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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구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 2 )
대구방송국이 태평로 공회당에서
동대구의 신천동 으로 옮긴것은 72년 9월
28일이고 73년 3월 3일을 기해서 KBS가 공사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서 3 0년 긴 방송을 하면서
1978년 7월 1일을 기해서 TV방송 TV방송시대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곳에서 현재의 새 청사로
옮긴것은 2002년 12월 4일이었습니다.
1972년 공사가 되기 전까지 라디오
중계소로는 1962년에 개소한 출력 1kW의 안동중계소, 1965. 9. 22일에 개소한 출력 50W의
김천 중계소와 같은 해 8월에 개소한 출력 1kW의
점촌 중계소, 그리고 1970년11월에 개소한 10kW의
영주중계소가 방송전파를 발사하게 되어 1950년대
말 부터 이동방송국으로 개국한 포항방송국과
더불어 경상북도내의 라디오방송
체제가 확립되었습니다.
대구지역에서 TV방송을 보기 시작한 것은 1966년 금오산에 300W의 TV중계소를 세우면서 입니다. 시청이 용이치는 않았습니다. 1969년 5월에 대구시 범어동에 2kW TV중계소를 세웠는데 대구 시내에서는 시청이 가능했지만 중계소와 막힌 지역에서는 가까운 거리에서도 시청이어려워 시청권이 너무 좁았습니다.
KBS가 팔공산에 중계소를 세워 난시청을 해소한것은 1971년 4월이었고 이에 앞서 1970년 2월 20일, 학가산에 1kW의 TV중계소를 세우고 뒤 이어 포항지역 난시청 해소를 위해 1971년 11월 20일 조항산 중계소를 세워 경상북도내의 TV방송 체제가 대체적으로 구축 되었습니다. 1978년 7월 1일, TV자체방송을 실시함으로서 명실공히 이 지역의 TV방송시대를 열었습니다.
공사 될무렵 라디오방송의 자체방송시간은 하루평균 6시간이었고 프로그램으로는 매일 방송되는 오늘도 명랑하게, 생활백과, 희망음악실, 오후의로타리, 노래의 꽃다발, 노래의 오솔길, 라디오 응접실이 있었습니다. 주 1회 방송되는 프로그램으로는 농사상담, 영농진단, 새마을광장, KBS배쟁탈 노래자랑 등이 있었고 60년대 중반까지 주간 연속극도 방송 되었습니다. 전속 단체로는 어린이 합창단, 성인 합창단, 방송극회, 전속가수와 경음악단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66년
3월부터 68년 7월 까지 2년 6개월간,
이곳 국장님으로 재직 하셨던 노정팔님이
그때의 일들을 써 놓으셨기에
옮겨 보겠습니다.
“ 방송과 보도계에는 우달수 계장을 위시해서 서병주, 여태영, 이내일, 심재일 기자가
있었다. 서병주 기자는 대단한 활동가 이었다. 시청은 물론
상공회의소 금융기관, 체육계 등 을 두루 누비면서특종기사를
많이 취재 해 왔고 방송국의살림이 어려운 때에는 잘도
도와서 주름살을 펴게도 해 주었다. 녹음구성 등
방송제작에도 일가견을가지고 있어서 성탄절
특집을 꾸며 문공부가 주최한 방송대상을
받은 일도 있었다.
이내일 기자는 처음에 아나운서로
부임해 왔으나 기자 쪽이 더 적절 할 것 같아
보도 쪽으로 배치했더니 반발이 여간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직종을 바꾼 것이 잘된 일이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녹음구성도 제작 했다.
아나운서 계에는 유필기, 박연옥, 이원춘, 김정자, 등의 쟁쟁한 맴버이었다.
뒤에 이원춘, 김정자가 서울로 가고 이종서, 최정자
두사람이 왔는데 모두 훌륭한 사람이었다.
PD는 박진우가 중심역할을 하다가 서울로 가고 박연규, 박요한 김인수 세사람이
그 많은 프로그램을 꾸려 나갔다. 모두가
열심히 했지만 일손이 부족했다.
이 무렵 나는 드라마 제작에도 역점을 두어 서울에서 김희창, 주태익, 이호원등 작가들을
초빙해서 세미나를 열기도 했었고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을 제작 연출 할 수 있도록 했으며
드라마 감상회를 개최 하여 지방의 작가, 연출가,
성우들의 안목을 높여 나갔다.
위시해서임병윤, 황철이,이재춘, 임염룡 등
기술자들이 버티고있어서 기술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노정팔님의 글에서 인용 했습니다.
