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未年의 역사
단기 4347년 말띠 해 甲午年(갑오년)은 물러가고 4348년 양띠 해 乙未年(을미년)이 각일각 다가오고 있다. 送舊迎新(송구영신)하느라 다들 종종걸음 치는 바쁜 연말이다. 갑오년 한 해는 말의 해라 그랬는지 말처럼 날뛰는 한 해가 되고 말았다. 온 나라를 나락으로 빠뜨렸던 세월호 참사가 잠잠해 지나 싶더니 ‘정윤회 문건’이 연말 대한민국을 다시 한 번 뒤집어 놓고 있다.
그러나 인간세상이야 혼란스럽든 말든 자연의 순환법칙은 一毫(일호)의 差錯(차착)도 없이 진행돼 간다. 춘하추동 계절의 변화도 그렇고, 해가 뜨고 달이 지는 하늘의 섭리도 엉성한 것 같지만 빈틈이 없다. 하늘은 말없이 천지 만물을 낳고, 양육하고, 변화시키며, 다시 생명체를 완성시키는 生育化成(생육화성)의 天道(천도)를 다할 뿐이다.
말처럼 날뛰던 갑오년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고 양같이 순하고 착한 을미년이 눈앞에 다가와야 함도 역사의 순리다.
양띠 해인 을미년에는 『國史大事典(국사대사전)』의 年表(연표)를 살펴봐도 역사적인 사건이나 사고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檀君朝鮮(단군조선)의 건국에서부터 4310년까지의 기록을 보면 두 해 정도가 역사에 남을 만한 사건들을 전할 뿐이다. 을미년이 양처럼 순한 해여서 그랬을까?
먼저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나는 건 3268년(서기 935년, 고려 태조 18년)의 을미년이다. 이해 3월 後百濟(후백제) 神劍(신검)이 왕위에 오른다. 후백제를 건국한 甄萱(견훤)이 후처의 아들 金剛(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신검, 良劍(양검), 龍劍(용검) 등 正妃(정비) 소생의 삼형제가 아버지를 金山寺(금산사)에 유폐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되자 그해 6월 견훤은 고려에 투항, 왕건이 후백제를 칠 때 향도가 되어 결과적으로 아들과 골육상쟁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해 12월에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 敬順王(경순왕)도 백성들을 肝腦塗地(간뇌도지 : 간과 뇌가 땅에 패대기쳐질 만큼 참혹하게 죽음)시킬 수 없다는 명분으로 천년 社稷(사직)을 들어 신생국 고려에 투항하고 만다. 이에 끝까지 항전하자던 麻衣太子(마의태자)는 눈물을 뿌리며 皆骨山(개골산 : 금강산의 겨울 이름)에 들어가 중이 되고 草食(초식)으로 최후를 마친다.
단기 3628년(서기 1295년, 고려 충렬왕 21년) 을미년에는 삼국시대 이래 耽羅國 (탐라국)으로 존재하던 탐라가 濟州(제주)란 이름으로 바뀐다.
조선 憲宗(헌종) 1년(단기 4168년, 서기 1835년)에는 강화도에 해일이 덮쳐 370호가 침수되고 75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을미년에 기록된 최대의 자연재해인 셈이다.
전년인 갑오년에 비해 역사적 사건 사고가 비교적 적었던 을미년도 조선의 高宗(고종) 32년(단기 4228년, 서기 1895년)의 을미년이 되면 그동안 참아 왔던 사건 사고가 한꺼번에 몰아서 터지기라도 하듯 역사상 사건 사고가 가장 많았던 한 해가 되고 만다. 이해 을미년은 전년에 일어난 甲午更張(갑오경장)을 뒤처리하는 해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먼저 이해 3월에는 동학농민봉기의 영도자 녹두장군 全琫準(전봉준)이 日帝(일제)에 의해 처형된다. 이로써 東學(동학)도, 농민봉기도 좌절을 곱씹어야 했다.
4월에는 한성사범학교가, 5월에는 한성외국어학교가 설치돼 우리나라 최초의 사범학교와 외국어학교가 설립된다. 9월에는 太陽曆(태양력)이 채택돼 이 땅에 처음으로 양력 사용의 길이 열리게 된다.
