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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1. 연구목적 동방정교회의 역사, 신학 그리고 영성을 깊이 연구하고 바라봄으로써 보다 더 정확하게 동방정교회를 알고자 함이며, 개신교와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발견하여 이해하고자 하는데 있다. 더 나아가 동방정교회의 예배와 예전 그리고 신학을 연구, 분석함으로써 목회현장에서 역동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상황화’의 안목을 향상시키기 위한 준비로서의 연구 목적을 갖는다.
2. 연구방법 8명의 조원들이 동방정교회의 역사 연구에 2명 신학과 영성 연구에 각각 3명씩 배정되어 각기 필요한 문헌들을 통해 연구‧조사한 후 그 결과물을 한 곳으로 모아 서로 비교 분석하여 하나의 논문 형태로 구성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Ⅱ. 본론
1. 동방정교회의 역사
1.1 동방정교회의 역사에 대한 고찰
기독교세계의 현재의 분단을 야기한 분열들은 대략 500년 간격으로 세 가지 주된 단계들 속에서 일어났다. 분열에 있어서 첫 번째 단계는 오늘날 오리엔트 동방정교회들(the Oriental Orthodox Churches)로 알려진 교회들이 기독교의 주된 몸으로부터 나누어졌을 때인 5, 6세기에 일어났다. 이 교회들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즉 동방교회(the Church of the East:주로 오늘날 이란과 이라크에 있고, 종종 ‘앗시리안’, ‘네스토리안’, ‘칼디안(Chaldean)’, ‘동방 시리안’ 교회로 불린다)와 5 개의 비칼세도니안 교회들(자주 ‘단성론자’라 불린다; 안디옥의 시리아 교회(소위 야곱교회), 인도의 시리아 교회, 이집트의 콥틱교회, 아르메니아와 에디오피아교회)이다. 오늘날 동방교회는(The Church of the East) 비록 한때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550,000만 명 정도이다. 그리고 비칼세도니안 교인들은 모두 약 27만정도이다. 이 두 그룹들은 종종 함께 ‘작고(lesser) 분리된(seperated)’ 동방교회(Eastern Churches)라 불려진다.
이 첫 번째 분열의 결과로서 동방정교회는 동쪽으로는 주로 그리스어를 말하는 세계로 제한되었다. 그 후 두 번째 분열이 1054년에 형식상으로 일어났다. 이제 기독교인들의 주된 몸은 두 단체, 즉 서유럽에서는 로마 교황아래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 비잔틴 제국에서는 동방 정교회로 나누어졌다. 동방은 이제 서쪽까지도 제한되었다.
기독교는 선교에 있어서는 보편적(혹은 우주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세 문화들-셈, 그리스, 라틴-과 연합하였다. 첫 번째 분열의 결과 시리아의 셈족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학자들과 저술가들의 번영하는 학교와 더불어 기독교세계의 나머지로부터 벗어났다. 그 후 2차 분열이 일어났다. 이 분열은 기독교세계에 있어서 그리스와 라틴전통 사이를 이간시켰다. 그래서 동방정교회 내에서 기본적인 문화적 영향은 그리스의 문화적 영향이 되었다.
동방정교회는 먼저 동쪽으로 그다음에 서쪽으로 제한되는 동안, 북쪽으로 확장하였다. 863년 슬라브족의 사도들인 성 시릴과 성 메토디우스는 선교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비잔틴 제국의 국경을 넘어 북쪽으로 여행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불가리아, 세르비아, 러시아의 개종으로 인도하였다. 비잔틴의 힘이 쇠약해지자, 북쪽의 이 새로운 교회들은 중요성이 증가하였고, 1453년 터키인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모스코바의 지위는 동방세계의 수호자인 비잔틴의 위치를 차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최근 2세기동안 이러한 상황에 부분적 역전이 있어 왔다. 콘스탄티노플 자체는 아직도 터키인들의 손에 옛 영화의 창백한 그림자로 남아 있지만, 그리스의 동방기독교인들은 1821년 그들의 자유를 다시 얻기 시작했다. 한편 러시아 교회는 20세기에 호전적인 반기독교 정부의 통치아래 70년 동안 고통을 당하였다. 이것이 동방정교회의 외적 발전을 결정지은 주된 단계들이다.
1.2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
1.2.1 정교회의 역사적 배경
정교회의 역사적, 종교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정교회 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황제 콘스탄틴1세(Constantine I)는 주후 330년 로마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현재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로 이전하였고, 대로마제국은 국운을 회복하지 못한 채 395년 동서로 분열하고 만다. 서쪽의 서로마제국은 로마를 중심으로, 동쪽의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각기 흥망성쇠 하게 된다. 결국 서로마제국은 북방 변경 지대에서 세력이 강해진 야만족, 게르만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된다. 반면 비잔틴 제국은 1453년 이슬람교의 오스만 제국에게 콘스탄티노플을 빼앗김으로써 1천년이란 역사의 장을 마무리하게 된다. 종교적으로 로마 카톨릭과 희랍 정교회가 정식으로 갈라선 해는 1054년이었다.
1.2.2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
860년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러시아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한 뒤, 864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포티우스(Photius)는 러시아의 수도 키예프에 선교사를 파송 했으나 오레그(Oleg)왕의 방해로 교회 성립은 당장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독교의 꾸준한 유입으로 945년 키예프에 교회가 세워지며 955년에는 올가(Olga)여왕이 세례를 받게 된다.
러시아 민족은 10세기말(A.D.988)에 기독교화 되었다. 러시아 민중들의 종교를 변화시킨 사람은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대제(Vladimir : 1015 사망)이다. 988년 올가 여왕의 손자 블라디미르 왕이 기독교로 개종한 뒤 비잔틴 제국 황제의 여동생과 결혼함으로써 정교회를 러시아의 국교로 공인하였다. 정교회는 1917년까지 러시아 국교였으며 1988년에는 러시아 정교회 1천주 년을 기념했다.
