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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동심초
서 성 옥 作
서촉의 성도(成都) 30리 서쪽 완화계에 봄이 왔다. 먼 티벳 고원에서 발원한 장강은 수천리 길을 돌아 이곳 사천 분지에서 잠시 숨을 멈추다가 형주 땅 아래 동정호, 파양호 쪽으로 내쳐 달린다. 완화계는 장강(揚子江)의 사천 지류 금강 줄기의 완만한 계곡이다. 서촉의 봄은 이곳 완화계에 제일 먼저 찾아온다.
음력 삼월 초하루 강가의 버드나무는 새순을 틔워 사방에 연둣빛 그늘을 드리웠다. 완화계(浣花溪) 10리 안쪽 냇물이 휘감아 도는 설도(薛濤)의 초당 안 뜰에도 봄빛이 완연했다.
마흔을 넘어선 여인의 얼굴에 살짝 주름이 내렸지만 눈빛 맑고 눈동자는 검게 빛났다. 단아한 이마, 오똑한 콧날, 안면에 서린 엷은 홍조는 그녀가 사천 제일의 미녀임을 은연중에 드러나게 했다.
초당 뜰 살구나무가 봄바람에 몇 점 흰 꽃잎을 떨어뜨렸다. 연분홍 도화(桃花) 꽃잎도 바람에 실려 난분분 강 쪽으로 날리고 있었다.
물색 나삼(羅衫) 차림으로 마루에 앉은 여인이 비파(琵琶)를 가슴에 안고 현(絃)을 쓸어 내렸다. 계면 조현법, 스르릉 4현금 당비파가 울리자 동시에 여인의 붉은 입술에서 애잔한 노랫말이 흘러나왔다.
花開不同賞 꽃이 피어도 함께 즐기지 못하고
花落不同悲 꽃이 져도 같이 슬퍼하지 못 하네
欲問相思處 묻고 싶어라, 그리운 그대 계신 곳
花開花落時 꽃 피고 꽃 지는 이 좋은 봄날에
攬結草同心 풀잎 뜯어 마음을 함께 묶어
將以遺知音 먼 그대에게 보내 드리고 싶네
春愁正斷絶 봄의 시름 끊어 정녕 잊으려 했는데
春鳥復哀吟 봄새가 다시 애달피 울어 대는구나
風花日將老 꽃잎은 속절없이 나날이 시들어 지고
佳期猶渺渺 만날 날은 아직 아득하기만 하네
不結同心人 함께 한 마음과 마음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공연히 동심결 풀잎 매듭만 짓고 있다네
장안(長安)의 봄이 이울고 있었다.
초여름 훈풍이 설운(薛鄖)의 집 마당 오동나무 가지를 스쳤다. 보라꽃송이를 떨군 자리에 넓은 오동잎이 자라나 기와집 처마에 엷은 그늘을 드리웠다.
처마 안 마루에 앉은 설운 부녀는 마당에 오동나무를 바라다보았다.
庭除一古桐 聳干入雲中
정원의 늙은 오동나무 한 그루, 줄기가 구름 속까지 치 솟았구나.
설운이 먼저 한 수를 읊으면서 어린 딸을 바라다보았다.
枝迎南北鳥, 葉送往來風
가지는 남북에서 오는 새를 맞이하고, 잎새는 오가는 바람을 보내는구나.
여섯 살 설도가 부른 댓구는 기가 막혔다.
설운은 기뻤다. 어린 딸의 천재성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섰다. 여자아이가 시와 학문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높은 장벽이 있음을 설운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금을 통틀어 예술의 길은 멀고 험난하다. 더구나 설도가 내 놓은 시구는 매우 불길했다. 가지가 온갖 새를 다 맞아들이고, 나뭇잎은 오가는 바람을 배웅한다는 것이, 왠지 어린아이의 순탄치 않을 앞날을 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설운은 딸의 운명이 흐르는 물처럼 순조롭기만을 빌었다.
서기 780년 ‘중흥의 치’를 기치로 내 건 덕종의 개혁정치는 웅혼했으나, 날카로웠다. 조․용․조 조세제도를 폐하고, 명 재상 양염을 등용하여 양세법을 시행 하였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을 개편하여 중서성과 문하성으로 나눴다. 중서성(中書省) 낭관(郎官)이었던 설운에게도 불운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급기야 설운은 사천성 절도부 낭관으로 폄적(貶謫)되었다. 설도가 열 살이던 784년의 일이었다.
사천성은 서촉(西蜀)의 땅이다. 그리고 성도는 유비가 촉한을 세운 땅, 사마염의 진(晉)나라가 천하를 통일 하면서 40년 만에 멸망한 촉국(蜀國)의 수도다. 그러나 위진남북조 시대를 넘어 600년 성상이 흐른 지금이야 당 제국 도성 장안 사람들 눈에는 그저 궁벽한 야도(野都)로 보일 뿐이다.
설운 가족들은 한중 땅을 지나 서촉의 경계 검문관에 다다랐다. 새들도 넘기 어렵다는 검문관. 깎아지른 절벽이 사방을 막아섰다. 수십 년 전, 시인 이백이 장안에서 촉으로 들어서면서 읊은 촉도난(蜀道難)이 절로 떠오를 만큼 난관이었다.
아아! 높고도 높도다! / 촉으로 가는 길 / 푸른 하늘로 오르기보다 어려워라 / 위로는 육룡이 해를 끌고 뒤돌아 가는 높은 봉우리 / 아래로는 부딪치는 물결 거꾸로 소용돌이치는 강.
어린 설도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검문관 잔도(棧道)를 타고, 절벽을 기어서 서촉 땅으로 들어섰다.
사천성 성도는 넓은 분지의 땅이다. 습윤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지평선이 보이는 넓은 들에서 온갖 풍부한 물산들이 쏟아진다. 안사의 난으로 잠시 이곳 성도로 몽진한 당 현종은 장안으로 돌아기기 전 성(省)의 중심에 주작대로를 내었고 성 청사를 새로 장중하게 지었다. 장강의 지류 금강(錦江)이 성도 한복판을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는데, 설운의 가족도 강가 언덕 마을에 맞춤한 집을 얻었다.
이제 몇 년 간 설운 가족은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 사이 무남독녀 설도는 소녀에서 낭자로 자라났다. 아버지의 서책으로 학문을 갈고 다듬은 설도는 이제 시, 부, 음율을 모두 깨우쳐 나갔다. 거리에 나서면 설도의 용모는 화중화로 빛났다. 모두들 설씨 집안의 빛나는 계집이라며 입을 맞춰 설희(薛姬)라고 불렀다. 머잖아 대갓집에서 점지해 갈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이 이구동성 침 마르게 칭찬하는 게 일이었다. 설운은 딸을 명문거족 집안에 시집보낼 일로 들떠 있었다. 그 길만이 하위직 품계를 높이고, 설씨 집안을 부흥시키는 유일한 일이라고 믿었다.
남조(지금의 운남성 일대)는 아직 당 제국 영토로 편입되지 않았다. 그 옛날 제갈공명이 맹획을 칠종칠금 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남만의 땅, 남조 사람들은 티벳인들과 결탁하여 당 제국에 맞서고 있었다. 장안의 천자는 사천 절도사를 파견하여 남조를 회유하려 했다. 절도사를 시종하여 외교관으로 남조를 다녀 온 설운이 성도에 도착하여 시름시름 앓더니 한 달도 못미처 급사하고 말았다. 운남의 풍토병에 걸렸다가 회복하지 못한 탓이다. 설운의 급료에 의지해 살던 설운 가족은 이제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설도의 어머니가 삯바느질 품일을 다니며 근근이 생활 하였으나, 모친도 몇 해를 넘기지 못하고 병사하고 말았다. 운명의 가시밭길 앞에서 설도는 절망했다.
