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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 황옥이와 여의도공원에서
〈한강과 여의도〉(15호)에 이어 〈공군 이야기〉
김 영 욱(대한민국 공군역사자문위원)
제3장 여의도공원 공군창군60주년기념탑
“황옥아, 이곳 여의도공원은 우리나라 최초로 미군으로부터 인수한 L-4 비행기가 시위비행示威飛行을 했고 국민으로부터 모은 성금으로 사 온 T-6의 ‘건국기 헌납 명명식建國機獻納命名式’을 했던 곳이고, 그리고 주둔駐屯하고 있던 비행부대가 육군으로부터 공군의 독립과 함께 공군비행단空軍飛行團으로 승격돼 우리나라 최초 비행단이 있었던 곳이기도 해. 그래서 공군창군 60주년을 맞이한 2009년에 ‘공군창군 60주년 기념탑空軍創軍60周年記念塔’을 세웠구먼”
“할아버지, 우리나라 공군창군은 언제 했나요?”
“대통령령大統領令 제254호로 1949년 10월 1일 창군되었지. 창군 된 지 60년 동안 우리나라 하늘을 빈틈없이 지킨 공군의 희생정신犧牲精神을 기리고 미래 항공우주군航空宇宙軍을 향한 공군의 비전Vision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공군창군 60주년 기념탑을 세웠는데 전투기戰鬪機가 솟구치는 모양으로 만들었단다.”
“할아버지, 그러고 보니 4대의 전투기가 동서남북東西南北 사방의 하늘로 솟구치는 것 같아요?”
“그려. 탑은 중앙의 첨탑尖塔까지 높이가 13.5미터이고, 본체本體까지는 9미터지. 탑 중앙부中央部의 길쭉한 동그라미 타원橢圓은 공군의 단합 및 우주로 넘어가는 대기권大氣圈의 표현이고, 주변부周邊部 4개의 탑은 공군의 핵심가치인 도전挑戰, 헌신獻身, 전문성專門性, 팀워크Team work의 표현이야. 그리고 중앙 탑은 미래의 항공우주군航空宇宙軍으로 도약하기 위한 공군의 비전을 상징한다는구먼.”
“탑의 기단 둘레의 돌판[石板]에는 ‘건국기 헌납 명명식’ 장면이 돋을새김[부조(浮彫)]되어 있고, 탑 앞쪽 대리석 바닥에는 여의도공원이 최초의 비행단이 있던 공군기지임을 알리기 위해 한글과 영문으로
‘이곳 여의도는/ 대한민국 최초의 비행단이/ 위치했던 곳입니다’(Yuoido was the localion/ for the first fight wing/ in the Republic of Korea Air Force)
라고 새겨진 동판銅版을 설치해 놓았거든.
그 당시 단장은 이근석李根晳(1917-1950) 대령이야. 말이 비행단이지. 6.25전쟁이 일어나자 전투기를 포함해 226대의 비행기를 보유한 북한 공군에 비교하면, 우리나라 공군은 22대의 연락기와 연습기밖에 없었으니, 눈물겨운 일이었어.
“할아버지, 6.25전쟁 당시, 이곳 여의도기지는 어떠했나요?”
“참혹했지.”
1950년 6월 25일 오전 9시 무렵 감시초소監視哨所에서 두 당직 병사가 메가폰으로 ‘적기敵機다! 적 공군이다!’라고 외쳤어. 그 소리에 비행단장 이근석 대령은 건물 밖으로 뛰어나갔지. 김포 방향에서 적기 두 대가 전속력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거든. 이근석 단장은 즉시
“적 전투기다! 모두 대피하라! 고사기관총高射機關銃! 사격 개시!”
라고 힘껏 외치면서 격납고格納庫로 달려가 몸을 피해야만 했고, 기지 네 곳에 설치된 고사기관총이 적기를 향해 일제히 ‘뜨르르르륵, 뜨르르륵, 뜨르륵, 뜨륵’ 불을 뿜었지만, 적기는 여의도 기지를 비웃는 듯 유유히 노량진鷺梁津 쪽으로 사라졌거든.
북한군이 전면全面 남침했다는 통보를 받고 비행단도 경계태세警戒態勢를 갖추고 있었으나 북한군의 공군 소련제蘇聯製 야크 전투기가 나타나리라고는 생각도 않았다가 나타나자 이근석 단장은 곧바로 기지 대원 전원에게 긴급소집緊急召集을 시켜 놓고
“제군諸君들은 들어라. 적 북한 공군 야크기 두 대가 기지를 정찰하고 갔다. 오늘 중으로 공습空襲 당할 가능성이 크다. 야크기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이 나치 독일의 막강한 공군과 맞선 전투기다. 현재로서는 세계 제1급의 전투기임이 틀림없다. 이 전투기를 적 북한 공군이 보유하고 있다. 우리에겐 큰 놀라움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비하면 우리 공군은 너무 비참悲慘하다. L-4, L-5, T-6를 합쳐서 스물두 대, 아무런 무장武裝도 없는 잠자리 신세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절망은 없다. 비록 잠자리이긴 하지만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무엇이냐? 우리가 해야 할 일, 그것은 L-4, L-5, T-6로도 할 수 있는 정찰과 연락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임무에 명예와 목숨을 걸어야 한다. 전투기가 없어서 출격하지 못한다는 하소연은 말이 안 된다.”
라고 비장秘藏한 각오로 피를 토할 듯 외쳤구먼.
“할아버지, 왜 L-4, L-5, T-6의 비행기를 ‘잠자리’라 했나요?”
“아마, 비행기의 모양이 잠자리 같기 때문이고 적敵 전투기처럼 빨리 날지 못하기 때문이야. 그렇지만 그날 6월 25일 오후부터 L-4, L-5, T-6는 문산汶山 방면으로, 의정부議政府 방면으로, 멀리는 춘천春川까지도 출격했지. 그렇지만 정찰이나 연락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어. 의정부가도議政府街道와 문산가도汶山街道를 물밀듯이 줄지어 서울을 향해 남하南下하는 적 북한군은 소련이 북한에 제공한 T-34형 탱크와 SU-76 자주포自走砲(기동성을 위해 차량에 탑재한 야전포)로 중무장重武裝을 하고 있었단다.
