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에 8명의 정승과 7명의 대제학과 청백리 6명, 문과급제자 250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연안이씨를 중흥시킨 사람은 연성부원군 이석형(李石亨)이다. 세종 때 문과에 장원하고 성종 때까지 무려 6대를 섬긴 명신이며 훈구파로서 정인지와 고려사와 치평요람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의 현손에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와 6세손 이귀(李貴)가 있어 연안이씨 가문을 명문의 위치로 올려 놓았다.
월사 이정구는 우리 역사상 한문학 대가로 손꼽는 학자로서 신흠(申欽),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함께 조선중기 4대문장가로일컬어진다.
월정 윤근수(月汀 尹根壽)의 문인인 그는 선조 때 대제학을 지냈고 인조 때 우의정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백주 이명한(白洲 李明漢)도 인조 때 이조판서. 대제학에 올랐으며 이명한의 맏아들 청호 이일상(靑湖 李一相)이 효종 때 대제학에 올라 3세에 이은 문형을 배출하였다.
연안이씨의 유래와 가문의 번영 과정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라는 홈페이지에서 우리 연안이씨에 대해 소개한 글입니다.
사실 연안이씨 홈페이지를 찾게 된것도 이 사이트의 힘이 컸습니다.
아무쪼록 보시고 우리 연안이씨가 어떻게 조선 최고의 명문이 되었는지 간략하게마나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같아서 올립니다.
연안이씨 가족분들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유래]
시조는 당나라의 장수 이무(李茂)이다.
그는 신라가 백제를 평정하던 서기 660년(신라 무열왕 7년) 나당 연합군의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따라온 중랑장(中郞將)이었다.
이무는 전쟁이 끝난 후 신라에 귀화 하였으며 이에 조정에서는 통일신라에 기여한 그의 무공을 높이사 연안백(延安伯)으로 봉한다(후에 연안후로 가봉됨). 그러나 신라시대의 선조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아 각파의 중시조를 1세조로하고 있다.
후손들이 시조가 식읍으로 하사 받은 연안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번영]
고려시대에 태자첨사 이습홍(李襲洪), 판소부감(判少府監) 이현여(李賢呂),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이지(李漬), 대장군(大將軍) 이송(李松) 등은 연안이씨의 맥을 이어온 4대 산맥이다. 이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오늘날 연안이씨의 주류를 이룬다.
조선시대에 와서 총 250명의 문과 급제자와 상신(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8명, 대제학 8명, 청백리 7명을 배출해 조선의 명문으로서 위세를 떨쳤다.
영조와 순조 때에 부자 대제학, 3대 대제학을 배출하여 명성을 날리고 그와 함께 8정문(旌門)을 자랑한다.
효자 이지남(李至男)에서 부터 아들, 손자, 며느리 8명이 효부, 열녀로 정문을 받아 8정문 집안이 되었다.
이호민(李好閔)은 연안이씨가 자랑하는 외교의 명수.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이조좌랑(吏曺佐郞)으로 명나라의 구원병을 끌어들이는데 공을 세웠으며 그 후 부제학(副提學)에 올라 대명외교문서를 도맡아 기초하는 등 탁월한 외교 솜씨를 발휘했다. 전란이 끝난 후 대제학, 예조판서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이귀(李貴)는 학자의 가문인 연안이씨의 번영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하여 명실공히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이었다. 선조 36년 문과에 급제, 평산부사로 있다가 광해군의 폭정을 개탄하고 사직했다. 1623년 반정을 주동하여 인조를 옹립하여 이공으로 대사헌, 좌찬성에 오르고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4대 최고문형 가문, 연안이씨/조선 최대 도학,문장가 가문!
한국명문 (2004-11-01 오전 7:30:38) Hit : 193 Vote : 23
4대 최고문형 가문, 연안이씨,조선 최대 도학,문장가 가문!