열여섯 살 설도는 눈물을 머금고 성(省)의 관기가 되었다. 그러나, 설도는 어디까지나 예기(藝妓)였다. 관청 소속의 전문 예술가라고 표현함이 옳았다.
당․송 문치의 시대에 문관들의 예술적 식견은 높았다. 성도는 숱한 문인, 예술가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였다. 두보, 이백, 백거이, 두목, 유우석 등 쟁쟁한 이름이 새겨져 있는 유서 깊은 문도(文都)다.
관기로서의 그녀의 시(詩), 부(賦) 재능은 성청(省廳) 내 문신들의 시샘의 대상이 되었고, 아름다운 얼굴과 관능적인 몸매는 성도 안 뭇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설도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다.
792년, 사천성 절도사로 위고(韋皐)가 부임해 왔다. 장안(長安)의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 난 위고는 젊은 날 진사시와 사마시에 연거푸 급제하여 전도양양했다. 장안 중앙 관청 중서성, 문하성 요직을 두루 거쳐 만 40세 나이에 종2품 절도사로 승차하여 처음 외직으로 나섰다.
위고를 처음 본 설도는 그의 기품 있고 온화한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위고도 설도를 보는 순간 사람들이 탄복해 하는 소리가 허언이 아님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열여덟 낭자의 깊고 투명한 눈빛은 참으로 당당했다.
신임 절도사를 맞이하는 잔치에 성청의 모든 문무 관료들이 들어 와 연회석에 나란히 앉았다. 잔칫상에 사천지방의 온갖 식재료로 만든 요리와 향기로운 술들이 올라왔고, 색색의 꽃들이 장식되어 사방을 밝혔다. 요란할 수 있는 연회는 악공들이 연주하는 장중한 음률이 울려 퍼지가 숙연히 가라앉았다.
신임 절도사를 맞이하는 몇 가지 의례가 끝나자마자, 문무관 차례로 올리는 술을 마다한 위고는 자작한 술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설도를 연회석 중앙으로 불러냈다.
위고는 설도에게 즉석 시 한 수를 주문했다. 잠시 하늘을 우러르던 설도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더니 종이를 끌어당겨 붓을 잡았다.
무산(巫山)의 경치는 송옥의 글처럼 아름다운데
흐르는 물소리는 초양왕 흐느껴 우는 소리
날마다 양대 아래서 운우(雲雨)를 즐기다가 초나라 망했네
슬프도다, 사당 앞 버들가지 봄이 왔다고
미인의 눈썹과 미색을 견주다니
멋진 율시였다. 성당기로 접어들면서 고체시가 율시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는데 위고가 보기에는 설도의 율시는 이미 고체시에서 벗어나 두보, 이백이 구가하던 칠언율시의 정격을 보여 주고 있었다.
“송옥(宋玉)의 고당부(高唐賦)에서 시제를 따 온 것이냐?”
“그러 하옵니다.”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대부 송옥은 선대 희왕이 무산에서 신녀와 하룻밤 정을 나눈 것을 ‘변화무쌍한 구름의 조화 같은 일’이라 빗대어 운우지락(雲雨之樂)이라고 칭하며, 양왕에게 고당부를 지어 바쳤다. 초양왕은 송옥의 이야기를 듣고 무산에 조운묘를 세운다. 무산은 여기 사천의 변방이고, 그 옛날 초(楚)와 진(秦)의 경계에 있었다. 훗날 초나라가 진나라에 멸망했지만 양왕에게 모든 잘못을 돌릴 수는 없었다. 다만 설도는 무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면서도 군주의 황음(荒淫)을 경계했을 뿐이다.
누군가 무산의 운무 경치를 말하기를 “창해를 보고나면 세상의 모든 강이 대수롭지 않고, 무산을 보고나면 다른 산의 구름은 운무가 아니라네.”라고 읊은 것을 위고는 잘 알고 있었다.
천년이 넘어서는 고당부와 서촉의 봄버들을 꿰고 있는 설도의 총명한 눈빛에서, 위고는 무산의 정기를 누리는 서촉 사람들의 기개를 엿볼 수 있었다.
위고는 당장 설도에게 문서의 열람, 교정, 관리 외 공문서 작성도 맡겼다. 위고의 눈에는, 설도의 학식과 품위 있는 글씨체가 절도부 내 문서 관리 직책을 맡고 여느 낭관, 교서랑 문관보다 윗길로 보였다. 공문에 쓰는 글씨체는 시, 부를 쓸 때와는 다르게 변주하여 왕희지 예서의 서풍으로 전아(典雅)했다. 꼼꼼하고 빈틈없는 성격까지 더 해져서 설도가 작성한 공문서는 완벽했다. 위고의 눈에 혜문왕의 벽옥(碧玉) 같았다.
위고는 장안의 비서성(秘書省)에 고해 설도를 교서랑(校書郞)에 임명해 달라고 청 했다. 교서랑이 비록 9품의 미관말직이지만 과거를 거친 남성 관료만 맡는 직책이다. 내명부가 아닌 외명부에 여성 관료가 임명된 전례가 없었다. 장안의 관리들은 위고의 주청에 코웃음만 쳤다.
설도가 교서랑 직책을 정식으로 받지는 못했으나 이 일은 성도 바닥에 퍼져 설도의 명성만 더 높여주었다. 이제부터 그녀는 예기가 아니었다. 성도의 모든 사람이 설도를 여교서(女校書)라고 부르며, 그녀의 문(文)과 예(藝)에 학문을 더하여 우러렀다.
꿈같은 나날이 흘러 정원(貞元) 8년, 794년이 되었다.
장안에서 위고의 조카 위정관이 사마시에 급제하여 숙부를 뵈러 성도에 왔다.
짙푸른 원령포에 검은 복두(幞頭)로 머리를 다듬은 위정관의 모습은 빛났다. 장안에서 온 젊은 도련님의 얼굴은 학처럼 고왔고, 목소리는 나긋나긋 서울 말투로 휘파람새 지저귐과 같았다.
“그대가 여교서, 아니 이곳 서촉의 으뜸 시인 설희군요?”
“......”
설도는 위정관의 낭랑한 말씨와 아리따운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과연 장안의 미인들이 고개를 숙일 천하의 일색입니다.”
“......”
위정관이 건네는 말에 설도의 가슴은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성도에 며칠 머물던 위정관이 출사 때문에 바삐 장안으로 돌아갔다.
위정관이 성도를 떠나자 설도의 가슴은 적막강산으로 가라앉았다. 한밤중에 달빛 아래서 아무런 이유 없이 오열을 하던 설도가 그것이 첫사랑임을 깨달은 것은, 까닭 없는 눈물을 며칠 더 쏟고 난 다음이었다.
다음 날, 만월이 비추는 관사 영창(映窓) 아래에서 설도는 붓을 들었다. 정성을 다하여 글을 써 내려갔지만, 글씨는 이미 갈 길을 잃었다. 생전 쓰지 않던 미사여구로만 여백이 채워졌다. 위정관에게 바치는 시를 쓰려고 했지만, 글은 어느새 구애의 시, 연애편지가 되고 말았다.
장안의 위정관으로부터 소식은 오지 않았다. 그런데 안개 같은 이야기가 성청의 절도사 집무실로 스며들었다. 위정관이 숙부에게 보내는 안부 인사에 비롯되었는지, 장안으로 가는 서신 담당 역부가 편지에 대하여 절도사에게 보고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설도의 ‘연애편지’ 사건을 위고가 그만 알고 말았다.
