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골기
문틈으로 날아든 송홧가루가 거실을 온통 노랗게 물들였다.
창틀 옆에는 아들의 검정 구두가 광채를 번득거리며 조용히 앉아있다. 조금 전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더니 구두를 매만진 모양이다. 반들반들 윤기가 난다. 구두 속에는 의족처럼 생긴 제골기가 들어있다. 며칠 전 이것이 택배로 왔을 때,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름도 생소한 제골기는 신발을 오래 신어서 틀어진 경우에나 볼이 작아서 발이 아플 때, 발의 생김새에 맞게 균형을 잡아주는 기구였다.
인간은 필요에 따라서 도구를 만들고 발전시키며 문명을 창조해왔다. 라이트 형제가 독수리의 날갯짓을 보고 비행기를 발명한 것도 같은 이치이다.
나는 신발 가게 주인도 아니고 구두수선공도 아니지만, 사람들이 신고 다니는 신발을 유심히 바라보는 버릇이 있다. 그렇다고 어느 소설의 주인공처럼 열 켤레의 구두를 진열해 놓고 출근 때마다 바짓가랑이로 구두를 문질러대는 예찬론자는 물론 아니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옷에 깨끗한 신발을 받쳐 신은 모습이 보기에 좋을 뿐이다. 그런 사람은 매사에 성실하고 무슨 일이든 자신의 역할을 야무지게 처리해낼 것 같아서 신뢰가 생긴다.
그런 내게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인 제골기가 얼마나 기발한 아이디어의 상품처럼 느껴지었겠는가! 온종일 주인을 따라 다니느라고 혹사당한 신발을 제골기에 넣어두면 하룻밤 사이에 주름을 좍 펴준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편리한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이런 작고 사소한 물건으로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산다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다.
구두를 떠올리면 이십 여 년도 더 지난 일이 생각난다. 이웃에 남편을 잃고, 어린 두 딸과 함께 살아가는 여자가 있었다. 어느 겨울 날, 어찌 사는지 궁금하여 그 집을 찾았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던 그녀의 분위기처럼 집은 침울하고 적막했다.
천장에 걸린 고장 난 전등마저 번쩍이다 멈추기를 반복해서 가장의 부재를 확인시켜 주는 듯 했다. 현관에는 여러 해 동안 주인을 기다리는 망자의 구두가 놓여있었다.
그녀가 내 눈길을 의식했는지 “집 안에 남자가 없으면 사람들이 무시해요. 그래서 신발을 아직 버리지 않고 남겨 두었답니다.” 하고 쓸쓸하게 웃었다. 구두는 오랫동안 신지 않아서 쭈글쭈글 일그러지고 구두코가 주저앉아서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그 때 이렇게 좋은 제골기가 있었으면 하나 선물해 주었을 텐데......하는 아쉬운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첫댓글 감동입니다.
일전에 발표한 작품인데 올려봅니다. 고맙습니다~
잘 돌아다니지 않는 저 같은 사람은 만날 수 없는 물건이네요. 신기합니다.^^
저도 처음 보았을 때, 무척 신기했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십시오.
고맙습니다^^
`제골기` 편안한 발을 위한 물건이 아닐까 싶은데 기억하게 해 주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