1037에서 1488년에 러시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임명한 수도 대주교가 통치했는데, 키예프의 그리스인 수도 대주교가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 사이에 일시적인 연합을 선언했던 피렌체 연합(1439)에 서명한 후 러시아 교회는 독립 자치가 되었다. 모스크바의 수도 대주교 욥(Job)은 총대주교의 지위로 승격(1589)되어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에 이어 서열 제 5위에 오르게 되었다.
1700년부터 1917년까지는 러시아 정교회의 ‘서양화’시대로 분류된다. 이 기간에는 러시아 정교회가 국가 권력 하에 속하게 되며, 교회의 세속화로 정교회 지도자들은 부패하고 성숙하지 못한 신앙생활로 인해 시민들의 지지를 잃게 된다. 1721년 피터 대제는 총대주교를 폐지하고 독일의 개신교 제도를 본 따 신성종무원(Holy Governing Synod)을 창설하여 교회를 국가 통치권 하에 두게 된다. 이 기구의 구성원들은 교회가 아닌 황제가 임의적으로 임명하였다. 총 대주교구는 1917년 10월 혁명으로 비로소 부활되었다. 1918년에서 1939년 러시아 정교회는 공산당의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그러다가 1943년 스탈린 종교 정책의 갑작스런 전환 덕택에 러시아 정교회는 놀랄 만한 부흥을 이루었다. 1945년에서 1959년에는 비록 몇몇 성직자들이 체포, 유배되기는 했으나 교회의 공식적 조직은 크게 확장되어, 문을 연 교회의 수가 2만5천개에 달했다. 그러나 1959년에서 1964년의 흐르시초프 치하에서 교회에 대한 새로운 탄압이 광범위하게 시행되어 문을 연 교회 및 교회 기구의 수가 1만개 이하로 줄어들었다.
브레즈네프 통치하에서는 교회의 공식 활동은 허락되었으나 국가의 통치에 대항하거나 반대하는 시위자들은 잔혹한 진압을 당하거나 극심한 고통을 당해야 했다. 1982년 브레즈네프가 사망하고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면서 현저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1988년 러시아 정교회는 988년에 있었던 블라디이르 왕자의 세례를 기념하여 기독교 전래 1천년 기념행사를 개최할 정도로 조직적인 힘과 자유를 얻게 되었다.
지난 25년 동안 기독교에 호의를 보이는 젊은이들의 숫자는 증가했으며 맑시즘 신봉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교회는 소멸되지도 않았으며 스탈린의 추종자의 계획에 의해 짓밟혀 지지도 않았던 것이다.
1.3 한국정교회 역사
1.3.1 한반도와 정교회의 인연
기록에 의하면 정교회와 우리 민족과의 만남은 약 8백 년 전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몽골군이 러시아를 지배하고 유럽을 유린하던 중세시대에 몽골에 파견되었던 로마 교황청의 사절이 남긴 기록을 보면, 몽골의 왕실은 비교적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이어서 러시아에서 온 대공(大公)을 후히 대접했으며 그 때 고려의 왕자들과도 접촉케 했으니 당시 볼모로 잡혀가 있던 고려 왕실 왕전(王佺) 등의 귀족 자제와도 화친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관계로 보면 러시아 정교회와의 만남은 2백 60년 전 조선 영조시대로 소급된다. 청나라 북경 사신 길에 올랐던 이윤신의 문견사건(聞見事件)에는 '큰 코 오랑캐'라는 의미의 대비달자(大鼻獺子)를 만났다고 하는데 그가 곧 코 큰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때는 이미 러시아와 청나라가 국교를 맺고 있었던 때다. 따라서 우리도 그들과 교분을 이루며 공어포와 인삼을 선물하였고 그들은 우리 사신들에게 거울과 주화를 주었다고 한다. 거울의 옛 우리말 이름은 '어르쇠'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그 무렵 아라사(러시아를 지칭하던 옛 우리말) 정교회 선교사로부터 입수한 물건들의 이름을 확실히 몰라 그냥 아라사라 불렀던 것이 후에 아르쇠로, 다시 어르쇠로 변음 되어 생겨난 이름이라고 전한다.
1.3.2 한국정교회의 시작
19세기 말엽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이 치열하던 때 조선에는 약 90명의 러시아 군인들을 포함하여 120여명의 러시아인 그리고 30여명의 러시아 국적 소지 한국인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주일과 축일이면 러시아 공사 관저에 함께 모여 그들끼리 기도와 찬양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생활을 유지했으나 성사를 축으로 한 신앙생활이 일상생활이었던 그들에게는 그때까지 그들을 위해 성사를 집전해 줄 정교회 사제가 조선에는 없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불랴노프스키는 위와 같은 러시아정교회 신자들의 긴급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마침내 1897년 1월 3일 본국에 사제 파송을 요청하였고, 불랴노프스키 공사의 사제 파송 요청을 받은 러시아 정교회 공의회는 1897년 7월 공의회 결정 2195호로 소규모 선교단을 조선에 파견키로 의결하고 신학 박사였던 암브로시오스 구드꼬 수사 대신부와 니콜라이 알렉시예프 보제와 봉독자 A. 니콜라신을 정교회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고 그들은 성당에 안치할 물건들과 성사에 사용되는 성물(聖物)들을 확보한 후 1898년 초에 조선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러나 당시 서울에는 그들이 예배를 드리고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성당이 없었다. 그리하여 독실한 신자였던 당시 러시아 공사는 자신의 관저 중에서 가장 큰 방 하나를 임시 예배 장소로 제공하였고 그 방은 약 6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임시 소성당으로 꾸며져 1900년 2월 17일 성수로 축성된 후 그 장소에서 이 땅에서의 첫 성찬예배가 거행되었다. 이날 성찬예배에는 정교 신자들 외에도 한국 정부의 대표와 많은 주한 외국인들이 참석하여 이 날을 경축하였다.
