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기 2장 1~13절>
서론: 재 터에 앉은 인생
본문은 인류 역사상 가장 깊은 고난의 현장으로 우리를 초청합니다.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은 욥에게, 이제는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악창(惡瘡)이라는 신체적 파멸마저 덮쳤습니다. 욥은 잿더미 위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19세기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그의 생애 마지막 해에 그린 작품, 《영원의 문에서》(At Eternity's Gate)를 깊이 떠올리게 합니다. 불길에 휩싸인 듯한 의자 위, 두 주먹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잿빛 절망 속에 앉아 있는 한 노인의 모습. 고흐 자신 역시 평생 원인을 알 수 없는 육체적·정신적 질병과 극심한 가난, 세상의 외면이라는 고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고흐는 바로 그 절망의 재 터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한 가장 눈부신 빛을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인생의 재 터를 지나고 있는 성도와 교회가 붙들어야 할 신약적 구속사 패턴과 철학적 통찰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자기 중심적 생존 본능을 넘어서는 진짜 신앙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욥 2:4)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가죽은 가죽으로" 즉 히브리어 '오르 베아드 오르(עוֹר בְּעַד עוֹר)'라는 속담을 인용합니다. 이는 "인간은 타인의 가죽(피부/생명)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가죽(생명)만 건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포기하는 이기적 존재"라는 사탄의 냉소적인 인간관을 담고 있습니다.
철학자 토마스 홉스(T. Hobbes)나 스피노자(B. Spinoza)가 말한 '코나투스(Conatus, 자기 생명을 보존하려는 욕구)'처럼, 인간의 이성과 본능은 극단적 위기 앞에서 자기 자신의 안위와 생존을 최우선으로 삼습니다. 사탄은 인간의 신앙마저도 결국 '내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거래적 이기심에 불과하다고 고발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이 통찰과 고발을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뒤집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가죽(생명)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가죽과 찢긴 육체를 십자가에 완전히 내어주셨습니다. 신약의 성도는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하신 말씀처럼, 생존 본능을 넘어선 그리스도의 자기비움(Kenosis) 사랑으로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고흐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자신의 육체적 생존('오르')을 챙기기보다, 예술과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 그리고 소외된 이웃을 향한 사랑에 자신의 온 삶을 쏟아부었습니다. 세상의 눈에는 '자기보존에 실패한 미련한 삶'이었으나, 그의 삶은 이기적 생존 법칙을 뛰어넘는 헌신이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유익과 안전만을 계산하는 '오르 베아드 오르'의 거래적 신앙을 타파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달라지는 지점은, 위기 속에서도 내 안위만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타인을 위해 나를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할 때입니다.
2. 깨어진 질그릇에 담기는 보배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욥 2:8) 욥이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자신의 가려운 피부를 긁어내던 도구는 '헤레스(חֶרֶשׂ)', 즉 '깨어진 흙수사기(질그릇 조각)'였습니다.
'헤레스'는 본래 하나의 완성된 그릇이었으나 깨어져 버려진 파편입니다. 마틴 하이데거(M. Heidegger)는 인간을 세상에 느닷없이 던져진 존재(Geworfenheit)이자, 본질적으로 깨어지기 쉬운 유한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욥이 잡은 질그릇 조각은 자신의 파괴된 건강, 깨어진 일상,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허무함과 실존적 유한성을 상징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이 이미지를 놀랍게 재해석합니다."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오스트라키노스, ὀστράκινος)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 자체는 보잘것없고 쉽게 깨어지지만, 그 안에 담긴 '그리스도의 영광'이 진정한 가치를 결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몸이 '헤레스'처럼 찢기고 깨어지심으로, 우리라는 질그릇 안에 영원한 생명의 보배를 담아주셨습니다. 깨어짐은 파멸이 아니라, 내부의 보배가 밖으로 흘러나오는 통로가 됩니다.
고흐는 끊임없는 정신적 발작과 육체적 질병이라는 '깨어진 질그릇(헤레스)'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깨어짐을 인정하고 붓을 놓지 않았을 때, 그의 작품 속 밤하늘과 해바라기는 단순한 풍경이 아닌 신성한 영광의 빛(보배)을 발산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약함과 깨어짐(질병, 실패, 상처)을 수치스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의 능력은 완벽한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어진 질그릇 사이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흘러나올 때 비로소 세상에 증명됩니다.
3. 말문이 막힌 고통, 임재의 침묵으로 초대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욥 2:13) 욥을 찾아온 세 친구는 욥의 '케에브(כְּאֵב)', 즉 '말할 수 없는 극심한 아픔과 슬픔'을 보고 칠 일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고통의 본질은 언어화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엠마뉴엘 레비나스(E. Levinas)는 타자의 고통 앞에서 인간이 건네는 성급한 논리와 교리적 설명은 도리어 타자에게 가해지는 2차 폭력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친구들이 유지했던 '7일간의 침묵'이야말로 욥기 전체에서 그들이 보여준 가장 훌륭한 윤리적·철학적 태도였습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케에브'를 먼 발치에서 관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고(요 11:35),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시며 인간의 가장 깊은 고통에 친히 동참하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5절에서 교회를 향해 명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신약의 교회는 고난당한 자에게 성급하게 답을 내려주는 신학 평론가가 아니라, 그들의 '케에브' 곁에 조용히 곁을 내어주는 '성육신적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고흐가 그린 노인은 머리를 감싸 쥐고 홀로 앉아 있지만, 그가 앉아 있는 잿더미와 방 한구석은 따뜻한 황금빛으로 감싸여 있습니다. 고흐는 말없이 그 고통의 현장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침묵 속 임재를 화폭의 색채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고통받는 이웃과 성도를 향해 섣부른 조언이나 율법적 정죄를 거두어야 합니다. 최고의 위로는 함부로 건네는 말 한마디가 아니라, 그들의 '케에브' 곁에서 함께 울어주고 자리를 지켜주는 '함께함의 현주소'입니다.
결론: 영원의 문 앞에 선 교회
고흐가 절망의 끝에서 그린 노인의 그림 제목이 《절망》이 아니라 《영원의 문에서》였음을 기억하십시오. 인생의 가장 깊은 재 터는 버려진 장소가 아니라, 바로 영원의 문이 열리는 거룩한 지성소입니다.
우리는 모두 살아가며 오늘 본문의 현장을 만납니다. 내 생명과 안위만 계산하라는 이기적 본능(오르 베아드 오르)의 유혹을 받기도 하고, 질병과 상처로 마음과 육신이 깨어지는 아픔(헤레스)을 겪으며,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눈물(케에브)을 흘리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가죽(오르 베아드 오르)을 지키는 이기심을 버리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다 내어주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우리의 깨어진 질그릇(헤레스)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영광을 기대합시다.
이웃의 고통(케에브) 곁에 말없이 다가가 손을 잡아주는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어 갑시다.
재 터 위에서 소망을 품는 성도, 그 깨어짐을 통해 그리스도의 보배를 세상에 흘려보내는 거룩한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