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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교실 스크랩 고교생을 위한 인생론(1982)
樂而忘憂 추천 0 조회 47 08.08.06 10: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교생을 위한 인생론

   이 이야기는   운영자의 저서  고교생일기(진장춘 저 : 1982)에 수록된 글을 약간 수정한 것이다.  

인생을 바르고 성공적으로 살려는 고교생을 위하여 쓴 글이다.  

1. 청소년기의 회의

 

  룻소는 그의 교육 소설 에밀(Emile)에서 청소년기를 제2의 탄생이라고 명명(命名)하였다. 청소년기는 육체적 성장이 가장 활발한 시기로서 17∼18세가 되면 육체의 성숙은 이미 성인의 문턱에 서게 된다. 그러나, 육체적 성숙에 비하여 정신적 성숙은 미숙을 면치 못할 뿐 아니라 사회 생활 역시 성인의 경제적 도움과 정신적 보호 아래 영위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불균형에서 오는 부조화는 청소년에게 불안과 갖가지 갈등을 안겨준다.

  청소년기는 질풍 노도의 시기라고 한다. 청소년의 젊음은 이상을 세우고 무한한 가능성에 도전하게 된다. 지칠 줄을 모르는 그들의 이상은 아직 충분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므로 순진한 정의론과 단순한 논리를 내세우게 한다. 그들은 그들의 이상과 논리에 어긋나는 기성 세대의 행동과 논리에 대하여 강하게 반발한다. 그 때에 기성 세대는 '너는 아직 어려서 모르니 어른이 되면 자연히 알게 된다.'는 식으로 납득할만한 설명도 없이 그들의 이상을 무시해 버리고 만다. 청소년들은 기성 세대와의 대화의 단절을 느끼고 고독감에 빠진다. 이제 성인들이 청소년들을 무시하듯이 청소년들도 성인을 무시하고 자기네들의 독자적 문화를 주장한다. 청년 문화라는 말이 있고, 히피니, 태양족이니, 전후파(아프레 겔)니 하는 말들이 모두 청소년들의 욕구 불만 해소를 위한 그들 나름대로의 세계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경향이 일시적이며 비정상적인 것을 이내 깨닫게 된다. 그들의 생각이 한편에 치우쳤고 다분히 감정과 욕망의 산물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청소년기를 회의의 시기라고 한다. 아동은 가족과 학교와 같은 주변의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성인이 시키는 대로 의심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청소년은 성인의 명령에 이유도 모른 채 무조건 따르지는 않는다. 이제 그들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의하여 독자적으로 인생을 살아야 하고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함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주체적 자아로서 내가 내 인생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알아야 겠다는 인간다운 자각의 시초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을 알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자신의 무지(無知)를 알라는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보다 인생과 나의 의미를 아는 것이 인간다운 삶의 시작임을 깨우쳐 주는 더 깊은 뜻이 있음을 간과(看過)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청소년기에 품었던 이러한 순수한 의문은 잡다한 삶의 욕구와 분주 속에 묻혀버리고 성인으로 갈수록 더욱 자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하기야 인생의 의문을 평생 추구한다고 해야 반드시 풀린다는 보장도 없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인간다운 욕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의문에서 참다운 인생을 살아갈 붕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청소년기가 갈등과 부조화의 시기이며, 성인의 준비기요, 참다운 인생에 눈뜨는 시기임을 생각해 보았다. 이러한 청소년기는 인생의 어느 시기보다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이 시기에 체험한 자각이 옳고, 인생의 지향이 바르고, 곧으면 이 자각과 지향은 성공의 기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중요한 청소년기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2. 인생(人生)과 진리(眞理)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욕구

  청소년기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기에 앞서, 나와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잠시라도 생각하는 것이 순서인 것 같다.

  자아에 대하여 눈뜨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생노병사(生老炳死)하는 유한한 인생의 모습에 눈을 돌리게 되고 선과 악, 이상과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고민하며, 고통에 찬 인간의 모습에서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우선 인간의 왜소함과 유한성에 눈을 돌리게 된다. 빛이 200억 년을 가야 끝이라는 대우주의 크기에 비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는 빛이 11시간이 걸리는 거리라고 한다. 그 크기의 비는 17조 : 1로 대우주가 지구라면 태양계는 작은 먼지에 비교된다. 작은 먼지속의 점인 지구. 지구속의 먼지와 같은 인간의 미소함에 이르면 우주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공간의 세계가 이렇듯이 시간의 세계인 영원과 인간의 유한도 비교할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인간의 100년 수명은 우주의 연령이라는 200억 년에 비하면 얼마나 짧은 것인가? 우주의 연령을 100년으로 잡으면 인생은 0.2초 밖에 되지 않는다. 우주의 연령 200억 년도 영원에 비하면 또 찰나인 것이니, 인생의 유한성은 아침 이슬에 비하기에도 과(過)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거시의 세계가 그런가 하면 미시의 보이지 않는 세계인 원자핵과 인간을 비하면 인간은 소우주의 크기와 같다.