1.3.3 한국에 세워진 첫 정교회 성당
당시 성 니콜라이 성당은 고종 황제께서 기증한 부지(현 정동 22번지) 위에 건립되었으며 모스크바에서 제작된 여섯 개의 크고 작은 종에서 울려 퍼지는 특이한 종소리는 장안 사람들의 이목을 끌면서 장차 그 부지 위에 세워 질 대성당의 웅장한 모습을 예고하는 듯 하였으나, 본래 소성당에 이어 지어질 예정이었던 대성당은 1094년의 러․일 전쟁과 1917년 예기치 않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에 따른 주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부에 대한 지원 약화로 인하여 결국 정동에서는 세워질 수 없었다.
1.3.4 선교의 고비와 확장
1906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국내 정세가 다소 안정됨에 따라 고종 황제는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들의 재입국을 허용하여, 파벨 이바노브스키 수사 대신부와 블라디미르 스크리잘리 수사 신부, 바르톨로메오 셀레즈노프 보제 그리고 봉독자를 포함한 4명의 평신도로 구성된 러시아 정교회 제 3 차 한국 선교단이 동년 8월 14일 입국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적대 행위는 끊이지 않아 선교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파벨 수사 대신부는 매일 예배 의식을 거행하며 서울 외곽 지역까지 선교 활동을 넓혀 나아갔다. 교리 공부는 일본 관헌의 감시 하에서 어렵게 진행되었으며, 이런 과정에서 교습 받은 제 1기생 중에서 나중에 국내에서 첫 한국인 사제가 된 요한 강탁 신부가 나왔다. 파벨 수사 대신부는 전임자의 변역사업도 계승하여 성찬 예배서를 보충 완성시켰고, 또 한편으로는 곳곳에 일반 교육을 위한 학교도 세웠다.
1.3.5 일제시대와 교회의 고난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선교된 한국 정교회는 처음에 1897년부터 1908년까지는 페테르부르그 대주교구에 속해 있다가 1908년부터 1923년까지는 블라디보스톡 대주교구에, 그리고 1923년 이후 일본 대주교구에 소속되어 있었다. 한편,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에서 교회 탄압이 시작되자 한국 교회는 러시아의 혼란으로부터 유발될 수 있는 국내 미등기 재산권에 대한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그리하여 1925년 교회는 교회의 재산권을 당시 법인으로 인정받았던「일본정교회 재산 협회」명의로 등기하였는데, 이 선택이 화근이 되어 교회 재산은 해방 후 수립된 한국 정부로부터 일본법인 소유의 적성 재산으로 취급받게 되었고 국가 재산으로 귀속되고 말았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암흑기였던 일제시대는 이제 갓 싹트기 시작했던 한국 정교회에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선교회의 존폐 위협 등 여러 난관을 힘겹게 헤쳐 나가는 고난의 시기였다.
1.3.6 한국 전쟁과 새로운 시도
1954년
안드레아스 신부는 귀국에 앞서 일본 동경 대주교에게 한국 신도들이 천거한 보리스 문이춘
신부
그 후 교회는 성 니콜라스 성당 신도 총회의 결의에 따라서, 해방 후 모교회(母敎會)의 영적 지도와 선교 지원을 더 이상 바라기 힘든 상황에서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관구로 관할 소속을 이전하기로 하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님께 탄원하였는데, 당시 한국 신자들의 그러한 탄원이 총대주교님으로부터 받아 들여져서 한국 정교회의 관할 소속이 러시아 정교회 소속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관구에 속해 있는 미국 대주교구 소속을 거쳐 1970년 이후부터는 뉴질랜드 대주교구 소속으로 이전된다. 한편, 알렉세이 김의한 신부의 납북 이후 어려운 교회 문제를 처리해 오던 보리스 문이춘 대신부는 건강상 이유로 당시 국내 유일의 정교회 성당이었던 성 니콜라스 성당의 주임사제의 직무에서 은퇴함으로서 1975년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수사 대신부가 한국 선교 책임자 및 성 니콜라스 성당의 주임사제로 부임되어 왔다. 새로 부임한 소티리오스 수사 대신부는 정동에서 이전 후 현재 성당의 미비한 시설물과 전쟁 때 파손된 종각을 증축하는 등 성당 내부 시설을 완비하고 그동안 부족했던 교회 예배서와 기초교리 책 등, 선교에 필요한 사항들을 준비하였다.
2. 동방정교회의 신학
2.1 동방정교회의 신학에 대한 고찰
다니엘 B. 클렌데닌은 그의 책 「동방 정교회의 신학」에서 정교회의 신학적인 주제를 네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부정의 신학(apophaticism)이며, 둘째는 성화상(icon), 셋째로는 성서와 전승, 넷째로는 신화(tneosis)이다. 정교회는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결정된 교리적인 사항을 정확 무오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기에 공의회가 만든 교회들은 성경과 함께 변질될 수 없는 권위를 가진다고 믿는다. 때문에 정교회는 니케아 공의회에서의 성부와 성자는 동일본질이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라는 교리를 믿느며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의 성경의 신성에 대한 공의회의 결정 사항을 따른다. 이 욍에도 앞의 역사적인 배경들을 고찰하면서 다룬 공의회의 결정들을 지키는데 A.D 431년의 에베소 공의회에서는 펠라기우스가 주장한 인간의 자유의지와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론을 정죄하고 어거스틴의 은총과 믿음에 의한 구원론을 채택하고 A.D 451년 칼케톤 공의회에서의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 하나님이시오 참 인간이심을 밝히고 이 두 본성 사이의 관계를 “혼동되거나 나뉨이 없는”조화로 본 결정 등을 따르며 이러한 기독론적 결정이 강화된 A.D 553년의 제2차 콘스탄티노플과 680년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화와 마지막 787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교회내의 성상숭배를 결의 등이 이러한 정교회의 전통으로 남아 있는 전통적 유산이다. 이러한 이해 하에서 정교회의 신학적인 네 주제들은 4가지가 있다.
