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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이후 독일 동양연구소와 독일 고고학연구소가 이 유적지를 발굴해왔다. 수메르 대도시의 하나인 이곳은 주변 약 9.6㎞가 벽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신화적인 영웅 길가메시에 의해 축조되었다고 한다. 담 안쪽 지역의 발굴을 통해 BC 5000년경 이전인 우바이드 선사시대로부터 파르티아 시대(BC 126~AD 224)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건설된 도시의 흔적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우루크는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어떤 도시보다 우루크잠다트 나스르 시대(BC 3500경~2900경)로 알려진 시대의 도시생활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전해주고 있다.
고대 우루크에서 숭배된 주요 두수메르 신들은 하늘신인 아누(안)와 여신 이난나(하늘의 여신)였다. 잠다트 나스르 시대에 흰색으로 지붕을 칠한 아누 지구라트(피라미드형 신전) 사원이 도시의 주요건물의 하나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대단한 번영을 상징했다. 이 지구라트는 금·은·구리로 정교하게 만들어졌으며 원통형 인장과 부적들 역시 뛰어난 세밀장식 공법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지구라트인 예안나의 테메노스(신성한 담벽)는 우르 제3대 왕조의 첫번째 왕인 우르 남무(BC 2112~2095 재위)를 포함하여 위세를 떨친 많은 왕들의 관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르 남무는 도시 설계를 위해 많은 기여를 했는데 당시 신수메리아 양식의 부활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다양한 건축술의 발전은 이신라르사 시대(BC 2017경~1763) 및 카시트 시대(BC 1595경~1157경)와 연관이 있다. 카시트 시대 이후 키루스 대왕과 다리우스 대왕을 포함한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조의 통치자들은 특히 예안나 지역에 자신들의 건축활동의 흔적을 남겼다. 이 도시는 고대 지식인 필경사 학파의 마지막 학자들이 설형문자로 씌어진 필사본들을 편집했던(BC 70경) 파르티아 시대까지 계속 번영을 누렸다.
이 지역의 지배적인 언어가 된 수메르어를 사용하는 수메르인들은 아나톨리아 주변으로부터 BC 3300년경 수메르로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BC 3000~2000년경 수메르 지방에는 키시·에레크·우르·시파르·아샤크·라라크·니푸르·아다브·움마·라가시·바드티비라·라르사 등 적어도 12개의 독립된 도시국가들이 있었다. 각 도시국가들은 하나의 성곽도시와 주변의 여러 부락 및 토지로 이루어졌으며, 고유의 신을 섬기는 신전이 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정치 권력은 원래 시민들에게 속했으나 도시국가들 사이의 경쟁이 심해지면서 각 도시국가가 왕정(王政)을 채택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수메르 왕 명부 The Sumerian King List〉에는 노아의 대홍수 이전에 8명의 왕이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홍수 뒤 여러 도시국가와 그 왕조들이 일시적으로 다른 도시국가와 왕조들 위에 군림했다. 분립한 도시국가들을 통일한 최초의 왕은 키시의 통치자 에타나였다(BC 2800경). 그로부터 수백 년 동안 키시·에레크·우르·라가시가 패권을 다투는 바람에 피폐해진 수메르는 외부의 침략을 받아 처음에는 엘람인(BC 2530~2450)에게, 그리고 이어 사르곤 왕(BC 2334~2279 재위)이 이끄는 아카드인에게 정복되었다. 사르곤 왕조는 100년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도시국가들을 통일하고 중동 문명 전체에 영향을 미친 모범적인 정부가 되었다.
바빌론에서 동남쪽으로 약 225㎞, 지금의 유프라테스 강 하류에서 서쪽으로 약 16㎞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고대에는 인접한 유프라테스 강 덕분에 비옥한 관개지였으나 강의 물길이 바뀜에 따라 폐허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대영박물관의 H. R. 홀이 최초로 우르 유적에 대해 본격적으로 발굴을 실시했고 그결과 대영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공동탐사단이 구성되어 1922~34년 레너드 울리의 지도로 발굴이 진행되었다. 이 발굴에서 나온 유물을 통해 우르 역사의 대부분이 밝혀졌으며 메소포타미아 역사에 관한 지식도 매우 풍부해졌다.
