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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중국 선종사
2. 불교의 종파宗派
1) 종파宗派의 탄생
중국에 불교가 들어오고 400여년이 흐르자 불교는 서서히 자리를 잡고 토착화하기 시작한다. 불교를 경전 번역을 통하여 무조건 받아들이던 시대에서 이해하려는 시대로, 그리고 이해를 넘어 연구하는 시대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학파學派라는 것이 형성되었고, 학파는 또 종파宗派로 발전하게 된다. 이어 다양한 종파들이 어깨를 겨루는 이른바 종파불교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남북조시대[420-589]에 기원을 두는 종파로는 비담종毘曇宗, 지론종地論宗, 섭론종攝論宗, 성실종成實宗, 삼론종三論宗, 열반종涅槃宗, 율종律宗 등이 있었고, 수 ․ 당대에는 천태종天台宗, 법상종法相宗, 화엄종華嚴宗, 진언종眞言宗, 정토종淨土宗, 그리고 선종禪宗 등이 독립된 교단敎團을 형성하게 된다. 수많은 종파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그중 앞에 열거한 종파들이 중국불교를 대표하는 중국불교 13종宗이다.
중국에 있어 수 · 당 이전의 시대는 불교연구 시기로서 주로 서역에서 불교를 수입해 배웠으나 바야흐로 수대에 접어들면서 연구의 결실을 맺고 종파불교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수 · 당의 불교는 명실공히 중국불교로서 정착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 수나라에서의 천태지의의 천태종, 가상사 길장의 삼론종, 신행의 보법종(삼계교)은 종파불교의 선구를 이룬 것이었다. (계환 옮김, 미찌하다 료오슈 저자,『중국불교사』p. 139.)
부파 중심의 인도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는 종파 중심의 불교로 변한 것이다. 차이라면, 부파 불교가 불교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불교 연구 집단이라면, 종파 불교는 종조宗祖를 두고 그를 따르는 종도宗徒들이 모인 불교 단체라고 할 수 있다. 종파 불교에서도 경전 연구가 이루어지지만, 어떤 이념을 가진 인물을 중심으로 새로운 교리나 규범을 만들고, 그 전통을 계속 계승해 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들 초기 교단들은 아직 종교라기보다는 학파적學派的인 성격이 강했다. 학파 불교는 교리 연구에만 치중하게 되어, 아직 일반대중을 어루만지고 동화시키는 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경전을 연구하는 이론 불교는 상류층에나 해당하는 것이어서 경전을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대중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을 것이다. 종교적 측면에서 현실성이 떨어지고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실용성이 부족하여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종파들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명멸明滅하였는데, 교학적인 측면에서는 천태종과 화엄종이 뛰어났고,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선종과 정토종이 두드러진다. 불교문화가 찬란하게 꽃 피던 수 ․ 당대에 접어들면 이들 교단들은 황금기를 맞는데, 실천적인 면에서나 대중적인 면에서 성공을 거둔 선종과 정토종은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며 현대 불교를 대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시대 원효와 의상의 등장으로 화엄종이 크게 번성하였고, 고려시대에는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일으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다. 이어 보조지눌은 선과 교를 통합하여 현 조계종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유교를 국교로 한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그 많았던 불교 종파들이 타의에 의해 통합되어 종파뿐만 아니라 선교 양종마저 구분이 없어진다.
근대에 들어 새로 종파들을 형성되고는 있지만, 현 한국 불교는 조계종曹溪宗과 태고종太古宗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종파에 관계없이 모두 선禪도하고 교학도 공부하며, 율·밀교·정토교淨土敎 등 종파에 구분 없이 다 배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도 관음·약사·미륵신앙 등 적성에 따라 공부하고 있어, 한국불교를 그냥 “통불교通佛敎”라고 한다. 조선이 망하고 이를 모를 리 없는 스님들은 다시 맨땅에 헤딩하듯 불교 중흥에 힘쓴다. 그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한국 불교계는 지금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2) 선종禪宗과 정토종淨土宗
수도인 장안(長安, 시안)과 낙양(洛陽, 뤄양)을 중심으로 교학 중심의 불교가 활발하던 시기, 한편으로는 이를 반대하여 현실 종교를 원하는 대중적 불교운동이 일어난다. 그중 한 부류는 교리에 치중하는 교학불교에 회의를 느끼고, 실천적 수행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또 한 부류는 당시 유행하던 말법末法사상에 근거해, 말법시대에 맞는 참회懺悔와 염불念佛 등을 택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교학 중심의 불교를 생활종교로 승화시켜 인간의 일상생활 가운데 실현하려는 뜻을 가진 선종과 정토종 계통의 사람들이었다.