11월에는 斷髮令(단발령)이 내려져 다음해 1월 1일(양력)부터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깎게 했다. ‘몸과 머리카락과 피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니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라고 하는 유교의 가르침에 젖어 있던 이 나라 백성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조처였다. 衛正斥邪派(위정척사파)의 거두 勉庵(면암) 崔益鉉(최익현)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면서 격렬히 저항하기도 했다.
뭐니뭐니해도 이 해 을미년을 대표하는 역사적 사건은 8월에 일어난 乙未事變(을미사변)이었다. 閔妃弑害事件(민비시해사건 :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는 민비가 명성황후로 추존되기 전이라 민비 명칭을 그대로 사용함), 明成皇后弑害事件(명성황후시해사건), 여우사냥(일본 작전명)이라고도 불려지는 이 사건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삼포오루)가 주동이 되어 排日親露政策(배일친로정책)의 배후인물로 지목된 민비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이었다.
이때 미우라는 낭인, 자객들을 고용, 왕비의 침실인 경복궁의 玉壺樓(옥호루)에 난입하여 우리의 국모인 민비를 시해하고 시체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처음에는 일본을 끌어들여 개화정책을 펴다가, 壬午軍亂(임오군란)으로 청을 끌어들여 親淸政策(친청정책)을, 청일전쟁으로 청나라가 패하자 이번에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려던 민비의 줄타기외교가 빚은 비극이었던 셈이다.
민비시해사건으로 국모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인 11월에 단발령마져 내려지자 이에 격분한 유생들이 勤王倡義(근왕창의)의 깃발아래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드디어 전국 각지에서 乙未義兵(을미의병)을 일으킨다. 제1차 항일의병이라고도 불리는 을미의병은 친일파 군수 등을 처단하고 일본군의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등 전과도 올렸으나 대부분 유생들로 구성된 의병은 관군과 일본군과의 교전 끝에 패퇴하고 만다.
단기 4288년, 60년 전 李承晩(이승만) 대통령 시절의 을미년은 조용한 한 해였다. 2월에는 2대 부통령이요 전라도가 낳은 교육가, 기업인, 언론인이며 정치가인 仁村(인촌) 金性洙(김성수)가 사망했다. 3월에는 趙瓊奎(조경규)가 국회부의장에 당선되고 10월에는 충주비료공장이 기공되는 정도로 한 해가 마무리 된다.
아쉬운 마음으로 갑오년 헌년(年)을 보내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년(年) 을미년을 맞이해야 겠다. 해마다 그래 왔지만 내년 4348년 을미년은 제발 양처럼 순하고 착한 한 해가 되어, 기록에 남지 않아도 좋으니 사건 사고 없는 , 국운융성의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강산이 여섯 번 바뀌는 60년 후의 을미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1 周甲(주갑 : 60년 만에 다시 같은 干支(간지)로 돌아오는 것) 후의 을미년 우리 대한민국의 모습은, 이 세계의 광경은, 저 우주의 형체는 後天開闢(후천개벽)의 모습으로 변해 있을 테지. 아무리 100세 시대라지만 이 나이에 60년 후의 을미년 모양은 보지는 못할 터. 저승에서나 지켜볼 수밖에….
해가 가고 옴을 제목을 붙이지 못하고 그냥 「무제」라고 노래한 김삿갓의 시 한 수로 글을 끝내야 겠다.
年年年去無窮去(연연연거무궁거 : 해마다 이 해가 가되 한없이 가네)
日日日來不盡來(일일일래부진래 : 날마다 이 날이 오되 끝없이 오네)
年去日來來又去(연거일래래우거 : 해가 가고 날이 오되 오고 또 가네)
天時人事此中催(천시인사차중최 : 자연과 인간의 일 이 가운데 재촉하 네)
단기 4347년 12월 14일 대구에서 抱民 徐昌植
첫댓글 좋은글 잘 봤습니다.
보름밖에 남지 않은 갑오년 한해를 마무리 잘 하시고
다가오는 을미년 한해에는 행운과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