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한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성불”
천태종 비구니 상임지도법사 문성 스님 회고담3
“비구ㆍ비구니 통틀어 천태종에서 제가 제일 먼저 출가했지요.”
단양 여의생 마을에서 나고 자라 상월원각대조사께서 천태종을 중창한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천태종 비구니 상임지도법사이자 종의회의원인 문성 스님〈사진〉의 말이다. 문성 스님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대조사께서 중생구제의 뜻을 품고 소백산 연화지를 찾아 왔을 때부터 대조사의 가르침을 받들어 평생 구도의 길을 걸었다.
문성 스님은 구인사 창건 이후 대조사 생가에 방문했던 얘기를 꺼내놓았다.
“대조사님은 이미 이 자리가 중생을 구원하고 세상을 제도할 자리인 것을 알아보고 찾아오셨어요. 그 때는 단양역이 없을 때라 구인사에 오자면 대조사님 댁에서 도계역으로 걸어 와서 기차를 탄 다음 매포역에서 구인사로 걸어 들어와야 했어요.”
대조사가 처음 구인사를 세울 당시를 묻자 스님은 “황토로 지은 방 8칸짜리 도투마리집(집 가운데 부엌이 있고 양쪽으로 방이 있는 구조)이었다”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놨다. 문성 스님은 “대조사님이 마을에 오실 적에 대조사님의 큰 뜻에 감복한 청년 둘을 데리고 왔었다”며 “그 청년들이 절 지을 돈을 내고 마을사람들이 일을 해서 지은 집이었다”고 말했다. 또 “내가 9살, 10살쯤 됐을 때였는데 싸리나무를 엮어 대롱박에 얼려서 황토를 발라지었다”며 “짓는데 2~3년이 꼬박 걸렸는데 한국전쟁 때 불타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그 때 대조사님은 정말 엄하셨어요. 식구들은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셨죠.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자식이 죽어도 연락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가끔 가족들이 옥수수나 보리 같은 식량을 가져와도 멀리 두고 가라고 하실 정도였어요. 그렇게 100일간 첫 안거기도를 했습니다.”
대조사께서 지도한 이 100일 기도는 해제를 일주일 남겨두고 한국전쟁을 맞았다. 문성 스님은 “대조사님은 전쟁이 나기 전에 미리 전쟁이 날 것을 아시고 우리에게 절대 피난을 가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셨다”며 “장정들에게는 쌀을 미리 찧어 한 달 먹을 분량의 백설기를 만들어 산으로 들어가 한 달 후에 내려오라고 하셨다”며 대조사께서 사람들의 동요를 막았다고 이야기했다.
스님에게 대조사의 수행담을 묻자 “처음에는 〈천수경〉도 외우고, 〈신묘장구다라니〉도 외우곤 했다. 이후에는 참선수행을 많이 했다”며 “‘나는 어디서 왔는가’, ‘부처님 법은 왜 생겼는가’, ‘어떤 마음을 가지면 부처님 법을 알 수 있는가’, ‘마음은 무엇인가’ 등 화두를 정해주시고 참선을 하곤 했다”고 대답했다.
“대조사님은 양쪽 방에 남녀신도들을 따로 앉혀두고 문지방에 떡하니 지키고 앉으셔서 수행을 시키셨어요. 오후 5시가 되면 농사일을 정리하고 6시가 되면 무조건 선방에 들어가야 했어요. 자정에 잠깐 쉬고 아침 6시까지 수행을 했죠. 그리고 낮에 2시간 잤는데, 오죽하면 ‘잠 한 번 실컷 자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을 정도였어요. 대조사님께서 지나가시다 들으시곤 ‘나중에 실컷 잘 날이 있을 테니 내가 하라고 할 때 부지런하게 닦아. 언제까지 내가 가르쳐 줄 것 같아’ 하셨어요. 또 ‘열심히 닦으면 내가 가져가나? 다 본인이 가져가지. 부지런히 닦아서 하나라도 더 가져가’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스님은 “대조사님은 비구ㆍ비구니 구분이 없다고 하셨다”며 “청정한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고 하셨다”고 회상했다. 또 “비구니·우바이가 지킬 것은 많지만 누구나 깨칠 수 있다고 하셨다”며 “비구니가 깨칠 수 없다고 하셨으면 나는 출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웃음 섞인 말을 덧붙였다.
문성 스님은 “경전에서 여자는 한 겁을 더 닦아야 한다고 하는데 대조사님은 깨달으면 남녀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며 “마음만 그 자리에 가면 모두 성불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아울러 “가정에서 닦는 것이 힘들긴 하지만 마음만 바르다면 깨칠 수 있다고도 하셨다”고 전했다.
첫댓글 거룩한 가르침 일편단심하시면
깨닳음에길 가까워진다는진리.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