선종은 두타頭陀행을 주로 하는 실천불교를 표방하였고, 현세에서의 성불成佛을 지향하면서도 교학을 떠난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내세워 대중의 호응을 얻어냈다. 정토종은 아미타불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구복적 실천신앙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서방정토에 태어난다는 정토사상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선종은 자력自力적이었고 정토종은 타력他力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 둘은 경론을 주석하는 교학중심의 중앙 귀족불교와는 그 근본 성격부터가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인도불교는 사색적 혹은 철학적이고 中國禪은 실천적이라고 구별하는 방법은 조심스럽게 이해하지 않으면 오해를 낳을 염려가 있다고 본다. 이는 인도불교가 실천적이지 않았다는 인상을 독자에게 주기 때문이다. 인도불교도 실천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철학적 사색까지도 중히 여겼다. 넓게 말하면 실천적이라는 점은 쌍방에 공통적이지만, 그것이 논리적 사색의 체계와 결합되었는지의 여부가 양자의 차이라 생각된다. 만약 굳이 말한다면 인도불교의 실천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었으나, 禪에서는 그것마저 깨버리고 일상생활 전체에까지 실천성을 확대하여 철저하였다고 할 것이다. (우에다 요시부미/박태원 옮김,『대승불교의 사상』 p. 190.)
이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불교가 대중적으로 보편화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 저변에는 교敎와 선禪을 종합적으로 체계화한 거장들의 노력이 밑바탕이 되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남북조시대 말기부터 활약한 천태종의 천태지의(天台智懿, 538~597)다. 지의는 앞 장에서 논의한대로 인도 불교의 모든 사상과 실천을 5시8교의 교상판석敎相判釋과 더불어 마하지관摩訶止觀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그의 영향은 지대하였는데, 초기 선종의 참선 수행법이 천태지의의 지관止觀 좌선법에서 기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체계화된 불교는 사상적으로는 잘 정돈이 되어 있었지만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아직 대중적이지 못했다. 이론은 확립하였지만 아직 대중화에는 실패했다는 것인데, 실천적인 면에서 활성화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이러한 사상적 배경과 중국적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중국화된 선禪과 염불念佛이라는 실천적인 모습들이 나타난다.
중국에 전해진 인도 불교의 모든 사상과 실천을 종합적으로 체계화했던 사람은 수나라의 천태지의(天台智懿, 538∼598)였다. 그런데 체계적인 책은 완전하면 할수록 구체적인 실천의 실마리가 없기 마련이다. 그것은 오히려 구체적 실천의 선택은 미루어 둔 채, 일체를 평등하게 종합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광대무변한 천태지의의『마하지관摩訶止觀』(위대한 명상)에 대한 실천파 사람들의 비판과 행동에서 새로운 실천 종교로서의 선禪과 염불念佛이라는 두 종파가 탄생했다. (柳田聖山 著 / 楊氣峰 譯,『초기선종사, 능가사자기·전법보기』 p. 18.)
실천은 본래 민중적인 특색이다. 현대에도 불교공부보다는 참선이 대중들에게는 더 친근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려운 불경을 읽는 것보다는 선과 염불이라는 실천법이 일반 대중들에게는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선과 염불이라는 새로운 불교 운동은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신선할 수밖에 없었고, 당시 유행하던 말법사상에서 젖어있던 민중들에게는 안성맞춤의 수행법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였으며,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어필하며 빠르게 번져나갔다.
한 쪽은 오랜 전통의 중압에 대한 위화감을 성실하게 분석하여, 말세 민중의 요구에 응하여 가장 단순한 실천으로서의 염불을 선택하였고, 다른 한쪽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명상을 통해 인간 정신의 근원으로 돌아가서, 전통의 영역 밖에 있다는 자각아래, 말세 자체를 넘어서려고 했다. (柳田聖山 著 / 楊氣峰 譯,『초기선종사, 능가사자기·전법보기』 p. 18.)
수 · 당시대 불교는 실로 이러한 말법사상을 바탕으로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사회의 주목을 받은 종파는 신행(信行, 540~594)의 삼계교三階敎와 도작(道綽, 562~645), 선도(善導, 613~681)의 정토교淨土敎다. 그중 말법에는 올바른 정치도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한 삼계교는 사교邪敎로 간주되어 몰락의 길을 걸었으나, ‘칭명염불稱名念佛’만으로 ‘정토왕생淨土往生’ 할 수 있다는 정토사상은 누구에게나 쉽게 받아들여져 꾸준히 교세를 넓혀나갔다.
통상 사람들은 형이상학적인 가르침이나 철학에는 관심이 없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먹고 살기 바쁘고 힘겨운 터에, 골치 아픈 소리일 뿐이다. 차라리 ‘맹목적으로 무조건 믿고 그 대가로 복을 받는 것’이 훨씬 쉽고 매력적이다. 대중은 즉물적인 그리고 치병적인 능력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강병균 지음,『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p. 220.)
선종禪宗이 종파로서 등장한 것은 당 중기 무렵으로, 이전의 중국불교가 지나치게 교학 중심으로 흐른 데 대한 일종의 비판으로 등장한다. 선종은 언어나 문자를 거치지 않고 교리에 구애받지 않으면서도, 좌선만으로 곧바로 부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도인에게 빌려 입은 교학적인 옷을 과감히 벗어버리고 좌선이라는 실천 수행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인도 불교에서 실천적 요소인 인도의 선禪만을 중국인 체형에 맞게 받아들인 것이다.
이들은 교敎와 설說이 아닌 체험을 통해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以心傳心]이 선의 진수眞髓라고 설파하면서,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경전 밖에 따로 전하니[不立文字 敎外別傳],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자신의 성품을 보면 부처를 이룬다[直指人心 見性成佛]’고 주장하였다. 선은 문자를 떠나 깨달음을 얻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상이었다.