--3대 대제학----
일찍이 그의 아버지 애호군 회림이 아들이 없어 삼각산 산신에게 기도하여 잉태하였다. 그 아버지가 금성
에서 숙직을 할 때 흰 용이 바위를 쪼개고 나오는 꿈을 꿨다.
이 아이는 태어날 때 푸른 색 보자기 같은 태를 뒤집어 쓰고 나왔다. 그것을 헤쳐보니 살색은 검고 얼굴에
는 거북이 모양의 검은 점이 있었다. 또한 온몸에 털이 나 있으며 기골이 장대한 지라 어머니가 기겁을 하
면서 아기를 버리려 했다. 애호군은 오히려 기뻐하며 "신기한 아이구료. 필경 하늘의 깊은 뜻이 있을 터이
니 잘 키웁시다." 라며 만류했다.
보통 집안이면 이런 조그마한 일로 인해서도 스스로 비관하며 자학하다 어이 없이 불행을 자초하기도 한
다. 이 집은 벌써부터 뭔가 남다른 면이 감지 되고 있다. 여기서, 이 집이 일시의 변고에 당황하지 않고 어
떤 불운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이 명문 탄생을 알리는 징후의 하
나가 된다.
이 아이 이름을 석형이라 하였다. 그는 김반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1441년 생원 진사와 문과 초시에 모두
장원하였고, 다음해 잇달아 삼장에 장원하였다. 그 뒤 정언을 지내고, 이듬해부터 집현전 학사로 24년을 봉
직했다. 성삼문, 박팽년과도 친했다. 1456년 사육신의 의로운 행의를 은연 중에 칭송하는 시를 지어 익산
동헌에 남겼다. 이일로 처벌을 받을 뻔했다. 그뒤 한성부윤,·호조 참판,·판한성부사 등을 지낸 후 지중추부
사를 거쳐 숭록대부에 올라 1471년 좌리공신 4등으로 연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일찌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했으며, 집현전 학사로 문명을 떨쳤다. 만년에는 정자[계일정]를 지어 놓고
시문을 읊으며 여생을 보냈다.
여기서 시문을 읽고 문장 짓는 재주가 시작되었으며, 석형의 현손 대에 이르러 그 재주가 크게 드러났다.
석형의 현손이 월사 정구이다. 조선 제1의 문장가 가문의 파조가 탄생했다. 그는 6세 때 이미 글을 깨우쳐
신동으로 일컬어졌고, 윤근수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1590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행재소에 가서 설서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경략 송응창의 요청으로 황 신 등과 함께 뽑혀서「경서」
를 강의하여 학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인조 초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
르렀다. 문장에 능했던 그는 외교에도 재치와 수완이 뛰어나 여러 차례에 걸쳐 사신으로 중국을 다녀왔으
며, 명나라 문사들의 청에 의해 1백 여 장의 기행문을 모은 [조천기행록]을 간행하여 문명을 떨쳤다. 문장
으로 신흠, 장유, 이식 등과 함께 조선중기의 4대 문장가로 일컬어졌다.
그의 아들 명한은 인격과 시재,·효행의 삼절로 불리웠다. 10세 때 [월교교]란 시를 지어 오봉 이호민과
오산 차천로의 칭송을 받았다. 그 [월교교]는 아래와 같다.
"흰 달빛이 산창에 비추니, 돌로 지은 누각이 가을의 생각을 깊게 하네, 명아주 대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긴 파람하는데, 사람의 그림자 사립문에 비쳐있네."
위의 시문 등을 병자호란 때 잃어버렸다. 어떤 군사가 물가에서 주었다가 10년 뒤에 돌려 주어 그것으로
문집 9권을 만들었다.
그는 효행도 뛰어났다. 병자호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에 들어 갔다. 청나라 군사가 입성하였다. 오랑
캐를 피하기 위해 길 곁 흙집 속에 어머니를 모셔 놓고 그는 문 앞에 누워서 몸으로 가리고 있었다. 청나라
군사가 활줄을 당겨 죽이려다가 흙집 안에 노모가 있는 것을 보고 그 효행에 감동하여 그낭 돌아갔다.
