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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불교의 비교론적 고찰 (2)
-기독교와 불교의 다른 점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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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
2. 불교는 어떤 종교인가/
3. 올바른 종교인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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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
(1) 신본주의 종교
기독교의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자요 주재자(主宰者)이며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신은 절대자이며 창조자이고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종[인간]은 주[하나님]를 믿고 따를 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본주의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이 문제는 유사 이래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기적 또는 이적이라고 부르는 초자연적인 현상, 예컨데 비온 뒤의 오색 무지개, 남북극 지방의 오로라 현상, 아름다운 저녁노을, 기이한 구름 모양, 산더미 같은 파도, 일식과 월식, 해와 달이 동산에서 떠서 서산에 지는 현상 등, 당시 사람들의 지식이나 능력으로는 설명이나 이해가 곤란했던 것들은 모두 신의 존재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은 이런 자연현상들의 원인을 속속 규명하였고, 아직 남아있는 것들도 언젠가는 설명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였습니다. 결국 기적이나 이적은 비록 연구나 추적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지라도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 채택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의 존재 문제에 대해서 중세 때, 『신학대전』을 쓴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결합해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고 했으나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하고 팬을 꺾어 버렸고, 이후에도 많은 신학자들이 갖은 방법과 비유를 들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으나 확실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였습니다.
근대에 들어와 근세철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신의 존재문제는 ‘논증불능(論證不能)’이라 하여 철학에서 아예 제외시켜 버렸습니다.
19세기 말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Nietzsche, 1844~1900)는 “신은 죽었다.”고 말 하여 수천 년 동안 신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던 서구인들에게 충격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본래부터 없었던 신을 있는 것으로 잘 못 알고 믿어 오다가 뒤늦게 없다는 사실을 알아 낸 것뿐인데, 마치 신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듯한 그런 말은 사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그 전에는 살아 있었음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최대의 석학자라고 일컬어지는 버트란트 러셀은 그의 저서 「나는 왜 크리스챤이 아닌가?」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이 세상 만물들은 다 원인이 있으며, 이 원인의 고리를 더듬어 올라가면 마침내 제1원인에 도달한다. 이 제1원인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모든 것에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 하나님도 원인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처럼 원인이 없이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면, 세계도 원인이 없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며, 신의 존재를 정면으로 부정하였습니다.
(2) 믿음의 종교
어느 철학자가“믿음이 있으면 종교요 믿음이 없으면 철학이다.”라고 하였지만 믿음은 종교의 본질입니다. 모든 종교가 믿음을 전제 조건으로 하고 있지만 기독교에서의 믿음은 철저한 믿음,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합니다. 그럼 기독교에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집회시마다 독송하는 사도신경(使徒信經)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아멘."
이와 같이 기독교에서의 믿음은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이 구세주(救世主)임을 믿어야 하고, 성령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하여 태어난 것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이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 것과 하늘로 승천하신 것, 그리고 이 세상에 다시 심판하러 오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신앙관에 대해서, 신학자 어거스틴은“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고 하였으며, 톨스토이는 "기독교는 믿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믿음의 종교"라고 하였습니다.
(3) 타력적 종교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신의 피조물로 보았습니다. 신은 창조자이고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는 다리를 놓을 수 없는 심연(深淵)을 일단 인정하고, 그 심연은 인간의 이성적인 노력으로는 도로(徒勞)에 그치고 만다는 예정론적인 근본 전제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 신과 인간의 이원적인 단절을 설정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성서는 비록 인간 및 세계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하나님께서 금지한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하나님의 계명을 어김으로써-인간은 죄인의 몸[原罪]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낙원에서 추방되어 고통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상승 가능한 중간자적 성격에서가 아니라 구약성서에서 상징된 바와 같이 에덴동산에서 신의 뜻을 거역하고 낙원을 잃고 아벨을 죽인 카인의 죄악을 계승한 인간형, 즉 배반자로서 파악하고,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될 수 없다는 원죄인적 성격으로 규정했습니다.
구약성서는 율법과 계명을 통해 인간이 질서있는 삶을 살 수 있고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이르면, 율법이 오히려 인간을 옭아매고 인간을 부자유하게 하는 멍에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율법을 강조하면 할수록 어느 누구도 구원의 길을 얻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본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과 그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인간 구원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피조된 인간은 스스로 구제의 능력이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과 절대적인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는 타력 신앙을 강조합니다.
