리를 맞았다. 그렇지 않으면 서당 마당을 귀를 잡고 몇 바퀴 돌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각자가 집에서 만들어 온 회초리를 걸어놓고 학습이 미진하거나 서당의 규칙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 경우에 자신의 회초리로 종아리를 20~30대 맞기도 했다. 훈장의 개성에 따라서는 학동으로 하여금 목침에 올라가게 하여 30cm 정도 되는 뽕나무 회초리 - 물론 이것도 학동들이 각자의 집에서 만들어 온 것이었다 - 로 벌을 주기도 했다. 한편, 접장이 훈장의 지시에 따라 1m 정도 되는 쥐똥나무를 준비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 서당 형태의 변화
16세기로 들어서면서 관학(官學)이 쇠퇴해지고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목적으로 하는 서원(書院)이 등장하면서 조선초기의 안거강학적(安居講學的) 서재서당(書齋書堂)은 서원체제적(書院體制的) 촌락교화서당(村落敎化書堂)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즉, 안거강학적 서당을 서원이나 향교(鄕校)에 부속시켜 교육의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새로운 형태의 서당이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인조실록』20 인조 27년 4월 계해).
조선시대 서당 훈장의 장려에 관한 규정
“지난 해 조정의 분부로 인하여 지방의 향촌이 각기 서당을 세우고 훈장을 두어 가르치니, 그 효과가 없지 않았는데 근래에는 도리어 허물어지니 한스럽다. 그러므로 지금 마땅히 전날의 사목을 따라 타일러 경계하고 시행하되, 그 훈장을 고을로 하여금 공론에 따라 뽑아 차임하고 관청에 고하기를 태학의 장의(掌議)의 예와 같이 하고, 각 마을에 나눠 정해서 취학에 편리하게 한다. 관가에서도 편리에 따라 충분히 지원해 주고, 수령은 공무 여가에 때때로 직접 찾아가 살피고, 그 학도들을 고강한다. 또 감사 및 도사(都事), 교양관(敎養官)도 순행하는 때에 친히 차례로 방문하거나 향교나 서원에 학도들을 모이게 하여 고강하거나 제술을 시험하고, 만일 실제 효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자는 『대전』에 의해 그 스승에게는 호역(戶役)을 덜어 주고 학도에게는 헤아려 상을 베풀고, 그 성적이 미달하는 자는 회초리로 때려 경계한다.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진 자에 대해서는 자세히 참고하여 계문하되, 해당 스승은 승급하여 동몽교관으로 삼거나 딴 직위에 제수해서 장려하는 도리를 보여야 한다.”고 하니, 예조가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조선시대 서당훈장의 자격
서당훈장의 경우 ‘능문능리(能文能吏)’의 뛰어난 학식을 지니지는 못하였더라도, 일정한 수준의 유교적 교양과 지식은 반드시 필요하였으리라 보여 진다. 대부분의 서당에서는 퇴관(退官) 혹은 은일(隱逸)한 사족(士族)이 직접 가르쳤거나, 동족마을 또는 재산가의 사비로 훈장을 초빙하여 운영하였기에 향교의 훈도같이 무위도식하면서 자리보존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훈장의 학식의 표준이 일정하지 않아, 강독으로는 경사 · 백가를 통달한 실력 있는 훈장은 드물었고 주석과 언해를 참고하여 가며 겨우 경서의 글 뜻이나 해득할 정도가 많았고, 벽촌에는 한문자의 활용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극히 저열한 훈장도 많았다. 작문으로는 표(表) · 책(策) · 기(記) · 명(銘)의 글을 짓고 시 · 율의 골수를 아는 이는 드물었고, 사율(四律:율시의 하나로 오언이나 칠언의 네 귀로 된 시)이나 짓고 18구시나 읊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가난한 마을의 훈장은 작문을 모르는 자가 많았다.