위고는 설도에게 불같은 화를 쏟아 부었다. 위고도 처음에는 설도가 책무를 다하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한다며 화를 냈지만, 솔직히 그도 그 이유를 잘 몰랐다. 스무 살 처녀가 젊고 늠름한 남자에게 끌리는 것이 당연한 데도 위고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성처녀로 남아주길 기대한 것인가, 위고는 그것이 묘한 질투임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위고는 설도를 성도 50리 밖 송주로 내쳤다. 설도는 가슴에 돋은 상처를 핥으며, 시작(詩作)에 더욱 몰두했다. 평조 조현법, 계면조 조현법 4현의 비파 가락도 익혀 나갔다. 1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설도는 첫사랑의 열병을 이겨내고 있었다.
새해 들어 위고는 사천성 성도 임지를 물러나게 되었다. 다시 장안 내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위고가 장안으로 들어가기 전 날, 서촉 평원에 서설(瑞雪)이 내렸다. 설도가 눈길을 재촉하여 송주에서 성도의 성청을 찾아왔다. 그날 밤, 설도는 위고 관저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어느 새 눈은 그쳤고, 침실 창가로 달빛이 교교히 내렸다. 만월이었다. 첫사랑의 열병을 이겨 낸 설도의 얼굴이 오히려 맑았다. 위고는 설도의 총명한 눈빛에 그녀를 처음 본 때가 떠올랐다. 크고 검은 눈동자가 위고의 가슴에 먹먹함을 안겨 주었다. 위고는 설도의 눈빛을 외면했다. 설도는 애써 외면하는 위고의 품을 파고들었다. 위고의 마음이 무너졌다. 위고는 설도의 상기된 뺨을 부비며, 그녀를 송주로 보낸 것은 ‘여인으로 보는 마음’ 때문이었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꿈같은 하룻밤이 지났다.
다음 날, 위고는 사천성 절도부에서 마지막 업무를 보았다. 그 일 중 하나가 설도의 면직이었다. 설도가 아직 절도부 기적(妓籍)에 관기로 배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설도는 위고의 배려로 여교서 직책을 수행했고, 송주현에서도 현청의 행정 잡무를 거들었으나, 여전히 기적에는 남아 있었다. 위고의 면직 처리로 이제 설도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설도는 오래 전 생각해 둔 성도(成都) 30리 밖 완화계로 향했다. 성청을 빠져 나올 때, 성청 앞 주작대로에서 장안 쪽 북동 방향으로 길을 떠나는 위고 일행의 마차가 보였다. 설도는 고개 숙여 읍을 하고, 위고의 떠나는 뒷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초여름이 시작되었다.
설도의 초당 뒤뜰 대나무 숲에서 부는 바람이 청명했다.
초당 앞뜰 연못에는 창포 꽃이 만발했다. 활짝 핀 꽃들이 설도의 초당 주위를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오래 전 금강 가에 살 때 어린 설도가 그 자줏빛 붓꽃을 좋아했다. 길 가 도랑에 핀 창포 꽃을 쓰다듬는 소녀에게 이웃집 할멈이 말했다.
“창포 꽃 좋아하면 혼자 살 팔자란다....”
열세 살 설도가 크고 검은 눈을 깜빡이며 할멈의 걱정에 미소로 답했다.
설도는 창포 꽃 우린 물로 머리를 감고 얼굴을 씻었다. 서른을 넘어 선 설도의 얼굴이 갓 스물 색시처럼 말갛게 보였다.
설도가 대숲을 산책하고 나올 때 초당 뜰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포삼은 연미색 학창의(鶴氅衣), 머리는 복두 대신 옥 건자(巾子)로 고정한 모습이었다. 헌헌장부의 모습이라기보다 앳된 학인(學人)의 모습이었다. 설도는 그 옛날 위정관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도는 그가 원진(元稹) 임을 대번에 눈치 챘다. 지난 해 시인으로도 이름 높은 유우석(劉禹錫)이 이곳 완화계를 찾아 온 적이 있었다. 유우석은 중앙 정부의 감찰어사로 사천으로 파견되어 와 오랫동안 사천 절도부 공무를 보다가 장안으로 귀임하기 전 시간을 내어 설도를 찾아왔다. 웅혼한 기상으로 늠름한 유우석에게서 젊은 위고가 언뜻 보였다, 유우석이 설도에게 시 한수를 어렵게 부탁했다. 유우석은 성도 성내 퍼져 있는 설도의 고명을 잘 알고 있었다. 설도는 서촉의 절경을 노래하는 서경시 절구 한 편과 사천의 명차인 몽정감로(蒙頂甘露)를 유우석에게 대접했다.
유우석은 장안에서 사귄 문우 원진과 백거이에 대하여 공들여 이야기했다. 자신의 후임 감찰어사로 원진이 곧 부임하는데, 지금은 사천성 통주에서 공무를 보고 있으나, 머지않아 새해가 되면 성도 본청에서 감찰어사 직무를 수행 할 거라 했다. 유우석은 원진이 본디 고운 도련님인데 일찍 장가들어 아이가 있지만 상처한 지라 홀몸이라고 했다. 시문으로도 자신을 뛰어넘는다고 유우석은 겸손해 했다.
과연 원진은 선이 고운 도련님 모습이었다. 스무 살 설도에게 열병을 안긴 위정관이 아름다운 청년이었다면, 원진의 수려한 얼굴에는 선병질(腺病質)의 예민함이 묻어 있었다.
설도는 원진에게 녹차인 감로차 대신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발효차 오룡을 끓여 주었다. 오룡차의 숙성된 맛과 기운이 홀아비 원진의 차가운 가슴을 따뜻이 덥혀 주었다. 원진은 차를 따라주는 설도의 깊은 눈에서 무르익은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것은 기방 여인네들 고양이 눈매의 교태에서 느낄 수 없는 기품 있는 미색이었다. 원진에게 알 수 없는 허기가 몰려왔다.
원진은 허난성 명문 집안 출신으로 유아 때 이미 문자를 깨우치고, 9세부터 시문을 짓기 시작한 신동이었다. 15세에 초시를 급제하고, 21세에 황제 앞에서 유우석, 백거이와 함께 본 과거시험 전시(殿試)에서 급제자 18명 중 장원을 차지했다. 이후 원진은 원재자(元才子)로 불렸다. 유우석이 원진을 추켜세우며“시문으로도 나를 뛰어넘는다.”고 말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날 이후 원진은 설도의 초당을 자주 찾았다. 설도도 원진을 반겨 맞았다. 설도를 만나는 동안 원진은 조강지처 배씨에 대한 그리움을 잊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원진은 그녀를 큰 누이로 느낀 게 아니라, 성숙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았다. 물론 빼어난 시문과 단아한 필체에 더욱 매료된 것도 사실이다.
설도의 검은 눈은 우주를 담을 수 있을 만큼 깊어 보였다. 잠자던 원진의 예술혼이 절로 소환되었다. 원진은 그 동안 상처(喪妻)의 상처로, 감찰어사의 격무로, 문우와의 별리로 시문을 창작할 힘을 잃었던 터였다. 그러나 이제 원진은 다시 시를 쓸 힘을 얻게 되었다.
설도는 처음에 그를 문우로만 대했다. 솔직히 원진의 박학(博學)은 대단했다. 당대(唐代)의 유학은 훈고풍으로 시, 서, 예, 역경에 춘추를 더한 오경이 기본이지만 형이상(形而上)을 향한 존재론적 질문을 하기에 촉망받는 젊은 관료들의 철학적 지식은 상당했다. 여교서 때 닦은 지식과 틈틈이 독학으로 메운 설도의 학문은 원진과의 교유로 한 단계 더 고양되었다. 설도에게는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였다. 원진과의 사귐은 이렇게 담백하게 시작되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두 사람은 문우를 넘어서 연인이 되었다. 설도는 연하의 청년 원진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열었다. 원진의 깊은 학문은 설도의 정신적 허기를 메워주었고, 젊은 육체는 몸의 빈자리를 채워 주었다. 설도가 부르는 절창의 노래는 원진의 시름을 잊게 했고, 눈부시게 흰 나신은 원진의 혼을 빼앗았다.