이에 대해 국군은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지. 57밀리 대전차포對戰車砲와 2.36인치 로켓포가 있긴 했지만, 적의 탱크와 장갑차裝甲車를 박살낼 만한 무기는 아니었어. 그래서 우리 공군 조종사들은 ‘적의 탱크를 보고만 있을 수 없다. 정찰이나 연락만 할 게 아니라 폭탄을 안고 출격하자!’고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단다. 그렇게 해서 육군으로부터 15킬로그램짜리 폭탄 274개를 보급 받아서 T-6에 8∼10개씩 장착했고, L-4, L-5는 장착할 곳이 없어 뒷좌석의 정찰원이 두 개씩 품에 안고 6월 27일부터 본격적 출격했구먼. 그런데 좀 서글픈 얘기를 할까?”
“할아버지, 6.25전쟁 자체가 슬픔인데, 무슨 서글픈 얘기를?”
“국군통수자國軍統帥者로 나라를 지켜야 할 대통령이 6월 27일 새벽 2시, 서울시민 몰래 피란을 가거든?”
“할아버지, 6.25전쟁 당시에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잖아요?”
“그려. 우리 공군 조종사들은 대통령이 없는 서울을 지키겠다고 의정부議政府와 문산전선汶山戰線에서 탱크와 자주포를 발견하면 전속력으로 하강下降해 뒷좌석의 정찰원이 손으로 폭탄을 던지는 폭격을 했어. 이러한 폭격은 명중命中 되는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빗나가기 일쑤였지.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오직 탱크를 부수고 말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출격을 했단다. 그렇지만 전선은 더욱 악화惡化돼 의정부전선마저 무너지면서 미아리고개 너머에 적의 탱크가 나타나면서 서울은 함락 직전이었지. 풍전등화風前燈火야. 공군 비행단도 이상 더 여의도 기지에서 작전을 펼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해 수원기지水原基地로 이동을 서둘러야 했구먼.
그때 구선진具仙鎭 소위는 단장실로 뛰어갔지, 단장 이근석 대령이 6월 26일 조종 장교 아홉 명을 이끌고 미 공군기지가 있는 일본 이다즈케[板付]로 F-51를 인수하러 갔기 때문에 공군참모총장 김정렬金貞烈(1917-1992) 준장이 비행단장을 겸하고 있었어. 구선진 중위는 용무가 있어 왔으니 허락해 달라고 단장에게 말했지.
김정렬 단장이 ‘허락이라니?’이라고 말하자. 구선진 소위는 ‘여의도를 뜨기 전에 한 번만 더 의정부 상공으로 출격을 허락해 달라’고 말하자. 단장은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느냐?’고 묻게 되었고, 구 소위는 ‘이대로 여의도를 못 떠나겠습니다. 서울이 함락을 두고 볼 수 없어 탱크 한 대라도 없애야만 속이 풀릴 것만 같다’고 했지. 구 소위의 애국심愛國心에 가슴이 뭉쿨해진 단장은 구 소위의 손을 맞잡으며 진정한 대한민국 공군 조종사라며 출격을 허락했구먼.”
“할아버지, 우리나라 국군은 탱크가 한 대도 없었나요?”
“그려. 탱크는 없었고 그저 장갑차가 몇 대 있었을 뿐이야. 그러니 적 탱크를 박살 내야만 북한군 남하를 저지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었거든.
L-5 비행기 뒷좌석에 이상도 이등중사二等中士(현재의 부사관 중 하사)를 태우고 여의도기지를 이륙離陸한 구선진 소위는 물결 출렁이는 한강 물줄기 따라 비행하다가 기수機首를 북으로 돌렸지. 저공비행低空飛行으로 전진하면서 현재의 지하철 4호선 길음역吉音驛과 성신대입구역誠信大入口驛 근처에 있던 미아리彌阿里고개를 넘어서자마자 국군과 적 북한군이 격전을 벌이고 있는 최전선最前線이 눈에 확 들어오는데 적 탱크가 스무 대가량 보였어.
박상도 이등중사도
“탱크가 보입니다!”
라고 외치자 조종간操縱杆(조종 손잡이)을 힘주어 잡고 있던 구선진 소위가
“알고 있다! 박 중사! 선두에 선 탱크를 노린다. 알겠나?”
외치면서 엔진 속도를 높이면서 다짜고짜 탱크를 향해 기수를 내리꽂을 때 탱크 주변에서 대공사격對空射擊의 불꽃이 무수하게 일어났지. 적탄敵彈이 비행기의 날개를 꿰뚫는 소리가 ‘퍽퍽’ 났지만 오로지 제일 앞에선 탱크를 노렸어. 뒷좌석의 박상도 중사가 두 개를 안고 있던 폭탄 중 한 개를 탱크를 향해 던졌으나 폭탄은 빗나가서 터졌거든.
구선진 중위는 기수를 치켜 올랐다가 다시 제일 앞에선 탱크를 향해 다시 내리꽂으면서 박상도 이등중사가 던진 폭탄은 명중命中이었지. ‘꽝!’ 하는 소리와 함께 탱크는 박살이 났어. 그 때서야 구선진 소위는 벅찬 가슴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렸거든. 이미 여의도기지 비행단은 수원기지水原基地로 옮겨갔기 때문에 수원으로 기수를 돌렸지. 그 이튿날 28일 서울이 함락되었구먼.”
“할아버지, 아까 말씀하시길 일본 이다즈케 기지로 F-51D를 인수하러 간 비행단장 이근석 대령은 어떻게 되었나요?”
“구선진 소위가 여의도기지에서 마지막 출격한 지 일주일이 지난 7월 3일 10대의 F-51D를 이끌고 돌아온단다.”
“할아버지, 그 얘기가 듣고 싶어요?”
“이근석 대령은 1917년 1월 17일 평안남도 평원군 청산면 구원리에서 출생했지. 그리고 1933년 평양고등보통학교平壤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갔어. 청운의 꿈이 비행기 조종사였기에 구마다니[熊谷] 비행학교 소년비행병少年飛行兵 2기생으로 입학해 1934년 졸업과 동시에 일본 군대에 들어가 요시오카[吉岡] 전투비행부대에 배속되었거든.
