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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단계 : 사회복지의 전사(前史)기
1) 고조선 시대의 상호부조활동
고대사회는 농경사회였고, 농경사회에서의 커다란 사회문제는 자연 및 인위적인 재해로 인한 빈곤문제였을 것이며,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상호부조와 진휼(賑恤)1)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 시대의 사회적 특성에 비추어 씨족 또는 혈연적 관계에 의하여 씨족간의 상호부조가 공고히 행해졌고 따라서 제3자에 의한 구호는 필요치 않았다. 그 후 시대가 진전됨에 따라서 인구가 증가하였으며 특히 한사군(漢四郡)2)의 설치 이후로 씨족의 유대가 희박해져 빈민이 생겨나자 구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문제의 대두는 서구사회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빈민구제가 행해져 사회복지의 기원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고조선 사회의 기본 이념은 홍익인간(弘益人間), 경천애인(敬天愛人)이었으며, 따라서 구제제도는 집단적 공동연대의식에 입각한 상호부조였다.
홍익인간이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라는 뜻으로 사회복지적 측면에서 보면,
첫째, 윤리적으로는 순수한 인간애이며, 이는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과 관계가 있고
둘째, 정신적으로는 선타후아(先他後我)적 미덕을 가지며
셋째, 경제적으로는 무차별적 균등성을 나타내며
넷째, 사회적으로는 평화애호적이다.
즉, 홍익인간의 특징인 「인간애」,「무차별주의」,「사회연대성」,「평화주의」등은 사회복지나 복지국가를 지향하는데 기본적인 이념으로 등장하는 인간의 존엄성, 기회균등권, 자기결정권, 인간고통에 대한 사회연대성 등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고조선시대에 있어서 사회복지적인 요소는 공동체내에서 상부상조의 정신을 띠고 있었는데, 여기서 사회정책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8조금법(八條禁法)은 사회의 안녕과 질서 유지 차원에서 백성의 생명, 신체, 재산, 정조 등 이른바 생존권적 기본권을 지향하는 사회적 법치주의 이념에 입각한 법제였다.
8조금법의 내용 중 「한서지리서(漢書地理書)」에 남아 있는 3개 조를 보면
첫째,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둘째, 남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변상해야 된다는 것
셋째,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원칙적으로 노예가 되나 자숙하려는 자는 매인당(每人當)3) 50만전을 배상하여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러한 규정은 인간의 존엄성에 입각한 것으로서 고조선의 8조금법은 우리나라 최초의 복지제도에 관한 내용을 규정한 법이라고 할 수 있다.
고조선시대의 부조활동을 살펴보면, 씨족 및 부족의 혈연 집단생활을 영위하면서 집단안에 곤궁자가 있거나 어려움이 발생했을 때에 집단의 공동연대의식에 의하여 도움을 주거나 받는 형태의 가장 원시적인 부조활동이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부조활동이나 구제제도가 그 구체적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부터이다.
2) 삼국시대의 구제방법 : 민생구휼사업
민생구휼사업은 삼국시대 이래로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긴 역사를 통하여 지속되어 온 사회제도였다. 삼국시대의 구휼사업은 그 자체가 고대국가 존립을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당시의 사회문제, 경제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 시대는 농본주의, 귀족주의, 토지국유 내지 공유주의 등을 사회제도의 원칙으로 삼았었다.
이러한 사회제도 아래서는 백성들의 재난을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은 곧 백성의 황폐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백성의 황폐화는 토지의 영주인 국왕과 귀족에게는 생산의 감소와 국력의 쇠잔을 초래하게 되어 타국으로부터 침략을 당할 경우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삼국시대에는 곤궁에 처한 자들에게 구휼사업을 행하는 것은 국왕의 은총으로써 매우 활발하게 실시되었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삼국에 공통된 기록들을 추출해 보면 구휼사업의 대상은 「기민(饑民)과 빈약자 및 인신매매대상자」「환과고독(鰥寡孤獨)4)과 불능자존자(不能自存者)」「역병자(疫病者)5)」「수재민」「유망자(流亡者)」「도적의 봉기」에 관련되는 사항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상의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는 구휼대상자는 모두 「민(民)」 또는 「백성(百姓)」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1) 구제 내용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제2대 남해왕(南解王) 15년(서기 18년)에 백성들이 한재(旱災)6)로 인한 기근으로 굶주림을 당할 때 국고를 열어 이들을 구휼했다”는 기록이 있고, 또 “제3대 유리왕 5년에는 국왕이 국내를 순례하다가 한 노파가 기한(飢寒)7)에 못 이겨 거의 죽어 가는 것을 발견하여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작은 몸으로 왕위에 앉아 능히 백성을 기르지 못하고 노유(老幼)로 하여금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하니 이는 곧 나의 죄라 하여 친히 옷을 벗어 그를 덮어주고 음식을 권하여 먹인 후 관리에게 명하여 곳곳마다 홀아비․홀어미․고아․아들 없는 이․노인․병자 로서 자활할 수 없는 자를 위문하여 식료품을 나누어주어 부양케 하였더니 이에 이웃나라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오는 자가 많았다.
이 해에 민속이 즐겁고 편안해지자 도솔가를 지으니, 이것이 가락의 시조가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기록에 나타난 왕의 은총으로 행한 구휼사업의 최초의 예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의 구휼사업은 주로 갑작스러운 풍수재해나 지진 등 천재 지변으로 인해 흉작이 발생함으로써 백성들의 다수가 기아상태에 빠질 때, 국고의 비축 양곡을 풀어 진급(賑給)8)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기아를 면하게 하고, 한편 종곡(種穀)9)을 배급하여 신년의 양곡 생산에 지장이 없도록 하는 국가정책으로서 실시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삼국시대의 민생구휼사업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관곡(官穀)의 진급(賑給) : 정부에서 비축하고 있는 관곡을 각종 재해로 인한 빈곤한 백성들에게 배급하여 구제하는 것으로, 이는 삼국에 있어 자주 실시된 것이었다.