2.2 부정의 신학
하나님의 신비성을 이해하고 그에 접근하는 데에 있어서 동방 정교회는 독특한 부정 신학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서방에서는 계몽주의의 유산에 따라서 이성과 논리를 모든 진리의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기준으로 삼아왔다.
동방의 사상가들은 이성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이 이해하건데 현재 서방 문화의 뼈대를 이룬 이성의 교만을 거부한다. 그들은 이성으로 하여금 신학적 신비를 해명하고, 또한 이성 자신을 진리의 유일한 척도로 자처하도록 허용하거나 격려하는 경향에 저항한다. 만일 정교회의 신학이 하나의 요소로 특징 지워질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정교회의 전 신학적 비전이 가지고 있는 아포파틱 지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아포파티시즘은 동방교회의 모든 신학적 전통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하나님의 지식의 문제는 [신학에 대하여]라는 한 작은 저술에서 근본적인 방식으로 계시되었다. 이 저술들은 처음에는 이 저술들의 권위에 의존하려 했던 단성론자들, 즉 이단들이었다. 7세기에 고백자 막시무스는 주석들 혹은 여러 글들을 통해 디오니시오스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통의 의미를 밝혀줌으로써 이 무기를 이단의 손에서 탈환해왔다. 이때부터 “아레오바고의 글들”은 서방과 동방의 신학전통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권위를 누려왔다.
디오니시오스는 두 가지의 가능한 신학의 길을 구별한다. 하나는 긍정으로부터 나오는 카타파틱 신학(theolohie cataphatique) 혹은 긍정신학(theologie positive)이며, 다른 하나는 부정으로부터 나오는 아포파틱 신학(theologie apophatique) 혹은 부정신학(theologie negative)이다. 긍정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들로 안내하는 불완전한 길인 반면, 부정신학은 전적인 무지에 이르게 하는 완전한 길, 본성에 있어서 알려질 수 없는 하나님에 관해 유일하게 적합한 길이다. 실제로 모든 지식들은 존재하는 어떤 것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 분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 분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 다시 말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한다.
인식가능한 모든 대상들 너머에 계시는 분을 아는 것은 바로 무지를 통해서 이다. 부정에 의해 나아감으로써 우리는 존재의 열등한 수준으로부터 그 것의 결정에 이르기까지 상승해나간다. 절대적은 무지의 어둠 속에서 계시는 알려지지 않은 분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알려질 수 었는 모든 것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빛, 특별히 충만한 빛이 어둠을 소별하듯이 피조물들에 대한 지식, 특별히 그러한 지식의 과잉은 하나님자체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무지를 소멸하기 때문이다.
2.3 이콘(icon)
성화상(聖畵像), 희랍어로 ‘이콘’ 이란 말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습(창 1:27)으로 창조되었다는 성경말씀에서 유래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작품이며 하나님의 성화상이다. 인간, 곧 살아있는 하나님의 성화상은 죄로 인해 손상되었기 때문에 인간 안에서 하나님의 참모습을 볼 수 없고 그릴 수도 없다. 더욱이 히브리 사람들의 생활 전통 속에서는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찾아본다든지 그려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나 때가 되어 하나님과 똑같으신 분(요한 1:1)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으로 육화(肉化, Incarnation)하심으로서 우리는 참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 안에서 손상된 하나님의 모습은 회복되게 되었다.
우리가 나무, 종이, 페인트 물감 등으로 만든 성화상은 우리 인간이 신화(神化)되게 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된다. 성화상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禮拜)드릴 때 경건심을 자아내게 하고 성경의 말씀과 주님의 사도들로부터 이어온 교회의 가르침에 교화(敎化)되게 하며 예배드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일치를 이루게 하는 하나의 영적 견결고리의 역할을 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동방 교회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성화상은 신성의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성상은 우상이나 예술작품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며, 그들의 실재가 삶 속에서 드러나도록 하는 도구이다. 잠재적으로 성화상은 인류의 구원과 이 세상의 회복과 변형을 반영한다.
인쇄술과 출판기술 없이 아직 일반화되지 못했을 때는 손으로 그려진 성화상이 정교회 안에서 아주 큰 역할을 담당해왔다. 예로부터 성화상 제작자(화가, 수도자 등 작가)들은 한 폭의 성화상을 완성하기 위하여 금식과 기도 중에 혼신을 다해왔다. 정성으로 만들어진 성화상(이콘)은 정교회 신도들의 영성생활에 필수적인 도구 곧 성물(聖物)이 되었다.
복음사가 성 루가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블라디미르의 성모님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그 이콘을 그렸다는데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 수많은 복사본이 전 세계로 퍼져 있다. 그리고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성 바울로의 서간을 연구할 때 자기 책상 앞에 성 사도 바울로의 이콘을 걸어놓고 기도하면서 일했다고 한다.
한편 성화상 공경이 맹목적이 되거나 지나치게 기복적이 되었을 때에는 교회 안에서 문제꺼리가 되기도 했다. 8세기 성화상 논쟁이 그러했고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성화상 공경에 대한 제한이 그러했다. 신앙심이 약한 신도들에게 우상숭배의 위험이 있다하여 성화상(이콘)을 배척파괴하고 심하게 제한하는 일로 인해서 아름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하나님의 참된 성화상인 인간의 심성이 배척당하거나 파괴되거나 소외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러시아 기독교에서 성상은 ‘가장 뛰어난 신학적 표현’으로 존중 받았고 ‘관념을 구체화하지 않고 이미지를 구체화’ 하려는 경향으로 정교회의 신앙고백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성화상(이콘)들은 모두 불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화상(이콘)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의 모습을 마음으로부터 그리거나 바라보는 것이어야 한다. 또 우리 인간의 마음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한다. 숨 쉬고 살아 움직이는 천태만상의 성화상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기를 갈망한다. 이제 곧 때가 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듯 우리도 완전하게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2.4 성서와 전승
신구약 성경의 권위에 있어서는 정교회와 개신교회의 입장이 같다. 그러나 정교회는 성경 본문의 사용에는 희랍어로 되어 있는 70인 역을 가장 권위 있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정교회에서는 기독교인은 항상 성경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정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교회위에 두지 않고 오히려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할 것으로 믿으며 전승과 성경의 권위를 분리하지 않는다.