그 부대는 일본 육군항공부대 중에서도 최정예最精銳 조종사들만 갈 수 있는 부대야. 그러기에 ‘전 일본 육군·해군 대항 비행대회全日本陸軍海軍對抗飛行大會’에서 1등을 하기도 했지. 그래서 조선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비행 교관 자격을 얻게 된단다. 하지만 전투기 조종사로서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 부대에 근무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에 남방南方(동남아시아) 미얀마전선으로 전출되었다가 애칭愛稱 ‘하야부사[準(매, 또는 솔개를 의미)]’라는 잇시키센토키[一式戰鬪機]를 몰다가 추락해 인도印度에서 영국군의 포로가 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구먼.
해방 후 멀리 중국이나 만주 땅에 망명했던 사람들이나, 일본으로 징병徵兵이나 징용徵用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꿈에라도 잊지 못했던 고국의 고향 땅으로 해방의 기쁨을 안고 돌아왔지.
그 무렵에 귀국한 이근석 대령은 1946년 조선경비대朝鮮警備隊 항공부대航空部隊 창설 요원이야. 앞서 말한대로 최용덕, 김정렬, 박범집, 정덕창, 김영환, 이영무 등 6명과 함께 조선경비대 보병학교步兵學校를 졸업하고 육군 항공소위航空少尉에 임관되었고 공군 창군 7인 중에 한 사람으로 공군사관학교空軍士官學校 초대 교장을 지내기도 했어.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여의도기지의 비행단장이었단다.
한 대의 전투기도 없던 비행단에는 연습기와 정찰기만 있었지. 북한군은 탱크를 앞세워 남하하면서 서울로 밀고 오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던 이근석 대령은 연습기의 뒷좌석에 수제 폭탄과 정찰병을 태우고 출격했으나 탱크를 공격한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치기’나 다름없는 현실이었어. 그래도 조국의 하늘을 지켜야 하는 비행단장으로서 최선을 다해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생각뿐이었구먼.
그러던 중 일본에 있던 미 극동사령부美極東司令部에서 F-51D 무스탕 전투기 10대를 지원해 주겠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지. 그래서 이근석 대령은 6월 26일 밤에 김영환金英煥 중령, 김신金信 중령, 장성환張盛煥 중령, 강호륜姜鎬倫 대위, 박희동朴熙東 대위, 김성룡金成龍 중위, 정영진 중위, 이상수李相垂 중위, 장동출張東出 중위 등 9명의 조종사를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어. 그리고 이다즈케[板付]기지에서 F-51D 무스탕 전투기 조종 교육을 받고 1950년 7월 2일 F-51D 무스탕 전투기 10대를 직접 인수하여 대구기지大邱基地에 도착했단다.
그때 지상전투地上戰鬪는 북한군이 우세한 병력과 탱크를 앞세워 밀고 내려오는 힘 앞에 아군은 힘을 쓸 수가 없었지. 유엔군 산하 미 제24사단 선발대 ‘스미스 대대Task Force Smith’가 평택平澤과 오산烏山 사이의竹美嶺 고갯길에 당도했어. 그렇지만 북한군을 너무 얍잡아 본 스미스 대대는 탱크를 부술 대전차무기對戰車武器를 갖추지 않았지. 그러니,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은 스미스 대대를 제치고 경부선京釜線 국도를 따라 주력부대를 남쪽으로 돌려 7월 4일 북한군은 이미 수원 남쪽의 평택까지 남하해 있었거든.
그 무렵 이근석 대령은 일본에서 인수편대장引受編隊長으로 F-51D 무스탕 전투기를 인수해 온 다음 날 7월 3일부터 출격했지. 하지만 우리나라 공군이 가지고 있던 비행기는 22대로 12대의 연습기와 국민의 성금으로 마련한 ‘건국기’라 불리우는 T-6 연습기 10대가 고작이었지. 이에 비해 북한군은 198대의 비행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중 소련제 야크 전투기만도 100대였거든. 그러니 전투기라곤 한 대도 없던 우리나라 대한민국 공군은 6.25전쟁이 나고서야 비로소 F-51D 무스탕 전투기를 갖게 되었으니, 이근석 대령은 단 1초라도 북한군의 탱크를 쳐부수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구만.
7월 4일이야. 이근석 대령은 출격준비를 하고 있었어. 어제도 출격했으니 그동안 쌓였던 심신의 피로를 풀어야 하니 하루 쉬라고 주위에서 말리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구국의 일념으로 스스로 편대장을 맡아 대구기지를 이룩했어. 편대를 이끈 이근석 대령은 평택 상공을 지나 오산 상공을 지날 때 경부선 국도를 따라 유유히 남하하는 북한군 행렬을 보게 되었거든.
이근석 대령은 편대원들에게 ‘적 대부대 발견 기총 공격한다. 나를 따르라!’고 명령을 내렸지. 그리고 기수를 내려 급강하하면서 기총 스위치를 힘껏 눌러 북한군을 향해 사정없이 갈겨대었어. 기총에서 불을 뿜으면서 발사된 두 줄기의 총알은 쭉쭉 뻗어나가며 적진을 파고들었거든. 그렇게 총알 세례를 퍼붓는 등 편대의 기총소사는 세 차례나 반복되었거든. 그러나 그게 목표는 아니었다. 첫 번째 목표는 북한군의 탱크를 찾아내어 박살내야만 했단다.
북한군은 38선을 돌파하여 남침할 때 242대의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우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내려왔지만 우리 국군은 겨우 몇 대의 장갑차만 있었을 뿐 탱크는 한 대도 없었지. 하지만 한 대의 탱크도 없었던 우리 국군은 북한군의 탱크를 육탄肉彈 공격으로 막아야 했어. 즉 몸에 수류탄手榴彈이나 폭탄을 지니고 적의 탱크에 뛰어들어 조국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려야 했거든.
알고 보면 육탄 공격은 우리 대한민국 공군도 예외는 아니었지. 전쟁 초기에 전투기가 없으니, L-4, L-5, T-6 정찰기나 연습기에서 조종사들이 적진을 향해 손으로 폭탄을 던져야 했으니 육탄 공격이나 다름없었구먼.