② 사궁구휼(四窮救恤) : 환과고독의 무의무탁한 빈민을 구제하는 것으로 삼국시대 이래로 여러 군주들이 친히 이들을 방문 위로하고 의류, 곡물 및 관재 등을 급여하여 이들을 구제하였다.
③ 조조감면(租調減免) : 재해로 인하여 심한 피해를 입은 지역의 주민들에게 그 재해의 정도에 따라 조세를 감면해 주는 것이다.
④ 대곡자모구면(貸穀子母俱免) : 춘궁기 등에 백성에게 대여한 관곡을 거두어들임에 있 어 재해로 인한 흉작으로 상환이 곤란할 때에는 그 원본 및 이자를 감면해 주는 것이다.
⑤ 경형방수(輕形放囚) : 천재지변과 같은 자연재난은 위정자인 군주의 잘못에 대한 신의 분노 또는 죄라고 하여, 군주는 형벌의 경감 또는 방수(放囚)10) 등으로 선정을 베풀어 신의 노여움을 풀고자 하였다.
⑥ 종자(種子) 및 식량의 급여 : 전년의 흉작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곤경에 빠져 영농의 종곡이 없거나 또는 식량이 부족할 때 관의 비축곡을 풀어 이들에게 영농 종자용 또는 식량으로 대여 또는 급여하는 것으로 삼국에서 자주 실시되었다.
⑦ 이재민에 대한 군주의 친순(親巡) 및 위문(慰問)
⑧ 왕의 책기감선(責己減膳) : 각종 재난이 발생하는 것은 왕 자신의 잘못에 기인한 것이라하여, 왕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일상생활하던 정전(正殿)11)에서 기거하는 것을 피하여 뜰 아래 방에서 기거하고 또 식사도 평소와 달리 소식을 하며 자신의 생활을 삼갔다.
⑨ 역농방재(力農防災) : 백성이 영농에 열심히 힘쓰도록 권장하고 각종 재해에 대해 사전․사후 방비함을 말한다.
⑩ 종묘(宗廟) 및 불사기도(佛寺祈禱) : 각종 천재지변의 재난을 피하게끔 종묘나 불사에 기도올림을 말한다. 한발시에 기우제를 올리는 것과 같이 각종 재난을 면하기 위하여 왕이 친히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삼국의 왕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시행하였다.
(2) 구제제도 : 천재지변시 빈민을 구제했던 구휼사업을 보다 조직화한 것이 창제(倉制)와 진대법(賑貸法)이다.
① 창제(倉制) : 창제는 본래 전쟁시에 필요한 군곡(軍穀)을 확보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었으나 갑작스런 재해나 질병이 발생했을 때에는 왕명을 받아 비축 양곡을 빈민에게 방출하여 곤궁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② 진대법(賑貸法) : 진대법은 고구려 고국천왕 16년(서기 19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써 흉 년이나 춘궁기(3~7월)에 곡식을 백성들에게 대부해 주었다가 풍작을 기다려서 추수기(10월)에 다시 갚게 하는 제도였다. 이 진대법의 제정은 삼국시대의 획기적인 사회복지의 제도화로 볼 수 있다. 이것은 후에 고려의 의창, 조선의 환곡 및 사창의 효시가 되었던 것이다.
목적 : ㉠ 춘궁기에 빈민을 구제
㉡ 영농자금을 대여함으로써 농민의 실농(失農)을 방지
㉢ 일반인의 생활을 안정시킴
㉣ 관곡을 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그 낭비와 사장을 없앰
③ 기타 : 구휼사업 이외에도 「삼국사기」의 「민기(民饑), 발창진지(發倉振之)」에 나타 난 것을 보면, 양로사업은 삼국이래 유교적 경로사상의 영향을 받아 역대의 현명한 군주들이 행한 사업의 하나였는데, 왕이 전국을 순회할 때 노인을 모아 의복과 잔치를 베풀어 노인을 공경하던 일은 「삼국사기」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으며, 신라 해탈왕은 자신이 한 해변가의 노모의 수양자가 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고아수양의 관습이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3) 고려시대의 구제방법
고려시대의 구휼제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봉건적 경제구조의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데, 구휼의 주 대상자는 농노적 성격을 가진 농민들이었고, 그들에 대한 구휼정책의 주 목적은 오늘날과 같은 복지권(福祉權)의 의미가 아닌 농노로서의 사회적 기능을 원활하게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시대에 있어서 구빈활동이 제도화된 배경은 정치․도덕으로서의 유교적 성격의 등장과 왕의 책기의 경향 및 사회의 안정과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기 위한 데에 있었다. 즉, 귀족세력을 관료체제에 재편하는 동시에 농민경제의 안정을 통해 국가의 수취(收取)기반을 안정시키고 그 기반 위에서 새로운 수취체제, 조세제도의 수립을 지향하는 면에서 추진된 농민경제의 안정 위에서 국가체제의 발전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고려시대 구빈제도의 변천과정을 보면, 건국 초기에는 태조를 거쳐 성종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확립되었고, 후기에는 인종 이후로 점차 그 기능이 쇠퇴하여 일시적인 구빈기관으로 변모되어 갔다. 그 이유는 이들 구제기관들의 자본이 주로 관곡(官穀)에 의지하였으므로 사회가 안정되었을 때에는 제대로 운영이 되었지만 정변이나 외침 등이 있었을 때에는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초기에 비해 말기에는 전쟁 등 각종 재난으로 구제사업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구제기관은 의창, 상평창을 제외하고는 모두 수도에 위치함으로써 빈민구제정책의 전달체계가 지방에까지 확립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고려시대 구제사업은 조선시대 빈곤정책의 모체가 되었다.
(1) 재해구제사업
① 창제(倉制) : 삼국시대 이래로 재해 발생시 빈민을 구제하는 비황책으로 창(倉)이 설치되었다. 창제는 고대의 창제에서 그대로 유래된 것인데, 고대의 제도보다는 발전된 것이다. 건국 초에 태조가 구황제도로서 흑창(黑倉)을 창설하였으나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다.
