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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대종주 산행기(화엄사-대원사 주차장,46킬로미터 02:40-18:00(15:30))
1. 들어가기
금주 한 주를 화두처럼 지배했던 화대종주! 마치 수능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긴장과 기대가 넘쳤다.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난 재수생이다. 상반기에 한 번 시도해 봤지만, 실력이 모자라서 시간 내에 해낼 수 없어 눈물을 머금고 중산리로 하산했었다. 지난 달에는, <자연 속에서> 청학동- 대원사 코스를 만들어서 모의수능을 보듯 30킬로를 걸었었다.기록이 좋지 않아 더욱더 자신감이 떨어졌기에 긴장이 더 됐다. 수요일 친선 축구경기에도 참가하지 않았고, 목요일 개천절에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자연 속>카페에서는 그간 어느 산악회에서도 선보이지 못했던 장시간(16시간)을 허용하는 화대종주 프로그램을 제시했기에, 나같은 초보 종주꾼들도 다시 한 번 기대를 걸 만한 좋은 기회였다. 이번에도 못 붙으면 아예 포기할 생각이었다. 남들은 “산이 어디가냐”고 하지만, 재수생 입장에서 한 번 더하면 성공할 것 같아 삼수, 사수, 오수, 그러다 장수, 되풀이 도전하다 결국 좌절로 인해 잠수 타는 결과가 생길 수 있다.그러곤 싶지 않다. 이번 산행의 핵심은 오로지 완주! 완주를 위해 카메라도 소지 하지 않고, 먹을 것 등 짐도 확 줄이고 가벼운 차림으로 금요일 10:10분 양재에서 승차하였다.
2. 종주기
차 안에는 반가운 나같은 재수생들이 보인다. 서로 말은 안 해도 서로 서로 위안 삼아 저번보다 더 잘해보자는 표정들이다. 25명이 출발, 요즘 가을인데도 <자연 속> 프로그램 참가자들 수가 적다. 화대종주만 하는 것이 아닌데 이것이 너무 부각되었나? 2시부터 산행예정이었으나 고속도로공사 관계로 30분 늦게 화엄사에 도착했다. 화엄사는 낮에 보면 멋있다는 곳이건만 밤에만 보게 된다. 대신 무료입장의 혜택과 함께 하늘 위에는 자갈만한 별들이 수놓은 모습은 낮에는 느낄 수 없는 밤 산사의 아름다운 모습 아닐런지. 총 25명 중 12명이 화대종주에 참가하기 위해 일주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출발했다. 이때가 2:40분. 우등생 말객님을 비롯하여 죠리퐁부부, 스케치북1,2, 물가, 천년초, 나까지 7명이 재수생, 지리산 처음 오시는 현역이 두 분(죠리퐁3, 오르리장), 그리고 처음보는 분들 두 명.
지난 번 우중 산행 때 발을 다쳐서 발바닥이 아픈 천년초님이 앞장을 서서 간다. 왼쪽,오른쪽 갈비가 모두 아파서 진통제를 먹으면서 산행을 하시는데 이번에는 설상가상 발바닥까지 사단이 났다.그래도 종주 욕심이 강해 제일 먼저 간다. 그러다 말객님이 앞서서 먼저 가시고,,,,, 재수를 하게된 첫 번 째 이유가 코재에서의 오버페이스였기에 무리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멀어져간 천년초를 찾아 코재를 오른다. 저번에는 노고단에 도착했을 때 탈진할 것처럼 힘들었다. 물가님 걸음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느라 이미 체력의 80%를 소진했다. 그후 내내 오르내림이 많은 산행에서 아주 힘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시간도 그 때보다 늦지 않으면서도 힘들지 않았다. 7킬로미터 한 시간 40분만에 왔다. 등산은 체력이 아니라 경험이라더니...한 번 경험으로 내 몸이 익힌 자극에 좀 익숙해졌나...역시 몸이 ‘그 느낌’ 아니까? 4시 20분 노고단 대피소에서 젊은 미녀 산객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천년초님을 만나 함께 임걸령을 향한다.
