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겨울, 우리는 성남의 언덕배기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벽지는 빛이 바래 있었고, 오래된 문틈으로는 찬바람이 쉴 새 없이 스며들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의 온기만으로도 충분했다. 서로의 체온으로 밤을 견디며,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에도 얼굴에는 사랑이 넘쳤다.
냄비 하나로 밥도 짓고 국도 끓였다. 밥상은 둥그런 양은상이었고, 살림살이라고 해봐야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그때의 우리에게는 그것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이듬해 겨울, 아내가 입덧을 시작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된장국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을 했고, 쌀 씻는 소리만 들어도 고개를 돌렸다.
그 시절 봉급날이면 어김없이 어머니가 찾아오셨다. 생활비로 십만 원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가져가셨다. 그때는 으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형편이 어려워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살았다.
십만 원으로 한 달을 살아가자니 살림은 더욱 빠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사과…… 사과 먹고 싶어.”
바로 그때였다.
문밖에서 장사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과 사려! 사과 사세요!”
아내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골목 어귀로 나가보니 트럭 한 대에 사과가 가득 실려 있었다. 나는 사과를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셈을 했다. 한겨울 사과는 제철이 아니어서 값이 만만치 않았다. 선뜻 살 엄두가 나지 않아 머뭇거리자, 눈치 빠른 사과장수 아저씨가 내 마음을 알아챘다.
“이거 한번 보세요. 흠집은 좀 났어도 맛은 좋아요. 반값에 드릴게.”
그가 내민 사과를 들어보았다. 여기저기 멍든 듯 검은 반점이 보였다.
“이 정도는 베어내고 먹으면 괜찮아요.”
아저씨는 얼른 사과 껍질을 벗기더니 한 조각을 잘라 내게 건넸다. 입에 넣어보니 생각보다 달고 맛이 괜찮았다.
“먹기는 괜찮으니 이거 한 박스 사요.”
다시 권하는 말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윤이 반들반들한 잘생긴 사과는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내가 고른 것은 흠집투성이의 값싼 못난이 사과였다.
한 박스를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사과를 보더니 잠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한 조각 맛을 보더니 이내 웃었다.
“맛은 괜찮네.”
그러더니 사과 두 개를 연거푸 먹었다. 정말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그날부터 못난이 사과는 입덧으로 아무것도 먹지 못하던 아내의 끼니가 되었다. 밥 대신 사과를 먹으며 버틴 아내는 그해 가을, 건강한 아들을 세상에 낳았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나는 아내에게 잘생기고 탐스러운 사과 한 알 제대로 사주지 못했다는 것이 못내 마음 아팠다. 넉넉지 못한 살림이 서러워 속으로 자책하면서, 아내 몰래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과일가게 앞에 진열된 사과만 보아도 그때의 못난이 사과가 떠오른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큰아들은 어려서부터 피부가 조금 검은 편이었다.
가끔 아내는 농담처럼 말한다.
“썩은 사과 먹여서 얼굴이 꺼먼가 봐.”
웃으며 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그 한마디가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내 폐부를 찌른다. 그때 사과 한 박스를 사주고도 나는 왜 그렇게 미안했던 것일까.
아마도 못난이 사과가 못나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그보다 더 좋은 것을 해주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 그것뿐이었던 젊은 남편의 마음이 못난이 사과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사과 하나쯤은 마음껏 고를 수 있는 세월이 되었다.
다음에 과일가게 앞을 지나게 되면 윤이 반들반들하고 탐스러운 사과를 한 박스 사야겠다.
그리고 아내와 큰아들에게 건네주어야겠다.
“그때는 못난이 사과밖에 못 사줬지만, 이제는 이걸 먹어.”
반세기 전, 언덕배기 단칸방에서 우리 가족의 겨울을 녹여주었던 못난이 사과에게도 늦은 인사를 건네면서.
첫댓글 엄청 따뜻한 신혼부부의 겨울과 어머니가 아들 월급을 10만원만 남기고 가져가시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시던 그 시절이 묘한 감정으로 오버랩됩니다. 참 어려운 시절을 건강한 마음과 생각으로 잘 보내신 것 같아 진심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오래된 영화를 보는 것 같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