그는 여러 벼슬을 거쳐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시와 글씨에 뛰어났다. 병자
호란 때 척화파로 심양까지 잡혀가 의분을 노래한 시조 6수가 전한다.
이일상은 명한의 아들이다. 1628년 17세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633년 설서가 되고, 검열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 정언으로 화의를 반대했다. 이듬해 척화 죄인으로 절도에 유배되었다. 그 후 풀려나와
청요직을 역임, 1654년 진하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7년 부제학으로 실록수정청 당상이 되어 「선조
수정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이어 양관 대제학에 올랐으며, 1659년 효종이 죽자 빈전도감 당상에 차출되어
영릉지장의 애책문을 지었다.
그 후 우참찬, 한성부 판윤, 지의금부사,·호조판서, 예조판서 등 요직을 지냈다.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시
호는 문숙이다. 조부 월사 정구, 아버지 명한과 더불어 [삼대 대제학]의 기록을 세웠다.
-----부자 대제학-----------
이복원은 1754년 문과하여 승지,대사간,예조의 참판 등을 지냈다. 1772년 대제학으로 현종의 상호를 지어
바쳐 영조로부터 호피를 하사받았다. 영조가 죽은 뒤 찬집청 당상으로 영조의 행장,시장을 찬술하는 일을
주관하며 영조의 시책문을 지어 받쳤다. 명의록 찬집당상, 병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정조가 처음 만든 규장
각에서 제학을 맡아 정조의 문화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1780년 이조판서가 되고 형조판서로 옮겼다가 우의
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종부시에서 간행한 [선원계보기략팔고조도]의 발문을 썼다. 문장이 뛰어나 임금의
말씀이나 명령을 도맡아 썼다. 경학에 밝아 원자보양관, 세자부 등의 직책을 맡았다. 외교관으로 언사가 훌
륭하여 심양문안사로 혹은 사은사로 중국을 두어 차례 다녀왔다. 검소한 재상으로 정성이 지극하고 언행
이 독실하여 유가의 모범 상신으로 추앙되었다.
이만수는 복원의 아들이다. 1789년 문과하여 도당록에 오르고 1795년 대사성 겸 규장각 제학을 지냈다. 새
로운 활자를 개발하기 위하여 [정리자]를 만드는 일을 감독하면서 정조가 추진하는 서적 간행 등의 각종
문화 사업에 공헌했다. 1800년 예조판서, 검교직제학, 이조판서 등을 거쳐 이듬해 대제학 형조와 병조, 예
조의 판서 등을 지냈다. 부자 대제학의 기록을 세웠다.
----기타 도학 문장가------------
3소의 칭, 문장가 이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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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한은 좌의정 정구의 아들이다. 1612년 15세로 진사가 되고, 1621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인조반정 후 정자,·정언, 교리를 지냈다. 1626년 다시 문과중시에 급제, 헌납·응교를 거쳐 승지
에 올랐다. 1632년 인조의 사친 추숭을 반대하여 충원현감으로 좌천, 이어 사직했다가 다시 등용되어 병조
참지,·예조참의,·진주 목사를 역임했다. 1643년 왕세자가 심양에 볼모로 갈 때 우부빈객으로 호종, 돌아와
서 승지를 거쳐 형조참판 겸 비변사 당상에 이르렀다. 어려서 신동으로 불리었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
나 아버지, 형 명한과 함께 송나라의 삼소[순·식·철]와 비교되었다
월사 가문의 대학자 이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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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상은 좌의정 정구의 손자이며,명한의 아들이고 농암 김창협의 장인이다. 단상은 인조 때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1655년에 사가독서를 했으며 인천부사를 지냈다. 그뒤 청풍부사를 거쳐 응교가 되었다. 그의 학
문과 덕행이 뛰어나 송준길,조복양 등이 천거하여 경연관에 임몀되었으나 사양했다. 1669년 부제학으로 서
연관을 겸했다. 양주에서 학문 연구에 힘썼다. [대학집람] [사례비요] [성현통기] 등의 명저를 남겼다. 문
하에서 아들인 이희조와 김창협, 임영 등의 쟁쟁한 학자가 배출되었다. 이조참판 겸 양관제학에 추증, 양
주의 석실서원, 인천의 학산서원에 제향 되었다.
