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앨범에서 블러는 1960년대 비틀스(The Beatles)와 킹크스(The Kinks)의 화려한 사운드 구성부터, 1970년대 매드니스(Madness)나 스페셜즈(The Specials)의 투톤 사운드(2 tone, 1960년대 자메이카 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뉴웨이브 음악), 그리고 XTC와 잼(The Jam)의 팝적인 감수성과 비판의식을 버무리기 시작한다. 과거의 기타팝들로부터 빌려온 음악적 유산을 1990년대에 맞게 '업데이트'한 음악, 즉 "브릿팝(Britpop)"이라는 용어로 설명 가능한 장르가 탄생한 것이다. 지금이야 브릿팝이라면 초기의 라디오헤드(Radiohead)나 콜드플레이(Coldplay) 같은 멜랑콜리한 기타팝을 떠올리지만, < Modern Life Is Rubbish > 발매 당시의 브릿팝은 좀 더 계급적 함의를 담은 용어이기도 했다. (물론 모든 장르의 상업적 성공에서 드러나는 급속한 '형식주의로의 환원'은 브릿팝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았다)
이후 이들은 < Parklife >(1994)에서 < Modern Life Is Rubbish >가 놓친 상업적 감각을 더함으로써 브릿팝의 왕좌에 오른다. 휴양지에서의 성적 일탈에 대한 들뜬 기대감을 표로하는 댄스곡 'Girls and boys'로 시작하여 향수병에 대한 (고향의 일기예보를 들으며 장소에 얽힌 추억을 차곡차곡 곱씹는) 지리학적 처방인 'This is a low'에 이르기까지, 앨범은 마치 1990년대에 유행했던 플라스틱 제품 같은 매끈하고 반짝이는 인공성과 아름다운 멜로디를 담은 좋은 싱글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4집 < The Great Escape >(1995)는 이러한 밴드의 성향을 극단까지 밀고나간 앨범이었다. 다양한 악기사용에도 불구하고 앨범의 사운드는 빽빽한 기타 사운드에 갑갑할 정도로 가두어져 있으며,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군상들에 대한 연민 없는 조소는 다양한 상황극 속에서 '현실의 탈출구가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 시기 블러의 음악은 당시 영국의 사회분위기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보수당 집권 하에서 소외되었던 노동계급의 불만은 1997년 노동당 토니 블레어(Tony Blair)의 총리선출과 함께 20여 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루어낸다. 당시 토니 블레어 정부가 낡은 보수당 정권의 이디엄을 대체하기 위해 사용한 캐치프레이즈 "쿨 브리타니아(Cool Britannia)"는 고리타분한 영국의 옛 전통이 아닌, 오늘날 영국을 살아가는 (주인공이라 주장하는) 노동계급의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긍정하고 이를 고취하기 위한 용어였다. '모던 라이프 3부작'은 '쿨 브리타니아'가 대두하기 직전 치솟은 영국 사회의 모순점을 가장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고발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블러는 '새로운 영국'의 '새로운 목소리'로 부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블러가 영국 음악계에 가져온 '새로운 세대성'은 이들의 발목을 잡는 족쇄로 작용하기도 했다. 노동당 집권 이후 모두가 샴페인을 터트리며 장미빛 전망을 얘기하기 시작하자, 이들의 비판적인 시선은 위선적인 잘난 척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상업적인 멜로디에 비판적인 가사를 담는다는 비난 역시 이에 해당한다) 여기에 "중산층 출신이면서 노동계급을 대변하는 척 한다"는 오래된 비난과, 출신 성분에서 이러한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운 '진짜 노동계급 출신'인 펄프(Pulp)와 오아시스(Oasis) 같은 밴드들의 급부상 등을 거치며 블러는 한물 간 스타로 치부되었다.