임걸령까지의 길 2.8킬로가 전체 길 중 가장 평이한 길이라 거의 뛰듯이 걸어 단숨에 도착했다. 그런데 저번에 임걸령의 물맛은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리산 최고의 시원한 물맛이었는데, 내 입이 지금껏 그 느낌 아는데, 이번에는 찬 새벽의 물이 그저 그렇다. 물맛이 달라졌나? 생각해보니 내 몸이 덜 지쳐서 그런가 보다.내 몸이 네비처럼 길들을 조금씩 기억하고 있다 보니 덜 힘들다. 덜 힘드니 물맛이 예전같은 느낌을 주지 못한다. 선비샘에서도 비슷산 느낌이었다. 반야봉 가는 입구 노루목에서 천년초님이 반야봉도 들렀다 가자고 제안했으나, 말객님도 10시간 내 주파하신다고 안 들르는데 하물며 우리가...화개재까지 평이한 길이다. 먼동이 가시고 반선 방향으로 펼쳐진 운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연하천까지 4.2킬로미터의 길이 두 번째 고비가 되는 코스이다. 날밤을 샌 것과 다를 바 없는 산객들이 꾸벅꾸벅 졸면서 계속 불편한 오름길을 가야 하니,,코재 못지 않게 힘든 곳이다.실제로 가다가 이슬 맞고 자다 일어난 등산객도 보았다.저런 곳에서 잘 수 있는 무신경이 부러웠다. 연하천에 도착하니 07:30분 20분간 아침을 먹고 나니 물가님,스케치북님,죠리퐁님 일행이 도착했다.물가님은 바나나 갈아온 주스만 드시고, 스케치북님은 다이어트한다고 거의 안 드신다. 독종들이다. 어떻게 안 먹고 종주를 하시겠다는 건지..난 안 먹으면 한 발짝도 못 간다. 먹는 게 걷는 거요, 걷는 게 보면 먹는 거다. 간만에 뵈는 간송 사장님 오늘은 오버도 안했고 힘이 안 드니 종주를 자신하는 모습이 당당하다.
지난 번에는 벽소령 가는 길부터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2.9킬로를 한 시간에 주파하고 각성을 위해 캔커피를 마시고 세석으로 출발했다.날 씨는 쾌청하여 사방의 조망이 다 들어온다. 길가에는 초록도 지쳐 끝난 자리에 노랗고, 누런 잎들과 붉은 단풍잎이 어울어져 가을의 모습이 역력하다. 마지막을 위한 시작인 가을이 완연하다. 길섶에는 9월에 봤던 보랏빛 용잠화, 투구꽃(처오)가 숫자는 줄었지만 여전하고, 대신 가을이 오는 길목, 대한민국 전역 어디에서는 흔히 피는 꽃, 마디가 아홉 마디라 구절초라 불리는 그 꽃이 한참이다. ‘웰컴투 동막골’의 동막골 처녀 ‘여일’이 머리에 꽂고 있는 그 꽃. 60-70년대 여성들 머리핀이 연상되는 꽃들이 지천이다.‘박용래’시인이 그리워했던 죽은 셋째 누이를 노래한 <구절초>가 떠오른다.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대려서 약으로도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 모자 차양이 숨었는 꽃
단추 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秋分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용잠화, 처오, 구절초 모두 약용재료로 쓰는 꽃이지만, 특히 처오(투구꽃)는 얼마전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온 보험금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살인에 이용했다는 혐의를 받는 꽃이라 한 번 더 눈여겨 본다. 천년초님이 분홍빛 산부추를 따줘서 씹어보니 상큼한 부추향과 맛이 난다. 선비샘에 들러 물을 다시 채우고 세석은 그냥 통과해서 장터목으로 가기로 한다.세석까지 총 두 시간, 장터목까지 3.4킬로 한 시간 15분 걸렸다.다들 그다지 힘들지 않은 듯 보인다. 다이어트하는 이나 안 드시고 걷는 이나 모두 거뜬하다. 아마 날씨 때문인가? 각오 때문인가? 암만해도 재수생들이라 현역과 자세가 다르다. 두 명의 현역들은 멋모르고 열심히 따른다. 힘들다는 말도 못한채
