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8. 목요일. 저녁 7시. 한남동 스트라디움. 목요일 음악감상회
태생부터 지금껏 그녀는 솔로였다. 그녀에게 결혼은 애초부터 현실 그 자체였다. 로멘스는 바이런같은...19세기의 대단히 음험한 문학적 사기꾼들이 만든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가정의 행복」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통해 이 점에대해 분명히 외쳐대고 있었다.
그녀야말로 톨스토이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일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지켜본, 신뢰할만한 목격자이자 참을성 있는 관객이였다. 불쌍한 어머니!! 이러한 가족사로 인해 그녀는 사랑 연애 결혼에 대해 냉소주의자가 되었다. 어머니를 빼닮듯 그녀의 영혼을 갉아먹는 끈질긴 참극 또한 유전될 거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성을 경계하고 배척했다. 한마디로 그녀에게 이성은 어쩌면 사랑할 수도 있는 존재가 아닌, 자칫 불행할 수도 있는 결혼으로 이끄는 존재였던 것이다.
여기까지가 그녀의 상태에 대한 장황하다면 장황할 수 있는 진단이다. 아마도 독자들은 다음이 궁금할 것이다. 과연 그녀는 연애 사랑 그리고 결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미래가 현실로 다가오기 전까진 의문은 어디까지나 의문일 뿐이다. 그녀 자신조차 예상할 수 없다. 인생은 어쩌면 그래서 흥미로운지도 모르겠다. 한가지 명백한 건 그녀에게도 사랑의 대상은 있었다. 불행히도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닌 예술이었지만...특히
클래식 음악은 그녀에게 애인과도 같았다. 그녀를 매우 잘 알고 있었고...
어떻게하면 그녀를 흥분시키고 쾌락을 주며 환희에 들뜨게 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여느때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현실은 때론 냉혹한 남편같이 짓눌렀는데 그럴수록 이상은 달콤한 연인처럼 다가왔다. 오늘따라 유독 직장에서 숨이 막힌 그녀는 일찌감치 스트라디움으로 향했다. 모태솔로지만 그녀는 바람난 유부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스타프 홀스트 행성
1악장 화성
2악장 금성
3악장 수성
4악장 목성
혹자는 지레 겁먹을지도 모른다. 거창한 이름에 천문학적 냄새가 다분히 풍기는 표제 음악이라.....하지만 작곡가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의 눈으로 바라본다. 따라서 머리 보단 감성에 치중한 결과 점성술로 풀고자 했다. 결국 지구는 제외되었고 1930년에야 발견된 명왕성도 관심 밖이어서 결국 총 7개의 행성만이 홀스트의 사랑을 받았다.
멜로디면에서도 전혀 어려울 건 없는데, 무엇보다 자주 그리고 널리 연주되어 익숙함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4악장 쥬피터를 들으면 당신은 깜짝놀랄 것이다.
앗! 익히 들어본 음악!!
영화 「스타워즈」에서도 과거 뉴스 시그널로도 나왔던 음악이니.....
그녀가 음감회 이후 귀가하고 나서의 일이다. 아버지 서재를 뒤적거렸다. 그 바람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먼질 뒤집어 썼고...
초연자 에드리언 보울트의 역사적 음반은 없다손 치더라도 예전에 분명 어딘가에 유진 오먼디& 필라델피아 심포니 LP판이 있었는데....그 인공낙원을 다시금 경험하고 싶었는데....
약 반시간 후 그녀는 찾는 걸 포기했다.
좀전 음감회의 감흥때문이었을까?! 아님 ... 유년기, 어떤 특정 시점에서 기억된 음악이
이제야 메아리로 재생되어 귓전에 울리는 것일까?! 아니면 끝내 소중한 음반을 못 찾은 미련 때문에?! 그녀는 침대에 누웠는데도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 2악장
지휘에 정명훈 피아노에 김선욱
"너 혹시 김선욱에대해 아니? 퍽 유명한 피아니스트니?"
하루는 저녁식사 도중 어머니가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2006년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쿨서 우승했잖아."
다음 이야기가 놀라웠다.
"네가 말하는 그 사람 어머니가 내 차에 탔었다. 좀전까지 우린 얘길 나눴지...아들이 그리 유명한데도 참 겸손하시더구나."
그 뒤로도 몇번 어머니를 통해 그의 근황을 건네들었다.
활짝 열린 창, 베토벤이 금발의 여인을 응시한다. 그 집요하고 강렬한 시선에 푸른 눈의 그녀가 뒤돌아본다. 처녀다운 수줍음에 그녀의 잔잔한 볼우물이 순간 발그레진다.
이윽고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창 너머로 멜로디가 들린다. 매혹적이고 잔잔한 멜로디!
그녀는 사랑받고 있음에 감사하며 시선을 떨어뜨린다...
일찍이 클래식 역사상 이토록 사랑받는 여인은 없었다. 더더구나 음악의 황제 베토벤에게......
때로는 음악감상시엔 사실보단 허구를 떠올리고 싶다.
"지금껏 여러분은 마에스트로 정, 빼어난 지휘자의 숨소리까지 들으셨던 겁니다.
바로 그 시간 그 자리에 정명훈씨, 김선욱군, 그리고 저 안동혁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깨닫는다. 한 연주자의 잊지 못할 추억이 이젠 그녀 자신의 추억이 되었음을.....이 또한 음악의 매력이요 힘이다.