  이러한 신비의 세계 속에 외로이 던져진 인간은 과연 아무런 의미도 없는 우연의 산물인가? 내가 무생물이 아닌 생명체로 그 중에서도 대우주를 사유할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초로인생일망정 행운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런 의미도 모르고 우주의 고아로 외로이 던져진 나의 고독한 모습에 이르면 인간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한다는 부모나 애인도 나를 대신하여 죽을 수는 없을 뿐만 아니라 고통 하나를 대신해 줄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인간은 지독한 이기주의자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유없이 남을 위해 희생될 수 없으며 고독해진 나는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고 나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생각하며 고민하고 전전긍긍할 뿐이다. 파스칼은 이와 같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관심하고 그저 쓸데없는 심심풀이로 소일하고 있다고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인간의 사유 능력은 세상에 진리가 존재하며, 그 진리를 궁구(窮究)하며, 그 진리를 붙잡고, 그 진리가 이르는 대로 산다면 안심입명할 것도 같은 믿음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궁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을 형이상학(形而上學)적 욕구라고 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형이상학적 동물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의문은 누가 쉽게 이야기해 줄수도 없을뿐더러 과연 몇 사람이 이 의문을 풀고 가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진실하게 살기를 희구하는 한 이 욕구를 버릴 수는 없다. 이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평생 철학도가 되어야 할 것인가? 우리나라 哲學의 대가인 박 종홍 선생은 「(철학을 시작한 지) 지금 40년이 가까와 오건만, 그것도 내가 하고 싶다던 철학 공부도 그럭저럭 계속해 오고 있건만, 아직도 사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부끄러운 노릇이다 <생활과 지성 p.10>.」라고 고백하였다. 그렇다고 인생의 의미 추구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또, 반드시 철학도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이 글을 조금 더 읽으면 알게 된다. 배우는 자인 우리 청소년은 겸허하고 경건한 구도의 자세로 독서하고, 사색하며 자아관과 인생관을 형성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인생은 괴롭다거나, 즐겁다거나 하는 식으로 가볍게 속단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

  수많은 철학자들이 필생의 노력으로 인식해 낸 진리란 과연 절대적 진리일까? 하나의 사실을 두고 각기 다른 진리를 주장하고 있다. 신이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한다. 우주의 근원이 물질이라는 유물론이 있는가 하면, 우주의 근원이 정신이라는 유심론이 있고,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원론이 있다. 그 주장을 들어보면, 모두 그럴 듯하다. 만약 인간에게 진리를 발견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수백의 철인들의 사상이 각기 서로 모순되지는 않을 것이다.

  근세에 들어와서 올바른 지식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로, 경험이 올바른 지식의 근원이란 베이컨의 경험론과, 이성이 올바른 지식의 근원이라는 데카르트의 합리론이 팽팽히 맞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칸트는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를 규명하여 본질의 세계(칸트는 이를 物自體라고 하였다.)는 인간이 영구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칸트의 이러한 결론을 빌리지 않아도 인간의 진리 인식 능력의 한계를 각기 모순된 주장을 하는 철학자들이 이미 증명해 준 셈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진리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혹자는 진리가 절대적일 필요는 없으며,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어서 시대마다 진리가 다른 것이므로, 나의 시대에 내가 그것을 위해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다면 그것이 나의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唯一한 절대적인 眞理에 대한 염원을 해소해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욕구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의 不完全性 때문에 거부될 수밖에 없다.

 

  삶의 지표로서의 진리

  

  그래서 인간은 절대적 진리의 발견 대신 그 시대에 삶의 방향을 주는 사상을 생각하게 되었다. 실용성에서 진리를 구하는 프라그머티즘이나 20세기 불안의 세계 속에서 자기 탐구와 자기 성실을 최대 과제로 삼는 실존주의와 같은 철학이 나타나서 그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확고한 인생관을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내가 가야 할 길인가에 대한 확신은 있어야 하고, 그 길을 현실에 적용하면서 독서와 사색과 경험을 통해 독자적인 철학을 가져야 한다.

 진리 추구의 욕구에 대한 결론부터 내린다면, 인간은 절대적 진리의 요청을 종교에서 믿음의 형태로 구하고, 현실을 살아가는 지혜를 현실 속의 철학 사조에서 구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철학과 종교의 조화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길

인간은 왜 형이상학적 욕구를 갖게 되는 것일까? 단순한 지적 호기심에서일까? 인간의 학문에 대한 욕구는 지적 호기심에서 출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진리를 알려는 욕구는 참된 인간의 삶이 무엇인가를 모색하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공자는 참을 배우는 것은 仁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人格의 수련(修鍊)을 인생의 최대 과업으로 생각하였다. 소크라테스도 知와 德의 일치를 주장하며 독배를 마심으로써 몸소 그것을 실천하였다. 진리란, 단순히 호기심의 대상일 수만은 없다.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되게 사는 것인가가 우리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며, 인간의 참된 길은 난해한 형이상학 속에 존재한다고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범하고 보편적인 진리에서 구해야만 될 것이다. 어느 정도의 학문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으나, 한 직업에 종사하는 甲男乙女도 참되게 살 방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참된 인간의 길을 걷는 인류의 위대한 스승은, 이론적인 哲人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보편적인 내심의 소리에 호소하고, 평범한 진실을 실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철학도들에게만 그 진실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말과 누구도 수긍 할 수 있는 논리로 만인에게 인간의 길을 가르치고 있다. 그들이 예수, 공자, 석가이다. 나는 내가 아는 많은 철학자나 사상가의 사상에서 그럴 듯한 논리와 삶을 살아가는 얕은 지혜는 배울 수 있었으나, 그들은 나에게 진실을 가르쳐 주지는 못했다. 왜 그럴까? 불혹(不惑)이 넘어서면서 나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철학자나 사상가는 머리와 혀로 인생을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와 공자와 석가는 무엇으로 인생을 말했단 말인가? 비록 그들은 입을 통했지만, 그들은 사랑에 불타는 가슴과 의를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는 행동으로 우리의 가슴속 깊은 내심의 소리(良心)에 공명을 주었다. 그들의 언행의 일부가 굳어버린 활자가 되고 서투른 후인들의 솜씨로 번역되어 극히 일부를 전하는 데에도, 많은 사람(殉敎者)들은 그 진리의 말에 생명을 바치기까지 하며 흠모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 이유를 규명함으로서 우리는 인간의 길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양심의 소리에서 풀어져햐 할 것이다.

 

  양심의 소리

 우리는 인간의 회의와 형이상학적인 욕구(眞理欲)와 지성의 한계(인식 능력의 한계)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길은 知性을 통한 난해한 형이상학의 추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의 길을 더듬어 봄으로써 인간의 내심에 있음도 알았다.