선종 초기 출가승들은 직접 생산노동에도 참여하였다. 자급자족하는 생산적인 집단이었을 뿐 아니라, 의례나 경전에 대한 의존도도 낮았다. 그런 이유로 ‘회창폐불會昌廢佛(845-847)’과 같이 불교가 억압받던 시기에도 쇠퇴하지 않고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이 시기를 틈타 크게 세력을 떨치며 중앙 무대에 진출한다. 경經 속에 갇혀있던 박제된 종교를, 생활 속에 살아 움직이는 현실 종교로 끌어 들이므로 해서, 중국 불교의 대표 주자로 부상하였던 것이다.
6조六朝 시대 말기부터 수 · 당 시대 초기에 걸쳐 불교계를 휩쓸었던 말법 · 말세 사상에 대해 초기 선종계 사람들이 거의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정통파 쪽에서 본다면 말세일지 모르나 이단파에서 본다면 오히려 새 시대의 도래였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단으로서의 자기 정립은 곧 정통과 이단을 아울러 내면적으로 깊이 초월해 가는 창조 작업으로 발전하기 마련이었다. (柳田聖山 著 / 楊氣峰 譯,『초기선종사, 능가사자기·전법보기』 p. 16.)
선종과 정토종은 이론보다는 실천에 중점을 둔 당시로서는 새로운 불교운동이었다. 선과 염불은 궁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었다. 이들은 기존 불교를 부정하는 이단 집단으로 치부되기도 하였지만, 불타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실천불교로의 복귀를 주장하며, 대중의 인기를 업고 광범위하게 퍼져나간다.
분명 중국불교역사를 보면 선과 정토수행법을 공히 수행한 고승과 재가수행자들이 많고, 당 시대 이후 주류를 이룬 이 두 종파는 755년 안록산의 난과 845년 회창폐불을 타 종파보다 잘 견뎌냈다. 송대 초기에 이르면 선-정토 통합사상의 기본교리가 설립되고, 이 통합형태가 중국에서 지금까지 선두적 형태로 남아있다.
선-정토 통합은 승려들뿐 아니라 일반대중에게도 단순하고 실용적이며 융통성 있고 접근 가능한 방법으로 여겨졌다. 이 통합법의 단순성은 타 종파의 철학적 추측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사적인 종교체험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 실용성은 선법과 염불 수행만으로도 해탈이 보장된다는 개념에서 온 것이었다. 융통성이 있다함은 이런 통합이 파벌심이나 특정 종파의 구분을 파괴하기 때문이고 마지막으로 접근성이 있다 함은 이 길에 들어선 모든 이에게, 총명하든 총기가 없든, 구원의 기회를 동등하게 주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선과 정토의 종지가 대립되지만, 선이 주창하는 자력으로 참선을 통해 자성을 깨치는 해탈과 아미타불의 타력에 의지해 정토불교의 극락으로 인도하는 염불을 통합한 것은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로버트 셔(호주국립대학교) Robert Shaw(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선과 정토법문에 대한 허운대사의 사상과 수행법 The Venerable Monk Xuyun’ thoughts on and cultivation practices of the Chan and Pure Land Dharma Doors(虚云老和尚之禅净思想与修炼方法) (제5회 세계속의 선불교 (간화선 국제학술대회자료집 2017))
3) 초기 선종의 수행법, 선정禪定과 지혜智慧
선禪은 범어(梵語, Sanskrit)인 ‘디야나dhyana’, 팔리어Pali인 ‘쟈나jhana’에서 기원한다. 중국에서는 ‘선나禪那’, ‘선사禪思’ 혹은 고요히 생각한다는 ‘정려靜慮’나 생각으로 닦는다는 ‘사유수思惟修’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말의 어근인 ‘드야이Dhyai’가 ‘심사沈思하다’ ‘숙고熟考하다’의 의미다. 내용상으로는 앞 개관 장에서 논의한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선(禪)은 인도 산스크리트어인 디야나(dhyana)의 음을 딴 것이다. 디야나는 ‘깊이 생각한다’, ‘내적으로 직관한다’, ‘고요히 관찰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붓다가 깨달은 진리를 깊이 생각하고 관찰하여 체득한다는 것이 선의 일차적인 의미이다. 불교의 방대한 교리체계는 대장경이라는 이름으로 집대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붓다의 직접적인 가르침과 후에 그것을 해석한 것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붓다의 가르침이 이렇게 문자로 기록된 것을 이론의 체계라고 한다면 선은 그 가르침의 실천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학은 부처님의 말이요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부처님의 마음을 직접 깨닫기 위한 수행이 선이다. (서정형, 2004,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밀린다팡하』「연관개념 서술 - G. 선(禪)」.)
선은 마음을 집중하여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거나, 눈을 감고 삼매(三昧, samadhi)에 드는 실천 수행법이다. 중국의 선이 정신집중을 의미하는 인도의 요가Yoga나 명상과 같이 좌선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같다. 그러나 붓다[佛]의 선이 아닌 인간[衆生]의 선, 즉 중국인들의 생활종교로 발전하였고, 이어 선종의 “조사선祖師禪”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인도의 선과 구분하여 이를 따로 “선사상禪思想”이라고 칭하는데, 참선을 통해 본성을 터득한다는 선종의 사상이다. 선사상은 당대 뛰어난 선승들의 예지로 이루어진, 9세기를 전후해 완성된, 중국의 독자적인 불교사상을 가리킨다.