綠英滿香砌 싱그런 꽃봉오리 향기로운 섬돌에 가득
兩兩鴛鴦小 쌍쌍이 어울린 어린 원앙이라.
但娛春日長 오직 긴 봄을 즐거워 할 뿐이니
不管秋風早 가을바람이야 무에 걱정할 것 있으랴
설도인들 원진과의 혼인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무수히 썼다 지운 글에서 그녀의 생각을 반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원진에게는 문우(文友)요, 나이 많은 정인(情人)에 불과할 수 있다. 설도의 이력에 새겨져 있는 기적(妓籍)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809년 가을, 백거이의 소식이 사천성 절도부 감찰어사에게 날아들었다. 원진은 절망했다.
백거이는 원진보다 몇 살 위이지만 두 사람은 평생지우로 살았다. 백거이는 진사시 급제 후 원진과 함께 한림원에서 한림학사로 일했다. 한림원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인 국가기관이었다. 고려의 한림원, 조선의 홍문관, 집현전도 당나라 한림원에서 내려왔다. 원진도, 백거이도 한림학사로 벼슬살이를 하는 데 높은 자긍심이 있었다.
원진은 본디 북위를 세운 선비족 탁발부 선무제 후예로 명문거족 집안의 사람이었다. 탁발 원씨의 가문은 한족이 다시 중원을 회복한 후에도 귀족에 가까운 대접을 받으며 한족(漢族)의 한 부류로 편입되었다. 그에 비해 백거이는 한족이나 그 가문은 한미했다. 돌과 구슬을 갈 듯, 뼈와 상아를 다듬듯 타고난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학문을 연마한 백거이는 25세에 이르러 황제(헌종)의 친시에 급제 하여 조정에 출사했다.
806년 (원화2년) 백거이는 비익조, 연리지 천년을 이어가는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이야기 장한가(長恨歌)를 지었다. 이 노래는 그야말로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 장한가는 훗날 백거이를 성당기 우뚝한 시인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디딤돌이 되었다.
808년 백거이는 좌습유에 올랐다. 좌습유는 백관을 탄핵하고, 황제에게 간언을 올리는 간관(諫官)이다. 이때 재상 무원형(武元衡)이 피살되는 큰 일이 일어났다. 반란군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일까, 아무도 재상의 피살 문제를 공론화하지 않았다. 좌습유 백거이가 나섰다. 그러나 이 일은 일개 좌습유가 나설 일이 아니었다. 조정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황제는 백거이의 월권을 문제 삼아 강주 행군사마로 내쳤다.
어찌 운명이 이러한가. 이것은 시인의 운명인가, 좌습유의 숙명인가? 40년 전 두보의 운명도 그러했다. 생활이 궁핍하여 간알시(干謁詩)로 겨우 벼슬을 구한 두보는 얼마 되지 않아 안녹산의 난에 휩싸이고 만다. 현종이 서촉 성도로 몽진을 가자, 황태자 숙종이 장안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행재소 봉상을 찾아가 새 황제를 배알한 두보는 좌습유의 벼슬을 받는다. 이때 재상 방간이 상황제 현종에게 올린 계책이란 여러 왕자를 나누어 각 지방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뒤늦게 방간의 계책을 듣게 된 숙종은 대노했다. 숙종은 방간에게 뇌물죄를 뒤집어 씌워 징치했다. 그간의 사정에 어두웠던 두보는 방간을 변호했다. 단지 좌습유의 책무를 다했을 뿐이다. 숙종은 두보를 장안에서 내치고 만다. 이제 두보는 죽을 때까지 장안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두보의 장강 주유가 시작된 것이다.
마침내 백거이는 강주 사마로 좌천 되었다. 강주는 지금의 장시성(江西省) 주장시 일대이고, 후베이성 우한과는 장강 물길로 이어지는 물의 고장이다. 그 옛날 조조를 물리쳤던 오나라 도독 주유가 수군을 키운 곳이다. 행군사마(行軍司馬)는 절도사 아래에서 군무를 보는 문관 직책이다. 그러나 한직으로 ‘사마’는 으래 장안에서 벼슬이 떨어져 오는 자리가 되었다. 백거이 34세, 관리로서는 아직 창창한 나이였다.
소식은 먼 곳 서촉 성도에도 전해졌다. 소식을 들은 원진은 먼저 편지를 보내 백거이를 위무했다. 그리고 벼르고 별러 강주 행을 결심했다. 원진은 설도에게 동행을 청했다. 설도에게는 감히 청하지는 못해도 바라던 바였다. 설도는 연인과 떠나는 먼 여행과, 흠모해 마지않는 당대 최고 시인을 만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성도에서 아주 먼 강주의 분강 포구까지 여행은 험로였다. 수로는 그 옛날 유비가 오나라 정벌을 나섰던 물길과 별 반 다르지 않았다. 열흘 넘게 쪽배에 의지해 지금의 중칭 지방인 파군(巴郡), 이릉의 장강 삼협을 따라 내려가 형주의 양양에 이르고, 다시 무한(武漢, 지금의 우한)에 도착했을 때 원진과 설도는 지칠 때로 지쳐 있었다. 무한에서 며칠 쉬면서 설도는 지친 몸을 회복해 갔다. 원래 부호였던 원진은 그녀를 위하여 무한의 최고급 객관, 가장 좋은 침실을 빌렸다. 설도는 무한의 명물 잉어탕으로 몸을 덥히고, 두보의 한이 서린 동정호를 찾아가 호수의 물안개에 몸을 맡겼다. 동정호 호숫가에 수국이 지고 있었다. 수향(水鄕)의 가을이 무르익었다.
무한의 객관에서 보낸 며칠은 꿈결 같은 나날이었다. 젊은 원진의 육체는 식을 줄 몰랐다. 설도의 몸이 달아오르면 거칠게, 조금 나른해지면 부드럽게 원진은 설도의 몸을 탐했다. 설도도 원진에게 마음껏 몸을 맡겼다. 아니 더없이 매달렸다. 구름이 요란한 비로 변하여 대지를 흠뻑 적셔 나갔다. 그야말로 운우지락이었다.
무한에서 강주 분강까지의 물길은 평온했다. 드넓은 평원을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는 장강의 물결은 잔잔했다. 큰 도시를 오가는 여객선은 쌍돛을 단 2층 누각 범선으로, 객인들은 강 물결의 흔들림조차 느끼지 못했다. 범선이 분강 포구에 닻을 내렸다.
분강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객잔(客棧) 2층에서 세 사람은 인사를 나눴다. 백거이와 원진은 서로 읍(揖) 을 한 후,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스스럼없이 껴안았다. 지음의 모습이었다.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공자는 두 사람을 위하여 천삼백 년 전 이런 말을 남겨 놓았다. 원진의 얼굴이 붉게 상기 되었고, 백거이의 침울한 얼굴에는 몇 점 눈물이 번져 내렸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설도의 가슴도 아려와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했다.
객주가 내 놓은 술은 볼품없는 조주(粗酒)였고, 나물 안주에 몇 마리 비린 민물고기가 고작이었다. 원진은 개의치 않았다. 백거이의 푸른 적삼은 낡고 초라했으나, 안광(眼光)은 여전히 빛났다. 백거이는 설도가 성도에서 위고를 만나 여교서 직책을 수행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위고 앞에서 지은 알무산묘(謁巫山廟)를 비롯해 몇 편의 시를 상찬했다.
