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밑그림
강표성
세월이 그린 오선지다.
그동안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주저앉은 흔적이다. 미처 삭이지 못한 그늘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거친 침묵, 뜨거운 말줄임표가 골을 이뤘다. 달항아리처럼 매끄럽고 깔끔하던 그 자리, 엄마 손이나 연인의 입술을 허락할 정도로 맑고 단정한 이마에 스며든 생의 암각화다.
햇살 좋은 날, 거울을 바라본다. 그늘진 이마 위로 해맑은 시절이 얼비친다. 날렵한 사지 바지를 입은 아버지가 보이고, 모본단 저고리에 벨벳 치마를 즐겨 입던 엄마가 어른거린다. 아버지는 주름에 민감하셨다. 바지 선이 제대로 잡히지 않으면 외출복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나 보다. 수직의 권위인 양 반듯한 선으로 무장하고 세상으로 나아가던 아버지에게 후줄근한 구김살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엄마는 넉넉한 치마꼬리 대신에 일 바지를 갖춰 입어야 했다. 한번 주름진 삶은 생의 다리미질로도 쉬이 펴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권위와 맵시를 지탱하던 바지 선은 어느새 이마 위로 옮겨와 깊은 빗금으로 자리잡았나.
구김살에 파묻힌 두 어른은 이젠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셨다. 봄만 되면 떠난 분들의 그림자가 내게 스며든 것을 본다. 알게 모르게 드리워진 침묵의 선들.
지난 계절은 혹독했다. 두드리고 두드려도 꼼짝하지 않는 문에 가로막힌 듯했다. 돌아서고 싶었지만, 너무 깊이 들어와 발을 뺄 수 없었다.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짐승처럼 웅크린 채 동굴을 버텼다. 바깥은 봄날로 출렁거리고 햇살도 노랗게 빛나는데 새순을 틔울 수 없는 계절이라니. 벌써 몇 번째인가, 마음을 틀어막은 채 기도문만 읊조리던 나날이었다.
다시 눈을 홉뜨고 앞을 바라본다. 들메끈을 고쳐 매고 이 시간을 건너가야 한다고 다짐해도 그 자리다. 접힌 마음에 토를 달고 밑줄을 긋는 날들이 이어진다. 보이지 않는 주름 하나 더 새겨지는 순간이다. 갈수록 생의 구김살이 깊어지고 내 안의 잔금도 짙어진다.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주름이 늘어나 문제다. 마음의 주름살은 숨어있다가 사람 사이를 무지른다. 구김이 많을수록 관계와 관계는 미끄러지고 작은 틈새에도 걸려 넘어지고 만다. 밀리고, 접히고, 눌린 모습은 서로에게 나아가는 선이 아니라 멀어지는 계기가 된다.
최근에도 그랬다. 친구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 양말을 뒤집듯이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었다. 그냥 넘어갈 수 있었는데 뾰족한 속을 드러내고 말았다. 부글거리던 마음이 가라앉고서야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의 주름, 그것이 문제였다. 문제는 상대에게 있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내게 있었다. 사소한 일에도 곤두서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내 안의 구멍이나 쓴 뿌리를 그대로 방치한 결과인가, 숨겨진 자아가 걸림돌이나 가시가 되어 순간에 사람을 넘어트리고 만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은밀하게 숨어있다가 존재를 드러내고 만다. 불편한 밑그림이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슬픈 나이테다.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기에 더 무참하다. 매번 내가 먼저 넘어지고, 아직도 그 자리를 맴도는가 싶어 마음이 아릿하다.
의외로 반대인 경우도 있다. 마음의 빗금조차 넉넉하고 부드러운 이가 있다. 자신의 굳은살에 연연하지 않고, 상흔마저 독특한 무늬를 이룬 거 같아 사람이 다시 보인다. 그의 숨겨진 밑그림이 오묘하게 다가온다. 그라고 어찌 상처가 없었을까만 내게는 기분 좋은 주름으로 읽힌다. 다양한 음표들이 조화를 이루는 오선지 같아 나도 몰래 눈부처로 다가가고 싶다.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다. 그 안에 드리워진 내면의 풍경이 중요하다. 얼굴에 세월의 풍상이 자글자글하다고 선입견을 가질 일도 아니고, 철저하게 다림질을 했다고 자기 관리에 충실하다고 생각할 일도 아니다. 누구나 주름 뒤에 가린 진짜 풍경이 중요하다.
산다는 것은 주름을 경작하는 일이다. 작은 선 하나하나에 지나온 세월이 담겨있다. 그래선지 나이와 동떨어진 얼굴을 보면 어쩐지 어색하다. 내용이 부실한 악보 같달까, 덜 채워진 캔버스 같아 어딘지 모르게 미진하다.
주름은 생을 기록하는 상형문자다. 평생 흔적을 새기며 나아가는 인생이다. 참 괜찮은 모습 뒤에 숨어있는 오만한 주름살을 마주했을 때는 뒷맛이 씁쓸하고, 온갖 풍상이 새겨진 얼굴에도 자애로운 가선을 보면 마음이 놓인다. 그럴 때마다 칙칙하고 울퉁불퉁한 나의 밑그림이 드러날까 봐 두 손을 여민다.
곱게 화장한다고 마음의 결이 말끔히 가려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불쑥 튀어나오는 말 한마디, 손짓 하나가 진짜 모습이다. 오늘 나는 사람들의 숲에서 어떤 풍경으로 읽힐 것인지. 마음의 이랑을 고르며, 조심스레 길을 나선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