여하튼 첫 번째 공격을 끝낸 이근석 대령은 편대를 이끌고 적의 탱크를 찾아서 다시 북상하면서 수원을 지나 안양安養과 시흥始興이 바라다 보이는 상공에 도착했을 때 시흥 남쪽에 탱크를 발견하게 되었지. 대충 세어보아도 어림잡아 20여 대가 넘었어.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정찰기에서 손으로 폭탄을 던져야 했지만 F-51D 무스탕 전투기의 기총 단추(버튼)만 누르면 탱크를 향해 자동적自動的으로 탄환을 소나기를 퍼붓듯 갈겨댈 수 있었거든.
이근석 대령은 편대원들에게 ‘편대원編隊員들은 들어라! 12시 방향에 적 탱크 20여 대 발견, 공격한다! 적 대공포對空砲에 조심하라!”
고 명령을 내렸지. 그러자 편대원들의
‘알았다!’
라는 화답和答이 리시버에 들려왔어. 이근석 대령은 조종간操縱桿을 앞당기며 급반전急反轉하면서 돌입각도突入角度를 잡았는데 적의 탄환彈丸이 하늘을 향해 무수히 날아올랐지. 하지만 이근석 대령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탱크뿐이었어. 그리고 탱크부대의 기동起動을 저지하기 위해 선두에 선 탱크를 조준기照準器 안에 공격 목표로 담았지. 고도高度를 계속 급강하하면서 고도계 高度計가 750피트를 가리키는 순간었지.
그때를 놓이지 않고 기총機銃 단추를 힘껏 눌렀어. 그와 동시에 기수機首를 치켜 올렸지. 그리고 적탄을 피하기 위해 반전을 거듭해 고도 2000피트로 솟구쳐 기체를 바로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어. 선두에 서 있던 탱크에 검은 연기가 퍼지고 섬광閃光이 번쩍이면서 폭발했지. 통쾌한 명중命中이었단다.
그때 이근석 대령은 명중의 감격에 겨운 채 2번기, 3번기도 급강하해 탱크를 명중시키는 것을 보면서 흥분된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다. 편대는 급강하를 거듭하면서 계속 기총을 쏘아댔다. 그리고 네 번째 공격을 마치고 급반전해 기수를 하늘로 치켜드는 순간이었다.
아, 그 순간에 그만 ... ... ... ”
“할아버지, 그만이라니요?”
“치솟던 적탄敵彈이 이근석 대령이 몰던 F-51D 무스탕 전투기의 기체機體 엔진에 명중되면서 순식간에 불이 붙었지. 비상탈출非常脫出 장치의 버튼만 누르면 좌석이 그대로 캐노피Canopy(조종실 덮개) 밖으로 떨어져 나가면서 낙하산落下傘이 펼쳐져 탈출할 수 있었지만, 이근석 대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단다.
그러나 잠시 비상탈출을 생각해 보기도 했겠지만, 자신의 목숨보다는 애기愛機 F-51D 무스탕 전투기를 더 사랑했는지도 모르지. 또는 불타는 기체는 마치 자신自身이 불타는 것처럼 생각했을지도, 그렇지 않으면 일본에서 미 공군으로부터 인수받아 손수 몰고 온 F-51D 무스탕 전투기이기에 전쟁터에서 한 대의 전투기라도 아쉬운데 비행기를 잃는다는 자책自責 일지도, 여하튼 평범平凡한 사람은 상상想像도 못할 마음의 갈등도 있었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애국충정愛國衷情 때문에 비상탈출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 …
편대원들은 ‘편대장님! 편대장님! 비상탈출! 탈출 하십시오!’라고 화염火焰에 싸인 채 선회旋回하는 이근석 대령에게 외쳤다.
‘조국의 하늘을 부탁해!’
그렇게 되돌아오는 리시버에 이근석 대령의 목소리는 비장했지. 푸른 하늘을 커다란 불덩이로 반원형半圓形을 그리던 이근석 대령의 전투기는 지상을 향해 일직선一直線을 그으며 적의 탱크에 마치 화우火牛처럼 돌진했어. 이어서 땅이 흔들리고 굉음轟音이 허공을 갈라놓는 듯하면서 불꽃이 튀었지. 그렇게 이근석 대령은 1950년 7월 4일 시흥 상공에서 마지막 생애生涯를 ‘막비명야 순수기정莫非命也 順受其正’ 즉 ‘천명이 아닌 것이 없으니 정명正命을 받아들이라’는 각오로 자폭自爆함으로서 조국 수호에 목숨을 바쳤지. 6.25전쟁 발발 이후 이근석 대령은 F-51D 무스탕 전투기로는 첫 번째 전사자戰死者야. 정부는 1951년 9월 이근석 대령에게 공군 최초로 태극무공훈장太極武功勳章과 함께 준장准將으로 1계급 특진特進을 추서했구먼.”
제4장 여의기지 백구부대
“황옥아!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의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으로 9월 28일 북한 공산당 共産黨 치하에 신음하던 서울을 수복收復하고 압록강鴨綠江까지 진격했던 아군은 다시 12월에 중공군中共軍의 개입으로 다음 해 1951년 1월 4일, 1.4후퇴一四後退로 다시 서울을 빼앗겼지. 4월에 국군과 유엔군은 전열을 다듬어 반격의 여세를 몰아 서울을 다시 수복하고 38선을 돌파했거든. 그때에 미 공군 제6146부대와 협동으로 북한군의 후방지역 後方地域를 강타하기 위해 우리나라 공군도 대전기지大田基地의 제1전투비행단 일부를 여의도기지로 옮겨 배치했는데, 일명 ‘백구부대白鷗部隊’라고 불렀지.
그때 여의도기지의 백구부대 주역을 맡은 F-51D 무스탕 전투기 조종사는 이강화李康和 대위, 오춘목吳春睦 대위, 최종봉崔鐘奉) 대위 그리고 이세영李世映 대위였지. 그런데 최종봉 대위가 4월 16일 강원도 이천伊川지구의 북한군 진지를 공격하다가 황해도 곡산谷山 상공에서 산화散華해 세 명으로 줄어든 편대는 죽을 맛이었구먼.”
“할아버지, 죽을 맛이라니요?”