“슬프도다, 사당 앞 버들가지 봄이 왔다고 미인의 눈썹과 미색을 견주다니”
설도는, 부끄러웠지만 장한가로 낙양의 지가를 올린 당대 일류 시인이 자신을 알아주는 것에 감격했다. 백거이가 이번에는 원진에게 전에 자신의 문집 ‘장경집’에 서문을 써 준 일에 사의를 표했다. 원진이 쑥스러워했다. 좀처럼 내색을 하지 않는 백거이이지만 먼 변방 가을 저녁이 그를 감상에 젖게 했다.
두 병의 술이 빌 때쯤 분강 너머로 붉은 석양이 물들기 시작했다. 해질녘에 이르러 시나브로 어둠이 사위에 몰려들기 시작하자 세상은 더욱 적막해졌다.
갑자기 비파 현을 뜯는 음률이 강가의 적막을 가르고 객잔까지 울려 퍼졌다. 애끓는 소리였다. 아련하여라. 비파 소리가 세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쓸어내렸다.
“서울의 음률이군....”
백거이가 신음하듯 내뱄었다. 물론 설도도 한 귀에 장안에서나 연주될 법한 세련된 비파 음을 알아챘다.
세 사람은 약속을 한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포구에서 쪽배를 빌려 타고 비파소리가 울리는 쪽으로 향했다.
한 여인이 뱃전에서 비파를 타고 있었다. 슬프고 아련한 노래이지만 음률은 명징했다. 백거이 일행이 도착하기 전, 이 천상의 소리를 찾아 여러 사람들이 이미 배 안으로 모여 들어 있었다.
지금은 비록 늙고 시들어 장사꾼의 아낙으로 전락했지만 한창 때는 장안(長安)에서 비파와 노래로 이름을 날렸던 여인이었다. 분강 포구에 나온 뭇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어 듣는 이의 심금을 울렸다. 원진이 사람을 보내 다시 술자리를 마련했다. 원진이 주문한 술은 미주(美酒)였다. 모인 사람들 모두 새 술자리의 객이 되었다. 비파 여인도 석 잔을 받았다. 그리고는 감상에 젖어 자신의 영고성쇠 무상했던 신세를 좌중에 털어놓았다. 젊은 날 영화는 가을날 물가처럼 쓸쓸히 저물었다.
백거이가 정중하게 다시 한곡을 청하자 여인의 비파 소리가 저문 강에 유장하게 울려 퍼졌다. 청중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백거이가 행낭에서 종이와 붓을 꺼내 들었다.
潯陽江頭夜送客 강주심양 강마루에서 객을 밤에 보내자니
楓葉萩花秋瑟瑟 단풍잎과 갈대꽃에 가을바람 쓸쓸하여
主人下馬客在船 주인이 말에 내려 배 위에서 객과 함께
擧酒欲飮無管絃 술잔 들어 마시려니 음악 소리 전혀 없네.
醉不成歡慘將別 이별할 일 참담하며 취하도록 기쁨 없어
別時茫茫江浸月 이별 때에 이르노니 달도 강에 젖어들고
忽聞水上瑟琶聲 어디선가 물 위에서 비파소리 들려오니
主人忘歸客不發 주인 손님 갈 길 잊고 자리 뜨지 못하네.
尋聲暗問彈者誰 소리 찾아 조용하게 누구인지 물어보니
瑟琶聲停欲語遲 비파소리 그치건만 오래토록 대답 없어
移船相近邀相見 배를 저어 가까이가 마주하길 청하고서
添酒回燈重開宴 술 갖추고 등을 밝혀 자리 다시 마련하네.
千呼萬喚始出來 여러 번을 청코 청해 겨우나와 건너오니
猶抱琵琶半遮面 다소곳이 비파 안고 얼굴 반쯤 가리웠고
轉軸撥絃三兩聲 굴대 현을 골라 두어 세 번 소리 내니
未成曲調先有情 노랫가락 타기 전, 그 모습 애틋하다.
絃絃掩抑聲聲思 현현마다 밀고 누르니 소리마다 깊은 시름
似訴平生不得志 한평생 호소하니 깊은 뜻을 알 길 없고
低眉信手續續彈 내린 눈썹 손에 맡겨 끊임없이 튕기내며
說盡心中無限事 속마음 다 말하니 그 사연이 무한토다.
輕攏慢撚抹復挑 살짝 스쳐 느긋 눌러 비비거나 튕겨내니
初爲霓裳後六幺 처음 곡은 예상이요, 나중 곡은 육요로다.
大絃嘈嘈如急雨 큰 현 줄은 급하기가 소나기 내려붓듯
小絃切切如私語 작은 현은 애절하게 귀엣말로 속삭이네.
嘈嘈切切錯雜彈 급한 소리 애절함을 어지럽게 탄하니
大珠小珠落玉盤 큰 구슬과 작은 구슬 옥쟁반에 구르는 듯
間關鶯語花底滑 간주하듯 꾀꼬리 소리 꽃꽃 마다 흩어지고
幽咽流泉氷下灘 얼음 밑 냇물 소리, 샘물의 여울소리로다.
氷泉冷澁絃凝絶 시냇물이 얼어붙듯 현을 막아 멈춰드니
凝絶不通聲漸歇 현의 가락 엉켜져 소리 점차 줄어들자
別有幽愁闇恨生 깊은 시름, 없던 한이 따로 있듯 일어나네.
曲終收撥當心畵 곡을 끝내 거두려고 마음 한 끗 그어내니
四絃一聲如裂帛 네 줄 함께 우는소리 비단 찢는 소리로다.
東船西舫悄無言 동쪽 배도 서쪽 배도 소리 없이 고요하고
唯見江心秋月白 보이나니 강 가운데 가을달만 밝았구나.
沈吟放撥揷絃中 깊은 한숨 뱉어내고 비파 거둬 비켜두며
整頓衣裳起斂容 차림새를 정돈하여 감춘 얼굴 보여주네.
自言本是京城女 자신 밝혀 나는 본시 서울 살던 여자인데
家在蝦蟇陵下住 하마 쪽에 집이 있고 능 밑 마을 머물러서
十三學得琵琶成 십삼 년간 갈고 닦아 비파소리 얻게 되니
名屬敎坊第一部 내 명성 교방 중의 제일부에 속했다네요.
曲罷常敎善才服 비파 곡조 마치면 선재로다 감복해 주고
粧成每被秋娘妒 화장하고 단장하면 추랑들이 시샘하며
五陵年少爭纏頭 오릉마을 젊은이들 서로서로 돈 뿌리니
一曲紅綃不知數 한 곡마다 붉은 비단 헤아릴 길 없었다오.
鈿頭銀箆擊節碎 자개 박은 은빗은 박자 두드리다 깨어지고
血色羅裙飜酒汚 핏빛 같은 비단치마 술을 쏟아 얼룩졌네.
今年歡笑復明年 해해연년 웃고 즐기며 달이 가고 해가 가고
秋月春風等閑度 가을 달 봄바람,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지냈네.
弟徒從軍阿姨死 동생들은 군에 가고 양어미 북망산 들어가며
暮去朝來顔色故 아침저녁 오가는 바람 아래 얼굴빛이 바래졌네.
門前冷落車馬稀 문전조차 적막하여 마차 가마 끊어지니
老大嫁作商人婦 늙은이에 시집와서 시장 상인 아내 되었구나.
商人重利輕別離 장사치는 이익 위해 너무 쉽게 이별하니
前月浮梁買茶去 지난 달 부양으로 차를 사러 떠나가서
去來江口守空船 강어귀를 오고 가며 홀로 빈 배만 지키나니
繞船明月江水寒 배를 비춘 밝은 달도 강물처럼 싸늘하구나.
夜深忽夢少年事 한밤 홀연 꿈을 꾸어 젊을 때가 생각나서
夢啼妝淚紅欄干 꿈에 흘린 눈물이 화장한 얼굴에 붉게 물드네.
