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목마름을 배운 곳은 사막이 아니었다. 갈증으로 죽기 전 발견한 오아시스, 얼굴을 물속에 묻고 마시는 달달함을 난 너무 늦게 배웠다. 하루를 오로지 이 순간을 위해 산다. 보급 식량처럼 남편에게 알약을 탄다. 하루에 아침, 점심, 저녁용을 모아 덜덜거리며 버텨온 수십 년 된 경운기 모터 같은 심장에 안식을 주는 시간이다. 1일 1식 하듯이 "1일 몰약"을 술과 함께 들이킨다. 할복하는 자처럼 0시가 되면 모든 예식이 진행된다. 정갈하게 준비한다.
천상의 맛이다. 몸과 영혼이 분리되어 하늘을 나는 짜릿함이 감돈다. 미뢰에 돌기들이 파도처럼 일어나 준비운동을 하고 달리기를 시작한다. 영혼도 맛을 느끼고 식탐을 가지고 있을까? 적어도 그런 일이 없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이런 탐욕의 옷은 이승에 벗어두고 가야 한다. 어렴풋이 어디선가 이 맛을 최초로 가르쳐 준 자가 있었다. 세월이 우사인 볼트보다 표범보다 더 빨리 달려도 그 얼굴은 잊을 수가 없다.
기억은 청동 조각처럼 푸르고 석고처럼 단단하게 뇌에 자리 잡고 있으나 내 모자란 글솜씨는 울대를 타고 흐르 던 그의 근사한 목 넘김 소리를 감히 그리지 못한다. 낡은 군복 바지에 허리춤에 미군용 통조림 깡통을 달고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봄날, 눈과 눈이 만났다. 그는 머리를 통째로 낙동강물에 처박고 물을 빨아들였다. 자연은 언제나 위대한 어머니, 스스로의 젖가슴을 서슴없이 내어 준다. 물 마시기를 끝내고 얼굴을 씻고 물을 터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얼룩을 벗은 희고 윤이 나는 피부와 긴 속눈썹, 검고 넘치는 머리카락과 단정한 이마의 선, 흰건반처럼 고른 이, 세상의 모든 잘생김을 모아둔 모습이었다.
맥주 광고를 하는 아이돌처럼 물을 날리던 모습이 숨을 멎게 했다. 낯선 사람 근처에 절대로 가지 말라고 했던 엄마의 말은 기억에서 이미 소멸되었다. 본능이었다. 어린 내 눈에도 잘생김은 착함이고 선이고 도이고 종교처럼 거룩한 것이었다. 순간, 그의 얼굴을 장님이 오만 원짜리 지폐 액면가 확인하듯 더듬어 보고 싶어졌다.
말끔히 씻은 그의 모습이 아름다워서 그가 살아온 삶이 궁금해졌다. 그의 인생엔 무슨 사연이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있었던가? 그의 외모엔 해독해야 할 비밀이 숨어있는 것 같았다. 비련의 영화 속, 남자 주인공 같은 착각이 들었다. 숨겨둔 이야기가 분명 가슴속에 암세포처럼 박혀있을 것 같았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치러야 하듯이 그는 잔가지를 모아 불을 지폈다. 밥이랑 개구리랑 송사리를 깡통에 부었다.
미친, 결국 극강의 외모는 합리화를 시켜주는 마약과 같은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그러했다. 어느 집안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어떤 방법으로도 가리지 못한 그의 외모는 분명 왕자와 거지가 하나인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를 만남으로 인해 과도한 행운을 다 써버려인지 평생 그런 잘생김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적어도 내 인연엔 없었다. 갑자기 그가 잘 익은 개구리 뒷다리를 번쩍 들어 입에 넣는 순간, 제정신이 들었다. 난 집을 향해 마구 달렸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말들을 지금까지 가슴에 숨기고 있었다. 낙동강 오리알처럼 하얗고 외로워 보였던 한 남자!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는지가 결국은 가장 중요한 운명의 실오라기였다. 하늘이 준 복을 함부로 한자들도 있겠지만 그때는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게 많았다. 특히 배움이 그러했다. 가끔은 그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서툴고 삐뚤삐뚤한 글자들로 빼곡하게! 시골에서의 외로움을 이기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당시엔 한글을 모르는 어른들이 많았다. 어린 내가 편지를 대신 읽어 드리는 재능기부를 했다. 군대에서 온 편지도 있었고 부고장도 있었다. 전보를 받아서 읽어 드렸는데 치맛자락을 뒤집고 우는 동네 할머니!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읽어 드렸고 사실 나도 뜻은 알지 못했다. 마치 우리가 영어를 읽고 뭔 소리인지를 모르는 경우처럼 해독이 안될 때가 있듯이!
난 배우지 않았다. 그냥 물었다. 이게 무슨 글자인지를 묻고 또 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닮은 음들을 찾았다.
동네 간판이랑 어린이용 종합 선물세트, 흑백 TV, 석유 냄새 풀풀 나는 신문지에서 공통점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 유사점들을 연결했다. 화장실에 매달린 낡은 삼촌의 교과서도 나에겐 재능을 자랑할 수 있는 도구였다. 어린아이가 한글을 안다는 게 묘기 대행진에 나가도 될 정도로 신기해하던 그 시절 이야기이다. 궁금한 게 왜 그렇게 많냐고 하시던 할머니의 나이가 되었다.
