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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압하에서 얼마나 곤란한 것인가를 전민족에게 보여 줌으로써 한국 민족
의 항일독립정신을 크게 고무하였으며, 전세계를 향하여 일제의 잔이성을
폭로하고 한국 노동자 농민들의 실상을 보여 줌으로써, 전세계 민족적 평
화 애호인들에게 한국의 독립과 해방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케 하는 데 크
게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제3절 일제식민지하 조직적 노동운동의 대두 발전
1920년대 전반에 걸쳐 광범하게 번져나간 노동자들의 쟁의투쟁은 그것
이 자본주의발전에 따라 점차 성장한 노동자의 수가, 그리고 이들의 참혹
한 노동환경을 반영하여 노동자들이 생존을 위하여 투쟁하는 몸부림의 결
과라고는 하지만, 또한 노동자들의 생활현실을 적극적으로 타개해 나가도
록 하려는 노동운동조직의 대두 발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을 망각할 수는 없다.
특히 1919년 3ㆍ1 만세운동이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자, 많은 독립운동 지사들이 민족적 독립을 얻기 위해서는 한국의 광범
한 노동자 농민 속에 구체적인 세력적 조직을 가져야 할 것을 깨닫고, 노
동운동 또는 농민운동을 민족해방운동의 한 형태로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이를 위해 헌신한 사실은 한국 노동 운동의 발전을 크게 촉진하였던 것이
다. 그리고, 이와 같은 노동운동조직의 대두 발전은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노동자들의 사회경제적 자립를 향상시키려는 쟁의투쟁이나, 또는 그 밖의
모든 노동운동의 기본적 추진체의 역할을 담당하고, 한국 노동자들의 자립
향상과 한국민족의 해방을 불가분리적인 것으로 결부시키는 핵심체의 역
할을 맡아왔던 것이다.
1. 조선노동공제회와 노동대회
빈곤의 밑바닥에서 헤매는 식민지 한국의 근로대중을 위하여,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민족의 해방을 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농민 대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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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적 단결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선두에 나선 것은 지식인들이
었다.
①[조선노동공제회] 1919년 경성에서 박중화를 중심으로 한 선감적
지식인들은 조선노동연구회를 조직하더니, 이들은 1920년에 이르러 전국
적 노동자조직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조선노동자들의 사회 경제적 자립 향상에 관심을 갖느
사람들을 모두 회원으로 망라하여 박중화 외 150여인이 1920년 2월 11일
경성 광식대에서 조선노동공제회 결성집통대회를 갖고, 동 4월 3일 경성
명월관지점에서 발기인총회를 열어 조선노동공제회를 결성하였다. 이 발
기인총회에는 뚜렷하게 사회주의적 의식을 가진 사람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 대부분이 영세주의적ㆍ명리가ㆍ실업가ㆍ의사ㆍ변호사ㆍ신사 등의 인물
이 240명 참가하고, 노동자는 인력차부ㆍ지게꾼ㆍ신문배달부 등 주로
자유노동자들이 개인의 자격으로 100여명 정도 참가하였었다.
4월 11일 광식대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회장에 박중화, 총간사 박
이규, 의사장 오상근을 각각 선출하였다.
이렇게 성립한 조선노동공제회의 취지서를 보면 이러하다.
“전략…대리지공하니 정로탄탄이라. …명을 매하고 권을 농하여 타의 력을 식하
고 타의 노를 의하야 고누거각에 은의옥식으로 일생의 여흥을 천행하는 금지적
유물은 현대의 패덕이라. 자를 오고하고 낭청함은 상제의 정의며, 성근히 작업
하야 자력을 식하고 자의 의함은 인세의 정식이라. 차를 경대하고 부지함은
인도의 본체로다. 고로 노동의 신성하고 노동자가 존귀하다 함이 어찌 신의 거
룩한 활성이 아니리오. 명성도 노동자에게 황금도 노동자에게 안락도 노동자에
게 응하려고 상제께서 고대하시나니라. 그러나 노동자의 이해는 서로 같고 자립
도 또한 같도다. 자녀를 교육치 못하고 직업을 보장치 못하고 질병과 고난을 구
제치 못하야 다만 사환과 천지로 타를 위하야 석공하였으니 스스로 안을 문하고
삼상하면 타를 원망함보다 자기를 자책함을 마지 아니할 뿐이로다.
그러나 변하였도다. 자조와 자존을 자각과 자고를 지하였도다. 자아의 노력을
타에게 견탈치 아니하고 자아가 의식하며 자아의 행복을 타에게 의뢰치 아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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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자아에서 구하야 천의에 패하는 정의가 개하였도다. ……사는 반드시 정으로
패하고 정에서 성하나니 정로로 진하는 정인의 정행은 병혁도 야( )도 패히 조하
며 거할가. 아니니라…기하야 진하라”
그리고 그 목적은 “조선 노동사회의 개조를 위하여 1. 지식을 계발할 것
2. 품성을 향상시킬 것. 3. 저축근검을 장려할 것. 4. 민중위생을 장려할
것. 5. 환난을 구제할 것. 6. 직업을 소개할 것. 7. 기타 일반노동상황을
조사할 것. 8. 기관지 「공제」를 발행하여 일반노동문화를 보급할 것”
등으로 되어 있었다.