그 후 성종 5년(879년)에 흑창을 의창(義倉)으로 개명하였다.
이 의창은 평상시에 곡물을 비축하였다가 흉년․전쟁․질병 등의 재난에 대비하는 제도로 각 주부(州府)의 인호수(人戶數)에 따라 의창을 두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는데 고구려의 진대법과 같이 신․구곡(新․舊穀)을 교환하여 줌으로써 백성들이 농사철에 종자를 활용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것은 수나라의 제도를 본뜬 것이며, 훗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이것이 사창(社倉) 또는 환곡(還穀)제도 등으로 발전하였다.
상평창(常平倉) 성종 12년(서기 993년)에 왕명으로 지금의 개성과 평양 및 전국의 12목(광주․양주․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나주․승주․황주․해주 등의 12 행정구역
)에 설치하여 백성들의 경제생활에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는 곡물 및 포목과 같은 생활필수품의 값이 저렴할 때 다소 고가로 사들였다가 값이 오를 때 저가로 내어 파는 물가조절의 기능을 맡게 함으로써 국민경제생활의 편의를 도모한 제도이다. 이 제도는 본래 중국 한나라의 것을 본뜬 것이다.
② 은면지제(恩免之制) : 태조 원년(元年)에 실시된 제도로 백성들의 조세와 부역을 3년 동안 면하게 해주고 부랑자들을 정착시켜 농업에 종사하도록 한 제도이다.
은면사업은 개국이나 왕의 즉위 혹은 지방순행, 국가의 경사, 전란 후 또는 기타 적절한 기회에 왕의 은혜로써 조세, 부역, 공물 등 각종 형태의 세금을 빈민을 포함한 일반 백성의 일부 또는 전부에게 면제해 준다든지, 죄의 형벌을 감면해 주는 것이었다. 고려 역대를 통해 대민 진휼책으로 가장 빈번히 행해진 것이 바로 은면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③ 재면지제(災免之制) : 재면지제는 천재지변으로 인해 흉작이 들었을 때 그 피해 정도에 따라 백성들의 조세를 감면시켜 주는 제도로 성종 7년(서기 988년)에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재면사업은 이재민들에게 조세와 부역을 감면하고 환곡의 반납을 면제하며, 경범죄를 사하여 주는 것으로 홍수, 가뭄, 병충해, 우박 등의 자연재해로 인하여 전답에 피해를 보거나 질병으로 농사를 못 짓게 된 경우에도 해당된다.
④ 사궁(四窮)의 보호 :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이를 진휼하는 항구적12) 구빈사업이다. 사궁이라 함은 환과고독(鰥科孤獨)으로 사궁 중에서도 고아와 노인의 보호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고아와 노인에 대한 보호는 연로자는 80세 이상, 연소자는 10세로 한정하여 보호하였다.
재난시 이제민을 구제하는 것은 긴급조치였지만 재난이 없는 평상시나 또는 응급시를 막론하고 특별한 은전의 보호를 받는 것은 4궁이었다.
⑤ 수한역려진대지제(水旱疫癘賑貸之制) : 홍수․한재(旱災)․전염병 등을 갑자기 당한 어려움에 처한 이재민에게 쌀, 잡곡, 소금, 간장, 의류 등과 의료, 주택의 제공을 통해 구제하는 제도를 말한다.
⑥ 납속보관지제(納贖補官之制) : 재민구휼(災民救恤)을 위하여 거액의 기부를 행한 민간인에게 벼슬을 주어 자선을 장려하는 제도로써, 제25대 충렬왕 원년(서기 1275년)에 국고 부족을 충당하기 위하여 벼슬을 파는 법을 시작한 것이 처음이다. 납속보관사업은 원래 고려시대의 주요 구제책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사업은 국가재정의 고갈, 군량의 부족을 보충하고 흉년을 당할 때 기민, 질병자들을 진휼하기 위한 재원조달의 한 방법이었다.
⑦ 행려(行旅)의 보호 : 행려라 함은 일정한 주거가 없고 생업 없이 떠돌아다니며 걸식하는 자를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관에서 큰 관심을 기울여 사원에 곡식을 하사하여 승려들로 하여금 행려자에게 급식케 했다. 승려들이 복전사상(福田思想)에 의하여 당시 걸식하는 행려자들을 위한 급식보호사업을 성황이 행하여 강도나 도적행위들을 방지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하기도 했다.
⑧ 유민(流民)의 보호 : 유민이라 함은 도호(逃戶) 또는 망호(亡戶)로 지칭되는 소위 생활 근거지인 본적지를 떠나 타향으로 방랑하거나 이산(離散)13)하는 자들로서, 고려시대에는 과세의 과중, 자연재해, 전란 등으로 많은 유민이 발생하게 되었고 그 결과 농촌인구의 감소로 농촌이 황폐화되고 농업생산에 있어서 노동력 부족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유민대책으로서는 유민들에 대한 강제적 처벌과 호구조사, 달아나는 유민들을 방지하기 위한 관문의 방수(防守)와 행정구역의 개편 등 법적 조치와 더불어 안무사(按撫使)14)를 각도에 파견하여 유민들을 보호하고 유망을 방지하기 위한 진휼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2) 구제기관 : 고려시대의 구제기관은 상설구제기관과 임시구제기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상설구제기관은 구제사업을 위하여 국가에서 재원을 마련하여 설치 운영하는 것으로 각종 재난이나 전란 등으로 국가 재정이 어려울 때에는 그 기능이 미약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고려 말까지 존속되었다.
이에 반해 임시구제기관은 상설구제기관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구제해야 할 대상이 갑자기 증가했을 경우 임시적으로 설치하여 이들을 구제한 후 곧 해체되는 기관들이다. 이러한 기관들은 특히 고려 후기에 많이 생겼는데, 이 시기에 많은 전란과 재난 등이 발생하여 상설기관이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① 제위보(濟危寶) : 제위보는 빈민구제사업과 이재민구제사업을 모두 맡아서 행하던 구제기관이었다. 실제로 궁민(窮民)과 재민(災民)을 구제하는 최전선 기관으로서 광종 14년(서기 963년)에 처음으로 빈민․기민, 병약자를 구제하기 위하여 재원을 보관, 경영하는 일을 맡은 관에 의해 설립된 기관이다.
