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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남자 읽기
이동민
김옥자의 내 남자는 제목부터 독자에게 연상의 길로 안내한다. ‘내 남자’라는 단어가 묘한 뉴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내’라는 말은 소유자를 의미한다. ‘남자’도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서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 낸다. 단순히 남, 녀라는 성의 대비점에서 바라본 남자가 아니고,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강한 이미지 때문에 성적 대상으로서의 남자를 느끼게 해준다. 이로서 독자는 훨신 더 넓어진 상상의 공간을 날아다닐 수 있다.
내 남자의 이미지로 하여 ‘언어유희’라는 개념으로 이 글을 읽어보자. 언어유희라는 말은 즐거움을 주는 단순한 말장난 정도의 의미로부터 사회풍자적이고, 사회비평적인 것도 내포하는 다양한 분야를 아우를 수 있다. 유희가 뜻하는 그대로 놀이 즉 즐거움에서 이 글을 읽도록 해보야 할 것이다.
언어유희 개념으로 가장 흔히 거론되는 것이 농담이다. 또는 익살이다. 농담이 지향하는 기본점은 쾌락지향이다. 농담이 즐거움을 준다는 것에서는 언어유희의 일종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농담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이유라면 유희적 판단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작가가 가정주부라는 사실과, 내 남자라는 표현 사이에 유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농담이 즐거움을 주는 기법에는 유사하지 않는 것의 짝짓기라는 것이 있다. 한국 사회의 평범한 가정주부와 성적인 욕구의 표현 사이에는 낯선 것끼리의 짝짓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농담에는 우선은 당혹감을 주지만 나중에는 깨달음을 준다고 하였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가정주부인 작가가 내 남자를 들먹일 때는 우선 당혹감을 준다. 그러나 글을 읽고 나서 그의 주장이나 표현에 ‘그래 맞다’라는 독자의 동의를 이끌어 낸다면 농담의 기능을 아주 잘 살려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당혹감이 깨달음으로 바뀌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글을 끝까지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농담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무의미 속의 의미라는 것도 있고, 숨겨진 것들을 드러냄이라는 것도 있다
글이 무겁고 장중한 주제를 다룰 때는 이미 제목부터 의미가 너무 무거워지므로 독자에게 부담을 준다. 그러나 언어유희식이나, 농담의 방식으로 시작하는 글쓰기는 읽고 나서도 꼭히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런 글은 글의 목적이 단순히 웃으면서 즐기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농담 양식의 글은 무의미한 웃음 뒤에 의미를 담고 있는 글이다. 그래서 숨겨진 의미를 찾아 낼 때는 성공한 글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내 남자도 글의 독해를 마치고 나서 과연 숨겨진 의미가 있을까를 평가해보기로 하자.
언어유희적 농담에서는 이중적 의미를 꼽기도 한다. 농담의 내용에 은유적 의미와 실제적 의미를 같이 담고 있을 때는 웃음 뒤에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앞에서도 기술하였듯이 내 남자라는 농담성 언어에서 성적인 것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성은 인간에게 가장 강한 쾌락을 주는 요소이다. 작가는 그 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제목을 삼았다.
내용은 중국의 연변에 여자 친구들이 여행을 가서 안마소에 들렸던 일을 에피소드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친구들은 전신 마사지를 받기로 하였으나 작가는 발 마사지만 받기로 하였다. 모두 남자 안마사에게 마사지 받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작가에게만 남자 안마사가 왔고, 친구들에게는 여자 안마사가 온 것이 이야기의 단초가 된다.
작가는 재능이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제목에서 내 남자라는 말로서 독자들에게 성적인 상상을 유도하였다. 글의 도입부에 성적인 욕구를 부추기는 분위기를 묘사하므로 독자들에게 쾌감을 느끼도록 글을 이끌고 간다.
“우리는 남자 안마사를 불렀는데 왜 여자 안마사 왔느냐고 항의를 했고, 그들은 당신들이 원하는 남자 안마사들은 다른 방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오래 기다려야 하며···. 답답한 마음에 손바닥을 펴서 사내 남(男)자를 써보이는 해프닝도 있었으나···”
그의 말대로 안마 시술소에서 있었던 해프닝을 소개하는 글이다. 여자 네 명이 손바닥에 男자까지 써 보이면서 남자 안마사를 요구하는 모습을 그려보면 웃음이 나온다. 흔히 여행이나 축제에서는 약간의 일탈은 허용한다. 작가는 이야기의 배경을 여행이라는 시점에서 잡으므로 적절히 이용하고 있다.