이상의 취지서와 목적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조선노동공제회는
창립 부조부터 단순한 노동자들 자기의 자발적인 단체가 아니라, 노자협조
적인 사회개량단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노동공제회의 활동은 노동자의 임금인상이나 노동 시간
단축과 같은 노동환경의 개선을 위한 사업에는 직접적인 간여를 하지 않
고 강연회 개최, 회지 발간 등의 문화사업에 주력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1920년 4월 조선노동공제회가 창립된 이후 제2-7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국 각지에 있는 기존 노동단체나, 또는 새로운 노동단체가
조선노동공제회지부의 형식으로 가입 또는 신설되었기 때문에, 1922년 동
회가 해산되기 전까지에는 그 회원수가 15,000명에 이르렀으며, 그리
고 이 회원들의 대부분은 실제적인 임금노동자로 구성되게 되었었다.
즉, 조선노동공제회를 창립할 당시의 발기인들이나 또 경성에 있는 조
선노동공제회본부의 간부들은 대부분 임금노동자가 아닌 지식층이었지만,
전국 각지에 있는 지부회원들은 배부분 노동자가 많았기 때문에, 조선노
동공제회는 지부회원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점차로 전국적인 노동자 조합
체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노동공제회 내부에서는 노동공제회를 진정한 노동자들 자신의
회로 만들어야 된다는 주장이 대두하여 드디어 “노동공제회는 제3회 정
기총회에서 일대파문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노동운동은 노동자 자신의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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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므로 진정한 노동자인 육체노동자에게 맡기라는 함성이 군중의 일부
에서 오르기 시작했다.”
조선노동공제회는 창립 당시 주동적 역할을 한 박중화가 동회 창립 직
후 허기죄라는 구실로 체포 투옥되자 박이규가 대신 회를 이끌고 나갔는
데, “1922년 회장 박이규가 퇴임한 후에는 완전히 회내의 통일을 상실하
고 윤덕병 일파와 차금봉 일파와의 대립이 표면화하여 권세의 쟁탈에 시종
하였다.”
그러다가 조선노동공제회의 간부였던 윤덕병은 사상상 또는 행동상 동
일보조를 취할 수 없는 분자를 노동운동의 대열에서 제법해야 되겠다는
의도로, 1922년 10월 15일 인사동회관에서 조선노동공제회의 해체를 결
의토록 하고, 새로 조선노동연맹회를 조직하였기에 이르렀다.
이에 반하여, 조선노동공제회내의 차금봉 일파는 동해체결의를 불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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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주장하며 조선노동공제회의 계속적 존재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서울청년회와 함께 조선노동대회 개최를 준비하
다가 1924년 4월 조선노동총동맹결성에 합류하고 말았다.
② [노동대회] 이 조선노동공제회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1920년 2월
16일 경성에서 김광제 등을 중심으로 ‘노동대회’라는 단체가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조선노동공제회와 같이 노동자의 상호부조와 인격의 향상을 목
적으로 하는 노자협조단체로 발기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성격이 조선노동공제회보다도 비조직적이며 계몽단체의 영
역을 벗어나지 못하여 주로 추상적인 내용의 강연회를 개최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다가 이 노동대회는 “회장 김광제가 창립한 지 얼마 있
지 않아 사망하고 문 탁이 대신 회장으로 되었다. 그 후 내부의 불통일은
내홍 속출하고 간부도의 쟁탈에 부심했기 때문에 점차 퇴세하였다. 더우
기 때마침 대정11년(1992) 제45차 제국의회에 대해 동광회 이희축 일파
의 조선내정독립청원서 제출에 있어 문 탁 등 노동대회 간부가 이에 서명
한 일이 발단이 되어 회원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드디어 문 탁 일파의 간
부가 인책 탈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회장제를 개정하여 집
행위원제로 하고, 노병조ㆍ유석태 등이 중심세력이 되어 동회를 유지해
왔는데, 내부의 불통일과 재정난으로 반간부열이 비등하고, 동년9월 임
시총회를 개최하여 집행위원 20명을 선거하고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
나, 내부의 사상적 대립과 분규는 피할 길이 없었으며, 1923년 7월 7일
제4차 정기총회에서 규칙 개정과 임원 개선을 단행하여 이병의ㆍ유황원ㆍ
최진만ㆍ김성규 등이 간부로 취임했으나, 기울어지는 회세를 막을 길이
없어 이 노동대회는 노동운동단체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노동대회가 간부층의 내부분열과 분규로 인하여 본래의 목적사항을 실
전하는 데 기여한 바는 크지 못했다고 하지만, 조선노동공제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노동대회에도 당시 조선 각지에 산재해 있는 노동자들이 기존
단체를 가지고 또는 신규로 단체를 조직하여, 제2-8표에서 보는 바와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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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 동욱(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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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당시 조선의 노동운동에 던지 파문은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이 선언문은 조선에 있어서의 사상운동이 일본의 각 주요사상단체와 밀접히 연결 협조하여야 하며, 노동운동은 계급적 사회주의운동으로 전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창했던 것이다. 그 뒤로 조선에서 노동 운동은 계급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중의운동자들에 의해서 지도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이 쏘련 및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지식인이었다.
1923년 이후 김 찬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쏘련에서 귀국하여 조선내에 있는 사상단체의 통일 단결을 종용하였으며, 또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조선에서 노동운동에 종사하고 있던 정운해 등 북성회인사들이 적극이에 호응하였기 때문에, 허다한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농민운동의 전국적 연합이 급격히 추진되었다.
