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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12:1 ~ 9
제 목 : 너는 복이 될지라
본 문 : 창세기 12:1 ~ 9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 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 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 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 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 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1. 세상의 방식
요즘 일요일 저녁 TV 최강자는 ‘진짜 사나이’라는 프로그램이라고 합니다. 연예인들이 군부대에 입소하여 현역 군인들과 함께 실제로 모든 군사훈련과 병영생활을 직접 체험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출연진 중에는 오래전 자신이 직접 현역 시절 생활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렵게 군 생활을 다시 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입니다.
군대 생활을 한 남자들 사이에서 흔히 통용되는 말 중에 ‘자기가 근무했던 부대 방향으로는 소변도 안 본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어렵게 군 생활을 했던 그 방향으로는 눈길도 주기 싫고, 마음까지도 주기 싫다는 의미 같습니다. 기억조차도 하기 싫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프로그램의 주 시청자들 중 하나가 이미 군 생활을 경험한 아저씨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힘은 들었지만 그 프로그램을 통해서 유격, 사격, 화생방, 축구, 족구 등 이런 저런 추억에 빠져보는 것 같습니다.
저도 물론 군대를 다녀왔습니다. 조금 특별하다면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데, 저는 군 생활을 장군의 숙소 당번병으로 근무했습니다. 별 하나를 단 장군과, 운전병, 그리고 저, 세 사람이 독립된 장군 관사에서 함께 생활을 합니다. 당번병인 저는 일종의 가사 도우미 역할을 했습니다. 밥도 짓고, 요리도 하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옷도 다립니다. 그때는 그저 하루하루 억지로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었는데, 지금은 그때 했던 그 일들이 큰 도움을 줄 때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입은 와이셔츠도 제 손으로 다림질 한 것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아이들의 교복을 다림질 해주기도 합니다.
당번병으로 군 생활을 하는 가운데 특히 제게 운이 따랐던 것은 모시는 장군이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별일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번병 세계에서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장군 같은 경우, 대부분 임기가 2년이라, 한 부대에서 2년 넘게 근무하는 일이 정말 드물기 때문에, 당번병으로 근무하는 동안에 한 번 정도는 모시는 장군이 반드시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운 좋게도 그 일을 겪지 않았습니다.
운이 좋았다고 말씀 드리는 이유는, 충분히 예상하시겠지만, 모셔야 하는 장군이 바뀌는 경우 여러 가지로 힘든 일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사를 보내드려야지, 새 이사를 맞이해드려야지, 새로 오신 장군의 식성, 습관, 성격 등을 빨리 파악해서 맞춰드려야지, 정말 힘든 일이 많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장군의 부인, 즉 사모님의 비위를 맞춰드리는 것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당번병들 사이에는 사모님들은 모두 오성 장군, 즉 별 다섯 개짜리 장군이라는 우수개 소리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형교회 사모님들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씁쓸해 지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모셔야 하는 사람이 바뀌게 되는 경우 힘든 일이 일시적으로라도 반드시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경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직장, 모든 기관, 심지어 정부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장이 바뀌면 회사의 경영정책이 바뀌고, 교장이 바뀌면 학교의 교육정책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뀌면 나라의 여러 정책이 바뀌게 됩니다. 실무자들은 그 바뀐 정책에 새롭게 적응해야 하고, 그 바뀐 정책이 잘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내야만 합니다. 그것이 세상 속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왜, 새롭게 리더의 역할을 맡게 된 사람은 한 결 같이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러 가지 이유의 정점에는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려는 의도가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즉 전임자와의 차별화를 통하여 전임자의 흔적을 빨리 지워내고 자기 자신만의 영역을 속히 구축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목표의 성취를 통하여 자신이 능력 있는 탁월한 존재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고, 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만 그 조직을 원활하게 통제할 수 있고, 그 조직을 통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속 기준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 속의 일은 사람에 의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은 과연 누구를 위한 일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그 일이 사람을 위한 일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죄인은 결코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죄인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저 자기 스스로가 기준이 되어서, 자기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어서, 자기 주도로만 역사를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데 수단적 가치만을 제공할 뿐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모를까요? 아니요. 사람들도 이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모르는 채 눈 감아 주는 것입니다. 알면서도 속아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도 바로 그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에게 유익이 되면 서로 암묵적으로 동의해줍니다. 그래서 세상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나름의 기준과 방식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어쩌면 진실보다는 거짓을 추구하며 사는 곳인지도 모릅니다.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곳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살아가는데 오히려 불편한 마음을 줄 때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2. 교회의 방식