이처럼 무식한 서당훈장의 예는 구전설화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거니와, 영조 때에 경영관을 지낸 어당(堂) 이상수(李象秀)가 기본적인 교수법마저 모르는 저급한 훈장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훈장의 자격과 인식이 일반적으로 멸시의 대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훈장의 자격과 역할 - 양반서당
양반서당의 기능은 양반의 자제를 교육시키는 초등 사설교육기관이었다. 한 가문에서 개별 혹은 가까운 집안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사랑채의 사랑방이나 문방이 서당의 역할을 하거나 한 가문의 공용시설인 별도의 건물을 서당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대개 훈장은 그 가문에서 가장 학덕이 높은 사람이 선임되었다. 훈장은 교육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가문 내력이나 다른 가문들과의 차별성 등 보학(譜學) 교육을 담당하였다.
조선시대 서당의 향사
서당의 향사 대상은 선조 또는 종족(宗族)의 비조(鼻祖)에 한정하는 가묘(家廟)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렇게 18세기에 성립된 동성촌락 중심의 서당은 동약(洞約) 또는 문중계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운영됨으로써 마을단위에 의한 경제적 지원을 확고하게 보장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서당에 대한 관권의 개입이 퇴조하고, 서당의 역할은 혈연적인 폐쇄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서당에서의 의례 및 과외활동
서당에서는 유교 관련 지식교육 이외에도 예문(禮問) 즉, 제례(祭禮) · 혼례(婚禮) · 관례(冠禮) · 상례(喪禮)의 의식(儀式)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이러한 예문은 따로 시간을 내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강독을 할 때에나 마을에서 관혼상제에 관련된 행사가 있을 때 가르쳐 주었다. 한편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을 시험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산에 올라가 암송도 시켜보고 학습한 내용을 질문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들판에 있는 약초를 뜯게 하여 풀이름을 교육시키고 나서 약간의 약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 서당설립의 주도세력
임진왜란 · 병자호란은 조선후기의 사회 · 경제 전반에 걸쳐 많은 변동을 초래하였다. 양란(兩亂)을 통하여 농촌경제는 극심한 타격을 받았고, 이에 따른 토지제도 · 수취제도의 변동도 가속화되었다. 또한 전란으로 인한 기존 윤리관의 파괴, 신분질서의 문란도 향촌사회의 새로운 재편성을 요구하고 있었다. 양란 이후 향촌사회의 재편성 요구는 곧 교육문제에도 직결되고 있었다. 양란 후 파괴된 윤리관의 회복이라는 교화적 측면 이외에도, 향촌 지배세력으로 계속 성장하기 위해서 교육은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양란 후 우후죽순 같이 나타난 서당은 당시 향촌민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요구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서당설립의 주도세력은 역시 기존의 재지사족이었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평민층 주도하에 설립된 서당은 쉽게 찾아볼 수 없으며, 이러한 현상은 서당설립을 위해서는 경제력뿐만 아니라, 향촌사회에서의 일정한 동의와 명분이 필요했던 것에서 연유하는 현상으로 파악된다. 이들 재지사족들은 전화(戰禍)로 인해 파괴된 향촌사회를 그들의 주도하에 재편성하기 위하여 서당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그들 재지사족들이 서당을 주목하게 된 것은 당시의 서원과 향교가 이미 심각한 폐해상을 노정시키고 있었고, 이에 강학(講學)기능으로서의 효과도 거의 기대할 수 없었음에서 연유하는 것이었다.(『恥齋集』卷4「樓山書堂呈書」) 그러나 재지사족의 입장에서도 전란 이후 당시의 경제력으로는 독자적인 서당설립이 곤란하였다. 그들 재지사족들은 재력이 부족한 경우에, 지역 수령에게 정문(呈文)을 보내거나 혹은 일읍(一邑)의 사족들에게 통문(通文)을 띄워 서당설립의 지원을 요구하였다. 17세기에 들어서 재지사족과 수령의 결합은 상호 긴밀한 이해관계 속에서 추진되었던 것으로, 그것은 경제적인 지원만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에 있어 양자의 결합은 사족들의 허약한 재지기반을 강화하려는 의도와 당시 정치권력의 추이(趨移 : 黨爭)에 바탕을 둔 관권(官權)과의 연결 구상일 수 있고, 서당을 향촌사회의 새로운 통치기구로서 주목하게 된 중앙정부의 관심 등이 얽혀져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서당의 학과 운영