노동운동단체의 결합을 위한 노력이 얼마나 집요하게 진행되었는가 하는 것은 당시 모당사자가
“1923년 가을부터 1924년 4월까지에 내가 교섭하고 또 교섭에 응한 비공식회합만도 명확치는 않으나 180회 이상에 달했다.”
고 말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노력과 아울러 1924년에는 지방 각지에서 노동운동계의 결합을 위한 요망이 고조되었던 것이다.
1924년1월에는 진주노동공제회, 마산노동합우회, 부산노동합맹의 3단체가 주최하여 진주에서 경남 사회운동자간담회를 개최하고 운동의 현상과 발전에 관한 토론을 마친 후 그 자리에서 남선노동조합맹발기조회라는 연합기관조직체를 발기하기로 하고, 60여개 단체가 발기단체로 되어 즉석에서 창립준비위원을 선정하고 대구에서 창립조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또 동년 3월에는 광주에서 19개 단체의 연합체인 전남청년연합회와 40여개 단체의 참가에 의한 광주노농연맹이 창립되어 이 광주노농연맹은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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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사회운동자간담회에서 결정한 남선노동조합맹발기에 참가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경상도와 전라도의 두 개 연합체가 1924년 3월 9일 가맹단체 90여 출석대표 150여명으로서 대구에서 남선노동조합맹을 결성하고, ‘노동운동의 전력을 집붕하기 위하여 전국의 조단결의 촉성을 기할 것’ 이라고 전국적 결합을 위한 압력을 중앙에 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전선노농 단체연합기관기성교섭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경성에서도 조선노동연맹회와 노농대회준비회 사이에 교섭이 진전되어 “1924년 4월 16일 82개 단체의 대표 77인이 참가하여 경성 Y.M.C.A.에서 전국대회의 개최를 선언하였다.
이 회가 성립되자 그간 중간적 입장에서 주저하던 다른 단체에서도 속속 가입하게 되어 제2일에는 88개 단체 대표 87인의 참석을 보게 되었는데, 이날의 공기는 ‘전국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단체는 전국적 조합맹을 조직하자’라는 제안으로 물의가 분분한 끝에 대체적으로 이 안이 결정화하여 가는 반면에, 남조선노농조합맹을 가입시킴으로써 전기의 목적이 원만히 실현될 수 있었으므로, 회의는 일단 중지하고 상경중에 있는 그들 대표자와 교섭하기 시작하였다. 준비회측에서는 교섭이 안 되면 대회로 나가고 교섭이 되면 조선노농조합맹을 조직한다는 전제하에 교섭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교섭은 성공하고 지금까지 3개 연합체로 정립된 듯하던 노농운동이 결합되어 1924년 4월 18일 경성 광무정에서 참가단체 181, 출석대표 295명이 모여 조선노농조합맹창리조회를 개최하였다.
조선노농조합맹의 강령을 보면
“➀오인은 노농계급을 해방하고 완전한 신사회를 실현할 것을 목적으로 함.
➁오인은 단체의 위력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철저적으로 자본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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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투쟁할 것을 기함.
➂오인은 노농계급의 현하 생활에 비추어 각각 공리 증진 경제향상을 기함.“
이와 같은 조노농조합맹은 조선의 노농운동이 무산계급 해방운동의 노선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강령을 내건 조선노농조합맹은 1924년 4월 19일 창립대회를 마치고 “다음날인 20일 장소를 옮겨 임시대회를 개최하고, 노동문제, 소작문제, 대동척문제, 대동아일보문제, 대각파유지연합 등 제반 사항을 토의 가결하고 거의 끝나려할 무렵 경찰의 해산명령을 받았다. 해산에 대해 분노한 5, 6백명의 군중은 혁명적 노동가를 고창하면서 자연스러운 행렬을 짓고 시가를 배회하며 시위운동을 시도하였으나, 마침내 30여명의 검동자를 내고 그 중 26명은 검사국에 송조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20일에 있은 임시대회에서 토의 결정된 노동문제를 보면 다음과 같다.
“➀가지방에 노동자단체를 조직하고 원조하며 각지방 노동자상황을 조사할 것.
➁노동운동의 근본정신과 배치되는 이류단체는 파괴할 것.
➂강습소와 판플렛 등으로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확고히 높일 것.
➃노동자 임금을 최저 1일 1원 이상으로, 노동시간은 8시간제로 할 것.“
이와 같이, 조선노농조합맹은 그 강령과 결의 등을 통하여 여러 가지 노동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하고 그 해결을 위한 투쟁의 선두에 나섰던 점에 있어서, 과거의 조선노동공제회나 노동대회 또는 조선노동연맹회보다도 이보 전지하였으며, 또 전국의 노동자 농민단체를 거의 총망라한 통일적 조직이었다는 점에서 조선노동운동의 커다란 진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합맹이 결성되자 전국 각지에 있던 노농단체들이 이에 가입하고, 또한 새로 단체를 조직하여 여기에 합류함으로써 조선의 노동자 농민들을 위한 조합맹으로서 명실상부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조합맹에 가입한 세포단체는 260여개소, 그 회원총수 53,00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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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이었다. 합총합맹 창립 이후 노동쟁의나 소작쟁의를 50여건이나 해결하고 기타 노농군에 많은 훈련을 주어왔다. 그리하여 합총합맹은 그 후 많은 난관에 부닥치기는 하였지만, 요감하게 이를 배제하고 조선노농운동에 대해 이론 및 정책상에서 그리고 또 실제적으로 다대한 활동을 하여 왔다.