“그 당시 공군의 출격은 공군 자체의 작전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어서야. 아군의 지상군地上軍이 공군에게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출격하는 횟수가 더 많았지. 쉴 사이도 없이 하루에도 서너 번씩 적진을 향해 출격해야 하니 아무리 무쇠 같은 강한 체력의 조종사들일지라도 견딜 수 없었지. 그러나 ‘내 한 목숨 던져 조국을 지킨다’는 정신력精神力으로 버티면서 출격을 했거든.
최종봉 대위가 전사한 지 열이렛날이 되는 1951년 4월 21일이었어. 그날은 아침부터 몹시 흐리고 강풍强風이 불며 먹구름이 낮게 낀 날이었지. 그래서 시계視界가 불량해 비행하기가 어려웠거든. 그런데도 지상군이 송정리松亭里(강원도 이천군 산내면)에 있는 적 보급품집적소補給品集積所에 새로운 전쟁 보급품이 많이 쌓여 있으니 ‘빨리 폭격해 달라’는 지원 요청이 전홧줄에 불날 정도로 끊일지 않았지. 비행대는 악천후惡天候지만 비행사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출격하기로 했어. 적의 새롭게 쌓인 전쟁 보급품이 예하隸下 각부대로 운반되기 전에 강타를 해야 했지. 출격이 늦으면 늦을수록 우리 지상군의 희생犧牲이 더 커지는 상황에서 일기불순日氣不純한 악천후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거든. 마침내 비행대는 비장悲壯한 각오로 악천후를 뚫고 출격하기로 했구먼.
그래서 네 대로 편대를 구성해 출격했는데 이강화 대위, 이세영 대위, 미 공군 조종사 두명이었어. 이세영 대위는 3번기였지. 공격 목표는 송정리의 적 보급품집적소였는데 사흘 전에는 없었던 전쟁 보급품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거든.
제1번기 편대장이 먼저 공격 목표를 향해 돌입하면서 공격을 했지. 이어 2번기가 돌입 공격하고 왼쪽으로 상승하는 사이에 이세영 대위 3번기는 공격 목표 200미터 전방에서 일직선으로 돌입해 폭탄투하장치爆彈投下裝置의 단추를 누르고 재빨리 오른쪽으로 상승했어. 투하된 폭탄은 모두 보급품집적소에 명중되어 검붉은 불꽃에 휩싸여 불바다를 이루고 있었단다.
작전에 성공한 편대는 무사히 기지로 귀환歸還한 뒤, 오후 1시 무렵 적의 수송대輸送隊가 이천으로 남하하는 중인데 그곳에도 엄청난 보급품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오후 1시 무렵 다시 출격을 감행해야 했거든. 편대장은 오춘목 대위, 제2번기 이세영 대위, 그리고 미 공군 조종사들은 3번기와 4번기를 맡았구먼
편대는 이천의 적 보급품집적소를 강타하고 기수를 막 돌리려고 할 때였지. 그때 이세영 대위는 기수를 돌리다 말고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중공군 트럭 여섯 대가 이천의 보급품직접소로 향해 가는 것을 발견했거든. 그리고 편대장에게 보고하고는, 즉시 트럭을 공격하려고 기수를 내려꽂기 시작했지.
그러나 이세영 대위는 트럭 여섯 대를 기총사격한 뒤, 방향을 틀어 상승하는 순간 엔진에 그만 … … …
대공포화對空砲火에 맞아 전투기는 순식간에 불꽃이 일어나면서 검붉은 화염에 휩싸인 채 검은 연기가 긴 꼬리를 그리면서 편대장과 편대원들에게
‘적진에 돌입突入함. 모두 안녕安寧히!’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적진敵陣을 향했지. 장엄莊嚴하게 자폭自爆했어. 스물네 살의 피 끓는 젊음을 조국의 하늘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희생제물犧牲祭物이 되었던 거야.
이세영 대위를 말하자면, 고향이 북한이야. 1927년 황해도 수안군 수구면 석달리에서 태어났어. 평양 제3공립중학교에 다니다가 1943년 일본으로 건너가 다치아라이[太刀洗] 육군비행학교에 들어가 1944년에 비행조종과飛行操縱科를 졸업했지. 해방 후 고향으로 귀국한 그는 북한 공군에 입대해 중위로 근무 중 반동분자反動分子로 몰려 숙청대상肅淸對象에 오르자 1948년 10월에 ‘삼팔따라지’로 남쪽으로 내려와 대한민국 육군 항공사령부에 입대해서 1950년 4월에 공군 소위로 임관했거든.”
“할아버지, 삼팔따라지가 뭔가요?”
“화투花鬪판에서 나온 말이야. 1에서 12까지 화투장花鬪張(화투의 낱장)이 있는데 그중에 3의 세 끗과 8의 여덟 끗을 합하면 열한 끗이 되는데, 거기에 10단위를 떼면 한 끗이 되지. 한 끗을 ‘따라지’라 부르거든. 가장 낮은 끗 수야.
해방 후 6.25 전쟁이 나기 전까지 북한의 공산당이 싫어서 삼팔선三八線을 넘어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많았어. 즉 삼팔선의 삼(3)과 팔(8)를 합하면 11이 되지. 거기에 10단위를 빼면 1이 되는데, 그 1를 화투판에서의 한 끗 따라지에 빗대어 삼팔선을 넘어 남쪽으로 온 사람들을 얕잡아 ‘하찮은 사람’의 뜻으로‘삼팔따라지’라고 불렀단다. 즉 그들은 삼팔선을 넘어 자유를 찾긴 했으나, 대부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거나 의지할 데가 없어서 그들의 신세身世를 화투판에 말하는 가장 낮은 끗수인 따라지에 빗대어 ‘삼팔따라지’라고 했구먼.”
그러나 이세영 대위는 삼팔따라지지만 홀로서기를 했지. 당당한 대한민국 공군 장교가 되었던거야. 그래서 북한군北韓軍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이세영 대위는 L-4 비행기를 조종하여 적정敵情 정찰, 지휘관指揮官 수송, 전단傳單 살포, 연락連絡 업무 등을 수행했지.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남하하자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洛東江防禦線을 구축하고 필사의 방어작전防禦作戰을 펼칠 때였지. L-4 비행기는 전투용 비행기가 아니고 연락, 정찰용 비행기이기 때문에 폭탄 투하장치가 없어. 그렇지만 이세영 대위는 60여 회 정찰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남하하는 북한군에게 30파운드의 폭탄과 수류탄을 손으로 던져 공격해서 낙동강방어선 사수死守에 이바지했거든. 그 공로功勞로 1950년 10월에 중위로 진급되고, 그 다음해인 1951년 3월 1일 대위로 진급했구먼.