연안이씨 월사 조손 3대 8문장의 일인 이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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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상은 소한의 아들이다. 유상은 조부 정구, 백부 명한, 가친 소한, 4촌 일상, 단상, 은상, 유상, 익상과
더불어 모두 문장에 뛰어나 월사 조손 3대 8문장이라 일컬을 만하다. 7인은 이미 위에서 문장의 탁월함을
말했다.
유상은 1642년 사마시를 거쳐1660년 문과에 급제, 1663년 부교리가 되고, 응교·예조좌랑·헌납을 역임했다.
시문을 잘 했으며, 특히 초서에 뛰어나 4촌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연안이씨 월사 가문, 3대 문장가의 일인 이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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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 명한, 천보는 연안이씨 월사 가문이 자랑하는 3대 문장가이다. 위 언급에서 빠진 이천보는 1739년
문과하여 1740년 정자, 교리 등을 거쳐 이조판서를 지내고 1752년 우의정, 1761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일찍
부터 시문에 능해 당대에 명성을 크게 떨쳤다.
대제학 이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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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3대 대제학과 부자 대제학 이외 대제학 이정보가 있다. 그는 1732년 문과하여 1742년 승지,부제학, 대
사성 등을 거쳐 1755년 예조판서, 1756년 공조판서 겸 홍문관과 예문관의 제학,1758년 이조판서, 세손사
부, 1763년 예조판서, 대제학을 지냈다. 상소문을 잘 썼으며, 사륙문에 뛰어나고,시조 또한 훌륭하였다. 작
품으로 시조 75수가 전해온다.
시문에 능한 좌의정 이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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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이천보의 손자이며,판서 문원의 아들이고, 이조판서 심수의 외손이다. 1794년 문과하여 1800년 겸
실록기사관, 홍문관 수찬, 1802년 규장각 직각,1809년 부제학, 1810년 규장각직각, 1819년 이조판서, 1821
년 예조판서, 1823년 예문관 제학,1827년 우의정, 1829년 좌의정을 지냈다. 시문에 능했다.
수복 겸한 문장 이철보, 경사에 밝은 이직보, 상소문에 뛰어난 이약우 3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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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보[이조판서]는 동생 길보[공조판서]와 함께 기로소에 들어가고, 아들 복원과 손자 시수가 모두 기로
소에 들어 조선시대 최초 3대 입기로소의 영광을 안았다. 여기에다 형제 판서, 형제 문장의 영광을 더했다.
이직보는 김양행의 문인이다. 1784년 유일로 천거되어 동몽교관을 지내고 다시 의정부와 이조의 천거로
경연관이 되었다. 세자시강원 우유선, 도승지를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다. 1806년 선성을 추모하는 의식인
석전의 제향을 주관했다. 1811년 서연의 우유선으로 태자를 가르쳤다. 사서삼경에 정통하고 성리학에 밝
아 사림의 중망을 받았다
이약우는 편집당상으로 [삼조보감] 편찬에 참여했다. 이조판서를 지냈다. 문장에 능하고 특히 상소문에
뛰어나 명성이 높았다. 역학 산수에도 정통했다.