선(禪)은 인도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선사상(禪思想)은 중국에서 형성되었다. 인도에서의 선은 불교뿐만 아니라 고대의 인도문명이래로 인도의 여러 사상이나 종교 및 철학 등 모든 사유의 근간이 되고 있다. 그것은 요가(yoga)라고 불리우는 명상법(冥想法)인 것이다.
지금 여기서 선사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도에서 발생한 선이 중국에 전래되어 독자적인 불교사상으로 형성되면서 중국인들의 생활종교로 승화된 조사선(祖師禪)의 사상을 말한다. (중략) 선은 불교의 실천적인 입장으로 항상 좌선(坐禪)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좌선의 자세와 외형적인 방법은 고대 인도의 요가와 고금을 통해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문제는 그러한 자세를 통하여 그 사고방법에 있어서 각각의 시대와 지역에 따라 크게 변화가 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중략) 오늘날 새로운 동양의 마음이며 인류의 지적 유산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는 선불교(禪佛敎:ch'an-buddhism)는 중국 당대 뛰어난 선승(禪僧)들의 예지로 이루어진 조사선의 불교사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鄭性本 著,『선의 역사와 사상』 p. 15.)
인도 불교가 중국으로 와 중국 화하는 과정에서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중 유독 ‘정定’과 ‘혜慧’가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선종 초기 세 가지 요체인 계정혜 중 ‘계戒’는 중국 여건에 맞지 않아서인지 소홀히 다루어지게 된다. 인도의 근본불교 시대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수행하다 보니, 공동생활을 위한 규칙이 필요했겠지만, 불교가 중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는 계율은 중요시되지 않게 된 것이다. 시대도 변했지만 토양과 환경이 다른 중국에서 계는 자연스레 무시되고 정과 혜, 둘만이 남게 된 것이다.
인도에서 중국이라는 문화와 환경이 바뀌면서 계율은 변화할 수밖에 없었고, 변화한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 생략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주기 마련이다. 여지가 생긴다는 것은 절대적인 구속력이 퇴색함을 의미하고 비중이 축소되어 감을 의미한다. 선정은 어떠한가. 중국불교의 전개과정에서 계율에 대한 비중이 사라지면서부터는 삼학 중에서 정과 혜 둘만이 문제가 되었다. 천태종에서 강조하는 止觀(지관)이 이를 말한다. 정은 지이고 혜는 관이다. (趙龍憲,「淨衆無相의 楞嚴禪 硏究」. )
불교 초기 교리나 실천 수행이 강조되다보니 계는 비중이 낮아졌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런 의미에서 교단이 형성되기 전 근본불교의 실천 수행인 명상수행으로 다시 돌아갔다고도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정혜의 강조는 계율이 생기기 이전의 근본불교시대로의 회귀를 의미하기도 한다.
불교 초기 교리나 실천 수행이 강조되다보니 계는 비중이 낮아졌기 때문이기도 한데, 교단이 형성되기 전 근본불교의 실천 수행인 명상수행으로 다시 돌아갔다고도 볼 수도 있겠다. 선종은 철학적인 가르침을 포함하지만 실천 수행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고요히 앉아서[定] 진지하게 진리를 찾는[思惟] 인도의 명상 수행법이 중국으로 들어와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의 지관止觀 수행법으로 정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정혜의 강조는 계율이 생기기 이전의 근본불교시대로의 회귀를 의미하기도 한다.
정중무상(淨衆無相: 684~762) 선사는 무억無憶 · 무념無念 · 막망莫忘의 삼구三句에 대해 설하면서, 이 삼구가 바로 계·정·혜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무억·무념·막망의 상태는 ‘염불기念不起’이자 계·정·혜의 완성이라고 하여 계·정·혜 삼학을 ‘염불기'로 통합하였다.
무상에 의하면 이 삼구가 바로 계·정·혜에 해당된다고 한다. (중략) 바꾸어 말하면 수십 가지 계율을 지키고, 여러 가지 관법을 동원하여 선정을 닦고, 지혜를 연마하는 복잡하고 오랜 과정을 무억·무념·막망이라는 간단한 세 마디로 대치시켜 버린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무억·무념·막망의 상태만 된다면 계·정·혜 전체가 완성됐다고 보는 셈이다. {역대법보기} 무상조 끝부분에 보면 삼학을 이렇게 설명한다.