그리고 기종전환機種轉換을 하기 위해 제주기지濟州基地에서 F-51D 무스탕 전투기 조종 훈련을 마치고 최종봉, 오춘목, 이강화 대위와 함께 기량이 뛰어난 조종사로 선발되어 3월 31일 공군 제1전투비행단으로 전속轉屬돼 이곳 여의도기지의 ‘백구부대’로 왔지.”
“할아버지, 백구부대라면 혹시 백구白狗인 진돗개가 부대의 이름이나요?”
“황옥아, 진돗개가 하늘을 나는 것을 보았나?”
“아니요. 할아버지!”
“공군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무엇이지?”
“할아버지, 그야 ‘하늘’ 아니면 하늘을 나는 ‘비행기’ 그러니까 하늘을 날 수 있는 것과 관계되는 것 같아요?” “그려, 하늘을 나는 새야. 새 중에서도 바다에서 사는 새지. 이젠 알겠지. 또 엉뚱하게 날지도 못하고 뒤뚱뒤뚱 걷는 ‘펭귄’이라 하지 말고 ... ... ... ”
“아하, 할아버지! 이제 알겠어요. 갈매기죠?
“그렇단다. 갈매기라도 그저 갈매기가 아니고 흰 갈매기, ‘백구白鷗’란다. 그러니 백구부대란 여의기지의 제1전투비행단 일부 부대를 사랑스럽게 부르는 부대 애칭愛稱이야.
중공군의 제2차 공세攻勢가 한창이던 1950년 12월 20일, 북한의 평양 미림비행장美林飛行場까지 진출해 출격했던 우리 공군은 안정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제1전투비행단 본대를 제주기지로 옮기기로 했지. 그 과정에서 일부 작전 요원과 비행장 확보 인원이 비행기가 가는 도중에 잠시 머물렀다가 가는 중간 기착지寄着地인 대전기지大田基地에 남아있었거든. 그때 김신金信, 1922-1916(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의 차남) 중령은 조종사와 정비사 등 총 20여 명을 모아 1개 단위의 비행전투부대飛行戰鬪部隊를 창설하였는데, 그 부대가 바로 백구부대야.
그렇게 창설된 대전기지의 백구부대는 실질적인 전투 임무보다 미 공군 제6146부대의 지원 임무에 주력했어. 그러다가 점차 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호전돼 다시 서울이 수복되고 전선(戰線)이 38선 이북으로 형성되었지. 그래서 1951년 3월 27일, 여의도기지에 전진 배치되면서 전투 임무를 수행할 준비에 착수했거든. 그 당시 여의도 비행장의 활주로滑走路는 중공군이 밀고 내려왔을 때 아군의 폭격으로 물웅덩이가 되다시피 파괴됐는데, 기지 장병들과 인근 주민들이 비행기가 뜨고 내릴 수 있도록 복구했단다.
그렇지만 배구부대는 부대 힘만으로 단독작전單獨作戰을 적절히 해낼 수 있는 조종사가 부족했지. 따라서 여의도기지로 옮긴 후 미 공군에서 훈련을 마친 이세영, 최종봉, 오춘목, 이강화 대위 등 4명의 대위가 조종사가 전입했지. 그리고 미 공군 조종사 헤스 중령, 멧칼프 대위, 길레스피 중위 등 4명의 미군 조종사가 보강돼 우리 공군이 미 공군으로부터 인수한 F-51D 무스탕 전투기 6대를 한국과 미군의 조종사가 혼합편성混合編成돼 운용했구먼.
그리하여 1951년 4월 3일부터 5월 31일까지 백구부대는 북한군의 후방 지역인 평강平康, 이천伊川, 남천점南川店, 신계新溪, 은율殷栗, 수안遂安, 해주海州, 신원新院, 재령載寧 등에 있는 적진지와 보급집적소를 강타하는 등 작전을 펼쳤는데 이세영 대위가 전사했지. 그래서 이세영 대위는 전쟁 중 세운 전공戰功으로 1951년 5월 1일, 일 계급 진급시켜 공군 소령으로 추서되었으며, 7월에는 을지무공훈장乙支武功勳章을 받았거든. 그리고 전쟁기념관戰爭記念館은 이세영 공군 소령을 2010년 4월의 호국인물護國人物로 선정하고 고인故人을 추모하는 현양顯揚행사를 했단다.”
“그런데 할아버지! 6.25 전쟁 땐 비행장이 있었는데, 오늘날 63빌딩을 비롯해 고층의 빌딩이 즐비하고 국회가 있고, KBS(한국방송공사)가 있는 이 여의도가 6.25전쟁 때는 공군 기지가 있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럴꺼야. 70년대만 해도 여의도공원은 백만 명이 모일 수 있는 ‘5·16광장五·一六廣場인데, 10월 1일 ‘국군의 날 기념’ 행사장으로 우리 국군과 향토예비군鄕土豫備軍이 대통령 앞에서 각종 부대기와 미사일, 탱크, 장갑차 등을 앞세우고 퍼레이드를 하던 곳이야. 그리고 한때 5·16광장 가에 있던 KBS(한국방송공사) 본관은 이산가족離散家族들이 헤어진 가족을 찾으려고 몰려들기도 했지.
우리나라의 이산가족은 일제식민지日帝植民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생겨났거든. 일제식민지 시기에는 일제통치日帝統治를 피해서,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위해서, 극심한 생활고生活苦를 위해서 살길을 찾아서 만주나 해외로 떠나가 살게 된 사람들이야. 또 일제의 징용으로 끌려가 해방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이산가족이 생겼거든. 지금도 그들 본인이나 자손들은 중국, 러시아, 일본 등에 살고 있단다.