물을 들이마시듯이 마시고 싶지만 잠에 방해가 될까 참는다. 하루를 공포 속에 쫓기고 심장은 물기에 녹아내린 솜사탕처럼 순식간에 얼룩무늬만 남기고 사라졌다. 수천 마리의 까마귀가 황금빛 밀밭 위를 스치듯 날아간다. 7알의 정신과 알약과 무의식 속의 잘생김의 미학을 떠올리는 밤 그가 고마워졌다. 미학을 가르쳐 준 최초의 남자였다. 문둥이들이 어린아이를 잡아간다는 소문이 무성했던 그때 그 시절 이야기이다.
이젠 정신과 약들이 진화를 거듭해 술과 콜래보레이션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를 오롯이 이 순간만을 위해 버틴 올림픽 영웅처럼 불안한 심장을 단련시킨다. 간이 간을 삼키고 달빛이 햇빛을 피하느라 얼굴이 창백해진 밤이다. 드라큘라 백작이 몸소 찾아와 송곳니로 사랑고백을 하는 순간, 광염 소나타가 먹먹하게 들려온다.
잠이 어느 날 나랑 술래잡기를 시작한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안 온다. 이틀 밤을 수면제 없이 견디고 말갛게 샌 하루! 햇빛 아래 누워 자는 디오게네스가 부러워진다. 병이 깊어간다. 이젠 그냥 다 정리하고 싶어 진다. 남편도 세상도 다 짐이다. 내가 버리고 갈 짐일 뿐이다. 네덜란드로 가고 싶다. 하루빨리 짐을 정리해서 떠나고 싶다. 제발 우리나라도 정신병 존엄사 좀 허락해 주었으면 좋겠다. 1호는 나이다. 미리 예약해 둔다. 아무도 손대지 마시라! "존엄사 1호내꺼, 내꺼!" 침 발라 두었다.
조만간 약이랑 술이랑 베르나르 뷔페가 쓴 검정 비닐봉지랑 준비해서 숲으로 가고 싶다. 지갑도 버리고 주머니에 현금 2만 원만 달랑 가지고 가야겠다. 실수하면 안 된다. 절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한다. 한 번에 성공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계획해야 한다. 절망을 절명하기 위해 처절하게 부수어 버리고 싶다. 인생의 처참함을 광대처럼 긴박하고 절묘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오늘 이 순간부터 난 피에로가 된다.
깊은 숲으로 가야겠다. 가급적 한낮에도 해가 들지 않는 나무의 암막과 진초록 이끼를 담요 삼아 누워야겠다. 오래된 신문지 한 장 이불로 덮어야겠다. 내가 썩어가는 것을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내 더 이상의 불행도 행복도 없다. 그냥 녹슨 죽음만이 존재할 뿐이다.
고마웠던 이들에겐 고맙다고 인사를 꼭 할 것이다. 열망과 노망이 합체한 디지몬 완전체 같은 절망이 망령이 되어 나를 흔드는 지독한 썩은 내가 진동하는 밤이다. 시인의 슬픔과 철학자의 절망과 소설가의 고통, 수학자의 광적인 집중력을 모아 뇌에다 기름을 붓는다.
기지개를 켜던 햇빛이 날 벼린 낫 위로 올라타고 춤을 추는 날, 신내림이 버림처럼 느껴지는 무녀가 된 기분이다. 얕은 지식으로 섣불리 말하는 자! 오늘 하루를 또 살아냈다. 위대한 순간이다.
날마다 무너지지만 다시 일어서는 자석을 향해 달리는 녹슨 쇳가루들의 발악처럼 내가 부활하고 살아오기를 기대해 본다. 귀를 땅에 대고 납작 엎드려 불행이 어느 방향에서 달려올지를 들어본다. 신이시여! 당신은 어느 방향에 계신지요? 동서남북 아니 좀 더 자세하게 360도 중 어디에 존재하시는지요?
오늘도 하루를 심장을 뜯으며 살았다. 살기 위해 걷는다. 그는 단 한마디만 하고 사라졌다. 수십 년,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그의 묘한 주파수의 달달한 음성이 들린다. 읽고 있던 책의 남겨진 뒷장의 두께가 가늠되는 날이다.
진심으로 맛보기 인생 살아보고 다시 태어날지 아닐지 결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쓸개즙 다 뺏긴 곰처럼 하루 종일 늘어져 지낸다. 심장 뜯긴 좀비가 된 기분이다.
최근에 자랑스러운 아들과 사랑하는 아내와 존경하는 아버지와 사별한 나보다 50% 정도 더 불행한 지인을 지나가는 길에 만났다. 상실의 아픔은 언제나 고통스럽지만 순서가 뒤바뀔 경우엔 그 고통은 극에 달한다. 살아남은 자들이 다 미워진다. 자신의 존재 자체도 고통이 된다. 난 극강의 아픔을 안다.
"차 태워 드릴까요?"라고 물었더니
" 살기 위해 걸어갈게."
명언을 남기고 사라졌다.
1번 성실할 것
2번 악몽 꾸지 않을 것! 이건 내 맘대로 안 된다.
3번 그냥 버틸 것
4번 오늘도 걷는다. 살기 위해 걷는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