(4) 구원의 종교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적은 구원에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입장이 사뭇 다릅니다. 가톨릭에서는 전통적으로“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함께 선행을 실천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루터는“인간은 선행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신앙)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였고, 칼뱅은“인간의 구제 여부는 전지전능한 신의 자의에 의하여 미리 예정되어 있다.”는 예정설(豫定說)을 내세웠습니다. 16세기 초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반발을 계기로 벌어진 이 논쟁은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가 갈라서며 종교 전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습니다.
(5) 언약과 계시의 종교
기독교는 하나님의 언약과 계시로 이루진 것이 또 하나의 특징으로 지적됩니다.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언약과 계시를 받았는데, 최초로 언약을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원전 18세기 경의 사람으로 지금 시리아 지방에 해당되는 메소포타미아 지방 갈대아 우르에 살았습니다. 그곳은 다신론 신앙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야훼 신은 아브라함을 불러 다음과 같이 약속했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세기 12:1~2)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부인 사라와 함께 고향을 떠나‘알지 못하는 곳’으로 향하였는데(그곳이 지금의 팔레스타인인 가나안 땅이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최초의 언약입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두 번째 언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시려고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것을 명하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려고 실행하려 할 대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세기 22:16~17)
하나님의 두 번째 언약을 받은 사람은 야곱이었습니다. 하루는 야곱이 꿈을 꾸었는데 끝이 하늘에 닿은 사다리 하나가 땅에 서 있고, 그 위에 하나님 천사들이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이 때 여호와가 그 곁에 서서 언약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의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遍滿)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세기 28 :11~14)
세 번째 언약을 받은 사람은 모세입니다. 야훼신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히브리백성을 구출하여‘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 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들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애굽기 3:9~10)
야훼신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을 애급에서 구출한 모세는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돌비에 새긴 십계명을 직접 받아오고(출애굽기 20:1~21), 이를 기초로 하여 이스라엘은 새로운 민족, 새로운 국가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야훼신과 맺은 언약을 통해, 자신들이야말로 야훼신이 택한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공고히 하게 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사무엘,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과 같은 위대한 선지자(先知者)들과, 그밖에 수많은 예언자(豫言者)들은 하나님의 언약 또는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두 다 인간이므로 하나님의 뜻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하나님의 로고스가 스스로 인간으로 육화(肉化)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체이기 때문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하게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이므로 완전한 신이요, 또 완전한 인간이 되어 신과 인간의 어간에서 중보(中保)가 된다는 것입니다. 신은 인간을 사랑하여 인간을 찾다가 그리스도에게서 인간을 만나고, 인간은 자기 생명의 본원인 신을 찾다가 그리스도에게서 신을 만났습니다. 종교의 정의를 말할 때에 랙탄티우스가‘재결합(再結合)’이라고 하였거니와 그리스도는 신과 인간을 다시 연결시키는 직무를 가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를 신의 로고스, 곧 신의 말씀이라고 일컫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인간에게 나타낸 계시, 곧 성경을 신의 말씀이라고 일컫습니다. 구약 말씀은 오실 그리스도를 주시마고 약속하신 계약이요, 신약 말씀은 오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약속하신 계약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합하여 성경이라 하거니와, 성경 말씀은 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므로 신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비록 인간의 손을 빌어 기록된 것이지만 그 내용은 신의 뜻을 인간에게 나타 낸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인간의 뜻이나 지혜, 기교(技巧)가 조금도 없다는 것이 정통파의 태도입니다. 여기에 있어서 조금 자유주의의 해석을 붙여 성경이 비록 신의 계시지만 인간의 손을 빌어 기록된 것인 만큼 거기에는 오서낙자(誤書落字)도 있을 수 있고, 중복되고 누락된 것도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신학자들이 취하는 태도입니다.