3개의 오페라 아리아
비제의 카르멘 중 「꽃노래」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중 「의상을 입어라」
푸치니 토스카 중 「별은 빛나건만」
그녀는 과학에 우호적이진 않지만 거진 10년전 작고한 파바로티는 물론이려니와
2세기전의 인물 카루소(1873년~1921년)의 육성도 고스란히 살리는 기술력에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그들의 목소리가 담긴 음반, 말하자면 그녀에게 그것은 이미 생을 마감한 짝사랑들의 사진첩 혹은 영정사진과도 같았다.
'모국어외엔 언어 공부가 게으른 파바로티에게서 멋들어진 프랑스어를 기대하긴 거북하니 그에게선 모국어만 듣자.'
설령 우습더라도 어쩔 수 없다. 역시 꽃노래는 그 보단 도밍고다.
그러나......다음 두 곡에서는 역시 파바로티!!
유랑극단 동료 실비오와 바람난 아내 넷다.
분명 그 밀회를 목격했는데도 그날 밤 있을 공연을 위해 광대옷을 걸치는 카니오. 아리아 후반부의 냉소적이고 허탈하며 발작적인 웃음소리. 인생은 멀리서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은 유감스럽게도 진리이다.....
지금껏 이 베리즈모 오페라(사실주의극)에 등장하는 수많은 카니오가 있지만 베스트는 단연 파바로티이다.
이어 푸치니의 토스카 이 아리아에 얽힌 에피소드에 주목하길 바란다.
지금은 노처녀지만 노처녀에게도 스무살하고도 딱 한살, 한창이던 시절이 있었단다. 성악가 재학중인 친구가 있었다. 한때 마친듯이 락을 좋아하다 대학은 고상하게 가고 싶어 슬며시 성악(테너)으로 전향했다 한다. 아무튼 그 시절 느닷없이 휴강이거나 땡땡이를 치고 싶은 날엔-대학생의 특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녀는 어김없이 그 친구의 학교 연습실로 놀러갔다. 아무 노래나 해보라 종용하면 그는 이내 못이기는 척 한 곡조 뺀다. 그녀는 그와 등을 진 채 창가에 서서 듣는다. 결코 그는 그녀의 숨겨진 표정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이윽고 아리아는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었다.
동이 트면 곧 죽을 목숨이다. 스카르피아는
일말의 자비심도 없는 위인이니까...화가로 그리고 독립투사로 항상 숭고하게 죽길 원했지만 막상 죽음이 엄습하니 지독하게 외롭고 무섭다......인간은 스스로 이성적이라 생각하지만 따지고보면 인간만큼 비이성적인 동물도 없다. 오래 사는 건 가장 무서운 형벌이라면서 막상 말기암 선고를 받으면 그토록 살고 싶어 하는 불쌍한 존재들인 것이다.
브루크너 교향곡 7번 1악장
지휘에 이반 피셔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심포니
전 시간에 2악장, 그니까 작곡가가 생전 숭배했던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며 작곡한 곡을 감상했었다. 오늘은 1악장, 그니까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에게 바치는 헌정사의 앞부분이 낭독될 차례다. 낮 동안의 활기가 저물어 고요한 저녁시간, 부드럽고 풍부한 목관과 따스한 현악이 한데 어우러져 월광처럼 빛나는 한편 교회 오르가니스트, 꼭 그만큼 겸손했다.
이쯤해서 그녀의 브루크너 심포니 7번 음반에 관한 추억을 들려주고자 한다.
그해 그녀는 크리스마스 시즌만큼만 만하임에 머물다 이듬해가 되자마자 마부르로 이사갔다. 마부르라는 대학도시는 지형적으로 유별났는데 엘레베이터로 도시 전체를 아래 위로 나누고 있었다.
1, 2차대전의 침공을 거의 받지 않은 윗동네는 과거 마을 풍경이 현재도 고스란히 남아 특히나 아름다웠고 이사 온 첫날부터 그녀는 자기집 드나들듯 쏘아다녔다.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즐비한 가운데 유독 그녀가 즐겨 찾은 곳이 있었으니 노부부가 운영하는 고즈넉한 클래식 음반점이었다. 말러 1, 2번, 5번 그리고 브루크너 7번 모두 거기서 연을 맺었다. 지금보다 더욱 철 없을 때 뭣 모르고 사뒀다가, 5년 정도 묵혀두었다... 역시 뭣 모르는 가운데 듣고, 이제 겨우 알아가는 식이다. 이렇듯 천재는 단번에 득도하지만 나같은 범인은 오래걸리는 법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예술이 없다면 사람은 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정말 그렇다. 만일 우리의 삶에서 문학이 미술이 그리고 음악이 사라진다면, 그건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죽음 그 자체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사상과 거기서 파생된 밥벌이만 남고 일체의 예술이 피살되어 숨진(?!)채 살아가는, 조지오웰의 1984의 세계는 너무도 끔찍한 세상이다.
예술은 매우 아름다운 이성인 연인이며 그네들은 우릴 유혹하고 사랑하게끔 유도한다. 비단 사랑 연애 결혼에대해 환멸감을 가지는 노처녀일지라도 심장 한복판에 아직 사랑이란 감정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사랑에 빠질 시도를 한 다. 그것이 문학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이성이든...그 무엇이든 괜찮고말고...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하면 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