我聞琵琶已歎息 비파소리 내가 듣고 탄식하게 되었건만
又聞此語重唧唧 이런 말을 듣고 나도 거듭하여 탄하노라.
同是天涯淪落人 그대와 나, 아득히 먼 곳을 떠도는 외로운 사람
相逢何必曾相識 어쩌자고 서로 만나 알게 되었는가.
我從去年辭帝京 나 또한 지난해에 황제 계신 장안을 떠나
謫去臥病潯陽城 심양성에 귀양 와서 병들어 누었다네.
潯陽地僻無音樂 심양 땅 궁벽하여 음악소리 전혀 없어
終歲不聞絲竹聲 일 년 내내 비파 피리소리 못 들었다네.
住近湓江地低濕 분강 근처 낮은 땅에 머무니 습기 많고
黃蘆苦竹繞宅生 바랜 갈대 거친 대로 얽은 집에 살고 있다네.
其間旦暮聞何物 그 동안에 조석으로 어떤 소리 들었으리요?
杜鵑啼血猿哀聲 듣는 건 두견이 피토하는 소리 애끓는 원숭이 소리
春江花朝秋月夜 봄날 아침 강 꽃 보고 가을밤엔 달을 보며
往往取酒還獨傾 돌아와서 가끔 술이나 외롭게 들이키네.
豈無山歌與村笛 촌부들의 산가 가락 피리소리 들리건만
嘔啞嘲哳難如聽 서투르고 조잡하여 듣기에도 민망타가
今夜聞君琵琶語 오늘 밤 그대 타는 비파소리 듣게 되니
如聽仙樂耳暫明 신선노래 들은 듯이 금방 귀가 밝아지네.
莫辭更坐彈一曲 사양 말고 다시 앉아 한 곡조 탄주해주오.
爲君飜作琵琶行 내 그대 위해 바로 비파행을 지으리다.
感我此言良久立 내 말 듣고 마음을 일으켜 한동안 서 있다가
卻坐促絃絃轉急 좌정하여 탄주하니 비파 소리 빠르게 가락타네.
凄凄不似向前聲 그 소리 처량하기 그지없어 쓸쓸하게 퍼져나가니
滿座重聞皆掩泣 소리들은 사람마다 흐르는 눈물 가누지 못하네.
座中泣下誰最多 좌중 모두 슬퍼하니 어느 뉘가 가장 서럽는가?
江州司馬靑衫濕 강주사마 푸른 옷소매에 눈물 가득 적셔졌네.
설도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 대 서사시가 칠언 87행 609자로 본문으로 이루어진 비파행(琵琶行)이다. 원진은 화답하듯 즉석에서 백거이 비파행에 서문을 써 주었다. 지음답게 백거이의 마음을 담아 1인칭 시점으로 서문을 써 내려갔다.
元和十年, 予左遷九江郡司馬. 明年秋, 送客湓浦口. 聞舟中夜彈琵琶者, 聽其音錚錚然有京都聲. 問其人, 本長安倡女. 嘗學琵琶於穆曹二善才, 年長色衰, 委身爲賈人婦. 遂命酒, 使快彈數曲. 曲罷憫然. 自敍少小時歡樂事, 今漂淪憔悴, 轉徒於江湖間. 予出官二年, 恬然自安, 感斯人言, 是夕始覺有遷謫意. 因爲長句, 歌以贈之, 凡六百一十二言, 命曰 <琵琶行>.
비파행을 지으며 서문(序文)을 쓰다
원화 10 년에 나는 구강군사마로 좌천되었다. 다음해 가을, 손님 맞으러 분강(湓江) 포구에 나갔다가, 객잔에서 비파 타는 소리를 들었다. 쟁쟁(錚錚)하게 울리는 그 소리를 들으니 전에 서울(長安)에서 듣던 소리였다. 그 사람을 찾아보니 원래 장안에서 노래하던 여자였는데, 일찍이 유명한 목(穆), 조(曹) 두 선생에게서 배운 비파의 고수였다.
나이 들어 쇠락하게 되자 늙은 상인에게 시집 가 의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술상을 차려 몇 곡 청해 들었는데, 연주를 끝내자 서로 참담해졌다. 젊고 예뻤을 시절엔 웃고 즐기기만 하다가 이제는 시골구석으로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고. 나도 이 시골로 쫓겨 온지 2년, 스스로 편안하게 마음먹으려 했지만, 오늘 밤 이 여인의 말에 끝내 감격해서 비로소 멀리 귀양살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장구(長句)의 노래를 지어 여인에게 보낸다. 모두 609자인데, <비파행(琵琶行)> 이라 부른다.
원진이 쓴 서문은 백거이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그야말로 간담상조(肝膽相照)였다.
세 사람이 자리를 파하고, 객잔으로 돌아와 다시 술잔을 나눌 때는 분강 포구의 밤은 이슥해져 서쪽 밤하늘에 파리한 하현달이 떠올랐다.
사천 성도로 돌아 온 원진은 성청 업무와 시작(時作)에 매진했다. 훗날 사람들은 원진을 백거이와 함께 원백(元白)으로 불렀다. 백거이와 신악부 운동을 주도하며 시가(詩歌) 혁신을 이끌어 후대에 받은 평판이지만, 아마 원진의 벼슬이 말년에 공부시랑, 절도사를 거쳐 재상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에 원백(元白)으로 호칭했을 거다. 당은 입신양명을 제일의 가치로 삼는 유자의 나라가 아닌가. 그러나 천년이 흐른 뒤에도 시인으로서의 평가는 백거이가 앞선다.
강주 분강 포구에서 원진이 백거이의 비파행에 서문을 써 주었지만, 원진은 백거이가 단숨에 읊어 내려간 609자 장문의 시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원진은 성도의 감찰어사 집무실에서 들창을 내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경탄을 넘어서는 질투였다.
설도도 완화계 초당에서 시작에 몰두했다.
사실 전에 원진과 설도는 서로에 대한 마음의 증표로 벼루를 동강 내 각자 나누어 가진 적이 있었다. 설도가 그 증표로 원진과의 결혼을 꿈 꿨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는 두 사람이 처한 처지가 달랐다. 나이 차이가 두어 살도 아니고 서너 살도 더 넘어서는 것이 설도의 마음을 움츠리게 했다. 퇴락한 하급 관료 집안 출신인 것도 명문거족 원씨 집안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 무렵 원진의 스승 이하경이 찾아 와 조카 이령을 소개하고 명문 이씨 집안에 장가 들 것을 종용했다. 이령은 명문 집안 여식답게 단아했지만, 질투심이 강했다. 원진이 간직하고 있는 벼루 조각을 찾아내 강물에 던져버렸다. 감찰어사 원진과 완화계 설도의 관계는 성도 바닥에 널리 퍼져 있었다. 원진은 이하경의 재촉과 장안 집안사람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이령과 재혼했다. 재혼을 한 원진이 완화계를 찾는 일이 드물어졌다. 원진이 설도에게 눈치 보인다는 말을 넌지시 했지만, 원진은 아직 젊은 육체를 가졌고, 이령은 설도보다 열 살이나 젊어 막 꽃봉오리가 피는 나이였다.
이제 설도의 초당은 적막했다.
설도는 백화지에 글을 쓰다가 창 너머 붉은 풀꽃을 보고 번쩍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손을 멈추었다. 아이 때 기와집 담장 아래 핀 봉숭아꽃 즙을 짜 손톱에 꽃물을 들이던 때가 떠올랐다. 백화지에 꽃물을 들여 치장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장안의 사람들도, 성도의 사람들도 붉은 색을 좋아했다.