고비가 없을 수 없다. 장터목 깔닥고개에 오를 때, 극심한 피로감이 밀려온다. 잠이 아직 깨지 않는다고 어디서 10분 자고 갔으면 소원을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천년초님. 이젠 갈비뼈에 발바닥에, 잠까지 밀려드니 정말 수습하기 힘든 상태. 상반기 때 여기 오르다 가슴 답답했던 경험을 느꼈던 곳이기에 더욱 긴장된다.그래도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의 고행처럼 산더미 같이 밀려오는 졸음과 힘듦을 견디면서 천황봉을 향해 힘든 한 발짝씩을 뗀다.천황봉 1.7킬로가 영화 <머나먼 다리>처럼 느껴진다. 세석을 지나면서 바람이 아주 거세진다. 옷을 입으면 덥고, 벗으면 춥다. 변덕장이처럼 옷을 입었다 벗었다 반복하며 오른다.정상 바로 앞에서 정상을 오르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나,물가님,스케치북님,천년초님 네 사람 중 내가 마지막 힘을 내서 제일 먼저 13:15분 천황봉 정상을 찍었다.지침은 한 시였는데 조금 넘었다. 정상비에는 먼저 온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나래비 섰다.10여분은 지나야 우리 차례가 올 듯 말 듯. 정상에 서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젠 완주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도 된다는 안도감 같은 심정이다.간송님,조리퐁님들,오르리장이 올라온다. 아픈 무릎에 파스를 뿌리고 남은 대원사를 향한 13.7킬로미터 길을 나섰다.
중봉 가는 길, 한참 내려가다 다시 오르는 마지막 오름길을 무사히 마치고 써레봉 건너편에서 지리산 단풍의 진수를 보았다. 물가님 말씀으로는 써레봉의 이런 아름다움은 처음이시란다. 설악산과 달리, 지리산은 점점이 단풍이다. 진달래가 온 산을 뒤덮은 고려산의 진경도 아름답겠지만 점점이 진달래 핀 4월의 백운산의 모습도 아름다웠다.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인적 드문 써레봉에서 점점이 단풍의 아름다움을 보았다.치밭목에서 잠깐 쉰 뒤에 무제치기 폭포쪽으로 하산하다 물가님 안내로 지리산에서 제일 크다는 무제치기 폭포의 모습을 보았다. 설악에는 폭포가 혼해서 폭포를 보고 특별한 느낌이 없는데 지리산에서는 폭포가 드물다.양쪽 갈래로 길게 흐르는 폭포의 모습을 벼랑에 서서 보는 조망의 맛도 분주한 일정 가운데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선다.유평까지 내리막길이 특히 지루했다는 기억이 강한데 오늘 지리산 길들은 나한테 매우 고분고분하다. 나 역시 한 번도 미끄러짐 없이 너들길들을 여유있게 밟고 내려가고 올라간다. 달인이 된 느낌이요. 길이 내게 순종하는 모습이라. 기분도 좋고 힘도 들지 않는다.유평 동네 입구에서 주인없이 주렁주렁 달리 감들 중 익어 떨어진 것들을 주워서 먹어보니 참 맛이 있다. 여기 저기 주인 없는 감나무들이 널려 있다. 시간만 있다며 많이 따가고 싶은데...갈길 바쁘니 어쩔 수 없다. 이곳으로 하산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이곳에서 오르는 사람들은 열 사람도 못 만났다.지금 길도 많이 좋아졌다고 하는데,몇 년 전만 해도 이쪽으로 산행 간다면 걱정스러워 만류하던 오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길들이 인위적으로 손을 댄 곳이 아직 많이 없어 거친 편이다.