정교회는 서방교회 못지않게 예배 시간에 성경이 정규적으로 읽혀져 왔다. 매 주일마다 시편을 읽으며 수난 주일에는 일주일에 시편을 두 번 읽는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성경을 많이 읽지 않는다. 매 주일 예배 시간에도 주로 신약성경을 많이 읽는데 그중에서도 요한 계시록을 제외한 복음서를 뽑아 지정해둔 부분들을 규칙적으로 읽는데 일 년에 신약 성경을 한 번씩 읽도록 한다. 기도역식 주님의 기도를 예배시간에 되풀이하고, 부활절에는 매번 성찬식 때 마다 복음서를 읽는다.
정교회는 성경이 말씀의 형태로 전해지는 것을 그리스도의 성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결정된 성상과 복음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며 존중되어야 한다고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교회의 신자들은 복음서를 제단위에 두고 성상을 섬기듯이 복음서에 입 맞추고 허리를 숙여 존경의 태도를 보인다.
전승은 사람들이 서로 상이한 성서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른 신앙을 가지기 위한 인도자로 돕는 역할을 한다. 레렝의 빈센트(Vincent of Lerins)는 “우리는 모든 곳에서 ,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의해서 신봉되어 진 것을 신봉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교회의 공통된 지성, 보편적인 지성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따라서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저술들의 해석 경향은 교회의 전승은 하나의 독립된 사실이 아니며 보완적인 신앙의 자료들도 아니다. 교회의 아해는 성경에 아무 것도 추가할 수 없다. 그러나 전승은 성경의 참된 의미를 드러나게 해주는 인도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전승은 동방정교회의 역사 안에서 성경의 진정한 해석으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5 신화(theosis)
블라디미르 로스끼는 그의 책 「동방교회의 신비신학에 대하여」에서 피조물들의 신화, 즉 테오시스는 나가올 세상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 이후에 충만하게 실현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한 반면에 이 신화시키는 연합은 죽음 이후의 때가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현세에서 이루어져야하며, 지금의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본질을 변화시켜서 영원한 생명에 적합하게 만들어 가야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신화의 의미는 이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으로 고양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역으로 올라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것이 본질적인 신화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품은 부패하고 타락한 본질을 변화시키며 영화(靈化)를 향해서 움직이게 된다. 인간의 영혼이 현재의 둔함에서 벗어나서 빛나는 영성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영혼은 신적인 영혼으로 수련되어서 인간적인 속성을 벗어나서 신적인 실체가 된다. 이것이 신적인 연합을 이루는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어서 우리가 피조 될 때의 형상을 회복하며 그 모습을 따라서 지으신 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간다. 이는 외적인 것에 그치지 않으며, 영원의 본성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은 신의 성품의 생성물이 되며, 원래의 아름다움으로 재형성되며,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신적인 하나님의 양자됨의 과정이다. 시나이의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of Sinai)는 신화를 이렇게 정의한다.
“신화는 우리의 본성이 열등한 것으로 쇠퇴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인간적 성품의 본질적인 변화도 아니다. 그것은 보다 선한 것으로의 고양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계획, 하나님에 의한 엄청난 차원의 자발적인 겸양이다.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은 원래 자신의 본성이 변화됨이 없이 보다 큰 영광으로 고양되어졌던 것이다.”
3. 동방정교회의 영성
3.1 동방정교회의 영성에 대한 고찰
“당신은 스스로 지탱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것들은 당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비록 당신이 믿음을 예증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덕분이다.”
위 글은 크리소스톰이 기록한 것으로 그는 동양의 영지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선행의 은혜에 대한 인정과 중요성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다. 정교회는 이러한 사상을 필두로 그들의 영성생활을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동방 정교회에서 강조되는 것은 영적체험을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그들은 영적체험을 통한 고요함을 경험함으로 인간의 의지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분하고 그것에 상호 작용을 통한 온전한 하나님과의 합일을 이루고자 노력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영적 훈련은 중요한 것이고 그러한 영적 훈련이 바로 그들의 기도생활과 성만찬, 예배에서 기인된 것이다.
3.2 기도
첫 번째 영성의 단계에서 기도에 대해 알아보고 정교회의 영성적 단계에 대해 알아보자. 정교회는 크게 4단계의 영성 단계를 체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삼위일체의 영성, 비움의 영성, 충만의 영성, 부드러운 마음의 영성의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 단계를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의 기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것의 핵심은 바로 헤시카즘(Hesychasm)과 침묵을 통한 마음의 정화이다. 이러한 기도의 훈련을 통하여 이러한 기도에 의한 영성의 단계를 따라가 봄으로 그들의 영성에 대해 보다 심도 있게 알 수 있다.