② 구제도감(救濟都監) : 제16대 예종 4년(서기 1109)에 중앙에 처음으로 구휼행정을 총괄 관장하는 기관으로 설치되었다. 이는 대기근, 질병 등으로 백성들이 재난을 당하였을 때 곡물, 반숙, 소금, 간장, 참기름, 채소, 의류, 배, 솜 등으로 이들을 진휼하고 구료하는 관설 기관이며, 경내에 전염병이 발생하여 대비원이나 제위보만으로 빈민을 치료할 수 없을 때 임시로 설치한 기관이다.
③ 진제도감 : 제29대 충목왕 4년(서기 1348년)에 증치(增置)된 임시구빈기관으로 천재지변에 의한 재난발생시 진휼을 실시했던 구제도감이나 구급도감과 유사한 기관이다.
④ 진제색 : 제32대 우왕 7년(서기 1381년)에 임시구빈기관으로서 필요에 따라 수 차례에 걸쳐 설치되었으며, 구제도감이나 진제도감과 같은 구빈기관이다.
⑤ 유비창 : 재난으로 빈민이 발생하거나 물가가 폭등하였을 때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설치된 창고로서, 동서대비원을 비롯한 타 구제기관에도 미곡을 공급하였던 의창과 상평창의 복합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⑥ 연호미법(煙戶米法) : 풍년에 온 백성이 재력에 따라 응분의 출곡(出穀)을 하여 주창고에 저축했다가 흉년에 사용하도록 하는 법이다.
⑦ 교제창(交濟倉) 및 제민창(濟民倉) : 각도의 환곡의 부족을 상호 보충함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서 남부지방과 북부지방이 농작물의 풍흉(豊凶)을 달리한 때에 상호 유통을 위하여 설치한 창으로서 북부의 창은 교제창이라 하고, 남부의 창은 제민창이라고 하였다.
⑧ 해아도감(孩兒都監) : 주로 유유아(乳幼兒)15)를 보호 양육하는 기관으로 최초의 관설 영아원이라고 할 수 있다.
(3) 의료구제사업 : 국가나 개인이 질병 발생시 빈민을 보호․구제하기 위한 급약, 시료 및 그에 준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사업으로 대부분 승려가 종사하였다.
① 동서대비원 : 주로 환자의 치료와 빈민구제를 담당하는 의료구제기관으로서 문종 때에 창설되었으며, 도성의 병자, 빈민, 고아, 노인, 걸식인들을 구빈․시료하고 또한 수용보호사업을 행한 대중적인 의료구제기관이다. 대비원은 불교의 대자대비사상에서 유래된 것이다.
② 혜민국 : 예종 때 설치되어 천재지변이나 기근, 전염병 등 재해를 당한 서민을 구료(求療)하는 일을 맡은 관아이다.
4) 조선시대의 구제사업
(1) 조선시대 구제사업의 특징 : 조선시대는 유교정신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구현을 국가통치의 근본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민생구휼을 국가의 중요한 시책으로 삼았으며 구제사업의 법적 기초와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한 체계가 성립되었다. 또한 중국에서 불교 또는 유교문화와 같이 도입된 것으로 보는 대부분의 구빈제도를 조선조에서는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토착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2) 구제사상의 원칙
① 왕의 책임주의 : 백성 중 한 사람이라도 빈궁에 처하게 하는 것은 치자(治者)의 책임이며 행정에 오점이라는 주의이다.
② 현물주의 : 구제는 우선적으로 생명연장에 필수적인 식료품을 공급하는 것이 기본이라는 원칙이다.
③ 신속구제의 원칙 : 구제는 시기를 놓치게 되면 효과가 감소하고 실정에 맞지 않으면 악폐를 수반한다는 원칙이다.
④ 국비우선의 원칙 : 구제의 재원은 국방에서 우선적으로 충당하고 구제대부에 의해서 발생한 이익으로 이를 보충한다는 원칙이다.
⑤ 중앙감독의 원칙 : 구제행동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은 전적으로 지방관에게 일임하며 중앙에서는 이를 지도․감독하는 역할만을 가지는 원칙을 말한다.
(3) 구제제도의 법적 기초 :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세조 때 시작되어 성종(1485년)에 와서 완성된 것으로서 여기에는 육전(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으로 편찬되었다. 이중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에 구제제도에 대한 규정이 기록되어 있다.
① 이전(吏典) : 이전에는 의료구제기관으로서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를 두는 규정이 있고, 80세 이상의 노인직조에 대해서는 1계급 승진의 특전을 부여하는 규정이 있다.
② 호전(戶典) : 호전에는 지방관리의 궁민진휼의 구제책임에 관한 규정이 있으며, 경성과 각 지방에 상평창을 두어 백성들의 경제생활을 돕도록 하고 수군과 지방관리들은 흉년에 대비하여 소금과 해초를 준비할 것 등을 규정하고 있다.
③ 예전(禮典) : 예전에는 경로, 혼비보조, 노인과 고아에 대한 수양 및 의과관급, 의약규제 등이 규정되어 있다.
④ 병전(兵典) : 병전에는 면역(免役), 구휼의 제도를 규정하고 있다.
⑤ 형전 : 휼수의 규정이 있다.
(4)구제사업
① 창제도(倉制度) : 창제도는 비황을 위한 것으로써 의창․상평창․사창 등이 있다.
㉠ 의창(義倉) : 흉년이 들 때를 대비해서 곡물을 저장하는 제도로써 고려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조선초기에는 민생안정과 국가재정의 확보를 바탕으로 국가차원에서 의창이 정상적인 기능을 해왔다. 이 제도는 그 후 상평창제도와 그 기능을 통합․분리해 가면서 고종 때까지 지속되었다.