설도의 초당 뒤뜰에는 수정 같은 샘물이 사계절 내내 솟아났다.
맑은 샘물을 떠 와 붉은 꽃 즙을 풀어 흰 종이를 물들여 보았지만 생각한 만큼의 색도가 나오지 않았다. 여러 번 값비싼 백화지를 망친 다음에야 은은한 붉은 색을 겨우 얻었다. 그것은 봉숭아 꽃물도 아니었고, 부용 꽃 붉은 꽃잎에서도 얻지 못했다. 다만 목부용 껍질에서 선명한 붉은 염료를 얻을 수 있었다. 홍련의 넓고 붉은 꽃잎에서 은은한 자색(紫色)을 우려냈다.
부용꽃과 연꽃으로 봄여름을 보내니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설도는 연붉게 물든 화지에 새 글을 써 보았다.
연꽃 피고 지니 촉산에 가을 젖어 들고
비단 편지 열어 보니 온통 그리움뿐이네.
연시(戀時)가 자염(紫染) 종이에서 훨씬 도드라져 보였다. 시인의 가슴도 수련 꽃잎처럼 벙그러졌다.
설도가 만든 종이는 완화계를 찾은 사람들을 통하여, 성도의 수많은 선남선녀에게 알려졌다. 사람들은 설도의 종이로 자신의 마음을 연인에게 알리려고 했다. 비망록도 백화지가 아닌 설도의 화지로 남기고 싶어 했다.
이제 설도의 종이는 자초와 홍화에서 얻은 붉은 색, 꼭두서니와 앵무새나무꽃에서 뽑아 낸 분홍색, 쪽물을 우려서 얻은 남색으로 변주되었다. 치자와 울금에서 황금빛을 뽑아냈지만 노란색 종이는 간직만 하고 유통을 할 수 없었다. 황제의 나라에서 금빛은 함부로 쓰면 안 되는 색채였다. 다만, 울금을 엷게 뽑아내면 연미색 종이를 얻을 수 있었다. 미색 화지는 문집을 엮는 선비들에게 새로운 호사품으로 통했다.
몇 해 안에 설도의 종이는 장안까지 유행하는 신문물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종이를 설도전(薛濤箋)이라 불렀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팬시상품, 브랜드 상품이 된 것이다.
설도는 밀려드는 홍화지, 청화지 주문에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재주와 명성이 당의 수도 장안 거리에 널리 퍼진 것은 분명 가슴 벅찬 일이었다. 어린 날 쫓겨 오듯 아버지 등에 업혀 서촉의 험한 봉우리를 넘어 서던 때가 어렴풋 떠올랐다. 아픈 기억이었다. 망부(亡父)의 생각으로 절로 눈물이 옷섶을 적셨다.
정신없이 몇 해를 보냈다.
문득 문득 원진이 몰래 찾아와 종이 만드는 일로 허기진 설도의 정신과 육체를 위로해 주었다. 금강 어귀 언덕에 억새꽃이 피었다 지곤 했다.
812년 원진이 갑자기 강릉부 사조참군으로 좌천되었다.
원진이 일전에 감찰어사 직무로 부수라는 곳의 역참에 묵게 되었는데, 불운하게 그날 부수 역참에 황제의 측근 환관 유사원이 원행을 하다가 들리게 되었다. 유사원 일행은 역참의 제일 큰 방을 요구했고, 역리는 이미 감찰어사가 묵고 있어 곤란하다고 했다. 유사원이 다짜고짜 원진이 유숙하고 있는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 와 채찍으로 뺨을 내리쳤다. 중앙에서 파견된 감찰 관리를 이렇게 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원진이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으나, 장안의 황제 헌종은 오히려 원진을 강릉부 말직으로 좌천시키며 일을 매듭지었다. 한, 수, 당, 송으로 중원의 왕조가 바뀌어도 황제의 측근 환관들의 횡포는 그칠 줄 몰랐다.
원진과 설도는 저물어 가는 금강 포구에서 이별했다. 설도는 원진의 소매를 놓지 않고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강가의 갈대도, 설도의 희끗해 져 가는 머릿결도 황혼의 역광에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水國蒹葭夜有霜 수향의 갈대에 이 밤 서리가 내려
月寒山色共蒼蒼 달빛 차가운 산색과 더불어 하얗다
誰言千里自今夕 누가 말했나, 천리 기약 오늘 밤 끝이라고
離夢杳如關塞長 이별의 꿈은 먼 관문 요새만큼 아득하구나.
설도가 원진에게 보내는 이별시가 원진의 가슴을 적막하게 쓸어내렸다.
그 옛날 형주 땅의 중심지 강릉은 지방의 대도시이고, 여전히 군사 요충지였다. 오랜 지방 생활로 지친 원진은 이제 시문으로 세상을 구하겠다는 순수한 이상을 접었다. 강릉부에 부임한 원진은 출세주의자가 되었다. 총명한 원진은 군무에 매진했고, 매사에 일부러 나서지 않아도 낭중지추,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두드러졌다. 강릉 태수는 그를 전적으로 신임했다. 몇 년 후 장안 조정으로 돌아와 선외부랑이 되었고, 황제의 측근 환관 위홍간과 교유 하면서 원진은 고부낭중, 중서사인 등 3품의 고관직을 이어 나갔다.
816년, 원진은 드디어 원하던 절강성 항주의 자사로 부임했다.
항주(杭州)가 어디인가, 강소성 소주(蘇州)와 더불어 강남을 대표하는 명승지 아닌가. 구슬과 옥이 있는 비경, 요림선경. 일찍이 사람들은 하늘 위에는 천당이 있고, 하늘 아래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고 했다. 그 옛날 월나라가 도읍을 정한 곳이 항주였고, 훗날 남송의 수도가 된다. 이곳이 물의 도시로 불리게 된 것은 수나라 때 북경까지 뚫은 운하가 시작되는 서호(西湖)에서 비롯된다. 서호에 아침 안개가 서리면, 그 몽환적 풍경은 사람들의 혼을 빼 놓는다.
훗날 소동파는 서호의 비경을 월나라 경국지색 서시(西施) 용모에 견주어 “짙은 화장을 하나, 옅은 화장을 하나 아름답기는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항주의 비경은 원진의 예술적 혼을 다시 소환했다.
그러나 이번에 원진에게 찾아 온 예술혼은 좀 방탕했다. 그는 연극 무대를 주로 찾았다. 절강성의 연극은 춘추시대 가무인 우(優)를 승계 한 것인데, 성도보다 한 수 위였고, 장안의 연극에도 비견되었다. 항주의 연극배우 중 유재춘의 재주와 미모가 발군이었다. 원진이 유재춘을 원했고, 유재춘 또한 준수한 용모에 시인으로도 이름 높은 벼슬아치 자사(刺史)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서호초어(西湖醋漁), 용정하인(龍井蝦仁) 기름지고 자극적인 서호의 요리에 절강의 미주 소흥주(紹興酒)가 곁들어지면서 두 사람의 연애는 더욱 질펀해졌다. 원진과 유재춘의 노골적인 사랑 이야기는 온 세상에 퍼져 나갔다.
원진의 문학은 더욱 세속적으로 변했다.
원진은 앵앵전(鶯鶯傳)이라는 연애소설을 쓰고, 각색하여 이를 연극 무대에 올렸다. 무대의 주인공은 물론 유재춘이었다. 원진이 묘사한 앵앵의 모습은 마치 하늘의 선녀와도 같았다.
常服睟容,不加新藏, 垂鬟接黛,雙膾消紅而已,顔色絶昇,光輝巧人
“평상복 입어도 용모 빼어나게 윤이 돌고, 장식 없이 동그랗게 틀어 올린 머리에 눈썹이 매초롬하고, 양쪽 뺨은 붉게 상기되었도다. 빼어난 목소리, 빼어난 얼굴 누구에게 견줄 것인가, 빛나는 광채 사람 애를 끓이는구나!”