우르는 BC 4000년대경 메소포타미아 북부지역에서 이주한 것으로 보이는 정착민이 세웠다. 순동문화 단계에 속한 농경민이었던 이들의 정착생활은 〈창세기〉에 묘사된 것으로 여겨지는 홍수로 인해 그뒤를 이은 '잠다트 나스르'(후기 원시문자시대) 단계의 큰 공동묘지에서는 우루크에서 발굴된 것과 비슷한 귀중한 유물이 발굴되었다(→ 청동기시대).
제3왕조의 유적은 BC 3000년경의 수메르 건축가들이 기둥·아치·볼트·돔 등 건축의 모든 기본 형태를 잘 알고 있었음을 말해주는데 지구라트야말로 그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안쪽으로 기울어진 벽과 그 각도는 면밀히 계산된 연속적인 각 층의 높이와 함께 시선을 안으로 또는 위로 끌게 만든다. 또 계단 경사가 이 효과를 더욱 강조해 거대한 구조 전체의 종교적인 초점이 되는 신전에 눈길이 머물게 된다. 놀랍게도 이 구조물에는 직선이 하나도 없다.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모퉁이에서 모퉁이까지 모든 벽은 볼록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직선이었다면 상부구조의 무게에 눌려 휜 것처럼 보였겠지만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약간 휜 곡선 때문에 매우 튼튼하다는 느낌을 준다. 결국 지구라트 건축가는 뒤에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건축가들이 재발견했던 엔타시스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제3왕조 왕들의 거대한 벽돌 무덤과 그들이 세운 신전은 엘람족에 의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으나, 신전은 제3왕조에 뒤이은 이신 왕조와 라르사 왕조의 왕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우르는 이제 수도는 아니었지만 강과 운하를 통해 페르시아 만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해외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종교적·상업적으로도 여전히 중요했다. 일찍이 아카드의 사르곤 왕 시대에 우르는 간접적으로 인도와 접촉했다(→ 인도사). 제3왕조와 라르사 시대부터 인더스 문명 양식을 보여주는 도장이 우르에서 발견되었으며, 수많은 점토판을 통해서 해외무역 방식이 밝혀졌다. 우르의 '해양왕들'은 수출품을 딜문(바레인)에 있는 중계항으로 운반했으며 이곳에서 동양에서 온 구리제품과 상아를 실었다(→ 엘람, 통상로).
점토판은 많은 부분이 발굴된 우르 시 주택가에서 발견되었다. 라르사 시대와 바빌론 함무라비 시대(아브라함이 우르에 산 것으로 추정되는 BC 18세기경)의 평민의 집은 편리하게 잘 지은 2층 집이었으며, 사생활이 보장되고 기후에 맞는 건축양식으로 가족·노예·손님을 위한 편의시설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몇몇 집에는 가족신 숭배를 위한 일종의 예배소가 있었으며 가족 구성원이 죽으면 그 밑에 묻었다. 국가적인 대신전뿐만 아니라 평민이 믿는 여러 신을 숭배하는 작은 신전도 발굴됨으로써 바빌론의 종교관습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이름없는 가족 신에게 음식물과 제사를 드리는 가정예배소이며 히브리 족장들의 종교와 관계 있는 듯하다(→ 메소포타미아 종교). 우르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신(新)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BC 605~562) 시대에 부흥기를 맞았는데 그는 우르 시를 실질적으로 재건했다. 바빌론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BC 556~539) 역시 이에 못지 않은 업적을 이루어 지구라트의 높이를 7층으로 늘리는 등 지구라트 개조에 힘썼다(→ 칼데아).