(6) 종말과 재림의 종교
기독교의 역사관은 처음과 마지막, 즉 창조와 심판이 있는 직선적 사관으로서 언젠가 종말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 역사가들에 의하면 인류역사는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운영되고 발전된다고 한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어떤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이 누려야 할 특권과 축복을 받도록 하는데 있으며,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고, 이 지상에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완전히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이 사탄의 장난으로 실현되지 못할 때 심판주인 그리스도가 종말에 다시 세상에 오셔서 그 목적을 꼭 실현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종말론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교주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 특수한 신앙이 있지마는 기독교와 같이 교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종교는 없습니다.
재림에 대해서 일부에서는 계시록에 기록된 것처럼 종말론적 선악의 투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일부에선 역사의 발전을 통하여 주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것을 재림으로 해석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계시록에는 재림의 시기에 대하여 땅위에는 큰 전쟁이 일어나고 천재지변(千變地異)이 나타나며 하늘과 땅이 모두 파괴되며 인류에게는 무서운 재앙이 내린다고 한다. 또 예수가 재림할 때에는 천사들의 나팔소리가 나고 죽었던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 위에 태평 왕국을 세운다는 천년왕국설도 있고, 인류가 극한 고통 속에 빠진다고 하는 대환란설도 있어 각 사람의 견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말일 심판이란 것은 모든 인간은 선악의 행위가 있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우주의 대주재자로서 또 심판자로서 공정한 보상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말일의 대심판은 모든 정통 교파에서 굳게 믿고 의심하지 않는 중요한 교의입니다.
(7) 부활과 영생의 종교
부활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며, 기독교인의 삶의 궁극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의 의미와 가치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즉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고통과 허무의 표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에게 아무런 삶의 용기를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린도전서 15:16~19)고 했습니다. 부활이 인생의 궁극 목적이요 기독교인의 삶의 목표가 된다는 말입니다.
부활이란 죽었던 사람의 몸과 생명이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는‘생명의 부활’이요, 다른 하나는‘심판의 부활’입니다. 생명의 부활이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무덤이 갈라지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가리키며, 심판의 부활이란 악인들이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기 위해 일시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린도전서 15:4~8)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하여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으며, 특별히 목격자들의 증언은 부활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종말론적 사건은 주의 재림이 있은 다음, 심판이 있고, 심판과 함께 의인의 부활이 있으며, 의인이 부활이 있은 후, 천년왕국의 영광이 있고, 천년왕국 후에 무궁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 천년왕국을 일반적으로 천년 동안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하고 번영할 것을 믿는 신앙에서 발로된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이란 이러한 영원을 위하여 나의 유한한 시간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일회적이며, 유동적이고, 유한한 시간적 삶, 거기엔 고뇌와 고통과 허무가 있을 뿐이나, 그러나 영원을 위하여 십자가의 삶을 살아갈 때 부활의 승리와 함께 영원의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義)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딤후 4:7~8)
이것이 기독교인의 소망입니다.
2. 불교는 어떤 종교인가?
(1) 깨달음(成佛)의 종교
불교신앙의 목적은 깨달음(成佛)에 있습니다. 깨달음을 떠나서 불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깨달음이란 일체 만법의 본원 그 자체를 바로 아는 것을 말한다. 일체 만법을 총괄적으로 표현하여서 법성(法性)이라 하고 개별적으로 말할 때는 자성(自性)이라 하는데, 이 본원 자체를 바로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깨달음을 근본으로 삼는 종교이며, 불교 이외의 어느 종교에서도 이와 같은 이론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컨대 유교는 공자님이 시경ㆍ역경 등 문자에 의지해서 거기서 얻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세웠고, 기독교는 예수가 절대자(絶對者)의 계시에 의해서 세워졌으나, 부처님은 많은 지식을 얻음에 의하거나, 혹은 절대자의 계시를 받음에 의해서 부처가 된 것이 아니라 보리수 아래에서 자기 스스로 선정(禪定)을 닦아 자기의 자성을, 일체 만법의 법성을 바로 깨쳐서 부처님이 되신 데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가 다른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2) 자력적 종교