 소크라테스는 양심의 소리를 신의 계시(daimonion)라고 하여 그가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 섰을 때 반드시 그 소리에 따랐다고 한다. 그는 범인보다 사심(邪心)이 양심을 가리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우리도 노력에 의하여 마음의 갈등을 양심의 소리로써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은 그대로 나타나면 사람은 누구나 착하다()」고 하였으며, 이 이는 「청소년은 자기도 성인이 되기로 마음을 먹어야 한다. 대개 衆人과 t성인을 비교하면 그 근본 성품은 같다<격몽요결·입지장>.」고 하였다. 이와 같이 유교에서도 인간의 착한 본바탕에 입각하여 인간의 최고 목표인 성인의 도를 제시하고 있다.

 예수도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 할 것이다.<마테오복음 8장 3절>.」라고 하였으니, 신약 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산상 성훈도 인간의 양심에 호소함으로써 뭇 사람에게 공명을 주고 참된 인간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원효는 「사람은 원래 영원하고 포괄적인 하나의 마음, 하나의 생명을 거역하고 감각적 욕구와 감정의 노례가 됨으로써 스스로 세계를 더럽히는 존재가 되고 세상은 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은 그 마음을 바로잡아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하였다.

 위에서 말한 소크라테스의 daimonion이나 유교의 근본 성품이나 예수의 어린이 마음이나 불교의 본래의 고향은 모두 인간의 양심을 본능과 구별하여 인간다움의 길을 제시하는 기본으로 삼아야겠다. 철학계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일으킨 칸트는 순수 이성(知性)의 한RP를 비판하고 그의 大 실천이성 비판을 끝맺는 말에서 다음과 같이 인간 양심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내가 두 가지 사물을 여러 차례로 또 장시간 성찰하기에 종사하면 할수록 그 두 가지 사물은 더욱 새롭고 더욱 높아지는 감탄과 외경을 내 마음 중에 가득 채우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물이란, 내 머리 위의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마음속에 있는 도덕법이다.… 나는 그것들을 내 눈앞에서 보고 그것들을 내 실존의 의식과 직접 결합한다.<그것들이 있으므로 내가 실존한다고 자각한다.><실천 이성 비판 최 재희역 p.242>」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인간의 길은 도덕적인 완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도덕의 절대적 원리를 仁(유교),慈悲(불교),사랑(크리스트교)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이성과 감성과 의지를 동원하여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인간의 길을 닦아 나가야 할 것이다.

 

 

  3.행복의 장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행복을 인생의 목적이라고 하였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무엇이 행복인가에 대해서는 각기 생각을 달리한다. 그런데, 행복이란 인간이 바라는 즐거움으로 인간이 원하는 결과이지 인생의 목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진정한 인생의 목적은 결과보다는 그 동기와 과정 속에서 찾아야 될것이다.

 나는 행복의 조건에 관한 평범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상식적 행복론을 펴고자 한다. 인간은 끈임없이 행복을 추구한다. 인간은 생존하는 동안 숨쉬지 않고 활동한다. 잠시도 그냥 있을 수 없다. 삶이란 곧(움직임)이다. 움직임은 무생물의 정(靜)적 상태보다는 좋지만 불안정과 부족을 의미하기도 한다.영어의 want(부족)라는 말은 욕망을 의미하기도한다.

 이러한 인간의 욕구가 추구하는 대상을 가치(價値)라고 한다. 가치는 평면적 구조를 가진 것이 아니라 우열의 입체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치에는 부(富), 명예, 생의 향락과 육체의 편안 같은 외적이고 수단적인 가치가 있는가 하면, 목적지인 가치로서 건강과 생명, 진리, 미(美) ,선(양심)의 실현 종교 등을 들 수가 있다. 목적적 가치라고 해도 상호간에 수단과 목적의 관계에 설 수도 있다. 어느것을 우위에 두고 생활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관과 삶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인간은 인간이 추구하는 이러한 가치의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만족하게 동시에얻기란 불가능한 것이므로 그 중 어느 것을 우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면, 수단적인 가치보다 목적적인 가치를 더 소중히 해야하고, 물질적 가치보다 정신적가치를 더 우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순교자는 진리와 종교적 가치를 위해 생명이라는 가치를 버렸다.

 우리는 육체와 정신을 가진 인간이므로 행복의 조건을 열거함에 있어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어느 정도 무시할 수는 없다. 오히려,행복의 조건을 양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건강한 육체, 불안 없을 정도의 경제적 안정, 유덕한 생활, 마음의 안정과 자유 등의 조건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조건 가운데 인간다운 생활의 핵심은 덕(德)에 두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동서의 행복론을 간략히 일람해 보기로 하자.

 오복(五복) ---- 수(壽 오래 삶), 부(富), 강녕(康寧 건강), 유호덕(攸好德 덕을 좋아함), 고종명(考終命 편안히 죽음)

 소크라테스의 행복관 ---- 행복한 삶은 덕(德)에서 나오는 것이며, 덕의 기본은 참된 지혜라고 보았다. 참된 의미의  利. 不利를 식별할 것과 극기와 절제의 생활을 강조하였다. 그는知德福一致의 행복관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관 ---- 인간의 목적은 행복(eudaimonia)인데, 행복은 인성에 맞는 원만한 활동, 즉 이성에 합치되는 합리적 활동 인 德에 있다. 덕은 진리를 인식하는 면과 정욕을 제어하는 면인 기질(品性 ethos)의 두 면이 있다.  德은 內面성에서 찾아야 한다. 명예, 재산, 건강 등 외형적인 것은 행복의 핵심은 아니다. 그 조건이므로 무시하여서는 안 된다. 또 인간의 性情이 양극단을 피하고 지혜에 따라 中正을 취할 수 있는 것이 성격화된 덕이다.  <유교에서도 中庸(지나침과 부족이 없는 상태)을 강조한다.>

 스토아 학파(Stoism)의 행복관 ----이성에 따르는 생활이 유덕한 생활이며, 덕은 부귀, 공명, 쾌락 등<이들은 선도 악도 아닌 중립적인(adiaphora)것이라 봄>에 무관심한 해탈의 상태인 아파테이아(apatheia 不動心)에서 구할 수 있다. 이 부동심으로써  행복인 안심입명(安心立命)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쾌락주의(Epikouros)의 행복관 ----쾌(快)가 善이요,  不快는 惡이다. 快樂의 영속을 바라자면 육체적 쾌락은 오히려 고통을 주므로, 정신적 쾌락이 진정한 것이니, 욕망을 버린 무욕의 상태인 아타락시아(atharaxia)가 진정한 행복이다.