3.2.1 기도를 통해 느끼는 영성의 4단계
1) 삼위일체의 영성
이 단계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영에 이끌려 예수님 안에 사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성령에 인도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바로 이것이 동방 영성에서 이야기하는 삼위일체 영성이고 이러한 영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삶을 닮아 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2) 비움의 영성 위에 언급한 삼위일체 영성의 핵심은 하나님(Theos), 말씀 (Logos), 영(Spiritus)으로 이러한 신적 합일을 통한 육화는 하나님의 자기 비움의 결과이고, 하나님의 이러한 비움을 통한 사랑을 예수를 통해 표현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함 비움의 영성의 핵심은 겸손에 영성에 의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겸손의 행위는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세족례 - 요한의 복음서 13:14절 “그런데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그것을 자신에게 갚지 말고 서로의 발을 씻기라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서 기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비움의 삶이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이익을 포기하고 이웃에게 조건 없이 예수께 받은 사랑을 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랑의 새 계명 - 요한의 복음서 13:34~35절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계명은 일관성 있는 것으로 우리가 주님에게 받은 사랑을 주님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나누는 겸손과 비움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체성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눔으로 하나되는 단계를 이야기하며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은 비움의 성체를 나눔으로 그분과의 일체적 삶을 상징적으로 느끼는 단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모든 비움의 영성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3) 충만의 영성 비움의 영성을 통하여 그분과 만남으로 느끼는 삶이 바로 충만의 삶이고 이러한 충만의 삶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분을 직관하고 신화(Deificatio)의 삶이 구원과 직결된 삶으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4) 부드러운 마음의 영성 부드러운 마음의 영성은 바로 마음에 침묵과 고요를 통해 얻는 것으로 이것은 헤카시즘에 의해 대표되는 것이다.
3.2.2 정교회의 기도의 힘 (Hesychasm)
헤시카즘이란 그리스어 ‘hesychia’에서 나온 단어로 “고요”, “정적”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헤지카스트는 예수의 기도와 관련된 육체적 기술을 사용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직접적이고 비매개의 하나님 경험이 예수의 기도에 의해 가능하다고 하는 성 그레고리 팔라미스(Saint Gregory Palamae, 1296~1359)의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을 가르킨다. 웨어(Kallistos Ware)는 헤카시즘의 수행자들을 가리켜 이렇게 이야기한다. ‘고요함(hesychia),내적인 정적과 침묵에 이른 사람은 듣는데 뛰어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깊숙한 곳에서 들리는 기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 음성이 자신의 말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다른 분이 말하고 있음을 이해한다.’라고 정의한다. 즉 헤시카즘이란 고요한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기도를 통하여 신학을 내면화하는 법을 말하는 것으로 앞에 언급되었듯 비매개인 하나님의 간접 체험인 예수와의 합일을 이루는 훈련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기도는 헤카시즘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며 침묵을 통한 대월과 관상에 의해 이들은 진정한 신적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1) 예수 기도(the Jesus Prayer)
정교회인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명상하는 가운데 마음을 한곳으로 집중하는 것으로 이러한 기도로 예수기도라는 특별한 기도를 가리킨다. 이러한 기도는 특별한 훈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를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13세기 아토스 산의 수도사인 Nicephorus로 그는 그러한 기도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턱을 가슴에 쉬게 하고 앉아서, 시선은 배꼽을 응시한다. 다음에는 호흡의 리듬을 천천히 내린다. 이렇게 하는 동안 한 번의 기도는 내면적으로 마음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오직 정신과 마음을 연합할 때‘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형식으로 기도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기도의 내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형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구원하소서.’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시대가 지남에 따라 기도문이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지만 이러한 반복 어휘를 통하여 생각과 감정을 하나로 모아 통전적 상태가 되게 하며 하나님과 일치에 이르게 하여 마음에 파편화된 상태를 단일화하고 복합적 상태를 단순화하는 것이 예수 기도의 목표이다. 이러한 예수의 기도는 크게 4가지 의식을 담고 있다. 첫째 예수의 이름에 대한 헌신, 둘째 죄에 대한 날카로운 참회 의식, 셋째 거듭되는 반복훈련의 의미(수동적으로 기도가 계속됨), 넷째 내적인 침묵을 통하여 집중적이고 내면적인 침전 세계로 들어가려는 의식이다. 이러한 훈련을 통해 정교회인은 기도가 심장의 고요함 속에서 암송됨을 느끼고 그들의 숨결 가운데서 예수를 느끼게 됨으로 인간과 신의 합일의 상태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2) 침묵을 통한 마음의 정화 (대월과 관상) 정교회의 침묵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 그분이 아닌 일체의 것, 그것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영적이든 간에 그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벗어나서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안에서 자아가 철저히 무(無)가 되는 행위’를 말한다. 즉 침묵은 마음 안에 분심과 욕심을 극복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침묵의 행위를 통해 정교회는 대월과 관상으로 이르게 된다.
ⓐ대월 대월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다. 대월은 침묵과 동시에 사욕을 없애는 것이다. 무아의 영성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서 시작하는 점성 정신에서 출발해서 침묵으로 마음을 맑게 하여 하나님과 만나는 대월로 완전히 하나님을 닮아가는 면형무아에 이르는 통합적 영성을 말하는 것이다. “침묵이 밤을 몰고 날을 부르면 대월은 빛을 타고 날아가네. 하나님의 신락이 얼마나 좋은지! 대월은 느끼네. 점성에서 보고 침묵에서 꽃을 피우고 대월은 빛으로 날아가네…. 대월은 물 건너 산 넘어 복지로 갔네….침묵이 하나님을 찾으면 대월이 모시고 오네.” 위 글에서 추론되어지듯 무아의 영성은 점성적인 것으로 침묵 대월을 통하여 무아에 단계를 이루고 그러한 무아를 경험함으로 하나님과의 신적 합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관상 관상은 그리스어 ‘Theoria’라는 것으로 이 용어는 ‘Theos’ 즉 하나님과 ‘Horao’라는 ‘보다’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지속적인 집중으로 정의된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5:8절. 관상이라는 것은 말씀으로 창조된 하나님의 세상을 육적인 눈을 통하여 시각적으로 말하는 방법이 아니라 영적으로 바라봄으로 세상에 숨겨진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관상은 마음의 진정한 투명성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명확히 볼 수 있는 사람은 신적 지혜를 인식하고 하나님을 영광스러운 단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팔라미스의 그레고리오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기쁨에 찬 인간은 영원한 정점에 도달 한다…. 천국에 있지 않아도 그는 끊임없이 노래하며 하늘의 힘과 협력한다. 지상에서 그는 천사와 같이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께로 이끈다.”
