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2학년 최명은이라고 합니다.
국경을 넘은 치료의 손길 그리고 마음의 정화
고단한 시험과 수업에 지친 본과생에게 방학은 스트레스와 압박감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생명수와 같은 시간입니다. 오랜 시간 쉬고 여유를 즐기면서 신체적인 피로를 씻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만 보고 달려온 그 동안의 길을 되돌아보고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4주간의 여름 방학 중에서 미얀마 해외 봉사를 다녀온 일주일의 시간이 제게 그러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제가 참여했던 아산 해외 봉사단은 울산의대 봉사동아리 ‘해열’의 지도 교수님의 추진 하에 다양한 과의 교수님들, 간호사들, 울산의대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집니다. 구성원과 진행 형식이 정해져 있는 공식적인 단체가 아니라, 각각의 경우마다 다른 구성원들이 모여서 출발 전 준비에서부터 도착 후 마무리까지 스스로 일궈내는 모임입니다. 함께 모여서 의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기여를 하고 책임을 나누어 맡게 됩니다. 따라서 그 어느 활동보다도 소속감과 주체성 그리고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얀마 해외 봉사는 항공사의 문제로 일정이 변경되면서 출국, 귀국을 제외하고 이틀의 여행, 삼일의 의료 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짧은 시간이었고 열악한 조건이었지만 미얀마의 각기 다른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천 명에 달하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병명을 맞추고 약을 처방하는 수준을 넘어서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첫 번째 진료는 미얀마의 수도인 양곤 근교에 있는 도서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말이 도서관이지 실제로는 커다란 천막과 같은 장소였습니다. 이불과 같은 천으로 칸막이를 만들어 각 과를 분리하고, 현지인들이 미리 준비해준 책상과 침대로 진료실을 차렸습니다. 열시부터 오전 진료를 시작해서 점심 식사를 하기 전까지 예상치 못한 여러 문제들이 발생했었습니다. 모두들 첫 날이라 일에 능숙하지 않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모여들어 실내는 오가는 사람들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많은 혼선을 겪었고 선풍기도 없이 습하고 더운 날씨에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지만, 놀랍게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도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였고, 다섯 시에 모든 진료를 마무리하기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그 결과 오전에는 50여 명만을 진료할 수 있었지만, 오후에는 그 다섯 배에 달하는 환자를 진료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진행되었던 진료와 더위에 지칠 만도 했지만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도 모두들 문제점을 논의하고 열정적으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는 모습이 제겐 정말 놀라웠습니다. 구성원 누구 하나 허튼 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고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일을 꿋꿋하게 이어나갔던 것이 첫날부터 삼백 명에 달하는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숙소에 도착해서도 새로운 방침을 정리하고, 다음 날을 위해 짐을 다시 꾸리고, 빠진 것이 없는지 철저히 점검하고, 내일 계획을 요약하고 나서야 모두들 편히 잠에 들 수 있었습니다.
둘째 날은 양곤에서 조금 더 떨어진 마을로 들어가서, 이층으로 된 건물에서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첫 날과 달리 현지인들이 미리 많은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다들 일에 익숙해지면서, 심리적으로도 여유가 생겨 환자의 이야기와 불편 사항에도 더 귀를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같은 시간 동안 사백 명의 환자를 진료하면서도 방문한 아이들에게 레고를 나누어 주고, 현지 정치인들에게 초음파 검사를 해주는 부가적인 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점을 고치기 위한 논의에 집중하던 첫 날과 달리 둘 째 날에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모두들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그 미소는 레고를 선물 받은 현지인 아이들의 활짝 핀 웃음꽃보다도 더 순수해 보였습니다. 봉사라는 것이 다른 사람을 위해 베푸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정화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는 과정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치료는 현지인들이 받는 입장이었겠지만, 행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받는 입장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날에는 좀 더 멀리 버스를 타고 이동해서 조그마한 교회에서 환자를 보았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숲 속에 난 작은 길을 따라서 걸어가다 보니, 나무들 속에 가려진 아름다운 교회가 서서히 그 모습을 보였습니다. 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너무나 순박하고 천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진료실에서 돕는 역할을 맡아서 환자들을 관찰할 기회가 많이 있었는데, 가끔은 환자들 병이 매우 위중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병의 진단을 통역해 주었을 때, 대부분 환자들의 반응은 저의 예상보다도 훨씬 담담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소승 불교가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현지인들에게 생사일여, 윤회 사상이 생각 깊숙이 자리 잡아서 그런 것인지, 치열하게 상황을 바꾸어 나가기보다는 현실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서 인지, 아니면 현대 의학에 생소해서 병에 대한 이해가 상대적으로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아직도 궁금증이 남습니다. 어쩌면 반대로, 제가 질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에 목표를 둔 현대 의학에 익숙해져서 삶과 죽음에 대한 여유 있는 모습이 생소하게 느껴졌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얀마 봉사는 단순히 환자를 많이 치료하고 진단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현지의 열악한 의료 환경을 대신해서 치료를 베풀자는 단순한 인도주의적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살고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살고 있지만, 사랑과 공감의 손길은 어디로든 뻗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저와 현지인이 모두 느끼게 해주는 계기였습니다. 마지막 날 진료실에서 중년의 한 남자 환자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찾아왔었습니다. 과거력을 물어보는 도중에 그 환자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면서 몇 년 전 자연재해로 가족들을 모두 잃고 아들과 자신만이 살아남았는데 아들이 매일 밤을 술로 지새운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 분의 백내장을 치료해서 눈을 잘 보이게 해드리는 것이 물론 중요한 일이었지만, 내면의 상처를 들어주고 따듯하게 손을 잡아드리던 것도 값진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연거푸 고개 숙이며 하던 감사하다는 말이 비록 미얀마어로 단어 자체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진심 가득한 눈빛을 통해서 충분히 마음으로 전달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닫혀 있던 마음을 열어 그들과 공감하는 과정이 국경을 넘어서 우리들의 내면을 정화시켜 주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몸은 비록 지치고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진한 감동과 여운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 우리의 따듯한 손길이 그 분들의 마음에, 그리고 진료를 마치고 손 흔들어 주던 그들의 밝은 미소가 우리들의 마음에 계속 남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