그러다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은 별개의 독립된 조직으로 활동해야 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여 1925년 11월 19일 조선노농총합맹은 농민총합맹과 노동총합맹으로 분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26년 4월 22일에 분리대회를 열기로 하였으나 경찰의 집회불허로 실현을 보지 못하다가, 1927년 9월 7일에야 서면재회의 형성으로 조선노농총합맹은 조선농민총합맹과 조선노동총합맹으로 분리되었으며, 조선의 노동운동은 조선노농총합맹의 발전적 해소에 의한 조선노동총합맹의 설립으로 일보 전진한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➁조선노동총합맹 전국적 노동자조직으로서의 조선노동총합맹이 결성된 것은 1927년 9월 7일 조선노농총합맹을 노동총합맹과 농민총합맹으로 분리하는 것이 결정되었기 때문인데, 이러한 분리가 형식상으로 결정되기 이전에 노농 분리원칙은 이미 1925년 11월 19일 조선노농총합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결정된 것이다.
조선노농총합맹은 1924년 4월 19일 결성대회를 마치던 그날부터 일체의 집회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공계적인 합법적 운동이 억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집회불허정책이 노동자 농민들의 운동을 저지할 수는 없었으며, 날이 갈수록 소작쟁의와 노동쟁의가 격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노동자 농민들의 전국적 조직으로서의 조선노농총합맹은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이 어디까지나 성질이 다른 별개의 산업분리를 가지고 있는 이상 전국적 조직도 별개의 중앙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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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게 되어, 1925년 11월19일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은결의를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➀조선노농총합맹의 가맹단체 중에 놈임단체로 따로이 조선농민총합맹을 조직하고 노동단체는 조선노동총합맹을 조직할 일.
➁농민 노동 양합맹이 완성된 시에는 조선노농총합맹연합위원회를 조직할 일.
➂중앙지행위원회 연설회에서 상기항이 결의된 시는 가맹단체의 가결을 요함.
➃가맹단체의 가결을 요하는 방법은 서면대회의 방법을 취할 일.
➄가맹단체의 가결을 득하기까지의 일체사무는 상무집행위원엑 일임할 일.
조선노농총합맹에서 이러한 결정이 내리자 먼저 각 지방에서 노동자 농민의 연합단체를 가각 분화하기 위한 조직개편사업을 진행시켯다. 즉, 종래의 노농연합회, 노농연맹, 노동공제회 등을 각각 노동 단체와 농민 단체로 붐리 재편성하는 사업이 진행되었는데, 몇 개의 예를 들어 보면 1925년 12월에 영광노농연합회는 영광노동연합회와 영광농민연합회로 분리하ㅗ, 대구노동공제회는 대구노동연맹과 대구농민연맹으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1926년 초에는 무안노농연맹에 무안노동연합회와 무안농민연합회로 분화되었고, 계속하여 광양, 나주, 완도, 진주를 비롯한 각지 노농단체들이 노동단체와 농민단체로 분리 재조직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조선노농총합맹에서는 1926년 3월 24일 중앙지행위원회 지회허가를 얻기 위해서 경찰에 교섭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4월 21일에는 당무집행위원회를 열어 노농분리대회를 대의원 간담회의 형식으로 개최코자 산하 세포단체에 미제출회원명단의 재출, 출석할 대의원수의 배정, 노농혼합단체의 정리 등을 결정하고 이를 추진하였으나, 일제경찰은 간담회조차 허락하지 않아서 뜻을 이루지 못혔다.
조선 노농홍합맹에서는 경찰이 집회를 허락해 주기만 기대하고 있었으나 1년이 지나도 희망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다음 해인 1927년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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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10일 다시 상무집행위원회를 열어 조선농민총동맹과 조선노동총동맹의 두 개 단체 규약을 심의 결정하는 동시에, 양동맹 중앙위원으로 농총에 25인, 노총에 21인과 후포위원 및 검사위원 각 5인씩을 선출 결정해서 그 걳을 각 세포단체 서면표결에 붙이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를 노농총동맹에서는 동 9월 7일 개표위원들이 모여 개표하였던바 노동단체에서는 원안에 대해 찬성 98단체 의상불명 4 단체이며, 농민단체에서는 찬성 128단체 의상불명 4 단체였으므로, 소속세포단체의 절대다수찬성으로 조선노농총동맹을 조선노동총댕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리 결성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이것으로써 지금까지 조선노동자들의 전국적 조직이 노농 미분리의 혼합적 형태를 벗어나서 노동자 들만의 단일한 전국적 조직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노동운동은 보다 높은 차원에서 그 활동을 심화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노동총동맹은 그 출생부터가 집회조차 허용치 않는 탄압적 조건하에서 서면대회라는 형식을 통해 겨우 결성되었던 것이니 만큼 그 표면적인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조선노동총동맹의 많은 간부들은 수차에 걸쳐 반복된 공산당원 검거사건에 전파되어 체포투옥 되었기 때문에, 조선노동총동맹의 중앙맹부는 사실상 마비되고 ‘1928년경에는 극도로 침체상태에 빠져 간판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정황이 되었다.