신을 믿는 종교에서는, 인간은 나약하고 무지한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는 구제불능이므로, 절대자을 믿고 그로부터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타력신앙(他力信仰)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인간은 나약하고 무지한 존재가 아니라, 그 실상은 부처가 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봅니다. 우리가 금생에 중생의 몸을 받은 것은, 무명 업장에 가려 본성(佛性)을 망각하였기 때문이며, 이 무명 업장만 정화하면 본래면목을 찾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혹자는 대승불교에서는 불ㆍ보살의 위신력(威神力)과 공덕을 찬양하고 철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신을 믿는 종교와 무엇이 다르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지만, 부처님이나 보살님은 본래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일찍이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큰 서원을 세우고 가없는 세월동안 수행, 정진하여 마침내 부처님ㆍ보살님이 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본질에 있어서 중생과 부처는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을 믿는 종교에 있어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창조자(주인)와 피조물(종)의 관계, 즉 '신ㆍ인현격관(神人懸隔觀)’의 관계인데 반하여 불교의 부처님과 인간의 관계는 '중생ㆍ불평등관(衆生佛平等觀)’에 입각해 있습니다. 불교의 타력신앙은 자력신앙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의 다름 아니며, 종국에 가서는 스스로의 힘(自力)에 의하여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3) 현실적인 종교
흔히 종교라면 의례히 내세를 내세우고 천당ㆍ지옥을 앞세우기 일쑤지만 여기에는 그런 것이 일체 배제되어 있습니다. 아니, 그런 것들이 처음부터 끼어 들 여지가 없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현실적으로 걸머지고 있는 인간의 괴로움을 문제 삼아 그것을 해결했을 뿐, 다른 데에는 눈조차 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정각의 내용인 연기법은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가 아니라, 이 현실을 분석하고 투시한 끝에 얻은 그 진상(眞相)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그 실천론인 4제(四諦)와 8정도(八正道)를 살펴보아도 신비적인 요소라고는 조금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현실적 합리적으로 처리되고 있을 따름입니다. 거기에는 기도도 없고, 예배도 없다. 오직 자기가 실천을 통해 향상해 갈 것이 요구되고 있을 뿐입니다.
(4) 논리적ㆍ합리적인 종교
일반적으로 종교는 비논리적ㆍ비합리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특히 서구의 종교는 어거스틴이란 신학자가“나는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했을 정도로 비논리적ㆍ비합리입니다. 이에 비해 불교는 불교논리학이 따로 성립해 있을 정도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입니다. 논리란 합리적인 이해와 같은 것이므로 현실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것은 비논리적이라고 규정하여도 좋을 것입니다.
불교는 우리 인간이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가르침을 처음에 제공하고 그로부터 보다 심화된 단계의 답변들을 제시하고 마침내 궁극적인 해답을 베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철학적인 분위기를 많이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은 종교에 비해 논리적 지적 체계라고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교가 논리적이라고 해서 철학의 범주에 들어가 버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철학과 구별되는 종교만의 특성인 종교 의례를 놀라울 정도로 정연하게 갖추고 있어 여전히 불교는 종교에 속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5) 과학적인 종교
불교는 여러 종교 중에서도 가장 과학적이라는 사실이 또한 특징으로 부각됩니다. 현대과학 특히 자연과학이 발달됨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이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부처님은 “색이 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다(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반야심경)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색(色)이란 유형(有形)을 말하고 공(空)이란 것은 무형(無形)을 말하는데, 이는 유형이 곧 무형이고 무형이 곧 유형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유형이 무형이고 무형이 유형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허공이 바위가 되고 바위가 허공이 된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허공이고, 허공이 바위입니다. 어떤 물체, 보기를 들어 바위가 하나 있다고 합시다. 이것을 자꾸 나누어 가다보면 분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분자는 또 원자들이 모여 생긴 것이고, 원자는 또 소립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입니다.