이러한 단계를 통하여 사람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체험할 수 있게 되는 영적 체험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체험을 통해 얻는 신적합일의 훈련을 통해 정교회는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3.3 정교회 예배
3.3.1 정교회 예배의 특징
첫째, 신적인 아름다움의 강조이다. 많은 사람들이 볼 때에 정교회를 믿는 민족들(특히 비잔티움과 러시아)의 특별한 은사는 영적 세계의 아름다움을 감지하고 그 아름다움을 예배 안에서 표현하는 능력이다.
두 번째로, 정교회인들이 볼 때에 예배는 “지상의 천국”바로 그것이다. 거룩한 성찬예배는 동시에 두 세계를 포용한다. 왜냐하면 지상에서나 천국에서 성찬예배는 동일한 것-하나의 제단, 한 희생제사, 한 임재-이기 때문이다. 예배하는 모든 장소에서, 비록 외적으로는 초라해도 신실한 자들이 성찬을 거행하기 위해 모일 때에 그들은 “하늘의 처소”로 들려 올려 진다. 어느 곳이든 거룩한 희생 제사를 드리는 곳에는 그 지역의 회중이 함께 할 뿐만 아니라 보편 교회 즉 성인들, 천사들, 동정녀 마리아와 그리스도 자신이 임재 하신다. 이 “지상의 천국”이란 통찰에 의해 고취되고 있는 정교회는 천국의 위대한 전례를 외적으로 빛나는 광채와 아름다움을 지닌 성화로 표현하려고 노력해왔다. 612년에 거룩한 지혜의 교회의 직원은 80명의 사제, 150명의 보제, 40명의 여 봉사자, 70명의 부보제, 160명의 봉독자, 25명의 성가대원, 100명의 문지기들로 구성 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블라디미르의 사신들이 참석했던 예배의 웅장함을 알 수 있는 약간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매우 다른 외적 환경에서 정교회의 예배를 경험한 많은 사람들 역시 키에프에서 온 러시아인들 못지않게 사람들 사이에 계시는 하나님 임재를 느꼈었다.
블라디미르의 사신들의 이야기는 정교회의 세 번째 특성을 묘사한다. 참 신앙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던 이 러시아인들은 도덕적 규칙들에 관해 묻지 않고, 합리적 교리적 진술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다만 각 민족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종교에 대한 정교회의 접근은 근본적으로 전례적인 접근, 즉 신적예배라는 맥락 안에서 교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정통주의라는 단어가 올바른 신앙과 올바른 예배를 의미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서로 불가 분리하기 때문이다. 비잔틴 사람들에 관하여 “그들에게 있어서 교리는 성직자들이 이해하여 평신도에게 설명해주는 지적인 체계일 뿐 아니라, 성찬예배를 통해서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위대한 천상의 것들과의 관계 안에서 보여 지는 통찰의 장이다”라고 말해진다. 조지 플로로프스키의 말에 따르면, “기독교는 성찬예배의 종교이다. 교회는 무엇보다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예배가 으뜸이고, 교리와 기독교적 훈련은 두 번째이다.” 정교회는 성찬예배를 통해서 신앙에 접근하기 때문에, 종종 의식의 세밀한 곳에까지 중요한 의미를 둠으로써 서방의 기독교인들을 놀라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교회의 삶에서 예배가 중심이 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러시아 교회의 이교도자들의 분열과 같은 사건을 그런 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예배가 행동하는 신앙이라면, 전례적 변화들은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정교회에서는 인간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 진실로 참된 존재가 되며 예배 안에서 자신의 완전과 자아 성취를 발견하는 성찬 예배적 피조물로 본다. 정교회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의 표현인 거룩한 성찬예배 안에 자신의 모든 종교적 경험을 쏟아 놓는다. 성찬예배는 그들의 시, 예술, 음악에 영감을 주어왔다. 정교회의 성찬예배는 중세 시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결코 학식 있는 자나 성직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적인 것, 즉 전체 기독교인들의 공동 소유로 남아 있었다.
3.3.2 동방정교회 예배자료
이 의식은 원래 '예비 교인들을 위한 기도'가 끝난 후에, 즉 말씀의 전례가 끝나고 성찬 전례가 시작되는 부분에 있었으나 후에 시간 관계상 조과 전(前)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의식은 천상(天上)의 교회와 지상(地上)의 교회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며, 주님의 탄생이 재현된다. 봉헌 의식을 집전하기 전에 사제는 카이로스(kairos) 의식(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때, 시간을 의미)을 하는데, 사전에 준비된 사제(모든 사람과의 화해, 원한을 버리고, 불순한 생각의 제거, 금식 등)는 성소(聖所)밖에서 시작한다.
먼저 '아름다운 문' 앞에서 '하나님이시여!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자세를 낮추는데, 이는 죄인이면서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사제로서의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성령 기도'와 '삼성송', '주의 기도'를 소리 내어 외운 후, 주님께 '무력한 우리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을 간구하는 기도'를, 성모에게 중보로서 '자애의 문을 열어 주실 것'을 간구하며 아름다운 문을 연다. 그런 후, 성상대(聖像臺)의 예수, 성모, 세례자 성 요한, 성당 수호 성인 순서로 기도문을 외우면서 절하고 입을 맞춘다.