그런데 제가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교회마저도 이러한 세상의 기준과 방식으로 운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교회의 담임목사가 바뀌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새로 부임하는 담임목사는 교회의 새로운 목표, 새로운 비전, 새로운 운영 계획, 새로운 실천 과제 등을 성도들에게 제시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거의 모든 목사들이 다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내기 위해 정말 열심히 수고하고 애를 씁니다. 부교역자를 다그치고, 성도들의 동참을 독려합니다. 왜 그럴까요? 도대체 목사들이 그렇게 수고하고 애쓰면서 열심을 내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불행하게도 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의 이유와 너무나 동일합니다. 아주 똑같습니다. 즉 교회 내에서 전임 목사의 흔적을 빨리 없애버리고,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가능한 한 빨리 확립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능력 있는 탁월한 목사라는 것을 성도들에게 각인시켜서 성도들의 충성과 헌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만 성도들을 원활하게 조정할 수 있고, 교회를 잘 다스려 나갈 수 있고, 교회를 통해 자신의 비전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포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교회는 세상의 원리로 작동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리로만 작동되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교회는 담임목사의 존재감이 드러나야 하는 곳이 아니라,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담임목사의 새로운 목표, 새로운 비전, 새로운 운영 계획, 새로운 실천 과제가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에 의해 다 주어졌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이 가지셨던 하나님의 목표,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운영 계획, 하나님의 실천 과제가 바로 교회의 목표이고, 비전이고, 계획이고, 과제입니다.
교회는, 담임목사는 이것을 이루어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을 정확하게 깨달아 하나님의 원리와 가치를 성도에게 알려주고, 그 성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잘 성숙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도가 하나님의 원리와 가치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의 교회이면서, 동시에 성도를 위한 교회, 즉 사람을 위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사들이 이러한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을 새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자기 자신들이 교회와 성도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 리더라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섬기는 자들이라고 말을 하지만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조차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목사를 위한, 목사에 의한, 목사의 교회가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그 마음으로 교회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 수고하고 애를 써야만 합니다. 바로 그때, 목사의 존재감은 저절로 나타나게 되는 것인 줄 믿습니다. 동의하시면 아멘 하시겠습니다.
조금 전 교회에서는 새로운 목표, 새로운 비전, 새로운 운영 계획, 새로운 실천 과제가 전혀 필요치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성경도, 하나님도 그와 같은 목표, 비전, 계획 등을 결코 새롭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창조 때 모든 것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것처럼, 창조 때 모든 것이 완성되었고,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사람만이 완성을 누리지 못하고 죄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죄인 된 사람만 회복시키면 모든 것이 제 자리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라, 사람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일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목표, 새로운 비전이 필요치 않습니다.
지난 주 우리는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 책’이라는 관점에서 5단계로 성경을 구분해 보았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하게 정리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억을 되살려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단계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사는 단계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2단계는 하나님과 사람이 분리되어 죄인 된 사람이 죄의 결과를 당하는 단계입니다. 창세기 3장부터 11장까지가 이 단계에 해당됩니다. 3단계는 죄인 된 사람을 하나님께서 수용해 주시는 단계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를 샘플로 사용하시면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수고하고 애쓰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단계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된 창세기 12장부터 구약성경 끝까지가 이 단계에 해당됩니다.