서당의 일과 시작은 대개 훈장이 가부좌하고 큰 기침을 하면 공부를 시작하였고, 접장이 책상을 치면 뒷간에 가는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서당에서 수업의 시작과 종료는 지역에 따라 달랐다. 대개 여름에는 오전 8~9시 무렵부터 오후 5~6시 무렵까지, 겨울에는 오전 8시 무렵부터 오후 4시 무렵까지, 농번기에는 오후 8시 무렵부터 11시 무렵까지 수업을 실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학동들에 따라 마치는 시간도 각각 달랐다. 이처럼 수업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던 것은 농촌의 사정이나 교육 시설의 미비 등과 같은 이유도 있었지만, 빨리 암기하고 쓸 수 있는 학동은 제 시간에 갈 수 있었지만, 그 날의 책임 학습량을 익히지 못한 학동은 늦은 시간까지 공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그 날의 학습 내용에 자신이 있거나 미리 다해 놓은 학동은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냇가에 가서 목욕하기도 하였고, 고기잡이 · 자치기 · 비석치기 · 팽이치기 · 잡담 등을 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서당의 사회적 역할 향학지규[鄕學之規]
임진 · 병자 양란 후 관권과의 협조 하에 설립되던 서당은 불가분 중앙정계의 정치적 기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즉, 당시의 서당은 향촌민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로부터도 대소민인(大小民人)들의 교화처(敎化處)로서 그 중요성을 새롭게 평가받게 되었다.
중앙정부에서 서당의 사회적 역할을 재평가하고, 그 의미를 강조한 것은 효종10년(1659)에 성균관 제주(祭主)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이 감정(勘定)한 「향학지규(鄕學之規)」를 통해서 알 수 있다.
1. 근래에 조가(朝家)의 분촌(分村)에 따라서 외방향촌(外方鄕村)에 각기 서당을 세우고 훈장을 정하니 그 효과가 적지 않았다.
1. 근래에는 다시금 폐괴(廢壞)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전일(前日)의 사목(事目)을 준승(遵承)하여 신칙수학(申飭修學)하게 한다.
1. 훈장은 일향(一鄕)으로 하여금 공론에 따라서 뽑도록 하고, 관(官)에 고하기를 대학장의(大學掌議)의 예(例)에 따른다.
1. 훈장은 각 촌에 분정(分定)하도록 하여 취학(就學)에 편하도록 하고, 수령은 편의에 따라서 십분(十分) 고조(顧助)한다.
1. 수령은 공사(公事)의 여가에 때때로 친히 가서 살피고 그 학도(學徒)를 고강(考講)하며, 감사(監司)와 도사(都事), 교양관(敎養官)도 순행시에 친히 역방(歷訪)하거나, 향교·서원에 모아서 고강하고 혹은 제술을 시키도록 한다.
1. 만일 실효가 드러나는 자가 있으며 그 사장(師長)에게는 호역(戶役)을 감하게 하고, 학도에게는 상을 주며, 불능자는 초달한다.
1.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자는 계문(啓聞)하여 사장에게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주든지 혹 다른 관직을 준다.
이상의 향학사목(鄕學事目)에서는 양란 후 조정이 서당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향학사목에서 제시했던 시책은 각 지역에 적극 수용되어 현실화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서당의 행사
서당의 행사로는 세책례(洗冊禮) · 개접(開接) · 파접(罷接) 등이 있었다. 학동이 한 권을 책을 마치면 부모가 떡 · 술 · 고기 등을 장만해서 모두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개접은 2월, 파접은 12월 초에 하였는데, 이 때 학부모는 학채(學債)로 벼 2가마 정도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형편이 곤란한 사람은 주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학동의 학업 성취 평가시험은 주로 보름과 그믐에 실시하여 잘한 학동들에게는 붓이나 먹을 상품으로 주기도 했다.
