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시 옆의 꾸찌터널을 돌아보며>
오늘 아침도 호텔에서 먹었지만(06:30), 지금보다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옆 호텔에 있는 일행과 함께 호텔을 출발(08:00)해, 1시간 45분 후에 꾸찌터널에 도착했다. 꾸찌터널(Cu Chi Tunnels, 꾸찌땅굴)은 베트남전쟁과 베트남 통일로 이어지는 일련의 현대사에 있어 매우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일행은 먼저 안내자를 따라 지하의 목조초가에 들어갔다. 이곳에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오는지 한국어로 설명하는 영상이 있어 그것을 보았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꾸찌터널 매표소에 있는 베트남 전도>
<꾸찌터널 매표소 앞에 앉아 있는 일행 모습>
<매표소를 지나 꾸찌터널 입구 풍경>
<한국어로 설명하는 지하 영상실 모습>
"터널은 194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투쟁을 벌이던 비엣민(베트남독립동맹회)이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결국 프랑스로부터 독립했지만, 1954년에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되고, 미국이 인도차이나전쟁에 참전하면서 독립전쟁은 베트남전쟁으로 바꿨다. 1960년부터 꾸지터널은 사이공(호치민시)함락을 위한 군사거점으로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곳이 비엣공(베트남 공산당, “베트공”이라고도 함)의 주둔지가 되면서 터널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비엣공은 미국과 협력한 남부 베트남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게릴라작전을 수행했는데, 낮에는 터널 안에 숨어있거나 농민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다가, 밤이면 비엣공으로 변모해 기습전투를 감행했다. 비엣공 중에는 여자들도 있었다. 특히1968년의 구정 대공세에 관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총공격을 감행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꾸찌터널을 발견한 미군은 지상군 투입과 더불어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화염방사기와 고엽제 살포에도 불구하고, 좁고 미로처럼 얽힌 꾸찌터널의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결국 B-52 전투기를 동원해 30톤의 포탄을 퍼붓는 융단폭격을 감행했으나, 미군의 공습이 강화될수록 터널은 더욱 견고해졌다.
터널은 지하 3층 규모인 10m까지 파내려갔고, 길이도 캄보디아 국경지대까지 확장되어 총 길이를 합하면 무려 250Km나 된다고 한다. 터널의 크기는 폭0.5m, 높이 1m정도로 한 사람이 웅크리고 다닐 수 있는 협소한 구조였다. 때문에 비엣공처럼 몸이 작은 사람은 빠져 다닐 수 있지만, 미군같이 큰 사람들은 움직이기 힘든 곳이었다.
그러나 터널 내부에는 넓은 곳도 있어, 작전상황실, 회의실, 병원, 극장, 무기저장고, 무기 및 군복제작실은 물론, 침실과 부엌까지 만들어 지하에서 모든 생활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터널 입구는 철저히 위장했고, 부비트랩이나 철창을 설치한 함정을 파서 적군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장애물을 만들었다. 부엌에서 요리하는 동안 연기가 분산되어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위장과 보안에도 신경을 썼다. 꾸찌터널은 비엣공뿐 아니라, 베트남 중부에서 시작되는 호치민 트레일(월맹군 군사보급로를 포함한 공격 루트)의 종착점이었다고 한다.”
일행은 영상에서 보았던 것을 확인하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관광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새로 만든 것으로 보였으나, 터널 입구에 함정을 파고 설치한 부비트랩과 쇠창살 등이 설치된 시설을 볼 수 있었다. 한 터널에는 관광객 중 서양인 여자가 들어갔는데도 좁아서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어떤 곳은 출입구를 직각으로 파놓고, 사방으로 굴을 뚫어 놓아 마치 “땅 속의 토끼 굴”처럼 얽혀 있었다. 옆으로 뻗은 터널이 잘 보이지 않아 전기 불을 밝힌 곳도 있었다.
<꾸찌터널에 파 놓은 함정 모형>
<꾸찌터널에 서양인 여자가 들어가 체험하는 모습>
<꾸찌터널로 내려가는 입구 모습, 옆으로 들어가는 굴이 있음>
<베트남전쟁 중 휴식을 취하는 비엣공을 재현해 놓은 모습>
<꾸찌터널의 각종 함정 모형 1>
<꾸찌터널의 각종 함정 모형 2>
또한 굴을 파는 작업과 군복을 만드는 공장에는 여자들도 참여했다. 일행은 다른 관광객들이 적은 곳을 골라가며 여기저기를 살폈는데, 터널 속에는 무기 제작공장 군복공장 및 군화공장 등도 있었다. 그들은 여자들도 총을 옆에 걸어놓고 군복을 만드는 등 항상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어, 그들의 힘든 삶의 현장을 보는 것 같았다. 조금 걸어오자 B-52포격기가 포탄을 투하해 만들어진 구덩이가 있었다.