대구방송국에서 개최한 방송극 세미나 1971년
1973년 2월말의 인원구성 (공사창립직전)
국장 장 기 범 방송과 ( 과장 ) 이무근, 김상진, 김영희, 이정란, 권오상, 박연규, 김기웅, 서정호, 김병률, 류필기, 인주희,
김성길, 박연옥, 이인숙, 우달수, 이기철, 이내일,
이원일, 심재일, 김국웅, 여태영, 노희현,
기술과 ( 과장 ) 이승균 최운하, 류의수, 박영기, 임채기,김무섭.
경산송신소장 한윤갑, 김천중계소장 권중훈, 안동중계소장
임병윤, 점촌충계소장 김봉,
영주 중계소장 조일건. 장기범 국장님은 공사 발족 시 본사 라디오국장으로 옮겼고 이무근님은
공사발족 초대 대구방송국장님으로
재직 했습니다.
대구방송국 연혁
1992년 7월, 서기원 KBS사장과
함께한 대국방송총국입니다. 김수웅 방송총국장등
간부들이 눈에 보입니다.
대구방송총국에 관한 얘기를 더 보실분은 아래 영문자 주소를 클릭 하셔요.
KBS 대구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 1 )
http://blog.daum.net/jc21th/17780127
KBS 대구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 2 )
사진으로 본 KBS 대구방송총국의 역사 http://blog.daum.net/jc21th/17780129
2010년 대구방송총국 재직사원
총국장 : 차시출
위원 : 이창희, 김진봉, 정일태
편성제작국
국장 : 이철민
직원 : 박주형, 정동희, 정세진, 김명숙, 도경완, 심정애, 오대환, 정연희, 이수민, 김태두, 박환욱, 지우진, 이진희, 한효연, 장소랑, 정현진, 정범수, 김영숙, 최수영, 김영민, 백명지, 박은정, 이연희, 이귀순, 김효정, 송화수, 이창숙, 이용환, 이병용, 백종희, 이학록, 안중석, 김충진, 김종국, 김종희, 송현주, 홍원우, 김영숙, 조병섭
보도국
국장 : 오헌주
직원 : 김영재, 정인수, 김재노, 이재민, 송영석, 권기준, 김익수, 이광호, 김봉곤, 최무열, 김정덕, 김동욱, 신지원, 이종영, 박병규, 이하늬, 이재교, 윤나경, 곽혜정, 김민아, 우동윤, 백창민, 이광숙, 김정수, 김명환, 서태교, 김상배
기술국
국장 : 김영동
직원 : 김정호, 정철진, 안태진, 정석준, 김성하, 박영규, 이종천, 김소룡, 권정의, 이용직, 박창훈, 이욱동, 김광업, 권호중, 박병섭, 윤진용, 조중호, 지광태, 손억호, 진태석, 박병혁, 서 일, 이문희, 임윤석, 백진호, 정창교, 하종백, 정현도, 주재열, 이상목, 최학수, 임성식, 김성규, 김해중, 김진선, 윤재필, 김대곤, 이승곤, 손동기, 손재구, 이현욱, 장주홍, 임병철, 백근호, 황진희, 김정수, 이진하, 윤종한, 이홍준
총무국
국장 : 김혁년
직원 : 서상립, 양해규, 정상문, 손관성, 김중동, 이중근, 서보규, 최지은, 조현옥, 이헌섭, 한상욱, 장유환, 노호자, 이 숙, 한옥경, 남태희, 이원석, 문용수, 김대규, 배명수, 정태섭, 이원수, 안재만, 김위완, 장대식, 이상국, 이종선, 이용덕, 신기진, 소재형
영일송신소
소장 : 박영찬 직원 : 이일우, 배재우, 진정곤, 박재헌, 안재성, 김수태, 김익주, 한경웅, 현동환, 이종태
안동방송국
국장 : 김춘엽
선임 : 조용수, 장재두, 주경애 직원 : 금혁준, 이종은, 박은지, 홍승헌, 안다영, 이형일, 박응식, 박유환, 남대희, 김순자, 서주태, 강창모, 한동권, 지동진, 허진태, 이준희, 장병근, 김기현, 김병관, 최진산, 박준형, 김석현, 조영수, 박재현, 박순곤, 김삼진, 박경희, 민각, 이낙삼, 오세창, 김경달, 김성종, 박통천, 김무동, 권오창, 김춘엽
포항방송국
국장 : 임오진
선임 : 한성은, 최규열, 강명수 직원 : 김태은, 최명숙, 김태균, 송정민, 조빛나, 김가림, 황 진, 하순열, 장성숙, 박순고, 정미원, 김순애, 권순우, 이진향, 류승열, 신광진, 한성칠, 김인섭, 예경옥, 강태흥, 강전일, 오돈택, 이형석, 백정기, 이근배, 심병곤, 오규인, 이종주, 김남희, 구자관, 박명성, 전종대, 이종호
대구방송총국 새 청사를 뒤로 하고 찍은사진
대구방송국에 근무하시던 분들은 KBS사우회 회원이나
방우회 회원으로 활동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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