작가도 이 내용을 독자들에게 아주 진지한 내용으로 소개하려는 의도는 아닌 것 같다. 그냥 가볍게 웃음이나 선사하자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오히려 더 깊은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성적 욕동을 방출하는 방법으로서 글쓰기가 유용하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작가는 제목에서부터 위의 인용문까지 성적인 욕망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눈에 보인다. 실제로 독자에게 성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도 있는 상상의 세계로 이끌고 가고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독자가 아닌 작가 자신의 욕망을 방출한 것이 아닐까? 만약에 자신의 욕구를 방출할 목적으로 글을 썼다면 정신치료의 아주 좋은 방법이다.
어느 사회이든지 성적인 것의 언급을 금기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는 더 심하다. 여자의 경우는 더더욱 심하다. 프로이트는 강박신경증을 설명하면서, 사회문화적 금기가 심하고, 그 금기를 모범적으로 잘 지키는 사람일수록 강박증을 앓는 수가 많다고 한다. 외부의 생활 태도와는 다르게 심리적 갈등은 더 많이 겪는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규제도 심하고, 또 남자들보다 더 잘 금기를 따르는 모범생이다. 그래선지 우리 사회에는 여자들이 남자보다 신경증을 앓는 일이 훨씬 더 많다. 심지어는 ‘화병’이라는 우리나라 고유의 정신질환이 세계 정신의학회에서 공식 용어로 통용되고 있다. 성적인 언급은 서양사회보다 더 금기시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남자들에게는 많이 관대하다. 여자들에게는 훨신 더 엄격하다. 여자들이 정신적인 갈등에서 벗어나는 길은 훨신 더 멀고 험난하다. 그래서 나는 수필쓰기에서 정신치료의 요법으로서 욕망을 방출하는 방법은 없을까를 두고 고심하였다. 그러나 수필쓰기에서는 자신을 드러내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천정의 밝은 형광등을 소등하고, 촉수 낮은 등을 켰다. 커튼이 내려진 실내는 약간 야릇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장난끼가 발동하여 내 앞에 서있는 남자를 ‘내 남자’라는 호칭으로 친구들에게 소개했더니 ‘복많은 년은 엎어져도 가지밭이다.’라는 야한 농담이 돌아왔다.”
작가는 이 글에서 내 남자라는 말을 하므로 언어유희를 뛰어 넘어 성적유희까지 즐기고 있다. 농담이론에 의하면 농담이기 위해서는 쾌감을 느끼게 하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농담-기술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하였다. 성적인 농담에는 특히 초자아의 검열이 심하다. 기술은 바로 이 검열을 벗어나서 성적 충족감을 채워줄 수 있는 재능이라고 하였다. 이제 내 남자라는 농담적인 언어가 성적인 의미로 전환하면서 새로운 의미 내용으로 바뀌는 것을 q볼 수 있다.
더 직접적으로 성에 대한 연상으로 유도해가는 것은 ‘가지’라는 말이다. 채소로서의 가지가 남근으로서의 가지로 전이한다. 남근은 다시 의미 변환이 일어나서 성적으로 더 은밀한 곳으로 상상을 유도해 간다.
다시 프로이트 이론을 살펴보자. 성적인 것을 언급하는 것은 사회문화적인 금기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내면의 욕망이야 어떠하든 간에 흔히 혐오스럽다는 말로 반응한다. 그렇지만 성적 욕구를 억압해 둔 것일 뿐이므로 내면의 욕구를 방출해주지 않으면 더 큰 갈등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욕구를 방출해주는 것은 정신 건강상 바람직한 일이다.
내 남자라는 말을 구사하므로 언어유희적인 방법을 시도하여 성적욕구를 방출하고 있다. 가지 밭이라는 단어에는 이중적 의미, 숨어 있는 의미라는 요건을 충족시켜 주므로 언어유희적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작가는 농담의 기술을 이용하여 수필을 쓰므로 사회문화적인 금기의 벽을 넘어서고, 초자아라는 검열관의 감시도 벗어나는 글을 쓰고 있다.