㉡ 상평창(常平倉) : 고려 때부터 전해 내려온 물가조절 제도로써 경성지방에 상평청을 두고 그 외의 지방은 상평창을 두어 곡물과 포목을 비축하고 곡물 외에도 포목을 두어서 곡과 포의 가격을 조절하여 백성들의 안정된 경제생활을 도모하였다. 이 제도는 인조 때 폐지하고, 후일 환곡제도로 흡수되었으나 경성지방의 상평창만은 그대로 남았다.
㉢ 사창(社倉) : 사창은 국가기관 주도의 구제제도가 아닌 일종의 민영 의창제도인데 본래는 송나라 주자가 의창을 본떠서 만든 제도였다. 우리나라에선 세종 때 도입되어 이율곡의 해주향약에 병행해서 최초로 실시되었다. 사창은 지방단위의 사(社)를 중심으로 그 지방의 향인들이 조합적 조직으로서, 미곡을 저장하였다가 위급한 경우에 진대(賑貸)하는 구휼을 목적으로 한 민주도(民主導)의 구휼기관이었다.
② 환곡제도 : 일종의 세민구제책으로 관고(官庫)에서 곡물을 방출하여 백성에게 대부한 다음 그 다음 해에 이를 환납하게 하는 제도이다. 환곡은 나누어주는 곡물과 남겨두는 곡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주로 굶주린 백성들을 위한 것이고 후자는 수해․재난 등에 대비하여 비축해 놓은 것으로 근본 목적은 백성의 생활안정과 국가재정의 안정을 기하고자 하는데 있다.
③ 자휼전칙(字恤典則) : 제22대 정조 7년(서기 1783년)에 유기아 및 부랑걸식아에 대한 보호법령이다. 자휼전칙의 아동보호규정을 보면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한 때에 유기를 당하여 호소할 곳이 없는 불쌍한 어린이와, 특히 몸을 가리고 입에 풀칠하는 것을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불쌍한 어린이와 사방을 떠돌아다니면서 문전걸식을 일삼는 부랑아들을 관에서 거두어 기르거나, 또는 민가에서 기르도록 하여 양자녀나 노비, 고공(雇工)을 삼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자휼전칙은 정조의 전교와 보호전반에 대한 9개의 절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9절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나이와 구제기관
㉡ 행걸아 구제에 있어 1차적으로 친족책임의 원칙
㉢ 행걸아 구제방법
㉣ 유기아 구휼에 있어 젖어미(유모) 제도
㉤ 행걸아․유기아 입양과 추거
㉥ 의복과 의료시혜
㉦ 지방에서의 절차와 재정
㉧ 행걸아․유기아에 대한 식이법과 낭관에 의한 사후감독
이 법령은 이전의 법령들과는 그 내용상 현저한 차이가 있다. 이전의 법령들은 요구호아동의 구휼에 있어서 국가의 개입 영역을 최소화하고 그 대신 민가수양과 같은 민간의 역할을 크게 강조하였지만 자휼전칙은 요구호아동의 구휼에 있어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을 일정한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제18대 현종 2년(서기 1661년)이후로는 관부의 허가제에 의한 민가 수양이 실시되었고 유기아에 대한 의복도 관에서 지급하였다.
④ 사궁의 보호 : 사궁에 대한 보호는 삼국시대 이래 중요한 구제사업으로 시행되어 왔다. 특히 조선조에 와서는 이들에 대한 보호가 관(官)에 의무로 되었으며 영조때 「경국속편」이 편찬된 이후로는 이들에 대한 구제책임의 순위가 명확해졌다. 즉 친족부양, 무친족자의 관부유양(官府留養), 민간수양의 순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친족부양의 의무한계에 관한 규정은 없다.
⑤ 시식(施食)제도 : 주로 흉년이나 춘궁기에 빈민 또는 행여걸인을 위하여 사원이나 기타 적당한 장소에 취사장과 식탁을 마련하여 음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고려조에서는 개성의 개국사(開國寺) 및 임진의 보통원(普通院)이 상설 급식소로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 제도가 조선조에도 계승되어 한성부의 홍제원(弘濟院)과 보제원(普濟院)등은 실농(失農)하여 떠돌아 다니는 굶주린 백성을 위한 급식소로 사용되었고 지방에서는 유랑하는 걸인과 빈민을 위한 급식소가 설치되어 이들을 보호했다.
(5) 의료구제사업
조선시대 의료구제사업의 특징은 의료보호 그 자체보다 의료기관과 의료원의 증설, 의약품의 개발과 제도화, 의술의 개발 및 의학서의 저술활동 등을 장려하였다.
조선의 의료보호기관은 고려의 대비원을 모방하여 동서활인서를 설치하여 빈곤과 병자들을 치료해 주었고, 태조 6년에는 제생원(濟生院)을 개설하였다.
이것은 숙종 35년에 혜민서로 바뀌었고 광무 3년에 와서 중앙에 광제원(廣濟院)이 설치되어 새로운 의학기술이 도입됨에 따라 이는 폐지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의 의료보호는 제도상으로는 어느 정도 형식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는데, 중앙에 왕실의 의료를 관장하는 내의원(內醫院)이 있고, 일반의료행정을 담당하는 전의감(典醫監)과 서민층의 의료사무를 담당하는 혜민서, 동서대비원 등이 있었다. 또한 지방 각지에도 각급 의원, 심약, 월령의 등을 배속시켜 지방의 의료보호 및 의학교육에 종사하게 하였다.
