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정신의 발원지가 된 유서 깊은 운문사
운문사로 들어가는 양변에 붉은 홍송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런데 소나무 아랫부분에 커다란 상처가 있다. 일제 강점기에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톱으로 흉측하게 자른 상처다. 일제강점기에 송진 채취했던 수탈의 흔적이다. 70~80년이 지나도록 새살이 전혀 돋아나지 않았다. 노송은 그날의 한을 품고 만고풍상을 견디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 얼마나 일본 놈들을 욕하며 자랐을까 참 대견스럽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마을마다 송진을 채취하던 곳이 있었다. 주민들에게 강제로 광솔을 따오게 하고 광솔에 불을 붙여 기름이 나오면 큰 통에 받아갔다. 그 기름이 굳으면 송진이다. 고즈넉하고 즐겁고 힐링이 되어야 할 소나무 숲길이 수탈의 흔적이 보여 관광객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운문사는 다든 절과 다른 점이 있다. 초창기 주지스님이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마라”라고 스님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지금까지 그 말을 사찰의 사훈처럼 지키고 있다. 사찰울타리는 개울에서 주어온 돌로 아름답게 콩 담장을 쌓았다. 담장 밑에는 둥굴레차를 심어 자라고 있다. 불자들이 오면 구수한 둥굴레차를 대접할 재료이다. 산 밑으로 넓은 텃밭에는 고추와 오이 호박 들깨 등이 자라고 있다. 풍성한 사찰음식의 재료가 된다. 일을 하던 경운기가 잠시 멈추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출입이 제한된 담은 빗살무늬처럼 돌을 주워 담장을 예쁘게 쌓았다. 돌의 모양과 길이가 비슷해서 마치 빗살을 보는 것 같다. 비구니 스님들은 이렇게 움직이고 일을 하니 건강하고 근심 걱정이 없이 불경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운문사는 30여동의 건물과 8점의 보물, 11명의 고승대덕의 영정 및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대운보전, 비로자나 삼신불회도, 석조여래좌상, 사천왕석주, 삼층석탑, 원응국사 비, 청동호, 금당 앞 석등,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있어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虎踞山)에 있는 운문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동화사의 말사로 비구니 도량이다. 주지를 비롯한 스님들도 모두 비구니이다. 범종각 들어서서 왼쪽, 남쪽 절반이 비구니를 가르치는 교육공간이자 스님들이 사는 요사여서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다. 오른쪽, 북쪽 공간은 법당들이 모인 신앙공간이다. 대웅전 옆 전향각만 요사채인데 손님을 모시는 영빈관 구실을 하기 때문에 따로 나와 있다. 그래서 일반인은 일주문으로 들어갈 수 없어 측면으로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면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거대한 반송이(일명 처진 소나무)있다. 야트막하게 옆으로 자랐다. 가지가 너무 길게 처져서 쇠 지팡이를 짚고 있다. 야구경기장 원형 돔처럼 둥글게 자리 잡고 있다. 옆에서 보면 가지가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안을 들여다보면 나뭇가지가 마치 우산살처럼 촘촘하게 바치고 서있다. 우아하고 아름답게 자라 비구니도량과 잘 어울린다. 어떻게 저렇게 자랄 수 있을까 탄성이 절로 나오다. 이 처진 소나무는 해마다 봄․가을로 막걸리 12말씩 받아 마시며 청청하게 자라는 천연기념물이다. 봄. 가을에 가면 처진 소나무의 술 취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운문사는 비구니 스님의 강학 공간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불교정화운동이 한창이었다. 1958년 비구니 전문 강원이 개설되어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87년 승가대학으로 바뀌었다. 전문교과과정과 교수진을 확보하여 승가대학의 명분에 걸 맞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약 260여명의 비구니스님들이 이곳에서 불경을 수학하고 있다.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운문사는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내려준 화랑정신의 발원지 이다. 1718년 채헌 스님이 쓴 ‘호거산 운문사’에 의하면 557년(신라 진흥왕 18)에 한 신승(神僧)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달았다. 불교를 숭상하는 10여명의 도움을 받아 갑(岬)자가 들어가는 다섯 개의 절을 짓기 시작하여 7년 만에 완성하였다. 동쪽의 가슬갑사, 서쪽의 대비갑사, 남쪽의 천문갑사, 북쪽의 소보갑사, 중앙의 대작갑사 등이다. 현재 남아 있는 절은 운문사(대작갑사)와 대비사 뿐이다. 그 후 600년(신라 진평왕22) 원광 국사가 중창하였다. 그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화랑도인 추항과 귀산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내려줌으로써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신라는 다섯 갑사를 창건하여 불교를 중흥하였다. 삼국통일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고 군비를 정비할 때라 이 일대에 화랑수련장을 만들었다. 신라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 가는 과정에 운문사 일대는 병참기지로 전략상의 중요한 요충지였다.