이제 원진에게는 장안의 이령도, 완화계의 설도조차도 안중에 없었다. 눈에서 멀어져 마음에서도 멀어 진 그저 먼 곳의 사람일 뿐이었다.
먼 곳, 항주의 풍문이 사천 완화계 설도의 초당을 찾아 왔으나 설도는 애써 그 소식을 외면했다. 그에게 철마다 보내는 연시를 거듭하여 쓸 뿐이었다.
二月楊花輕復微 이월의 버들강아지는 가볍고 가녀린데
春風搖蕩惹人衣 봄바람 태탕하여 살랑살랑 옷깃에 나부낀다.
他家本是無情物 버들강아지야 본래 무정한 것이건만
一向南飛又北飛 님 향한 마음 남으로 북으로 날아가네.
완화계의 이른 봄은 아직 맵고 쓰렸다. 설도의 이마에 주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錦江滑腻峨眉秀 금강의 부드러움과 아미산 수려함이
幻出文君與薛濤 문군과 설도인 듯
言語巧偸鸚鵡舌 말씨가 공교하여 앵무새 혀 같고
文章分得鳳凰毛 문장 또한 봉황 깃털이로다.
紛紛詞客皆停筆 여러 시인들은 모두 붓을 놓았고
个个公卿欲夢刀 벼슬아치들은 꿈속에서도 영광이라 하네
別后相思隔烟水 헤어져 서로 그리운데 아득한 강 저편이라
菖蒲花發五云高 창포꽃 활짝 피고 오색구름 높은 곳의 그대
오랜 날들이 흐른 후, 원진으로부터 온 답장은 뜬 구름 같았다. 설도는 원진에게 보내는 시에 ‘무정한 버들강아지’, ‘님 향한 마음’으로 표현하면서 직설적으로 애모의 정을 드러냈지만, 원진의 답시는 애매모호했다.
문군은 탁문군을 말하는 것으로, 한나라 제일 문장가 사마상여와 천하일색 재원인 탁문군의 사랑이야기는 당나라 사람들 누구나 아는 전설이다. 두 사람은 맺지 못할 사랑으로 야반도주 이곳 완화계에서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울었다.
자신을 사마상여로, 설도를 탁문군에 비한 것이 아니었다. 금강의 부드러움이 탁문군이고, 아미산의 수려함은 설도라는 것이다. 수백 년의 세월을 넘어서 서촉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사람, 가장 뛰어난 재원(才媛)인 두 사람을 비교한 것이다. 문장이 봉황 깃털이며, 창포꽃 활짝 피고 오색구름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은 그녀 문장에 대한 상찬이며, 고매한 정신을 고양 시켜준 것이다. 헤어져 그리운데 아득한 강 저편이라고 한 것이 겨우 마음 한 켠이었다. 설도는 원진에게서 문장가로 칭찬받고 싶지 않았다. 원진 앞에서 더 이상 빼어난 시인이고 싶지는 않았다. 설도는 사랑에 목이 말랐을 뿐이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원진으로부터의 소식은 끊겼고 먼 풍문으로 그가 항주에서 서울 장안으로 금의환향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머지않아 재상으로 승차할 것이라는 소식도 함께 전해졌다. 원진과 이령의 부부 금슬은 다시 좋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도와 원진이 사랑의 증표로 나누어 가진 벼루를 깨버린 이령은 곧 정경부인이 될 것이다. 설도는 속울음을 울었다.
그러나 설도는 원진에게 보내는 연시를 멈출 수 없었다. 물색 나삼 옷자락을 여미고 봄바람이 부는 초당 뜰에 나왔다.
난분분(亂粉粉) 날리는 꽃잎에 봄이 완연했다. 설도는 엄혹한 겨울을 잊고 싶었다. 설도의 <봄의 바램>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염원일까. 그 바라는 마음을 정격 오언율시 4수의 시에 담아 쓰고, 비파 음율로 곡을 입혔다. 시대의 명작 춘망사(春望詞)가 탄생한 것이다.
아주 오랜 세월이 무심히 흘러갔다.
이제 설도는 무념무상의 일상을 맞이할 수 있었다. 도교에 입문한 것이다. 완화계를 떠나 깊은 산속 벽계방(碧鷄坊)으로 거처를 옮겼다. 대나무숲에서는 사시사철 맑은 바람이 불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더 이상 붓을 들지 않았다. 붉은 나삼은 이제 벗어 버리고, 회색 도포로 갈아입었다. 설도는 도교 여사제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무상(無上)한 날들이 이어지면서 열여섯 예기(藝妓) 때의 기억도, 열여덟 여교서(女校書) 때의 일들도 희미해졌다. 위고도 위정관도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원진에 대한 마음도 이제 투명한 물빛으로 맑아졌다.
832년(대화 6년), 지난 가을에 장안의 원진이 죽었다는 소식이 벽계방 대숲으로 날아들었다. 설도의 희끗한 머릿속에 쨍그랑 고드름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겨울의 끝이었다.
몇 달 후, 설도도 벽계방 음시루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늦봄날이었다. 오래 전 춘망사를 지어 노래 부르던 그날처럼 태탕(駘蕩)한 상춘의 하오였다.
☆ ☆ ☆
1945년 12월 해가 저무는 어느 날, 동숭동 서울대학교 교정에 첫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경성음악전문학교 교원에서 서울대학교 교수가 된 36세의 김성태는 그날 우연히 본 스승 김억의 번역시 <동심초>가 마음에 머물러 있었다. 원전은 당나라 여류시인 설도의 시 <춘망사>였다. 저녁 어둠이 내릴 때까지 잔상이 지워지지 않았다. 떠오르는 곡조 한 두 소절이 입가에 맴 돌았다.
어둠이 내린 연구실에서 그는 연필을 다듬어 곡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난방이 되지 않는 방은 몹시 추웠다. 김성태는 곱은 손을 부비면서 떠오르는 악상을 음표로 한자 한자 적어 나갔다. 천 년 박제된 여자의 혼을 불러내는 초혼의 의식이었다. 설도의 혼이 잠긴 우물은 깊고 푸르렀다. 새벽 동이 트고 나서야 곡이 완성되었다.
김성태는 벅차오르는 감격을 느꼈다. 그러나 앞으로 이 노래 ‘동심초’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가곡(歌曲) 중의 가곡(佳曲)이 될 줄을 감히 생각하지는 못했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난 날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 길은 뜬 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곡의 2절은, 1연의 김억 번역 부분을 변주하여 김성태가 직접 작사해 넣었다. 결국 마지막 숨결을 불어 넣은 것은 김성태였다. 깊은 잠을 자고 있던 설도의 혼이 천 년의 사랑 노래로 다시 살아나 하늘로 날아올랐다.
새벽 교정을 나서는 김성태의 눈에 마로니에 나목에 핀 얼음꽃이 반짝 빛났다.
<끝>
첫댓글 격려와 지도를 해 주신 김익하 소설가님, 좋은 평을 해 주신 김태수 박사님 감사합니다.
흩어진 구슬을 꿰는 일이였지만, 탈고하니 새로 만들어 낸 기분입니다.
천년의 혼을 꼭 불러내고 싶었습니다.
백거이의 비파행 전문을 싣는 것도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폰 화면이나 PC 화면으로 보는 것과는 분명 다른 맛이 있을 겁니다. 백거
이와 원진이 문우요, 서로 성당기 우뚝한 시인이라 이렇게 픽션으로 엮을 수 있었습니다.
천년의 혼을 건저 올린 설도의 시혼과 사랑의 이야기를 아침 운동을 접고 ^소설 동심초^ 에 빠저 정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