4단계는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 되는 단계로서 신약성경의 복음서가 이 단계에 해당됩니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단계입니다. 5단계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이 이제 스스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단계입니다. 사도행전부터 서신서를 포함한 신약성경 끝까지가 이 단계에 해당됩니다. 다들 기억하고 계시지요?
3.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가 5단계로 나누어서 성경을 살펴볼 수 있지만, 각 단계별로 하나님의 목표와 비전,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절대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모두 똑같습니다. 각 단계별로 목표와 비전이 동일하고, 구약과 신약에서도 목표와 비전이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의 일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고, 그 신실하신 하나님의 목표와 비전은 단 하나, 바로 사람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방법이 바뀔 수는 있습니다. 한번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단계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명령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이미 수차례 말씀 드렸습니다. 이 내용은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 선언입니다. 즉 창조의 최종 목적이었던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그 사람이 충만한 존재, 정복하는 존재, 다스리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다짐이며 약속입니다. 즉 사람이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한 삶을 유지해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수고하시고 애쓰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다음은 2단계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9:1-2]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랜 방주 생활을 마감하고 땅에 발을 내딛는 노아와 그의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내용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2단계에 등장하는 사람은 1단계 때의 사람과 달리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나 내용은 동일합니다.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복을 주시고, 그 사람이 충만한 존재, 정복하는 존재, 다스리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행복한 삶을 인도하시고 책임져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다짐입니다. 비록 사람은 죄인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럼 3단계에 해당되는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창세기 12:1]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창세기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라고 말씀하셨고, 또 [창세기 12:7]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민족을 이루어 주고, 아브람이 복의 근원이 되게 하고,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족을 이루어 준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여 그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되게 하고, 결국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민족,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되도록 해주겠다는 뜻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하셔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죄인이 되어 하나님 곁을 떠난 사람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친히 찾아오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받아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땅을 주시겠다는 것은 사람의 생존을 사람 스스로 해결하고 책임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먹을거리, 마실 거리, 입을 거리, 삶의 터전까지도 결코 부족하지 않게 하나님께서 알아서 공급해 주시고 채워주시겠다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좋습니까? 이런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계획도 1단계와 2단계에서 확인한 내용과 동일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책임져 주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복을 위해 수고하고 애쓰시겠다는 하나님의 다짐이며 약속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1단계와 2단계의 약속이 포괄적인 하나님의 다짐이자 약속이었다면, 3단계에서는 아브람에게 세 가지 일을 이루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보다 구체적으로 아브람에게 제시하였다는 점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4.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언약을 하실 때에 세 가지 일이 등장하는 이유는 사람이 죄인이 되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 차례 말씀 드렸지만 죄인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죄인은 하나님이라는 존재 자체를 아예 인식할 수 없고, 당연히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을 알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2단계 노아의 사례를 통해서 그것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 가지 일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눈높이를 사람의 눈높이로 맞추어 주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일을 펼치시고, 그 일의 성취를 통해 하나님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세 가지 일은 사람이 생각하기에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루어 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성취하신다면 그 결과를 본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셨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고,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수원시에 학생들을 아주 잘 가르친다고 명성이 자자한 과외 교사가 한 사람 있습니다. 한 어머니가 그 과외 교사를 초빙했습니다. 어머니와 상담을 할 때, 그 과외 교사는 학생의 성적을 책임지고 향상시켜 주겠다고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교사는 초보 교사입니다. 학생의 성적이 조금 올랐다고 해보겠습니다. 어머니는 기쁘기는 하겠지만, 그 성적 향상이 과연 과외 교사로 인한 것인지, 학생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운이 좋아서 그랬는지 의심을 할 수도 있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죄인의 심리입니다.