일연스님은 운문사에서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1277년 일연선사는 고려 충렬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1281년까지 머물렀다. 이곳에서 일연은‘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집필을 착수하였다. 운문사의 절 동쪽에는 일연스님의 행적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아 볼 수 없어 안타깝다.
삼국유사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 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 후 사회적 혼란을 수습한 왕건은 937년(태조 20년), 대작갑사를 운문선사라 개칭하고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경제적 기반이 튼튼한 대찰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105년(고려 숙종10년) 원응국사(圓應國師) 학일이 제3차 중창한 후 왕사로 책봉되었다. 원응국사가 1129년(인조7)부터 이 절에 머무를 때 나라에서는 토지 200결과 국노비 500명을 운문사에 귀속시켰다. 이때부터 나라의 500선찰 중 제2선찰이 되어 운문사의 최고 전성기였다.
운문사 대웅보전(보물 835호)로 보물오 지정되어있다. 건물은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천장은 4면에 빗천장을 돌리고 중앙에 우물천장을 두었다. 주초는 자연석을 이용한 덤벙 주초에 기둥은 민흘림을 사용하였으며 귀 솟음을 하여 건물의 상승감을 더하였다. 안팎의 단청은 금단청(錦丹靑)으로 선이 굵고 대범하여 건물과 잘 어울리고 안정감을 준다. 정면문은 어간(御間)을 수놓은 아름다운 꽃살문이 한 짝만이 남아있어 안타깝다. 좌우 협시도 없이 비로자나불이 홀로 넓은 법당을 지키고 있다. 불단 서쪽의 천장 아래에는 대롱대롱 줄에 매달려 있는 앙증스러운 나무 동자상도 있다. 이 착한 동자승은 모든 사람을 배에 태워 용궁으로 보내고 자기 혼자 마지막으로 남아 줄에 배달려 용궁으로 가려고 한다. 그런 착한 마음을 가진 동자승은 용궁에 꼭 가리라 믿는다. 자비를 베푸는 동자승이다.
운문사에는 대웅보전이라는 전각이 두 개다. 1988년 청도군이 실측 조사했는데 상량 도리 밑에 별도로 설치한 상량문(墨書)을 발견하였다. ‘세차순치십년계사구월일(歲次順治十年癸巳九月日)’의 날짜가 기록되어 있어 이를 근거로 효종4년(1653년)에도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대웅보전은 만세루(萬歲樓)뒤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비로전이었던 이 전각을 개수하여 대웅보전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비로전 건물이 대웅보전으로 보물지정이 되었다. 보물로 지정이 된 후에는 임의로 명칭을 변경 할 수 없다. 1980년대 초 대웅보전이 새로 들어서면서 운문사에는 대웅보전이라는 현판이 걸린 전각이 두 개가 있다. 비로전이었던 대웅보전 앞에 쌍 탑을 건립한 것은 대웅전이 위치한 자리의 지세가 전복하기 쉬운 작은 배와 같다하여 지세를 누르기 위해 고려 때 세운 비보 탑 이다.
운문사는 30여동의 건물과 8점의 보물, 11명의 고승대덕의 영정 및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비구니 스님의 강학 공간인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비구니를 가르치는 교육공간이자 스님들이 사는 요사여서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다. 스님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불경에 전념할 수 있게 하기위해서 일 것이다.
비로전을 대웅보전으로 사용할 때 보물로 지정되어 대웅보전 전각이 두 개 이다. 일연은 이곳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집필을 착수하고, 원광 국사가 추항과 귀산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내린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초창기 주지스님이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마라’라고 스님들을 가르쳐서 지금까지 그 말을 사찰의 사훈처럼 지키고 있다. 사찰주변 텃밭에 채소 등을 가꾸어 식재료로 사용하여 자급자족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소나무를 톱으로 흉측하게 잘라 송진 채취했던 수탈의 흔적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고즈넉하고 힐링이 되어야 할 소나무 숲길이 제 기능 다하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