“남자와 여자, 피부와 피부의 접촉, 어색하고 민망하다.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나는 계속 눈을 감고 있다. 아무리 감정의 전원을 끈다 해도 나이를 무시하고 잔류가 흐른다. 속칭 내 남자는 정부(情夫)가 색탐을 하듯 어깨와 팔을 거쳐 다리와 허벅지까지 거리낌 없이 열심히 문질러 댔다. 그는 단지 업무에 충실할 뿐인데 나는 불량한 생각으로 얼굴을 붉힌다.”
이글을 읽으면 작가의 말마따나 불량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러면서 웃으면서 읽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여행길에 들르는 안마 시술소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홍등가도 아니고, 여행길에 피로를 풀어주는 휴식 장소뿐이다. 말하자면 작가가 묘사하듯이 그렇게 야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작가는 그 분위기를 역이용하여 실제보다 훨신 더 강하게 성적 욕망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과장은 농담이론에서 하나의 기술이다.
나는 작가가 안마 시술소에서 보다 오히려 이글을 쓸 때 더 깊은 성적 욕구와 충족을 느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글을 쓸 때는 환상 속에서 잠겨 있었을 것이다. 환상은 실제보다 훨신 더 쾌락충족적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마 시술소에서 보다 작가는 이글에서 욕구의 방출과 충족을 느꼈을 것이므로 정신치료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제 농담이라는 언어유희에서 무의미 속의 의미, 또는 숨겨진 의미라는 것을 찾아보기로 하자.
그는 이글을 통하여 닫혀진 우리 사회에 대하여 항변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한 남자의 아내로, 한 가정의 며느리로, 몇 아이의 엄마로 살아온 복잡다단했던 지난 세월’이라는 표현에서 우리 사회의 닫혀있는 가치관과 그가 살아온 세월이 욕구의 억압으로 가슴에 감정을 담고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대부분의 한국의 보통 주부들이 살아온 방식을 충실히 따르면서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글은 단순하게 자신이 겪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는 글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 짧은 글귀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한국의 가치관에 충실히 따르면서 억압된 욕구를 안고 살아왔는가를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여행길에 들른 안마 시술소에서 겪은 일을 과장하여 성적인 욕구를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단순히 웃음을 주려는, 독자에게 언어유희적인 놀이로서 쾌락을 주려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이 평소의 삶에서 억압하였던 욕구를 이런 식으로 방출할 수도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언어유희적인 놀이를 넘어선, 무의미 속의 의미를 찾아보기로 하자. 나는 마광수가 주장하였던 우리 수필의 엄숙주의, 경건주의에 대한 항변으로 읽고 싶다. 너무 경건한 주제만을 다루는 우리 수필에 대해서 야한 표현을 서슴지 않으므로 냉소적으로 비평한 것이라고 믿는다. 작가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이런 류의 수필을 발표하고 싶지만 나를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이 두려워서···. 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수필이야말로 우리에게 우리 수필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수필을 읽으면서 인간의 욕구를 방출할 수 있는 방법을 수필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나로서는 크나 큰 발견이었다. 수필은 내면의 고백이다. 그러나 성적인 표현은 어느 사회이든지 금기시하므로 수필로 표현하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내 남자’처럼 농담을 하듯이, 언어유희적 방법으로 욕망을 표현한다면 검열관의 눈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 강의 20강에서 ‘인간의 성생활’을 주제로 발표하면서 마지막에 이말로 끝을 맺었다.
“정신분석학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 성으로 불리는 것은 생식에 기여하거나, 정상적으로 간주되는 제한된 성 뿐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끝을 맺겠다.
“수필에서 성의 표현은 억압된 욕망을 충족하는 방식으로서 농담-기술의 기법은 활용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 사례가 내 남자이다.”
** 수필쓰기에서 농담기법
농담의 사전적 의미는 ‘실없이 장난으로 하는 웃음의 말’이다. 즉 농담에는 유희적(놀이) 요소가 기본이라는 뜻이다. 농담은 당혹감을 주지만 유희적 판단이 있을 때라야 만 농단이 성립한다.
그러나 농담은 단순히 유희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드러나지 않는 것, 숨겨진 것을 끌어내야 한다. 수필에 농담은 ‘재미’라는 맛을 내는 동시에(양념 역할이라고 한다.) 내밀한 의미를 내포한다. 농담은 수필 뿐아니고 다양한 용도가 있지만 여기서는 말하지 않겠다.
