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이두 글을 보다가 과거에도 제기했던 의문을 다시 한번 제기합니다
“ 無乎事 ” 는 이문입니다. 언문으로하면 “업스온일”
“ 是去有等以 ” 는 언문으로 “ 이겨이신돌로 ” 이며 “이것이온줄로”로 해석됩니다
지방관아는 일반인을 상대로 모든 문서를 작성하므로 언문과 이문을 혼용하는데 이문으로 올라가는 문서가
중앙에서는 한문으로 번역하여야 하므로 이문관이 필요한 것입니다.
순서로 보면
언문(諺文) - 이문(吏文) - 한문(漢文)..
서우성 선생님의 이 문장에서 의문이 드는것은 최종적으로 중앙에서 이두문을 한문으로 번역할때 쓰는 문장이
현 중국말 어순으로 쓰여진 문장인가요?
가령 훈민정음 해례본의
國之語音 異乎中國與文字 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
이 문장이 중앙에서 쓰여진 한문이 맞다면, 중앙조선인들이 쓰는 한문 문장이 어째서 고립어와 똑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들어서입니다
제가 과거에도 이 의문 때문에 이런 글을 쓴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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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과 현재 중국말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보니 이두(吏頭)에 대한 의문이 생기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이두(吏頭)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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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吏頭) ·이토(吏吐) ·이투(吏套)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호칭은 이승휴(李承休)의 《제纜齋�(帝王韻紀)》에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에는 쓰이지 않은 듯하며 고려시대에 들어와 점차 공문서나 관용문에 쓰이면서 생긴 명칭인 듯하다.
이두는 넓은 의미로는 한자차용표기법(漢字借用表記法) 전체를 가리키며 향찰(鄕札) ·구결(口訣) 및 삼국시대의 고유명사 표기 등을 총칭하여 향찰식 이두 또는 구결식 이두 등의 말로 쓰이기도 하나, 좁은 의미로는 한자를 한국어의 문장구성법에 따라 고치고(이를 통칭 誓記體表記라고 한다) 이에 토를 붙인 것에 한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두는 신라 초기부터 발달(儒理王 때의 辛熱樂, 脫解王 때의 突阿樂 등)한 것으로 추측된다.
대체로 의미부(意味部)는 한자의 훈을 취하고 형태부(形態部)는 음을 취하여 특히 곡용(曲用)이나 활용(活用)에 나타나는 조사나 어미를 표기하였다. 이두를 이러한 요소들의 명칭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방식의 표기는 한국어 문장 전체를 표기하게 되는 향찰에 와서 그 표기의 난숙기를 이룬다.
《서동요(薯童謠)》 《혜성가(彗星歌)》가 진평왕(재위 579∼632) 때의 작품이므로 6세기경에는 그 표기법이 고정된 것으로 보인다. 훈민정음이 창제될 때까지는 한문번역의 구실도 하였으며,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에는 그 쓰임이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나 소송문 ·고시문 ·보고서 등의 관용문에는 여전히 쓰였으며 조선 후기의 영 ·정조 때까지 사용되었다.
이두를 창안한 사람이 설총(薛聰)이라고 하나 《서동요》나 《혜성가》의 제작연대가 6세기경이라는 것과 이두의 표기가 보이는 경주의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591) 및 설총이 신문왕(재위 681∼691) 때의 사람이라는 사실로 보아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두 사용의 한 예를 들면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권6, 호율(戶律) 남녀혼인조(男女婚姻條)의 “凡男女定婚之初 若有殘疾 ·老幼 ·庶出 ·過房 ·乞養者 務要兩家明白通知 各從所願 寫立婚書 依禮嫂嫁 若許嫁女已報婚書及私約”을 이두로 “凡男女定婚之初良中 萬一殘疾 ·老弱及妾妻子息 ·收養子息等乙 兩邊戈只 仔細相知疾爲良只 各從所願以 婚書相送 依例結族爲乎矣 女家亦 婚書乙 曾只通報爲 私丁音定約爲遣”라 해석하였다.