BC 2200~500년의 메소포타미아(지금의 이라크)에 있는 주요도시의 특성을 나타내는 종교적 건축 구조물로, 내부를 진흙 벽돌로 채우고 외부를 구운 벽돌로 덮었다. 안에는 방이 없으며 보통 기단은 길이가 각각 50m인 정4각형이거나 세로 40m, 가로 50m의 직4각형이다. 지금까지 약 25개의 지구라트가 발견되었으며 수메르·바빌로니아·아시리아 유적에서 거의 같은 수가 발견되었다. 원상태의 높이만큼 보존되어 있는 지구라트는 하나도 없다. 원래는 밖으로 낸 3개짜리 계단이나 나선형 통로를 통해 올라가도록 했으나 발견된 지구라트 가운데 거의 반수는 올라갈 수 있는 어떤 길도 찾아볼 수 없다. 경사 부분과 테라스를 종종 나무와 관목으로 조경해 바빌론의 공중 정원 같은 구조를 만들었다. 가장 잘 보존된 지구라트는 우르(지금의 탈알무카이야르)에 있는 것이며 가장 큰 것은 엘람의 초가잠빌에 있는 것으로 길이가 각각 102m인 정4각형 기단에 높이는 24m인데 그것도 원래 높이의 반으로 추정된다. 전설상의 바벨탑은 일반적으로 바빌론에 있는 마르두크 대신전 지구라트로 여겨진다.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에서 흘러들어온 것으로 여겨졌으나 이는 아마 잘못된 견해일 것이다. BC 3000년대말의 엘람 자료들에 처음으로 언급되는 이들은 BC 2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해왔다가 함무라비의 아들에게 격퇴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바빌로니아의 북부 국경지대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거주지를 확보했으며 후에 바빌로니아 제2왕조를 창건했다. 이들에 관한 연대기들과 역대왕의 기록들은 정확하지 않다. 카시테 왕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576년 동안 바빌로니아를 지배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들 중 초기 왕들이 바빌로니아 제1왕조의 마지막 왕들과 함께 동시에 바빌로니아를 지배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카시테 제1대 왕인 간다시는 대략 BC 18세기 중반에 통치를 시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바빌론을 통치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카시테 왕들은 소규모 무사 귀족출신이었던 것 같지만 뛰어난 통치자들이었음은 분명하며 관할 지방에서는 백성들의 지지도 받았다. 그들의 수도는 두르쿠리갈주였다. 카시테인들이 신성한 동물로 간주하는 말은 아마 이 시기에 처음으로 바빌로니아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 같다. 당시의 카시테 자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대부분이 니푸르 시 구엔나(지방총독)의 문서보관서에 들어있던 것이며 BC 14, 13세기의 봉건적 정부체제에 관한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
하투실리스 1세의 손자로,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선왕의 정책을 따라 처음에는 북시리아에서 알레포를 파괴하고 마리 시(市)를 함락한 후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아모리 왕조를 멸망시키고 바빌론을 병합했다. 그후부터 히타이트와 바빌론의 역사는 합쳐졌다. 또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후리족과 싸워 많은 전리품과 포로를 얻고 수도 하투사스(지금의 터키 보가즈쾨이)로 돌아왔으나 매부 한틸리스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현대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된 법령으로 꼽히던 현존하는 법전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함무라비 법전).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제외한 자기 왕조의 다른 모든 왕들과 마찬가지로 함무라비는 암나눔 부족에 속하는 아모리족의 명칭을 사용했다. 그의 직계가족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아버지인 신 무발리트와 누이인 일타니, 큰아들이며 후계자인 삼수일루나 등의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BC 1792년 신 무발리트를 계승하여 왕위에 올랐을 때 함무라비는 아직 어린 나이였으나 당시 메소포타미아 왕실의 관계에 따라 왕국을 다스리는 데서 공식적인 직무를 이미 일부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에 바빌로니아 남부 전지역을 통치하던 라르사의 림 신이 바빌론과 라르사의 완충지역으로 기능하던 이신을 정복했다. 이후 림 신은 함무라비의 주된 경쟁자가 되었다.
함무라비는 자신의 정치활동의 중요한 1가지 방향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 그것은 유프라테스 강의 치수사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는 것으로 관개농업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지역 실정에 비추어 중요성을 갖는 일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자연히 유프라테스 강 하류의 불리한 지점에 위치해 있는 라르사 왕국과의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이 정책은 함무라비의 할아버지가 시작한 것이지만 그의 아버지 대에 가장 힘 있게 추진되어 부분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함무라비 자신은 왕위에 오른 직후인 BC 1787년 이 사업에 착수하여 림 신이 지배하는 우루크(에렉)과 이신 등의 도시들을 정복하고 그 다음해 또다시 림 신과 충돌했다. 그러나 함무라비의 연호와 당대의 외교서한에 따르면, 1784년 함무라비가 군사작전의 방향을 서북방과 동방으로 바꿈으로써 이 싸움은 더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이후로는 20년 가까이 중요한 전쟁이 없었던 것 같다. 이 시기는 마리·아슈르·에슈눈나·바빌론·라르사 등 주요왕국들 사이의 동맹관계가 변화를 거듭한 것이 특징이었다. 함무라비는 이러한 불안정한 교착기를 틈타서 북쪽 변경의 몇몇 도시들을 요새화했다(BC 1776~68).