그럼 소립자는 어떤 것인가? 이것은 원자핵 속에서 시시각각으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가 충돌해서 문득 입자가 없어졌다가 문득 나타났다가 합니다. 인공으로도 충돌 현상을 일으킬 수 있지만 입자의 세계에서 자연적으로 자꾸 자가 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입자가 나타날 때는 색(色)이고, 입자가 소멸할 때는 공(空)입니다. 그리하여 입자가 유형에서 무형으로의 움직임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연히 말로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닙니다. 실제로 부처님 말씀 저 깊이 들어가면 조금도 거짓말이 없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면, 부처님은 “일체 만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 만법은 없어지지도 않나니, 만일 이와 같이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나타나리라(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화엄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체 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 법이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한 마디로 줄이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부터 여러 가지 철학도 많고 종교도 많지만 불교와 같이 불생불멸에 대해서 분명하게 주장하는 철학이나 종교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불교의 전용이요 특권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발달하여 요즈음에는 불교의 불생불멸에 대한 특권을 과학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과학 중에서도 가장 첨단과학인 원자물리학에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데 성공해 버린 것입니다. 이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 아인슈타인인데,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에서 등가원리(等價原理)라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자연계는 에너지와 질량, 이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전 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을 각각 분리해 놓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에서는 결국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은 곧 에너지이다. 즉 질량과 에너지는 서로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전에는 에너지에서는 에너지 보존법칙, 질량에서는 질량불변의 법칙을 가지고 자연현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였는데, 요즈음에는 에너지와 질량을 분리하지 않고 에너지 보존법칙 하나만을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동양사상을 잘 아는 일본의 물리학자들은 에너지와 질량의 관계가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공공연히 말합니다. 질량 전체가 에너지로 나타나고 에너지 전체가 질량으로 나타나는 이런 전환의 전후를 비교해보면 전체가 서로 전환되어서 조금도 증감이 없습니다. 곧 부증불감입니다. 불생불멸이니 마땅히 부증불감입니다. 불교의 근본 원리인 불생불멸이 상대성이론에서 출발하여 현대 원자물리학에서 과학적으로 완전히 증명된 것입니다. 물론 과학이 불교 이론을 모두 증명해 준다고 하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불교 원리를 설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고 또 현대물리학이 불교에 접근해 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6) 이해와 관용의 종교
나란다에 우바리라는 장자(長者)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이나교의 교조 나타붓다의 유명한 재가 신도였습니다. 한때 나타붓다는 그를 특별히 부처님에게 보내 업(業)에 관한 논쟁으로 부처님을 누르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업에 관한 부처님의 견해가 그와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정반대로 논쟁 끝에 우바라는 부처님의 견해가 옳고 그의 스승의 견해가 그르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처님에게 그를 재가신도로 받아들여 주도록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당신같이 잘 알려진 인물에게는 신중한 고려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며 서두르지 말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것을 권했습니다. 우바라가 다시 그의 소망을 얘기했을 때 부처님은 그에게, 모시던 옛 스승을 계속 존경하고 보필하도록 권유했습니다.
이러한 이해와 관용의 정신은 오늘날 종교 교의의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와 관용의 정신은 처음부터 불교문화의 가장 소중한 이념이었습니다. 불교는 오래 전에 아시아 대륙에 전파되었고, 오늘날에 와서는 서구에 전파되었으나 종교 문제로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았고, 어떠한 박해의 사례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교의 이해와 관용의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3. 맺음말(올바른 종교인의 자세)
지금까지 불교와 기독교의 다른 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유일신을 믿는 종교와 불교의 교의는 서로 다르며,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타종교를 배척하거나 폄하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내가 믿는 종교의 가르침만이 참 진리라고 확신한 나머지 남의 종교를 폄하하거나 멸시한다면‘공존의 원리'가 깨어지게 되고 걷잡을 수 없는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마련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종교가 소중하면 남의 종교도 소중합니다. 종교 간의 우열을 논한다든가, 내가 믿고 있는 종교만이 참 진리이고 다른 종교는 미신이란 주장은 갈등만 조장 할 뿐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는 신념체계이기 때문에 자기가 믿는 종교가 외부로부터 침해를 받으면 그 반응이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믿는 종교의 가르침만이 참 진리라고 확신한 나머지 남의 종교를 폄하하거나 멸시한다면‘공존의 원리’가 깨어지게 되고 걷잡을 수 없는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마련입니다.
기원전 250년 경 최초로 인도를 통일하고 자신은 불교 신자이면서 종교에 관용정책을 펼쳤던 아쇼카 대왕이 그의 비문에 남긴 글은 모든 종교인들이 깊이 아로 새겨야 할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의 종교만을 존중하고 다른 종교를 비난하지 말라.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종교도 존중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종교를 성장시킬 수 있으며, 또한 다른 이의 종교에도 도움을 주는 것이다. 행동이 그와 같지 않으면 자신의 종교의 무덤을 파는 것이며, 또한 다른 이의 종교에 해를 미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