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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말 국군과 유엔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한 이후, 그해 7월 제1차 휴전회담이 열리기까지 중공군(북한군 포함)은 4·5·6차 등 세 차례 공세를 가해왔다. 하지만 이 공세들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중공군이 개입한 이후 1·4후퇴를 촉발했던 3차 공세까지는 아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후퇴를 거듭했다. 이에 비해 4~6차 공세 때는 오히려 공격을 한 중공군측이 막대한 전투력 손실을 입으면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또 이 시기에 아군은 서울을 다시 탈환했다.
중공군 4차 공세는 2월 11일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 아군 정보망에 중공군이 주력을 가평·홍천 일대에 집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파악됐다. 중공군 재배치는 “미군과 한국군 2만~3만명을 섬멸하고 37선 이남 대전-안동선을 점령하라”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이뤄졌다.
중공군은 횡성 전투에선 국군 부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지만, 곧바로 이어진 지평리 전투에서는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미 제23연대 전투단이 활약한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은 4946명이 사살된 것으로 추산됐다. 중공군 4차 공세는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한 이후 최초의 참패로 기록됐고,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도 능히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주도권을 장악한 아군은 즉각적인 반격작전(2차 반격)에 돌입했다. 아군이 북진을 거듭하던 3월 12일부터 중공군이 서울을 포기하고 철수하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서울 탈환 임무를 부여받은 국군 제1사단 15연대는 3월 16일 아침에는 서울시 전역을 장악했다. 우려했던 중공군의 반격이나 시가전은 없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제 다시 38도선 돌파를 감행했다(사진: 1951년 4월 6일 서부전선에서 미8군 89전차대대 병사들이 38도선을 넘었다는 표지판을 세우고 있는 모습). 4월 초 리지웨이 장군은 38도선 북쪽에 비교적 유리한 방어지역을 선정했다. 이때 설정된 방어선은 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캔자스선’으로 명명됐다.
4월 22일 중공군 제5차 공세가 시작됐다. 적은 이번에도 국군 사단들을 먼저 돌파하여 후방으로 진출한 뒤, 유엔군 병참선을 차단하려 했다. 하지만 아군은 설마리 전투 등에서 적의 공격을 격퇴하는 동시에 수만명에 달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4월 26일 팽덕회는 공세 실패를 모택동에게 보고했고, 제5차 공세 종결을 주도했다. 이어 29일에는 방어로 전환, 공세는 불과 8일 만에 끝났다.
5월 16일 시작된 제6차 공세는 실질적으로는 제5차 공세의 연장이었다. 팽덕회가 계획한 것도 ‘5차 전역 제2계단 공세’였다. 이전까지 서울 점령을 목표로 했던 중공군은 중·동부 산악 지역에 공격을 집중했다. 하지만 4일째 만에 고질적인 보급문제로 공격기세가 현저히 둔화됐고, 미 제3사단의 역습 등으로 중공군은 참전 이래 가장 처참한 피해를 입었다. 5월 27일부터 팽덕회는 8개 군단을 투입해 전 전선에 걸쳐 방어전에 돌입했다.
조선일보 201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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