 라이쯔니쯔의 낙천주의(樂天主義)   ---- 신의 무한한 권능과  지고(至高)의 지력(知力)  과 의지는 가능한 한 세계 가운데서 최선(最善)의 세계를 선택, 창조한 것이다. 불선(不善)  의 원인은 인간의 유한(有限)성에 있는 것은 아니다. [편자 주 --- 신이 창조한 세계는 최선의 것이나, 신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었으므로, 인간은 그 의지를 남용하여 스스로 불행의 길을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의 자비를 믿고 신의 계명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에겐 행복 (구원)이 올 것이다.]

 불교의행복관 ---- 불교의 교리인 사성제(四聖諸 네 가지 신성한 진리)에서 볼 수 있다. 인생의 본질은 고(苦)이니 그 고의 원인(集)은 실재하지 않는 것 (만물이 모두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에 집착하는 데서 온다. 八正道의 길(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비)을 통해 해탈 함으로 열반의 행복에 이르게 된다.

 유교적 행복관(맹자의 군자삼락(君子三樂)) ----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의 왕노릇을 하는 것은 그 속에 들어 있지 않다.  부모님은 모두 건강하게 살아 계시고 형제들이 무고하게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둘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 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셋째 즐거움이다.

  맹자 진심장구 上 20

 위에서 본 현철(賢哲)들의 행복관의 핵심적인 공통점은 물질적 가치보다 정신적인 가치 추구에서 인생의 행복을 찾는 데에 있다고 보겠다. 그리고 즐거움이라는 결과에 치중하지 않고 인간답게 사는 길(道)에서 행복을 찾고자 하였다. 필자는 여기서 우리  人들의 평범한 행복론의 일장을 펴고자 한다.

 나는 인생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신성한 의미를 지니고 세상에 태어났다는 데서 생각의 기초를 잡고자 한다. 인간 공통의 양심은 신의 소리이다. 양심은 `하느님의 모습` <창세기전1장>으로 신성한 것이다. 왜 신은 인간인 나에게 신성을 박아주고 나에게 내가 되게끔 하였는가? 남이 아닌 나로서의 자각은 진정한 행복의 시발점이다. 구체적으로 실존하는 나는 나의 위치에서 남과의 차이를 느끼게 되고, 그 위치에서 부여된 책임을 자각함으로써 스스로 그 책임을 질뿐만 아니라 새로운 위치를 선택하고 그 속에서 자아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현재 주어진 위치를 자각하고 그 위치에서 자기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 ---- 즉, 자기다운 자세 ---- 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밝히고자 한다.

 

 첫째, 인간으로서의 직분에 충실하자면 떳떳하게 살아라. 양심에 부끄럼 없는 생활이야 말로 평화의 첩경이다. 맹자의 첫째 행복도 부끄럼 없음이다.  정직이 최상의 정책이라는 서양의 속담도 있다. 그러나, 부끄럼 없는 생활이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인간은 악마와 신의 중간적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유혹을 받는다. 쾌락과 안일에의 유혹과 세상의 부조리, 내적 신념의 부족에서 오는 갈등 따위에 끝없이 도전을 받는다.  그래서 불경에도 백만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를 이기는 것(克己)이 더 위대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급 가치와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윤리세계(양심) 에 대한 확신과 선한 습관이 필요하다.

  윤리 세계에 대한 확신이란 도덕법(양심법)에 의하여 사는 것만이 인생의 참된 길이라 확신이다. 이는 확고한 가치관에서 온다.  死六臣은 어찌하여 부귀를 버리고 義와 죽음을 택했으며. 18~9세기 조선시대의 수많은 천주교도는 왜 순교의 길을 택했는가?  여기에는 자기의 믿음이 진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이 확신의 배경에는 종교나 신념이 있다. 종교에서 제시하는 진리를 믿고 진리를 위해 생명을 버려도 신은 진정한 나의 영혼을 구원해 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스승이 된 많은 분들, 특히 行을 통해 윤리의 길을 보여준 분들 중에는 종교인이 대다수이다.  예수와 석가가 그렇고 공자의 天命 사상이나 태연히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의 사상관은 종교에 가깝고, 슈바이처, 간디, 도산 등은 모두 종교인이다.  그래서 윤리의 세계는 종교와 통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칸트도 도덕법(양심법)에 정언성(定言性- 조건없는 지상명령)에서 영혼과 내세와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다.<실천 이성 비판에서 논함 >  선한 습관은 수양으로 가능하다.  습관은 제 2의 이다.  한번 굳으면 고치기 어렵다.  청소년 시기야 말로 자각의 시기로 나쁜 습관을 과감히 끊어버리고 바른 마음씨와 선한 품행을 닦는 데 더없이 중요한 때이다. 평소의 사소한 일에도 세심한 주의로 몸과 마음을 닦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

  둘째, 직업인으로서 자기 맡은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데서 보람을 느껴야 한다. 무엇에 자신을 잊고 열중하는 데서 인생의 숭고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재물이 많다고 해서 무위도식(無爲徒食) 한다면 폐인이나 무기력한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인간은 일을 통해 나의 재능을 발전시키고 생활의 자료를 얻으며 사회에 봉사하도록 창조되었다.  직장은 가정 다음으로 중요한 생활의 장(場)이다. 사명감을 가지고 일에 열중하여 일의 삼매경(三昧境)에 빠진 이는 그 자체로서 행복할 뿐만 아니라 두 가지 보상을 받는다.  첫째는 창조와 성취의 기쁨이요, 둘째는 명예와 보수가 같은 사회적 보상이다.