<꾸찌터널 내에서 폭탄을 제조하는 모습>
<직각으로 파내려간 꾸찌터널 입구 모습, 옆으로 들어가는 다른 굴이 있음>
<꾸찌터널을 파기 위해 흙을 나르는 여인>
<꾸찌터널 내에서 옷을 만드는 모습>
<꾸찌터널 내에서 만든 전투복과 모자들>
<꾸찌터널 내에서 신발을 제조하는 모습>
<꾸찌터널 내에서 음식을 만드는 모습>
<꾸찌터널 내에서 음식을 하던 부엌 모습>
<꾸찌터널 내에서 사용하던 맷돌>
<꾸찌터널 모형을 만들어 놓은 주위 풍경>
한 곳에는 실제보다 땅굴을 넓고 높게 팠으며, 처음 땅굴을 들어가는 곳과 굴을 빠져나오는 지점에는 실제에 없던 안전팔걸이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체험하기 위해서 굴로 들어가니 서서 걸을 수 없을뿐더러, 드문드문 전기 불을 희미하게 밝혔음에도 굴이 직선이 아니라 꺾어지는 곳이 많아서 어두웠다. 총길이를 100m정도 만들어 놓았다고 했으나, 일행은 대부분 50m도 채 체험하지 않은 것 같았다. 시간이 없기 때문인지 더 가는 쪽 굴을 안내자가 막고 출구로 유도했다. 그러나 밖으로 나오니 가빴던 숨이 확 나오며, 공기가 시원함을 느꼈다.
<꾸찌터널을 체험할 수 있게 넓게 만들어 놓은 관광객 체험장 입구 1>
<꾸찌터널을 체험할 수 있게 넓게 만들어 놓은 관광객 체험장 입구 2>
<꾸찌터널 체험을 하기 위해 줄을 선 일행>
길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가자, 초가집에 카사바(나무고구마)를 삶아놓고 하나씩 맛보라고 했다. 먹어보니 땅에서 나오는 고구마와 비슷했으나 어딘가 조금 다른 점도 있었다. 그 20m쯤 옆에는 터널에서 요리를 하는 연기를 조금씩 나오게 분산시키는 시설로 얼핏 보면 잘 모를 정도였다.
<비엣공이 먹었다는 카사바(나무 고구마)를 시식하는 초가>
<비엣공이 먹었다는 카사바(나무 고구마)를 시식하기 위한 일행>
<꾸찌터널에서 음식을 하는 연기가 분산되어 밖으로 나오는 모습>
그 아래에는 당시 비엣공처럼 군복과 총을 멘 남녀 마네킹을 만들어 놓아 관광객이 그들과 사진을 찍도록 했다. 위에는 관광객을 위한 사격장이 있었다. AK-47, M16, 카빈 소총 등 다양한 총을 쏘아볼 수 있었다. 사격 대 뒤에는 터널에 있었던 맷돌과 부엌모양이 있고, 그 때 먹었던 쌀 종이를 만들고 있었다.
<추억을 남기라고 만들어 놓은 비엣공 남여 마네킹>
<비엣공 마네킹과 추억을 남기는 일행 1>
<비엣공 마네킹과 추억을 남기는 일행 2>
<비엣공 마네킹과 추억을 남기는 일행 3>
<비엣공 마네킹과 추억을 남기는 일행 4>
일행은 꾸찌터널 투어를 마치고 매표소 앞으로 돌아왔다. 매표소 옆에는 호치민의 상반신 동상이 있고, 베트남전쟁 시 사용되었던 각종 포탄 및 총 등 무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일행은 걸어서 강에 있는 수상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은 밥, 국, 튀김, 닭고기, 돼지고기, 야채, 수박 등이 나왔다. 안주가 있는데, 술이 빠져서야 되겠는가. 일행 중에는 맥주를 사서 한 잔씩 마시기도 했다.
<꾸찌터널 매표소 옆에 있는 호치민 동상>
<베트남전쟁 시 사용되었던 폭탄들>
<베트남전쟁 시 사용되었던 무기들 1>
<베트남전쟁 시 사용되었던 무기들 2>
<베트남전쟁 시 사용되었던 무기들 3>
<점심을 먹은 수상식당에서 바라 본 풍경>
첫댓글 비극의 현장입니다. 이런곳을 보면 몸과 맘이 저려와서 별로 보고 싶지않아요. 6.25가 생각나구. . ....
이곳에 선배와 친구들이 참전했었어요.
여기를 보면서 생각이 많았죠.
전쟁은 다시 없어야할텐데 요즘 좀 걱정이...
전쟁이 그리 쉽게 나지는 않지요.
그러나 항상 대비는 해야겠지요.
미국 영화를 통해 본 베트남 전쟁!(부비트랩으로 희생되는 미군을 보면서 베트콩을 잔인한 야만인?)
다시 생각해 보게 되더군요~~
무엇이든 한 쪽만 알고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