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계유정난의 배경과 사건 분석
※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
언 제 : 1453년
누 가 : 수양대군
어떻게 : 수양대군이 1453년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아들을 죽임
왜 : 왕위찬탈
세종(世宗)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文宗)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세 사람 중
남지는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하였으므로 그의 후임인 정분(鄭笨)이 대신 당부를
받았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1453년 문종의 유탁(遺託)을 받은 삼공(三公) 중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이 사변 직후에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모반하였으므로 주륙(誅戮)하였는데, 사변이 창졸간에 일어나
상계(上啓)할 틈이 없었다’고 사후에 상주(上奏)하였으며, 곧 이어 단종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을 소집한 뒤, 사전에 준비한 생살(生殺)계획에 따라 황보 인,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찬성 이양(李穰) 등을
궐문(闕門)에서 죽였으며, 좌의정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인 조수량(趙遂良) 등을 귀양보냈다가
죽였으며,
수양대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이 ‘황보 인 ·김종서 등과 한 패가 되어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다’고
거짓 상주하여 강화도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사(賜死)하였다.
수양대군은 10월 10일의 정변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그는 의정부영사와
이조 ·병조 판서,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직하였고,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 한확(韓確)을 우의정으로 삼았으며,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는 등 그의 집권태세를 굳혀갔다.
이 정변이 계유년에 일어났으므로 이를 계유정난이라 하는데, 이 사건에 공이 있다 하여
수양대군 ·정인지 ·한확 ·이사철(李思哲) ·박종우(朴從愚) ·이계전(李季甸) ·
박중손(朴仲孫) ·김효성(金孝誠) ·권람(權擥) ·홍달손(洪達孫) ·최항(崔恒) ·
한명회(韓明澮) 등 37명은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되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12세의 어린 나이로 단종이 조선 제6대 왕으로 즉위하자 조정은 고명대신에 의해
장악된다. 이는 곧 조정이 신권에 의해 완전히 장악당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신권의 팽창이 왕권 자체를 위협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왕권을 위협한 것은 수양을
위시하여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던 왕족들이었다.
당시 조정은 영의정에 황보 인, 좌의정에 남지, 우의정에 김종서가 포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이 해 10월에 좌의정을 내놓게 되고, 좌의정에 김종서,
우의정에 정분이 앉게 된다. 당시는 의정부서사제였기에 조정의 권력은 의정부의
삼정승이 쥐고 있었는데 건강이 악화된 남지가 정사에 적극 참여할 수 없자 조정은 황보
인과 김종서가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되었고, 정분이 우의정이 된 다음에도 계속 두
사람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단종실록에는 이들 대신이 안평대군 등 종친뿐 아니라 혜빈 양씨, 환관 등과 모의하여
궁중에까지 세력을 펴는 한편, 황표정사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요직에 배치하여 붕당을
조성하고 끝내는 종실을 뒤엎고 수양대군에게 위협을 가한 것이 계유정난의 원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단종실록이 세조 때에 편찬된 점을 고려할 때 이 기록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황보 인 등 고명대신들은 문종의 유지를 받들어 어린 왕을 보필하는 데 최선을
다했을 뿐, 붕당을 조성하려고 한 흔적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다만 대신들의 협의체인
의정부가 본래의 권한을 넘어서 왕권을 미약하게 만들었던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한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왕은 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백관은
의정부는 알았으나 군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 지가 오래 됐다'고 했다. 또한 재상
중심 체제를 주장하던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도 김종서의 지나친 권력 증대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이런 두 가지의 예는 곧 의정부가 권력을 남용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왕권이 완전히 땅에 떨어져 있었음을 반증해주고 있다.
하지만 대신들의 합의체인 의정부가 세력을 키워 수양대군을 제거하려 한 것 같지는
않다. 수양은 자청해서 명나라에 고명 사은사로 간 바 있는데 만약 의정부가 그를
제거하려 했다면 이 기간에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양은 그의 수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명을 다녀왔다. 이는 곧 당시 김종서 등이 수양의 행동에 별로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수양은 명을 다녀옴으로써 의정부 대신들에게 자신이
정권에 대한 야욕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의정부 대신들을 안심시켜
허를 찌르겠다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이는 수양대군의 거사 계획이 명에서 돌아온 뒤 급진전된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수양대군은 명에서 돌아온 1453년 4월에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
양정 등 심복 무사를 양성하기 시작했고, 6개월 뒤에 드디어 거사를 감행했다.
그는 우선 김종서를 제거했다. 당시 김종서는 병권을 쥐고 있었고, 조정 대신들의
구심체였기에 그를 제거하지 않고는 거사를 성공시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 해 10월
10일 밤 유숙, 양정, 어을운 등을 데리고 김종서를 찾아가 간계를 써서 그를 철퇴로
죽였으며, 영의정 황보 인,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우찬성 이양 등은 왕명을
핑계로 대궐로 불러들여 참살했다.
또한 친동생 안평대군을 붕당 모의의 주역으로 지목해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사사시켰다. 게다가 자신의 형제들 중 뜻을 달리했던 금성대군을 유배시켜서 죽였으며,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낸 후 다시 노산군으로, 그리고 서인으로 전락시켜 죽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수양대군이 왕권에 대한 야심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또한 비록 의정부 대신들이 조정을 쥐고 있었다고 해도 이는 적어도 왕권에
대한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왕이 권한을 펼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한시적인 일이었다.
조신이 개국 초부터 재상 중심제를 정치 이념으로 삼았던 점을 감안할 때 사실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있어도 통치에서는 별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계유정난은
수양과 그 주변 무리들이 왕권을 탐한 나머지 저지른 비윤리적인 역모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