조선노동총댕맹이 일제의 탄압으로 말미암아 비록 표면적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는 없었지만, 당시 조선노동자들의 유일한 전국적 조직으로써 노동운동을 조직 지도하는 핵심으로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1920년 후반기에 와서 전국적으로 보다 활발하게 조직된 지역별 노동조합연합회의 결성과 전국적 규모의 산업별 노동조합 출현은 모두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노동총동맹의 적극적 지도에 의존하였던 것으로 보아도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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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것이다.
지역별 노동조합연합체의 결성이 1925년 조선노농총댕맹이 조직되기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농민단체나 형평단체, 심지어 개인들까지 혼합되어 있는 경우가 있었으며, 노동조합들만의 지역별 연합체로서 실질적 역할을 다하지 못했었다.
여기서 잠시 1920년대 후반기에 들어와서 조직된 지역별 노동조합단합체들의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925년 5월에는 전남함평 에 있는 수개노동단체가 연합기관으로 함평노동조합연합회를 창립한 것을 비롯하여 전남 보성과 벌교의 노동조합이 연합하여 보역노동조합연합회를 창설하였으며, 1925년 8 월에는 경성인별직공조합 경성철공조합 경성급수부조합 등으로 경성노동연맹을 조직 하였다.
그리고, 1925년 10 월 수포에서는 제유노동조합 면업노동조합 정미노동조합 방직공조합 자유노동조합 발하노동조합 하차노동조합 문호노동조합 등이 연합하여 목포노동총동맹을 조직하였고, 원산에서는 종래에 40여개 소조를 합하여 원산노동회로 되어 있던 것을 결복노동조합 운반노동조합 부두노동조합 운송노동조합 두량노동조합 선박노동조합 해육노동조합의 7개 산업별조합으로 개편하고 원산노동연합회를 구성하였다.
1925년 11 월 전남 담양에서는 수차조합 우마차조합 운반조합 정미노동자조합 자유노동자조합 등이
① 오등은 계급적 단결력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투쟁함,
① 오등은 무신계급의 실질적 연계를 자각하고 일치단결을 기함,
① 오등은 상부상조를 생활기반로 하는 신질서의 실현을 위하여 최후까지 노력함.
등의 강령을 내세우고 담장노동조합연맹을 창립하였으며, 이들은 나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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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2월에 나주노동조합연맹 (세포단체) 광주정미노동조합 광주철공노동조합 광주인쇄직공조합 영암노동회 지도왜관노동조합등과 더불어 전남노동연맹을 발기하였다.
그리고, 전북 익산에서도 1926년 3 월 신문배달인조합 정미 접인부조합 우마차부조합 함열노동자조합 자유노동동맹 정원신목회 익산노동회 등 7개 노동 단체가 연합하여 익산노동연맹을 창립하였으며, 동년4 월에 가서 전북노동연맹을 결성하였다.
이와같이 전국 각 도시와 각도에 계속해서 노동연맹 또는 노동조합연합회의 이름으로 노동조합들의 연합체가 결성되었는데 이러한 노동조합들의 지역별, 또는 산업별 연합체들을 그 창립된 년대순으로 보면 대개 제 2-9 표와 같다.
제2-9표의 조사는 당싱의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보도된 자료에 의한 것으로 물론 불완전한 것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노동조합의 연합체들이 결성된 경향만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통치자들의 탄압이 전국적 노동자조직의 결성과 활동을 억압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적 노동조합연합회의 경성을 위한 집회조차 금지한 경우가 많았던 조건하에서 그들은 간담회니 협의회니 하는 명목으로 집회를 가지거나, 또는 서면대회의 형식으로 연합체를 결성해야만 했으니 그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1920년대 후반기까지만 하더라도 일제경찰의 탄압이 지역적 연합체에 대해서는 전국적 조직에 대해서보다 비교적 강력하게 집중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국적 표면활동을 할 수 없었던 조선노농총동맹이나 조선노동총동맹으로서는 방편적으로 지역별 연합체나 산업별 연합체의 활동에 전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조선노동총동맹은 그 주요간부들이 계속된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에 관련되어 많이 구속 투옥되었지만, 그래도 나머지 인원들은 끊임없이 전국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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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의 지역별 또는 산업별 노동조합연합체의 표면에서 각지의 노동쟁의를 조직 지도하여 또 그것을 후원하는 사업에 적극 참여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노동조합연합체들의 결성과 관련하여 특기할 점은 1920년대 후반기에 들어와 비로소 전국적 산업별 노동조합연합체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1926년 2 월 전 조선신문배달조합총동맹을 비롯해서 동년 3 월에 전조선인쇄직공조합총연맹과 조선철공총동맹이 조직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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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의 조직이 근대적인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발전하는 일보전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물론 당해산업부문노동자들의 (특히 인쇄직공들의 경우) 의식수준이 높아진 결과이기도 하지만, 조선노농총동맹 내지는 조선노동총동맹의 선진적 노동운동지도자들이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도 추진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4. 조선공산당과 신간회
