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의 개항은 공식적으로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후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에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곧이어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 잇달아 외교관계를 맺었다. 쇄국정책을 고집하던 조선 정부가 개항을 하게 된 배경에는 자율적인 면과 타율적인 면이 동시에 작용하였다.
자율적인 배경으로는 통상개화론을 들 수 있다. 통상개화론이란 비록 조선사회가 문호개방을 위한 내적 준비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서구열강의 군사적 침략을 피하기 위해서는 개항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통상개화론의 중심인물들은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으로서 이 중 박지원의 후손인 박규수는 북학파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중인 출신인 오경석과 유홍기 등은 일찍부터 청을 통해 서양문물을 접하였다. 이들은 강력한 쇄국주의자였던 대원군의 실권을 계기로 열강의 군사적 침략을 막기 위한 개항의 불가피성을 주장하여 문호개방의 여건을 마련하였다. 다음은 박규수가 주장한 개항불가피론이다. ******************************************************************************
<사료탐구> 박규수의 통상개화론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합하(고종)께서 깊이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일본이 바야흐로 서양과 더불어 한데 합친다는 점과 이 서계(문호개방을 요구한 일본의 외교문서)를 받는 것은 곧 약점을 보인다는 점이며, 소생이 깊이 걱정함은 또한 왜양(倭洋:일본과 서양)의 합침에 있어 우리가 틈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점과 또한 서계를 받지 않으면 약점을 보이게 된다는 점입니다. 진실로 이와 같으니 서계를 받지 않는 것이 과연 강점을 보이는 것이 되겠습니까, 약점을 보이는 것이 되겠습니까? 강약은 서계를 받고 안 받고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구실을 잡아서 군사력을 동원하는 명분으로 잡기에 족할 따름입니다. 무릇 강약의 세(勢)는 단지 사리의 옳고 그름에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의 처사가 남을 대접함에 예가 있고 이치가 옳으면 비록 약하더라도 반드시 강해지고 우리의 처사가 남을 대접함에 예가 없고 이치가 그르면 비록 강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약해집니다. <박규수 전집> ---------------------------------------------------------------------------- 윗 글에서 서계란 일본이 조선에 문호개방을 요구한 외교문서인데 당시 조선정부에서는 이 서계의 수리 여부를 놓고 찬반 양론이 전개되었다. 먼저 척사파 유생들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론을 전개하였다. 하나는 일본은 이미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서양과 같은 오랑캐 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일본과 통상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본이 보낸 서계의 형식이 종래의 조·일 외교 관행을 벗어났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박규수 등 통상개화론자들은 윗글의 내용과 같이 그들의 군사적 침략 구실을 만들어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타율적인 배경으로는 일본의 압력을 들 수 있다. 일본은 1851년 미국과 불평등 조약(가나가와 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한 이후 1868년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여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였다. 그 후 일본은 급속한 자본주의화를 달성하기 위해 해외로 진출을 시도하였으며 그 발판을 만들기 위해 조선의 문호개방을 강요하였다. 일본이 고의적으로 일으킨 운요 호 사건(1875년)은 조선의 문호를 강제로 개방시키기 위한 구실이었다. 결국 조선은 강화도조약(1876년)을 체결하여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다음은 일본 외무성이 일본 국왕에게 올린 건의문 및 운요 호 사건에 대한 그들의 보고서로서 이 사건을 일으킨 일본의 속셈을 잘 말해준다. ----------------------------------------------------------------------------
<사료탐구> 운요 호 사건의 배경 지금 그 나라(조선)는 내분 중이며 쇄국 세력이 아직 강해지지 않은 틈을 타 힘을 덜 들이고 일을 쉽게 이루려면 우리 군함 2척을 파견하여 대마도와 그 나라 사이의 바다에 보내어 해로를 측량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우리 편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한편, 또한 조선 조정에 우리측 교섭 담당자인 이사가 일을 지연시키는 데 대한 문책과 독촉의 뜻을 보여 그들을 핍박케 함으로써 일을 순조롭게 이루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 국력을 그들에게 행사하는 것은 오직 이 때가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삼가 상신하는 바 속히 영단을 내리시어 간절한 원을 이루도록 바라나이다. --明治 8年 4月 外務省6等出仕 廣津弘位 頓首 再拜
조선 강화도에 20일에 도착, 보트에서 내려 음료수를 찾고 있는데 포대에서 대포와 소총을 마구 쏘아 댔다. 무엇 때문에 포격하는 것인지 묻고 싶어도 그들의 포격이 너무 치열한 고로 부득이 우리 군함에서도 포격 응사하였고 상륙하여 그들의 대포 38개와 그 밖의 소총 등 다수를 노획하고 철수하였다. <대일본외교문서> ---------------------------------------------------------------------------- 사료 앞부분에서 일본이 운요 호 사건을 일으킨 속셈이 문호 개방에 있음과 일본이 애초 목표로 했던 작전 지역이 부산 근처('대마도와 그 나라 사이의 바다에 보내어'라는 문구를 통해)였음을 알 수 있으며 사료 뒷부분에서는 운요 호 사건이 마치 조선이 아무런 잘못이 없는 일본 배를 선제 공격해서 발생했던 것처럼 꾸미려 한 일본의 속셈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