조선초기 서당의 형태
조선이 건국된 초기에는 고려의 향선생(鄕先生)과 관계되는 사설교육기관이 있었다. 그리고 향교의 진흥을 위하여 안거강학적(安居講學的) 서당 교육을 방해하지 않도록 국가적 배려를 요청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방에 산재되어 있는 서당을 국가에서 공인하도록 요청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서당의 성격
양란(兩亂) 이후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후기의 사회 경제 전반에 많은 변동이 초래되었다. 전란으로 인한 기존 윤리관의 파괴, 신분질서의 문란은 향촌사회의 새로운 재편성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이는 곧 교육문제에도 직결되고 있었다. 파괴된 윤리관의 회복이라는 교화적(敎化的) 측면 이외에도, 사족들이 향촌 지배세력으로 지속되기 위해서 교육은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양란 후 서당설립이 빈발했던 것은 당시 향촌민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요구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사족들은 약화된 재지기반을 강화하는 방안으로 서당을 중심으로 관권(수령) 및 외부 사림과의 결합을 시도하는 양상이 주도적이게 되었다.
먼저, 재지사족(在地士族)과 관권의 결합하여 서당설립을 주도하는 경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양란 후 향리세력들이 향청(鄕廳)의 주도권을 위협하는 가운데, 사림들은 이미 강학(講學) 기능의 상실 등 심각한 폐해상을 노출시키고 있던 서원과 향교에서 눈을 돌려 관권과 결합하여 서당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관변측(官邊側)으로서도 향교와 서원을 통한 향촌사회 통제에 한계성을 인식하고, 서당을 향촌교화의 새로운 수단으로 주목하게 되어 서당 설립 및 운영을 적극 지원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평해(平海) · 울진(蔚珍)지역에 설립되었던 소곡서당(蘇谷書堂)과 영천(永川)지역의 누산서당(樓山書堂)이 있다. 이들 지역은 재지사족의 기반이 열악했던 지역으로, 조정 상신들의 지원과 수령의 운영은 서당 장악을 통하여 향권(鄕權)에 대한 관권(官權)의 우위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기도 하였다.
재지사족은 수령을 직접 서당에 초치(招致)하여 향민들을 대상으로 강회(講會)를 열고 상벌을 시행하기도 하는 등 향촌기반 구축에 부심하였다.
두 번째로, 중앙관료층의 서당설립을 살펴볼 수 있다. 당시의 서당은 향촌민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로부터도 대소민인들의 교화처로서 중요성을 새롭게 평가받게 되었다. 이러한 서당의 사회적 역할의 재평가는 효종 10년(1659)에 성균관 제주(祭主) 송준길(宋浚吉)이 감정(勘定)한 「향학사목(鄕學事目)」을 통해 나타난다. 또한 당쟁의 정점에서 부침하던 홍여하(洪汝河) 및 박세채(朴世采)가 각각 산양서당(山陽書堂)과 남계서당(南溪書堂)·구봉서당(九峰書堂)을 설립하여 운영한 예는 당시 집권세력들의 향촌기지 구축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17세기에도 사족이 연합하여 서당이 설립되는 경우가 있었다. 마을이 중심이 되어 상호 결합한 경우와 명망 있는 인물이 중심이 되어 결합되어, 몇 개의 자연촌을 대상으로 서당을 설립하였던 사례들이 이 시기에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타양서당(?陽書堂)을 들 수 있다. 당시 서당 설립 목적 중의 하나는 사회신분제의 동요를 억제하고, 엄격한 신분적 차등윤리를 향촌사회에 정착시켜 재지사족의 지배력을 확보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거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사족이 파괴된 향촌사회를 복원시키기 위해 양민과 천류(賤流)를 회유하였으나, 그것이 곧 교육에서의 반상간(班常間) 차별을 완화하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서당의 역할과 기능
조선시대 널리 일반화되었던 서당은 크게 두 가지 역할과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초등교육기관(初等敎育機關)으로서, 향교나 사학을 거쳐 성균관으로 진학하여 과거에 합격하기 위한 준비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공식적인 초등교육제도를 마련하지 않았지만, 그 역할과 기능은 서당이 담당하였다. 둘째, 조선시대에 서당이 보편화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완성교육기관(完成敎育機關)으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완성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은 과거를 통한 사회적 진출의 기회가 강력히 제한되어 있었던 하류계층의 교육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즉 사회생활에 필요한 초보적인 문자와 지식을 배움으로써 일반상식적 교양을 넓히고 인격을 갖출 수 있는 기능을 서당이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서당의 완성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은 일반서민들에 이르기까지 인륜도덕의 숭상, 청렴절의(淸廉節義)의 존중 등 유교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가치와 규범을 실제생활에 내면화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 이것은 곧 당시 서당이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유교사회가 요구하는 인격체를 교육하는 도장(道場)으로서의 전인교육적(全人敎育的) 역할을 다했음을 의미한다.