‘상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계율문이요, 상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선정문이며, 상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지혜문이다[念不起是戒門 念不起是定門 念不起是惠門(염불기시계문 염불기시정문 염불기시혜문)]’라 하여 상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念不起)은 계·정·혜를 관통하는 핵심으로 설해지고 있다. 결국 ‘念不起(염불기)’는 三學(삼학)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삼학을 '念不起'라는 한마디로 압축시켰다는 측면에서 무상의 선사상은 돈오법으로 인식된다. ( 趙龍憲,「淨衆無相의 楞嚴禪 硏究」. )
정중무상 선사도 상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念不起]은 계·정·혜를 관통하는 핵심으로 보고, 삼학을 염불기라는 한마디로 압축하고 있다. 무상의 돈오법이다. 이후 벌어진 선종 내 돈점頓漸 논쟁에서는 정혜에서 혜[돈오頓悟]가 더 중시된다. ‘계정혜’에서 ‘정혜’로, ‘정혜’에서 ‘혜’로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은 이후 나타날 간화선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4) 초기 선종의 수행법, 부시심불不是心佛
사실 불교는 생로병사의 해결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생사문제를 뛰어넘어 과연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포괄적인 의문으로 확대된다. 불교 발달사를 보면, 이 진리라는 것이 연기緣起, 공空, 중도中道 등으로 얼굴을 바꿔가며 변신을 계속하였지만, 다시 열반涅槃 혹은 깨달음[覺]이라는 인간의 문제로 귀결된다.
다시 말해 수행을 통해 현재의 나를 성찰하고, 사색하여 연기적 나를 이해하는 수행만이 나를 열반에 이르게 한다. 결국 불교는 ‘나’라는 문제에 귀결되며, ‘나’를 규명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지난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깊은 명상을 통해 자아, 즉 나의 참모습을 규명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주관적 내가 아닌 객관적 나를 직시하고, 그로 인해 구현되는 수행자의 도리인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이상 목표를 실현해 가는 여정인 것이다. 진리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변해왔지만, 종국에는 ‘자각각타自覺覺他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목표를 추구하는 데 있어 선종은 온갖 사설들을 내려놓고 근본으로 돌아가 붓다의 수행에 집중한다. 그럼 붓다의 수행이란 과연 무엇인가? 붓다의 수행은 어떤 것인가? 혹자는 붓다의 수행이 위빠사나이고, 위빠사나 수행만이 초기불교와 상좌불교의 수행법이라고 말한다.
부처님이 지도하신 수행의 기법은 제자들의 근기에 따라 다양하다.《중간길이의 가르침(中部)》경전의 32경 <고싱가 대경>을 보면, 부처님의 큰 제자들이 각자 이상적인 수행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자신들의 입장에서 한 마디씩 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리불, 목련, 아누롯다, 레와타, 마하가섭, 아난 존자가 각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수행자상을 말하는데 모두 자신들이 걸어온 수행의 길을 근거로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하며, 마지막으로 부처님이 모두의 이야기를 인정해주고 부처님이 생각하시는 이상적인 수행자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경전이 주는 중요한 교훈은 수행의 방법은 다양하며, 그 모든 방법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는 점에 있다.
위빠사나가 초기불교와 상좌불교의 전통 안에서 열반을 추구하는 수행법이라면, 간화선은 대승불교의 바탕 위에서 중국에서 피어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목적으로 한 수행법이다. 견성성불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자성청정심의 의미, 대승불교의 불타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탐진치라는 번뇌가 소멸한 경지라고 이해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김재성,「위빠사나 수행과 간화선」.)
이상적인 수행자의 수행방법은 다양하며, 그 모든 방법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열반에 이르기 위함이라는 주장이다. 반면에 현재 우리가 접하는 위빠사나는 붓다의 수행과는 거리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1990 년대 이후 많은 사람들이 미얀마를 중심으로 남방 불교권에서 위빳사나 명상을 수행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위빳사나 명상이야 말로 부처님의 명상이며 초기불교의 명상이고 불교고유의 수행법이라고 주장하면서 간화선 중심의 한국불교 명상수행 풍토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미얀마에서 위빳사나 명상센터들이 생겨나는 과정들을 돌아보면, 현재 남방불교에서 유행하고 있는 수행법은 1,800년대 중반 이후 새롭게 개발되었고, 1,900년대 초반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한 수행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비달마 교학 위주의 미얀마 불교는 일종의 단절을 겪으면서 수행위주의 불교로 전환되기 시작했고, 위빳사나의 정체성 및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수행법을 초기경전의 몇몇 가르침과 일치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은 위빳사나 수행법이야말로 남방불교의 수행법이자 부처님 수행법이며 초기 불교의 명상이라고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황순일,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 제 8차 국제학술 포럼「불교의 명상: 고대 인도에서 현대아시아까지」, 2012. 11. 29~30, 포럼주제 p. 16.)
결론적으로 말해 그럴듯한 설명이나 해명에도 불구하고 붓다의 수행 방법은, 몇 가지 골격을 제외하면 어딘가 모호하고 형체가 불분명해 보인다. 물론 붓다 당시나 붓다의 수행이 그랬을 리가 없겠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다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행을 말하는 경전이 넘쳐나지만, 실재 현장에서의 수행법은 그 많은 스승이나 선지자들만큼 다양해 실체가 뚜렷하지 않게 된 것이다. 현대에 와서도 수행법에 대한 논쟁이 새롭게 일어나는 것을 보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진리는 하나로되 그 길은 하나가 아닌 것이다. 그 진리라는 것이 애초에 정의될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수행법이라는 것이 좌선 중심의 명상 수행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그러나 그 수행이라는 것이 실체가 불분명해서 딱 “이거다!”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 습선자들의 공부 방식 또한 기존의 경전보다는 살아있는 조사의 직접적인 가르침에 의지하게 된다. 그 방식이나 전통들은 이후 가르침의 집약체인 선어록으로 모아지게 되었고, 선어록은 가르침의 핵심인 공안수행 나아가서는 화두로 이어졌다. 무문관 제27칙 부시심불不是心佛은 스승과 제자와의 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남전 화상에게 한 승이 물었다.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은 법이 있습니까?”