농담에는 반드시 쾌락기제가 따른다. 그러나 농담에는 외부(사회적인 제약 요소들)와 내부(내면심리적-수퍼이고)의 금기에 대한 저항이 있다. 그러나 농담을 듣는 상대자가 의미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하면(웃지 않는다는 뜻-쾌락기제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뜻) 농담은 성립하지 않는다.
농담을 할 때는 상대방이 웃어야 하고, 의미를 눈치 채도록 한다. 이것을 농담 기술이라고 한다. 쾌락에 비판적 요소가 끼어들면 놀이는 더 이상 반복하지 않는다.(이것을 경향(흑색) 농담이라고 한다.) 때문에 상대자가 눈치를 채지 못하게 하는 기술(농담기술)이 필요하다.
수필쓰기에서 농담의 효과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무의미 속의 의미’이다. 수필은 허구가 아닌 진실로 자기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표현에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회문화적인 금기나, 초자아의 감시를 무시하고 표현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농담에는 이성적 논리성이나 비평적 판단은 배제되어 있다. 사회문화적인 금기와는 배치되는 속성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음담패설이다. 음담패설의 내용은 사회문화적인 금기이다.
웃음이 유발되는 심리적 기전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중요한 것이 사소한 것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불일치가 나타날 때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농담에는 약간의 가치비하적인 요소가 있으므로 자칫하면 상대방(수필에서는 독자)에게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다. 수필을 쓸 때는 이 점도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기술에는 농담이 아니면 표현이 금지되는 무의식적 경향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부분적으로 공개하거나 방출하는 것이 허용되도록 도움을 준다. 특히 성적인 농담에서 그런 경향을 볼 수 있다. 농담의 목적이 적대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이거나, 성적인 것이거나 농담이 아니면 표현이 허락되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훌륭한 농담은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메시지 자체는 표현이 금지된 충동을 기교(농담의 기술)를 부려서 방출시켜 줄 때 느끼는 쾌감만큼 크지 않다.
농담 행위를 요약하면 쾌락을 목표로 하는 정신기능 중에는 가장 사회 수용적이다. 즉 사회에서 거부하지 않는 행위이다. 농담은 일종의 놀이이다. 즉 유희이다. 농담은 욕구에 의하여 제한받지 않고 단순한 심리장치를 통하여 작은 즐거움을 얻으려는 것이 목적이다. 쾌락을 얻은 이후에는 외부세계와 연결되는 기능을 갖는다. 수필에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이 기능 때문이다.
다시 수필과 농담의 관계를 살펴보자. 지금까지의 검토에서 농담은 쾌락과 숨겨진 의미가 목적이므로 수필에서 단순히 맛을 내는 양념은 아니다. 수필쓰기가 문학치료의 유용한 방법이라면 농담은 활용가치가 아주 높은 기법이 된다. 양념보다는 훨씬 더 높은 가치를 가진다.
감정을 폭발적으로 분출하여서는 안 된다. 수필쓰기는 감정을 순화시켜서, 서서히 표출해내는 방법이 된다. 이때 농담을 사용하는 것은 유용한 기법이다. 분노의 폭발을 제어하는 방법으로 적대적인 농담을 이용할 수도 있다. 성적인 욕망도 검열을 통과할 수 있게 가공하는 방법에 농담은 유용하다.
다시 요약하면 수필에서 농담의 기술을 활용하는 것은 즐기기를 향유하는 것이다. 농담은 쾌락과 더불어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므로 농담을 하는 것은, 즉 수필쓰기에서 농담을 활용하는 것은 정신적인 긴장을 방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농담에는 무의식적인 욕망이 숨어 있으므로 방출하는 것은 정신치료에서 유용한 방법이다. 수필에서 농담의 기법을 잘 활용함으로 치료효과도 올릴 수 있다.
첫댓글 수필 쓰기와 농담 기법 활용이라는 높은 수준의 이론을 적용하고 있군요.
농담 속에 진담이 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농담 속에 담겨 있는 깨달음은 수필 속에 담겨 있는 깨달음과 접목 될 때 시너지 효과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좋은 수필에 좋은 해설이 이루어질 때 수필 문학이 예술로서 발전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