1920년대 일제 식민지하에 대두한 조직적 노동운동은 초기의 조선노동 공제회 및 노동대회로부터 조선노동연맹회와 조선노농총동맹으로 나타났는데, 이들 조직적 운동은 1920 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다분히 정치적 성격을 가지는 조선공산당 및 신간회 등의 조직기반이 되었다. 그것은 특히 일제가 1925년 치안유지법을 공시하고 조직적 노동운동을 노골적으로 탄압하는 조건하에서 민족해방을 궁극의 목표로 삼는 정치운동과 식민지노동자들의 사회적 해방을 목표로 하는 당시의 노동 운동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서 전국적 조직으로 대두한 조직적 노동 운동이 조선노농총동맹을 거쳐 조선노동총동맹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공산당 및 신간회에 관해서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① 조선공산당 원래 칼 마르크스 Karl Marx의 이름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주의사상은 자본주의 발달과정에서 야기되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적 대립이 첨예화한사회에서 강한 전번력을 가지며, 또 그것은 그와 같은 사회에서 초기의 노동운동과 밀접하게 관련을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이론 자체가 자본주의하의 노동자계급을 어떻게 하여 계급적 착취에서 해방시킬 거인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노동운동과 무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에 사회주의사상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부터였는데, 1920 년대에 들어와 노동운동이 활발히 대두하게 됨에 따라 사회주의사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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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병행하여 활발히 보급되었다. 그 결과 조선에는 수다한 사회주의사상단체가 나타났는데 서울청년회 무산자동맹회 토요회 신사상연구회 사회주의자동맹 노동당 북풍회 화요회 적*단 건설사 해방운동사 신흥청년동맹 등의 단체가 모두 그것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사1990년 1월 1일 단체들은 점차 고조되는 노동운동 및 농민운동을 배경으로 1924년경부터 단일한 정치단체의 형성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1924년 10월 김사국 이영 등에 의하여 조직된 서울 청년회계의 조선공산당과 1925년 4월 김재봉 김 * 등에 의 하여 조직된 소위 화요회계의 조선공산당으로 구체화되었다.
1924년 10월 조직된 서울계 조선공산당이란 일찍이 1920년 에 김광제 이내의 등과 더불어 노동대회를 조직한 바 있는 김사국이 중심이 되어 우선 중앙조직을 완료하고 다음에 각도기관 및 세포조직에 착수한 하향식 비밀조직이었다.
1924년 10월 창립초의 중앙간부는 책임비서 * 조직부에 김사국 *전통신부 이영 수양부 김** ** 청년부 이** 사회부 박형* 노동부 이내의 민족부 김노만 연결부 이*발 검사부 *택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나중에 권태* 최익환 임혁근 박태선 한해 박원희 최창익 등의 참가를 얻었다.
이들은 당으로서 확고한 대중적 기반이 잡힌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정치운동이나 사회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 할 여유를 갖지 못한 채 화요회계에서 추진하는 조선 공산당 조직확장운동에 대해서 경쟁적으로 맞서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편 조선노동공제회와 조선노동연맹회를 이끌어 노는데 주도적 역해 * 정운해 등이 가담하고 있는 화요계에서는 1925년 4월에 전선민중대회 및 전선신문기자대회를 개최하도록 하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 4월17일 오후 경성부 황금정일정목에 있는**원에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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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요회계의 조선공산당에서는 중앙집행위원으로 김재봉 김* 조동* 김약수 정운해 주동건을 그리고 중앙검사위원에 윤덕* 송덕만 조봉암 등을 선출하였는데 그 대중적 조직기반은 전술한 서울계 조선공산당에 비하여 확고하였던 것이다.
이같이 별도로 결성된 두 개의 조선공산당은 1925년 6월경 각각 대표를 모스크바에 있는 코민테른에 파견하여 공산당으로서의 승인을 받으려 노력했는데 코민테른은 화요계 조선공산당을 정식당으로 승인하고 일국일당의 원칙입각해서 서울계 조선공산당은 하나의 클럽으로는 인정하나 화요계 공산당에 가입하라는 지령을 내렸기 때문에 조선공산당의 정통은 1925년 4월에 조직된 화요계 조선공산당에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성립된 조선공산당은 탄압에 혈안이 되어 있던 일제경찰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1925년 11월에 있었던 제1차검거를 비롯하여 1926년 1.10만세를 계기로 한 제1차검거 1928년 2월의 제3차 검거 1928년 7월 제4차 검거 1929년 3월 제5차 검거 1929년 5월 인점식 등 93명의 검거 그리고 1931년 함경북도 경창부에 의한 45명의 검거 등에 의하여 계속 수십 수백명의 검거 투옥되었기 때문에 체계있는 조직적 정치 사회운동을 전개 할 수는 없었으나 이들이 노동자조직의 내부에서 미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자 또는 공산당원들이 당시의 유일한 전국적 노동자 조직인 조선노농총동맹 및 그 발전체인 조선노동총동맹에서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종 직업별 노동조합 또는 지역별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데도 적극적인 활약을 하였다는 사실로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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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구체적인 예를 몇 가지 들어보면, 1925년에 조직된 경성노동연맹 서울인쇄직공청년동맹, 1926년에 조직된 조선신문배달조합총동맹 조선인쇄직공조합총연맹 조선철공총동맹 등은 모두가 공산주의자 또는 조선 공산당원들에 의하여 조직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특히 당시의 노동 운동에 대하여 조선공산당이 미친 영향은 노동 운동을 노동자들만의 독립적인 투쟁으로 방치하지 않고 당시의 모든 사회운동단체, 예를 들면 농민단체 여성단체 청년단체 형평단체들로 하여금 유기적인 협조관계를 맺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조선공산당의 직접적인 지도와 영향을 받고 있던 농민단체나 여성단체, 청년단체 그리고 형평단체 들은 어떤 지방에서 노동쟁의 가 발생했을 겨우 즉시 동지적 성원을 보내고 또 이것을 적극 후원하기 위한 각종 활동을 전개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이 노동운동에 준 영향은 결코 긍정적인 측면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조선공산당의 주도권쟁탈을 둘러싼 파벌형성은 노동운동의 통일적 발전에 적지 않은 해악를 끼쳤으며 또 조선공산당에 대한 일제의 누차에 걸친 대량적 검거가 그대로 노동운동에 커다란 타격을 주게 