< The Great Escape >의 실패(?)에 따른 침체기를 겪으며 블러는 '너무나 블러답지 않은', 혹은 '너무나 블러다운' 방향으로 활로를 찾는다. 의미심장한 셀프타이틀인 < Blur >(1997)에서 이들은 "브릿팝은 죽었다 (Britpop is dead)"는 선언과 함께 자신들이 공들여 쌓아올린 양식적 특성들을 완전히 부정한다. 매끈한 기타사운드와 관현악 파트는 사라지고 얼터너티브(Alternative) 록의 영향을 드러내는 노이지 사운드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메시지도 사회적인 이야기를 배제한 채, 개인적이고 모호한 심상들을 다루기 시작한다. (이런 점은 데뷔작 < Leisure >와의 연관성을 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페이브먼트(Pavement)나 소닉 유스(Sonic Youth), 다이노서 주니어(Dinosaur Jr.) 같은 미국 인디/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을 연상시키는 거칠고 음울한 사운드는 발매 당시 "상업적 자살"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앨범은 'Song 2'의 세계적인 히트와 함께 밴드 최고의 상업적 성과를 거두었다.
사운드적으로는 기존 블러로부터 탈피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자신들의 사운드와 메시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는 밴드의 특성은 여전하다. 'Song 2'는 1990년대 얼터너티브/컬리지 록 사운드의 '상업적 요소'를 양식화한 곡이다. 전형적인 'Stop-n-start' 풍의 잠잠한 도입부와 노이즈 기타가 폭발하는 후렴구, 맥락 없는 가사는 픽시스(Pixies)나 너바나(Nirvana)의 곡을 연상시킨다. 다른 점이라면 'Song 2'는 분명한 상업적 의도를 가짐과 동시에, 소위 이러한 '대안적' 사운드의 이면에 감추어진 요소들을 패러디하고 조롱한다는 것이다. (귀에 익숙한 "woo-hoo!" 코러스가 이러한 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자신들이 영향 받은 형식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도 그 대상을 객관화하여 바라보고 비판한다는 점에서 < Blur >의 이질적인 사운드와 이전의 앨범들을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블러의 대상에 대한 '거리두기'가 잘 활용된 예로 영화 < Trainspotting >(1996)을 들 수 있다. 영화 중반에 사용된 'Sing'(< Leisure > 수록)은 도입부의 동일한 상황에 흘러나오던 이기 팝(Iggy Pop)의 'Lust for life'를 대체한다. 절도 후 경비원과 추격전을 벌이며 '삶에의 욕망'과 함께 "(보잘 것 없는) 인생을 선택하라"던 주인공 렌턴의 세상을 향한 자신만만한 조롱은, 약물로 인한 관계의 파탄과 삶의 몰락을 보여주는 일련의 과정을 지나 전혀 다른 맥락에서 반복된다. 우울하고 절박한 피아노 연주와 건조한 노이즈 기타는 초반부 스릴 넘치는 마약중독자의 삶 이면에 도사린 피폐함과 비애를 드러낸다. 물론 이것을 온전한 블러의 공이라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대상에 쉽게 공감하지 않고 '이면의 상황'을 드러내고자 하는 이들 음악의 핵심이 영화와 훌륭하게 조응한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감독 대니 보일(Danny Boyle)과 블러의 훌륭한 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기 팝의 "Lust for life" 삽입장면
블러의 "Sing" 삽입장면
2009년 NME 誌의 주선으로 재결합한 블러는 싱글 'Fool's day'(2010)와 'Under the westway'(2012)를 발표하며 간헐적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현재 작업 중이라는 밴드의 8집 앨범이 언제 완성될지는 불투명하다. (데이먼 알반의 첫 솔로앨범 < Everyday Robots >(2014)의 발표소식까지 겹치며 컴백은 더욱 요원해졌다) 밴드의 작곡을 전담해온 알반의 최근 행보를 볼 때, 감성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는 이들 음악의 특성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블러의 음악적 발전과정은 지극히 영국적이고 형식 지향적인 성향에서 비정형적이고 내밀한 영역으로의 이동을 이루어냈다. 밴드로서 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찬사와 비난, 상업적 몰락과 재기를 거쳐 온 이 베테랑 밴드가 그 수많은 굴곡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존경받는 밴드'로 불릴 수 있는 데는, 스스로에게 함몰되지 않는 냉정한 거리두기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