(6) 민간의 인보상조(隣保相助)제도
① 계(契) : 계는 약자(농민)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직한 것이다. 이는 원시적․협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동지결합(同志結合), 동업상집(同業相集)16), 동리단결(同里團結) 또는 동문동족의 상호부조(相互扶助)와 인보상조(隣保相助)17)를 행하고, 애경사(哀慶事)에 있어서는 공제구조(共濟救助)18)를 하는 등의 활동을 벌인 대․소규모의 민간 조직체로서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계가 성행하게 된 배경은 조선조는 치국의 이념으로 민본주의, 위민주의를 표방하였으나 국가재정이 피폐해지고 집권통치기능이 약화되자 민생안정을 목적으로 시행되던 진휼 및 진대제도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유명무실화되어 진대․진휼제도에 의지해 오던 서민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② 두레 : 두레는 농촌사회의 상호협동체로서 발달한 것인데, 촌락단위로 조직되어 농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 등의 오락을 즐겨 행하였다.
③ 오가통(吾家統) : 오가통은 하급 지방행정조직을 그 지역별로 세분화(5가구를 1단, 즉 통(統)을 조직)하여 인보상조와 연대책임의 원칙하에 각 구역 내의 치안을 유지하고 복리를 증진시키며 지방행정의 운영을 돕는 국영의 지방자치제도이자 인보제도(隣保制度)였다. 이 오가통의 주된 임무는 질병상담․혼상상조(婚喪相助)19)․환난상휼(患難相恤)등과 통내(統內)에 불효․살인․도적 등의 일이 있을 때 면(面)․리(里)에 이를 신고하는 것이다.
④ 향약(鄕約)20) : 향약은 본래 한 지역의 주민이 그 지역주민의 교화(敎化)를 목적으로 자치적으로 정한 규약이었는데, 이것이 향촌의 지역적 자치단체의 설정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단체 명칭도 향약이라 부르게 되었다. 향약의 목적은 조합원 상호간에 선(善)을 권장하고 악(惡)을 징계하며 서로 도움으로써 복리증진과 질서유지를 꾀하는데 있었다. 향약의 골자는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21)의 4대 강목으로 대표된다.
⑤ 진궁(振窮) : 진궁은 4궁(四窮)이라고 하는 홀아비(鰥)․과부(寡)․고아(孤)․자식이 없는 자(獨)에 대하여 진휼사업(賑恤事業)을 실시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중에서도 건강상 생업에 종사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6등친(六等親)이 없는 사람이 그 대상에 되었다. 진궁의 시혜자는 고을의 수령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관습에 의한 것이었으며, 하나의 제도로 시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7) 구제기관
① 구황청(救荒聽 또는 진휼청) : 구황청은 제4대 세종대왕 때 처음으로 설치되어 빈민구제를 맡아 관장하던 국가기관이었다. 이는 신라와 고려시대의 제도를 계승한 것으로 제16대 인조 4년(서기 1626)에 진휼청으로 명칭을 바꾼 뒤 전국에 구호양곡을 방출하고 급식을 실시하는 등의 제반 진휼사업을 전개하였는데, 갑오경장(서기 1894) 때에 폐지되었다.
② 혜민국(慧民局) : 혜민국은 태조 때 처음 설치되었으며,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여의사를 교습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후 제3대 태종 14년(서기 1414)에 혜민서(惠民署)로 그 명칭이 바뀌었고, 제16대 인조 15년(서기 1637)에 전의감(典醫監)에 합병되었다가 제26대 고종 19년(서기 1882년)에 이를 폐지하였고, 광무 5년(서기 1901년)에 다시 혜민원(慧民局)을 두었으나 3년 후인 광무 8년에 이를 다시 폐지하였다.
③ 활인서(活人署) : 활인서는 태조 때 동부와 서부에 2개를 처음으로 설치한 경성 내의 환자를 구휼하는 것을 관장하던 기관이었다. 처음에는 고려시대와 같이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이라 하였는데 제3대 태종 14년(서기 1414년)에 동서활인서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고, 고종 19년(서기 1882년)에 이를 폐지하였다.
④ 기로소(耆老所) : 기로소는 태조 3년(서기 1394년)에 경성의 중부에 처음 설치된 것으로, 70세 이상의 노인을 입소시켜 잔치를 열어 주는 등의 노인 구제활동을 담당하였다. 이는 고종 31년에 폐지되었다가 광무 8년(서기 1904년)에 다시 설치되었지만 그 후 곧 폐지되었다.
⑤ 진휼청유접소(賑恤廳留接所) : 유기아나 부랑아를 발견하는 즉시 진휼청유접소로 보내 수용․보호토록 한 제도로 진휼청유접소는 경성에만 설치하였고, 지방의 경우에는 진장(賑場)으로 보내 수용하였다. 부랑아의 수용일 때는 겨울에만 수용하였다가 봄에 다시 내보내는 것을 자휼전칙(字恤典則)에 규정하고 있다.
5) 일제시대의 사회사업
(1) 일제시대 사회사업의 특징
① 근대적 사회사업의 성립 : 조선 말엽부터 유입되었던 구미제국의 자선구제사업은 일제 때에 이르러 사회사업이라는 새로운 용어로 바뀌게 되었고 사회사업이 하나의 학문으로 태동․발전하기 시작하였다.
② 행정의 체계화 : 일본은 식민지 정책을 더욱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일본에서 시행하던 행정모델을 그대로 우리나라에 옮겨와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한일합방 당시 휼구 및 자선사업에 관한 사무를 취급하던 총독부 내무부 지방국 지방과를 폐지하고 내무부 지방국을 내무국으로 바꾼 뒤 1921년 내무국 제2과를 사회과로 개칭하여 독립된 1과를 설치하였다.
그 후 1932년 일반행정 정리 때에 사회과를 학무국으로 이관하여 사회사업에 관한 사무와 종래의 소관업무였던 사회교육에 관한 사무 및 종교과에 속했던 종교․고적 등의 사무를 합쳐서 관장하게 하였다. 또한 각 도에 있어서는 총무부 내에 사회과를 설치함에 따라 내무부에 사회과를 신설하여 도내 사회사업의 지도와 통제를 실시하였으나 1924년 행정정리에 의해 이것이 폐지되고 그 소관업무를 내무부 지방과가 담당하게 되었다.