조선후기 서당 교육의 변화
18세기 말부터 나타나는 서당의 서민적 성격은 사실상 우리 교육사에서 획기적인 변화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기실 신분제 사회에서 평민층은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 교육으로부터 사실상 소외되어 있었다. 법제상으로는 평민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부여되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의 평민은 결코 교육의 주된 대상이 아니었다. 밤낮으로 노동에 허덕이고, 경제적으로 대부분 피폐했던 평민들이 교육의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이시기의 대다수 평민층은 노동력의 한 단위로서 인식되었지 제도 교육의 대상으로 파악되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국가에서도 평민들에게 제도교육의 기회를 부여하기보다는,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와 같은 의례의 설행을 통한 교화의 대상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화의 대상으로의 평민층은 엄격한 의미에서 교육의 주체가 아닌 객체적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18세기 말부터 서당 내부에서 평민층이 교육의 주체가 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리 교육사에서 크게 괄목할 만한 변화임이 명백한 것이다.
조선 후기 서당과 서민 문학
조선 후기의 문화 동향
정치의 안정과 경제 성장, 그리고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영조 · 정조 때에는 문화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영조 · 정조의 중흥 정치와 농촌 사회의 경제적 성장을 배경으로 서민들도 교육과 문화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 시대의 교육 과정
조선 초기에는 사대부의 자제들이 7~8세가 되면 서당에 들어가 《천자문》을 익혔다. 그러다 15세 전후가 되면 지금의 중등 교육 기관과 같은 사학(서울의 4곳에 세운 중학 · 동학 · 남학 · 서학)과 향교에 들어가 5~6년 동안 배웠다. 이어 소과에 응시해 합격하면 생원 또는 진사가 되어 대학 기관인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당시의 교육은 모두 과거에 필요한 것이었다.
서당의 보급과 교육 기회 확대
서당은 덕망이 높고 유식한 선비가 훈장이 되어 양반 자제와 서민 자제에게 한자와 글씨 쓰는 법을 가르치고, 유학과 역사를 학습시키던 사설 초등 교육 기관이다. 서당은 조선 전기에도 있었으나 후기에 농촌 경제의 향상과 함께 교육 기회가 넓어져 농촌에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이 무렵에는 농민들도 지식을 깨쳐 학식을 높여야겠다는 자각이 싹터 전국 각지의 마을마다 서당이 생겼다. 서당이 이처럼 전국적으로 보급되자, 농민들 가운데서도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 나오게 되었다. 또 종래 사회적 활동이 막혀 있던 여성들 가운데서도 한글을 익히는 사람이 늘어났다.
서민 문화의 성장
이 무렵에는 서민과 부녀자를 대상으로 하는 한글 소설이나 민화 같은 서민적인 작품이 많이 나왔다. 한편 서민들 가운데서도 창조적 재능을 지닌 이들이 나타나 문화 분야에서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처럼 서민 문화가 자라나게 된 것은 실학의 융성, 국학의 발달, 한글의 보급, 서양 문물의 전래 등 조선 후기의 새로운 문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때 어린이들에게 글공부를 가르치던 곳.
당(堂) · 사숙(私塾) · 사횡(私黌) · 서당(書堂) · 서숙(書塾) · 서옥(書屋) · 서재(書齋) · 학당(學堂) · 학방(學房).
다음백과사전에서
첫댓글 단순히 옛그림을 떠올리던 서당에 대해 전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당시 서당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슬며시 웃슴이 나오기도 하지만 우리의선조들이 배움과 익힘에 대해 얼마나 철저했는 지에 다시 경건한 마음으로 돌아옵니다...17세기 후반의 권세를 위한 서당설립이 요즘의 정치가들에 의한 xx연구소의 시초인 것 같아 씁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