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경외
DVD가 대세인 요즘은 좀처럼 비디오를 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TV채널도 다양하고 어디서나 맘만 먹으면 구할 수 있는 영화파일들이 널려있어서 영화를 보기 위해 굳이 비디오 대여점을 찾을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시간 때우기 안성맞춤인 것이 비디오였고, 덕분에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법비디오들을 시청함에 따라 비행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라고 시작하는 홍보 문구와 영상이 참 친숙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라는 주제를 놓고 오랫동안 씨름하던 차에 불현듯 스치는 것이 생뚱맞게 호랑이 만화로 시작하는 그 경고 문구였습니다.
어디 두려움이 어린이들만 갖는 감정이겠습니까? 어른들을 위협하는 다양한 두려움도 많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는 많은 사건들과 사고, 그리고 유한한 인간 존재가 떠안고 살아가는 많은 문제들, 이를테면 천재지변, 소외, 고통, 병, 죽음, 파산, 실패 등등 수많은 요인들이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두려움과 공포를 안겨줍니다. 이런 두려움은 그지 반가운 감정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읽다보면, 특히 지혜문학서들은 하느님을 두려움의 첫 자리에 놓을 것을 권고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두려워해야할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지난 과거와 현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지혜’라는 화두를 풀기 위해 노력했던 이스라엘의 현자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증언하는 지혜에 대한 결론이 하필이면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이 언뜻 이해하기 쉽지만은 않습니다. 자애와 선, 아름다움, 기쁨과 희망 등 긍정적인 감정이랄 수 있는 단어들이 아니라 두려움이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왜일까? 또 왜 하느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소개하고 그것을 참 삶의 길이라고 피력하는 것일까요?
전율시키는 그러나 매혹적인 신비
일반적으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대상과 마주선 인간은 등을 돌리고 그 상황을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전율시키는’ 분으로 만나는 인간은 정반대로 그 상황을 벗어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의 원인 속으로 빨려듭니다. 1917년 R. 오토라는 종교학자는 이를 가리켜 두렵고 매혹적인 신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s)라고 정리했는데, M. 엘리아데는 자신의 저서 「성과 속」(1957)의 서문에서 오토의 연구를 가리켜 “경외와 비합리적인 경험의 특징을 발견해 내려는 고심”이라고 정의합니다. 성경의 대표적인 신체험 이야기들은 이런 이론을 뒷받침 해줍니다. 베텔의 야곱, 하카르, 호렙산의 모세, 엘리야나 이사야, 에제키엘 같은 예언자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과 자신 사이를 갈라놓는 존재론적 차이에 몸서리칩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체험한 그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누구인가,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구약의 지혜문학서들은 이러한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인식과 깨달음,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길의 정점에서 만나게 되는 최고의 지혜를 ‘하느님을 두려워함’이라 표현하게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당신의 회칙 「신앙과 이성」에서 다음과 같이 이 여정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역사적 반성을 통해서 이성에게 그 신비에 이르는 통로를 열어 보여 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계시를 가지고, 이성으로써 도달해 보려고 헛되이 추구하던 모든 것의 깊이를 측량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더욱 깊은 형태의 지식에 바탕을 두어, 선민(選民) 이스라엘은, 만일 이성이 그 자신에게 충분히 진실하다면, 마땅히 기본적인 특정 규칙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규칙은, 인간 인식이 끝을 모르는 하나의 여정이라는 사실을 이성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 규칙은 그런 길이 모든 것이 개인적 정복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자의 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으로부터 흘러나오며, 세 번째 규칙은, 이성이 세상 통치 속에서 그분의 초월적 주권과 섭리적 사랑을 마땅히 인정해야 하는 ‘하느님 두려움(timor Dei)’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규칙들을 포기할 때 인간 존재자는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고 결국 ‘어리석은 자’의 처지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이 어리석음이 바로 인생에 대한 커다란 위협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들에 시선을 맞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도 모르고(잠언 1,7 참조), 자기 자신이나 주변 세계에 대하여 올바른 태도를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느님은 없다.”(시편 13,1 참조)고 주장할 때, 그의 지식이 얼마나 빈약하며 또 사태의 충만한 진실, 그 기원, 그 운명 등으로부터 그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과 이성, 18항)
벤 시라의 고백
벤 시라 역시 주님을 경외함에서 지혜를 찾습니다. 그의 손자는 그가 ‘울법과 예언서와 다른 선조들의 글을 읽는 일에 오랫동안 전념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머릿말 참조). 즉, 성경 공부에 몰두했던 벤 시라가 주님을 경외함은 “지혜의 시작”(1,14), “지혜의 화관”(1,18)으로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1,12.18)임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벤 시라의 고백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그가 단순히 책상머리에서 읽었던 하느님의 말씀들을 아무런 반성 없이 뇌까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위기에 까지 몰렸던 멸망과 곤경의 날로 점철된 자신의 생애를 돌이켜보면서 그러한 가르침을 실증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51장의 벤 시라의 기도 참조). 마지막으로 그가 자연 현상들을 탐구한 결과를 정리한 단락을 마감하면서 내놓는 결론을 들어봅시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말로 이야기해도 미치지 못하니 “그분은 전부이시다.” 할 수밖에 없다. 무슨 힘으로 그분께 영광을 드릴 수 있을까? 사실 그분께서는 그분의 모든 업적보다 위대하시다. 주님은 두려우시고 매우 위대하신 분이시며 그분의 권능은 놀랍다.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그분을 높이 받들어라 아무리 높이 받들어도 그분께서는 그보다 더 높으시다. 그분을 높이 받들 때 네 온 힘을 다하고 지치지 마라. 아무리 찬미하여도 결코 다하지 못한다. 누가 그분을 뵙고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으며 누가 그분께 맞갖은 찬양을 드릴 수 있겠느냐? 이러한 것들보다 큰 일들이 많이 숨겨져 있으니 우리는 그분의 업적 가운데 조금만을 보았을 뿐이다. 정녕 주님께서 만물을 만드셨고 경건한 이들에게 지혜를 주셨다." (43,2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