내일은 북간도北間島로 길 떠나는 날/ 세간을 다 팔아도 여비 모자라/ 검둥이마저 팔아 돈 받았지요// 아버지는 예전부터 하시는 말씀/ ‘북간도는 좋은 곳 이밥 먹는 곳/ 나무도 아니하고 학교도 가지’// 이렇게 좋은 곳을 찾아가는데// 어머니 아버지가 봇짐 싸면서/ 어째서 하루 종일 울으실까요
1930년 1월 2일 날짜의 동아일보東亞日報에 게재된 「북간도北間島」라는 동시지. 그 당시에 우리나라의 수많은 사람이 일제통치日帝統治 밑에 가난에 허덕일 수 없어 고향을 등지고 기후도 찬 줄 알고 바람이 매서운 줄 아는 북간도가 있는 만주로 가야 했지. 만주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시베리아로도 가야 했어. 그러나 그곳에서도 나라 잃고 떠나간 사람들은 결코 주린 배를 채울 수 없었지. 그리고 해방이 되어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어, 그 곳에 머물러 살아야 했고, 고향에 있는 부모형제父母兄弟를 만날 수 없는 이산가족이 되었던 거야.
6.25전쟁 때는 북에서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온 실항민失鄕民, 그리고 본의 아니게 강제로 북으로 끌려간 납북자拉北者들로 인해 이산가족이 생겼어. 그래서 실향민들을 위한 대중가요가 만들어져 그들의 심금(心琴)을 울리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노래가 「꿈에 본 내고향」이지. 그 노래는 1절이 끝나면, 2절을 부르기 전에 ‘뜬 구름아 물어보자 어머님의 문안을, 달님아 비춰다오 인성이와 정숙이의 얼굴을, 생시에 가지 못할 한 많은 운명이라면 꿈에서나 보내다오 어머님의 무릎 앞에, 아! 어느 때 바치려나 부모님께 효성을,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라는 대사臺詞가 있어서 실향민들의 심금을 더욱 울리게 했단다.
그런데 6.25전쟁으로 생긴 이산가족 문제는 휴전 후 남북적십자회담南北赤十字會談을 여러 차례 했지만 별 진전이 없었지. 그래서 1983년 2월 ‘일천만 이산가족찾기 재회 추진원회’가 결성되었거든. 그리고 같은 해 6월 30일 KBS가 이산가족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이산가족들은 물론 온 국민이 열광熱狂과 환호喚呼로 밤을 지새웠구먼.”
“할아버지, 어떤 프로그램인데 그렇게 ... ... ... ?”
“즉 1983년 6월 30일 밤 10시부터 KBS-1TV를 통해 특별 생방송生放送 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로 원래는 95분가량의 분량으로 기획되었지. 그러나 이산가족 150명을 초청한 방청석傍聽席에 무려 1천여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몰려 북새통이었고, 방송 도중에 이산가족들의 문의 전화가 너무 많이 걸려와 방송업무가 마비痲痹될 정도였어. 그래서 새벽 1시까지 예정된 방송시간을 새벽 3시까지 늘여 연장 방송했지. 무려 4시간 15분 동안 생방송에는 총 850이산가족이 출연해 36가족이 서로 만나는 기쁨을 누렸구먼.
이튿날 6월 31일에는 날이 밝기도 전에 KBS 본관 앞에는 1만여 명의 이산가족이 몰려들었지. 그래서 KBS는 연장방송을 하기로 했는데, 7월 1일의 이산가족 찾기는 다음날 새벽 5시까지 8시간 45분 동안 생방송 되었어. 그렇게 새벽 5시까지 생방송 하기는 우리나라에 방송이 생기고, 처음 있는 일이었었거든. 7월 2일에는 14시간 동안 생방송이 되었는데, 그날 하루에 다시 만난 이산가족이 3백여 쌍이 되었지. 아예 7월 3일에는 뉴스도 드라마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을 하였단다. 그때 트로트 가수 설운도雪雲道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리웠던 삼십 년 세월을’이라는 노래 「잃어버린 삼십 년」을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무대에 나와 불러 그 당시 이름도 없던 무명가수가 일약一躍 스타가 되었구먼.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얌전한 몸매의 빛나는 눈/ 고운 마음씨는 달덩이 같이/ 이 세상 끝까지 가겠노라고/ 나하고 강가에서 맹세를 하던/ 이 여인을 누가 모르시나요//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부드런 정열의 화사한 입/ 한 번 마음 주면 변함이 없어/ 꿈 따라 임 따라 가겠노라고/ 내 품에 안기어서 맹세를 하던/ 이 여인을 누가 모르시나요
1964년 발표된 곽순옥郭順玉의 노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지. 이 노래를 패티 김이 리메이크remake 해 ‘이산가족 찾기’ 배경음악背景音樂으로 인기를 끌었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은 1962년 라디오 연속극連續劇 《남과 북》의 주제가主題歌였는데 1965년에 상영된 영화 《남과 북》의 주제가이기도 했어. 노래를 지은 사람은 6.25전쟁 때 우리나라 공군 전투기 조종사의 얘기를 다룬 영화 《빨간 마후라》의 원작자 한운사韓雲史, 1923-2009 선생이었단다.
『남과 북』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최전방 최전선에 이 대위가 중대장으로 있던 부대에 북한 인민군人民軍으로 국군의 소령少領 계급에 해당하는 장일구 소좌少佐가 귀순해 오지. 이 대위는 장일구에게 적군敵軍의 정보를 얻으려고 하지만, 장일구는 이 대위에게 정보를 주는 댓가로 자기 애인愛人을 찾아 달라고 부탁을 하지. 장일구가 귀순한 이유는 전쟁 전에 헤어진 애인 ‘은아’를 찾기 위해서지. 그러나 그가 내민 사진 속의 은아를 본 이 대위는 그만, 소스라치게 깜짝 놀라지.”
“할아버지, 혹시 그 사진의 여자가 장일구의 애인이면서도 이 대위의 애인이 아닌지요?”
“맞은 통밥이긴 한데 약간 빗나갔구먼!
애인이 아니고, 이 대위의 아내였어. 장일구는 인민군 배치에 대한 주요 군사정보軍事情報를 이 대위에게 알려주고, 그 댓가로 꿈에 그리던 애인 은아를 만나지. 그때 장일구는 자기의 애인이 이미 이 대위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 그래서 그는 이 대위와 이 대위의 아내가 된 은아의 행복을 위해 단념斷念하기로 결심한다는 내용의 영화야. 즉 전쟁으로 엇갈린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을 내세워 분단分斷의 아픔을 내세운 영화란다.