  우리가 일에서 얻는 행복은 열중의 행복과 성취의 기쁨이다. 이러한 기쁨을 기대하면서 (성취 만족에 대한 기대) 우리는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해 가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의 적성과 희망에 적합한 직업을 스스로 준비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참다운 뜻을 찾아야 한다.  그 뜻을 이상 또는 大志라고 한다.  올바른 이상을 가지고 그 이상을 실현하려고 분투 노력하면서 역경과 싸우고 인내하며 목표를 하나 하나 관철해 나아가는 데서 젊은이는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는 현재의 일인 학업에서부터 열중하는 자세를 익혀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고 창의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세상의 대다수의 일들이 인간의 창의에 의한 개선을 기다리고 있으며, 일을 통해 나의 삶을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개척해 주기를 기다리는 많은 일들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 기다리고 있으니, 그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내 인생의 큰 뜻을 펼쳐 나가자.

  세째, 인간은 가족의 일원으로서 가족을 사랑함으로써 가정의 화목과 안정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가정의 화목은 행복의 필수 조건이다.  가정은 地上의 낙원이라고 한다.  가정 생활에서 불운한 사람은 정서적 안정의 뿌리를 잃어버려 직장 생활에서 성공하기도 어렵다.  맹자는 가정 화목을 제2의 樂으로 치고 있다.  우선 부모에게 감사하고 효도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에게 가장 은혜를 베푼 이들을 사랑할 줄을 모르는 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 받을 자격도 없는 자이다.  그 다음 가까운 사람인 형제 자매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요즈음 효가 점점 시들어지고 재산 등의 물질적, 이해 관계로 서로 다툼이 없는 형제가 오히려 줄어듦을 보이는데, 利 때문에 義를 버리는 소탐대실 (小貪大失)하는 인간의 비극을 느낀다.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며 서로 아껴주는 가정을 만들자.

  네째, 사회 속의 작은 직분을 생각하자.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나는 나로서만 존재할 수 없다.  사람 人字는 서로 의지하는 인간을 상징한다.  서로 돕고 사랑함으로써 人의 구실을 하게 되고, 이웃에 대한 나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게 된다.  유해(有害)한 이웃이 되지 말고 유익(有益)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받기보다 주는 데서 더욱 행복을 느끼며, 좁은 소아(小我)의 세계에서 벗어나 보다 큰 자아로 성장하는 것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자는 불행하며 그 마음은 차고 외롭다.  공자도 德不孤(덕은 외롭지 않다.)라고 했다.  나의 외로운 인생을 풍부히 사는 길은 베풀 줄을 아는 것이다.  물질만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더욱 소중하다.  조그만 친절과 미소나 양보, 인정이 사회를 훈훈히 하고 나의 마음도 따뜻하게 한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보시(布施)의 철학은, 물질적 布施(財施)도 중요하나 진리를 알려주는 法施와, 두려움 없는 마음과 안심을 주는 무외시(無畏施)를 강조하고 있다. 「베풀되 그 마음은 평등해 뉘우치거나 인색함이 없으며, 果報를 바라지 않으며, 명성을 구하지 않으며, 이들을 탐하지 않는다(화엄경.)」는 심정으로, 준다는 생각없이 베푸는 것이 이상이다.  예수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륵 하라. <마태오 복음 6장 2절>"고 하였다.

  죄란, 금지하는 것을 어기는 것만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란 말이 있다. 자기가 재산이 있다고 자기들만이 풍족하게 살고 남에게 베풀지 않는 이는 일종의 양심 냉당증에 걸린 사람이다.  그의 찬 가슴은 타인에게 위화감과 불행의 의식을 심어주고 자신의 온몸도 차게 하여 이기심과 불안에 쌓이게 한다.  공자는 「백성은 가난을 불평하지 않고 공평하지 못함을 불평한다.」고 하였다.  예수는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청빈한 이)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오 복음 5장 3절>.」라고 하였다.  부하여도 교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예를 알며 베풀 수 있는 이는 행복하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하거나 비굴하지 않고 남에게 호의를 베풀 줄 알고 인생을 즐기는 이는 더욱 행복하다.  성인들이 설파한 이 행복의 비법을 모르고 사는 이는 불행하다.

  우리는 사회의 일원으로 그 법을 준수하며 그 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그 사회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국가와 민족이다.  한국인인 우리는 한국인으로 존재할 때 뱅복한 것이다.  비록 한국이 가난하고 우리 조상이 보잘것없다고 하여도 내가 한국인임을 자부하며 한국의 주체성을 찾고 그 번영을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인간다운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요즈음 우리는 우리를 잃어가고 있다. 외국 것만을 좋아하며 모방하고 우리 것을 소중히 할 줄 모르며 배우러 하지도 않으려 한다. 우리가 우리 것을 소중히 하지 않는데 누가 우리를 귀하게 볼 것이며, 우리 문화가 우리 땅에서 천시 받는데 어찌 우리가 바른 민족으로 대우 받을 수 있을까? 우리는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났다. 겉보리 세 말만 있으면 처가 살이는 하지 말라는 속담이 있다. 사대의 늪에서 벗어나 우리의 주체성을 회복하여야 한다. 이런 민족적 당위성에서 볼 때에 민족적 주체성을 가지고 애국하는 길이 인간다운 길이다. 한민족의 어려움과 不德과 부조리에 대해 불감(不感)하느니보다 고민하는 것이 오히려 행복이다. 그에겐 민족을 사랑하는 따뜻한 가슴이 있기 때문이다. J.S.Mill은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좋다."고 질적 행복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섯째, 진정한 자아의 회복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  앞서 이야기한 민족아로서의 자각도 진정한 자아 회복의 한 요소이다. 자기의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자. 세상 모든 것을 얻어도 자기를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현대의 실존주의자들은 국가니, 세계 평화니 하며 떠들다가 혼돈의 와중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자 하여, 자기 성실을 최대 과제로 삼고 있다. 인생의 모든 것은 자기애에서 출발한다. 자기ㅏ애의 바탕이 바르지 못하면 이기주의로 전락하거나 허무주의에 빠져서 이웃 봉사도, 사랑도 허구가 되고 만다. 진정한 자아 회복이란, 생활의 분주 속에서 일에 빼앗긴 자아를 찾는 것이다. 조용히 혼자서 자아를 성찰하고 독서하며 자기 발견과 자기 발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인간은 독서와 사색없이 바른 길을 걷기 어려우며 자기의 세계가 없이 행복할 수 없다. 또 독서 삼매에 나를 잊는 시간은 행복한 순간이다. 일에만 파묻히지 말고 가족과 대화하고 여가를 선용하여 자기의 건강을 돌보고, 건전한 취미의 세계를 가짐으로 인생의 멋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일만을 사랑하는 이는 인간미가 없다. 인간은 여유 속에서 예술(美)의 세계를 즐길 줄 알아야 된다. 그래야 인간은 일의 활력을 얻고 타인과의 내면적 대화를 즐길 수 있으며 내 영혼을 더욱 미화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음악을 즐기면서 그것을 수양의 방편으로 삼지 않았던가? 그는 제 나라에 있을 때 소악을 듣고,배움에 석 달 고기 맛을 잃었다. "음악의 아름다움이 이렇게 극진함을 내 일찌기 생각 못했다." 라고 경탄하였다<논어 술이13>. 그는 仁에 의지하여 살고 예로써 즐기라고 하였다<논어 술이6>.