이는 원문을 번역한 번역문의 구실도 하며 밑줄 그은 부분이 형태부를 나타낸 것으로 그 읽는 법과 뜻은 다음과 같다. 良中 → 아 ·아에 ·아의(∼에, 處格을 나타내는 말)/等乙 → 들을(‘들’은 複數接尾辭),‘을’은목적격)/戈只 → 이, 익기(‘이’ 또는 ‘n’의 뜻으로 主格을 나타내는 말)/爲良只 → 얏기(‘하여’와 같은 뜻)/以 → 으로(造格의 뜻)/爲乎矣 → 오되(하되)/亦 → 여, 이(여기서는 주격을 나타내는 말로 쓰임)/曾只 → 일지기(현대어와 같음)/爲 → 며(하며)/私丁音 → 사사로이, 아뎌(현대어와 같음)/爲遣 → 고(하고)...
대충 이러한데.. 그 내용중
대체로 의미부(意味部)는 한자의 훈을 취하고 형태부(形態部)는 음을 취하여 특히 곡용(曲用)이나 활용(活用)에 나타나는 조사나 어미를 표기하였다
이 구절에 많은 생각을 갖게합니다
한국어는 교착어에 속하여 단어가 활용될 때 단어의 어간과 어미가 비교적 명백하게 분리되며 조사나 어미가 나타납니다
반면, 현 중국어는 고립어에 속하여 조사나 어미가 없고 격변화가 없고 격관계의 표시를 어순에만 의존하게되어있는데, 이두에서 조사나 어미를 표기하기위해 한자의 음을 차용했다는 것은 중국(조선, 정확히말해서 신라?)어가 고립어가 아니라 교착어라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조선의 사료들은 하나같이 고립어인 현 중국말의 어순과 문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사료에는 고립어의 특징처럼 조사나 어미가 나타나지않고 어순또한 한국말과는 전혀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는겁니다
그런에 이두(吏頭)는 사료들과는 달리 어미나 조사가 나타나고 어순또한 한국말과 흡사합니다. 만약 사료들이 윤색된것이 아니라면, 사료와 이두(吏頭)간에 나타난 극명한 차이는 무엇때문일까요?
이두(吏頭)가 위작일까요? 아니면 조선에서 정말로 두가지 말이 혼용되었다는 것일까요?
참고로 현재의 중국어와 아주 흡사한 영어는 옛날에는 굴절이 많았으나,소유격 -’s 이외의 , 격변화를 상하고, 격관계의 표시를 어순에만 의존하게 되었으며 고립어에 가까워졌습니다
서세동점 시기에 현재 중국어와 영어간에 모종의 급격한 교류가 이루졌을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있어 교류조차 힘든 게르만 계통의 영어와 동양의
중국어가 그렇게 흡사한지 설명이 힘듭니다
첫댓글 현재의 한글은 말[言]에 맞추어 일제의 조선어학회에서 만들었으며 현재의 중국은 중국이란것을 인식시키기 위해 한문문장을 중심으로 말을 만들어 대륙에 교육시킨결과라고 봅니다. 일반인이 글을 몰라도 말은 하기때문에 말의 발음표기가 필요하고 또한 말에는 군더더기가 많으니 줄인것이 文이라 봅니다. 이때 말의 표기과정에서 군더더기인 어미나 조사가 사용되어진 것이 이두인 것으로 보이며,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의 말, 즉 음을 일단 문자로 표기하는 것이 향찰 혹은 향언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나라(羅羅)라고 쓴것이 실제는 나라[國]의 발음을 그대로 쓴 것입니다. 언어도 새로이 만들어진 결과로 보입니다
역순으로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도 한글- 국한문 혼용- 한문으로 되었다고 배웠습니다. 일제시기에 한글을 배운 즉 가갸거겨로 배운 세대는 한글 맞춤법이란 것을 모르고 소리나는 대로 적었습니다. 국한문 혼용은 누가 사용했으며 누구를 위한 글이었을까요?. 한문은 또한 누가 사용하고.....
한반도를 교육하는데에는 40년 세월이 걸렸고 중국을 교육하는데에는 7-80년 세월이 걸린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그 이후로는 스스로 굴러가고 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