어둠이 서려 내리는 유평마을부터 대원사 주차장까지는 어둠 속 적막강산 같은 괴괴한 분위기다 가끔 헤드라이트를 비치며 달리는 자동차뿐이다. 화대 종주를 했건만 축배를 들만한 시간, 알탕할 시간이 있을까 싶어 상황 파악을 위해 물가님과 함께 선두에서 빠르게 주차장으로 걸어가다 막걸리를 사려고 가게를 찾았건만 가게는 안 보인다. 다행히 주차장에서 우릴 눈 빠지게 기다리시던 지기님, 말객님, 황토대장님, 호거님, 꽃돼지님, 정각님 등이 우리를 보자 더 기뻐하시면서 우리를 맞아 주신다. 특히 정각님의 따뜻한 허그에 가슴이 뭉클해졌다.여려 분들이 권하는 막걸리 잔을 받으며 정처럼 옮아오는 따뜻한 격려에 가슴이 따뜻해지며 종주로 인한 피로가 모두 풀렸다. 종주 후에 막 걸른 듯한 신선한 막걸리의 맛이 씻어야 한다는 의무도 저버린 채 자리에 날 옳아맸다. 참 아름다운 구속이요, 감사한 하루였다.
3. 피날레
불꺼진 깜깜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잠이 좀처럼 오지 않는다. 오히려 의식이 선명해진다.어설픈 음주 탓일까 아니면 기쁨으로 인한 설레임 때문일까? 그러다 길이 막혀 잠깐 졸다가 열 시 반이 넘어 양재에서 내릴 때는 어설픈 깨어남에 피곤함이 엄습하며 기쁨이고 뭐고 다 잊혀졌다. 하긴 로또에 1등 당첨된 자의 기쁨이 얼만큼 가는지를 하바드대 심리학자가 연구했더니 아무리 큰 기쁨이든 슬픔이나 3개월이면 잊혀진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고 들었다. 그러니 종주의 기쁨이라 해야 일장춘몽같은 버스 안 세시 간의 기쁨도 긴 것이 아닐까? 신참에게 처음 참가해 그 어려운 종주를 성공했으니 종주 축하주는 선배들이 사겠지만 아이스크림이라도 한 번 쏘라고 농을 했는데, 그러겠다고 하고는 한 번 자고 일어나니 다 잊어먹고 식언이 돼 버리는 것도 인지상정이라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이번 종주는 일 년 전부터 시작된 산과의 불륜의 결정판이었다. 그리고 이 종주가 ‘어느 종주 산행의 종말을 위한 협주곡’이 될른지 아니면 ‘종주 환상곡’이 될른지는 아직 확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분간만이라도 내가 오늘 어디만큼 얼마에 걸었다는 기쁨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종주형 산행은 잊고 싶다. 자연인처럼 등산도 하나의 유희로, 어디 가서 걷다가 좋은 곳 보면 한참 놀다 가기도하고 사진도 찍고 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즐기는 산행을 해 보고 싶다. 시간에 쫓겨 바쁜 걸음으로 수도자처럼 오직 시간과 거리에 목숨 거는 무모한 산행을 계속하고 싶지는 않다. 호거님처럼 좋은 것을 보면 그 유래도 파악하고 즐기고 기록하는 산행을 하거나, 마루코님처럼 명산 백산 같은 테마 산행을 하거나, 물가님처럼 자연을 진정 사랑하고 어루만지면서 의미를 추구하는 철학적 산행을 하거나 정각님처럼 건강을 치유하는 기쁨의 힐링 산행을 하거나 아니면 근교산을 줄기차게 오르는 스케치북님 같은 일상 산행이든 뭔가 의미 있는 산행을 추구하고 싶다. 물론 종주 산행이 무모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종주산행의 경험이 여러 가지 의미를 주었다. 일단 체력을 좋게 해 주었고, 목표를 갖게 해 주었고, 어려움을 극기하는 훈련을 할 수 있었다. 아울러 함께하는 이들과의 협력의 중요성도 깨닫게 해 주었다.하지만 오늘 산행에서도 오로지 걷기만 했지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지리산에 왜 왔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주말마다 오산종주를 계속하는 것과 뭐가 다른지 하는 회의감도 든다. 여러 모러 이번 산행이 앞으로의 산행에 분수령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어찌 될 것이든 이번 종주를 기획하고 만들어주신 지기님, 열심히 응원해주신 자연 속 회원님들, 함께한 재수생들인 동료들, 이번 처음 참여해서 종주에 참여한 새내기 현역들(특히 이분들은 Carve their name in this cafe(이 카페에 그들의 이름을 새겨라.)) 께 감사하며 이글을 가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