“있다.”
“무엇이 사람들에게 설하지 않은 법입니까?”
“그것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물건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圓悟克勤, 鄭性本 譯解,『벽암록碧巖錄』「제28칙 남전화상 설하지 않은 불법」 p. 180.)
‘설하지 않은 법’을 물었으되, ‘설하지 않은 법’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물건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법에 대한 설명보다는, 기존에 있던 이런, 저런 것이 아니라고만 하고 있는 것이다. 말로 설명으로 할 수 없다는 의미인가? ‘설하지 않은 법’을 설하고 있는 것인가? 혹은 ‘설하지 않은 법’을 체득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덫인가!
소품『반야경』제 8권, 환청품에 “설사 열반의 경지를 초월하는 훌륭한 법이 있을 지라도 나는 꿈과 같고 환상과 같다고 설한다.”라는 말을 선승들이 자주 인용하고 있다. 즉 언어 문자는 방편법문이지 불법의 진실 그 자체는 아닌 것이며, 불법의 진실 그 자체는 부처나 조사도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여 설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설불급(言說不及), 혹은 언어도단(言語道斷),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圓悟克勤, 鄭性本 譯解,『벽암록碧巖錄』「제28칙 남전화상 설하지 않은 불법」 p. 180.)
부연하자면 진리는 수행자 개개인의 그릇에 담기는 것이고, 그 그릇이 천차만별이다 보니 그 진리를 표현하는 방법 또한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각각의 그릇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다를 것이기 때문에 진리는 그 그릇만큼 많다는 뜻이다. 각자의 목소리를 표현하는 언어나 문자는 각자의 그릇에 담긴 진리의 한 모습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법은 어떠한 언어나 문자로 설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아니 설한다 해도 각각의 목소리일 뿐 전체를 담지는 못한다. 여래선如來禪이 아닌 조사선祖師禪이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불교의 이론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도 그것을 깨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부뚜막에 있는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 이론이란 마치 소금에 대한 분석과 같은 것이다. 소금의 성분과 그 짠맛에 대해서 설명한 책을 암기하고 며칠 간 토론한다고 해서 짠맛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금의 짠맛을 알기 위해서는 단지 손으로 집어먹는 실행이 필요할 따름이다.
불교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훌륭한 가르침이라고 해도 몸소 실천을 통해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을 생각은 않고 밥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학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교학은 선의 이론적 근거로서 실천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양자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 (서정형, 2004,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밀린다팡하』「연관개념 서술 - G. 선(禪)」.)
진리를 말함에 있어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물건도 아니다’라는 것은 그냥 그대로 진리일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설할 수 없는 법을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는 하나의 길일지도 모르겠다. 불법은 각자 실천을 통해 직접 체험體驗하고 체득體得해야 하는 것이고, 언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평범하지만 어쩌지 못하는 이론이 여기로부터 성립된다. 차고 더운 것은 스스로 체득해서 알아야 한다[冷暖自知]. 다만 묻는 이가 가진 선입견, 예컨대 즉심즉불卽心卽佛이니 비심비불非心非佛 등등, 기존에 그렇다고 알려진 것들을 하나하나 부정해 나갈 뿐이다.
59. 기봉만 가지고는 안목을 판가름하기 어렵다 / 대혜선사
(중략)
스님이 말하였다.
“요즘 사람들은 전도된 것을 따를 줄만 알지 바른 이치는 따를 줄 모른다. 이를테면 무엇이 부처냐고 물어 마음이 부처라고 하면 도리어 평범한 대답이라 생각하고, 무엇이 부처냐 해서 등롱이 벽을 따라 천태산에 오른다고 해야 대단하다고 말을 하니 이것이 어찌 전도된 것을 따르는 일이 아니겠는가?”
(선림고경총서 23, 백련선서간행회 편,『종문무고宗門武庫』 p. 87.)
61.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닌데 / 원오 (圜悟) 선사
범현군 (范縣君) 의 호는 적수도인 (寂困道人) 이다. 성도 (成都) 에 있을 때 불과 (佛果克勤) 선사를 찾아보니 불과선사는 그에게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닌데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참구하도록 하였다. 한마디도 할 수 없고 입을 뻥긋할 수도 없고 계속 들었으나 착수할 곳이 없자 갑자기 근심이 되어 선사에게 물었다.
“이 밖에 또 다른 방편으로 저를 깨닫게 해줄 수 없습니까?”
“방편이 하나 있기는 한데, 그것은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닙니다.”
적수도인은 여기서 깨닫고는 말했다.
“원래 이처럼 가까이에 있는 것을…….”
(선림고경총서 23, 백련선서간행회 편,『종문무고宗門武庫』 p. 91.)