 다시 말하면 자기 성찰을 통해 참된 자아의 모습을 보도록 노력하며 독서와 취미 생활을 통해 수양을 쌓아 자기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도 행복의 뺄 수 없는 조건이다.

 여섯째, 감사하고 기도할 줄 알아야 더욱 행복하다. 내가 강직하고 성실히 사는 데에도 가난하다고 하면서 대부분 불평을 하게 된다, 孔子가 말하는 가난하면서도 즐기는 자세. 곧 감사하는 자세가 없이는 진정한 행복을 얻기는 어렵다. 그런데, 감사하는 자세는 받음이 없이는 곤란하다. 이는 앞서 윤리 세계에 대한 확신에서 이야기했듯이 義를 위해 불평 없이 즐겨 목숨을 버릴 수 있으려면 종교나 종교에 가까운 신앙이 없으면 안 된다. 신이 나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자각이 없이는 감사가 곤란하다. 그러나 신앙이 없다 해도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길을 수 없는 불구자가 감사할 수 있을까? 그는 성한 눈과 귀와 손을 그리고 귀중한 생명을 보존하고 있음을 감사할 수 있다. 또, 정신 세계의 소중함을 안다면 더욱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데살로니카 전서 5장 16~18절>] 이는 사도 바오로가 한 말이다. 이러한 신앙을 얻자면 쉬운 일은 아니다. 인간의 유한성과 괴로움은 믿음이 없이는 온전한 평화를 얻기 어렵다. 항상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자야말고 행복한 이가 아니고 무엇이랴 !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완전하도록 노력하라]는 인간의 지상 사명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말한 행복론을 한 마디로 언급하면 인간답게 사는 길에서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하게 최선을 다해 사는 길이 인간의 길이며, 그렇게 살면 그것이 행복이라는 확신을 가져야겠다. 양심의 命대로 삶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고, 이상의 추구와 일에서 보람을 찾고, 가정의 사랑과 화목 속에서 안정을 구하고, 이웃 사랑에서 나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내 자아의 세계를 성찰하고, 주체성을 찾음으로써 나의 세계 속에서 나를 높이고, 감사와 기도하는 믿음 속에서 불안을 잊고 安心立命하는 삶이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랴 ! 이상을 보수를 위주로 생각하는 자는 더 값진 정신적인 평화와 보람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진실을 알았다고 곧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福은 知에 있음이 아니요, 行(德)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나의 위치를 자각함으로써 그 직분에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닦아나가는 자세가 행복인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은 德을 알고 인지(認知)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實踐)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알고 실천하는 데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경지에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수양으로 가능하다. 수양은 실천으로써 심성을 착하고 강하게 쌓아 가는 과정이다.

 

    4. 덕(德)과 수양(修養)

 행복론에서 행복의 본질은 덕(德)에 있음을 알았다. 덕이란, 양심의 명령인 선을 실천하는 습관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덕이라고 하면 학문이 높고 고고한 군자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덕의 본질인 선(善)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인간은 본래 선하게 창조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순진무후한 어린이가 가장 선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성인들은 어린이와 같이 순수해져서 어진 본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는 순수하지만 아직 몰라서 순수한 것이요. 악해질 소지를 가진 이기적인 존재이므로 수양을 통하여 이기심과 악의 요소를 억제하여야 한다.

 德이라고 하면 고루한 선비나, 위선이 생각나서 가벼운 저항감을 느끼기도 한다.  일찌기 노자는 道를 이미 道라 이를 때 진정한 도가 아니요, 명예를 명예라고 부를 때 이미 명예가 아니라고 하였고 지극한 선(上善)은 만물을 이롭게 하고도 다투지 않는 물과 같다고 하였다<孝子 1장, 8장>. 진정한 善과 德이란 남에게 베풀고도 그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요, 큰 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德스런 인물은 자기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여 남과 다투는 군자가 아니라 남몰래 숨어서 행하는 겸허한 사람일 것이다 大賢如愚(대현여우 큰 어짐은 어리석게 보인다)라고 했다. 공자의 제자인 자하도 어진 이를 좋아하고 孝와 忠과 신의가 있는 이는 배우지 않아도 학문한 사람이라고 이르겠다고 하였다.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고 하나 선과 악의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으므로 자라면서 욕심이 점점 많아지고 경쟁과 갈등 속에서 성품은 점점 악하게 된다. 요즈음 사람은 배울수록 점점 악해지니 웬 일이냐고 하는 노인의 말은 요즈음 뿐만 아니라 옛날에도 그러하였던 것 같다. 배움이 선을 실천하는 데 쓰이기보다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데에 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조그만 선을 하게 되면 허세를 부리고, 도덕은 남에게나 강요하는 기준으로 생각하여 자신을 보는 눈에는 대들보를 가리고 만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살펴서 자신의 위선된 모습을 발견하고 순수한 인간 본성으로 돌아가는 데에서 수양을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덕에 관해서는 수양에 대한 이야기한 후 성현들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성찰과 수양 자료를 제공하고자 한다.