BC 1762년 함무라비는 또다시 동방의 강대국들과 대결했다. 이 싸움이 그의 자위적인 행동이었는지 아니면 세력균형의 변화에 대한 상대국들의 반발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BC 1761년 함무라비가 어떤 동기로 바빌론에서 유프라테스 강 상류 쪽으로 약 400㎞ 지점에 있는 그의 오랜 동맹국인 마리의 왕 짐릴림을 공격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2가지 설명이 가능한데 그것도 역시 치수권(治水權)을 둘러싼 분쟁이라고 보거나, 아니면 함무라비가 고대 근동의 육상무역의 교차로에 자리잡은 마리의 지리적 이점을 탐내어 그곳을 장악하려고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2년 후 함무라비는 3번째로 동방을 향해 출병해야 했다(BC 1757~55). 이 원정에서 또다시 수로를 막는 책략을 써서 에슈눈나를 결국 멸망시킨 것은 득보다 실이 많은 승리로 판명되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바빌로니아 본토와 동방 민족들 사이의 완충지대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그로부터 160년 후 바빌로니아를 점령한 카시트인도 아마 그 동방민족들 중 하나인 것으로 여겨짐). 그때문에 재위 말년의 마지막 2년 동안 함무라비는 방어요새를 구축하는 데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했다. 이무렵 그는 병이 들었으며 BC 1750년 이미 통치를 맡고 있던 그의 아들 삼수일루나에게 짐을 떠넘기고 죽었다. 함무라비의 재위중 거의 모든 생활영역에서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 변화들은 작은 도시국가가 영토를 보유한 대국으로 변모하는 데 따른 새로운 상황들을 안정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의 서한을 보면 그와 같은 변화를 세부적으로 실행에 옮기고 왕국의 일상적인 행정절차를 확립하는 데 그가 몸소 관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친히 개입하는 통치방식은 함무라비뿐만 아니라 다른 동시대 통치자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현대적 의미의 법전 형태는 아니지만 함무라비의 법령은 또한 정의로운 통치자가 되고자 하는 관심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함무라비 법전). 그것은 바로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이 늘 추구해온 이상이었다. 함무라비가 효율적인 관료제도를 확립하지 못했던 것은 그의 직접 나서는 통치방식도 한 원인이겠지만 또한 재위 말년에 전적으로 전쟁에 매달려 있었던 탓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효율적인 행정기구를 갖추지 못한 것은 그의 사후 그가 군사분야에서 이룩한 성과들이 급속히 퇴색하게 된 한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동양에서는 중국 은(殷)나라의 갑골문에 이미 '왕'이라는 글자가 나오나, 명칭으로서의 사용은 전국시대인 BC 4세기말에서 BC 3세기초 무렵 조선후(朝鮮侯)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연(燕)나라를 치려 했던 것이 처음이다. 한국 역사에서는 원시사회가 해체되고 계급분화가 일어나면서 소집단 내에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등장해 정복과 복속을 통하여 각 집단들이 더 큰 정치체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국가가 성립되었다. 넓은 지역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최고 지배자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해갔다. 왕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이전에는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로 그 지위를 표현했다. 고조선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는 말은 제사장을 뜻하는 '단군'과 정치적 지배자를 뜻하는 '왕검'을 합쳐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단군을 무당·하늘을 뜻하는 몽골어인 '탱그리'(tengri)와 연결시키는 견해가 있고, 왕검은 왕의 우리말 훈(訓)인 '임금'과 통하는 것으로 본다. 이후 위만(衛滿)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準王)이 뱃길로 한(韓)나라에 가서 한왕(韓王)을 칭했다는 사실에서 왕이라는 명칭이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은 각기 고유한 언어로 된 왕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주서 周書〉 백제전에 따르면, 백제의 지배층은 왕을 '어라하'(於羅瑕), 왕비를 '어륙'(於陸)이라 불렀고 일반민은 왕을 '건길지'(鞬吉之)라 불렀다고 한다. 이는 부여·고구려 계통으로 남하한 백제의 핵심 지배층과 마한의 토착인들 사이에 약간의 언어차이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의 언어가 비슷했다는 점으로 보아 고구려에서도 왕을 고유한 언어로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건길지를 〈니혼쇼키 日本書紀〉에서는 '코니키시'(Konikisi)라 읽고 있다. '키시'는 '귀인'(貴人)·'수장'(首長)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는 '길사'(吉士 : 吉師)와 통한다. 그리고 '건'(鞬)은 '크다'는 뜻이므로 건길지는 '대왕'의 뜻으로도 풀이된다.