유명 교사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중간고사 때 국어가 60점, 수학이 40점, 영어가 50점 이었는데, 기말 고사 때는 세 과목 모두 90점 이상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을 이루어 내지 못하면 과외비를 한 푼도 받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목표를 이루어냅니다. 학생의 어머니는 성적 향상이 오로지 과외 교사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생의 노력만으로는, 그리고 시험 운만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인 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 가지 약속을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마침내 성취하셔서 하나님께서 실재하심을, 하나님께서 늘 사람과 함께 하심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세 가지 일을 이루어 내는데 목적 자체가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세 가지 일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기에, 하나님께서 진행하시고, 하나님께서 성취하실 것이기에, 어차피 세 가지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하여 실제로 행하고자 하시는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약속의 본질이자 핵심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시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그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성품, 사람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며, 하나님의 원리가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꾸어 주시려는 하나님, 사람을 죄인인 상태로 두시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시려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원리와 가치로 살아가면 참 기쁨과 참 행복을 온전히 다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세 가지 약속에 담겨있는 참 목적입니다. 이것을 절대로 잊지 않으시는 우리 다누림 가족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람과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시험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을 사람에게 알리시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는 하나님, 심지어 사람으로부터 스스로 시험을 받으시는 것도 주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언약으로 맹세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맹세가 결코 필요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믿음의 대상이 되실 수 있는지 없는지 친히 시험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험 받으시는 하나님을 야곱에게서도 볼 수 있고, 모세에게서도 볼 수 있고, 기드온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기꺼이 시험을 당해 줄 것이니까, 나 하나님이 믿을 만한지 사람 스스로 검증하고 판단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의 요청이나 간구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스스로 계획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세우신 계획에 대해서도 사람 앞에 맹세하시고, 확증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 배려의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5. 언약의 성격
오늘 본문 중에 대단히 오해를 받을만한 구절이 있어 그것만 풀어보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창세기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대하고 이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야. 특별한 사람이 틀림없어.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겠지. 오죽 사랑하셨으면 아브람을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복을 내리고, 아브람을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린다고 하셨을까?’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분명한 오해임을 먼저 밝혀 드립니다.
먼저 아브람은 절대로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음 주에 자세히 말씀 드리겠지만 아브람은 좋은 가문도 아니고, 순종적인 사람도 아니고, 신앙이 좋은 사람도 아니고, 특별한 능력이나 재주를 지닌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시는데 있어서 분명히 사람을 들어서 쓰십니다. 그러나 여러 번 말씀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쓰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능력이나 재주를 가진 사람이 필요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복을 내리고, 아브람을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린다고 하셨을까요? 이 말씀을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저주를 내리시는 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담겨 있는 의미는 ‘축복받을 사람도 없고, 저주 받을 사람도 없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 죄인의 특징은 자신이 기준이 되어서 자신 밖에 모르는 존재입니다. 누구를 축복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절대로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브람을 축복해 주는 자도 없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도 없는 것입니다.
죄인은 타인을 축복해 주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저주하는 존재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시기, 질투, 저주가 살인이라는 끔찍한 결과로까지 이어집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아브람을 저주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저주하면 되겠습니까? 결과적으로 복 받을 사람도 없고, 저주 받을 사람도 없게 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구절은 [창세기 12:3] 후반부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절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내용을 전반부와 연결하면 모든 사람은 어차피 죄인이기에 그 사람의 조건이나 상황, 자격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됩니다. 복 받을 자는 하나도 없고, 모두 저주받아야 할 대상이지만 그들 모두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다짐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은 전 인류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아브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람 당사자에게만 해당되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아브람을 사람의 대표로 하여 모든 사람과 맺은 언약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치유하고, 회복하고, 구원하여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주셨던 모든 축복들을 모든 사람이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도우시겠다는 하나님의 다짐이며, 약속입니다. 그 안에 여러분과 제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한 언약입니다. 일정한 기간 동안에만 유효한 한시적인 언약이 절대로 아닙니다. 취소할 수 있거나, 무효가 될 수 있거나, 해지될 수 있는 언약이 절대로 아닙니다. 왜냐하면 조금 전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의 언약은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앞으로 태어날 모든 사람에게 조차도 복을 주시고 책임을 져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계셨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간도 여러분과 저를 위해 쉬지 않고 일을 해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잘 아시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기쁘고, 즐겁고, 신나고, 행복한 신앙생활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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