③ 민간사회사업 지도 및 통제의 강화 : 일제시대의 민간사회사업을 지도․통제하는 기관으로서는 재단법인 조선사회사업협회가 있었다. 이 협회는 총독부 사회가 내에 사무실을 두고 회장에는 정무총감, 부회장엔 학무국장, 간사에는 사회과장이 직무를 맡았으며, 각도에 지부를 설치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한 관영 민간통제기관이었다.
(2) 일제 치하에서의 사회사업의 내용
① 온정주의 정책의 실시 : 한일합방 당시 일본의 천황은 임시 은사금 3천만엔을 하사하여 일부 귀족․공로자․관리․양반․유생 등에게 5부 이자로 대부해 주고, 그 외 대부분의 은사금을 구제사업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구제사업 자금의 내역을 보면, 지방민의 교육․수산 및 구제금으로, 효자․효부와 홀아비․과부․노인 구제금으로, 또한 고아의 양육․맹아자의 교육․정신병자의 구제금과 일반 빈민의 구제금 등으로 쓰여졌다. 이렇듯 한일합방 후의 조선 총독부의 구제사업은 천황(天皇)의 인정(仁政)을 강조하고 식민지 국민들의 불만을 무마시키려는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② 교화사업의 전개 : 조선 총독부는 각 도에 지침서를 내려 일반 민중들이 무위도식하는 풍조를 교화하는 동시에 근검저축의 정신을 일으켜 일을 열심히 하도록 하는 교화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러한 교화사업은 일본 자본주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민중의 반일(反日) 행동을 억제시키려는 치안적 목적에서 행해졌다.
③ 시설사업의 전개 : 근대적 성격의 시설사업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고종 25년(1888년)에 천주교회 고아원이 설립되면서부터였다. 그 뒤를 이어 고종 32년(1895년)에 천주당 부속 고아원이, 광무 10년(1906년)에 경성 고아원이 설립되었다. 노인복지사업이 천주교 조선 교구에 의해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으며, 부녀복지 시설사업은 1919년에 설립된 루라웰즈 학원에 의해서 처음 시작되었다. 장애인 복지사업 중에서는 맹인사업이 최초로 실시되었는데 미국 감리교 여선교사 셔우드(R. Sherwood)에 의해 1894년 처음으로 시작되었고, 1897년엔 평양식 점자를 창안․보급하였다.
또한 1903년에는 맹인 여학교를 개설하였으며 1909년엔 농아부를 설치하여 맹아학교로 발전시켰다. 이와 같이 사회사업시설이 급속하게 확산되자 총독부는 시설의 확장과 육성의 통제에 철저를 기하게 되었다.
④ 구제사업의 확대 실시 : 조선 총독부에서는 구제행정을 더욱 조직화하고 체계화하여 구제사업을 실시하였다.
㉠ 진혈구호 : 이재민구호, 궁민구호, 행려병자구호, 양로사업, 군사구호
∙이재민(罹災民)구호
이재민구호의 적용대상은 수해나 화재 등과 같은 재해로 인한 이재자(罹災者)이며, 급여내용은 식량, 의류 및 의료비 등의 지원이었고, 이에 소요되는 재원은 은사금이재구조기금관리규칙(1914년)에 의거하여 은사금이재구조기금에서 충당하였다. 한편 이재민에 대한 재원은 국비, 지방비, 임시은사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궁민구호
궁민구호는 은사진휼자금 궁민구조규정(1916년)에 근거하여 실시되었는데, 그 적용대상은 폐질자 또는 중병자, 60세 이상의 노쇠한 자로서 생활을 유지할 수 없고 다른 데에 의지할 곳이 없는 자, 독신자는 아니라도 기타 가족 노유(老幼), 폐질, 불구, 실종, 또는 재감(在監)등으로 부양을 받을 수 없는 자 또는 18세 미만의 무의무탁한 자 등이다. 구조방법은 식량급여에 한정되었으며, 재원은 은사진휼기금으로 충당하였다.
∙행려병자구호
행려병자구호사업을 위해 1933년 현재 전국에 18개 구호소를 설치하였으며, 비용은 부양의무자가 부담하였으나 그렇지 못할 경우 행려병인구호자금관리규칙(1917년)에 의거하여 충당하였다.
㉡ 의료보호 및 아동보호 : 임산부보호, 유아보호, 특수아보호
㉢ 빈민구료사업 : 이 사업은 은사진휼자금궁민구조규정에 근거한 것으로서 은사진료, 시료, 실비진료, 특종진료사업 등이 있었다. 재원은 은사금에서 충당하였으나 시료(施療)22)는 국비, 지방비로 충당했다는 점에서 은사진료와는 다르다. 특히 특정진료사업으로는 결핵환자, 나환자, 정신병자, 마약중독자에 대한 요양이 있었다.
㉣ 직업소개사업 : 구인 및 구직 신청을 받아 고용계약을 성립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 사업은 그 당시 실업자의 문제를 상당 정도로 해결했다고 할 수 있으나 이 사업에 의한 실업문제의 접근은 순수한 의미의 실업자 구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확대과정에서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노동인력으로 동원했다는 점이다.
㉤ 농촌빈민대책사업 : 일제시대에 들어와서 농민층 분화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소작농(小作農)의 급증이었다. 소작농의 급증은 식민지 농촌 수탈정책의 결과로 인하여 자작농(自作農), 자소작농(自小作農)의 계속적인 몰락을 의미하며, 동시에 농촌빈민의 양산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의 농촌구제를 위해 위한 대표적인 사업은 농가경제 갱생계획사업이었다. 이는 개별 농가의 생산능력을 증대시켜 절대궁핍을 해소하여 농가경제를 안정시킨다는 목적이었으나 이러한 계획은 빈농과 소작농을 보호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증산(增産)과 자급자족에 의한 지출의 절약만을 강요한 것이었다.