 

  수양(修養)의 방법

人格의 完成을 平生의 목표로 삼고 구도(求道)의 자세로 배우라.

 공자는 「朝聞道면 夕死可矣<里人 8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다. 이러한 구도의 자세가 있음으로 성인이 된 것이다.  우리의 양심의 거울은 항상 닦아야한다. 수양서를 틈틈이 읽으면서 성인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내 마음을 밭(心田)을 갈아야 한다. 잡초가 우거지지 못하게 갈고 유익한 곡식과 아름다운 꽃을 심어야 한다. 한 번 심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가꾸어야 한다.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위대한 수양서는 신약 성서와 論語와 불경(법구경과 수타니파타)이었다. 특히, 신약의 복음서와 논어는 평생토록 매일 거듭 보아도 새로운 교훈을 주는 생명의 교훈서이다.

 

마음의 성찰을 게을리 하지 말자.

 一日 三省(1일삼성) 이라고 했다. 매일 일기를 쓰면서 하루 동안 나의 행동을 살피고 그릇된 점을 솔직히 시인하고 고치도록 노력하자. 공자는 學而不思면(배우고 성찰하지 않으면) 則 (즉 어두우며)이요, 思而不學이면 (생각만 하고 배움이 없으면 독선에 빠져 위험하다.)

라고 하였다.

③수양이란 평범한 일상 생활에서 선한 습관을 기르는 것이다.

 성인이 말한 道나 德이 보이지 않는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소하고 평범한 생활 속애 있다. 수도(修道)하는 곳은 산 속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과 접하면서 나를 길러 나가는 것이다. 논어 而편 29장에서, 공자는 "仁이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인을 원하면 인은 곧 나를 따른다." 라고 했다.  우리는 나의 환경이 인물되기에 부적당하다고 불평하고 내 주변 인물들은 왠지 내 수양에 지장을 주는 존재처럼 보인다.  금이 흙 속에서 나오듯 진리는 평범 속에 있으며 행복은 우리 마음 속에 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공자는 사생아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또 참(眞)이나 선을 거창한 데서 찾으려는 망상을 버려라. 학교에서 항상 강조하는 휴지 안 버리기 하나 제대로 실천하지 못 하면서 심각한 체 불평만 나열하는 것은 위선이 아니고 무엇이랴 ! 학생 제군은 「작은 것을 행할 줄 모르는 자는 절대 큰 일을 행할 수 없다.」는 진리를 아는가? 깊이 새겨 항상 작은 일에서부터 성실을 다하라. 나는 처음 논어를 읽으면서 너무도 평범한 그의 일생과 말에 다소 실망하였다. 그러나 읽을수록 평범 속에서 진리를 깨쳐준 우리의 위대한 스승임을 알게 되었다.

④一生의 큰 志向(뜻)을 가져야 한다.

  뚜렷한 지향을 가지고 덕을 닦아 나가야 한다. 그럴 때 그 덕이 더욱 빛을 내는 人物이 될 수가 있다.

 논어에 君子三畏(세 가지 두려워하는 것)가 있으니 天命(평생의 큰 지향 또는 하늘의 도리)과 大人(어진 이)과 성인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수양에 있어 깊이 새겨들을 말이다.

⑤좋은 벗을 가져야 한다.

 그 사람을 모르면 그 친구들을 보라는 말이 있다.

좋은 벗을 갖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큰복의 하나이니 벗과 더불어 나의 인생도 바르게 성장하는 것이다.

 

  인격 완성(完德)에의 지향
-인간의 목적은 인격의 완성 내지 자아의 실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孔子의 一生에 대한 자술(自述) :「나는 열 다섯에 學問에 일생을 바치기로 뜻을 두었고, 서른에 기초가 확립되어 서게 되었고 (人生觀의 확립), 마흔에 판단이 확고해 지고 (不惑), 쉰에 天命(하늘이 내린 사명 一道를 세워 인류에 공헌하는 길)을 알았고, 예순에 남의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고 (耳順), 일흔에 하고자 하는 바를 행해도 도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였다.」<論語爲政4>-孔子는 학문과 덕을 사랑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배웠으니, 「학문과 인생에 대해 이해가 잘 되지 않으면 침식을 잊고 탐구하였고, 독서와 구도에 근심을 잊고 즐거워하여 늙음조차 알지 못했다.」고 자평 하였다. <술이 18>

*성경 말씀 :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라<마태오 6장 33절>.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오복음 5장 43~48절>」-원수 사랑에 이르기까지 이르는 완전한 덕을 요구하고 있다.

*불경의 말씀 : 「온갖 중생은 같은 佛性(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서 차별이 없다 <열반경, 불교 대전 58>. 자애가 곧 여래요, 여래가 곧 자애다<열반경, 불교 대전 222>. 명상에 잠기고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는 평화를 기뻐하고 깨쳐서 지혜 있는 현자는 신조차 부러워한다.<법구경 181장>」

 

 황금율(黃金律)

 인간의 길을 한 마디로 줄여서 말한 성인의 교훈이 孔子의 仁기독의 사랑, 불타의 자비이다.

*孔子의 仁 : 「자공이 물었다. "한 마디의 말로 평생토록 행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가 답하였다. "그것은 바로 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論語  公 24>- 란 如心 즉 타인의 마음과 같이 되는 경지다.