하였던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⑵신간회 1919년 3 1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이래 국내에 있어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은 저조한 상태에 빠졌는데 반하여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점차 앙양 된 데 따라 사회주의사상운동은 활발하게 진전된 것이 1920년 전반기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기에 들어와 일제의 탄압이 격심해지고 수차에 걸친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사회주의운동은 지극히 난관에 부닥쳐 새로운 운동 방향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저조한 상태에 있던 민족주의자들도 앙양되는 노동자 농민운동에 부응하여 사회주의자들에게 지지 않고, 무엇인가 대중적인 조직운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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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은 비록 사상적인 입장은 달리한다 하지만,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하나의 공동전선을 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조직을 추진한 결과가 1927년 신간회의 창립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신간회는 민족주의자 중의 일부가 식민지하의 자치운동을 들고 나온 이광* 최남선 최 * 등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고 합법적인 결사운동으로 비*협적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서 사회주의자와 제휴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된 일면과 , 또 사회주의자들의 일부가 강력한 탄압하에서 보다 광범한 대중과 결속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자들과 공동전선을 펴서 어떤 합법적 조직을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된 다른 일면이 부합하여, 민족단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해방운동의 합법적 대표기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신간회는 그 결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모두 연합하여 1927년 2월 15일 경성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200 여명의 대표가 참집하여 *시의장 신흥우 사회하에 창립총회를 갖고 회장 이상재 부회장 홍명대를 선출하고 강령과 규칙을 통과시켰다.
신간회의 강령은 1.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1. 우리는 단결을 견고히함, 1. 우리는 기회주의자를 일절 부인함 등으로, 일제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극히 온화하고 평범한 표어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신간회의 창립을 방임한 것은 단순히 신간회의 강령이 온화하다던가 또 신간회의 성격이 용납될 수 있 는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일제는 신간회가 조직되면
⑴ 총독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지주계급이 신간회에 가입하게 되면 그들을 통하여 조직내부 탐소과 배후 조종이 가능하다는 것, ⑵ 노도의 세로써 북방에서 밀려드는 공산주의사상의 정세하에서 차라리 이 혼합적인 단체에 좌우양이의 모든 사상가와 운동가들을 집결시키면 그 감시와 취체가 용의 하다는 것, 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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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본질적으로 부상객인 지주등 유산계급과 무산운동자들을 한 곳에 모아 서로 싸우게 하면 불로이득하는 어부지리가 크다는 것
등의 고등경찰적 기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당시 신간회의 창립에 임하는 사회주의자나 민족주의자 또는 일제 식민지통치자들의 의도야 어디에 있었던 간에, 그것이 일단 합법적인 표현단체로써 성립한 이상 전체 조선대중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27년 2월에 창립을 본 신간회는 불과 3년도 못된 1929년 말경에 이미 그 회원수 37,309인, 지회수 138개소에 달하였으며, 제 2-10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지회는 전국 각지에 광범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 전국 각지의 신간회지회들은 여러 가지의 민족적 제사건에 대처하여 규탄연설회의 개최 항의 제출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거니와, 각지에서 일어난 노동쟁의를 배후에서 조종 지도하는 데도 커다란 역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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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하였으며, 노동쟁의에 있어서 장기적 투쟁을 보장하기 위한 후원활동도 적극적으로 전개한 지회가 많았다.
그 일예로 1929년 원산총파업 때에도 많은 신간회지회가 원산 파업노동자들에게 동정금을 보냈으며, 또 신간회 원산지회에서는 적극적으로 나서 배후조종에 힘썼다.
그리고, 1927년 12월 18일 신간회 동경지회 제2회대회에서 신간회의 기본정책으로 제안한 것을 보면,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들 20여개 조항을 제안한 것 가운데
“7. 단결권, 파업권, 단체계약권의 확립, 12. 소년 급 부인의 야업노동, 갱내노동 급 위험작업의 금지, 13. 시간노동제의 실시, 14. 최저임금, 최저봉급제의 실시, 15. 공장법, 광업법, 해원법의 개정”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만 보더라도 신간회가 노동운동에 대해서 얼마나 열의를 가지고 참여하고 있었느냐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노동자들만의 단체가 아닌 신간회가 당시의 노동 운동에 있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당시 유일한 전국적 노동자조직이었던 조선노동총동맹이 일제의 탄압으로 말미암아 표면활동을 할 수 없었다는 데서 많은 노동 운동 지도자들이 방편상으로 합법적 표현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있다.