더불어 수행체계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기본은 존재하되 각자에게 맞는 수행은, 각자의 경험에 의존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각각의 수행체계나 그에 따른 깨달음의 체험들이 모인 것이 선어록이고, 그 체험들을 경험하는 것이 이른바 문자선이고 간화선이다. 그 체험들의 집약체인 화두 참선이야 말로 진리로 들어가는 관문인 것이다.
선종은 실질적인 창시자인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 이후, 이런 전통을 이어 받아 본격적으로 이론적 기초와 수행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그 후 청규의 제정과 선사상의 정립, 독자적인 전승체계 등을 통해 점차 독특한 형태의 새로운 종파로 뿌리내리게 된다. 이어 당唐말 오대五代에 이르기까지 대략 250년간 선의 황금시대를 구가하며 임제종臨濟宗, 위앙종潙仰宗,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 등 오가五家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인도의 불교 명상 수행법인 선이 중국에서 불교의 선사상으로 재정립되고, 일반 대중에게 퍼지면서 실생활에 입각한 당당한 생활 종교로서 정착된 것이다.
5) 초기 선종의 습선자習禪者들
중국에 선禪이 전래된 것은 후한[後漢: 25-220] 말기다. 서역으로부터 안세고와 지루가참 등이 중국에 들어와 선禪과 선경禪經을 전하였는데, 안세고가 소승계의 선경인『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및『선행법상경禪行法想經』을, 안세고보다 20여년 늦은 지루가참이 대승계의 선경인『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등을 번역 소개하였다.
이들 외에 수많은 선승들이 들어와 그들이 번역한 선경들이 소개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축법호가『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독증자경삼매경獨證自誓三昧經』『여환삼매경如幻三昧經』을, 구마라집이『선법요해禪法要解』『선경禪經』『선법요法要禪』『신수능엄경新首楞嚴經』을,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각현覺賢, 359~429)가『달마다라선경達磨多羅禪經』과『관불삼매경』을, 그리고 담마밀다가『오문선요법五門禪要法』을 번역 소개하였다.
그중 안세고의『안반수의경(anapana-sati)』은 이른바 ‘수식관’이라고 하는 관법을 가르치는 경전이다. ‘아나(ana)’는 들숨이고 ‘아파나(apana)’는 날숨인데, ‘사띠(sati)’는 의식의 집중을 의미한다. 즉 수식관은 좌선을 하면서 숨을 들이쉬고[入息] 내쉬는[出息] 수를 헤아리는 방법으로 산란한 마음을 쉬고 마음을 고요히 집중시키는 수행법이다. 오정심관五停心觀의 하나인 수식관은 당시 유행하던 도교의 호흡법과 흡사하여 당시 지식인 계층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고, 달마의 선법이 소개되기 전 거의 200년간 습선자들에게 수선修禪의 지침서가 되었다.
『안반수의경(安般守義經)』은 오정심관(五停心觀) 가운데 수식관(數息觀)을 설한 경으로 (중략) 사실 5세기말 보리달마가 내조(來朝)하여 본격적인 중국 선종이 흥기되기까지는 초기 중국불교의 습선자들이 이 경에 의지하여 수행했으며, 따라서 이 경이 초기 중국의 선관수행(禪觀修行)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하겠다. (鄭性本 著,『선의 역사와 사상』 p. 127.)
한편『달마다라선경』은 달마계 사람들에게 선경으로보다는 전등설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선종의 초조인 달마는 남 천축국의 제3왕자라는 이외에는 그 전기가 분명치 않았다. 그러나 초조로 세우기 위해서는 그의 전기나 그의 스승, 그리고 그의 법통 체계를 밝힐 필요가 있어 이 경전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역대법보기』에서는 중국 선종의 초대 조사 이름을 달마다라達磨多羅라고 한다. 이것도 신회의 종론宗論과 관계가 있다. 달마다라라는 이름은『달마다라선경(禪經)』에 말미암는다. 이 책은 달마다라가 교설한 좌선법을 모은 것이다. ‘달마’와 ‘달마다라’는 본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중국 선종의 초대 대사는 달마, 곧 보리달마이지 달마다라는 아니다.
(중략)
티벳으로 전해진 중국 선종의 초대조 이름은 언제나 달마다라였지 달마는 아니었다는 점이다.『역대법보기』에 말미암았기 때문이겠지마는, 한편으로는 ‘달마다라’라는 이름이 경전의 전통에서, 티벳 불교도로서는 달마보다는 통하기 쉬웠던 탓이 아니었을까? 달마다라 이름은, 중국에서는 현재『역대법보기』이외에도『조계대사전』과 종밀의『원각경대소초』 연수延壽의『종경록宗鏡錄』 권 97 등에 보인다.『전등록』에서는 본명을 달마다라로 하고 제27조 반야다라般若多羅의 법통을 이어서 보리달마菩提達磨로 개명했다고 한다.『역대법보기』의 영향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던 사정이 엿보인다. (柳田聖山 著 / 楊氣峰 譯,『초기선종사 II』「역대법보기』 pp. 35~37.)
이들 경전 외에도 불교의 근본교리 및 수행법, 좌선관법 등을 설하고 있는『잡아함경雜阿含經』등 소승경전이나, 선에 대해서 풍부한 이론들을 설하고 있는『금강경金剛經』『화엄경華嚴經』『법화경法華經』등 대승경전들도 수행법과 무관하지 않아 ‘광의廣義의 선경’으로 보기도 한다. 후세의 경전이나 대승의 논서, 삼매를 설하고 있는 경전들도 모두 선경으로 간주하여도 무방하다는 의미이다.