 

*예수의 사랑: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의 정신이다.(마태복음 7장12절")

*불타의 자비(慈悲): 서있을 때나 걸을 때나 누워 있을 때 잠자지 않는 한, 이 자비스런 마음을 굳게 가지시오. 이 세상에서는 이 상태를 숭고한 경지라고 부르오.

(수타니파타 151장)ㅡ 慈悲의 기본 전제는 자타불이(나와 타인이 하나임)이며,知慧를 바탕으로 발생하는 남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고 (慈, 興樂)불이익과 고통을 덜어주려는 인간애를 의미한다.

*仁(恕 즉 如心), 사랑, 자비(自他不二)가 모두 한가지 인간 내심의 소리에 근원을 둔 것이자.  칸트의 정언명령(定言命令(령))인 "그대의 의지의 격율(格率)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게 행위하라."는 말도 같은 의미이다.

 

德目에 대하여

 성현들은 사상에 따라 그 덕목의 분류가 다소 차이가 있으나 그 덕목의 근본이 되는 덕목은 겸허와 사랑이다. 사랑은 앞서 서술하였으므로 겸허에 대하여 이야기한 후 성현들이 말한 덕목을 나열해 보고자 한다.

*겸허(謙虛):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너무 소중히 여겨 자기 능력을 과대 평가 하기 마련이다. 또 자기 몸의 소중함만 알지 남의 소중함을 잊기는 쉽다. 겸허란 무조건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자기 자신을 알라.'는 말은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라는 뜻이다. 지혜가 넓고 깊어질수록 자신의 앎과 덕이 보잘것없음을 알게 된다. 그의 눈이 밝아져서 자신이 우물 안의 개구리임을 알기 때문이다.

 공자는 "내 아는 것이 있으랴! 아는 것이 없다 . 촌부(村夫)가 찾아와 묻되 그 말이 어리석어도  곰곰이 풀어 성의를 다할 뿐이다. (자한 7)"라고 하였다. 우리가 흔히 잘 모른다고 얘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예수는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하느냐는 물음에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기를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마태오18장 4절)"라고 하였고. 누가 더 높으냐는 다툼을 하는 제자에게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코9장35절)"고 훈계하였고, 그 후 제자들이 다시 그들이 차지할 왕국(제자들이 상상한 지상의 왕국)의 자리에 대해 다시 다툼을 벌일 때에 "너희가 알다시피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 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예수)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르코10장 42절)"라고  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7덕(기독교의 입장)

  세속적 4덕 : 지혜(知慧), 용기(勇氣), 절제(節制),  정의(正義)(이는 platon의4덕에서 도입)

  크리스트3덕: 믿음(信德), 소망(望德), 사랑(愛德)

 

*유교의 五常 :仁, 義, 禮, 知, 信(행자의 4덕은 信을 뺀 것이다.)

*유교의 五倫 :忠(君臣有義), 孝(父子有親), 貞(夫婦有別), 서(長幼有序), 信(朋友有信)

*老子의三德 : 慈(자애), 儉(검소), 不敢爲天下先(남 앞에 나서지 않는 것,즉 겸허)(老子67)

*불교의 八正道 :이는 덕이라기보다 수행의 방법이다.

 定見(바른견해), 正思(바른판단), 正語(바른말), 正業(바른행위), 正命(바른생활),正精進(바른   노력),  正念(바른생각), 正定(바른명상)

*프랑크린의 德의 13條(자서전 16장)

그는 나쁜 습관을 끊어버리고좋은 습관을 터득하기 위해하여 13개조를 스스로 세웠다.

1. 절제(節制) ; 너무 배부르게 먹지 말고 ,너무 취하지  말라.

2. 침묵(沈默) ; 자기가 남에게 무익한 말을 지껄이지 말라.

3. 규율(規律) ; 물건을 일정한 장소에 두어라. 일은 꼭 시간을 정하여 하라.

4. 결단(決斷) ; 해야 할 일은 결심을 하고  결심한 것은 꼭 실행하여라.

5. 절약(節約) ; 자기나 남에게 이롭지 못한 일에 돈을 허비하지 말아라.

6. 근면(勤勉) ;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라. 언제나 유익한 일에 종사하여라.

7. 성실(誠實) ; 거짓으로 남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 사악한 마음을 버리고 공경한 마음을 가져라.

8. 정의(正義) ; 남에 이익을 침해하거나 또는, 줄 것을    주지 않아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말아라

9. 중용(中庸) ; 극단을 피하라.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일이 있더라도 지나친 흥분을 억재하라.

10.청결(淸潔) ; 신체, 의복, 주거에 불결한 것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

11.평정(平靜) ; 일상 생활에서나,무슨 불가피한 일이 생겼을때에 평정을 잃지 말아라.

12.순결(純潔) ;남녀의 사귐은 윤리가 허하는 범하는 범위 내에서 할 일이다.

13.겸양(謙讓) ;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본받도록 하라.

 

*논어의  六言六蔽(六德과 六蔽)...(논어 陽貨8)

 공자가 자로에게 육언육폐(6덕과 6폐단)를 말한다."1.仁을 좋아하고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어리석음(愚)이요, 2지혜(智)를 좋아하면서 배우기 싫어하면 그 폐단은 방탕이요, 3.信義를 좋아하면서 배우기 싫어하면 그 폐단은 남을 해치게 되고, 4.正直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가혹(絞)해지고 5. 勇氣를 좋아하면서 배우기 싫어하면 그 폐단은 난폭해지고, 6. 굳세기(剛)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싫어하면 그 폐단은 무모(광)해진다.

*****군자가 갖출 仁, 智, 信, 直, 勇, 剛의 6덕과 그것을 닦지 않을 때(여기서는 배우지 않는다고 표현) 오는 그 폐단을 들고 있다.

*논어의 九思: ,논어 季氏10장에 있으며 ( )안의 해설은 이 율곡 선생의 격몽요결 持身章에서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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