㉥ 기타 : 이외에 화전민23)대책사업, 토막민24)대책사업 등이 시행되었는데, 화전민대책사업은 결과적으로 화전민을 착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빈곤을 더욱 악화시키게 되었으며, 토막민대책사업은 도시 미관과 위생상의 이유를 내세워 토착민들을 근교에 격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3) 조선구호령의 실시
① 제정 배경 : 조선 총독부는 일본에서 제정․실시된 구호법을 거의 그대로 가져다가 조선구호령으로 제정․공포하여 실시하였다. 그러나 조선구호령이 우리나라에서 실시된 것은 구빈목적에서라기 보다는 전시체제하에서 식민지 통치를 보다 강화하고 식민지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② 조선구호령의 의의 : 근대적 사회사업의 법적 근거를 마련해 줌과 동시에 국민의 빈곤․불구․폐질 등에 대하여 보상할 책임이 있으며 나아가 국민생활을 보장할 의무가 있음을 법령으로 규정하였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③ 조선구호령의 내용
㉠ 구호대상 : 원칙적으로 65세 이상자, 13세 이하의 아동, 임산부, 불구․폐질․질병 기타 정신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해 일할 수 없는 자를 그 대상으로 삼았다.
㉡ 구호기관
∙거주지의 읍․면장
∙거주지가 없거나 불명(不明)한 자는 현재지의 읍․면장
∙보조기관 : 명예직 의원
㉢ 구호종류 : 생활부조, 의료부조, 조산부조, 생업부조 등이 있다.
㉣ 구호방법 : 거택구호를 원칙으로 하며 거택구호가 불가능하거나 또는 그것이 부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구호시설에 수용하거나, 수용을 위탁하거나 또는 민간의 가정에 그 수용을 위탁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 구호비 : 원칙적으로 부․읍․면이 부담하였지만 국가에 의한 보조도 이루어졌다.
(국가가 2분의 1 또는 12분의 7 이내, 도에서 4분의 1을 부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4) 일제시대 빈곤정책의 특성
첫째, 식민통치의 합리화와 황민사상의 주입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띠고 있다.
둘째, 식민통치정책의 전개에 따라 변화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셋째, 식민지 민중운동의 성장과 발전을 무마하고, 이를 식민지 지배체제로 편입시키려는 특성을 갖고 있다.
넷째, 구호사업의 내용면에서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는 차별대우가 행하여 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성을 살펴본 결과 일제식민지 시대의 빈곤정책의 형성 및 전개는 식민지통치 정책의 필요성과 식민지민중운동의 성장과 발전의 무마 및 식민지민중의 불만 해소를 통한 지배질서의 안정확보, 식민통치의 합리화와 황민사상 등 식민지 이데올로기 강화라는 두 가지 요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제시대 빈곤정책은 빈민의 기본 욕구해결에 주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질서의 안정이라는 정치적 기능과 이데올로기적 기능이 강조되면서 전개되었다.
식민지 통치정책의 변화, 즉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 및 전시동원 정치체제로 변화하면서, 빈곤정책의 내용과 목적이 그에 상응하여 식민지 통치효율성을 제고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갔음을 알 수 있다.
1) 진휼(賑恤)은 황정(荒政)의 기본으로 식량을 주로 하고, 염(鹽) ․ 장(醬) ․ 의(衣) ․ 포(布) 등의 현물이나 혹은 금전을 지급하여 이재민(罹災民, 飢民)이나 빈궁민의 급박한 기아를 구제하는 것이다.
2) 한사군(漢四郡)은 BC 108~BC 107년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고지(故地)에 설치한 4개의 행정구역이다.
3) 매인당(每人當) : 각 사람에게 돌아가는 몫으로.
4) 환과고독이란 4궁(窮)(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자)을 말하며, 이들은 왕자인정(王者仁政)에 가장 우선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할 대상자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삼국시대로부터 구휼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 시대의 사회제도는 엄격한 신분차별 사회였으므로 이들 4궁은 천민신분이었다.
5) 역병자(疫病者) : 악성(惡性)의 전염병에 걸린 사람
6) 한재(旱災) : 가뭄 때문에 생기는 재앙.
7) 기한(飢寒) : 굶주림과 추위.
8) 진급(賑給) : 구휼하는데 보태다.
9) 종곡(種穀) : 씨곡
10) 방수(放囚) : 죄수를 놓아줌.
11) 정전(正殿) : 임금이 나와서 조회(朝會)를 하던 궁전.
12) 항구적(恒久的) : 변함없이 오래가는 (것).
13) 이산(離散) : 헤어져 흩어짐.
14) 안무사(按撫使) : 변란이나 재난이 발생한 지방에 파견되어 백성을 안무하던 임시직.
15) 유유아(乳幼兒) : 유아(乳兒)와 유아(幼兒)를 아울러 이르는 말. 곧,학령(學齡) 이전의 어린이를 통틀어 이르는 말.
16) 동업상집(同業相集) : 같은 일을 하러 서로 모이다(만나다).
17) 인보상조(隣保相助) : 이웃끼리 서로 힘을 합해 돕는 일 또는 그러한 조직.
18) 공제구조(共濟救助) : 서로 힘을 합하여 도움. 힘을 같이하여 일함.
19) 혼상(婚喪) : 혼사(婚事)와 상사(喪事).
20) 향약과 사회보장의 기능은 모두 사회질서의 유지기능을 띠고 있는 것이면서도 그 근본원리나 방법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조선시대 향약들은 대부분 교화의 기능을 인간의 기본적 욕구보다 더욱 중요시하고 있으나 현대 사회보장은 먼저 급여를 하고 나중에 교화를 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21) 환난상휼(患難相恤) : 근심이나 재난을 당하여 서로 돕고 보살핀다는 뜻으로 이는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심어주고 개인의 생존권을 보장해 주는 동시에 사회체제의 유지를 가능케 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환난상휼의 구체적인 사업으로 급난(急難-다급하게 닥친 곤란)의 구제, 질병의 구제, 고아나 약자의 부양, 빈궁의 진휼․장제 등을 들 수 있다.
22) 시료(施療) : 무료로 치료해 줌.
23) 화전민(火田民) :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사람.
24) 토막민(土幕民) : 움집에서 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