문장에 능한 이희조와 이우신 양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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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조는 송시열의 문인이다. 1680년(숙종 6) 유일로 천거되어 건원릉 참봉이 되었으나 사퇴, 그 뒤 별검
을 지내고 공조좌랑을 거쳐 진천현감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694년 이후 인천 현감,·동궁서연관,·지평,
·천안군수,·장악원정 등을 역임했다. 이어 해주목사가 되어 석담에 있는 이이의 유적을 찾고 요금정을 세웠
다. 1717년 대사헌, 이듬해 이조참판을 거쳐 찬선,·좨주를 지냈다. 1721년 신임사화로 김창집 등 노론 4대신
이 유배당할 때 영암에 유배되었다. 후진교육에 힘쓰는 한편 많은 저서를 남겼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인천의 학산서원, 평강의 산앙재영당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이다.
이우신은 이희조의 문인이다. 1714년 정읍현감으로 여씨향약을 시행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였다. 1718
년 인제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이에 김창흡이 칭송하는 글을 지어 보냈다. 1725년 의성현감으로 굶주리
는 백성을 잘 돌보았으며 1731 말의 병을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 글을 지어 말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인력을
길렀다. 1736년 한성우윤, 부총관 등을 지내고 호조참판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했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특
히 변려문에 능해 그의 문장이 아주 화려했다.
호당 출신 학자 이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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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사 후손으로 호당에 든 이가 명한, 소한, 단상, 은상이다. 이 4명은 위에서 이미 거론되었으므로 여기 이
해조를 추가한다. 그는 정구의 증손이며, 일상의 아들이다. 1689년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있다가 1702년 전주판관으로 알성문과에 급제, 사가독서했다. 그뒤 정언, 부교리,·집의, 부제학을 역임하
고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호당 출신 학자 답게 시문을 잘 해서 김창흡으로부터 천재라는 격찬을 받
은 바 있다.
제학 출신 학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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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판서 이은상[양관제학], 이조판서 이익상[부제학,제학], 이조판서 이시원[규장각 직제학, 홍문관 부
제학,예문관 제학], 이조판서 이조원[홍문관 제학,예문관 제학], 이조판서 이학수[홍문관 제학] 등 5인은
제학 출신 학자군이다. 이들은 경학에 밝고 문장에 뛰어나 문형의 버금 가는 자리에 앉아 경서나 사적의 관
리, 문한의 처리, 왕의 자문에 응하는 제반 업무를 잘 처리했다.
예조판서 학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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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보,이조원,이문원,이풍익,이세재,이교익
경사에 정통한 기타 학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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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참판-----이면우, 경사 두루 섭렵,역사에 정통
예조참판-----이명재, 경전은 물론 제자백가서에 박통
금성현령-----이영보, 경사에 정통 장소노불에까지 두루섭렵 시문에 뛰어남
청양현감-----이연익, 경사와 제자백가서 탐구
장흥고 봉사--이문수, 경학이 뛰어남
-------------이건우, 경사를 깊이 연구, 제자백가서 두루 섭럽
오늘날 한국은 학문을 사랑하는 열기가 500전 월사 가문처럼 뜨겁다. 세계적으로 소문난 한국의 교육열이
바로 이런 가문이라는 모체에서 담금질된 호학의 기풍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월사 이정구 가문의 교육 형질은 한국인의 원형질을 대표한다. 월사 가문의 형질은 한국인의 원형질을
잘 드러내고 있다.
유가를 바탕으로 하는 원형질에다가 새 시대가 요구하는 다양한 색깔을 입힘으로써 한국인의 유전적 특징
을 아주 다채롭게 하였다. 야구의 박찬호,골프의 박세리,피아노의 정경화 형제 등 우리의 건아와 낭자들
이 세계 여러 분야에서 우뚝하게 선 모습, 줄기 세포를 연구하여 온 세계 과학자들의 눈을 황홀하게 한 교
수 황우석의 눈부신 모습, 월드컵 4강에 오른 모습, 세계 12대 경제 대국에 진입한 모습, 이것들은 옛날 가
문의 교육 형질을 진화시킨 오늘날 우리의 다양한 모습 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