다시 아름다운 문 앞에서 도구로 쓰이는 사제에게 힘을 주시고, 정성껏 주님께 대한 봉사를 다해 주의 존엄한 제단 앞에서 단죄 받지 않고, 피 흘림이 없는 제사를 올릴 수 있게 간구하는 기도와 카이로스의 폐식기도를 하며, 이어서 공동 집전자들과 교인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성소 안에 들어가면서 주님의 성소에 두려운 마음으로 들어가 엎드리는 겸손의 자세를 보이는 기도를 드리며 제단 앞에 서서 절하면서 다시 죄인인 집전자에게 자비와 불쌍히 여기심을 주님께 바라는 기도와 입맞춤을 한다. 이 카이로스는 주교와 보제, 혹은 여러 명의 집전자가 있을 경우에는 방법과 형식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내용은 바뀌지 않는다. 카이로스를 마친 집전자는 제의(祭衣)를 입는데, 아무 형식 없이 그냥 입는 것이 아니고, 순서에 의해 축복을 하고(보제는 주교나 사제의 축복으로) 구약의 여러 구절을 외우면서 입는다. 먼저 속옷(스티하리온)은 이사야 61, 10을 외우면서, 영대(에피트라힐리온)는 시133:2, 칼(에삐고나티온)은 시45:4-5, 허리띠는 시18:33, 오른쪽 수대는 출15:6-7, 왼쪽 수대는 시119:73, 겉옷(펠로니온)은 시132:9, 십자가는 입을 맞추며 몸에 걸친다. 그러나 위에서 에삐고나티온과 십자가는 주교로부터 공로 수여가 있어야 패용할 수 있다.
3.3.3 동방교회의 특징(교리와 신앙생활)
동방교회들 중에서 가톨릭과 일치한 교회는 전례와 관습만 다르고 교리는 가톨릭과 같다. 정교회는 교회의 초기 7번의 공의회를 가톨릭과 함께 인정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근본교리인 성삼론과 그리스도론에 대하여 표현이나 설명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몇 가지 교리와 실천 상에 차이가 있다.
- 계시(성서와 성전) : 하느님의 계시는 성서와 성전을 통하여 전달된다고 인정하지만, 러시아 교회는 개신교의 영향을 받아서 구약성서의 제 2정경을 성경이 아니라고 한다. - 성령론 : 콘스탄티노풀의 성령론 해석에 있어서 가톨릭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Filioque) 발하신다고 해석하는데, 정교회는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발하신다고 해석한다. - 성모께 대한 신심 : 성모께 대한 신심은 두터우면서도 성모 무염시태 교리는 배척한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성모는 모태에서 성화되지 않았고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서 성화되었다 한다. -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 :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는 하지만 사후에 보속을 하는 연옥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 동방교회에서도 죄의 사면장을 발행하지만, 죄의 사면으로 벌도 사면된다고 하면서 가톨릭의 은사교리를 배척한다. - 교황의 수위권 : 교황의 명예상 수위권은 인정하나 통치권적 수위권을 배척하고, 교황의 특별 교도권의 무류성을 부인한다. - 신심생활 - 전례 : 미사와 성무일도에 집중되어 있고 대단히 장엄하고 복잡하다. - 세례 : 세례를 받은 자라야 타인에게 세례를 줄 수 있고(실제는 사제와 부제), 긴급한 경우 외에는 세 번 물에 잠그는 침수 식으로 거행한다. - 견진성사 : 견진은 여러 번 받을 수 있다. - 미사 : 반드시 누룩으로 발효시킨 빵을 사용하며, 평신자도 빵과 포도주를 받아서 영성체 한다. 일반 신자들은 성탄축일, 부활축일, 베드로. 바오로 축일, 성모승천축일에 영성체하며, 영성체하기 며칠 전 부터 단식을 하기도 한다. 신심은 깊으나 교리적으로 너무나 무지한 것이 큰 문제이다. - 병자성사 : 건강한 사람도 받을 수 있다. - 혼인 : 양 당사자의 동의로써가 아니고 사제의 축복으로 성사가 된다. - 신품 : 특별한 관면이 없으며 다른 교파의 주교에게서 받은 신품은 무효로 본다. 수도자가 아닌 재속 성직자는 신품받기 전에 결혼할 수 있으며, 1923년 이후로는 홀아비가 된 부제나 신부는 재혼할 수도 있다. - 전례시기 : 예수부활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고, 성탄축일은 1월 6일(공현축일)에 지낸다. - 신심 : 성모와 성인과 그들의 성화공경이 활발하고 순례행사를 즐기며, 수도생활을 매우 높이 존경한다. - 신학과 전례 : 신비주의적인 색체가 농후하며 교회가 각 국민문화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전례와 성서는 일찍부터 각국어로 번역되어 사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국민문학이 발흥하였다. - 성직자 : 성직자는 수도지원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결혼을 하며, 성직은 사도전승에 따라 주교, 사제, 부제 등을 두는 고대의 성직 제도를 고수하고 있다. - 성찬의 전례 : 장엄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색이다. 주로 성 크리소스토모의 전례를 사용하지만 1년 중 10번은 성 바실리오 전례를, 한 번은 성 야곱 전례를 사용한다. - 신심 : 교회 신심생활의 중심은 삼위일체의 예배이고, 여기에 성모와 여러 성인에 대한 공경이 첨가된다.
Ⅲ.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동방정교회의 역사, 신학 그리고 영성에 대해 매우 심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각기 다른 역사적 상황 속에서 기원하여 발전해 온 동방정교회와 개신교는 교회형태와 신학적 기조에 있어서 그리고 교회 일치를 추구하는 방식에 있어서 차이점과 공통점을 나태내고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위와 같은 발견을 통하여 우리는 동방정교회와 개신교의 차이점과 공통점들을 교회들의 사귐과 일치를 방해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보기 보다는, 보다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가능하게 할 긍정적인 모습으로 바라보며 간주해야만 할 것이다. 즉 ‘다양성을 통한 일치’, ‘협의회적 사귐을 통한 일치’로서의 ‘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일치 ’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는 동방정교회의 역사, 신학 그리고 영성에 관해 그리고 더 나아가 문화, 선교, 교회적 삶 등 다른 차원에서까지, 진리의 문제나 진리의 부족으로 인하여서 생기는 문제와 대화방식의 문제나 대화의 부족으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를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동방정교회와 개신교회와의 관계성을 올바로 정립해 나아가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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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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