신라는 그들 특유의 고유한 왕호를 사용했다. 경주분지의 사로(斯盧) 소국으로 출발한 이래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마립간(麻立干)의 칭호를 차례로 사용했고, 6세기초 지증왕대에 와서 왕이라는 칭호로 굳어졌다. 거서간은 존장자(尊長者), 차차웅은 무(巫), 마립간은 대수장(大首長)의 뜻을 가진 것으로 신라의 국가성장과 왕권이 확립되어가는 과정이 잘 나타난다. 초기 제사장의 기능을 겸했던 단계에서 벗어나 점차 정치적 지배자로서의 위치를 확보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마립간은 광개토왕릉비·봉평신라비 등의 금석문에서는 '매금'(寐錦)·'매금왕'(寐錦王)이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한편 삼국은 국가체제를 갖추어가면서 국왕의 권위를 강화하여 '대왕'(大王)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고구려의 경우 주변 소국의 왕이 항복해왔을 때 고구려의 왕이 대왕의 위치에서 그를 왕으로 봉하기도 했다. 백제도 국왕 아래 왕·후(侯)·좌현왕(左賢王)·우현왕(右賢王) 등이 있었다. 봉평신라비·영일냉수리신라비에 의하면, 신라도 국왕인 매금왕 외에 왕에 버금가는 자로 갈문왕(葛文王)을 비롯한 다수의 왕들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삼국의 왕명 가운데 고구려의 경우는 장지(葬地)의 지명을 따서 붙이는 경우가 많았으나 시호제(諡號制)의 시행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장수왕이 죽자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가 '강'(康)이라는 시호를 내린 사실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동성왕이 죽은 이후부터 시호를 사용하고 있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구려의 경우에는 제6대 태조왕이 있고, 후대에 주몽(朱蒙)을 태조로 칭한 사례가 있다. 신라에는 〈진흥왕순수비〉·〈문무왕릉비〉에 '태조'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는 김씨집단에서 처음 왕위에 오른 미추이사금을 추존하여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므로 문무왕이 즉위하면서 자신의 부왕인 김춘추에게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라는 중국식 묘호를 올려 당나라와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통일 이후 이러한 묘호제는 지속되지 못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국왕의 묘호를 사용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다. 중국식 묘호제에 의하면 창업지주(創業之主)나 두드러진 공이 있는 경우에는 '조'(祖), 수성지군(守成之君)으로 덕이 있을 경우에는 '종'(宗)을 붙였다. 고려시대에는 이 원칙에 따라 왕건에게 태조 신성대왕(神聖大王)이라는 묘호를 붙인 이후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생전에는 국왕이 스스로를 짐(朕), 후계자를 태자라고 했고, 국왕의 명령을 조(詔), 신하가 임금을 부를 때는 폐하라고 부르는 등 중국과 대등한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몽골간섭기 이후에는 단순히 '모모왕'(某某王)으로 격을 낮춘 시호만 사용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와 같이 묘호와 시호를 사용했으나 국왕 자신을 가리키는 용어로는 격을 낮추어 고(孤)를 사용했고, 국왕의 명령은 교(敎), 신하들이 임금을 부를 때에는 전하(殿下), 후계자는 세자(世子)로 불렀다. 그리고 창업지주는 아니지만 국가적 위기를 넘긴 왕이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경우에는 '조'를 사용하기도 했다. 세조·선조·인조·영조·정조 등이 그런 경우인데 이 가운데 영조와 정조는 처음에 '종'이라 했다가 뒤에 영조·정조로 추존했다. 또 악덕과 부도덕으로 군주의 자격을 박탈당해 폐위된 왕은 격을 낮추어 '군'(君)이라고 했는데 연산군·광해군의 경우가 이에 속한다. 단종도 도중에 폐위되었으므로 처음에는 노산군(魯山君)이라고 했으나 숙종대에 와서 추존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죽은 직후부터 재위 연간의 연대기를 편찬했는데 '군'의 경우에는 '일기'(日記)라고 했고, 나머지는 '실록'(實錄)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