노동 운동의 지도자들은 조선공산당이 가혹하게 탄압되고 조선노농총동맹의 중앙간부들이 이와 관련하여 대량 검거되고 있는 당시의 환경하에서 신간회를 유일한 활동출로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간회의 합법적인 표면활동에 대해서 일제 경찰이 그것을 언제까지나 허용하고 보장할 의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 사람들의 민족해방운동을 말살하기 위한 고등경찰적 목적을 가지고 신간회의 창립집회를 묵인하고 있던 일제 경찰은 그것이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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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자, 온갖 구실을 붙여 탄압하는 한편, 정세판단을 잘못하여 신간회의 해산을 주장한 일부분자들을 조종하는 교묘한 술책을 써서 해체를 하도록 공작하였다.
그 결과 조선노동운동의 심화 발전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해오던 신간회는 1931년 5월에 창립된 지 5년만에 해산결의를 하고 해체되고 말았다.
신간회의 해체에 관하여 국제공산청년동맹은 1932년 1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신간회와 청총의 해소문제에 있어서 조선의 공산주의 제단체는 그 발붙일 곳을 불리하게 하였고, 또 중대한 정치적 오류를 범하였다. 민족개량주의자가 일본제국주의의 지령에 의해서 솔선 개시한 신간회 급 청총해소운동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공청제군의 오류가 있었다.’
결국 신간회의 해소는 일제의 고등경찰적 교묘한 술책에 걸린 일부 지회들의 해소운동을 당시에 참여하고 있던 사회주의자들이 잘못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행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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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일본제국주의의 위기와 노동운동의 심화 산복
제1절 일본제국주의의 위기와 노동자상태
제1차세계대전 이래 급격하게 발전한 일본제국주의는 1929년의 세계대공황을 계기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기업체의 파산은 속출하고 실업자는 범람하여 사회적 불안은 격화되었다. 이에 일본제국주의는 당면한 위기를 모면할 목적으로 1931년에 이르러 밖으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전쟁을 도발하고 안으로는 일본내에 중요산업통제법을 공포 실시하여 산업의 군사화를 시작하였다.
1931년부터 1936년까지 군수 공업에 투자된 금액은 70억원에 달했다. 그 중 53억원은 새로운 군수공업의 건설을 위해 투자되고, 나머지는 기존하던 기업의 확대를 위해 투자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유휴장태에 빠진 자본에 새로운 투자구를 제공하며 실업자를 감소시키기 위한 제국주의적 수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의 산업 군사화와 전쟁 도발 정책은 그들의 위기를 극복하기는커녕 점점 더 심각한 위기에로 몰아넣고, 만주사변에 이어 중일전쟁, 그리고 태평양전쟁에로 더 큰 전쟁으로 말려들게 하여 드디어는 패망의 날을 재촉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식민지 조선의 종주국인 일본제국주의가 그 위기를 모면하려고 산업을 군사화하며 계속적인 전쟁을 도발하게 되자, 식민지 노동자들의 상태도 자연히 그 영향에 의하여 지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즉 1930년대에 들어와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 대한 자본진출을 적극화하고 종래의 단순한 원료 공급지 및 상품 시장으로부터 대륙진출을 위한 병점기지로 재편성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의도는 어디에 있었던 식민지 조선의 광공업은 크게 발전하였으며, 이에 따라 노동자계급의 성장은 촉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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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장 종업원수는 1930년의 101,043명으로부터 1936년에는 188,250명, 1942년에는 520,439명으로 늘었으며, 광산노동자는 1930년의 31,100명으로부터 1936년에 139,934명, 1942년에 233,996명으로 늘어나 놀라운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광공업노동자 이외에도 토건, 운수 기타 각종 자유노동자의 수도 계속 증가하였으므로 1936년경 조선의 임금노동자 총수는 아마도 100만명을 훨씬 초과하여 150만명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조선철도협회의 조사 통계에 의하면 1928년에 임금노동자총수는 1,185004명중에 광산 및 공장노동자수가 328,184명이나 되었던 1936년에는 임금노동자총수가 150만명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추산해도 과히 무리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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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37년 이후의 시기에 있어서는 일제가 조선의 병점기지화정책을 더울 급격히 추진하였기 때문에, 광공업을 비롯한 임금노동자의 총수는 1943년말경 약 200만명을 초과하고 있었다. (제3-2표 참조)
그러나, 이 시기 조선 노동계급의 성장은 비단 국내의 산업분야에서 증가한 임금노동자수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밖에도 수많은 노동자 농민들이 관알선, 징용, 군요원 송출 등의 갖은 형태로 강제동원된 인원의 수도 식민지조선노동자들에게 무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944년 12월에 소집된 제86회 일본제국의회에 조선총독부가 예산 설명자료로 제출한 보고서에 의하면, 1939년 이래 조선에서 동원되어 일본본토, 구태, 남양군도 등지로 송출된 노동자의 총수는 1944년 6월 현재 444,306명이었는데, 1944년의 송출계획이 40만명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1945년 8월까지에는 100만명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와는 별도로 1939년 이래 1944년 5월 까지에 88,241명의 노동자가 군요원이라는 명목으로 일본, 중국, 남양 등지로 송출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1929년 세계대공황 이래 산업의 군사화와 전쟁의 확대, 그리고 군사팟쇼체제의 강화로 줄달음치고 있던 일본 식민지통치하에서 급속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