후세의 경전이나 대승의 논서 중에도 광의의 선경이 되는 것이 적지 않다. 특히 앞 장의 「대승불교의 선정설」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국선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금강경』을 비롯하여 여러 반야계경전과 대승의「선경」이라고 일컫는『유마경』그리고『법화경』, 16관법을 설하는『관무량수경』『중론』『대지도론』등도 넓은 의미로 볼 때는 선경으로 간주하여도 크게 지장이 없다.
또한『능가경』이 초기 달마계의 선종에서 유일한 소의경전으로 주목된 것도 그러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며, 여러 대승경전의 삼매경전류(三昧經典類)도 선경인 것이다. 더욱이 중국선종에서는 일체의 경전이 좌선을 위한 참고서로 취급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의미로 보자면 일체의 경전을 모두 선경으로 볼 수 있겠다. (鄭性本 著,『선의 역사와 사상』 pp. 132~133.)
『금강경』은 육조혜능이 한 구절을 듣고 깨우침을 얻었다는 경전이다. 『금강경』은 또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이 형상 아님을 알면, 곧바로 여래를 보리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는 무상無相의 가르침,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應無所住 而生其心]’는 무주無住의 가르침을 통해 선종 사상 형성에 도움을 주었다. ‘불법은 불법이 아니므로 그 이름이 불법이다[佛法者 卽非佛法 是名佛法]’라는 ‘즉비卽非’의 논리나 중생과 부처, 세속과 출세간, 열반과 생사 등이 동일하다는 ‘불이不二’ 사상 또한 선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금강경』은 초기 선종의 소의경전이기도 하다.
다음『화엄경』은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다[一卽多 多卽一]’는 ‘상즉무애相卽無碍’의 논리나, ‘중생이 바로 부처[衆生卽佛]’라는 돈오선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이 모두 바닷물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의 논리적인 구조는 선종에서 ‘일행삼매一行三昧’의 하나인 좌선실천의 밑바탕이 된다.
또, ‘번뇌가 곧 보리[煩惱卽菩提]’, ‘생사가 바로 열반[生死卽涅槃]’ 등으로 유명한『유마경』은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진眞과 속俗이 다르지 않다는 ‘불이법문不二法門’으로 선종 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침묵과 함께 일상에서의 차별 없는 선과 재가자在家者로서 보살의 전형을 보여주므로 서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의 수행을 독려, 선종에 영향을 주었다.
한편 언어 문자에 걸림 없고[無碍], 집착 없고[無相] 머무름이 없는[無住]『반야경』의 논리나, ‘일자불설一字不說’, ‘지월指月의 손가락’, ‘설통說通과 종통宗通’ ‘여래선’ 등의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는『능가경楞伽經』은 선종의 ‘이심전심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선종의 슬로건도『능가경』의 일자불설(一字不說)이란 정신을 토대로 주장한 것이며, 이러한 사실을 세존이 꽃을 들어 보이고, 가섭이 미소로 대답한 염화미소(拈華微笑)로써 교외별전과 이심전심으로 전법이 이루어지게 된 사실의 증명으로 주장하게 된 것이다.
선불교의 새로운 출발은 세존의 일자불설과 교외별전으로 경전에서 언어 문자로 전하는 방편법문과 五時八敎의 교판으로 주장하는 교학체계를 극복하여 불법의 진실을 본인이 직접 체득하는 실천체험의 종교를 주장한 점이다. (圓悟克勤, 鄭性本 譯解,『벽암록碧巖錄』「남전화상 설하지 않은 불법」 p. 179.)
특히『속고승전續高僧傳』「혜가전」에 따르면, 달마가 구나바드라(구나발타라Guöabhadhra) 삼장三藏이 한역한『능가경』을 주면서, ‘이 『능가경』4권을 너에게 부촉한다. 이 경은 여래심지如來心地의 ‘요문要門’ 이며, 모든 중생을 개시오입開示悟入하게 할 것이니라.’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또 혜가의 제자 10인이『능가경』주석서를 저술하였고, 달마도 제자의 청에 의해『능가요의楞伽要義』1권을 저술했다고 한다.『능가경』은 초기 선종의 소의 경전이다.
『능가경』3권에 ‘나는 최정각(最正覺)을 이룬 그날 밤부터 열반(涅槃)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49年間) 일자(一字)도 설하지 않았다’라는 구절을 여러 곳에서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여래일자불설’의 주장은 일찍이『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7권에도 보이고『대지도론(大智度論)』54권 등의 다른 경전에도 산견(散見)되는 주장인데,『능가경』은 종래의 주장을 한층 더 구체적으로 체계화시켰다. (鄭性本 著,『선의 역사와 사상』 p. 117.)
이렇게 선종은 대승경전과도 무관하지 않다. 선종은 이들 대승경전의 사상들을 수용하고 발전시키고 있으며, 어떻게 보면 선종은 이들 대승사상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선종은 언제 어떻게 가시화 하였으며 어떻게 중앙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하게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