남북 분단으로 서로 휴전선休戰線을 두고 남과 북으로 헤어진 이산가족의 <KBS 1TV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은 이산가족들이 남한에서 생존生存해 있는 가족을 찾기 위해 방송으로 1983년 6월 30일부터 그해 11월 14일까지 138일간 총 방송시간은 453시간 45분이었지. 그리고 방송기간 동안 신청자 10만952명 중 5만3천536명이 출연해서 1만189명이 서로 만나는 대기록을 세우면서 세계 방송역사상放送歷史上 그 유례가 없는 긴 방송으로 국제적으로 큰 화제話題였구먼.
그런데 매일 열광과 환호 속에 펼쳐진 이산가족찾기 방송으로 헤어져 살던 사람들이 다시 만나 서로 얼싸안고 울음바다를 만들었고, 안방에서도 시청자視聽者들이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덩달아 울었고, 어떤 노인은 텔레비전을 보다 자기와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너무 흥분해 쓰러졌지. 너무나 안타까운 일도 있었어. 서로 만나서 ‘맞다, 맞아’ 하며 한참을 안고 울다가 신청서에 적어낸 신상명세身上明細가 틀린 것을 알고 ‘어, 아닌데?’ 하며 멋쩍게 돌아서는 사람들도 있었고, 세 살배기 딸을 데리고 30년을 수절守節하다가 느지막에 재혼再婚한 부인이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남편을 찾았지만, 남편 역시 재혼한 상태였기에 서로 비정非情하게 발길을 돌리는 딱한 사정도 있었단다.
방송 진행이 중단되기도 했어. 피난길에 부모의 손을 놓쳐 고아가 된 뒤 식모살이를 하며 어렵게 살아온 중년 여자가 가족을 찾은 뒤 ‘왜 나만 버렸느냐’며 울부짖자 일흔이 넘은 나이의 노모老母가 충격에 못 이겨 공개홀에서 실신해 소동이 벌어졌지. 그 와중에 방송 진행자進行者마저도 목이 메어 방송이 잠시 중단되었어.
“할아버지, 아까 말한 영화 《빨간 마후라》는 어떤 영화인가요.
1964년 개봉한 영화 《빨간 마후라》는 신상옥申相玉, 1926-2006이 감독했고 배우 신영균, 최무룡, 최은희가 출연했거든.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 공군 강릉기지는 ‘승호리 철교 차단작전勝湖里鐵橋遮斷作戰’, ‘평양 대폭격 작전平壤大爆擊作戰’, 351고지 전투 항공지원작전351高地戰鬪航空支援作戰 등에 출격할 때마다 승리하면서도 많은 희생을 치르었지. 그 당시 강릉기지 제10전투비행전대에서는 날마다 출격이 이루어지고 있었지. 그 가운데서도 별명이 ‘산돼지’인 나관중 소령은 1백회 출격의 기록을 세운 용감한 조종사였단다. 그는 비록 적은 액수의 봉급을 받지만 출격해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동료, 부하 조종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흐뭇한 정을 나누곤 했단다. 그의 절친한 전우는 서양식 술집 여자 종업원 ‘지선’과 연애해 결혼까지 했으나 출격해 기지로 돌아오지 못하고 전사했지. 슬픔에 잠긴 그의 부인 지선을 위로하던 다른 전우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게 영화의 줄거리인데 주인공 나관중 소령은 실제로 고故 유치곤兪治坤, 1927-1965 장군을 모델로 했구먼.
유치곤 장군은 1927년 대구시 달성 유가면에서 태어나 1944년 일본 육군비행학교를 졸업했지. 1951년 4월에 대한민국 공군 소위로 임관했지. 강릉기지에서 첫 출격을 시작으로 ‘승호리 철교 차단작전勝湖里鐵橋遮斷作戰’에 참가해 ‘승호리 철교폭파’의 주연이기도 했거든. 무엇보다도 1953년 대한민국 공군에서 처음으로 200회 출격을 돌파했으며 총 203회 출격해 ‘빨간마후라의 불사조不死鳥’야.
여하튼 여의도공원은 민족의 애환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지. 그런데 1997년 조순趙淳, 1928- 서울시장이 7만평 규모의 공원으로 꾸몄지. 이젠 여의도기지의 비행장 흔적은 눈을 닦고도 찾아볼 수 없구먼.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 하나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종점/ 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한들 무엇하나/ 궂은비 내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대중가요「마포종점麻浦終點」이야. 대중가요는 그 시대를 반영反映하는 노래지. 서울에 전차電車가 다닐 때 영등포, 여의도, 당인리唐人里(현재 마포구 당인동 일대), 마포의 밤 풍경을 알 수 있는 노래거든. 마포종점에서 한강 건너 영등포엔 불빛만 아련하고 여의도비행장에 불빛만 쓸쓸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리고 생각한들 무엇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궂은비 내리는 마포 종점은 서글프다는 노래구먼.”
“할아버지, 전차는 언제까지 있었나요?”
“1899년부터 서민들의 애환을 실어 나르던 전차는 가요 「마포종점」이 불러진지 이듬해인 1968년까지 운행되었지.
지금은 여의도비행장도, 당인리발전소, 마포종점도 없지만, 여의도비행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이야. 1924년 일제의 식민지 때 비행장으로 개장開場했지. 그땐 이름이 ‘경성비행장京城飛行場’이거든. 8·15해방 후에는 민항기民航機와 함께 공군기지로 사용되었단다. 1958년 김포국제공항 金浦國際空港이 생기면서부터 여의도비행장은 공군기지로만 사용하다가 1978년 지금의 서울공항으로 이전하면서 폐쇄되었지.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서울공항을 김포공항으로 잘못 알고 있지만 성남城南에 있는 공군기지야. 대통령 전용기專用機로 ‘대한민국 공군1호기’가 있는 곳이란다.”
에필로그Epilogue
손녀 황옥이와 여의도공원에서 6.25전쟁 때 여의도기지에서 대한민국 공군으로 출격해 산화散華한 조종사들의 애국충정愛國衷情에 감사하며 묵념을 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 땅에 제2의 6.25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